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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점(頓.漸)오수론(悟修論)에 대한 방외자(放外者)의 견해(1)
이경재/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한국학과 강사
이글은 본지의 특별기획으로 연재되고 있는 현 단계 한국불 교의 중심문제의 하나인 <돈오돈수 돈오점수>에 대한 글들은 읽고 이경재박사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이다. 2회에 걸쳐 소개될 이박사의 글에 독자 여러분의 애독과 투고를 바란다. -편집자 주-
1. 들어가는 말
먼저 나의 견해를 전개하기 전에 밝혀 둘 것이 있다. 나는 불교학자가 아니요 불교학에 그리 조예가 깊은 사람도 아니다. 단순히 한국인으로서 한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불교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갖고 있는 철학자요 종교학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에 얽힌 을 바라보면서 로서 한마디쯤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방외자는 불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자유롭다. 무식이 통통 튀는 말을 하고 있어도 이를 애교로 봐주는 여유를 불자들은 가지고 있을 터이다. 무식은 그렇다 치고라도 방외자는 사물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 볼수 있는 자유를 소유한다. 논쟁의 적 공간 속에서 찌들다 보면 때로는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감옥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그러면 방외자로서 왜 들의 진지한 논쟁에 한가한 훈수를 두려하는가 하고 혹자는 물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불교가 불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한국 문화사의 한 전통에 속한 것 일진대 그 전통을 존중하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써 나는 그 논쟁에 참견할 권리를 당연히 지니고 있다. 그 보다 더욱 중요한 학문적 이유에서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지구촌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한 민족의ㅡ 정치, 경제, 문학 현상이 그 민족의 "닫혀진 언어"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될수도 이해 될 수도 없게 되었다. 이 같은 사정은 학문이나 종교현상 일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한 집단, 그것이 종교집단이든 철학 집단이든 자기들만의 "닫혀진 언어"속에서 고답을 즐기던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종교나 철학은 문화사라는 전체 맥락에서 이해 되어야겠고 문화사는 또한 인류사 내지는 우주사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인류사나 문화사라는 것이 인간의 상징적 행위(Symbolic Action)에 근거한 역사인식이요 종교나 철학이라는 것이 도한 인간의 상징적 행위에 의한 언어적 문화 행위라는 데에서 하나로 수렴되어진다. 곧 근본적인 인간의 상징적 행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자들의 논쟁도 인간의 상징적 행위의 한 단면으로 이해되게 된다. 그런데 그 상징적 행위라는 것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정한 양태나 구조를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러기에 학문이 가능한 것일 터이며 문화비평이나 역사비평이나 종교비평등의 "읽음의 행위"가 가능할 터이다. 종교논쟁이 방외자에게는 차단되어 있는 종교인들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종교의 언어는 인간의 상징적 언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열러진 언어"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방외자는 불자들의 논쟁에 참견할 의무와 권리를 당연히 지니게 된다.
더군다나 요즘 몇 분 학자들의 글을 미주현대불교를 통하여 대하고 보니 뭔가 논쟁의 촛점이 조금 잘못된 듯한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것도 방외자로서 하는 말이니 이해를 구하며 하는 말이다. 학문적 논쟁은 항시 장려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지마는 논쟁이 꼬일 때는 처음의 문제로 다시금 돌아가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전치수씨의 단평은 박성배교수의 답으로 일단은 막을 내렸다 치더라도 김호성씨의 논설은 차(車)와 포(包)가 궁(宮)을 마구 공격하는 대장정의 장기판을 두고 있으나 실상 자기 궁단속을 하지 못하여 에 먹혀 버리는 형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모두의 개념 혼란에서 오는 성 싶다. 혼란의 언어는 바벨의 언어요 흩어짐의 언어라 했던가.
