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7024]趙仁規(조인규)선생-示諸子(시제자)
示諸子(시제자)= 諸子=윗사람이 아랫사람들을 부르는 제 이인칭(第二人稱). 去塵/貞肅 趙仁規(거진/정숙 조인규)
事君當盡忠 사군당진충 遇物當至誠 우물당지성 願言勤夙夜 원언근숙야 無忝爾所生 무첨이소생
임금 섬김에 극진한 충성 사람 만나면 지극한 정성.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삶을 욕되게 말아야지.
事君 사군= 임금 섬김에 當盡忠 당진충= 극진한 충성 遇物 우물= 물건을 만남. 사람을 대함. 사람 만나면 當至誠 당지성 = 지극한 정성 願言 원언= 바라건대. 원컨대. 言은 조자(助字). 勤夙夜근숙야=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夙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無忝 무첨=욕되게 말아야지 忝 = 더럽힘. 욕되게 함. 爾所生이소생=자기 어버이 孝經注疏에 詩云 夙興夜寐하야 無忝爾所生이어다하니라 ≪시경≫에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며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여, 너를 낳아주신 어버이를 욕되게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忝은 辱也요 . 所生은 謂父母也라 義取早起夜寐하야 無辱其親也라 忝은 辱(욕되게 함)이고 所生은 父母를 일컫는다.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며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여, 자기 어버이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음’의 뜻을 취한 것이다. ‘詩云’至‘所生’ ○正義曰:夫子述士行孝畢, 乃引小雅小宛之詩, 以證之也. 言士行孝, 當早起夜寐, 無辱其父母也. 經의 [詩云]부터 [所生]까지 ○正義曰:夫子(孔子)가, 士가 행하는 효에 대한 서술을 마친 다음 ≪詩經≫ 〈小雅 小宛〉의 시를 인용하여 증명한 것이다. ‘士가 행하는 효는 의당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며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여, 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直譯 임금(君) 섬김에(事) 극진한(盡) 충성(忠) 마땅히 하고(當) 일을(物) 당해선(遇) 지극한(至) 정성(誠) 마땅히 하라(當). 청하여(願) 말하느니(言) 아침(夙) 저녁(夜) 부지런하여(勤) 그대(爾) 살아가는(生) 바(所) 욕됨이(忝) 없게 하라(無).
원문=동문선 제19권 / 오언절구(五言絶句) 東文選卷之十九 / 五言絶句 示諸子[趙仁規] 事君當盡忠。遇物當至誠。 願言勤夙夜。無忝爾所生。 시제자(示諸子)-조인규(趙仁規) 임금을 섬기는 덴 마땅히 충성을 다할 것이니 사물을 대하여선 마땅히 지성스러울지라 바라노니 밤낮으로 부지런히 닦아 낳아 준 아비를 욕되지 않게 하라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68 |
몽골어와 한어에 능통하여 원에서 보내오는 조서와 칙서를 번역한 공을 원에서 인정받았으며,
또한 일본정벌 때 원나라에 고려의 일을 잘 보고한 공으로 토지와 노비를 받고 그 자손들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1290년에 원나라가 동녕부를 폐지하여 고려가 서북의 여러 성을 돌려받는 데 공을 세웠다.
원나라의 간섭기 때 어린 자제들 중 똑똑한 자를 골라서 몽골어를 배우게 했는데,
여기에 선발되었다. 3년 동안 몽골어를 공부하여 제교로 임명된 후,
세자 심(뒤의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했고,
세자와 혼인한 제국대장공주의 사속인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 세력을 배경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1275년(충렬왕 1)에 장군이 되었다.
1278년 대장군으로 경상도에 파견되어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호적에 등록했으며,
이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80년에는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1292년 딸이 세자비가 되었으며, 중찬을 거쳐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가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조비를 무고하여
충선왕이 퇴위하게 되자 그도 재산을 몰수당한 후 곤장을 맞고 원의 안서로 유배되었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진(去塵). 원(元)나라의 간섭기 때 어린 자제들 중 똑똑한 자를 골라서
몽골어를 배우게 했는데, 여기에 선발되었다. 3년 동안 몽골어를 공부하여 제교(諸校)로 임명되었다.
세자 심(諶 : 뒤의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했고,
세자와 혼인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사속인(私屬人)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 세력을 배경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1275년(충렬왕 1)에 장군이 되었다.
1278년 대장군으로 경상도에 파견되어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호적에 등록했으며,
이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80년에는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몽골어와 한어에 능통하여 원에서 보내오는 조서와 칙서를 번역한 공을 인정받아 원나라에서 금패를 받고,
선무장군 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宣撫將軍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일본정벌 때 원나라에 고려의 일을 잘 보고한 공으로 토지와 노비를 받고
그 자손들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1290년에 원나라가 동녕부를 폐지하여
고려가 서북의 여러 성을 돌려받는 데 공을 세웠다. 1292년 딸이 세자비가 되었으며,
중찬(中贊)을 거쳐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가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비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가 조비(趙妃)를 무고하여 충선왕이 퇴위하게 되자
그도 재산을 몰수당한 후 곤장을 맞고 원의 안서(安西)로 유배되었다(→ 조비무고사건).
1305년 석방되어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임명되었으며,
1307년에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고 난 뒤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에 봉해지고
선충익대공신(宣忠翊戴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