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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장 주석
시험 받는 예수 (누가복음 4:1-13)
앞 장(章)의 마지막 말은 예수는 "아담의 자손"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가 "여인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약속에 따라서, 그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하고, 온갖 시험을 통해서 악마를 물리치고 좌절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악마는 단 한 가지의 시험으로 우리의 첫 조상들은 거꾸러뜨린 적이 있는 자이다. 이리하여 전쟁의 초반부터 그리스도는 그에게 앙갚음을 했고, 정복자를 다시 정복해 버렸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유혹 기사 속에서 이런 것을 관찰할 수 있다.
Ⅰ. 그는 시험을 위해 "준비해"있었고, 또 "적합했다." 그에게 시련을 계획하신 그분은 또한 그에 따른 힘도 부여하셨다. 우리는 비록 우리 앞에 어떤 사태가 다가오고 있으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 맞게 예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예비하신다. 우리도 거기에 따라 능력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1. 그는 "성령에 충만해" 있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강림"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위대한 은사의 방편, 곧 성령의 은총과 위로를 이전 보다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자가 최강의 유혹을 이기는 최선의 무장을 한 자이다.
2. 그는 이제 막 "요단 강에서 돌아왔다." 그곳은 그가 세례 받은 곳이요,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라는 인정을 받은 곳이다. 그리고는 이 전투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가장 즐거운 교제를 누렸고, 하나님의 가장 뚜렷한 은혜를 입은 때에라도,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서며(가장 값비싼 배가 해적의 목표물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까지 하신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총의 권능이 빛나게 되는 법이다.
3.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갔다. 즉 선한 영의 인도를 받아서 갔다. 그 성령은 그리스도가 참피온인 양 그 전장으로 내어 몰았다. 그것은 분명코 이기리라고 확신되는 그 적을 무찌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광야로 끌려" 갔다는 사실은
(1) 유혹자에게 이점을 "주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홀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친구도 없게 된다. 유혹(시험)의 시간에는 친구들의 기도와 조언이 있다면, 그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홀로 거하는 자에게 화 있도다 !" 그는 사탄에게 이점을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하는 데에 "유리했다." 아니 그 동안 줄곧 적당한 명상에 잠길 수 있었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과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자기의 모든 시간을 직접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에 썼다. 산에 있던 모세가 아무런 방해 없이, 중단 없이 교제했던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계셨던 생애 전체 중에서, 이 기간이 아마 거룩한 완전과 신성한 생활에 가장 가까웠던 시기로 보인다. 이로써 그는 사탄의 고발을 대비했고, 나아가 그것에 대해 무장을 했다.
4. 그는 금식을 계속했다(2절). "이 모든 날 동안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않았다"고 했다. 이 금식은 전혀 기적 같은 것이다. 마치 모세나 엘리야의 금식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들처럼 그도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처럼 보이게 했다. 아마 그 금식은 모세나 엘리야가 금식했던 호렙의 광야였을 것이다.
그는 "광야"로 물러가심으로써 "세상"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금식은 "몸"에 전혀 애착이 없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이처럼 "세상"과 "육체"에 대해서 해방되었거나 죽은 자들은 쉽게 범접하지 못한다. 우리가 "몸은 제어"하여 복종시키면 시킬수록, 사탄은 그만큼 우리에게 대해서 불리해지는 법이다.
Ⅱ. 그리스도는 차례 차례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매번 유혹자의 의도를 꺾으셨고, 보다 큰 승리자가 되셨다. "40일" 동안 그는 "악마의 시험을" 받았다(2절). 그 시험은 어떤 내적 암시에 의한 시험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군주가 그리스도 안에다 무엇인가를 주입하여 역사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적인 속삭임, 아마 첫 조상들을 유혹할 때처럼 어쩌면 뱀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유혹의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40일이 끝나자. 유혹자는 그에게 다가와서 친근한 사이인 양 가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렸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2절). 아마 그때 우리 주 예수는 나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으며, 어떤 먹을 만 한 게 없나 하고 살폈을 것이다. 바로 이때를 이용하여 악마는 그리스도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1. "아버지의" 돌보심을 "불신하게끔" 유혹했다. 그래서 "제 발로 서라"고 유혹했다. 즉 아버지께서 그에게 지정하시지 않은 방식으로라도 빨리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라고 했다(3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치 하늘에서 선포되는 음성과도 같았다. "이 돌에게 떡이 되라고 명하라."
(1) "내가 네게 할 일을 일러주겠다.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면, 너를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가 네게 먹을 것을 주려고 까마귀나 천사를 보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조리사가 되려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지도 않은 채 스스로의 예상으로 생활해 나가려 하고, "우리 손의 권능과 권세로" 건강을 누리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그것은 사탄의 유혹(시험)이라고 여기고 거부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게 하는 것이 사탄의 계획이다.
(2) "나는 네게 그것을 해 보라고 도전한다.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할 수 없다면, 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리라." 얼마 전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즉 하나님은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드실 수 있느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은 네게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필요한 때에, 작은 일을 못한단 말인가 !"
하나님도 친히 이처럼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하나님)가 우리에게 양식을 줄 수 있을까? 그가 우리에게 떡을 줄 수 있을까?"(시 78:19, 20)
[1]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돌을 떡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첫째, 사탄이 명하는 것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와 악마의 주군 사이에 무슨 맹약이라도 있었는 듯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마에게 틈을 타게 하는"(엡 4:27)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기적은 신앙을 확증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악마는 확증해야 될 아무런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사탄)를 위해서는"기적을 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는" (요 20:30) 자기의 표적을 보이셨다. 특히 물을 포도주 만드는 "처음 기적"을 행하셨고, 그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믿는 신앙을 주었을 것이다(요 2:11). 그러나 여기 광야에서는 사탄에게 아무 것도 가르칠 것이 없었다.
