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문학회 평창문예대학
나눔 마당 - 名詩 ‧ 名文 감상
제 14 호(2015. 07. 08.)
동전 구멍으로 내다본 세상 / 유 혜 자
차르륵 차르륵, 숙모님이 지나갈 적마다 허리춤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큰 집안의 며느리였던 숙모님이 할머니에게서 살림의 주도권을 인계받아 열쇠 꾸러미를 차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곡식과 연장을 넣어두는 광 열쇠, 몇 가마니 들이의 뒤주, 그 밖에 장롱이며 벽장 등의 것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니셨다.
어느 날 그 열쇠꾸러미에서 시커멓고 구멍이 뚫린 동그란 쇠붙이를 발견했다. 녹이 슬고 닳아서 글씨는 분명치 않았지만 가운데에 사각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이 조선왕조 때 쓰던 돈인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것은 후에야 알았다.
첩첩 산골에서 태어나 50리나 되는 장 구경 한 번도 못하고 새댁이 어려서부터 돈이라는 걸 꾸러미로 만들어 숨겨온 줄은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나 아무도 몰랐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로 넘어갈 때 어머니 생각이 나면 새댁은 동전을 꺼내보고 위안을 받았다. 계룡산 줄기 몇십 리를 뻗은 산길을 지나 둥우리처럼 아늑하던 마을, 햅쌀을 찧는 디딜방아 울려오던 그 친정 뒤란이 생각이 날 때 동전꾸러미는 향수를 달래는 노리개가 되기도 했다.
시퍼렇던 모과에 노란 물이 들고, 풍년이 와서 오랜만에 사랑방에서 시아버님의 질퍽한 웃음이 울려 나오던 날, 새댁은 논을 더 장만할 돈이 될까 하고 시아버님 앞에 내놓고 싶었어도 꾹 참았다.
흰 테 두른 까만 모자와 금빛 단추의 학생복을 입은 맵시 있는 서방님은 방학에나 만날 수 있었다. 서방님이 경성(서울)에서 내려오면 예쁘게 보이려고 방물장수의 보따리에서 금박댕기, 칠보 비녀를 탐냈다가도 감춰둔 돈을 더욱 요긴한 데 쓰려고 도로 놓곤 했다.
겨울밤, 잠이 안 오면 장롱 깊숙이 손을 넣어 손끝으로만 동전을 세어 보았다. 12냥만 가지면 서방님이 공부하고 있는 3백 리 경성에 갈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이면서….
그러나 여름방학에 경성에서 온 서방님의 표정은 겨울밤 장롱 속에서 느끼던 동전의 감촉보다도 서먹하고 차가웠다. 방물장수 아주머니에게서 박가분이라도 사뒀다가 바를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며 빡빡 깎은 서방님의 뒤통수를 보니 더욱 애티가 나지 않는가? 자신의 쪽 진 머리가 그날따라 뒤퉁스러운 느낌이었다.
사랑방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치는 야학(夜學)인가 한다고 학생 서방님이 돌아오지 않는 밤, 목이 타게 기다리노라면 먼 논에선 끄악끄악 하고 개구리가 울곤 했다. 야학만 쫓아다니다가 경성으로 가버린 서방님을 원망할 겨를도 없이 일에 파묻힌 새댁은 가을도 쉽게 보내버렸다.
겨울방학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서방님, 한밤 내 등잔불이 버선볼 받는 손목은 비춰주었지만 새댁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줄 줄은 몰랐다. 고독은 한 알의 굵은 의지로 여물어 밤이면 손이 부르트도록 물레를 잤게 했고 베틀을 매어 부지런히 베를 짜게 했다.
구멍 뚫린 동전, 그 텅 빈 것처럼 마음이 허했고 실팍한 손자를 보고 싶어 하는 시아버님의 바람이 자신에게도 절실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이뤄지지 않았다. 옥양목같이 바랜 염원은 동전처럼 뚫린 마음의 공간 속을 들락거리기만 했다.
겨울의 기나긴 밤, 문풍지에 불던 바람은 마을을 하나 넘고 들을 건너가기도 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길, 웅얼웅얼 아이를 달래듯이 북을 이쪽저쪽으로 보내며 마음에 무늬를 놓듯이 베를 짜는 밤도 있었다.
은실과 금실이 쏟아지는 것 같은 신록의 버들가지를 헤치며 장 구경을 나간 새댁은 현란한 자연과 장터의 물건들에 눈이 부셨다. 빛살 속의 시냇물을 맨발로 건널 때 마음까지 시원하게 트이는 듯했고 잠든 귀를 깨우는 수많은 사람의 화사한 웃음소리, 옷감 전의 비단들은 오색무늬로 아른거려서 장롱 속에 두고 온 돈 꾸러미가 아쉽기도 했다. 희한한 세상도 있구나. 집집이 유리창이 번쩍이고 그릇 전의 매끈하고 아담한 사기그릇들, 고무신 가게에 쌓인 신발들이며 잡화상에 진열된 오밀조밀한 물건들.
그뿐이 아니었다. 이상한 옷차림을 펄럭이는 왜놈들이 가마 아닌 인력거에서 내리는 것을 보곤 비실비실 도망쳐 버렸다. 낮 동안 장 구경한 것을 떠올리다 잠이 든 새댁의 꿈길엔 더욱 화려한 것이 어른거렸다.
2년 만에 여름방학에 온 서방님은 몹시도 우울해 보였다. 시아버님께서 흉년으로 학비를 못 보내셔서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던 때문이었다. 등잔불도 몹시 가물거리는 밤, 오랜만에 서방님과 마주 앉은 새댁은 등잔 심지보다도 더욱 팔락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서방님 앞에 아껴 둔 동전 꾸러미를 내밀었다.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는 서방님에게 학비를 보태라고 했을 때 그토록 냉랭하던 서방님이 폭소를 터트렸다.
“쯧쯧, 당신은 우물 안 개구리만도 못해. 그래 동전 구멍으로나 세상을 내다보고 어리석게 살고 있으니….”
뜻도 모를 말을 하며 소중한 동전 꾸러미를 휙 밀쳐버릴 때 새댁의 눈에선 참았던 눈물이 솟구쳤고, 저문 날 외진 길 돌아가는 외기러기의 슬픈 운명을 절감했다.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모아서 남몰래 간직했던 동전들이 오래전에 시대가 바뀌어 쓸모없어진 것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아온 세월. 먼 산 불타는 노을에 고개를 넘어올까 기다리던 서방님이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떠난 줄도 모르고 가슴에 빗장 지른 세월 지내는 동안 새댁은 조금씩 눈이 뜨여갔고 살림을 주도하는 마님이 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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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자(1940~ ) 충남 논산 강경 출신. 세종대 국문과, 동국대 국문과 · 동 대학원을 졸업. MBC 라디오 부국장 대우 프로듀서,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등 역임. 〈수필문학〉 ´청개구리의 변명´으로 데뷔.. 수필집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거울 속의 손님』, 『세월의 옆모습』, 『어머니의 산울림』, 『절반은 그리움 절반은 바람』, 『자유의 금빛 날개』, 음악에세이 『음악의 숲에서』, 『차 한 잔의 음악읽기』, 『음악의 정원』, 수필선집 『꿈꾸는 우체통』, 『종소리』, 『시간의 대장장이』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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