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건축사는 변리사, 관세사, 감정평가사 등과 함께 ‘고소득 전문직종’에 추가됐다. 고소득 전문직종은 변호사, 의사 등 말 그대로 월 소득이 높아국세청에서 특별히 소득과 세금 납부를 관리할 정도로 공인된 ‘부자’들이다. ‘공인 부자’들 틈에 건축사가 새로 포함됐다는 것은 그만큼 건축사들의 대내외적인 위상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건축사 업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소득 전문직종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건축사 경력 12년의 K씨는 “허울 좋은 감투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며 “고소득 직종 편입은 딴 나라 얘기”라고 토로한다. K씨는 “실제 요즘 들어 국세나 지방세와 같은 세금을 내지 못해 영업 중단 위기에 몰린 건축사들도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고소득 전문직’과 ‘세금 체납’은 현재 건축사 업계에 엄연히 공존(共存)하고 있는 사실이다. 건축사 업계 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쉽사리 억대 수입을 올리는 건축사들이 있는 반면 연 5000만원 벌기도빠듯한 건축사도 많다. 김형진 가이아도시건축 사장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계속 심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한다. 김 사장은 “80대 20 법칙이건축사 업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며 “개인 건축사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불황 체감도가 훨씬 높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양 극단을 제외한 보통 건축사들의 현실은 어떨까. 분위기를 종합해보면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2004년 국세청에서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건축사들의 1인당 평균 매출액은 1억1522만원.그러나 이는 건축사 활동을 위한 제반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이기 때문에실제 소득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게 건축사들의 주장이다. 이중식 진아건축도시종합건축 이사는 “일반인과 같은 연봉 기준으로는 6000만~800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반 샐러리맨 기준으로는 분명많은 수입이지만 왠지 ‘고소득 전문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더욱이 과거 쉽게 억대 수입도 가능했던 터라 현재 상대적으로 느끼는 불황의 골은 더욱깊다.
■저가 덤핑 경쟁 만연■이렇게 평균적인 건축사들의 수입이 감소한 이유는 수급논리에 숨어 있다. 건축사 주요 업무 영역인 설계 부문에 대한 수요는 기업들의 투자 위축과 건설경기 침체로 급격히 줄어든 반면 건축사들 공급은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실제건축사는 96년 9200여명에서 2003년에는 1만5000여명을 넘어섰다. 90년대 중반이후 정부가 건축사 면허 자격자를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공급이 수요를 웃돌다 보니 자연스레 건축 설계에 대한 가격은 떨어지고 저가 덤핑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K사장은 “대형사는 대형사대로, 개인 사무실은 개인 사무실대로 경쟁을 벌이다 보니 설계 대가 금액이 출혈 경쟁으로까지 번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WTO 시장 개방에 따른 건축 서비스업 개방과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설계 대가기준 폐지 문제도 건축사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실제 설계 대가 기준이폐지될 경우, 최근의 저가 수주경쟁 상황을 고려하면 대가 보수 하향 조정이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실제 건축사들 모임인 대한건축사협회는 “설계 대가 기준 폐지는 건축사 생존권과도 직결된 문제인 만큼 (실력행사를 포함해) 적극적으로 대응해가겠다”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위기를 타개해 나갈 건축사들의 생존비법은 뭘까. 이효추 명승건축사장은 ‘전문화’와 ‘대형화’를 꼽는다. 특히 개인 건축사무소들의 입지가계속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대형화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 이 사장은“건축사 자격증 취득 후 개인 사무실 개업은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라며“개인 사업자가 아니라 샐러리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화와 사업영역 다각화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기업들의 업무 시설 투자가 줄어든 상황에서 의료시설, 고급 주택에 대한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신사업 부문에 특화한 건축사무소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 건축 설계, 감리라는 건축사 영역에서 탈피해 부동산 개발, 리모델링 등 연관 산업으로 영역을확장해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해 가는 곳도 있다. 건축사 노하우가 충분히 경쟁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 실제 수목건축사무소는 부동산 개발과 리모델링 부문에 진출해 건축사 영역을 한 단계 넓혔다.
■해외시장 개척도 대안■해외 시장 개척은 이미 대규모 건설 붐이 한 풀 꺾인 내수 시장 침체를 대신할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건축사들의 경쟁력도 충분하기 때문에우리나라와 인접한 신흥시장 진출을 통해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낼 수 있다. 실제 젊은 건축사들을 중심으로 베트남, 중국, 말레이시아 등 인접 국가 진출을적극 추진하고 있다. 정영균 희림종합건축 사장은 “도시화, 산업화가 빠르게진행되고 있어 일감이 풍부할 뿐 아니라 비용 대비 수익성도 충분해 건축사들의 새로운 수익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대형화’를 통한 건축 사무소의 마케팅 능력 강화, 설계능력 선진화가 선행조건이다.
<정광재 / 김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