둘째, 그는 자기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기" 까지는 기적을 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굶주림"을 못 견디는 자로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기쁘게"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으러"온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대신 지러온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기 친구들의 위신과 편의를 위해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려 했으나, 자신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일을 해 서 "자기를 즐겁게"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넷째,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를 차후로 보류하고 싶었다. 또한 차라리 사탄에게는 약자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조소를 받을망정, 사탄에게 설득되어 부당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라고 원수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또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라고 했을 때에도 내려 올 수는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니, 그것은 그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자기 아버지(하나님)를 불신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하나님과 "유리된 행동" 혹은 자기의 현재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따위의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에(히 2:17 참조), 하나님의 다른 아들들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그의 약속에 의지하여, 또 하나님이 광야로서 먹을 것을 보내 주실 것이라든가 "인도하사 거할 성으로" 보내시리라는 것(시 107:5-7)을 신뢰하면서 살고자 했다. 그러면서 비록 배가 고프지만, 지나간 40일 동안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부지해 주시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2] 그는 그 요구에 말씀으로 답변했다. "기록되었느니라..."(4절). 이것은 그가 예언자적 직능에 임하면서 하신, 기록된 첫 마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 성서의 인용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라도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지지해주기 위해 그가 오셨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는 무한한 말씀이 있고, 전파할 자신의 교리와 또한 세워야 할 종교가 있었지만, 그 말씀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저작을 자신의 규율로 삼고, 우리에게도 사탄과 그의 유혹에는 성경 말씀으로 대항할 것을 권유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검"이다. 또 그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안에서 권능을" 얻어, "그 권능 안에서 나가고" 들어오며,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어떠하든 "기록된 바"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은 바로 우리를 "교훈하고"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인용한 성경 본문은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돌을 떡으로 만들 필요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처럼, 내게도 영양을 위해서라면 만나를 보내 주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곧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삶을 위해서 지시해 주시는 모든 것에 의해서 살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는 이 40일 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평안히 살았을 것인가? "떡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그 말씀에 대한 명상과 교제에 의해서, 그리고 그 말씀 속에 또 그 말씀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지냈다. 그는 다시 "배가 고프기" 시작했지만,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방식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식량을 조달해 주신다. 그러므로 어느 때든지 그를 불신해서는 안 되며, 언제든지 의무를 지키는 가운데 그를 의지해야 한다.
식사가 모자라면, 하나님은 식욕을 제거하시든가 "파멸과 기근을 비웃을 수 있는" 그런 강인한 인내력을 주실 수 있다(욥 5:22). 또는 "채소와 물"을 "왕의 진미보다" 더 영양가 있게도 하실 수 있다(단 1:12, 13). 또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무화과나무가 꽃피지 않은"때에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게도 하실 수 있다(합 3:17). 떡이 없을 때에 자신은 약속으로 여러 끼니의 식사를 했다고 말한 그녀는 참으로 실제적인 신앙인 이었다.
2. 사탄은 "자기에게서" 나라를 "인수 받으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그 나라를 물려받을 수 있었고, 또 "아버지에게 절해야" 했던 것이다(5-7절).
누가복음 기자는 이 유혹을 두 번째에 놓았으나, 마태는 제일 마지막에 놓았다. 아마 실제는 마지막에 있었던 유혹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가는 이 시험에 대단히 관심이 컸다. 그것이 그 시험이 가장 속 검고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문제를 서둘러 취급한 것이다.
악마가 우리의 첫 조상들을 유혹할 때에, 그들에게 그 금단의 열매가, 먼저 "먹기에 좋다"고 제안했고, 그 다음에는 "눈에 즐겁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가지의 매력에 다 넘어가고 말았다. 사탄은 여기서 먼저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다. 떡은 먹기에 좋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세상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보기에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시험에서 그리스도는 사탄을 물리쳤다. 아마 누가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순서를 바꾸었을 것이다.
이제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사탄이 그리스도를 이겨 자기의 부하로 만들고, 자기의 파견으로 자기의 나라를 인수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시험을 어떻게 "이끌어 나갔는가"를 보자.
[1] 사탄은 그에게 "순식간에 세상 모든 나라들"의 전경을 찬란하게 제시했다. 그것이야말로 사탄이 가장 환상(fancy)에 충족할 것이요, "참된" 세계처럼 보이는 그런 광경이다. 사탄은 자기의 목적을 보다 쉽게 달성하기 위해 "그를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 시험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요단 강 건너편에 가 계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혹자는 사탄이 데리고 간 산은 비스가 산꼭대기라고 본다. 그 곳은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보았던 곳이다.
그러나 공중 권세의 왕인 악마가 여기서 우리 구주께 제시한 것은 하나의 환성(phantasm)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누가가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그 주위 사정을 보아서 밝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람이 만일 어느 한 나라의 전경을 본다고 할지라도, 성공적으로 보자면 처음에는 이쪽을 보고 그 다음에는 돌아서서 저쪽을 보면서 두리번거려야 하기 때문인 까닭이다. 이처럼 악마는 우리 구주를 거짓으로써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악마 자신이 그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함으로써 자기(악마)가 그 모든 나라를 "그(그리스도)에게 줄"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2] 사탄은 이 나라들을 "그에게 모두 넘겨주겠다"고, 즉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영광"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고 하는 대담한 제안을 했다(6절). 혹자는 이 때 악마가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했으며, 나아가 나라들을 주관하도록 파송된 천사 중의 하나처럼 다른 모든 천사들을 싸워 물리쳤으므로, 자기가 그 모든 처분권을 "넘겨받았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나라들을 그에게 줄 것인데, 그것은 나라들이 그에게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조건 때문에 방해물을 놓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무릎을 꿇어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은 선한 천사라면 허락도 하지 않을 그런 요구였다. 선한 천사라면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여주었더라도 그런 요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계 19:10; 22:9 을 보라).
그러나 나는 그가 사탄이기 때문에 이런 권능을 주장했다고 본다. 그 권능은 "주님이" 그에게 넘겨 준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들의 왕들과 그 백성이 넘겨 준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과 영광을 악마에게 넘겨주었다(엡 2:2). 따라서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운다. 또 "이 세상 임금"이라고도 불리운다. "이방인들을 자기의 유업"으로 받으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사실이다(시 2:8). 악마는 말한다. "왜 그러냐? 이방인들은 나의 것이요, 나의 백성이요, 내 숭배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내게 주겠다. 내가 그들을 네게 주겠다. 다른 사람들이 네 앞에서 그리하듯이 그들은 내가 네게 준 보상이라고 말하자(호 2:12). 그리고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내 밑에서 그들을 가지고 장악하기로 동의하라."
[3] 악마는 그리스도에게 충성과 경배를 요구했다. "네가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7절).
