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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식의
'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
< 더 퀸 - The Queen >
'왕관을 쓴 자, 그 누구도 편히 쉴 날 없나니'
(Uneasy lies the head that wears a crown)
< 더 퀸 > 은 셰익스피어 희곡 < 헨리 4세 > 의
2부 3막 1장 대사로 그 막을 열어가죠.
1997년 5월 2일,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10번째 총리인 토니 블레어를 만나 왕실 인증
절차를 마칩니다.
여왕은 군주제 반대론자를 아내로 둔, 급진적
개혁 성향의 총리를 마뜩지 않아 하죠.
한데, 그로부터 4개월 가까이 지난 8월 30일...
1500년 역사의 영국 왕조가 배출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다이애나 비가 프랑스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왕실 가족들은 이혼했으니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왕족이 아니라며 거리를 둔 모습을
보이죠.
소식을 전해 듣고 사태가 간단치 않음을 직감한
블레어 총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추도식
절차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여왕은 총리와 통화하면서 민간인의
일이므로 자신은 추모 성명을 발표하지 않을
것이며, 다이애나 유족의 뜻을 따라 가족 장례로
치룰 것이라고 잘라 말하죠.
국민들의 감정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블레어는
크게 곤혹스러워합니다.
"자신들이 그녀의 인생을 망쳤으면 고이
보내드리기라도 해야 할 텐데..."
영국 왕실은 오히려,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어린 왕자들을 배려해 여왕 가족들을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으로 잠시 떠나 있도록
조처하죠
그 사이 버킹검 궁전 광장엔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슬퍼하는 국민들의 추모가 끊이지 않고,
뜨거운 애도행렬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됩니다.
평소 다이애나 비와 사이가 좋지 않기로 소문난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며느리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국민들의
눈에는 이런 여왕이 마치 냉혈한처럼 비춰지죠.
다음날 총리는 애정이 담긴 추모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파리로 가서 다이애나의 시신을 영국으로 운구한
찰스 왕세자(앨릭스 제닝스 분)는, 유해를 맞이하러
공항에 나온 총리와 함께 가족장으로 장례를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데에 공감하죠.
이틀 후 다이애나의 장례를 위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립니다만... 여왕은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국장으로 치루기로 했다는 회의 결과를 보고받게
되죠.
반면에... 블레어는 찰스로부터 총리와 뜻을 같이
하겠다는 호의적인 전화를 받습니다.
국민들은 다이애나 비의 죽음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고, 계속 휴양지에 머무르고 있는 왕족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죠.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심각하게 나빠지는
가운데... 민심을 제대로 읽는 총리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있다며 보좌관들은 반색하지만, 정작
블레어는 이런 상황을 마냥 반기지만은 않습니다.
"여왕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도 힘들어져요"
그런 총리는 여왕에게 전화해서, 왕궁에 조기를
게양하고 런던으로 돌아와주실 것을 거듭 정중히
요청하지만, 여왕은 이를 거절합니다.
"무슨 박람회 구경거리도 아니고... 다이애나는
이미 주목을 받을만큼 받았네!"
그럼에도 블레어는 국민들의 태도에 낙담하는
여왕을 나름 이해하며, 왕실에 대한 적대감을
부채질하는 언론 보도를 자제시키려 노력하죠.
여왕은 TV를 통해 며느리의 생전 인터뷰를 보며
착잡해 합니다.
" 전 국민들 가슴에 남는 왕비가 되고 싶을 뿐 왕비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제가 왕비가 되는 걸
원치 않는 분도 많고요.
현재 왕실의 높은 분들은 제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위험해 보였나 봐요. 진실하게
살고 싶어서 위선을 거부했더니 결국 고통이
오는 군요."
" 남편의 옛 애인 카밀라 땜에 이혼한 건가요?"
"한 남자와 두 여자가 같이 사는 기분이랄까요?"
여왕은 남편 필립 공(제임스 크롬웰 분)에게
털어놓습니다.
" 솔직히 우리도 책임이 있는 거 인정합시다.
우리도 결혼을 부추겼잖아요. 당신이 유난히
좋아했던 거 기억해요?"
필립은 며느리가 죽어서도 가족들의 속을
긁는다며 심드렁하게 답하죠.
