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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10타
<개회> 사회자
<법신불전 헌배> 일어서서 대례
[특별정진기도]
<입정>
<영주>
영주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기원문>
<심고>
<독경>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법어봉독>:694쪽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15 유촉편(遺囑編) 1~2장
유촉편(遺囑編) 1장
정산 종사 병상에서 물으시기를 [우리의 본의가 무엇인지 아느냐.] 시자 사뢰기를 [도덕으로 천하를 한 집안 만드시려 하는 것이옵니다.] 말씀하시기를 [네 말이 옳다. 도덕천하 위일가(道德天下爲一家)가 우리의 본의니라.]
유촉편(遺囑編) 2장
김 대거와 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시대는 개벽 시대요 교역 시대라, 모든 것이 교역되고 융통되나니, 우리의 경전 가운데 그 범위가 혹 지역이나 종파에 국한된 듯 해석될 부분은 이 시기에 잘 정리하여 대종사의 근본 성지를 남음 없이 드러내고 주세 경전의 존엄에 조금도 손됨이 없게 하라. 그 대체는 이미 다 정해 있으니, 더 드러낼 데는 드러내고 그대로 둘 데는 두되, 사은 사요와 삼학 팔조만 잘 드러나면 만고 대법이니라.]
< 일상수행의 요법 대조> (p54)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성가>
<성가>
90장: 불문에 들어오니(法位等級歌)
<설법> 창산 김진성 교무
법강항마위와 계문/ 김대거 종사
김대거[金大擧, 1914~1998]
주요약력
본명은 영호(榮灝). 법호는 대산(大山). 법훈은 종사. 1914년 음력 3월 16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부친 인오(金仁悟)와 모친 안경신(安敬信)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뒤를 이어 1962년(원기47)부터 1994년(원기79)까지 원불교 종법사를 역임했다.
생애
대산종사는 11세 되던 1924년(원기9) 진안 만덕산에서 개최된 초선(初禪)때 할머니인 노덕송옥(盧德頌玉)의 인도로 소태산에게 귀의했다. 1924년(원기9) 6월 1일 전북 익산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개최한 후 며칠 지나서 소태산이 두 번째로 만덕산에 행가한 바로 그때였다. 대산은 어린나이임에도 정산종사ㆍ오창건김ㆍ광선 등을 비롯한 초창기 쟁쟁한 창립선진 10여 명과 더불어 소태산을 모시고 5월 한 달 동안 선을 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소태산-정산-대산으로 이어진 새 회상 원불교의 3대 주법(三代主法)이 최초로 한자리에 만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1929년(원기14) 16세에 출가한 대산은 3년간 총부에서 학원생활을 하면서 소태산과 은부자(恩父子)의 의를 맺고 서원을 확고히 세웠다. “차신필투공중사 영세진심알역행 인생출세무공적 사아평생하면괴(此身必投公衆事 永世盡心竭力行 人生出世無功績 斯我平生何免愧(이 몸은 반드시 공중사에 던져 영원토록 몸과 마음을 다하리라. 사람으로 태어나 공적이 없다면 이 내 평생 어찌 부끄러움을 면할손가)”(《월말통신》 제35호)라는 입지시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 후 대산은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서무ㆍ상조ㆍ공익ㆍ육영ㆍ교무 각 부서의 서기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소태산의 시봉도 겸했다.
20세가 되던 1935년(원기20)에 한살 위인 이영훈(李永勳)과 결혼한 대산은 가사를 일체 불고하며, 봉직하다가 1936년(원기21)경에 사가를 정리하여 총부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어 1937년(원기22)부터 서무부장ㆍ교무부장ㆍ감사부장ㆍ총부 교감 겸 예감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속 깊은 수도적공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는 멋과 여유도 즐겼다. “조그마한 우주선에 이 한 몸 태우고서 다북 찬 호연대기 노삼아 저어가니 아마도 방외유객은 나뿐인가 하노라”(사공(沙工), 《회보》 제47호)을 비롯하여 ‘피안의 님’(《회보》 제56호), ‘일여선가(一如船歌)’(《회보》 제58호) 등 낙도의 심경을 시로 표현하면서 공사에 전념한 것이다.