첫째,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경배하게 하려 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나란히 악마를 경배하라는 것이다. 악마는 그리스도가 단 한 번만이라도 자기의 동역자가 되어 준다면, 둘도 없는 충신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가 계약하기를 바랐다. 즉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이 세상 나라들의 소유권을 잡을 때에, 그 나라 안의 종교를 변경시키지 말고,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제 민족들에게 "악마에게 제사하는"(고전 10:20) 것을 묵인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마귀 숭배(demon-woship)를 존속시켜 주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그 나라들의 모든 권력과 영광을 넘겨주리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취하려는 자들은 모두 사탄의 노예가 되리라. 사탄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과 애착과 경배를 갖기만 하면, 그 모든 것도 가질 수 있게 되고, 불복종의 "자식들에게" 역사 할 수 있다. 그 때에는 실상 사탄이 "그들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 주 예수는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그는 단호하게, 크게 혐오하여 거부했다(8절). "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난 참을 수가 없노라. 뭐라고 ! 내가 받들려고 온 그 하나님의 원수를 경배하라고 ! 내가 구원하러 온 인간의 원수를 경배하란 말이냐? 아니다 난 도무지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은 유혹에는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된다. 즉각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말씀 한 마디로 당장 사탄의 뒤통수를 쳤다.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을 예배하라 하였느니라." 또 그럴 뿐만 아니라 "그분만" 경배하고, "다른" 자를 경배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탄을 경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아버지가 자기에게 "넘겨 준 세상 나라"들을 차지하게 되면 - 이것은 곧 있을 일이었다 - 그 나라들 속에 있는 악마 예배를 더 이상 묵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의 복음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악마 예배가 좌절되고 괴멸되리라. 그리스도는 결코 사탄과 협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신론"과 "우상 숭배"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면, 무너져야만 한다.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되며, 악마 예배에서 떠나 오직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예배로 돌아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들 중에서 재수립할 위대한 신법(神法)이요, 그의 거룩한 종교가 사람들을 복종하게 할 그 법이다. 즉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해야 한다"는 법이다. 따라서 어떤 피조물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든 - 그것이 성도이든 천사이든, 동정녀 마리아 일지라도 - 그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정면으로 도전한 자들이요, 다시금 이방 종교로 돌아간 자들이다.
3. 악마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를 믿는다는 구실 밑에 그리스도를 자살자로 만들려고 유혹했다. 그런 보초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관찰하자.
(1) 이 시험에서 악마가 노린 것은 무엇인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리라"(9절).
[1]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위한 새로운 증거를 요구했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하늘로부터 나온 음성으로, 또 그 위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보여 준 증거는 불충한 듯이 말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입증한 방법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 못되기라도 한 듯이, 하나님의 명예를 깍아내리는 그런 것을 요구한 것이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내재하심을 불신하라는 주장이었다. 성령의 내재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또 가장 중대하게 그리스도에게 증거해 주는 자료였다(히 1:8, 9).
[2] 악마는 이 사실을 세상에다 알리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라고 그리스도에게 요구했다. 사실상 악마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곳은 "어두컴컴한 한 구석"에서였고, 요한의 세례를 받던 평민들 속에서 되어진 링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에서," 즉 성전 예배에 참례하는 높은 자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제 증거 한다면, 그리고 그 증거로 거기서 뛰어내리고도 다치지 않게 된다면, 그리스도는 즉각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사신임이 인정되어지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그리스도 자신의 궁리를 영예롭게 만들고(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방법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회개한 자들에게 더욱 모습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제사장들에게보다는 그 회개자들에게 더 잘 수용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3] 아마 악마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피해는 끼칠 수 있으리라고 다소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져 버린다면, 그 추락은 그의 죽음이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악마는 보기 좋게 그리스도를 이탈시킨 셈이 된다.
(2) 악마는 이 시험을 더욱 후원하고 강화시켰다. "기록된바....."라고 제안을 했다(10절). 그리스도가 성서를 인용하여 악마를 대항했다. 그리고 악마는 그리스도와 대등하 게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역시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 했다. 성서를 왜곡시키고, 성스런 저작들을 최악의 일로 이용해 먹는 것은 이단자들이나 유혹자들에게는 통상적으로 있어 왔던 일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하나님)가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를 명할"것이요, 그래서 "그들이 손으로 받들어 주리라." 이제 그리스도는 성전의 첨탑에 올라가 있다. 따라서 천사들의 그러한 수종을 기대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으리라.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은 그가 들어가 있기에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2:46). 그리고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장소가 끊임없이 천사들의 수호를 받고 있다 할진대, 성전은 반드시 천사의 감시하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시 68:17). 하나님은 천사들의 보호를 약속하시사, 우리로 하나님을 믿고 시험하지 말 용기를 주셨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한은 천사들의 수종도 함께 약속된다. 그러나 그 이상일 수는 없다. "네가 네 길이 있는 땅에 다닐 때에는 그들이 너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네가 공중을 나르겠다는 망상은 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3) 악마는 이 시험에서 어떻게 패배당했는가?(12절) 그리스도는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했다. 거기에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주었는데도, 하나님의 계시의 증거가 될 표적을 구하는 시험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런 시험을 했다. 즉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 그 때 그들을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 주셨도다." "그러나 고기까지 줄 수야 있겠는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그리스도도 만일 "하나님은 실로 내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약속을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은 더 큰 자이다. 그러나 그가 이제 나를 위해 자기 천사들을 명할 수도 있겠는가? 이들은 더 작은 자들이다"라고 했더라면, 죄를 짓고 말았을 것이다.
Ⅲ. 이 투쟁의 결과와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13절) 승리를 거둔 우리 구주는 자기의 터전을 지켰고, 정복자(우리 조상을 정복한 자 - 악마를 이름. 역주)를 격퇴시켰다. 그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서도 격퇴시켰다.
1. 악마는 자기의 화살통을 다 비워 버렸다. 그리스도는 악마가 자기에게 도전하여 말로나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악마에게 온갖 발악을 다 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악마는 패배 당했다. 그리스도는 시험받으심으로써 모든 시험이 종식되기까지 수단을 받으셨는가? 또한 우리도 우리에게 할당된 "유혹(시험)의 시간"이 지나가기까지 우리들의 온갖 시련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되겠는가?
2. 그러나 그는 전투를 중지했다. 악마가 "그를 떠나갔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공격한다는 일이 소득 없는 짓임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맹열한 창을 던졌지만, "그에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스도에게는 눈먼 곳이나 어디 한 곳 허점이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사탄은 그 사건을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가 악마를 대항하면 악마가 우리를 떠나 달아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약 4:7 참조).
3. 그러나 악마는 계속 그리스도에게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고, 다시 공격하리란 결의를 품고 떠났다. 악마도 단지 "잠시간만" a;cri kairou/ 즉 한동안까지만 떠났다. 즉 다시금 해방되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지만 떠난 것이요, 그 때는 "유혹자"(시험하는 자)로서가 아니다. 유혹자는 그를 "죄짓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치려한다. 그것이 악마가 지금 목적하고 있는 바요, 완전히 패하고 만 지점이다. 그 때에는 "박해자"로서 등장하여 유다와 그 밖의 다른 악의 도구들 - 이들은 악마가 부리는 자들이다 -을 통하여 그를 "고난받도록" 만들고, "그의 발뒤꿈치가 상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이미 옛날에 악마에게 허락된 일(창 3:5)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물론 "그(악마) 자신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건이 된다. 악마가 "지금은 떠났다." 그리스도께서 "흑암의 권세"를 부르는 시간이 오면(22:53), 그 때는 다시 이 세상 임금이 "오리라"(요 16:30).