더군다나 전씨가 박교수를 많이 언급하고 잇음으로 훈수 이전에 한마디 덧붙이고 시작하자. 말이 길면 쓸 말이 적다지만 요즘같이 재미없는 세상에서는 긴 말이라도 위로가 될런지 모른다. 박성배교수의 학문 방법은 철저히 전통적이다. 전통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 순차에서의 현대이전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전통적이라는 말은 현대가 상실한 학문의 핵심. 전체적 인간이 되기 위한 이상과 노력을 상실한 현대학문의 몰가치적 경향에 대한 대 부정을 의미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가치를 교환가치와 비교가치에 의해 일괄 처리하고 학문도 그러한 양적 가치관에 의해서만 평가되고 전개되는 데 대하여 박교수는 거부의 몸짓을 하는 것이다.
학(學)은 퇴계에 있어서 성인이 되기 위한 성학(聖學)이었듯이 박교수에 있어서 현대 학문의 양적 과학성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전인이 되기 위한 오(悟)와 수(修)의 문제요 체(體)와 용(用)의 문제로서 의 학이다. 이러한 박교수의 학문적 자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지눌/성철의 돈점론"이나 그외의 다른 글들의 근본 취지가 이해되지 못한다. 이러한 학문적 방법은 불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세계관을 지닌 기독교나 이슬람, 힌두교 나 유학등등의 전툥에 있어서의 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들에 있어서 학문이란 실상 삶의 학이요 삶을 위한 학이며 삶에 의한 학이며 그러기에 학은 곧 도를 닦는 실천이었다. 삶을 떠난 학은 추상이요 말장난이요 숫자놀음으로 그칠 우려를 지닌다. 인생은 찗고 학은 멀다고 했던가. 학을 다시금 삶의 자리에 정좌시키려는 노력. 그것이 없다는 우리는 학을 위하여 짧은 인생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초로와 같이 짧은 인생을 공리 공론에 매달려 보내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나 아름답고 도전적이다. 추상에 사로잡혀 입에 침이 튀다가도 푸른 창공을 쳐다보면 내 입보다 더 크고 내 대가리보다 더 밝은 삼천대천 세계의 허공이 미소한다. 나는 선(禪)을 그러한 허공의 미소라고 생각한다. 저 창공의 침묵의 미소를 바라보며 방외자의 덧없는 훈수, 곧 전통적 입장이 아닌 현대 학문적 훈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이미 독자들은 오수론에 얽힌 지눌과 성철의 게임을 대충 이해하고 있겠기에 주변을 돌지 않고 직접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도록 하자.
2. 오(悟)와 수(修)의 일반적 이해
오와 수를 말하는 모든 종교와 철학은 인간학을 근본 전제로 한다. 거꾸로 인간에게서 오와 수를 요청하게 됨은 인간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으로 부터 출발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기에 오도 수도 요청되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그러하기에 오와 수가 존재 안에서 하나가 된다. 자연은 스스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수(悟.修)는 철저히 인간학적 개념이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는 철저히 삶의 본질을 꿰뚫는 悟요 修는 잘못된 삶을 질정하기 위한 수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보면 잘못된 삶을 질정하기 위한 수를 하기 위하여는 올바른 삶에 대한 정확한 오(悟)가 요청된다. 그러기에 悟는 항시 論理的으로 修에 선행될 수밖에 없게 된다. 悟는 修의 선험적(a priori)요청이다. 悟없는 修는 맹목이고 修없는 悟는 공허하다. 따라서 悟는 修의 인(因) 이 되며 수(修)의 과(果)가 된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오와 수의 요청으로서의 잘못된 인간 삶을 인간의 신과의 존재론적 동일성(同一性)으로 부터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추락의 원인은 인간의 이기심(hubris)이라고 한다. 인간 실존(Existonce)이라는 개념 자체가 "밖에 서있다"(exsistere)라는 신적 본질로부터의 격리를 뜻하며 이로부터 추락의 개념과 타락 또는 죄의 개념이 등장케 된다. 따라서 죄는 존재론적인 단절의 개념인 동시에 실존적인 유한의 개념이다. 존재론적으로 단절되었으므로 인간실존은 본체인 신과의 동일성을 회복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 동일성의 회복은 신으로부터의 능동적 구속행위에 의하여만 가능한 것으로 요청된다. 그 구속의 행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오(悟)의 내용을 이루며 그 오(悟)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수(修)란 무엇인가? 기독교의수(修)란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된 에 대한 신앙을 따라서 살아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다. 그러나 진정코 올바른 신앙이라면 오(悟)와 수(修)는 신앙인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올바른 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오(悟)와 수(修)가 따로 있게 된다. 기독교가 끊임없는 수(修)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비관적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는 깊어서 결국 수(修)도 오(悟)와 같이 신의 은총이 아니고는 이룩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고백이다. 즉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오(悟)와 수(修)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신앙은 신의 구속행위에 대한 응답이요 그 응답속에서 신은 인간에게오(悟)와 수(修) 를 이루는 구원의 은총을 주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적 인간관의 비관론은 단순이 이론적인 관심이 대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삶 속에 있는 깊은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을 통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값싼 낙관론이나 이성적, 과학적 유토피아론은 역사를 통하여 그 허구가 수없이 증명되어 왔으며 과연 인간은 구제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의 물음을 우리는 수 없이 들어온 터이다. 여하튼 기독교의 오수오(悟修)의 문제는 이러한 인간학적 어두움을 전제치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고 하겠다.
