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만족도 1위' 판사… 옛날에는 누가 했을까
조선시대의 사법제도
지방은 사또가 민·형사 재판 맡아… 억울한 판결 받으면 관찰사에 상고
반역죄인은 의금부에서 왕이 재판, 상고심·중요 범죄는 형조가 나서
재산 다툼은 한성부가 판결 내렸죠
2017년 고용정보원에서 국내 621개 직업에서 일하는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직업만족도 조사를 시행한 결과를 발표하였어요. 직업의 발전 가능성과 급여, 근무 환경, 사회적 평판, 일에 대한 만족도 등을 따졌는데 판사가 가장 만족도가 높은 직업으로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자녀에게 권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에서도 판사는 초등학교 교장·교감 선생님과 함께 높은 점수를 보였어요.
판사는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논쟁과 증인의 진술, 여러 증거 등을 검토해 판결을 내리는 일을 합니다. 지금처럼 법원이 없던 옛날에는 어디서 재판이 열리고 누가 판사 역할을 하였을까요?
◇ 이몽룡이 춘향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이나 고전을 보면 고을을 다스리는 사또(수령)가 죄인을 심문하고 벌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또는 조선시대에 지방을 다스리도록 파견된 관리로 사람 사이의 시비를 가르는 민사 재판이나 가벼운 형사 재판을 맡아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태형 이하의 벌을 주기도 하였어요. 오늘날 지방법원 판사의 역할을 사또가 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따라서 바른 판결을 내리는 것은 사또가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춘향전에 나오는 변학도처럼 죄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벌을 내리는 엉터리 사또도 있었지요. 이런 사또를 만나 억울한 판결을 받은 백성은 어떻게 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억울한 판결을 받은 백성이 사또보다 높은 관찰사나 암행어사, 중앙기관인 사헌부에 상고(上告·판결에 불복하여 더 높은 기관에 판결의 재심사를 신청)할 수 있었어요. 이몽룡이 춘향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사또보다 높은 암행어사가 되어 다시 재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살인죄 등 중대 범죄에 연루된 경우에는 세 번 재판을 받게 하는 삼심제가 운영되었고요.
◇ 형조와 의금부에서 열린 재판
사극이나 고전에서는 의금부에서 죄인을 재판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반역죄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의금부에서 심문과 재판을 하였는데, 이때는 왕이 직접 판관이 되어 죄인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렸어요.
하지만 조선시대 법률과 소송에 관한 업무를 중심적으로 맡은 곳은 의금부가 아닌 형조였습니다. 오늘날 법무부와 법원의 역할을 동시에 맡은 것으로 볼 수 있지요. 형조는 지방에서 열리는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지 감독하고, 다른 행정기관이 법을 잘 지키는지도 감시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상고심이나 살인죄 등 큰 범죄의 재판도 형조가 맡았는데, 이때는 형조 관리들이 판사와 비슷한 역할을 맡아 죄인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렸어요. 물론 판결을 내리기 전에는 임금에게 죄인의 죄목과 형벌 정도를 아뢰어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최종 판결 권한은 임금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입법·사법·행정 권한이 나누어져 있지만, 옛날 왕들은 세 권한을 모두 쥐고 있었어요.
오늘날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에서는 재산과 관련된 재판이 열렸어요. 주로 호적이나 부동산에 관한 소송을 맡았는데 태종 때에는 가벼운 범죄에 관한 재판을 맡기도 했습니다.
◇ 율학청과 형조낭청놀이
상고심을 맡는 형조에서는 공정한 재판과 판결을 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형조 관리들이 올바른 재판과 판결을 하도록 가르치는 '율학청'이라는 기관이 있었어요. 종6품 벼슬인 율학(법학) 교수가 형조 관리를 모아 법전 운영과 법률에 관한 지식을 교육하는 곳이었지요. 태조 이성계가 "형벌은 사람의 삶과 죽음이 달렸으니 중요하게 여기고 삼가서 행해야 하는 만큼 법률을 따로 교육하는 기관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율학청을 운영하도록 하였어요. 오늘날 사법연수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판결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도 있었나 봐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종 때 여러 신하가 "재판을 맡은 관리들이 뇌물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고 비판하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세조 때에는 광대가 형조의 재판이 공정하지 않음을 비꼬는 놀이를 하자 이를 본 신하들이 재판 과정을 바꾸자고 임금에게 아뢰었던 기록도 있고요.
이 무렵 임금 앞에서 광대가 형조를 비꼬는 놀이를 가리켜 '형조낭청놀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낭청'이란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를 뜻합니다. 형조낭청놀이가 성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형조의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백성의 원망이 컸음을 알 수 있어요.
[고려 사법제도와 삼원신수법]
고려 때는 '형관'에서 여러 법률 업무와 재판, 상고심 등을 맡았어요. 도읍지 개성에서는 '개성부윤'이라는 관리가 개성의 민사 재판을 담당하였고요. 지방에서는 수령들이 민·형사 1심 재판을 맡고 그보다 높은 안염사·관찰사가 형사 2심 재판을, 각 도로 파견된 안무사(순무사)·염문사 등이 민사 2심 재판을 맡도록 했어요.
고려 문종 때인 1062년부터는 죄수를 심문·재판할 때 반드시 형관(판관) 3명 이상이 참여하도록 하는 삼원신수법이 생겨났어요. 여러 명의 판관이 재판에 참여해 더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판결을 내리라는 취지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