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찾기(서울 선릉과 정릉)
◇ 선릉(宣陵) : 강남구 삼성동 135번지 4호(사적 199호)
- 조선 초의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를 모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왕릉이 세 개가 있다 하여 ‘삼릉공원(三陵公園)’으로 불리는 이곳에는 조선왕조 제9대 성종과 그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의 능인 선릉(宣陵)과 제11대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 있다.
선 · 정릉은 약 7만여 평의 면적에 송림과 잡목이 들어 서 있으며, 서울시는 이곳을 시민의 휴식처로 하기 위해 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선릉(宣陵)이 위치하는데 홍살문과 정자각 건너 멀리 보이는 봉분이 성종의 능이고, 동쪽 언덕에 있는 봉분이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성종은 추존왕(追尊王) 덕종(德宗)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다. 왕비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의(淑儀) 윤씨를 왕비로 삼았다가 1479년에 폐위하고, 계비(繼妃)로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맞았다. 숙의 윤씨는 3년 뒤에 사사(賜死)하였는데 이 사건은 뒤에 연산군 때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므로 성종은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대비(貞憙大妃)의 수렴청정을 거쳐 20세가 된 1476년부터 직접 정치를 하였다. 성종의 재위 기간에는 국가의 통치체제 기반이 완성되었다.
우선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 오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몇 차례의 증보를 거쳐 1485년에 완성하여 이를 반포하였고, 1492년에는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하여 통치의 기본이 되는 법이 완비되었다. 1470년에는 세조 때의 직전제(職田制) 실시에 이어 국가가 경작자로부터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한편 성종은 엄격한 배불정책(排佛政策)을 펴는 한편 유학을 장려하여 1475년에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연구를 후원하였다.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주어 관학을 진흥시켰고, 홍문관을 확충하는 동시에 독서당을 설치하였다. 편찬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많은 서적을 간행하게 하였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勳舊勢力)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士林勢力)을 등용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 시기의 사림의 정계 진출은 이후 사림 정치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국방에서는 1479년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 건너의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許琮)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일대의 야인을 정벌하였다.
왕비 정현왕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호(壕)의 딸로서, 1473년(성종 4)에 선입대내(選入大內)하여 1480년(성종 11)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현왕후 윤씨는 중종과 신숙공주(愼淑公主)를 낳고 1530년(중종 25)에 69세로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원(園) · 능(陵)은 석실(石室)이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사대석[莎臺石,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
는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성종의 능은 석실을, 정현왕후의 능은 병풍석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선릉은 정릉과 함께 왜군에 의해 파 헤쳐져 도굴되었다.
선릉에 세워진 석인(石人)의 얼굴은 사실적이나 몸은 기둥 같고, 얼굴이 몸과 비교하면 커져서 퇴화한 양식을 보인다. 우선 문인석의 신장은 3m 내외로 성종 · 정현왕후릉과 크기가 비슷하여 안면은 중후 감을 주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동체(胴體)와 비교하면 비율은 맞지 않고, 사각주(四角柱)에서 가공한 조각품이라는 느낌이 든다.
무인석은 전체 길이 290㎝로 안구(眼球)를 중심으로 한 안면이라 생각되는데 한국인과는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 상이다. 갑옷은 전체적으로 솟을 고리 문이며, 흉부 가운데 대(帶)까지 3개의 연주문으로 할개식(割開式)으로 되어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상태에서 칼을 집고 있으며, 귀면문(鬼面紋)은 복부와 칼 손잡이, 양어깨에 시문 되었다.
칼의 길이는 149㎝, 칼집의 길이는 127㎝로 소매 아래에서 끈 2개가 내려와 칼집을 고정하되 끝에는 술을 달아 실물을 보는 것 같이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 정릉(靖陵) : 강남구 삼성동 135번지 4호(사적 제199호)
- 조선 초의 제11대 중종을 모신 왕릉
선릉을 뒤로하고, 동산 모습을 갖춘 언덕을 넘으면 사적으로 지정된 조선조 중종(中宗)의 능인 정릉(靖陵)이 고요함 속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중종은 현재 서삼릉 내의 제1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묻힌 곳에 합장을 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7년 뒤에 권력을 장악한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풍수상 수파(水破)가 불길한 자리에 선왕을 모실 수 없다 하여 1562년(명종 17) 9월에 중종을 삼성동, 현 위치로 천장(遷葬)하였다.
그러나 이는 문정왕후가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천장한 것으로 보인다. 중종의 능을 천장하고 난 후에 이곳의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에는 재실(齋室)까지 강물이 들어 보토(補土)하기에 큰 비용을 들였으므로 능 터를 다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현재의 태릉(泰陵)에 결국 단릉(單陵)으로 장례를 지내게 되었다. 이로써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 · 장경왕후 윤씨 · 문정왕후 윤씨 등 세 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홀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이 능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선릉과 함께 파헤쳐진 변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중종은 1488년(성종 19)에 탄생하여 진성대군(晋城大君)으로 봉해졌는데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반정(反正)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중종은 재위 중에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선비를 등용하여 혁신정치를 도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기묘사화 등이 일어났다. 중종은 재위 39년인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릉을 수호하는 절은 보우(普雨)가 주지로 있었던 봉은사(奉恩寺)였다. 이 절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창건하였던 것을 1498년(연산군 4)에 중창하여 봉은사라고 개칭하였다.