나사렛 회당 안의 예수 (누가복음 4:14-30)
그리스도는 악령을 쳐부수고 난 뒤, 성령의 강한 힘을 힘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악마의 고발을 스스로 방어하신 그는 이제 공세적 "행동을" 개시하여, 말씀 전파와 기적을 통해서 악마에게 공격을 가한다. 그것은 악마가 저항하거나 격퇴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다음을 관찰해 보자.
Ⅰ. 그의 전파에 대한 일반적 서술과 "갈릴리에서" 접하게 된 사건 - 갈릴리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다 - 에 대해 살피자. 그리스도가 거기에서 자기의 사역을 개시했다는 것은 그의 겸비의 일례이다.
1. 그러나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예언자적 직능의 시행을 위한 자질을 갖추어 주었던 바로 그 성령이 다시금 그를 그곳으로 강하게 인도해 갔다. 그는 사람들이 불러주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빛과 생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거기에 간 그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즉 공중 예배당이었다. 거기서는 그들이 성전에서처럼 의식적 예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건적인 도덕 행위, 즉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응용하며,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교인 훈련을 받기 위해 모였다. 바벨론 유배 사건 이후로는 이런 일이 더욱 잦았다. 그때에는 의식을 갖춘 예배가 거의 사라져 버린 때였던 것이다.
3. 그는 마치 위대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자처럼 가르쳤다. "그에 대한 소문(명성)이 사방에 퍼졌다"(14절). 그리고 그것은 좋은 소문이었다. 그는 "뭇 사람에게서 칭송을 받았다"(15절). 모두가 그를 경모했고 환성으로 영접했다. 그들은 생전에 그런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아무런 멸시나 반대에 부딪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칭송했다." 그리고 아직은 그를 헐뜯는 자들이 없었다.
Ⅱ. 나사렛, 곧 그가 자라난 마음에서 전파한 일에 대해서 보자. 그는 거기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가 거기서 어떻게 "전파하셨고,"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를 알게 된다.
1. 그는 거기서 전파했다.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1)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가? "그는" 다른 지역에서 명성을 얻고 난 연후에 "나사렛으로 갔다." 그러므로 동향인들이 가할 경멸이나 편견이 최소한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갔다. 거기서 그를 기회를 잡아 전파했다.
[1] "회당" 곧 적절한 장소에서 전파했다. 그가 사적 인물로 있을 때 늘 참례하는 것을 "자기의 규례(관습)로" 삼던 바로 그곳이다(16절).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 예배에 참례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기의 공적 직무를 띠고 거기서 전파했다. 거기에는 많은 고기들이 있었다. 이 지혜로운 어부는 자기의 그물을 거기에 던졌다.
[2] 안식일, 곧 경건심이 있는 유대인들이 세상 노동을 떠난 단순한 의식적 휴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예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전파했다. 마치 그들이 옛적에 "월삭"과 "안식일"에 예언자 학교에 모이곤 했던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안식일에 엄숙한 집회를 열어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라.
(2) 그는 그곳을 방문했다.
[1] 그는 성경 말씀을 "읽으려고 섰다." 그들의 회당에는 매 안식일마다 7명의 낭독자가 있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다른 다섯은 그 회당에 소속된 일반 이스라엘인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끔씩 다른 회당에서도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나사렛 회당을 제외하고는 "성경을 읽었다"는 기사를 보지 못한다.
이제 그는 아마 종종 해 오던 대로 자기의 직무를 거행했다. 그는 예언서 중에서 한 과를 읽었다(행 13:15).
경건한 집회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자기가 그런 일에 부려지는 것을 위신 손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자.
[2] 회당 지도자나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그 사역자가 "이사야서를 그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pro hac vice ─즉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아무런 방해자도 없었고 당연한 인정을 받았다. 그날 읽을 성경의 제2과는 이사야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3) 그는 그 본문을 설교했다. 그는 "읽으려고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일"을 존중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에스라가 율법서를 폈을 때, "모든 사람이 일어섰다"(느 8:5). 이제 그리스도도 예언서를 읽으려 할 때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제 그 책이 "그에게 건네"지자,
[1] 그는 그것을 "폈다"(열었다). 구약 성서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것을 열기까지는, 줄곧 "닫혀"있는 것이다(사 29:11). "그 책을 받아 봉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는 "죽임당한 여린 양"이었다. 그는 그 책을 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차례를 따라 "그 날"에 읽기로 지정된 곳을 "찾았다." 물론 그가 그 차례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즉시 그곳을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의 본문으로 취했다. 그리하여 그의 본문은 이사야 61장 1, 2절에서 취한 것이 되었다. 그 본문은 여기에 자세히 인용되어 있다(18, 19절).
그 날에 그 본문이 읽을 순서가 된 데에는, 섭리의 역사가 있었다. 그 부분은 아주 분명히 메시야를 말해 주고 있었고, 더욱이 메시야를 증거해 주는 성경을 "매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음성"을 듣고도(행 13:27) "그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곳이었다. 그 본문은 그리스도의 과업을 충실히 설명해 주고 있고, 또한 그가 세상에 와서 할 일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주목하자.
첫째, 그는 그 일을 위한 자격을 어떻게 구비했는가? 그것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했다"는 것이었다. 성령의 온갖 은사와 은총이 그에게 부여되었는데, 다른 예언자들에게서처럼 한도껏 부여된 것이 아니라 무한히 부여된 것이다(요 3:34). 이제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들어갔다(14절).
둘째, 그는 어떻게 위임받았는가? "그가 내게 기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의 비상한 자격이 위임장이 되었다. 그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할뿐더러 그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무슨 일로 "지정하시면," 그 일을 위해 그는 그들에게 "기름 부으신다." "그가 나를 보내셨으므로, 그는 또한 성령을 보내시사 나와 동행케 하셨다."
셋째, 그의 과업은 무엇인가 ! 그가 자격을 갖추고 위임을 받은 것은,
1. 위대한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전파하기 위해서 기름부음 받았다." 그것이 3번이나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이제 개시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누구에게 전파했는가?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즉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유대 학자들은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거절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이다. 죄로 인하여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에게이다. 그들에게 복음과 그 은총이 영접될 것이요, 그들은 그것을 받으리라(마 11:5).
(2) "무엇을" "전파"했는가? 한 마디로 하면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euvaggeli,zesqai ─즉 복음화하기 위해서 보냄 받았다. 그들에게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 전파가 효력을 내게 하기 위해서 왔다. 복음을 그들의 귀에만이 아니라 마음에다가도 전하여, 그들이 복음으로 재주형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세 가지를 전파했다.
[1]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이다. 복음은 애굽이나 바벨론에 있던 이스라엘에게처럼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죄인들은 죄책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그의 성령과 은총에 의해서 부패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그것이야말로 죄악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다. 그 해방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머리로 삼고자 하며 기꺼이 그의 지배를 받으려는 모든 사람이 향유할 수 있다.
