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한 터를 찾아서/지구문학 2018년 여름호
갑자기 일상이 개미 쳇바퀴 돌듯 판에 박은듯 권태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리를 덮은 매연을 보며 꼭 이런데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연락하는 친구가 있다. 그와 나는 산삼 캐러다니며 운동하는 심마니가 산삼 사먹는 사람보다 더 장수함을 안다. 병원 열심히 다니면서 의사선생님에게 운명 맡기기 보다 나무꾼 약초꾼 따라다니는게 건강에 더 좋다고 생각한다.
'최박사 며칠 짬 좀 낼 수 있나?'
'무슨 일인데?'
'지리산 갑시다.'
이렇게 두 사람이 며칠 지리산 밑을 헤집고 다니다 왔다. 남부터미날서 출발 원지에 내려 덕산으로 들어갔다. '택리지'에 보면 사람이 살만한 곳은 땅이 준수해야 하고 인심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덕산은 산이 우람하면서 순하고, 산을 닮아 그런지 인심도 순하다.
부동산 보고 개울물 퍼마셔도 될만한 곳 소개하랬더니 반천 그 집을 소개했다. 차에서 내리니 돌돌돌 고랑을 치고 내려가는 물소리 반갑다. 이 물소리만 듣고살아도 건강해질 것 같다. 서울의 그 잘난 호텔 아무 데 가도 이런 맑은 물은 없다.
앞을 바라보니 멀리 산길이 보인다. 가도(賈島)의 시가 생각난다.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어보니, 스승은 약초 캐러 가시어 이 산 속에 계시긴 하지만, 구름이 깊어 어디 계신줄 모릅니다(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 나도 여기 산에 약초 캐러가면 동자가 그런 소릴 하겠지.
마당가 엄나무가 살이 통통하다. 땅심 좋을 법한 그 시커먼 땅에 당귀 돌미나리 심고 두룹 오가피 키우면 무공해 채소로 배 불릴 수 있겠다. 집은 서너채 밖에 없다. 한가해서 스트레스 없겠다.
이만하면 살만하다. 그런데 위에 더 좋은 땅이 있다. 차가 좁은 길 따라가니, 산이 다하고 물이 끝난 곳에 천하명품이 있다. 근처는 모두 암반이다. 물은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내며 흐른다. 세가닥 물이 터 앞에서 합수되는데, 한쪽은 절벽 위에서 비단을 펼친듯 하얀 폭포가 되어 내려온다. 봄 신록도 좋겠고, 가을 단풍도 좋겠다.
'최박사! 여름에 여기 와서 밤에 별빛 보면서 비박 한번 하자'
'좋지. 그런데 이런 데는 기 약한 사람은 밤에 경기(驚氣)한다. 아시재?'
덕산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이튿날 찾아간 함양 삼봉산은 산이 얼마나 높은지 알프스 산록 같다. 광활한 풍경은 맘에 드는데 3월 중순인데 아직 눈도 녹지않았다. 승용차 두고 올라가니 솔밭 아래 깨끗한 물가가 보인다. 속세를 발 아래 깐 이런 솔밭에 평상 하나 놓고 냇물에 발 담그면 신선노름 따로 없겠다. 요즘이 백수(百壽) 시대 이다. 부채 들고 바둑 두기 딱 좋고, 짚으로 만든 망태기 메고 산삼과 버섯 캐러다니기 딱 좋다. 두 사람 다 칠십 넘도록 별로 병원 신세 진 적 없다. 여기 와서 백수 넘어 대한민국 장수 기록 세울까 겁난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이 서하면 화림동 계곡이다. 화림동 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 상류이다. 냇가에 기이한 바위와 담과 소를 만들고 농월정에 이르러서는 반석 위로 흐르는 옥류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무릉도원 이룬 곳이다. 거기 동호정(東湖亭) 위에 있는 땅을 둘러보았다. 눈 아래 선비들이 차일을 치고 가무음주 즐겼다는 2백명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 차일암과 그 아래 시퍼른 옥녀담 보인다.
동호정 현판 그림
이런 명승지를 내려다 보는 그 땅 한쪽에서 용천수가 솟아오른다. 풍수(風水)에서 물은 재물을 의미한다. 알갱이 고운 사암(砂岩) 뚫고 몽글몽글 올라오는 그 물 맑기가 한량없다. 천지가 공해로 덮힌 마당에 이런 물은 귀한 것이라 자체로 값을 쳐줄만 하다. 그 위에 구기자나 차나무 심어보라. 녹차 구기자차 따로 끓일 필요없다. 물이 그대로 약차가 된다. 근처에 감나무 사과나무 과수원 많다. 가을에 사과 감 원도 없이 먹을 수 있겠고, 빨간 열매 매달린 사과밭 감나무밭 풍경 일품이겠다.
그 밑에 물가의 땅도 보았는데, 글 쓰는 사람에게 알맞을 땅이었다. 넓은 하천부지에 갈대밭이 펼쳐있다. 아침 안개 속엔 물새 나르고, 가을 갈대꽃 위엔 달이 곱겠다. 물속에 매끈한 넓은 암반 있으니, 그 밑에 붕어와 쏘가리 살겠다. 나는 붕어찜 좋아한다. 싱싱하고 커다란 벚나무 있으니, 봄에 벚꽃 피면 그 꽃 누구와 함께 감상하노. 아름들이 느티나무는 그 위에 미국서 유행하는 나무집 하나 지을만 하다. 단골 양재동 분재가게 주인은 서울은 공기가 나빠 나무 키우기도 어렵다고 한다. 이런 데서 매화 심고 약초 심고, 물가 하얀 해오라비 친구하고 살면 된다. 서하면은 지리산 덕유산 자락이다. 약초 구하기 쉬우니, 겨울엔 난로에 약초 끓이며 글 쓰고 살면 된다.
마지막 찾아간 화계동천에는 김필곤 시인이 산다. 지리산 산악인 사이에 전설이 된 분이 다오실의 성낙근 씨다. 그가 김시인은 향기가 나는 분이라 했다. 부산에서 차 잡지 발행하다가 은거해서 한나절은 차밭 가꾸고 한나절은 시 쓰고 산지 오래다. 만난지 십수년 지났는데 그렇게 반길 수 없다. 그는 언제 보아도 산골짝에서 고고한 향기 풍기는 명품 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를 생각하며 <춘난>이란 졸시 하나 쓴 적 있다.
'싸락눈 싸락싸락 내리는 봄에, 춘난 잎 푸른 빛이 새삼 더 반가워라. 지리산 높은 준령 흰구름 아득한데, 은은한 난향은 오두막 찾아온다. 베개를 높이 베고 山家에 누웠나니, 천리 밖 세상사는 내 알 바 아니로다. 창공에 달 밝고 물소리 그윽한 밤, 그 누가 墨蘭 하나 창문에 그렸는가.'
김시인 얼굴은 이미 반쯤 신선이 되어있다. 지음(知音) 만나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근작시 한 편 낭송했고, 부인은 부부가 만든 '달빛차'를 내면서 춘난 몇 촉 꺽어오셨다. 차에 춘난 띄워 난 향기 맡으라는 것이다.
여행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하고 화계에서 서울 행 버스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