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건너온 언어 하나가 우리나라를 유행처럼 휩쓰는 느낌입니다.
그러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나 사상, 하다못해 세상을 휩쓰는 히트 상품 하나가 나오는 데에도 반드시 사회적인 까닭이 있습니다. 하물며, 언어는 가장 사회성이 강한 상징물입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웰빙은 자연스러운 삶,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삼사백년 동안의 산업자본주의 사회를 반성하는 의미의 언어입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가 전 인류의 자연과 자원, 동식물을 파괴했음을 인정하는 언어입니다. 그리하여, 인간 중심에서 자연중심으로, 자본 중심에서 인간의 본래 심성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임을 진정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훼절된 느낌이 듭니다. 원래의 의미에 상업적 전술이 기민하게 달라붙었습니다. 식품과 몸매, 건강 따위의 상행위 속에 그런 언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웰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극히 상업적이고 제한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웰빙의 핵심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좁혀 말하면, 인간의 원래 품성을 좆아서 살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돈이나 명예, 지위, 욕망의 끝이 무엇인지를 산업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히 드러내 보여주면서 인류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답변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섰습니다.
2. 명상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람으로 태어난 의미와 이유, 그리고 진정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삽니다.
만약에 그런 질문과 답변이 자신에게 돈이나 명예, 지위, 학력, 자격증 따위를 가져다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공부할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스승들을 찾아서 산으로 계곡으로 몰려다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이제까지 우리의 문제 해결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학교를 가고, 학원을 가고, 책을 보면서 해결해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내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여러분은 이러한 질문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에서도 이런 문제가 제시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십세기 말부터 인류에게 던져진 질문은 바로 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서구에서 말하는 웰빙의 본질입니다.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제 나 자신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돈을 벌어왔다는 자각이 싹튼 것입니다.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왜 이 길을 가야하는지조차 모르고 간 셈입니다. 대개 남들이 가니까 그냥 따라간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관습이라고 하죠. 관행이니, 관념이니 하는 말들이 바로 과거에 이뤄진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소위 출세를 하는 것도 자신이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궁극적인 질문없이 그냥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월과 함께 길을 너무 멀리 온 다음에야 되돌아보게 되는 거죠. 그때서야 아! 내가 나의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것들에게 홀려서 살았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뒤따르는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죠. 그때서야 자신이 무지의 삶을 살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동양의 참선이나 명상이 서구에서 오히려 붐을 이루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의 단맛과 쓴맛을 일찌감치 맛보았습니다. 이제까지의 길이 잘못 된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생명과 미래를 죽여오고 있음을 철저히 자각한 것입니다. 자연재해와 인간성 피폐, 환경 파괴, 마약과 성범죄, 전쟁과 기근.... 이 모든 것의 근본자리에 자본주의적 속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습니다.
이제 인류는 사람의 근본 자리를 찾기 위해 나섰습니다. 마음의 뿌리, 참나의 자리입니다.
당신이 어머니이 뱃속에서 핏덩이로 왔던 그 자리가 어디던가요. 정자와 난자가 만나기 전의 그 자리는요?
바로 그 자리서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물질 만능주의적 사고와 생활이 시행착오였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처음 출발했던 그 곳이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공부하기 시작한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학문과 부와 권력을 모두 긁어모은 서구 사회가 그동안 캄캄한 무지 속을 헤맸음을 뼈저리게 자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인류는 과연 옳게 살아왔는가.
나는 왜 책상에 앉아서 이 공부를 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아이를 밤늦도록 공부시키고자 하는가.
이것이 명상입니다. 어렵고 신비하고 우리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 속 깊은 곳에 있는 참다운 나에게 지금의 나를 물어보는 순간 여러분은 명상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의 내 생각이 진실로 맞는가. 이렇게 자신에게 지금 이 순간 물어보십시오.
묻는 순간, 뭔가가 멈추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냥 의심없이 돌아가는 생각이 멈추고 막연한 관념이 멈추고, 습관적 사고나 판단이 멈춥니다.
명상은 멈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 깊숙한 참 자아에게 묻는 것입니다.
3. 명상의 방법
명상이라는 용어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앉은 자리에서 공중부양하는 것이 명상으로 알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명상은 그저 한자말일 뿐입니다. 눈감을 명(瞑)과 생각 상(想)입니다. 또는 어두울 명(冥)을 쓰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 정도로 몸과 마음을 깊은 고요속에 두고 골똘히 생각해 본다는 것입니다.