[2] "눈먼 자들에게 시력의 회복"이다. 그는 복음의 말씀으로 "암흑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서 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은총의 권능으로 "눈먼" 자들에게는 시력을 주기 위해서 왔다. 이방인들은 물론이요 중생하지 못한 모든 자들은 삼손이나 시드기야 처럼 "속박"을 받고 있는 자일 뿐만 아니라 "눈먼" 자들이다. 그는 자기가 우리들에게 "안약"이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러 왔다. 그 약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약이다. "주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라면, 그의 응답은 "너의 시력을 받으라"하는 것이 될 것이다.
[3] "주의 은혜의 해"의 선포이다(19절). 그는 세상 사람들이 거역하고 있던 그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새로운 조건으로 그들을 "용납"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주려고 왔다. 또한 아직도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수락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 왔다.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자비"의 때이다.
이 구절은 "면제(석방)"년(年)을 비유한 것이거나 "희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 해는 종들에게는 "은혜의(용납될 수 있는)해였다. 그 때가 되면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다. 빚진 자들에게 대한 모든 가혹한 행위도 모두 중지된다. 땅을 저당 잡혔던 자들은 땅을 다시 돌려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희년의" 나팔을 불려고 왔다. 그리고 "그 즐거운 소리"를 듣는 자들에게는 축복이 있다(시 89:15). 그 때는 은혜의 때이다.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위대한 "의원"이 되려고 왔다. "상한 심령을 고치고," 위로하며, 고통 받는 양심을 어루만져 주고,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겸비해진 자들에게 평화를 주며, 죄로 인하여 닥칠 하나님이 진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며, 죄책과 부패의 짐으로 고심하며, 지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안식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왔다.
3. 위대한 "구속자(救贖者)"가 되기 위해 왔다. 고레스왕이 포로 된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했듯이, 그리스도는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그는 "누구든 원하는 자는" 고향 이스라엘로 "올라가도 좋다"고 선언했다), 상처 입은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 그는 그의 영에 의해서 마음을 "움직이시고"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이것은 옛날처럼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스 1:5).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빚진 자요 죄수들인 가난한(불상한) 죄인들을 해방시키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다. 예언자들은 자유를 선포할 수 있을 뿐이지만, 권위 있는 자로서, 또 "죄를 용서해 주는 지상의 권능을" 가진 자로서 그는 "자유케 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여기에 부가되어 있는 것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사실을 이렇게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성경 낭독자들에게 허용한 자유에 따르면, 성경을 읽는 중에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고, 그 본문을 해설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이사야 58장 6절에다 이런 것을 추가했다. 이사야서에 보면,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가게 하라"는 것이 은혜의 해에 해야 할 의무로 되어 있고, 이 구절은 칠십인역이 사용한 구절과 꼭 같은 것이다.
(4) 그리스도가 이 본문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킨 사례가 나와 있다(21절). 그는 말씀을 읽은 다음, "책을 말았다(덮었다)." 그리고는 그 일을 맡은 "사역자" 즉 "서기"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앉았다". 이것은 유대 교사들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다"(마 26:55).
이제 이렇게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오늘 이 성경이 당신들의 귀에서 이루어졌다. 이것, 곧 이사야가 예언의 방식으로 기록했고, 이제 역사의 방식으로 너희에게 읽어 준 바이니라."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이 시작됨으로써 실현되기 시작된 것이다. "이제." 그들이 다른 지역에서 그가 베푼 그의 설교와 기적에 관해 들은 그 보도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바로 그들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들려준 그 설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데에 대한 그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이 성경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었을 공산이 아주 크다. 나아가 자유와 시력과 치유를 선포한 그의 전파에서, 그리고 "주의 은혜의 해"가 주는 모든 축복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그밖에도 다른 많은 은혜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종종 긴 설교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긴 설교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이날 이 성경이 이루어졌느니라"는 이 말씀은 새로운 도입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메시야에게서 실현되어야 할 구약 성서의 모든 말씀은 주 예수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바로 이분이 "오실 그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2]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성경의 실현"을 관찰해 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그의 은밀한 말씀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계시된 그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이루어진)섭리를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은 그 양자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5) 청중들의 "주목"과 "칭송"이 나와 있다.
[1] 그들이 "주목(注目)"했다(20절).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의 눈(아마 그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이 그를 주목했다." 그들은 최근에 그에 관해 많은 소문을 들었으므로, 그가 할 말에 큰 기대를 가지고 온 것이다. 사역자의 말을 들으며 눈으로 주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눈이 마음에 감동을 주듯이, 역시 마음은 눈을 따라가고, 눈에 따라서 고정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나아가 우리도 지금부터 그 사역자를 통해서, 그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법을 배우자. "내 주께서 그의 종들에게 무어라 하셨는가?"
[2] 그들의 "감탄"(22절)이 있다. "그들이 모두 그를 증거 했다." 즉 그가 감탄할 만큼 말을 잘하고, 요령 있게 한다고 증거 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칭찬을 보냈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 의하면, 그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훌륭한 사역자들과 훌륭한 설교를 보고 들으면서 감탄은 하나 그들 자신은 결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살펴보자.
첫째, 그들이 무엇에 감탄했는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이었다. "은혜로운 말," 좋은 말, 인정에 넘치는 말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은혜로운 말"이란 것을 명심하자. '그의 입술에"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에(시 45:2), 그의 입술에서 은혜의(은혜로운)말이 나온다. 그리고 이 은혜로운 말은 "기이히 여기게"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경이로운 것이요, 그는 그의 은혜, 그의 은혜로운 말, 그리고 그 말에 동반되는 그 권능에 있어서 경이롭다. 그가 우리와 같이 은혜를 모르는 천한 자들에게 그가 그처럼 "은혜로운 말"을 했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경이로운)일이다.
둘째, 이 경이감을 더욱 증가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그의 출생(기원)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므로 그의 출신이나 교육이라야 하찮은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떤 자들은 그의 "은혜로운 말"을 더욱 더 기이히 여기게 되었을 것이고, 그 사람은 필경 하나님께 대해 배워야 할 자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가르칠 수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그의 은혜로운 말에 대해 가졌던 경이감을 고쳐먹고는, "실제로는" 그 말에 아무 것도 기이할 것이 없으며, 어떻든 그는 "요셉의 아들"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비천한 자에게서 어떻게 위대하고 중대한, 가치 있는 것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6) 그리스도는 자기의 청중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을 반대를 미리 알았다.
관찰해 볼 것이 있다.