불교는 잘못된 인간 삶을 무명(無明)의 논리로 접근한다. 무명의 논리에서는 인간과 불(佛)의 존재론적 단절의 교리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불성(佛性)은 곧 법성(法性)이요 아시불, 심즉불(我是佛 心卽佛) 이 그 내용을 이루게 된다. 존재론적 동일성이 단지 무명에 의해 가려저 있다면 그 가리움을 걷우는 것이 요청될 것이며 그것이 오(悟)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법계(法界)가 불(佛)과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면 무명 자체도 불성(佛性)의 표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 된다.
따라서 전자를 비인과적(非因果的)인 진여문 또는 체에 후자를 인과적인 생멸문 또는 용(用) 에 두는 것은 실상 편의적인 논의이지 서로 다른 실체를 구성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我是佛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말하기에 불교는 기독교에 비하여 인간에 대한 낙관론에 서있다 할 수 있다. 신의 은총보다는 나의 오(悟)가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수(修)는 무엇인가? 我是佛이란 오(悟)의 내용이 실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명에 의해 가려져 있다면 그 무명을 계속 걷어내는 과정의 노역이 일것이며 그 의 내용대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또한 수(修)의 내용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 오(悟)가 진정한 오(悟)라면 그 순간 이미 무명을 걷힐 터이고 도한 무명 마저도 대긍정하는 체용의 무애하고 활달 자재한 삶이 구현될 것이다. 이것이 또한 중국인의 낙천적 자연철학을 배경으로 한 선(禪)의 탕탕대허적 삶의 태도요 내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 我是佛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말한다 할지라도 훈습이나 업(業)이나 근기의 이론이 강조되면오(悟) 후에도 수(修)가 다시금 강조되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라라. 전자의 경우에는 돈오돈수의 원증(圓證 ) 이 강조되고 후자에는 돈오점수가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것이다. 전자는 철저히 비인과론적 성기론에 서있고 후자는 진성연기의 양문에 서있다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전자의 돈오는 후자의 돈오가 아니다. 비록 같은 언어인 돈오(頓悟)를 사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은 다르다는 말이다. 성철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하고 지눌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된다. 그들은 두개의 다른 전통에 서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성철의 지눌의 철학을 선학이 아닌 교학의 지해(知解)로 규정한 것은 선의 무애한 입장에서 보면 전적으로 정당하고 정확한 진단이다. 앞으로 상론하겠지만 그 누구도 그러한 진단을 내린 적이 없는 한국 불교사에 성철의 혜안과 기개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성철에 비하여 지눌이 안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하나 전제로 하고 넘어갈 것 있다. 그것은 앞으로 지눌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말임을 주지해두자. 지눌과 성철은 두개의 다른 정통을 대표하는 혜안(慧眼)을 지닌 학자요 수도인이요 나같은 범부의 스승이심을 전제로 하면서 말이다.
