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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만들어 12년째 이끌고 있는 공연기획자 인재진 총감독. 그는“기의 흐름이 무대 뒤에서부터 관객까지 이어져야 좋은 공연이다”라고 답했다. 안봉주 기자 | ||
도시마다 봄 축제가 뒤를 잇고 있다. 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와 포스터와 사인탑은 도시의 거리를 부유한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축제의 일상은 우리의 기대처럼 늘 평탄하지만은 않다. 축제가 도시의 경쟁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침이 심한 축제의 결말은 늘 불안하다. 자치단체가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는 축제라면 더 그렇다.
대한민국의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축제 중에 우리가 진정으로 선망하는 축제는 얼마나 될까.
지난 2004년, 인구 6만 명의 군 단위 작은 도시에서 새롭게 이름을 올린 축제가 있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다. 북한강 유역, 비가 와 물이 불어나면 잠겨서 없어지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섬.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져있던 이 섬이 재즈 페스티벌로 깨어나 지금은 ‘아시아 최고의 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 풍요로운 낭만의 땅이 됐다. 시골의 작은 섬과 재즈라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 장르의 만남은 흥미롭다. 더구나 이 페스티벌은 이제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페스티벌이 됐다.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만들어 12년째 이끌고 있는 공연기획자 인재진 자라섬재즈페스티벌 총감독(51,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학부장)을 만났다. 햇살 좋은 3월 봄날이었다.
30대부터 40대를 거쳐 50대에 이른 그의 삶은 대한민국에서 공연기획자로 살아온 험난한(?) 여정위에 온전히 놓여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골라서 걸어온 그의 궤적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시간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돌아보면 어느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자라섬페스티벌과 같은 성공한 무대는 그의 표현대로 ‘위대한 실패’가 가져온 결실이다.
30대와 40대를 거쳐 오는 동안 그가 올렸던 공연무대는 1000여회, 이중 적자를 면했던 공연은 100분의 1정도에 그친다. 이쯤 되면 기획자로서 능력 부족은 충분히 검증(?)된 셈이다. 그의 이름 앞에 ‘흥행업계의 마이너스 손’ ‘희귀음반 제작자’ 라는 별칭이 붙었던 것도 이때다. 그런데도 그는 그 실패를 딛고 살아남았다.
“아무도 하지 않는 장르를 개척해 좋은 공연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시작한 일이어서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해서 그것이 좋은 공연무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아니죠.”
비결은 따로 있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대로 ‘꾹 참고’ 그래도 ‘안 되면 말고’ 다시 일어서 온 인고의 시간들이 바로 비결이었다.
인터뷰 전날 그는 전주의 축제기획자들와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만나 강연을 했다.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강연 현장은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그의 ‘위대한 실패’가 주는 울림은 컸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과 감독님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니셜을 JJ로 쓰시던데요. 자라섬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우연히 이루어진 특별한 인연이죠.(웃음) 친구 대신 특강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축제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그 자리에 가평군청 문화담당 공무원이 있었나봐요. 그 분이 가평에서도 그런 것 할 수 있겠느냐고 나중에 연락이 왔어요. 막상 가보니 그 분이 안내해준 곳은 축제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돌아오면서 마지막으로 보여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자라섬이죠.”
-인연이 특별하군요. 그때 자라섬은 그냥 방치되어 있는 섬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자라섬은 비가 와 물이 불어나면 소양댐이 방류를 하게 되니 가라앉는 섬이었죠. 그런데 저는 ‘여기다’ 싶더라고요. 자라섬 같은 아름다운 섬에서 언젠가는 꼭 재즈 페스티벌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주위에서는 다 말렸다고 들었는데요.
