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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 想 4 /묵향
어릴 적.. 하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산과 들녘에 밝은 햇살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고 아버지가 쓸어놓은 동네 길은 마치 토끼 길처럼 늘어져 있었지요.
면소재지 5일장에 설빔을 마련하기 위하여 아버지는 털신에 새끼줄을 감고 눈길을 다녀오시며 자식들의 양말 한 켤레씩을 마련하여 설날아침에 꺼내 놓으시려 우리들이 모르는 궤짝 깊숙이 숨기시던... 그립습니다.
또다시 설 명절이 다가오고 떡국 한 그릇에 세수(歲壽)는 늘어나지만 건강과 만복을 기원하며 일 년을 시작하는 즐거운 명절이지요.
壬辰年... 還甲(환갑)... 내가 태어나던 해를 기점으로 만60년... 내가 걸어온 짧은 것 같은 긴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이루며 삶을 이어왔던가...
걸어온 발자취를 거슬러 오르며 옛 생각이 젖어 봅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의 명절에 대한 사고와 소위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해방세대와 6.25사변을 겪거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대통령 통치시대의 가난을 벗어나려는 삶의 개척을 경험했던 세대의 민속명절에 대한 개념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민족문화의 뿌리는 뽑아버릴 수가 없고 우리의 혼을 버리면 국가의 이념이 소멸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문화를 계승시키며 발전시켜야 하는 중요한 국가적 사명이 아닐 런지요.
먹 거리가 부족하던 그 시절 특히 농어촌지역의 민초들은 명절이라는 명분아래 가난한 집이나 넉넉한 집이나 명절을 핑계로 넉넉한 차림을 장만하는 것에 대한 흉허물이 배제되던 시절이었지요.
이맘때면, 아버지나 장정들은 설날의 매서운 추위를 포근하게 보내기 위하여 6.25 전쟁 통에 벌거숭이가 된 산에 올라 고주박(부러진 나무밑둥)을 뽑고 자르고,
산주인의 이목을 피해서 도둑 나뭇짐을 지고 낱 가리를 쌓듯 땔감을 쌓아 놓고는 정월대보름을 준비를 하고는 봄까지 쭉 농한기를 즐기곤 했지요.
동네 어귀에서는 돼지를 잡는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와 잔인하게 산돼지의 목을 따서 괴로운 돼지의 비명소리 멀리서 들려오면, 이 번 명절엔 고기를 먹게 되는구나..하는 즐거움도 있었지요.
“ 엄니..나 운동화 좀 사줘 응? ” “ 돈이 어딧니..그 비싼 운동화를...아부지한테 말씀드려봐 니가..”
그러나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게 운동화를 사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서 그저 칭얼대기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도심의 아이들은 그러한 촌구석아이들의 사정을 이해를 하기가 힘들 테지요. 그러나 그것이 삶에 버거워 슬퍼하거나 좌절을 하지 않는 우리들이었고 그 가난한 삶을 내 인생의 모태로 여기고 그것을 탈피하기 위하여 못 배웠어도 잘나지 못했어도
거짓을 모르고 열심히 뼈가 부서지게 일을 하고 자기소임에 최선을 다했던 그 시절 그 때의 사람들이고 삶이었지요.
그래서 명절은 서로가 살길을 찾아 객지에 나가있는 온가족들이 모이는 날이 되고 누구하나 그것에 대한 불만도 불평도 없이 돈을 많이 번 동생이나 조금 벌어온 형이나 부끄럼 없이 아버지의 집에 들이 닥치며 서로 부등 켜 안고 건강과 안녕을 물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짧은 며칠간의 명절을 마치고 아쉬움의 이별을 고하며 부모와 작별의 인사를 하고 배웅하며 다음의 추석명절을 기다리며 타향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습니다.
“ 얘야..집 걱정은 하지를 마라. 에미 애비는 잘 있으니 염려말고...” “ 부디 몸 건강하게...남들하고 다투지 말고...알았지? ” “ 가면 도착했다고 편지나 한통 보내렴...”
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어머니의(서모庶母) 모습을 뒤로 하며 산모퉁이를 돌아 부지런히 시골버스 정류장으로 1시간여의 먼 거리를 줄달음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답니다.
아버지...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인가.
“ 아버님..다녀 오겠습니다. 저 가요...”
사랑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리고 뒤 돌아서는 내게 하시던 말씀...
“ 남의 것에 탐내거나 눈독들이지 말고 열심히 살거라...”
