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선대부 병조참판 (嘉善大夫 兵曹參判), 9世
참판공파 파조는 휘 종신(從信)이고, 원(8世,경질공)의 五남이며 판서공의 넷째 아우이다. 벼슬은 전라도 관찰출척사 (全羅道 觀察出陟使)와 경력소경력(經歷所經歷)을 지냈다. 공께서는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을 추증받으셨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개성왕씨(고려종실 王氏)로,永福君(영복군) 왕격(王격)의 딸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배양리 亥坐에 쌍분(雙墳)으로 모셨다.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3일이다. 슬하에는 1남1녀를 둔 바,아들은 嘉靖大夫 同知敦寧府事인 進(가정대부 동지돈령부사 휘진)이고, 사위는 판제용감(判齎用監)을 지낸 이연기(한산이씨)이다. 돈령부사 진의 배위는 정부인 평양조씨(貞夫人 平壤趙氏)이다. 평양부원군 조대림의 딸이며, 태종대왕의 외손녀이다. 참판공조의 10世孫이며 의성현령과 선산부사를 지낸 18世 순원군 응창공(順原君 應昌公)께서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로 계시다가 봉림대군이 몽고의 볼모가 되어 갈때 함께 가서 온갖 고난을 함께 하셨다
안종신(安從信) 순흥인 참판공파 공주소종
9世 안종신(安從信) *따를 종, 믿을 신
공주종중 直系인 참판공파(參判公派) 파조(派祖)이시다. 6 형제분 이신데 장형(長兄)인 판서공(判書公) 휘(諱) 종약(從約)은 종손(宗孫)으로 계승(繼承)하였고 그 아우 감찰공(監察公) 휘(諱) 종예(從禮), 첨추공(僉樞公) 휘(諱) 종의(從義), 도정공(都正公) 휘(諱) 종염(從廉), 그 다음분이 우리 파조 참판공(參判公) 휘(諱) 종신(從信)할아버님이시다.
또 할아버님의 아우 참의공(參議公) 휘(諱) 종검(從儉) 이렇세 6형제분인 바 각각 분파(分派)하셨다. 따라서 우리 공주(公州) 종중(宗中)은 참판공의 후손(後孫)임으로 차대(此代)부터는 참판공파 계통(系統)을 중심으로 기술(記述)하기로 한다. 할아버님께서는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 *현 도지사*)를 지내시고 경력소(經歷所) 경력(經歷)을 역임(歷任)하셨으며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현 국방차관)에 오르셨다.
9세 참판공(參判公=諱 從信)대에 이르러 분파(分派) 되였는바 이 할아버지는 6형제분 중 다섯째 분임으로 이 대에서 분파(分派)하여 참판공파가 형성이 되고 파조(派祖)가 되셨다.
공주 후손(後孫)은 이 할아버지의 후손임으로 참판공계(參判公系)로 계승하는 소종중이다.
1394년10월에 한양(漢陽=현 서울)으로 천도(遷都) 하게되자 우리 참판공 파조께서는 곧 서울로 이사(移徙)하셔서 15세 감사공(監司公=諱. 宗道= 본인의 14대조)까지 7대 약200년 간 서울에서 삶으셨고 대대로 고관을 지내셨다.
<남양주시지>
제2권 문화재와 인물 | 제2편 성씨와 인물 | 제2장 고려·조선조 인물*
안종신 安從信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고려 말 공양왕 때 형조판서와 지신사(知申事)를 역임하고 조선 건국 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에 다녀오는 등 고려·조선조에 걸쳐 벼슬한 원(瑗)의 아들이다.
공신 또는 당상관의 자손으로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음서로 동반 종4품인 조봉대부 전라도경력에 임명된 뒤 음악에 소질이 있어 장악원에서 관직생활을 하였다. 사후에 아들이 현달하여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묘는 진건면 배양리에 있다.
9世 참판공파 파조(휘 종신從信) 묘
양주군 진건면 배양리(楊州郡 眞乾面 培養里) 구 원풍양 왕숙탄 어은동(舊 原豊壤 王宿灘 漁隱洞) 후산 해좌기향(亥坐己向) 지원에 쌍분(雙墳)으로 모셨다. 1650년 경인춘(庚寅春)에 할아버님의 9대손인 순원군(順原君) 응창(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 광남(墓 壙南)에 묻었다.
1914년 갑인춘(甲寅春)에 16대손 도(濤)가 주관하고 후손(後孫)들이 합력(合力)해서 묘비(墓碑)급 의물(儀物)을 개수수의(改修隧儀=고치거나 다시 만듬)하였다. 할아버님은 이조3대 태종(太宗)과 4대 세종(世宗)조때 조정(朝廷)에서 고위관직을 지내신 분 이 신데 생졸년월(生卒年月)과 행세연도(行世年度)등이 실전된 고로 고증문헌(考證文獻)을 찾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사실(史實)을 알 수 없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매년 음10월3일 세사를 올린다.
부인은 증정부인(贈貞夫人) 고려(高麗)종실(宗室) 왕씨(王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영복군(永福君) 휘(諱) 격(隔)이시고 조부(祖父)는 순안군(順安君) 휘(諱) 방(昉)이시며 증조(曾祖)가 낙낭군(樂浪君) 휘(諱) 수(琇)이시다. 슬하에 1남 진(進)과 1녀를 두셨다.
묘(墓) 쌍분(雙墳)
<子>
안진(安進)
10世 안진(安進) *나아갈 진
할아버님은 이조(李朝)초엽(初葉)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내셨다.
배(配)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이조(李朝) 3대 태종(太宗)왕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즉 태종의서랑(壻郞)이고 세종(世宗)의 매부(妹夫)임)이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강안공(康安公) 조대림(趙大臨)公이시다. 그리고 조부(祖父)는 조선왕국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 평양백(平壤伯)을 역임(歷任)한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公이시다.
從信종신
全羅都觀察黜陟使 經歷所經歷 贈嘉善大夫 兵曹叅判
配 贈貞夫人 高麗宗室 王氏 父 永福君▣ 祖 順安君 昉 曾祖 樂浪君 琇
外祖 監司 南陽洪彛
○墓 楊州 眞乾面 培養里 原豊壤王宿灘漁隱洞 亥坐 雙墳 有表石 九代孫應昌 撰誌
○公及同敦寧公墓碣剝落無以識別迄至 一九一四年甲寅 春改修儀物一切鐫竪兩代碑文印出廣傳諸?以表其蹟
歲祀 十月三日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都觀察黜陟使)와 경력소경력(經歷所經歷)을지내고,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叅判)에 제수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고려종실 왕씨(王氏)로,
부친은 영복군(永福君) 격(▣)이고, 조고는 순안군(順安君)방(昉)이며 증조는 낙랑군(樂浪君)수(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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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 |
왕(王)高麗宗室 永福君 왕격(王?)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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