“회사 식구들부터 반발이 컸어요. 외진 곳이고 게다가 대중성이 없는 재즈페스티벌을 하자고 하니 그럴수 밖에요. 그래도 설득을 했죠. 저도 사실은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도 어떤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계기가 있었죠. 핀란드에서 열리는 포리재즈페스티벌에서 영감을 받았거든요. 포리는 인구 8만 명의 작은 해안도시예요. 1966년에 포리재즈페스티벌을 만들었죠. 핀란드 전체 인구가 520만 명인데 연평균 15만 명이 이 페스티벌을 보러 옵니다. 지난 40년 동안 모든 국민이 다녀간 셈이죠. 포리 페스티벌을 만든 사람이 유리키 캉카스감독인데 그 분을 2000년 시드니에서 만났죠. 스물한 살에 그 페스티벌을 만들었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디렉터로 일하다가 65세를 맞아 은퇴한 분입니다. 그 인연으로 포리를 가게 됐습니다.”
-공연 기획자로 일할 때였겠군요.
“제가 30대 중반, 재즈 전용 소극장을 운영했던 직후인데 재즈와 월드뮤직을 전문으로 하는 공연기획사를 운영 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죠. 좋은 인연이었는지 그 다음해에 핀란드 대사관을 통해 저를 초청해주셨어요. 항공과 숙박, 개인 경비까지 지원을 받았는데 가서 보니 포리는 완전 별천지인거예요. 더구나 제게는 무대 뒤 대기실 뿐 아니라 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ALL Access Pass ‘가 주어졌어요. 거기서 재즈계 스타들을 다 볼 수 있었죠. 관객 4만 명이 열광하는 그 무대를 보면서 한국에서 꼭 저런 페스티벌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어요.”
-자라섬 첫해 예산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가평군에서 지원해준 예산이 3억 원이예요. 군 단위 자치단체로서는 큰 부담이었지만 페스티벌을 치르기에는 많이 부족했어요. 세계 각국의 뮤지션을 섭외하고 초청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스폰서십을 유치해 몇 군데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일들이 많아 고생했죠.”
-재정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공무원들에게 빌렸어요. 적잖은 돈을 과장 계장 담당공무원한테 부탁했지요. 처음엔 황당해했는데 그래도 빌려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돈독한 관계가 되었어요.(웃음) 그때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돈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그 돈을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융통해서 해결해주었거든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그런 훌륭한 공무원들을 만나고 나서 대한민국 공무원들에 대한 선입견을 날려버렸습니다.”
-복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첫해 부담이 컸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제가 공연료를 받겠다고 하니 자치단체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죠. 예산을 지원했는데 무슨 돈을 받느냐고. 그래도 상징적으로라도 입장료를 받아야 한다고 우겼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잘한 선택이었어요.”
-지금은 자라섬 페스티벌이 정체성으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페스티벌로 꼽히는데 지원에만 의존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축제 초기는 늘 적자로 허덕였어요. 4회쯤엔 제가 살고 있던 서울집을 팔아 적자를 좀 해결하고 가평으로 이사했죠. 다행히 적자 폭이 줄기 시작해 5회 쯤 되니 투자와 수입이 거의 맞는 상황이 되었어요. 조금 여유 있게 축제를 준비하고 가능성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좀 되돌려보죠. 어렵게 공연기획사를 운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90년대 중반쯤인가요.
“그렇죠. 기획사를 차리고 온갖 잡다한 일을 다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뮤지션들을 행사에 보내주는 역할을 주로 했는데 전문적인 매니지먼트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프로축구 개막전이 있을 때 밴드 하는 아저씨들 50명 이어주는 것. 일종의 음악 인력 공급업이었죠.(웃음) 그런데 그때 그 일을 하면서 많은 뮤지션들을 알게 되었어요.”
-돌아보면 소중하지 않은 일은 없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음악적인 영역에서 보면 그때가 가장 넒은 인적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그즈음 방송 드라마 덕분에 재즈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는데, 재즈는 낯설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이니 해보고 싶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에 대한 관심. 거기에 자라섬의 성공 비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때 재즈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니 재즈뮤지션들과 일을 같이 하게 되고 그러면서 대학로에서 ‘딸기 소극장’이란 재즈 전용극장까지 열었으니까요.”