" 그 땐 애가 말쩡했잖소. 찰스도 애인을 포기했고,
다이애나도 얌전히 살 줄 알았지. 여자 문제가
뭐 대수라고!"
다음날 어느덧 칠순을 훌쩍 넘긴 여왕은 사냥터의
손주들을 보러 직접 운전해 가다가 차 쉬프트
고장으로 어쩔 수 없이 멈춰서게 되죠.
망연(茫然)히 밀려두는 야속함, 서글픔에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홀연히 나타난, 뿔이 14개로
갈라진 웅혼(雄渾)한 기상의 사슴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개 숙여 흐느끼는... 홀로 있을 때만 눈물을
훔칠 수 있는 여왕의 뒷모습에서 그녀가 헤쳐온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묻어나지요.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여왕은
사슴을 향해 사냥꾼들로부터 어서 달아나라며
탄식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하지만 여왕은 도망갈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군주이기 때문에...
악화일로인 국민들의 여론 추이를 보며 고민을
거듭한 총리는 여왕에게 전화를 걸어, 군주제
폐지에 대한 국민들의 뜻을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을
따라주길 간곡히 부탁하죠.
치열한 번민 끝에 결단을 내린 여왕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1세께 정부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요구를 말씀드립니다.
" '하나, 왕궁과 모든 왕실 저택에 조기를
게양한다. 둘, 조속히 런던으로 떠난다. 셋, 직접
다이애나 관에 조의를 표한다. 넷, TV 생중계로
추도문을 발표한다.'
그대로 안했다가는 제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군요. 제 편은 한명도 없어요.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너무 변했어요.
국민에게 버림 받았으니 물러나야죠."
왕실을 위태롭게 할 거라며 걱정하는 여왕을
어머니(헬렌 매크로리 분)는 나무라면서도
또 격려합니다.
" 무슨 소리! 네가 한 선서 기억나니? '오직 국민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국민과 신 앞에서 한 약속이다.
위태롭다니? 넌 가장 훌륭한 왕 중 하나야. 네가
그만두면 진짜 문제될 거다. 그런 생각하면 안 돼!
흔들리지 말고 권위를 지켜야 한다.
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이고 천 년 넘게
이어온 정통 왕가의 후손이야. 울고 짜는 국민들
눈물 닦아주러 당장 달려가라고? 선조 군주 중
누가 그런 짓을 했겠니? 능글능글 별걸 다
트집잡는 총리라니..."
그러나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 결국 한 은행가의
총에 맞아 박제가 된 제왕급 사슴의 시신을 보고
여왕은 만감이 교차하죠.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길... 사냥꾼에게 축하한다고
전해주게."
마침내 런던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 여왕은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국민들 앞에 섭니다.
블레어 총리는 "저 할머니, 등 떼밀려 온 표정하곤..."
이라며 빈정대는 보좌관을 크게 힐책하죠.
" 자넨 그렇게도 생각이 없나? 저 분은 어쩔 수 없이
일생을 바쳐 일하셨네.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진
곳에서 50년 간이나! 근데 명예롭게 살아온
그 분한테 우린 어쨌나? 국민들 비위 맞추라고
협박이나 하고!
이 나라의 군주가 왕실에 먹칠을 한 사람을 위해
조문을 하고 있네.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소중한 걸
짓밟힌 여왕인데..."
총리는 늦게나마 엘리자베스 여왕의 깊은 고뇌를
헤아리며 그녀의 속내를 대변한 게지요.
'여왕 탄생일' 이나 '승전 축하식'이 아닌, 비극적인
사건으로 여왕이 궁전 밖으로 나와 대중 앞에 선
경우는 종전 축하 후 처음으로,
언론은 이를 마치 국민과 군주 왕족이 싸운 후
화해한 상황으로 풀어냅니다.
'다이애나 사랑합니다', '천사같은 분',
'저들은 당신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저들의 손에는 당신을 죽인 피가...'
여왕은 왕실을 미워하고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국민들의 추모 글귀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죠.
한데... 추모 인파 속에 있던 한 여자 아이가 폐하께
드리고 싶다며 꽃다발을 건네고, 추모객들도
예의를 다하자 여왕은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습니다.
생중계를 앞두고, 여왕은 추도문의 내용에 대한
총리실의 마지막 요청까지 모두 받아들이죠.