정릉의 시설은 국조오례의에 준했으므로, 옆의 선릉과 비슷하며, 구름무늬의 12지(支) 신상(神像)이 새겨진 병풍석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능의 왼쪽 등성이 부근에 도로를 내고, 인근에 주택이 밀집한 관계로 원래 모습은 파괴된 느낌이 든다.
정릉에 세워진 문인석은 전체적으로 선릉과 거의 비슷하여 안면이 약간 두툼해 보이고, 양어깨가 풍성하게 보이지만 목은 그대로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다. 체구와 비교하면 얼굴은 지나치게 크게 표현되었다. 몸 전체는 각주(角柱)에다 조각을 조금 가한 것 같이 보이며, 홀(笏)을 쥐고 있는 양손이 일직선으로 되어있어 포(袍)의 입체감을 전혀 나타내지 않은 도식화한 의습(衣褶)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무인석의 투구에는 상모(象毛)가 있으며 홍모(紅毛)를 묶은 상태에서 뒤로 넘겨 꼬불꼬불한 곡선을 이루었다. 양어깨는 머리 부분보다 아주 좁은 평면 형태에서 귀신 문양이 있다. 옆에서 보면 안면은 약간 뒤로 젖힌 모습이다.
칼은 양손으로 귀신 무늬의 부위 손잡이를 잡고 있으며, 칼집은 45도의 각도로 조각된 것으로 늑갑에서 내려온 2개의 매듭에서 칼집 고리를 연결하였고, 그 뒤로 술이 달린 끈까지 섬세하게 나타내었다.
◇ 봉은역사공원(奉恩歷史公園) : 강남구 삼성동 75에 있는 사적공원.
- 1988년에 봉은사를 중심으로 한 근린공원
봉은역사공원 안에 봉은사(奉恩寺)가 자리를 잡고 있다. 1971년 8월 7일 도시계획시설 중 공원으로 결정된 후 1988년 5월 1일에 공원으로 개장하였다. 1971년에 ‘봉은 근린공원’으로 불리다가 2009년에 ‘봉은역사공원’으로 바뀌었다. 이 공원의 공간 구성은 사찰 권역과 공원 권역으로 구분된다
봉은사 사찰 경내에서 수도산과 연결된 산책로는 근린공원의 역할을 한다. 공원 시설로는 그늘 시렁 1개소·테니스장 1개소·배드민턴장 4개소·체력 단련 시설 21종·벤치 11조가 설치되어 있다. 공원 내 수목은 키 큰 대형 목이 다수 현존하여 도심지 내 풍부한 녹음을 제공하고 있다.
◇ 봉은사(奉恩寺) : 강남구 삼성동 73번지[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4호 선불당(選佛堂), 유형문화재 제83호 판전(版殿)]
- 통일신라 때 연회대사가 세운 이 사찰은 조선 초에 선릉(宣陵)의 원찰로 됨
수도산(修道山) 아래 조계종의 봉은사(奉恩寺)는 794년(신라 제38대 원성왕 10) 7월에 당시 왕이 국사(國師)로 모시던 연회대사(緣會大師)가 세웠는데 원래의 명칭은 견성사(見性寺)였다고 전해진다.
본래 이 절은 현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1㎞ 거리의 선릉(宣陵)의 동쪽에 있었다. 조선초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가 선릉(宣陵)을 수호하기 위하여 중창(重創)하고, 봉은사라 명명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봉은사는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경기도 일원의 80여 사찰을 관장하던 본사(本寺)였다. 조선시대 1551년(명종 6)에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로 한국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찰이다.
그런데 1562년(명종 17)에 조선 제11대 중종의 정릉(靖陵)을 서삼릉에서 봉은사 자리로 이장함에 따라 이 절도 그 해에 당시 중 보우(普雨 : 1509~1565)가 선릉 동쪽에서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에 이 절은 모두 타 버린 것을 1637년(인조 15)에 선화(禪華) 경림(敬林)스님이 중건하였다. 그 후 1692년(숙종 18)에 왕실에서 다시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많은 사찰이 철폐 또는 위축되었지만 이 봉은사 만은 왕실의 후한 보호를 받았다.