-대학로에 재즈 전용 소극장을 연 것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딸기소극장은 100석 정도의 작은 공연장이었어요. 아는 분이 소극장 운영이 어려워지니 ‘니가 한번 해보라’해서 맡은 것이었죠. 매일 재즈 공연만 했는데 어떤 날은 두 명 관객을 놓고 그보다 더 많은 뮤지션들이 무대에서 연주를 했어요. 그래도 재즈라는 장르로만 운영되는 전문극장이 없어서인지 관객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해 꽤 운영이 잘되었는데 건물주가 바뀌는 바람에 아쉽게도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잘되어가던 소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다시 시작해야했겠군요.
“건물주가 바뀌면서 극장을 접게 돼 없어졌는데 그 뒤로는 떠돌며 되지도 않는 공연 기획해서 망하고 다시 시작하는 악순환이 계속됐어요. 결국 기획사는 망했죠.”
-감독님 말씀대로라면 좀 망해봐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너무 여러 번 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과정 모두가 소중한 경험이 되었어요.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전문가란 특정 분야, 자기 주제에 관해서 가능한 모든 실수를 이미 저지른 사람’이라고 정의했잖아요. 저는 그 정의를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넘치는 전문가거든요.(웃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이 대한민국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실수와 실패를 하고 있을 겁니다.”
-자라섬을 맡기 전까지도 수많은 공연을 하셨죠.
“기획사를 하면서 정말 많은 공연을 했어요. 그것도 재즈와 월드뮤직만으로 자라섬 페스티벌을 맡기 전까지 대략 1000회 정도 공연을 했더라고요.”
-재즈라는 영역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관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어렵지 않았습니까.
“소극장을 운영할 때 그런 어려움은 단련되었던 것 같아요. 관객이 없으면 뮤지션이나 관객이나 기획자나 모두가 서로에게 미안한 상황이 되죠.”
-그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그래도 해야 합니다. 저는 뭐든지 한 번에 이룬 일은 없어요. 소극장 관객도 무대 위의 연주자보다 많은 상황까지 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 경험으로 어떤 공간이 특화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과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대부분이 그 시간을 못참는것이겠지요.
“그렇죠. 그래서 또 다른 길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답은 아니거든요. 그 실패가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 되어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기반이 되기도 하지요.”
-상업적으로 성공한 공연도 있지 않나요.
“대부분 망해서……. 1000회 공연하면서 돈을 번 것은 한 열 번쯤 될까요. 그렇다고 뭐 큰돈을 번 것은 아니고 적자를 면했다는 것이죠. 위축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중성을 좇아가고 싶진 않았어요. 남들이 하지 않는 좋은 공연을 하려고 노력했죠.”
-감독님이 생각하는 좋은 공연은 어떤 것인가요.
“기의 흐름이 원활해서 무대 뒤에서부터 관객까지 그 흐름이 이어지는 공연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공연이죠. 무대 뒤에 있는 사람들도 즐겁고 신나야 좋은 공연이 되는 것이거든요.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관객은 관객대로 감동을 받아야 하고. 역으로 그런 기의 흐름이 관객으로부터 무대 뒤까지 전달되는 그런 공연이죠.”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런 공연을 늘 추구해왔어요. 대한민국에서 아는 사람이 5명만 된다 해도 공연을 무대 위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죠. 오히려 낯선 영역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무대를 기획할 때 더 즐겁게 일했던 것 같아요. 즐거움이란 것이 꼭 익숙하고 아는 것으로부터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가령 지나치게 아방가르드하거나 어려운 공연이라 하더라도 완성도 있는 좋은 무대라면 관객들은 감동 받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감동이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막연한 것이라도 의미가 있죠.”
-그것이 곧 진정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자라섬은 아시아권에서도 재즈음악의 네트워크 중심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시아권에도 좋은 재즈페스티벌이 여러 개 있는데 그런 페스티벌의 네트워크가 잘 이루어지고 있어요. 세계 각국의 뮤지션들이 올 때 그 네트워크로 초청이 되기도 하고 찾아오기도 하는데 중심 역할을 지금은 자라섬이 하고 있어요.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이 올 때 자기들끼리 투어 계획을 짜고 오기도 하는데 자라섬을 중심으로 동선을 구성하는 일이 많죠. 굉장히 큰 발전이에요.”