3. 성철의 "아니다"의 기개
선문정로를 흐르고 있는 성철의 논지는 불교 일반의 교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조사선의 정로를 제시하려는 것이 그의 논지요 목적이다. 성철에게는 수(修)의 이론이 없다는 생각은 단편적이다. 그는 다른 의미에서의 수(修)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성철은 조사선의 근본모습을 두 가지 방법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 선(禪)의 正路는 이런것이다."라고 하는 긍정론(via positive) 의 방법이다. 긍정도의 길에서 성철은 조사선의 정맥이라 할수 있는 마조나 백장등을 취하고 있다. 둘째는 선(禪)의 正路는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부정론(via negative)의 방법이다. 이 길을 말하기 위하여 설철은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라는 지눌의 보조선을 끌어들인다. 한 마디로 말하면 지눌의 보조선이 말하는 돈오(頓悟)가 선문(禪門 )에서 말하는 돈오(頓悟)가 아니라 해오(解悟) 에 그침으로 점수가 필요한 것이라는 논지이다.
지눌의돈오(頓悟)가 선문에서는 격이 낮은 지혜(知解) 의 앎 정도요 구경각인 돈오(頓悟)가 아니라는 성철의 지적은 지눌을 신격화하는 보조선 승려들이나 학자들에게는 하나의 모독이요 도전으로 들리런지 모른다. 더군다나 통불교와 회통(廻通)의 불교, 실천불교 등을 몽중대사 처럼 읊어대온 불자들에게도 성철의 질타는 아닌 밤중의 홍두께식 같은 얘기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닌 것을 정확히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회통(廻通)은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고 정교하게 조직화 될수 있으나 진정한 회통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르다"라는 말하기를 꺼려왔던 한국의 문화적 풍토가 결국은 적당한 사상적 혼합주의의 우(愚)를 범하여 왔는 지도 모를 일이다. "같다"는 회통의 정신은 오히려 "다르다"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름"을 인정치 않는 "같음"의 일방통행적 사유는 결국 동서사상사를 통하여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역활을 하여 왔음을 주지하자.
한국의 불교적 전통이 아름다운 것은 방외자인 나의 눈에는 호국 불교의 전통이 아니요 회통이나 통불교의 전통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다른" 전통들이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미치며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이 다른 전통들의 다양성에 대하여 우리는 다른 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말함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야 하겠다. 적당한 회통이나 통불교를 주문처럼 외워대는 것은 한국의 종교사를 위해서나 학문의 발전상에도 유익치 못하다. 숭유억불의 서슬이 시퍼렇던 이조시대에 있어서도 "유교는 직근(稙根)이요 도교는 양근(養根)인 반면 불교는 발근(拔根) "이라 함으로써 불교의 심원성을 그 "다름"에서 제창한 서산의 기개는 과연 용기 있고 을 지난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지눌의 보조선이 왜 선문의 정로가 아닌 것인가?를 규명하기 위하여는 지눌의 철학을 구명하는 것이 그 선결 과제가 될 것이다.
4. 지눌 사상의 철학적 구조와 돈수 (頓修)
왜 지눌을 말하기 위하여 먼저 그의 철학적 구조를 말하려는가? 언뜻 보기에 인간의 사유는 천차만별이요 문화형태 역시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언어라는 상징매체를 통하여 사유하고 문화를 이루어 나갈 때에 그 사유의 형태라는 것은 언어가 지니는 상징성과 구조성을 따라서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주지하여야 겠다. 이를 스타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개똥 철학이든 고등철학이든 어떠한 문화행위를 막론하고 거기에는 구조적 유형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구족적인 유형을 앎으로써 어떠한 사람의 사상적 핵심에 접근할 수 있으며 또한 한 구조적 유형을 다른 문화적 형태의 유형과 비교함으로써 그 동일성과 차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혹자가 이러한 그조적 유형을 거부한다면 인간의 이제까지의 문화행위는 모두 제멋대로의 카오스적 연속이어야만 될 것이고 더군다나 학문이라는 것은 조금도 가능치 않을 것이며 조금 잘났다는 모든 사상가들은 인간이리를 그치고 신비화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문화행위 일반 특히 사상이라는 것은 몇 가지 형태의 코스모스적 구조성 속에서 전개되어온 것 일 뿐이며 그 구조를 파악함으로 우리는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말의 배후에는 지눌을 신화화하거나 우상시 해서는 안되겟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다. 지눌을 종교적 영웅으로 추대하고 모시고 하는 것은 개인의 고유한 자유에 속하는 것일 터이요 개의 할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눌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구조적으로 읽는 학문적 작없이 없이는 지눌은 어떤 신비스런 오라(Aura)속에 존재하는 반신적 존재로 되어 버릴 것이다. 앞으로 전개되는 지눌에 대한 비판적 읽음은 어떤 불교학자의 학설을 통한 "간접적 읽음:이 아니라 필자의 "직접적 읽음"임을 밝혀둔다.