참선이나 기도, 묵상, 요가 등도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가는 마음 공부인 거죠.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므로 지혜의 길을 찾아가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지식은 몸과 마음의 바깥에 있는 정보들을 모아서 머리 속에 담아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알아차림으로써 삶의 지혜를 찾는 마음 공부. 여기에서의 핵심은 “마음을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교과서나 참고서 삼아서 자세히 관찰하고 알아차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놈이 문제입니다. 마음은 형체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형체 없는 그 무엇이 형체 있는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달리게 하고,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아프게 하고, 심지어는 암이나 종양이 생기게도 합니다. 요즘 흔한 병리 현상 중의 하나가 그것이죠. 심인성 또는 신경성이라고 하는 병증들. 그 또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병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뗄래야 떼어지지 않는 거죠. 따로 나뉘지 않습니다.
마음은 자신의 몸 안팎을 그야말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합니다. 순식간에 미국으로 갔다가 할머니 집에 갔다가, 어릴 적 외갓집으로 갔다가, 뒤로 넘어지곤 합니다. 그야말로 시공간을 초월해서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변덕이 심한 마음이라는 놈에게 붙들려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일으킵니다. 더 한심한 것은, 그 마음이 시킨 일을 하면서 그것이 바로 “자기”라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마음이란 놈이 자존심으로 드러나는 순간 그 자존심이 “나”가 돼버리는 거죠.
마음 공부 즉 명상은 바로 그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생각이나 기억을 쑤썩거리고 있는지, 어떤 생각에 붙어서 또다른 생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관찰하는 것.
우리에게 관찰은 반드시 눈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관념을 일단 내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움직임을 마음으로 관찰해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지금 슬퍼하고 있으면 슬퍼하고 있음을 관찰하고,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으면 그 벅차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그대로 관찰합니다. 마음이 미국에 가 있으면 미국에 가 있음을 관찰하고 미국에 갔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순간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거죠.
몸과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리에 몸을 앉힙니다.
그것을 대개 좌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방석 위에 앉아야만 명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서 할 수도 있고 의자에 앉아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명상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대로 관찰할 수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4. 명상은 집중력과 창의력, 그 자체.
허리를 곧추 펴고 방석 위에 몸을 앉히는 것은 마음 공부 자세 중 한 형식일 뿐입니다. 반드시 그런 자세를 취해야만 명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서 움직이거나 대화하거나 걸을 때에도 자신의 마음 관찰을 잘 할 수 있기 위한 훈련일 따름입니다.
물론, 보다 깊은 마음의 문제, 뿌리 깊은 자신의 문제 따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런 안정적인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몸을 고요히 앉힘으로써 마음 또한 고요해질 수 있거든요. 오랜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다보면 아주 깊은 잠재의식까지도 살펴 볼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마음 공부는 생활 속에서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은 자신의 생활 자세나 태도, 고정관념이나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기 위한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의 지혜를 찾아가는 공부죠.
가정에서라도 마음 공부를 해보고 싶은 분은 일단 자리에 자신의 몸을 앉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자 생활을 하는 분은 의자에서 척추를 주욱 펴고 앉습니다.
그 상태에서 눈을 살짝 감은 다음, 맨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앉아 있는 자신의 몸을 상상력으로 한번 주욱 살펴보는 것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그렇게 살피면서 몸 전체를 하나하나 이완시킵니다. 척추를 반듯이 편 상태에서 몸의 힘을 빼는 거죠. 몸의 모든 근육이 이완되면 몸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고요해지면 확연하게 마음의 평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상태가 다른 차원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됩니다.
집중은 이렇게 몸이 고요해짐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몸이 긴장돼 있거나 어느 부위가 굳어 있으면 내면의 집중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몸 전체가 이완되고 고요해지면 생각이나 감정, 과거 기억, 영상 따위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잡념이라고 하죠. 바로 그 잡념들이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여러분은 그 마음의 움직임, 즉 잡념을 멈추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들만 날뛰지 않으면 나도 근사하게 명상이란 걸 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움직이는 사물을 멈추게 하기 의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요. 말할 것도 없이 그 사물을 봐야 합니다. 관찰하는 거죠. 그것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잡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잡념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상태에서, 영상으로 보이면 영상을 관찰하고, 생각으로 떠돌면 생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보실 때는 다른 생각이나 추측 따위를 붙이지 않고 그냥 영화 보듯이 봅니다. 이때 보이는 잡념이야말로 자신의 진실입니다.
여러분은 단 십분만 이런 상태를 유지해보고서도 몸과 마음이 뭔가 달라진 느낌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잠깐 동안의 경험으로도 자신의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얼마든지가질수있습니다. (끝)
첫댓글 우리가 살고 싶은대로 살기 위하여... 영상... 꼼꼼히 잘 읽고 갑니다. 내일은 사무실에 가서 카피해 정독해볼만한 자료이로군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