그 한마디를 남기시고는 떠나는 자식을 방안에서 마음으로 지켜보시던 그 아버지가 코끝이 찡하도록 보고픕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6학년 때의 일 일 것입니다 그 나이에 술과 담배를 하는 아이들은 없었지요.
그러나 예외의 날이 바로 설날이었습니다. 저희 동네에선... 담배는 서열의 상징이고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린아이에겐 절대적 금물이었기에 자신보다 윗사람 앞에선 맞담배질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었지요.
그러나 술은 달랐답니다. 설에서부터 대보름 까지는 귀밝이술 이라고 해서 조금씩 허락을 했지요 설날의 특혜... 대보름 이전의 먹 거리 인심이 풍부한 마음의 따뜻함이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 얘야~~!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 다녀 오거라!”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고 아버지가 사 오신 양말이나 검정고무신을 받아들고는 좋아서 가슴에 꼭 품어 안고는 누가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닌데, 다락에 꽁꽁 숨겨 놓고는 아버지와 작은댁 식구들의 남자들이 모여서 하얗게 눈이 쌓인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하고나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었지요.
세배를 하라고 강요를 하시는 아버지의 의도는...
첫째, 경로 효도사상을 고취 시키고 <아무개집의 아들입니다>...하는 알림의 목적. 둘째, 배고픈 시절에 자라는 자식에게 모두가 베푸는 명절인심에 맛있는 음식을 포식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나름대로 해석을 해 봅니다
“ 어서오너라...000댁 아들이구나. 아버님은 무고 하시고? 에헴...”
넙죽 절을 하고는 무릎을 꿇고 어른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차려나오는 음식을 먹지요. 그런데, 세배를 다닐 때는 절대로 혼자서 다니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혼자서는 아무래도 서먹하고 어른들이 무섭고 그렇기에 친한 친구 서너명이서 몰려다니며 가가호호 방문을 하는 도중 어느 댁엘 갔는데 아주머니가 막걸리를 권하기에 그만 한 사발을 꿀꺽하고 마셨지요.
“ 너희들 막걸리 좀 줄까? ^^ ”
쭈뼛 쭈뼛 하다가 덥썩 대답을 하고 말았지 뭡니까
“ 네...”
솔직히 아버지가 시키는 술심부름을 하던 중에 누런 양은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자주 마셨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신만큼 샘물로 보충을 시키고는 아버지에게 주전자를 내밉니다. 아버지는 대접에 한 그릇을 따라서 마시면서 한 마디 하시지요.
“ 어?? 安씨네 막걸 리가 왜 이렇게 싱겁지?? ”
자라목 들어가듯이 움츠리고는 얼른 아버지의 시야에서 사라지며 희죽 웃으며,
“ 내가 마셨지롱~~~헤헤..”
아버지는 아십니다. 어린자식 놈이 배가 고파서 주전자꼭지에 입을 먼저 댔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도 음식이기에 아버지는 아무말씀 않으시고 가슴에 품었다는 것을...
그렇게 그 넓은 동네집들을 돌며 기름진 음식에 막걸리를 마시고는 뉘엿뉘엿 해가 서산으로 넘을 때 친구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만 갈지자(之)가 되어버리고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어머니의 손 자락에 끌려서 골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답니다.
“ 이놈이 아직 오지 않았어 임자? ”
어머니가(친모親母) 그만 엉겁결에 대답을 하시길
“ 예....”
해버렸지요.
아버지는 귀한 아들을 찾아서 대문을 나서시고 아랫마을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 하였지요 아버지는 아십니다. 이 어린자식 놈이 가끔 아버지의 꿀 같은 막걸리를 상습적으로 마셔왔다는 사실을...
이 매서운 대한 추위에 혹여 눈 속에 묻혀서 동사나 하는 것이 아닌지 근심에 따뜻한 아랫목을 지키고 계실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 기우는 놓아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아랫마을로 향하는 도중에 알아 버리셨지요. 일가친척 형수가 귀가를 하는 내 모습을 이미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이 바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술 취한 어린놈을 같이 보았으니까요. 아버지는 희죽 웃음을 흘리시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여 안 씨 댁 사랑방에 모여 있는 친구들을 찾아 가시어 아들이 취한 것처럼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늦은 밤에 귀가를 하시었고
이튿날 아침...
“ 너...혹시 어른들에게...” “ 아부지.. 아뇨, 아뇨 절대 그런 적 없어요..”
손사래를 치며 둘러대는 자식 놈에게 엄명을 내리셨답니다.