대산은 의문점이 생기면 소태산에게 여쭙고 감정을 받으면서 법도 있는 공부에 정성을 쏟았다. 대산이 어느 날 소태산에게 법강항마위의 취사공부에 대해서 질문했다. “김대거 여쭙기를 ‘법강항마위부터는 계문이 없사오니 취사 공부는 다된 것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법강항마위부터는 첫 성위(聖位)에 오르는지라, 법에 얽매이고 계문에 붙잡히는 공부는 아니하나, 안으로는 또한 심계(心戒)가 있나니, 그 하나는 자신의 수도와 안일만 취하여 소승에 흐를까 조심함이요, 둘은 부귀향락에 빠져서 본원이 매각될까 조심함이요, 셋은 혹 신통이 나타나 함부로 중생의 눈에 띄어 정법에 방해될까 조심함이라, 이밖에도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을 공부하여, 위로 불지를 더 갖추고 아래로 자비를 더 길러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공을 쌓아야 하나니라’”(《대종경》 수행품63).
생사거래의 원리와 열반 후 영혼 천도의 의의와 방법에 관한 법문들을 모아 수록한 《대종경》 ‘천도품’의 내용 가운데 32장부터 38장까지 총7장의 법문이 대산과 소태산의 문답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소태산은 일찍이 대산이 속 깊은 적공을 통해 일원의 진리를 요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엄격히 지도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대산종법사법문집3》 제5편에 이렇게 수록되어 있다.
“대종사님께서는 중근에 걸려있는 제자들을 대중 앞에서 지적하시며 중근의 말로가 위태하다는 법문을 직접 내려주셨다. 그 후 삼산종사를 보고 ‘삼산도 3년 정도 그 고비에 머물렀으나 이제 넘어섰다’고 출가위 인증을 해주신 일이 있으셨고, 주산종사에게도 ‘그 고비를 넘겼노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대종사님께서 ‘너도 조심하라’하시어 나는 그때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반성하다가 한마음 얻음에 대종사님께서 크게 인증하여 주시었다. 그때가 나로서는 마음이 새로 난 날이며 대종사께서 열반하시던 해의 정월 초나흘이었다.”
이를 통하여 소태산이 여러 제자들로 하여금 대산이 큰 법기임을 암암리에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했음은 물론이요, 대산이 소태산의 지도에 절대 복종하는 투철한 신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대산은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이 열반할 때까지 줄곧 교단 간부로서 총부를 떠나지 않고 측근에 머물면서 법설을 받들고 수필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는데,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회보》 제46호)를 비롯한 수편의 소태산 수필 법설을 남겼다. 소태산이 열반한 후 정산이 종법사의 대임을 계승하자 정산을 보필하며 교단발전에 헌신하던 대산은 1946년(원기31) 총부 서울출장 소장에 피임, 광복 직후 3년간 다단한 원불교 역사에 큰 역할을 했다. 백범 김구 등 정계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사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그 후로 원평ㆍ총부ㆍ진영ㆍ다대 등지에서 《대종경》 자료를 정리했으며,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2년(원기37)에는 수위단 중앙에 피선되고 교정원장에 선임되어 교정 실무를 담당하며 교단의 든든한 대들보로 자리매김하면서 정산의 경륜과 포부를 받들어 실현하는데 힘을 다했다. 1959년(원기44)에는 중앙선원장에 피임되었으나 영산에서 요양하면서 정관평 재방언공사와 성지사업의 기초를 세웠고, 1961년(원기46)부터는 하섬, 신도안 등지에서 교재를 연마 중 정산의 특별유시로 정화사(正化社) 감수위원에 위촉되었다.
정산이 1962년(원기47)에 열반하자 법통을 계승하여 2월 23일, 49세에 종법사 위에 오르고 1994년(원기79) 11월 대사식을 통해 좌산 이광정 종사에게 법좌를 양위하기까지 6차에 걸쳐 종법사를 연임, 33년간 교단의 주법으로서 교화를 주재하고 교단발전에 헌신했다.
