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19 - 영곡사를 출발해 명 효릉에 도착해 주원장을 만나 일대기를 회상하다!
10월 20일 난징(남경) 손문의 중산릉 을 본후 관광차를 타고 영곡사역 에 내려 혁명열사관과 영곡사
절 을 보는데 절에 주차된 BMW 며 벤츠등 고급차를 뒤로하고 산을 내려와 10원에 표를 사
관광객 때문에 혼잡한지라 줄을 서서 관광차를 타는데 이건 명효릉이 아닌 중산릉 까지만 간다네요?
밍샤오링 明孝陵 (명효릉)은 다른 정류소에서 출발한다기에 자리를 옮겨 기다리는데 중산릉 차가
7대나 와도 여긴 올 낌새가 없어 명효릉을 포기하고 중산릉 까지 가자 싶어 관광차를 탈려니
안내원이 안된다고 합니다. 정원을 엄격히 지키는지라 다시 명효릉쪽에 줄을 서는데 몇사람이
기다리다 못해 도착하는 중산릉 차를 탔다가 고함을 듣고 내려오는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중산릉은 10대가 왔는데도 명효릉은 소식이 없는데 시내 버스 가 오는게 보여 갈등합니다.
시내 버스를 타면 20원을 버리는 것이니 마눌의 심기가 용서치 않을 것이라?
202번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는데 잘못 탔다가 낭패 를 볼수도 있다고 자위
하는데 마치 바둑에서 잘못 놓은 돌의 체면을 생각해 활용할 작전을 궁리하는 모습일러나?
30분만에 명효릉 가는 관광차에 올랐는데 승객이 5명에 불과한건 시간이 늦은 때문일까요?
관광차는 중산릉을 지나 4시 30분에 명효릉 에 도착하는데 문은 열려 있습니다.
明孝陵(명효릉) 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묘로 1381년부터 1413년까지 30년동안
10만명을 동원해 만들었다는데 당시 황실에 경제적 파탄을 몰고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1km 에 달하는 참배로 에는 24마리의 석상만 남아 능을 지키고 있으니 사자, 낙타,
코끼리, 말 등의 동물이 종류별로 네 마리씩 조각된 석상은 두 마리는 서 있고
나머지 두 마리는 앉아 있는데, 이는 하루 2교대로 황릉을 지키는 것(?) 을 상징한답니다?
순장 된 관인이 10여 명, 병사와 시종이 46명 이라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난징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으며 능의 명칭 효릉(孝陵) 은 마황후(馬皇后) 의 시호인 효자(孝慈) 에서 따온 것
이라는데 카이산사를 이전해 1381년 착공하였으며 이듬해 마황후가 죽자 황릉에 먼저 매장합니다.
1383년 대전이 완공되었으며 1398년 태조 주원장은 병사한 뒤 매장되었는데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永樂帝) 때인 1405년에 최종 완공되었습니다. 태조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하여 황릉 을 건설하였는데 효릉 동쪽에는 주표가 묻힌 동릉(東陵) 이 있습니다.
주원장이 죽은뒤 난징 13개 성문을 열고 관을 운구하여 성밖으로 나가 매장하였다는데 도굴을
피하기 위하여 가짜 무덤 을 여러개 만든 것이니 주원장의 진짜 능묘는 난징 서쪽의
조천궁 삼청전 지하와 황성(皇城)의 만세전 지하 또는 베이징의 만세산이라는 설도 있고....
명효릉의 지상 건축물들은 이미 훼손되었지만 지하의 유적은 아직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효릉의 담벽은 난징 성벽의 3분의 2에 이르며 구도는 베이징의 심삼릉 (十三陵) 과 일치
하는데 십삼릉이 효릉의 구도를 모방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을 뒷받침 한다네요?
주원장이 태어난 1328년은 토그 티무르가 원나라 황제가 되던 해인데 수탈에
허덕이던 한족 들이 도처에서 궐기하니 원나라는 강남에 토벌대를 보냈으나 실패합니다.
기근이 드니 주원장은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황각사 절에 들어가 탁발승
이 되어 떠도는데 1351년에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홍건적”이 봉기합니다.
주원장도 안휘성 홍건적 곽자흥 의 수하로 들어가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와 혼인
하는데 곽자흥이 죽은후 대장이 되어 1356년에 집경(남경)을 점령하고 큰세력을 이룹니다.
“장사성은 재정이 풍부하고 진우량은 병력이 강했으나 주원장은 내세울 장점이 없었다.”
해서 사람들은 장사성이나 진우량이 강남의 패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으나...
주원장은 강남 선비를 영입“북방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 구호를 내겁니다.
주원장은 진우량을 공격하여 대함대가 파양호에서 세기의 결전을 벌여 승리한후 여세를 몰아
장사성에게로 창 끝을 돌려 승리하니 1367년으로 황제에 즉위하니 대명(大明) 이니
홍건적 북벌군을 계승해 서달을 총사령관으로 20만 대군을 진격시켜 북경을 함락합니다.
주원장은 승상제도를 폐지하고 육부를 황제에게 직속시켰으며 군사행정 대도독부를 다섯으로
나눈 다음 황제에게 직속되도록 해서 문,무의 최고통치권을 한손에 거머쥐며 지방에는
황족을 왕으로 봉했는데 행정권, 조세 징수권은 전혀 없고 지역의 군사지휘권 만을 가졌습니다.
명태조는 1380년 개국공신이던 승상 호유용이 역모 를 꾀했다고 처형하는데 증거가 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형이 확정되었으며 1384년 개국공신인 이문충이 독살당했고
강남 평정과 북벌 통일의 전쟁에서 둘도 없는 공헌을 했던 노장 서달마저 독살 되었습니다.