인 감독에게는 일과 관련된 두개의 꿈이 있었다. 하나는 국제적인 축제를 만들어 일흔 살 될 때까지 감독으로 일하다 은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멋진 아티스트를 지원해서 전 세계를 다니며 공연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 것이었다.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을 만들어 세계의 뮤지션들을 불러 모으는데 성공했고, 세계적 재즈아티스트 나윤선씨와 생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그의 꿈은 이룬 셈이 됐다. ‘생각하고 있으면 이루어진다 ‘는 그의 철학은 좋은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명제다.
자라섬 축제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축제란 것이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인데 자라섬페스티벌은 언제까지나 청년처럼 건강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건강함을 나눠가는, 꿈꾸는 생활을 하루라도 실험해볼 수 있는 그런 페스티벌을 항상 꿈꾸죠.”
● 인재진 총감독은 수 많은 실패 딛고 재즈 대중화 이끈 공연기획자
인재진 감독은 충남 당진에서 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조기 유학을 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경찰대를 가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수로 고려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방황이 시작됐다. 학교 다니기를 싫어해 철저한 아웃사이더가 됐던 그를 붙잡아 둔 것은 밴드부였다. ‘취주악부’라는 밴드부에서 그는 나팔을 불었지만 연주보다는 연주자 섭외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취주악부는 고려대와 연세대 경기의 대규모 응원전에 필요한 음악을 담당했는데, 수가 부족해 밤무대 뮤지션들을 섭외해 응원전에 참여해야 했다. 그의 역할은 빛났다. ‘음악 비즈니스’의 첫 경험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짧은 미국생활을 거쳐 취업 전선에 도전했다. 신문사·방송국·광고기획사·여객기 조종훈련생 모집까지 가리지 않고 응시했다. 뜻대로 취업은 되지 않았다. 스물아홉 살에 의류를 취급하는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그가 맡은 일은 수출영업이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해야 했다. 함께 일하는 팀장을 보니 자신의 미래가 거기 있었다. 첫 직장생활은 6개월 10일 만에 끝났다.
1993년 1월 언론사 시험 준비를 함께 했던 친구들과 창업을 했다. 서울 시내 대학에 들어가는 무가지였다. 주간생활정보지의 성격을 띤 신문의 이름은 ‘제 3강의실’. 그러나 두 달 만에 망했다. 열정만 믿고 뛰어든 대가였다. 동료들은 다시 취업의 길로 갔지만 그는 공연기획자로 삶을 시작했다. 기획사를 차려 음악과 관련된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주로 했던 일은 연주자들을 행사와 연결시켜주는 것이었다. 전문적인 매니지먼트는 아니었지만 그때 수많은 연주자들을 알게 됐다.
98년 대학로에 재즈 전문 소극장을 차렸다. 재정은 녹록치 않았지만 매일 공연을 올리며 재즈 대중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재즈뮤지션들과 교유했던 그 시절이 인감독의 오늘을 있게 하는데 큰 힘이 됐다. 그러나 그가 일구었던 1000여회의 공연과 음반제작 사업은 부침이 심해 늘 적자에 허덕였다. ‘흥행업계의 마이너스 손’이라거나 ‘희귀음반 전문제작자’라는 별칭은 그래서 붙었다.
2004년 우연히 가평군의 문화담당 공무원과 인연이 되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을 시작하게 됐다.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던 첫 공연 이후 12년. 그의 열정을 바탕으로 성장한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은 대한민국의 가장 멋있고 풍요로운 음악축제가 됐다. ‘아시아 최고의 재즈 페스티벌’로 평가받는 이 축제로 인해 대한민국은 재즈라는 음악장르의 세계지도위에 비로소 존재를 알리게 됐다.
9년 전 가평으로 이사해 아예 가평 군민이 된 그는 40대에 음악적 인연으로 만난 세계적 재즈 아티스트 나윤선씨와 결혼했다.
자라섬청소년재즈센터 이사장과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학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난해 공연기획자로 살아온 삶의 기록을 담은 책 ‘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