활동과 업적
대산은 정산이 병상에서 최후까지 유촉한 ‘교재정비(敎材整備), 기관확립(機關確立), 정교동심(政敎同心), 달본명근(達本明根)’의 4대 경륜과 ‘삼동윤리’의 계승실천을 강조했다. 종법사 취임법설을 통해 법위향상과 이를 위한 훈련강화, 삼동윤리 실현을 위한 해외교화와 종교연합운동을 제시, 교단의 공부사업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또한 대산은 1971년(원기56) 10월 정산종사 성탑을 건립할 때 ‘성탑명(聖塔銘)’을 지어 정산종사의 성은(聖恩)을 높이 기렸다. 교서편정, 〈교헌〉개정 등 교단의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소태산이 밝힌 ‘4,50년 결실이요, 4,5백년 결복’이라는 유시에 따라 개교반백년기념성업을 전개, 교단의 역량을 하나로 집결시켜 나갔다.
특히 교재정비는 정산이 남긴 유훈일 뿐 아니라 교단의 대중화를 위해 화급을 다투던 일이었다. 이에 대산은 취임 첫해인 1962년(원기47) 9월 소의경전인 《원불교교전》을 발간했고 이어서 《불조요경》(1965), 《예전》(1968), 《성가》(1968), 《정산종사법어》(1972), 《원불교교사》(1975), 《원불교교헌》(1976) 등을 잇달아 펴낸 데 이어 1977년(원기62) 《원불교전서》 발간으로 마무리했다. 개교반백년기념대회는 1964년(원기49)부터 1971년(원기56)까지 8년에 걸쳐 추진되었다.
대산종사는 이 기간 동안 교화3대목표운동(연원달기ㆍ교화단불리기ㆍ연원교당만들기)의 추진 지도력을 발휘하여 교세를 두배 이상 신장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연원교당 92개 봉불, 교화단 1,457개 증가, 신입교도 77,605명이라는 결과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영모전, 반백년기념관, 교정원 사무실 건축 등 중앙총부 확장 및 기념물 조성을 통해 새 회상의 면모를 일신시킨 것이다. 피날레인 기념대회는 1971년(원기56) 10월 8일 3만여 명의 교도가 운집한 가운데 총부와 원광대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내건 대회주제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는 교단의 비전과 세계사의 방향을 제시한 큰 이념이 되었다.
대산은 원광중ㆍ고등학교 교사(校舍) 신축 처리에 따른 부채문제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도법위향상운동, 각종 건축사업,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전개, 교단에 법풍을 불리었다. 자고 일어나면 교당이 세워질 정도로 생명력이 약동하던 시절이었다. 1971년(원기56) 10월 원광대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된 기념식에는 3만여 명의 교도가 운집, 교단사상 최초의 대집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교단은 교화3대사업의 성공과 반백년기념관을 비롯한 기념물 조성 등으로 중앙총부의 면모를 일신함으로써 새 회상의 저력을 한국사회에 과시했으며 명실 공히 한국 6대종교로 발돋움하게 됐다.