[1] 그 반대는 무엇인가? "너희는 반드시 '의원아, 네 자신을 고치라'고 말할 것이다(23절). 너희는 내가 요셉의 아들, 곧 너희 이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지역에서 행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기적을 행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의원에게 그가 유능하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들과 동포들도 고쳐야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베푼 기적의 대다수는 "치유" 기적이다 ─ "그렇다면 왜 네 자신의 고향에서는 다른 마을에서처럼 병자들을 치료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기적들은 사람들의 불신앙을 치료하는 것이었다─"왜 불신아이란 병은 치료하지 않는가? 그게 정말 중대한 병이라면, 다른 마을의 불신앙처럼 네 고향인들의 불신앙도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버나움에서 행한 것으로 우리가 들은 모든 것 ─ 소문이 많이 나 있었다 ─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하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을 기뻐했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기이한 일"을 베푸는 서론이 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 중의 절름발이, 소경, 병자, 또 문둥이들이 치유되고 도움을 입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마음의 부담이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염두에 둔 주요 목표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자기 마을도 다른 마을처럼 기적의 무대가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보다는 바로 이 마을에 그리스도가 일단의 기적을 베풀어서 안 될 일이 있는가? 그리고 다른 어떤 마을보다도 그의 이웃들과 귀인들이 그 기적의 혜택을 받아서 안 될 일이 있겠는가?
[2] 그가 취한 행동에 대한 이 반대에 그는 어떻게 대처했는가?
첫째, 그는 왜 자기가 자기의 본부를 나사렛에다 정하려 하지 않는지, 그 평이하고 실증적인 이유를 들었다. "예언자들이 고향에서는 환영을 못 받는다"는 것, 최소한 좋은 대우도 못 받으며, 다른 마을에서처럼 효과도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경험은 이 진리를 확증해 주고 있다. 예언자들이 자비의 전갈이나 기적을 가지고 고향에 파송되어 왔지만, 그들의 출신과 교육 내역을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극소수만이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했다. 하몬드(Hammond) 박사도 그렇게 말한다. 친근성이 경멸을 낳는다. 또 우리는 우리가 늘 교제해 오던 자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사적 인간"으로 있을 때 잘 알려진 자들이 "예언자"가 되면 예언자의 당연한 예우를 좀처럼 받지 못한다. 실제로는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국산"보다는 "멀리서 가져온"것, "값비싼 것"이 정평을 받는다. 이것은 사람이란 그 이웃에 대해서 질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은 언제나 자기들은 "열등한"길을 가는데 남들이 "우월한" 길을 가면 배가 아픈 법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려 하지도 않았고 어떤 비상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구약성서 중의 가장 이름난 두 예언자들의 적절한 본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대응했다. 그들은 자기 동포들에게보다는 외국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쪽을 택한 자들이요, 그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분명코) 그러했다.
1. 엘리야는 "시돈의 한 성읍, 사렙다 과부"의 생계를 돌봐 주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해서는 하나의 비방자였던 자이다. 그 때 "그 땅에는 기근이" 있었다(25, 26절). 이 이야기는 열왕기 상 17장 9절 이하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가 제 3년에" 아합 왕에게 나아갔고, 그 때 그 땅에는 "비가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뭄이든지 제 3년이 아니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집에 유숙한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이 "그 아들의 아버지"요 "과부들의 재판장"임을 보이셨듯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이방인들에게도 자비를 풍성히 주시는 자임을 보이시려 했던 것이다.
2. 엘리사는 나아만이란 아람 사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 나아만은 아람 사람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였던 자였다(27절). "엘리사의 시절에는 이스라엘에(도) 많은 문둥이가 있었다." 특히 4 문둥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람인들의 사마리아 포위가 철수되자 그 소식을 황급히 알린 자들이요, 아람인들의 막사에서 노획한 것들을 가지고 사마리아를 부유하게 해주었던 자들이요, 이 때 그 성읍에 엘리사 자신도 갇혀 있었던 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그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었다(왕하 7:1, 3 참조). 그러나 엘리사가 그들을 고쳐 주었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다. 즉 그들이 한 수고나 전해 준 좋은 소식에도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아람 문둥이만은 고쳐 준 것이다. 신앙을 가진 자들이 아니고는 아무도 치료를 위해서 예언자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가끔씩 이스라엘인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이방인들을 접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그 두 사례를 언급한 것은, 자기는 어떤 사적인 이유 때문에 기적의 호의를 베풀지는 않으며, 단지 하나님의 지혜로운 지시에 따라서만 베푼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나사렛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의원아, 네 자신을 고쳐라"고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나 엘리사에게도 으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 고향에서는 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 기적을 행하셨고, 반면에 이 위대한 예언자들은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행하였다. 성도들의 본이, 나쁜 행동을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성미 까다로운 사람들의 비난에서 떠나 자유롭게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2. 그는 어떻게 나사렛에서 "핍박받았는가?"
(1) 그가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그들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해졌다"(28절). 그들이 "모두" 그래졌다. 이것은 22절 이후 커다란 변화이다. 그 때는 그들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었다." 이와 같이 군중의 견해와 기호는 불확실한 것이요 변덕이 심하다. 그들이 만일 자기들이 기이히 여긴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말에다가 신앙을 배합했더라면, 그의 나중 말씀은 그들에게 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귀만 즐겁게 하고"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들의 귀에 거슬리게 되었다." 그들의 부패된 본성을 자극시킨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는데도 그 자신을 위대한 예언자들과 비교하며, 자기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던 저 부패한 시절의 사람들과 비교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러나 특히 그들을 노하게 만든 것은, 유대인들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다소간의 자비를 베푸셨다고 그가 암시한 사실이다(행 22:21). 그들의 신앙심 깊었던 조상들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는 일(다윗의 시와 이사야의 예언 중에는 이에 대한 많은 증언이 있다)로 기뻐했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인간들은, 자기들이 그 계약을 상실해 버린 지금에 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 계약에 들어서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까지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당장 그리스도를 죽일 기도를 할만큼 심히 화가 났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활동 벽두에 당한 가혹한 시련이었고, 그가 "자기 백성에게 왔을"때 통상 접대 받는 일의 한 전조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1] 그들은 그에게 대한 소란을 일으키고 "일어나서," 그의 설교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예배까지 망쳐놓았다. 그들은 그 회당 예배가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었다." 그는 그토록 오랜 기간을 그곳에 정착하고 살았었지만, 이제 와서는 자기들과 함께 거주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여긴 때문이다. 마치 그가 만물의 찌꺼기밖에 안 되는 양, 그들은 구주와 또 구원 자체를 자기들에게서 쫓아내고 만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다가 그들을 죽여버렸더라면 얼마나 마땅했으랴 ! 그러나 이 날은 그의 인내의 시간이었다.