여왕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성심 성의껏
추도사를 읽어 내려갑니다.
" 난데없이 슬픈 소식이 들려온 후 전국민의
눈물을 보면서 제 자신도 얼마나 애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고통도 겪었습니다.
충격이 너무 심하면 남겨진 사람에게 의혹과
분노, 또 우려를 전가하게 되죠. 물론 다 너무
슬퍼서 생긴 일입니다.
여왕으로서, 그리고 할머니로서 진심으로 말씀
드립니다. 아이들에게는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우리 모두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다이애나의
삶이 얼마나 진실했는지는, 애도의 물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다이애나를 소중히 간직하는 여러분, 비록
다이애나는 떠났지만 여러분이 어디에 있건
고인의 짧은 생애를 같이 애도하기 바랍니다.
평화롭게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진심이라고? 진심 같은 건 없으면서..." 라며
비난하는 부인 체리(실비아 사임스 분)를 블레어
총리는 다독거리죠.
" 저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소! 처절해
보이잖소..."
하지만 왕실에 대해 비판적인 체리는 계속해서
여왕의 추도사를 폄하합니다.
"당신 왜 그래요? 1주일 전만 해도 '민중의 왕세자비'(People's Princess)라고 외치던 사람이!
갑자기 비굴해졌네요. 뭐 놀랄 것도 없죠.
결국 개혁파 노동당 총리들이 모두 여왕의 충복이
되니까요..."
9월 6일 토요일,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이
엄숙하게 거행됩니다.
그 자리엔 여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 총리와
함께 수많은 명사, 그리고 국민들이 참석했죠.
화면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엘톤 존,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등 생전 다이애나 비와 가깝게
지냈던 유명 예술인과 영화인들의 모습을
비춥니다.
베르디의 '레퀴엠' 중 '리베라 메'(Libera Me :
저를 구원하소서)가 처연히 흐르는 가운데,
화면 속엔 생전의 다이애나가 활짝 웃는 모습과
슬픔에 오열하는 영국 국민들...
그리고 극중 침통한 표정의 여왕 가족들, 또한
숙연한 총리 부부의 영상이 절묘하게 콜라쥬되고
있죠.
그리고 2개월 후... 체리 블레어는 여왕을 알현하러
가는 남편에게 묻습니다.
" 여왕이 '군주자의 구세주' 역할을 해준 당신의
공을 인정해주실까? "
총리는 그때 주제넘은 짓을 했던 건 아닌지
충심으로 여왕에게 사과드립니다.
"그런 건 전혀 없었소... 다만 내 상식으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지."
"그땐 특별한 상황이었죠. 여왕님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아주 현명하게 대처하신 겁니다."
"그게 바로 치욕이었지. 왕궁 밖 조문카드를
읽어보셨잖소?"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총리 성공을 위한 최선이었겠지..."
"1년에 52주가 있으니 여왕이 되신 후 2500주를
지내신 셈인데 그 일주일은 기억도 안 될 짧은
시간이었죠."
"과연 그럴까? 왕정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약해졌다고 생각 안하나?" 라며 한숨짓는 여왕을
향해 총리는 화답하지요.
"전혀요. 어느 때 보다도 존경받고 계십니다."
여왕은 총리에게 밖에서 얘기하자며 일어서지요.
" 총리가 산책을 좋아하면 회의가 잘 진행되던데...
걸으면서 결정을 내릴 때가 많지.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 정리가 잘 되거든."
그러곤 심각하게 되묻습니다. "4명 중 한명 꼴로
여왕을 없애고 싶어했다고?"
총리는 "아주 잠시였고 런던에 오신 후론 그런 말은
없습니다" 라고 얼버무립니다만....여왕은
토로하지요.
"그렇게 많이 남의 원망 받아본 적이 없어요.
아주 힘들었소... 선왕(조지 6세)의 갑작스런
서거로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엔 너무 어렸었지.
근데 이제 세상이 변했어. 생각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도와드릴 수 있다는 총리를 향해 여왕은 한 방
날립니다.
" 앞서가지 말게. 서열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내가 위잖나!"
여왕과 총리는 그렇게... 왕궁을 함께 산책하며
화해합니다.