법위향상은 대산의 가장 큰 염원이었다. 법위향상이야말로 소태산과 정산에게 보은하는 길이라는 신념에 따라 법위사정을 전향적으로 실시, 반백년기념대회 때 법강항마위, 2대말 총회에 출가위 배출 등으로 꾸준히 법위를 양성화했다. 하지만 ‘법위의 인플레’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한 비판에도 불고하고 대산종사는 법위향상을 위해서 필수적인 훈련강화를 역설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훈련 교도훈련 국민훈련 인류훈련”을 강조하고 인류심전계발운동을 본격화할 훈련원 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총부에 주재하지 않고 신도안에 주석하면서 삼동원을 개발하고 원평, 완도, 제주국제훈련원, 영모묘원 등에 주석한 것은 대산종사의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국내에 중앙훈련원ㆍ대구동명훈련원ㆍ중앙상주선원ㆍ소남훈련원ㆍ만덕산훈련원ㆍ제주국제훈련원ㆍ중앙중도훈련원, 해외에는 하와이국제훈련원ㆍ심원훈련원 등이 설립되었으며, 1977년(원기62) 교정원에 훈련부를 신설, 교단의 훈련정책 수립과 각급 훈련기관에 대한 사무를 관장, 전 교역자와 전 교도에 훈련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했고, 원불교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또한 국민훈련으로 범위가 확장, 청운회가 주축이 된 ‘새삶훈련’을 통해 기업체 사원이나 일반 국민훈련을 하고 청소년 수련시설을 통해 일반청소년훈련까지도 하게 되는 성과를 이루게 됐다. 대산의 포부와 경륜에 의한 사업들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1970년(원기55) 10월 반백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흑석동 한강변에 서울회관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공사를 맡은 남한강개발이 부도가 나면서 교단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대산은 의연히 일을 수습해갔다.
“누구에게 책임을 추궁하기 보다는 재가ㆍ출가가 서로 주인이 되고 책임자가 되어 난국수습에 정성을 다하자”고 독려하고 “선후진 동지가 일심합력하는 계기, 교단만대에 전화위복이 되는 계기로 삼자”고 호소하면서 단결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1980년(원기65) 10월 골조만 세운 채 서있던 공사를 재개하며 1982년(원기67) 10월 봉불낙성식을 갖게 됨으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았다. 한편 대산은 1976년(원기61) 10월 중앙교의회에서 법치교단 확립을 강조했다. 법치교단 운영의 3가지 원칙으로 ①가족적 운영에서 합리적 제도에 의한 운영을 지향, ②종법사 중심의 통치에서 수위단회 단지도체제로 나아갈 수위단회의 성격, 사업 방향 등 교단 운영체제의 기본 틀 확립, ③교단의 민주적 운영을 밝혔다.
이러한 3대 원칙에 입각, 재위기간에 3차에 걸친 〈원불교교헌〉의 개정을 통해 아주 멀고 오랜 세대를 이어갈 수 있는 교단의 큰 기틀을 마련했다. 1980년(원기65)에는 ‘원불교창립 제2대 및 소태산대종사 탄생100주년 성업봉찬사업회’를 발족했다. 그에 따른 목표를 “체제정비와 실력양성, 교세확장, 성지장엄 및 각종 기념행사”로 정하고 교단창립 제3대 설계안을 마련, 창립3대의 방향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1980년대의 한국사회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팽배하던 시기였고 원불교 교단은 이러한 한국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말미암아 원불교는 외형적인 성장과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점차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었다. 특히 1986년(원기71) 문공부에서 발표한 종교인구조사결과는 큰 충격을 주었다. 발표된 원불교 교도 수는 96,333명으로 당시까지 100만 교도 운운해왔던 상황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1987년(원기72) 발족된 ‘교단창립 제3대 설계특별위원회’는 체제제도분과ㆍ교화계획분과ㆍ전무출신제도분과ㆍ인재육성관리분과ㆍ재정산업분과ㆍ봉공공익분과로 나누어 1년여 동안 토론을 거쳐 18개 분야 61개항의 현안문제에 대한 대책과 미래지향적 방향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안은 일부 시행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안에 머무르고 구체적인 실행은 답보상태에 머물고 말았다.
