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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1
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빛에 대한 것도 소금에 대한 말씀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질적 의미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본문이 말씀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문맥을 무시하고 빛의 역할에 대하여 상상한 해석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본문은 ‘빛이 어떤 대상물을 비추어야 한다는 역할’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가 빛이 나기 때문에 그 빛이 드러나 보이는 존재’에 대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빛의 역할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빛의 본질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절). 예수님은 빛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빛이라는 존재는 캄캄한 세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남으로 어두움이 숨겨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그다음 15절 역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라고 하여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는 것은 빛이라는 존재는 모든 대상물에게 보이도록 드러난다는 점을 말씀한다. 마가복음 4:21-22, 누가복음 8:16-17에서도 같은 관점에서 전하였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13절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에서 ‘게’라는 단어와는 달리 ‘질서, 꾸밈, 장식, 세계, 세상’이라는 뜻의 ‘코스모스’로 썼다. 13절의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였다면 14절에서 질서가 있는 세상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란 하나의 짝을 이루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이란 헬라어로 ‘포스’인데 ‘빛, 햇빛, 횃불, 불빛, 시각, 새벽’이라는 뜻이다. 70인역에서 ‘오르’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성경에서 ‘오르’가 처음 나타나는 본문이 첫째 날의 창조이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빛을 만드셨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대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빛을 창조하심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창조 언약이다.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빛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빛을 생명이라고 선언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어둠을 인격적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어둠이라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을 전제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여기서 “따르는”이라는 말의 헬라어 ‘아콜루데오’는 ‘함께가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라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함께 하심으로 어둠에서 벗어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가 세상의 빛이다. 성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빛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선언한다.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2-13)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어둠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산 위에 있는 동네”를 ‘예루살렘’으로 보기도 한다(참고 사 2:2-3). 그런데 예루살렘을 지칭한다면 정관사를 붙여 ‘그 산 위에’라고 할 것인데 여기는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다. 즉 일반적으로 산 위에 있는 성읍은 요새화되어 있기에 철저히 감추어져 있는데 때가 되면 다 드러나듯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다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 본다면 죄인이 성전을 중심으로 행하는 율법적 행위가 될 것이고 일반적 의미로 본다면 죄인의 모든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심으로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 인간의 모든 죄악상이 드러나 어둠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5절). “말”이란 헬라어 ‘모디오스’는 약 8리터에 해당하는 계량 그릇이다. 그릇으로 덮어 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누가는 “그릇”(헬, ‘스큐오스’)으로 표현하였다(눅 8:16). 마가는 “말 아래나 평상 아래”(막 4:21)라고 하여 마가나 누가는 “평상”(헬, ‘클리네’ : 침대, 침상)을 추가하였고, 누가는 또 다른 본문에서 “움(헬, ‘크륍테’ : 지하실, 골방, 은밀한 구석, 덮은 길) 속이나 말 아래”(눅 11:33)로 표현하였다.
“등불”은 ‘뤼크노스’로 ‘등불, 빛’이라는 뜻인데 70인역에서 대부분 ‘네르’와 ‘니르’의 역어로 사용되어 기름과 빛을 내도록 불붙이는데 이용되는 심지가 들어있는 작은 사발 모양의 기름등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서 보통 이스라엘 또는 사람의 운명(삼하 21:17)이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시 119:105, 욥 29:3)을 나타낸다.
“등경”의 ‘뤼크니아’ 역시 ‘뤼크노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등잔대, 등대’라는 뜻인데 대체적으로 성전의 등잔대를 지칭한다. 즉 창세기 1:3에서 빛(오르)을 창조하시고 1:14에서 광명체(마오르)를 두심으로 성막의 등잔대(마오르)를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출 27:20). 이런 점에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라는 말씀에서 “집”은 정관사가 붙은 ‘그 집’이다. 즉 성막, 성전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집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막 안의 등잔대에서 비치는 빛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이 빛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집 안 모든 사람”이란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를 지칭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치게 하여”라는 표현이 명령형이다. 즉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명령형도 과거형으로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는 말씀은 명령형이 아니라 동사 가정법으로 ‘~하면’이라는 의미로 표현되었다. 그러니까 ‘착한 행실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빛을 비추는 명령이 이미 이루어졌다면 착한 행실로 아버지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착한”이란 헬라어로 ‘선한, 좋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의 ‘칼로스’이고 “행실”이란 ‘에르곤’으로 ‘일, 행위’라는 뜻이다. 즉 ‘선한 행위’라는 의미이다. 우리 성경에 착한 행실이라고 번역해 놓으니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데 죄인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여기서 말씀한 ‘선한 행위’란 윤리 도덕적인 의미의 착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하셨고(요 3:19-21), 바울 사도도 우리의 행위는 “악한 행실”(골 1:21)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에 우리의 율법적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강조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착한 행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행위뿐이다.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이 되었다(롬 5:18). 십자가로 생명이 주어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33).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대로 행하신 것이라고 한다(딤후 1:9). 결국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함께 죽는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성전 중심의 율법적 행위를 함으로 마치 그릇으로 빛을 덮어 놓은 것과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심으로 율법의 본질적인 것이 온전히 다 드러났다. 그러므로 팔복을 말씀하신 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신 것은 팔복이 된 자의 정체성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합류되었다는 선언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전하였다.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6-7)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는 ‘오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십자가 죽음 안에 하나 되게 하심의 “보배”로 말미암아 “질그릇”으로 묘사된 교회요 성도인 우리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마오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202406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