1. < 더 퀸 > 트레일러
https://youtu.be/BIvESE9A_gc
< 더 퀸 > 속에 그려지는 양대 프레임 중 하나는
전통을 고수하는 엘리자베스 2세와 국민 정서를
대변하는 블레어 총리의 길항(拮抗) 관계이죠.
또 하나의 프레임은 근엄한 여왕이면서도
한편으론 가녀린 감정을 지닌... 나이든
여성으로서의 흐느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영화는 시종일관 드라마 당사자들의
숨 막히는 심리전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죠.
영화의 소재가 바로 다이애나 왕세자비라는
사실은 크나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너무도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국민의 왕세자비’ 라
호명하며 애도했던 여성, 여왕보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왕족였던 데다...
또한 그녀가 든 가방이 ‘다이애나 백’이라 불리고,
웨딩드레스가 한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던
패션 아이콘의 주인공이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 말 많고 복잡했던 사건을 감당해야만
했던 여왕의 복잡한 내면을 그려내 보겠다는
제작진의 의도 또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가며 빼꼼히 얼굴만 드러내는
새침한 여왕의 내면, 도대체 그 두꺼운 성벽 안에
어떤 감정들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죠.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은 그렇게... ‘다이애나
왕세자비’ 의 죽음과 관련된 민감한 사건을
영화 소재로 삼아 금지된 구역에 발을 내디딥니다
그는 < 더 퀸 > 에서 ‘세속되는 오랜 권력’ 인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과,
적극적 개방을 요구하는 ‘영국 대중’ 과의
부딪힘에 초점을 맞췄죠.
엘리자베스 여왕과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운명적
대립으로 압축된 < 더 퀸 > 의 내면적 갈등은
결국 보수적 완강함과 개방적 자유로움 사이의
극명한 대립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실 생활에 대해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다이애나는 동의하지 않았고... 그런 그녀를 보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선은 곱지 않았죠.
걸핏하면 파파라치에게 잡힐 만한 행동을
제공하는 다이애나는 그저 문젯거리, 골칫거리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가풍을 무시하는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는
보수적 시어머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죠.
어쩌면 두 여자의 갈등은 이 깊고 오래된 불편한
관계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냉정하고 인기도 없는 여왕보다
뜨겁고 열정적인 며느리가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죠.
대중은 그녀의 자유분방한 열정에 응답하듯
끓어오르고, 여왕의 냉정함에 경멸을 보냅니다.
여왕은 이혼한 며느리에게 예우를 갖출 필요가
없다고 평정심을 유지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죠.
이혼한 며느리가 아닌, 한때 왕실 가족이었던
여성에 대해 예우를 지켜야 한다는 대중의 입김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왕실 자체의 존폐 여부가 문제되는
상황으로까지 사태가 치닫자... 여왕은 비로소
대중의 의견을 따라 조기를 내걸고, 공개적 장례식을
치르죠.
그런데 왜일까요? 보수적이며 전통과 명예를
완강히 고수하려 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굴복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여왕의 말처럼 왕실기는 왕의 부재시 조기 형태로
달게 되어 있죠.
선왕의 죽음에서조차 조기를 달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중은 왕실의 전통에는
관심이 없죠.
그들에게 왕실은 하나의 상징이자 추억일 뿐...
전통은 귀찮은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 요즘 사람들은 감동과 눈물을 원하지만 난 느낌을
대놓고 표현하지 못해요. 가슴에 간직할 뿐.
국민들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차분한 여왕을
원할 거라 착각했소.
그래서 고통과 슬픔은 묻어두고 대범하게 자리를
지키려 했던 거요. 난 그렇게 배웠고 그걸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라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은 듯하네요.”
그렇게... 영화 < 더 퀸 > 에서는 전통과 명예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권리인 엘리자베스
2세의 화려한 왕관 뒤에 가려진 인간적인 모습이
진솔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왕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혀야 하는,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교육받은 그녀는 가장 주목을 받으면서도
외로운 존재였던 게지요.
갑작스런 다이애나 비의 죽음으로 지금껏
받아보지 못했던 원망과 미움 속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뜻을
따를 것인가, 아님 지금껏 왕가가 지켜온, 그리고
그녀가 지켜야 할 전통을 이어갈 것인가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최고의 결정권자인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근엄함을
유지해야 하는 여왕이기에... 자신의 고독함은
물론, 슬픔조차 겉으로 표할 수 없어 괴로워하지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을 둘러싼...