1991년(원기76) 원광대학교 대운동장에서 거행된 소태산대종사 탄생100주년 기념대회는 5만여 명의 교도가 운집, 한국사회에 교단의 이미지를 밝게 인식시켰다. 초등학교 5학년 사회교과서에 “새로 일어난 종교”라는 제목 아래 소태산대종사의 생애와 원불교의 개교정신 등이 소개되어 일반인들의 인식도 많이 높아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연이은 복지기관 설립 운영과 함께 은혜심기운동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수단, 인도 라다크 등지에 구호활동을 전개하여 대사회적ㆍ대세계적 책임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대회는 일원문화가 싹을 틔우는 계기를 마련했고, 은혜심기운동의 전개, 소태산기념관ㆍ법은관 건립을 비롯한 성지장엄사업 등 외형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당초 목표로 세운 교세확장은 내실이 뒤따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지나치게 장엄위주로 치우쳤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산종사의 탁월한 지혜와 강력한 지도력은 교단의 위상을 대내외에 드높이는 전기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좌산종사는 대산의 공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의 유지를 받들어 7대교서를 정비 완정. ②각종 사업회를 발족하여 교단경제의 기반 확립. ③교화ㆍ교육ㆍ자선ㆍ산업ㆍ훈련ㆍ문화ㆍ봉공 등 각종기관들을 차례로 설립하여 교단 저력을 확충. ④법치교단의 기틀을 확립하여 교단 만대의 기반을 확충. ⑤반백년기념사업2ㆍ대말 사업ㆍ대종사탄생100주년사업 등 3차에 걸친 성업봉찬사업을 통해 교단의 위상을 격상. ⑥훈련강화를 통한 조불불사로 법위향상의 길을 닦아 천불만성의 배출문로를 열음. ⑦해외교화의 문로를 열어 세계 속의 원불교로 도약, 종교연합과 UN NGO 활동을 통해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 ⑧세계평화를 위한 3대 제언인 종교연합운동ㆍ세계공동시장 개척ㆍ인류심전계발운동 제창 등 세계가 풀어야할 과제 제시. ⑨ 교단을 국내 6대 종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여 국가 민족과 세계 인류에 지도의 역할을 하는 책임 있는 종교로 성장시켰다.”
대산은 1994년(원기79) 11월 6일에 좌산에게 종법사직을 양위하고 상사(上師)로 추대되었다. 당시 〈원불교교헌〉에는 종법사직을 임기제로 시행하고 상사제도를 시행할 수 있었지만, 교단적 정서와 강력한 지도력 때문에 종신토록 종법사직을 수행해주기를 바라는 여론도 많이 있어서, 상사제 시행은 대산의 단호한 결단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대산은 퇴임 후 전북 익산시 왕궁면의 영모묘원에 위치한 상사원에서 정양하며 교단과 국가, 세계평화를 염원했다. 더욱이 노구를 이끌고 1996년(원기81) 5월 하와이국제훈련원을 직접 방문함으로써 해외교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1998년(원기83) 9월 17일에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를 게송으로 내리고 중앙총부에서 노환으로 열반에 들었다. 세수 85세, 출가 법랍 70년, 법위 대각여래위, 법계 대원정상(大圓正師), 사업성적 정특등, 원성적 정특등에 해당한다. 주요저서로 ≪교리실천도해≫,≪정전대의≫등이 있으며 후학들에 의해 여러권의 법문집이 발행되었다.
사상
대산의 종법사 재위기간(1962~1994)은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한국사에 있어서 1962년은 5ㆍ16 이듬해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는 등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오던 시기였다. 나아가 근대화와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1970년대와 민주화 열기가 드높았던 1980년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1990년대 초반에 해당된다. 세계사적으로도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체제와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인한 탈냉전의 시기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대산은 재위기간 동안 교단사와 한국사,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을 통찰하면서 변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대산은 한국사회의 이러한 변화를 예견하고 대산은 민족의 앞날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962년(원기47) 10월 《원광》에 발표한 ‘신생활운동요강’은 새마을운동의 이념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ㆍ일회담 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시기에는 서울에 직접 올라가 정해영ㆍ장경순 국회부의장을 만나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기도 하는 등 민족과 국가의 앞날에 적극 참여하는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혼란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치인들에게 ‘대참회 대해원 대사면 대정진 대보은 대진급(大懺悔 大解寃 大赦免 大精進 大報恩 大進級)’의 법문을 강조하기도 했다.