지눌의 회통사상의 열쇠는 그의 철학의 2원적 구조에 있다 2원적 구조라는 말은 이원론(Dualism)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임을 주지하기로 하자. 2원론이라는 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自然/超越, 물질/영혼, 선/악등의 대립적 개념들을 두개의 다른 원리 내지는 독립된 실체들로서 상정하는 사유체계로 생각하면 무방할 것이다. 지눌의 철학은 물론 이러한 이원론이 아니다. 지눌의 철학을 2원론적 구조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원론과 구별하기 위함에서다.
지눌사상의 이원적 구조는 중국적 불교의 체용의 형이상학 내지는 원효의 진여(眞如)/생멸(生滅)의 이원적 구조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은 불교 전반을 취법(就法)/취인(就人) 으로 나누고 다시금 취법을 불변不變/수연隨緣으로, 취인을 돈오/점수로 나눈다. 지눌은 이 이원적 구조에 충실함으로 그가 산 당시의 禪과 敎를 회통하려고 한다. 이러한 이중적 구조는 회통논자들에 있어서는 가장 편리한 무기요 수단이다. 이것은 불교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이라 불리우는 Perennial Philosophy의 경우에는 모두 통용되는 도식이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브라흐만/마야의 철학이나 기독교 신비주의의 경우나 회교 수피즘의 신(神)/세계(世界)가 다 이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는 철학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인과법으로 기멸(起滅)하는 모든 차별상의 본체는 비인과적 비차별적인것이요 거꾸로 불변하는 體의 현전(現前)이 수연(隨緣)의 상(相)이 됨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의불변不變/수연隨緣이 다른 철학적 전통과 다른 것은 체는 어떠한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공(空)이라는 철저한 비실체주의(Non-substantic)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형이상학적으로 가장 독특하고도 중요한 불교의 특성이다. 본고의 성격상 번잡한 이론은 피하고 요점만 말하기로 하자. 전통적인 신비주의적 Perennial Philosophy 에서는 체외 용이 이중적 구조를 지니면서 체의 본질성에서 용을 포섭함으로서 일원적 세계관을 지니게 되며 그 체가 브라흐만이나 神등의 어떤 실체로 이해됨으로써 용의 세계는 그 실체의 몸이라는 유기체적 신비주의의 사상 양태를 낳게 된다. 그러나 불교의 체는 어떤 실체가 아닌 공이라는 자각에서 그 독특성을 갖게 된다. 공의 자각은 연기설의 논리적 귀결이다. 모든 차별상이 연기에 의한다면 연기 이외의 어떠한 다른 실체도 상정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연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공이 될 수 밖에 없다. 연기의 체는 공이요, 공의 현전(現前)이 연기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연기와 공은 하나의 물(物)에서 무애하게 융합되어 있는 것에 대한 두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굳이 체와 용을 나누어 생각하고 불변과 수연을 가르어 생각하나 연기의 체가 공이라면 體卽用이요 用卽體일수 밖에 없는 것이 성기론적 입장이요 논리적 타당성이며 불교가 지니는 독특성이다. 그러나 지눌은 여기까지는 나아가지는 않는다.
