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만큼 세시풍속이 많은 명절도 없다. 농촌에서는 여전히 농한기로 대보름이 지나면 서서히 농사준비를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대보름이 농한기 휴식의 정점으로 각종 놀이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지금은 반찬가게가 각종 나물과 오곡밥을 준비한 것으로, 마트에 부럼용 호두나 땅콩들이 보이는 것으로 대보름을 상기하는 정도이다.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가슴 설레던 어린 시절의 놀이들은 상당수가 사라졌다. 북한에서는 대보름을 설, 단오, 추석과 함께 4대민속명절로 지정하여 각종 놀이를 즐기고 있다는데 말이다.
설이나 정월대보름, 추석 등은 태양이 생활 중심인 서양에는 없는 명절로, 음력을 책력으로 쓰던 우리나라와 중국에 존재하는 달과 관계된 고유 명절이다. 대보름에는 집집마다 오곡밥을 먹었으며, 나물반찬이 어찌나 많았는지 젓가락이 한 번씩만 가면 이미 배가 불러온다. 말려두었던 고사리, 고춧잎, 호박고지, 가지, 무말랭이 나물에 시래기까지 보태고, 땅속에 묻어두었던 무를 꺼내 채쳐서 볶아내고... 고기반찬이 없어도 그리도 풍성했던 식탁이다.
이때의 세시풍속을 살펴보면 아침에 오곡밥을 지어서 먹기 전에 나물과 함께 집안 구석구석 성주나 삼신 등 소위 가신(家神)에게 먼저 떠올린다. 오곡밥은 많이 먹을수록 좋다고 여겨, ‘장정이라면 대보름에 나무 아홉 짐과 오곡밥 아홉 그릇을 먹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특히 여러 집의 밥을 먹는 것이 좋다고 여겨 14일 밤에는 ‘밥 훔쳐 먹기’놀이도 했다. 대문을 열면 소리가 나니까 오줌을 눠서 삐걱하는 소리를 없애던 짓궂은 추억이 떠오른다. 솥뚜껑은 얼마나 무거웠던가. 쇳소리가 들려도 어른들은 한밤의 부엌 침입자를 알면서도 헛기침으로 인적을 알리는 정도만 하시고 모르는 척하신다.
부럼은 밤이 제일 많았고, 땅콩도 썼으며, 호두나 은행도 있다. 견과류를 딱 소리가 크게 나도록 깨문다. 그렇게 부럼을 깨면 1년 내내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고 치아도 튼튼해져서 한 해를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고 여기던 시절이다. 귀밝이술도 있다.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눈도 잘 보인다고 하여 어른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조금씩이라도 마시게 한다. 말 그대로 술 권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불러서 대답을 하면 “내 더위!”하면서 다가오는 여름 더위도 팔던 기억이 난다.
마을단위로 농악을 하면서 수꿩인 장끼의 곱고 화사한 긴 꼬리털을 꽂은,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현수막 크기의 천을 달아맨 장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돌며 잡귀를 쫓고 풍년과 무탈을 빈다. 밀주(密酒)를 내어 대접하고 부잣집은 돈도 내놓아 마을기금에 보탠다. 이를 ‘걸립(乞粒)’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은 연을 띄워 놀다가 내보내는 마지막 날이고, 어른들은 윷놀이를 즐겼으며, 상품으로 남자는 삽이나 낫, 부녀자는 물바가지나 빨래비누다. 어린 우리들에게는 쥐불놀이만큼 더 신났던 놀이는 없었다.
원래 쥐불놀이는 음력 정월에 60갑자 중에 쥐에 해당하는 ‘자(子)’가 처음 나오는 날(상자일-上子日)에 논이나 밭두렁에 불을 붙이는 민속놀이로, 농가의 세시풍속이다. 마을 사람들이 해가 저물면 들로 나가서 논둑과 밭둑에 불을 놓아 태운다. 쥐불을 놓는 이유는 잡귀를 쫓아내고 신성하게 봄을 맞이하는 의미가 담겨있고, 마른 풀을 태워서 해충의 알이나 유충을 태우고 쥐를 몰아내 풍작을 이루려는 농민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단다.
이 당시 아이들 몇몇은 주머니에 성냥을 넣고 다니면서 썰매 타고 얼음 치다가, 추우면 논두렁 마른 잔디 풀에 불을 지피고 언 몸을 녹여가며 놀았다. 어차피 태워야 할 논둑이기에 바람이 잔잔하여 화재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면 어른들도 묵인하였고, 어쩌다 바람이 세져서 논둑불이 활활 타올라도 논에 있는 얼음을 쟁반만큼 크게 깨서 잔딧불 위를 누르듯 끌고 지나가면 완벽하게 진압된다.