엘리자베스 2세의 아름다운 승복을 담은
< 더 퀸 - The Queen >(2006)은,
언어장애(신경성 말더듬증)를 극복해내는
조지 6세(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의 연설
이야기를 다룬 < 킹스 스피치 - The King's
Speech >(2011) 로 이어졌습니다.
세월을 거슬러 < 킹스 스피치 > 가 < 더 퀸 > 의
프리퀄(Prequel) 작품이 된 셈으로,
극중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조지 6세의 주역을
맡은 배우 헬렌 미렌과 콜린 퍼스는,
5년의 시차를 두고 제78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제83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각각 수상했죠.
다양성을 아우르는 소통의 영화음악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두 작품 모두에서
오리지널 스코어를 맡았습니다.
2. 베르디 < 레퀴엠 > 중 제7곡 'Libera me'
베르디는 < 레퀴엠 > 을 통해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참회하는 인류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죠.
이는 단순히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미사곡을
넘어, 산 자들을 위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레퀴엠' 인 것입니다.
베르디는 < 레퀴엠 > 을 작곡하면서 강렬한
리듬과 열정적인 벨칸토 풍 선율을 구사했으며
각 곡들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도록 배치했죠.
특히 제2곡 '세쿠엔차'(Sequenza : 속송)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디에스 이레'(Dies Irae :
진노의 날) 음악을 전곡의 중간부와 마지막에도
반복해서 흐르게 했습니다.
이는 마치 전편을 관류하는 사상과 정서의
구심점을 '심판의 날에 대한 두려움' 으로
설정한 것이죠.
이렇듯, 다양한 색채와 스펙트럼, 통일성과
방백(Aside)의 연극처럼 직조된 베르디의
< 레퀴엠 > 은 한 편의 '망자를 위한 오페라' 처럼
울려옵니다.
하여, 진한 감동을 주는 멜로드라마... 나아가
'성직자의 옷을 걸친 오페라적 진혼곡' 으로서,
최후 심판의 힘, 죽음의 신비와 맞닥뜨린 고통을
순화시켜 주지요.
서정적인 멜로디로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믿음을
노래하는 제6곡 '룩스 에테르나'(Lux aeterna :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 에 이어지는,
마지막 제7곡 리베라 메(Libera me : 저를
구원하소서).
< 레퀴엠 >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온한
울림의 순간으로 스며져옵니다.
- '리베라 메 1'
https://youtu.be/hcpaaGPu15U
- '리베라 메 2'
https://youtu.be/bFrrfTBnKnI
: 소프라노 안야 하르테로스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밀라노 라 스칼라
- '리베라 메' OST
: 소프라노 린 도손, BBC 싱어스
https://youtu.be/pcm-YDmy4m0
영국 출신의 소프라노 린 도슨은 농염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바로크에서 낭만 음악을 넘나들며
텍스트를 구현하는 섬세한 표현이 매혹적이죠.
그녀는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BBC 싱어스 들과
함께 이 '리베라 메'(Libera me) 를 불렀습니다.
-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니커,
스웨덴 라디오 코러스, 2001
https://youtu.be/9Vm_uIKVHQo
3. < 더 퀸 > 주요 사운드 트랙 모음곡
: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런던심포니
https://youtu.be/XFIRIEPpO7Q
- 'Hills of Scotland'
- 'River of Sorrows'
- 'Queen of Hearts'
- 'People's Princess I'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영화음악가' 라는 직업,
곧 '영화에 맞는 음악' 을 창조해내는 미션에
최적화되어 있는 인물이죠.
영화가 음악을 고를 수 있지만 음악이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는 드문 현실 속에서,
데스플라야말로 가히 영화에 온전히 음악을
맞춰줄 수 있는,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음악가' 로 자리합니다.
그는 14곡에 달하는 오리지널 스코어를 통해
전통과 변혁, 보수와 개방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는 여왕의 심경을 장인의 솜씨로 담아내고
있죠.
2007년 < 더 퀸 > 을 통해 처음으로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오른 데스플라는 9년이 흐른 뒤에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로 제87회 아카데미
음악상 트로피를 거머쥡니다.
- 李 忠 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