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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문화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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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선비의 서재/ 김득신의 억만재
강나루 추천 0 조회 171 11.12.15 04: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金柏谷得臣字子公。性糊塗魯質。惟好讀書。晝夜勤讀。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이 있으니 자가 자공(子公)인데,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하였으나 글 읽기만은 좋아하여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凡於古文。不至萬遍不止。尤好伯夷傳。讀至一億一萬八千遍。故名其小齋曰億萬。以文章鳴。

무릇 고문은 만 번이 되지 않으면 중지하지 않았는데, 백이전(伯夷傳)을 특히 좋아하여 무려 1억 1만 8천 번을 읽었기 때문에 그의 소재(小齋)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孝廟嘗見其龍湖吟一絶。古木寒烟裏。秋山白雨邊。暮江風浪起。漁子急回船之詩曰。無愧唐人。

효종(孝宗)이 일찍이,
"고목에는 찬 안개가 감돌고 / 古木寒煙裏

가을 산에 소나기 흩뿌리네 / 秋山白雨

저무는 강물에 풍랑이 일어나니 / 暮江風浪起

어부는 서둘러서 뱃머리를 돌리누나 / 漁子急回船"

라고 한 그의 시 용호음(龍湖吟) 한 절구를 보고 이르기를, “당인(唐人)에게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

 

游齋李判書玄錫銘其碣曰。無懷葛天之民。孟郊賈島之詩。行心八十年兮如一日。讀書億萬數兮奇又奇。人謂之實錄。

판서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이 그의 묘갈(墓碣)에 명(銘)하기를,
"무회씨와 갈천씨의 백성이며 / 無懷葛天之民

맹교와 가도처럼 뛰어난 시로구나 / 孟郊賈島之詩

팔십 년 마음 가짐 하루와 같았으니 / 行心八十年兮如一日

억만 번 글 읽음이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 讀書億萬數兮奇又奇"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러 진실된 기록이다 하였다.

 

출전 : 『안정복安鼎福』「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상헌수필하橡軒隨筆下'에서

 

이 글은 순암 안정복 선생이 조선시대 최고의 독서광으로 일컬어지는 '백곡 김득신金得臣'과 그의 서재書齋인 '억만재億萬齋'에 대해서 표현한 글이다.

 

그러면 '억만재億萬齋'는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은 글자 그대로 김득신이 독서를 할 때마다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독서를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득신이 만년에 세운 '취묵당醉墨堂'이 충북 괴산군에 현재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독수기讀數記'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여기에는 그가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글의 36편의 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김득신이 『사기史記』의 「백이전伯夷傳」을 1억 (億 지금의 10만을 가리킴) 3천을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당시의 선비들은 독서의 횟수를 어디에 기록을 했을까?

조선시대의 선비들 중에는 넉넉하지 못한 삶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하였기에, 종이 등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대나무 가지에 횟수를 표시하면서 지속적인 독서를 하였던 것이기에, 김득신의 독서 횟수의 기록은 정확할 것이다.

 

 

김득신이 말년에 괴산으로 낙향하여 지은 취묵당

 

 

김득신이 말년에 충북 괴산으로 낙향하여, 조상의 묘 근처에 두칸 짜리 초당草堂을 짓고, 당호堂號를 '취묵당醉墨堂'이라고 하였다.

김득신은 그의 저서인 『백곡집』 「취묵당기醉默堂記」에 기록하기를, "결코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당호라고 하면서,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을 이름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했어도 침묵하지 않고 깨어 있어도 침묵하지 않는다.

 

이렇듯 말로 인해서 재앙을 만나지 않도록 경계할 줄 모르니,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는가? 취해 있어도 입을 다물고 깨어 있어도 입을 다물며, 평소 마치 병의 마개를 닫듯이 하면 반드시 재앙의 조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취해 있어도 침묵하지 않고 깨어나서도 침묵하지 않는다면 몸을산야山野에 둔다고 하더라도 도성都城 안에 거쳐하면서 말을 조심하지 않는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이유로 구당 박중구朴仲久가 임인년 여름에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내 내게 침묵하지 않음을 경계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당호를 '취묵당醉默堂'이라고 내걸게 되었다. 무릇 취해 있어도 반드시 입을 다물겠다는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고보니 '취묵당'은 '깨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취해도 입을 다물어야 재앙을 모면할 수 있으니 침묵을 금金으로 여기면서 삶을 살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억만재'는 김득신의 초당인 '취묵당' 안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만 서재이다. 김득신은 이곳 '억만재'에서 수천 혹은 수만 번에 이르는 독서를 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독수기를 쓰면서, 내 자손들이 이 독수기를 읽으면, 내가 책을 읽는데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면 조선시대 최고 아니 우리 역사상 최고의 독서광인 김득신(1604~1684)은 누구인가?

김득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전투인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부제학인 김치金緻이다. 그는 어릴 때 매우 둔하여 10살이 되어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배우고 나면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김득신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김치金緻였다. 아버지는 우둔한 김득신에게 "분명히 나중에 큰 문장으로 이름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를 하였다. 남들이 과거에 합격하는 스무 살 때 비로소 글을 지은 김득신을 두고, 화를 내거나 꾸짖기는 커녕 공부는 과거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니 더욱 열심히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자식의 우둔함을 창피해하기는 것보다 성실히 노력하는 아들의 자세를 자랑하고 다녔다.

 

이런 아버지의 교육철학의 영향을 받은 김득신은 주변의 힐난과 멸시에 개념치 않고, 자신만의 공부법을 찾기를 노력하였다.  그 방법이 바로, 남들이 몇 번 읽을 때 자신은 몇백 혹은 몇 천 번 읽는 것이었다.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기의 백이전을 무려 1억1만3000번을 읽었다. 한유의 사설師說을 1만3000번, 악어문鰐魚文을 1만4000번, 노자전老子傳을 2만번, 능허대기凌虛臺記를 2만500 번씩이나 읽었다.

 

조선시대 문장가인 정약용 조차도 김득시늘 평하기를 "서계書契(문자)가 있어온 이후로 상하上下로 수천 년과 종횡縱橫 3만 리를 통틀어도 독서讀書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당연히 백곡柏谷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득신은 백이전을 가족의 장례식에서도 읽었다. 영조 때 영의정인 이의현이 쓴 도곡집에 그 내용이 나온다. '80이 넘은 김득신은 딸을 먼저 여의었다. 장례 행렬을 따라가는 그의 손에는 백이전이 들려 있었다. 또 아내를 잃었을 때 친척들이 '아이고, 아이고'라고 곡을 할 때 그는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

 

이런 독서법을 통해서 아주 때늦은 나이이지만 59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재주가 다른 이에게 미치지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짓지 말라. 나처럼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에는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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