이것이 바로 쥐불놀이이고, 우리들이 제일 신나게 놀았던 불깡통 놀이는 전통적인 세시풍속이라기 보다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깡통이 보급되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전쟁 중에 공수된 미군의 군수 물자 중에는 각종 통조림이 많았는데, 먹고 버린 그 빈 깡통을 불놀이 도구로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쥐불놀이와 결합되었고, 지금은 오히려 불깡통 돌리기를 쥐불놀이로 알고 있을 정도다. 집에서 가져온 가래떡이나 고구마를 불깡통 재에 구워 먹기도 했고, 서리태 콩을 볶아 먹기도 했다. 집에 돌아갈 때는 입 주위가 새까맣다.
한국전쟁 이후로도 꽁치 통조림이나 복숭아 통도림을 먹고 나면 빈 깡통은 아이들 몫이다. 통조림이 흔치 않았으니 빈 깡통 구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깡통 옆에 못으로 구멍을 송송 뚫고 철사줄로 단단히 묶어 깡통 속에 솔방울이나 관솔을 넣고 불을 지핀 뒤 깡통을 돌리면 불의 궤적은 원을 그리며 캄캄한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멀리서도 보이고 어두울수록 더 잘 보인다. 다 타서 재가 되면 깡통을 하늘 높이 던져서 불꽃 머금은 숯불재가 쏟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불꽃놀이가 되는데, 그 몇 초간의 광경이 어찌나 황홀한지 깡통을 채워 다시 돌리고 또 던지고를 반복한다.
친구들과 불깡통 놀이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놀다보면 깡통에서 나온 불씨가 옷에 붙어 구멍이 송송 태워 먹기 일쑤다.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놀다가 집에 돌아와 보면, 설빔 새옷에 불구멍이 군데군데 생겨서 부모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던 그 찰진 기억이 있지 않은가. 없는 살림에 큰맘 먹고 사주신 건데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부모님께 또 죄송한 일은 어린 나이에 불깡통을 너무 신나게 돌린 날은 한밤에 이불에 오줌도 쌌다. 다음날 아침에 곡식 쭉정이를 고르는 키를 뒤집어쓰고 빈 바가지를 들고는 이웃으로 소금을 얻으러 갔다. 8살쯤의 기억으로 아랫집 할머니의 소금세례와 함께 창피함을 흠씬 당하고 나서 그 뒤로는 지도를 그린 적이 없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풍습이다. 부모님께 혼날 일은 또 있다. 썰매 탈 때 얼음이 얇아서 또는 물이 솟아나는 얼지 않는 곳에 빠지면 쥐불을 놓고 양말을 말리다가 곧잘 태웠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꾸지람과 함께 천을 덧대어 꿰매주신다.
이 땅에 농촌인구가 줄어들어 농경문화가 사라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우리 어릴 때 놀던 쥐불놀이나 불깡통 돌리기도 이제는 지자체의 이벤트성 행사로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엊그제는 딸아이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여의도 불꽃축제에 다녀왔는데, 아이는 어려서부터 놀이공원에 연간회원으로 다니면서 불꽃놀이를 수없이 보아왔다. 딸은 달빛이나 반딧불이의 은은함도 모르고, 여름밤 멍석위에 누워 밤하늘에 그려지는 별똥별을 보고 감탄하던 경험도 없고, 우리들이 지금도 하고 싶은 쥐불놀이 추억은 당연히 없다.
딸은 형형색색으로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놀이의 멋진 장관을 편하게 앉아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우리들은 친 구가 돌리는 불깡통을 바라보며 또 내 불깡통을 돌리면서 그 궤적으로 원을 만들어 내고, 하늘 높이 던져서 직접 밤하늘의 불꽃을 만들어냈으니, 즐겁고 신나고 흥분되던 그 마음이야 불깡통 돌리기를 어찌 따라올 수 있겠는가.
불깡통을 힘차게 돌리면 송송 뚫린 못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가서 관솔이 활활 타오르면서 공기를 가르는 ‘쉭쉭’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묘한 매력에 빠져든다. 그렇게 한참을 돌리다 보면 멀리 다른 동네 아이들도 들에 나와서 불깡통을 돌린다. 어둠 속에서 마치 올림픽 오륜기를 보는 듯하다. 경쟁적으로 불깡통을 돌리면서 느끼던 환희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지금은 사라진 놀이지만, 어린 시절의 이런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면서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사라진 아름다운 정경, 아쉽고 안타깝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정월 대보름 그 어여쁜 우리의 풍습, 그 시절만큼 되돌아가서 살면 좋겠다.
그때의 행복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뿌듯함]이고,
지금의 심정을 세 글자로 대답하라면 [그리움]이다.
(20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