[3] 그들은 "그들 낭떠러지로 끌고 갔다." 그것은 "그를 밀쳐 내리치고자" 함이었다. 마치 살려 두기에 부적합한 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오랫동안 자기들과 같이 살 때 이미 아무런 해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생활이 얼마나 빛나는 생활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 또 그들은 그에 대한 많은 소문은 들어왔었고, 지금은 자기들도 "그의 은혜로운 말을 감탄하고" 있었지만 - 또 그는 정당하게 자기를 해명하고 이야기할 여유를 허락 받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민중 봉기 또는 차라리 광란에 빠져서 그를 급히 쫓아내고, 지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려 든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그가 한 "선행"(요 10:22) 때문에 돌로 쳐 죽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이 그에게서 선행을 실행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악한 자들의 종국에는 폭력이 돋아나게 마련이다.
(3) 그러나 그는 도망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저희 가운데로"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고 "지나갔다." 하나님께서 소돔인들이나 아람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듯이, 그가 그들의 눈을 멀게 했든지, 아니면 그들의 손을 묶어 두었거나 혼란을 일으켜, 자기들이 뭘 계획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그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오지 않았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아낌없이 자기를 포기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자기들에게서 "몰아내었고," 그는 "자기의 길을 갔다." 그는 나사렛 사람들을 모으고 싶었으나, 그들이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은 "황폐하게 버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나사렛 예수임이 하나의 치욕거리임을 말해 주기 위해 부가된 기사이다. 즉 나사렛이란 아무런 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요, 또한 아주 악하고 거치른 곳이며 그에게 "불친절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사렛 사람들의 존경을 크게 받지 못한 사실 속에는 섭리가 깃들어 있어. 그들이 그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와 그의 옛 친지들의 공모 사건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 (누가복음 4:31-44)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추방되자, 갈릴리의 다른 한 마을 가버나움으로 갔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보는 그의 설교와 기적에 대한 기사는 앞에서 이미 본 것이다(막 1:21 이하).
Ⅰ. 그의 설교를 살펴보자. "그가 안식일에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했다(31절). 하나님의 한 규례인,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안식일"에 적합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32절). 그들이 "그의 가르치심(doctrine)에 놀랐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무게가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듣는 자들에게 놀라운 발견이 있게 된 것이다. 그 가르침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그 가르침이 어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도 못한 자에게서 나와서 놀라운 것만은 아니다. "그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다." 그 말씀 속에는 강력한 호소력이 있었고, 살아 있는 권능이 그 말씀과 동반되어 사람의 의식에 와 닿았다. 그러므로 "성령과 권능의 증거로" 한 바울의 가르침도 그 자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해 준다.
Ⅱ. 그의 기적을 살펴보자.
1. 특히 두 가지의 구체적 기적을 살펴보자. 그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1) 인간 세계에서와 사람의 영혼의 세계에 있어서, "사탄의 통제자"요 "정복자"임을 보여 준다. 그는 자기의 권능으로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그 사람의 몸에서 사탄을 추방시켰다. "그는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관찰해 볼 것이 있다.
[1] 악마는 "더러운 귀신(영)"이다. 그의 본성은 직접 순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과 대립되며, 최초의 상태에서 타락해 버린 것이다.
[2] 이 부정한 영은 사람들 속에서 활동한다. 그 때에는 사람들의 몸 속에서 활동했듯이, 역시 사람들의 영혼(soul) 속에서도 활동한다.
[3] 사탄의 권능과 역사(役事)에 크게 짓눌려 있는 자들도 "회당에" 갈 수 있고, 하나님 예배에 참예 할 수 있다.
[4] 악마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요,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
[5] 그들은 믿고 "떤다," 더러운 영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기"(히 10:27) 때문이요,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를 멸하러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정한 영들은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6] 악마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상관 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는 그 악마를 제재했다. "그는 꾸짖어" 가로되 "잠잠하라"고 했다. 이 말씀은 "권능이 있는" 말이었다. fimw,qhti─ "재갈을 물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악마에게 침묵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그의 입을 닫아버렸고, 자기의 듯으로는 떠들고 싶어도 떠들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8] 사탄의 권세를 꺾으심으로써, 정복된 그 대적은 자기의 악의를 드러내었고, 정복자 그리스도는 은혜가 넘치는 사랑을 보이셨다. 여기서
첫째, 악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공개했다. 그 때 악마는 마치 그 사람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이, 맹렬한 분노로 "그 사람을 무리 중에서 넘어뜨렸다." 그러나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가 악마를 떠나게 함과 동시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이별의 타격과 고통도 주지 않은 채 고이 떠나게 함으로써, 악마를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고 계심을 보이셨다. 사탄은 자기가 "멸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상처"를 주려 한다. 그러나 그도 그리스도가 허락한 한도 이상으로 피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위안이 된다. 아니, 악마가 사람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 그는 "나왔다." 그리고 "그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즉 악마가 그 가엾은 사람을 얼마나 심하게 쓰러뜨렸든지, 사람들은 그가 박살나는 줄로 알았으나,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완전히 건강해졌다.
[9] 악마를 제어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널리 인정되고 경모를 받았다(36절). 아무도 이 기적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했고, 그 영광을 감소시킬 만한 제안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놀라서, '이 어떠한 말씀인고 !' 하더라" 고 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악마를 쫓아내는 듯이 가장하는 자들은 악마를 달래는, 많은 주술이나 주문으로 그런 일을 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잠시 그를 잠들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권위와 권능으로" 악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권위와 권능이야말로 그들이 방해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증의 권능을 잡은 임금"도 그리스도의 종이요, 그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된다.
[10] 이 사건도 다른 사건들처럼 그리스도에게 명성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경홀히 여기지만 이러한 그의 권능을 당시의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목격했고(그리고 그들은 바보들도 아니었거니와 비상한 투시력을 가진 자들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찬양했으며, 그 사건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영예롭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37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예수의 소문이" 전보다 더 멀리 "퍼져 나갔다." 즉 "그 근처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공무에 처음으로 들어섰던 사람들은 그를 많이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나중에는 신기한 사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감탄이 메말라 버리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병 고쳐주는 자"임을 드러내셨다. 앞에서는 인간의 비극의 뿌리에 공격을 가했다. 그 뿌리는 사탄의 적개심이요, 그것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나무의 가장 무성한 가지들, 인생에 지극히 흔한 참상─ 그것은 육체의 질병이다─을 공격하신다. 그러한 질병은 죄와 더불어 사람에게 들어온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 죄 때문에 당하는 가장 일반적이요 구체적인 징벌이며, 그것은 많지도 않은 우리의 날을 "근심으로 가득 차게" 하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는 그러한 질병의 자리를 제거해 버리기 위해 오셨고, 그 의도를 말해 주는 사건으로서 그가 지상에 오셨을 때 이와 같은 기적을 통해서 자기의 교리를 확증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그 기적이란 다름 아니라 질병 그 자체까지도 제거해 버리는 기적이었다.