봉은사는 고려 현종 때 고승인 법경왕사(法鏡王師)를 비롯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사명대사 유정(惟政) 그리고 벽암(碧岩), 청호, 한암선사(禪師) 등의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봉은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보우(普雨)는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에 출가하여 장안사 · 표훈사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보우는 1548(명종 3)에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이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선교 양종(禪敎 兩宗)을 부활시키고, 선종 판사(禪宗判師)가 되어 도첩제(度牒制)와 승과제도(僧科制度)를 실시하는 외에 300여 사찰을 국가에서 공인한 절로 하였다.
승려를 뽑는 승과(僧科)가 설치됨으로써 봉은사 앞, 지금의 종합전시장인 ‘코엑스(COEX)’ 부근을 ‘중의 벌’ 또는 승과평(僧科坪)이라고 불렀다. 이는 이 벌판을 과장(科場)으로 하여 1552년(명종 7) 8월에 승과를 실시하자 응시한 승려가 수천 명이었다. 그중의 400명을 뽑아 도첩(度牒)을 주었으므로 이 뒤부터 이곳을 ‘중의 벌’ 또는 승과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보우는 1555년(명종 10)에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사에 머물다가 1560년(명종 15)에 다시 선종 판사와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후에 도대선(都大禪)에 올랐다.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죽자 잇따른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와 유림의 기세에 밀려 보우는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귀양을 가자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게 피살되었다.
1911년에 이 절은 경기도 선종의 대본산이 되어 광주군 등 8개 군의 77개 사암(寺庵)을 관할하였고, 일본 강점기 때인 1912년에 청호(晴湖) 학밀(學密) 스님이 새롭게 중수하였다. 1939년에 다시 화재로 타 버리자 1941년에 일초(日初) 태욱(泰旭) 스님이 중창(重創),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 후에는 조계종 총무원의 직할 사찰이 되고, 1972년부터는 동국역경원의 역장(譯場)이 되었다.
봉은사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된 선불당(選佛堂)이 있다. 이 선불당은 대웅전 한단 아래 왼쪽에 자리 잡은 일종의 대중 선방(禪房)으로 규모가 큰 19세기의 목조건물이다.
선불당은 승과를 실시하던 곳으로 현재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 당시 승과를 통하여 서산대사 휴정(休靜), 사명대사 유정(惟政)도 이곳에서 등과하였다 한다. 정면 8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집으로 초익공(初翼工) 양식을 이루고 있는데, 팔작지붕 네 곳에 작은 합각(合閣)을 이루고 있음이 특이하다.
또한, 이 절에는 1992년 12월 31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1786~1856) 글씨의 ‘판전(版殿)’이 있다. 이 판전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으로 유명하며 추사의 노숙한 신필(神筆)의 경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판전 안에는 81권의 화엄경 목판을 위시하여 13가지의 경판 3,794판이 남아 있어서 경전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곳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된 대방광불 화엄경 수소연의(大方廣佛華嚴經 隨疏演義) 초판 3, 175점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1856(철종 7)에 유명한 남호영기(南湖永奇)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영기(永奇)스님이 조성(雕成)한 화엄경 소초 80권 판본과 금강경(金剛經), 유마경(維摩經), 한산시(寒山詩), 염주경(念珠經),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불족인(佛足印) 등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대웅전 현판도 김정희의 글씨이고, 다락 누문(樓門)의 ‘대도량[大道場]’이란 현판은 3․1운동 때 33인의 한 분인 위창(韋滄) 오세창(吳世昌)선생의 휘호이다.
이 절 내에는 법왕루(法王樓), 북극보전(北極寶殿), 천왕문(天王門), 일주문(一柱門) 등이 있으며, 보물 321호로 지정된 ‘지정 4년 재명 고려 청동루 은향로(至正四年在銘高麗靑銅縷銀香爐)’ 1 좌(坐)가 있었다. 이 향로는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사용하던 것이며, 지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현재는 고려대장경 목판본(木板本)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1996년 1월 7일에 봉안된 미륵 대불이 유명하다. 봉은사의 10년 숙원사업이었던 이 미륵 대불은 높이 23m로서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관촉사의 은진미륵보다 5m 정도 높다.
이 절의 석조물로는 1975년에 건립한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으며, 이보다 1년 전에 청동 500관, 지은(地銀) 1관으로 주조한 범종이 있다.
한편 이 절에서는 윤달마다 수륙재(水陸齋)를 행하고 있다. 이는 병자호란 때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옮겨 갈 때 도성의 피난민들이 배를 타려다가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인조가 환도한 뒤에 그때 숨진 영혼들을 달래고자 매년 이 날이면 이 절에서 수륙재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이 절 일주문 안에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708명의 목숨을 구한 나청호(羅晴湖) 주지 스님의 「수해구제공덕비」가 1929년에 세워졌다.
나청호 스님은 1925년에 잠실, 신천, 부리도 주민들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느티나무에 피신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들을 구조하면 상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몇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몰아 신천리에 가서 수재민들을 구조해 왔다. 주민들이 피신해 있던 그 느티나무는 몇 분 후에 물살에 떠내려갔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