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이 시작되기 전 인류는 숲 속에서 사냥과 채집 등으로 삶을 영위해왔다. 하지만 농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인류는 숲을 농경지로 바꾸며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숲이 농경지로 바뀌어갔지만, 농업사회에서 숲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숲이 훼손되면 목재와 땔감이 부족해지는 것은 물론, 물의 정상적인 순환을 어렵게 하여 홍수, 가뭄, 강의 범람 등으로 인해 농업생산에 타격을 주는 자연재해가 일어난다. 따라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숲을 보호해야만 한다.
삼국시대의 숲 파괴
[삼국지(三國志)] 〈한(韓)〉조에는 ‘염사치(廉斯錙)란 자가 서기 20~23년경에 낙랑(樂浪)으로 가던 도중에 호래(戶來)라는 한(漢)나라 사람을 만났는데, 호래의 무리 1,500명은 재목(材木)을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1,500명이 벌채(伐採- 나무를 베어냄)를 할 정도라면, 넓은 지역의 숲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숲을 파괴하면서까지 벌채를 하려던 것은 철이나 소금 생산에 필요한 연료를 구하거나, 또는 대형 건축물이나 큰 배를 만들 재목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造船), 건축(建築), 야철(冶鐵- 철기를 제작함), 제염(製鹽- 소금을 만듦) 등은 숲을 파괴하는 주요한 산업들이었다.
300년 고구려의 제 14대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300)은 궁궐 수리를 위해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켰다. 왕은 숲을 파괴하면서 얻은 목재로 화려한 건축물을 지어 자신의 위엄(威嚴)을 과시하고자 했지만, 백성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나무를 깎고 돌을 다듬는 일(木石之役)로 힘겨워했다.
삼국시대에 두드러지게 숲의 파괴가 일어난 것은 전쟁과 관련이 깊다. 초기의 전쟁은 전사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싸움이었기에 숲의 파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보병을 중심으로 한 다수가 참전하는 대규모 전쟁이 발생하면서, 숲은 크게 파괴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지역은 평양(平壤) 일대였다.
612년 고구려는 수나라 대군을 물리치기 위해 청야(淸野- 주민들을 성안으로 들이고 군수물자와 식량을 차단하는 병법) 전술을 감행해 살수대첩을 이끌어 승리했다. 하지만 들판을 비우는 이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유실수(有實樹)를 베어버리는 등 숲의 파괴가 먼저 진행되어야 했다. 661년 8월 당나라 대군은 수천 척의 배를 동원해 황해를 건너 평양을 직접 공격해왔다. 이들은 다음해 2월까지 평양 일대에 머물다가 고구려 군에게 패해 쫓겨났다. 667년 말부터 668년 9월 고구려가 항복할 때까지 당-신라 연합군 수십만이 평양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군대가 한곳에 장기간 머물게 되면 땔감이나 방어용 목책, 공성 무기의 생산과 수리, 사망자의 화장 처리 등에 필요한 나무가 대량으로 필요해진다. 따라서 평양 일대의 숲은 크게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弓裔, 재위: 901~918)는 사람들에게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군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200여 년이 지난 시기까지도 평양 지역이 황폐해져 있었기에 이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몽골의 7차례에 걸친 고려 침입(1231~1257)을 비롯해, 고려 말 왜구의 해안가 침탈 등 이후로도 다수의 전쟁은 우리 숲이 파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큰 전쟁이 지난 후에는 유독 가뭄과 홍수로 흉년이 들어 백성의 삶이 곤경에 빠지는 일이 많다. 그것은 숲의 파괴로 농업환경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1차로 사람들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2차로 숲과 농경지를 파괴해 사람들의 생명을 다시금 위협했던 것이다.
숲의 파괴와 홍수 880년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은 신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아니하며,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 하지 않는다 하니 사실이냐.”
신하는 실제로 그러하며, 이는 백성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왕의 성덕(聖德)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라의 풍요는 심각한 산림파괴를 가져왔다. 기와를 만드는데는 대량의 연료가 필요하다. 또 숯은 좋은 연료이기는 하지만 자원 낭비가 심하다. 무게로 따져 질 좋은 숯은 원료가 된 나무의 1/10에 불과하다. 숯의 사용이 늘어난 만큼, 숲은 빠르게 훼손된다. 당시 경주는 국제적인 대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이 숯을 사용하면서 숲이 파괴되자, 신라는 886년부터 888년까지 계속해서 가뭄에 시달렸다. 그러자 889년(진성여왕 3)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원종·애노의 난). 이를 계기로 신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니, 숲의 파괴를 신라 멸망의 한 원인으로 볼 수도 있다.
숲의 보호
숲은 자연 그대로의 천연림(天然林)과 인간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조성되거나 보호된 인공림(人工林)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숲을 뜻하는 영어 forest는 라틴어 foresta에서 유래된 것으로, 제한구역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유럽에서 숲은 왕의 사냥터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산업화의 동력으로 많은 나무들이 베어졌음에도 숲이 보존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도 왕실 전용 사냥터가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 기산(箕山), 질산(質山), 왜산(倭山) 등은 여러 차례 왕이 사냥했던 곳으로, 대개 도성에서 말을 타고 1〜2일 가야하는 곳에 있었다. 이러한 사냥터의 숲은 당연히 훼손이 안 되고 보존되었다.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숲에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나, 신성한 나무가 위치해 종교적 성지가 된 곳이 있다. 신라는 한때 ‘계림(鷄林)’이라고 불렸다. 계림은 신라의 수도인 반월성 북쪽에 위치한 숲으로, 이 숲에서 김씨 왕족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 계림은 도심의 한복판에 위치한 곳이지만, 시조가 탄생한 신화가 담긴 곳인 만큼, 오래도록 보존되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