몸의 모든 질병 중에서도 "열병" 이상으로 어른들에게 흔하고도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 병은 갑자기 와서, 갑자기 사람들의 생애를 잘라버린다. 즉 그 병은 때때로 "유행하여," 순식간에 "수 천 명을 죽인다."
이제그리스도가 말씀 한 마디로 열병을 치료한 사실을 보게 된다. 장소는 시몬의 집이요, 그 환자는 시몬의 장모였다(38, 39절).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는 그를 환대하는 자들에게 훌륭한 대가를 지불해 주는 손님이다.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마음과 집으로 영접하려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아무런 손해도보지 않는다. 그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방문하신 가정에도 질병이 방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특별한(구별되는) 은혜를 축복 받는 집안"에도 현생의 인간이 부닥치는 "공동 재난"이 닥칠 수 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었다. "주여, 보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3]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남들보다 더 가혹한 고통에 시달릴 수 있다. 그의 장모는 "중한 열병에 붙들렸다." 즉 아주 고통이 심하고 열이 높으며 무서운 열병에 걸렸다. 아마 열병이 머리를 덮쳐서, 정신착난에 빠졌었을 것이다.
[4] 나이가 많다고 질병에서 면제되지는 못한다. 아마 베드로의 장모는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병"에 걸렸다.
[5] 우리의 친척들이 아플 때는, 그 때마다 우리는 신앙과 기도로써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녀를 위해 그리스도께 구했다." 또한 신앙의 기도는 병을 물리치리라는 특정한 약속이 주어져 있다.
[6] 그리스도는 자기의 백성들이 병들어 고생하고 있을 때에,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일어나 그녀에게로 갔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께는 육체의 질병을 통어하는 절대권을 지니고 계셨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가 질병을 꾸짖으셨다." 한 마디 말씀으로써 질병에게 나가라고 명했고, 그러자 "그것은 그녀를 떠났다." 그리스도는 질병을 보고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병은 갔다. "오라"하면 온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큰 열병에게라도 지금도 "꾸짖을" 수 있다.
[8] 즉각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치유가 기적임을 입증했다. "즉시 그녀가 일어났다"고 했다.
[9] 그리스도께서 병에서 회복시켜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곳에는, 그가 그 생명이 참으로 새로운 생명이 되어서, 이전보다도 그의 사업과 그의 영광을 위해 그 삶을 쓰게 되기를 원하시고 기대하신다. 질병이 꾸짖음을 당하고, 우리가 참상에서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법이다.
[10]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의 것이 된 모든 자들을 받들어 섬길 준비도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수종들었다." 즉 자기를 고쳐 준 "그분"에게만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그에게 구했던" 그들에게도 수종들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 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행한, 그와 같은 종류의 다른 많은 기적들을 일괄해서 말한 기사가 나와 있다.
(1) 그는 "많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즉 그에게 자기 자신들을 내맡긴 모든 자들을 예외 없이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그때에" 해가 지고 있었다.(40절). 그 날, 안식일 저녁에는 회당에서 시간을 보냈다. 안식일 전체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해질 때까지라도 이런 저런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안식일과 그 날의 업무를 "즐거움"이라 부르는 자들처럼 하는게 좋다.
그리스도는 "병든 모든 자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고쳐 주셨다. 또 그들이 "각색 병"을 앓고 있었지만 모두 고쳐 주셨다. 따라서 그를 어떤 한 가지 병을 고치는 전문의로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모든 질병을 고치는 약이 있다.
그가 병 고칠 때 쓴 표적이란 "자기 손"을 병자에게 "놓는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서 손을 쳐든 것이 아니다. 그는 권위를 가진 자처럼 고쳤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권능으로 치유했다. 그리고 그는 그 후 성령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용할 때 쓰는 그 표적을 영예롭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2) 그는 또한 악마 들린 많은 자들을 고쳐 주셨다(41절). 마귀들에게서 고백이 터져 나왔다. 마귀들은, "당신(주)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격노와 분함에 못 이겨 "소리친" 것이었다. 그것은 고문으로 나온 고백이었다. 따라서 신빙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는 "저희들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가 그리스도신 줄을 앎이더라." 즉 그가 그들을 정복해 버렸으며, 아무런 협약도 맺지 않았음이 논의의 여지없이 밝히 드러나게 생긴 것이다.
3. 그는 가버나움을 떠나신다(42, 43절)
(1) 그는 잠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다." 그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잠시간 뿐이었다. 그것은 "작은 것이 그를 섬겼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작은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안일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은 "낮이었다." 그것은 계속하여 은둔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과 더불어만" 있기 위해서였다. 공무에 무척 바쁜 사람들도 그런 시간을 가져야 하며, 또 그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일은 볼품없이 되고 말며, 그들 자신도 "그렇게 외로이" 있는 때가 아니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는 다시금 "집합" 장소로 "돌아갔다." 그것은 거기서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한적한 곳"이 "은거"하기에는 편리하겠지만, "유숙하기에 편리한 곳"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우리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세대를 위해 선을 행하려고 보냄 받은 것이다.
[1] 그에게 가버나움에 머물러 달라는 간청이 들어왔다." 그 무리"는 예수를 지극히 좋아했다. 그것은 분명코 그가 그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그를 찾았다."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그가 간 곳이 "한적한(황량한) 곳"이었지만, 그들은 "그에게로 가서 만났다." 한적한 곳이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으면 한적하지 않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다". 따라서 그가 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초대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옛부터 알고 있던 나사렛의 이웃들은 그를 쫓아내었다. 그러나 새로 안 이 친구들은 자기들에게 머물러 달라고 열성이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기들을 쫓아내는 자들이 있다고 하여 낙심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과 자기들의 설교로 맞아들이는 자들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빛을 어느 한 곳에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퍼지게" 하는 쪽을 택했다. 따라서 아무도 자기들이 다른 교회에 비해 "모(母)교회"라고 자칭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가 가버나움에서 환영을 받았고, 또 거기서 많은 선을 베풀었지만, 그는 "다른 마을에서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가버나움은 그의 체류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복음의 혜택을 맛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기뻐해야 하며, 결코 "독점"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 또 한 장소에서 "쫓겨나지" 않은 사역자들이라도 더 큰 쓰임을 생각하고 다른 지역으로 "쫓겨날" 수도 있다.
그리스도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헛되이 전파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거기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전파했다"(44절). Bonum est suidiffusivum─즉 선한 것은 저절로 퍼져나간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느 한 장소나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그들과 함께 계시는데,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그리스도교의회당에서처럼 "이방인의 갈릴리"에서도 그의 특수한 임재가 같이한다.
첫댓글 2021년 새해를 시작합니다
회원님께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 겨울 난방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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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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