“ 애비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을 하지마라! 알겠니? ”
설날을 그렇게 보냈지요.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친구들과 어울려 썰매를 타러 얼음이 언 논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뒹굴고 논둑에 마른풀과 나뭇가지를 주워서 불을 피워놓고
시린 발을 녹이려 고무신을 벗고 들이대는 바람에 나이론 양말 발바닥이 녹아버려서 설빔으로 받은 아버지의 선물을 쓸모없이 만들어 버리기도 했지요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추억은 가슴에 남아 눈감으면 어린 시절의 그 모습으로 변하여 꿈의 나라를 나는 요정이 되어갑니다.
청년시절... 지옥 같은 귀향전쟁이 시작이 되면 서울의 귀향길은 기차와 시외버스 밖에는 탈거리가 없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차를 해야만 하는 고달픈 귀향이었지만 누구하나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을 가는 즐거움에 부모형제를 보는 기대에 차서 그들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고향으로 향했답니다.
기차를 타기 위하여 몰려드는 귀향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며 표를 구하여 먼저 승차를 하려는 인파를 정리하는 서울역이나 청량리역의 관계자들은 앞에 먼저 서려는 사람들을 줄을 맞춰서 순서를 기다리게 하고 일어서서 새치기를 하는 사람을 막기 위하여
긴 장대를 양쪽에서 잡고 앞에서 뒤로 쓸어내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요. 어찌 어찌하여 열차를 타고 고향 역에 내리면 그 다음 부터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는 일이 녹녹치 않았습니다.
그 버스를 놓치면 집으로 갈 수가 없기에 기를 쓰고 밀쳐내는 차장의 궁둥이를 마주치며 밀고 들어가 마치 발이 허공에 떠오르듯 사람들의 틈에 끼어서 출발을 하지요 그러면 버스기사가 재치 있게 정리를 합니다.
붕..하고 차를 몰았다가 갑자기 부레이크를 잡고 다시 얼른 차를 몰아가지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고 나면 마치 콩나물이 제자리에 차분히 서 있듯이 승객들은 나름대로의 제 위치를 찾아서 숨소리를 죽입니다.
그 와중에 소매치기를 당하여도 모르고 있다가 차에서 내리고 나면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휘저어 보지만 이미 버스는 저 멀리 먼지를 풍기며 떠나 버립니다.
어느 해... 고향에 들어가는 막차를 놓치고 나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최대한 고향동네와 가까운 곳 까지 이동을 하여서는 겨울밤길 50리(20km)를 걸어서 도착을 했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래도 힘듬도 피곤함도 모르고 룰루랄라 양손에 부모님의 선물을 들고는 해발 600고지의 산길을 걸으며, 부엉이 부엉 부엉 울어대고 노루의 울음소리 처량하게 짖어대도 무서움 없이 걸었지요.
오직 고향을 찾는 이유로.. 부모형제들을 만난다는 기대감과 행복감에 젖어서 사방이 하얀 눈으로 덮인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개울에도 빠지고 논둑에 뒹굴면서 찾은 고향이 지금도 가고 싶습니다.
추억이 피어오르는 설날 그리움이 송글 송글 샘솟는 그 시절...
지금의 아이들은 무엇을 그리워하며 옛일을 회상할까.. 흙 내음이 풍기는 푸근한 정서를 쌓아 자연이 내게 숨쉬어지고 삶을 가꾸고 이루어 가는 고달픈 과정의 성취감을 느끼며 행복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며 행복이 아닐까...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우렁찬 울음을 울렸듯이 나는 삶을 새로 이어가면서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행복의 울음을 토해낼 수 있을까
누구나 그러했듯이 우리는 시대적 아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나를 이루어 세웠지요 새 생명을 부여 받아서 숨을 고르는 우리의 새로운 나이가 얼마가 되었건 우리는 이 해에 맞는 이 설날이 뜻 깊은 명절이 될 것입니다
설날을 맞아 내 인생길에 시점이 되었던 <고향>이 그리워서 내게 소중한 생명을 주신 어머니 아버지가 그리워서 < 回想 > 의 나래를 펴고 꿈속을 날고 있습니다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만사형통을 바라며 설날의 이야기를 맺습니다 건강 하세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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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아름다움이 서리 서리 얼키고 설킨
그러나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등에 언고 이 글을 읽었습니다. 몇일 지나면 설이군요.
묵향님께서도 고은 한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 시절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까요?
우리들만의 추억이며 기억 속에서
그리움을 그려내며 아린가슴을 쓸어
내립니다
세월을 따라 시대도 변했지만
설날은 변하지 않고 다가오네요^^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차례를 올리고
부모님을 그리고 조상을 생각하며
우리 같이 즐거운 명절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