지눌은 타종교의회통논자(廻通論者)들에게서와 같이불변不變/수연隨緣의 이원적 구조에 매우 충실하다. 그가 就法論(취법론)을 불변/수연의 非因果法/因果法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취인론(就人論)을 하려 하니 그것이 돈(頓)/점(漸)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頓/ 頓이나 漸/頓이나漸/漸으로 就人論을 나눈다면 그것들은 자신의 철학적 구조에 배치되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불변/수연의 이원적 구조가 타당한 것으로 지눌에게 인식되었다면 그의 오수론(悟修論)은 마땅히 돈오(頓悟)/점수(漸修)의 성구문(性具門)/現行門의 이중구조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여기서 돈오는 불변에 해당하고 점수는 수연에 해당된다. 만약 지눌이 신학자라거나 敎학자라면 그의 이러한 철학적 구조는 훌률한 Summa로 평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이러한 철학적 이중성으로 禪이라는 독특하고도 가장 래티칼한 종교 경험을 회통하려는 데에 문제가 생긴다고 볼 수 있다. 體卽用이요 用卽體인 절대적인 悟의 경험을 체와용, 悟와修의 이분법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실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성철이 지적하는 지눌의 문제점, 곧 지눌의 돈오는 禪家에서 말하는 돈오(頓悟) 아니라 解悟요 지해(知解)라는 지적은 지눌의 철학적 구조와 무관하지 않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지눌의 이중적 철학 구조를 염두에 두면서 지눌이 말하는 돈오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언어란 본질상 비유적(Metaphoric)한 셩격을 지니는 까닭에 언어의 사용자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뚯하고 있는 어휘의 의미를 구명치 않고는 우리는 한 걸음도 생산적인 대화의 길로 들어 갈 수 없게 된다. 같은 어휘인돈오(頓悟)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지눌의 돈오가 성철의 돈오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가를 밝혀야 겠고 성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지눌의 돈오가 교가(敎家)의解悟 정도에 그치는 것인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발상이 성철의 돈오/해오의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데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의 과제는 비교학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로 하자. 같은 언어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을 밝혀 내는 것이 당연한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성철이나 지눌의 한쪽을 무조건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말하면 잔소리이다.
5. 지눌에 있어서의頓의 개념
앞서 우리는 지눌의 철학적 구조가 頓/修의 도식을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식속에서 지눌은 頓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지눌에 있어서頓은 크게 두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로 한예를 들자면 에서 ‘절요’에서 "身心不二 是爲眞我 與諸佛 不毫不殊故 云頓也"(신심이 둘이 아니요 이것이 진아가 되어서 제불과 더불어 털끝만치도 차이가 없는 고로 頓이라 한다.)라 하였으니, 즉 진심시불(眞心是佛)의悟가 頓이라는 말이다. 진심진설(眞心直說)에서 지눌은 진아(眞我 )라는 말을 진심(眞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진아나 진심은 인과적 차별상에 대한 본체로서의 비인과적 불변이며 이를悟하는 것이 바로頓이다.
그런데 이頓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여기서 둘째 의미로서의 頓의 이해가 나타나게 된다. ‘절요’에서 지눌이 "종미리오즉돈 從迷而悟卽頓”( 迷를 따라悟하는 것이頓이라 할때의頓은 迷라는隨緣相을 따라서 그 본체를悟하는 것으로의 뜻으로 사용된다. 隨緣相을 따른다는 점에서悟에 이르는 과정은 漸이겠으나悟의 경험 자체는漸의 일부가 아닌 특수한 점으로 나타난다. 이를 지눌은 홀(忽)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不變隨緣性相體用之義 忽悟靈明知見是自真心 " (不變/隨緣, 性/相, 體/用 의 뜻을 홀연히 깨달아서 이것이 스스로의 진심임을 영명하게 지견하는 것)에서의頓은忽 이라는 시간적 순간의 뜻을 지니게 된다. 또는 (此舊習卒難頓除故 이러한 구습은 순간적으로 제거할 수가 없는 고로)에서頓은 순간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본다면 지눌에 있어서頓이란 순간적인 홀(忽)의 경험이요 그 홀(忽)의 내용은 진심즉블(眞心卽佛)이라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지눌의頓의 이해가 선가의頓과 같은 것인가 아닌가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계속)
1992년 2월 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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