1390년에 이선장등 1만 5천명이 호유용 역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처형되고 1393년 에는
남옥이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운 역모혐의로 2만여명의 연루자 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강남 군벌 시절 천하제패의 계책을 들려주었던 “4대 선생” 역시 뒤끝이 좋지 못했습니다!
4대 선생 중에 유기는 낙향해 있다가 독살되고 송렴은 유배지에서 죽었으니 한 마디로
명태조는 개국공신 을 단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조금이라도
권세를 가진 신하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검교라고 하는 첩보조직을 운영했습니다.
송렴이 어느날 손님을 초대해 식사를 하자 다음 날 명태조가 그를 불러 그 일을 물었는데
누구를 불러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공포와 불신만이 가득한 군신관계는 문제가 있다고 여긴 사람 중에는 황태자
인 주표 도 있었으니 신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청하자.....
명태조는 가시가 박힌 막대기를 가져와 주표에게 집어보라고 하니 “가시 때문에 잡을
수 없습니다”고 말하자 “그러면 너를 위해 가시를 말끔히 잘라내 주겠다”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니라, 어째서 그 뜻을 몰라주느냐?” 라 말합니다.
애써 세운 왕조가 강력한 공신 들 때문에 힘을 잃고 멸망하는 예는 중국사에 흔합니다.
명태조는 자신의 숙청에 왕조의 기반을 다진다는 정치적 의의를 찾고 있었으니 태종
이방원 이 장인과 처남 넷을 모두 죽이고 장모를 노비 로 만들었던 것이나 같은 것이라!
아울러 명태조는 “문자의 옥”을 일으켰으니 누가 자신을 비웃는 것을 싫어하고
불우했던 옛 시절을 부끄러워했던 그는 상소문이나 공문서 등에.....
“광(光)”, “승(僧)”, “적(賊)” 자가 들어있으면 그것을 쓴 사람을 가차없이 처형했으니
광은 승려였던 자신의 깎은 머리를 연상시키며 적은 도적을 뜻하기 때문이라?
이런 터무니없는 검열 은 갈수록 심해져서“칙(則, 賊 과 발음이 비슷)”, “도(道, 盜 와
발음이 같음)”, “생(生, 僧과 발음이 같음)” 자 등이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법률 자체도 엄해져서 그가 집대성해 반포한 대명률(大明律) 은 과거의
법률에 비해 한층 엄격했으며 잔인한 처형 방식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명태조는 30년 치세를 끝내고 1398년 70세로 숨을 거두는데 죽기 직전 말하기를
“짐은 그 동안 모든 것을 오직 혼자서 담당해 왔다. 돌이켜 보면
너무 괴로운 일이니 다음 대를 이을 사람은 좀 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TV 에 방영된 주원장 일대기 연속극에 보면 학살을 말리는 장남과 황후는
홧병으로 죽고 태조는 눈이 멀었는데...... 6~ 7살 짜리 손녀가 유일한 낙 입니다.
주원장은 얇은 금괴와 은괴를 안에 넣어 특수제작한 옷 을 손녀에게 주면서 그 가치와
사용법을 예를 들어 상세히 가르치는데 혹시라도 변란이 나면 천하를 손에 넣은
태조나 시종할 시녀 하나 믿을 사람이 없으니 손녀더러 혼자 멀리 달아나 숨으라 이릅니다.
불행히도 에감은 적중하니 태조가 죽자 넷째 아들인 북평의 연왕 주체(영락제)
가 반란 을 일으켜 난징으로 쳐들어와서는...... 황족들을 몰살 시킵니다.
그후 영락제의 명을 받은 환관 정화 는 1405년 대함선 62척에 병사 2만 8,000여명으로
자바 섬과 인도를 거쳐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까지 항해합니다.
이후 1407년의 2차, 1409년의 3차, 1413년의 4차, 1416년의 5차, 1421년의 6차,
그리고 1430년에 시작해 1433년에 끝난 7차까지 모두 16여년에 걸쳐 계속됩니다.
그 목적은 이국땅의 진귀한 물건을 구하는 개인적인 동기에다가 아시아에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고 "중화와 변방" 이라는 전통적인 국제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숨은 목적으로는 건문제의 시신 을 발견하지 못했기로 혹시나 동남아로
달아나 재기를 꿈꿀지 모르니 찾아서 후환 을 없애려고 했다나요?
80년후의 콜럼버스의 캐러벨선이 3개의 돛에 200톤 인데 비해 정화의 보물배는
10개의 돛에 1,500톤 에 이르렀으니 당시 부딪쳤으면 명나라의 압승이라!
함대는 나침반과 견성판으로 방위를 재고 물시계를 가지고 배의 속력을 따지며 장거리 항해
를 했다는데 새 황제가 즉위하니 엄청난 비용 때문에 다시 쇄국정책 으로 돌아섭니다.
명효릉을 나와 조금 걸어나오니 시내버스 정류소가 보이기로 잠시
기다려서는... 도착하는 버스에 오르니 요금은 2원인데 산을
달려 내려와서는 지하철 무쑤위안역 위쪽의 정류소에 도착합니다.
첫댓글 허선생님 그간 잘 지내셧죠? 하는일 없이 바빠서 모처럼 들어왓습니다
올해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이제 끝이 보입니다.
이제 자주 들러겟습니다.
그렇지요? 저 무더위도
이번 비에 한풀 꺽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나 봅니다!
네 그런것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빕니다
이제.... 가을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