통일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이미 1960년대에 ‘용공ㆍ화공ㆍ구공(容共ㆍ和共ㆍ救共)’의 통일철학을 제시한 것은 대산의 역사관과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1989년 소련의 붕괴 이후 탈냉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돋보이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연합운동과 해외교화에 기치를 높이 든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산은 1965년(원기50) 종법사 취임사에서 “일원대도와 삼동윤리의 실현은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제시하면서 해외교화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소태산의 일원주의와 정산의 삼동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실현을 위한 대산종사의 경륜을 선언한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1965년(원기50)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주최한 6대종교연합회에 참가하면서 본격화된 종교연합운동은 총부 서울사무소에서 월간 《종교계》(1965.2)를 창간하는 등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자세로 참여를 모색했다. 나아가 1970년(원기55)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1회 세계종교자평화회의(WCRP)에 박광전 등을 파견, 세계종교연합기구(UR, United Religions) 창설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결과 1986년(원기71) 제3차 아시아종교자평화회의(ACRP), 1991년(원기76) 대종사탄생10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 1992년(원기77) 4월 중앙중도훈련원에서 제1회 외국인 종교지도자 일원훈련, 같은 해 8월 UN NGO 가입 등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1971년(원기56) 미국 뉴욕을 시작으로 본격적 교화활동을 전개한 이래 미국ㆍ캐나다ㆍ일본ㆍ러시아 등지에 잇달아 교당을 설립하여 원불교의 세계화에 힘을 기울였다.
대산이 제시한 종교연합기구 창설 제의는 세계를 지향하는 보편성의 이념을 제시한 것으로 교단의 비전과 위상을 일시에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대산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종교협력기구에 교단대표를 파견, 종교연합기구 창설을 일관되게 제의했다. 1974년(원기59)에는 천도교 총부를 답방했고, 1984년(원기69)에는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 종교연합기구 창설을 제안, 교단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高元局〉
<대산종사>
법강항마위
[法强降魔位]
개요
원불교 법위등급 가운데 네 번째 계위(階位). 《정전》 수행편 제17장 ‘법위등급’에서는 “법마상전급 승급조항을 일일이 실행하고 예비법강항마위에 승급하여 육근을 응용하여 법마상전을 하되 법이 백전백승하며, 우리 경전의 뜻을 일일이 해석하고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으며, 생ㆍ로ㆍ병ㆍ사에 해탈을 얻은 사람의 위이다”라고 했다. 곧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를 깨달아(見性) 마음속의 법(法)과 마(魔)가 싸우되 법이 백전백승하는 초성위(初聖位)의 바른 스승(正師)으로서 삼십계문 외에 각각의 처지와 장단을 고려한 심계(心戒)를 따로 두고 세밀하게 삼학공부를 하여 해득한 사람이다.
내용
법강항마위는 육근을 응용하여 법마상전을 하되 법이 백전백승하여 초성위(初聖位)에 올라 있는 사람의 위로서 바른 스승의 자격을 갖춘 분으로 교단으로부터 정사의 법계를 받게 되며 부모님은 소희사위(小喜捨位)가 된다. 《대종경》 불지품 9장에서는 “법위가 항마위만 오르더라도 천인 아수라가 먼저 알고 숭배하나니라. 그러나 그 도인이 한번 자취를 감추려들면 그 이상 도인이 아니고는 그 자취를 알 수 없나니라”고 했다. 《대종경》 변의품 34장에서는 견성을 못한 사람은 정식법강항마위에 승급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대종경》 성리품 20장에서는 “수양하는데 견성이 무슨 필요가 있나이까? 국문에 본문을 아는 것과 같나니라”고 했고, 21장에서는 “견성을 하면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를 알게 되고 목수가 잣대와 먹줄을 얻은 것 같이 되나니라”고 하여 참다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성품의 본래 자리를 보는 견성이 필수적임을 말하고 있다. 법강항마위는 첫 성위에 해당하는 법위이므로 일률적으로 받아 지키는 계문은 두지 않으나 각각의 처지와 장단을 고려하여 특성에 따라 각자의 마음속에 선정(選定)하여 지키는 계문인 심계를 둔다.
《대종경》 수행품 63장에서는 “김대거 여쭙기를 ‘법강항마위 부터는 계문이 없사오니 취사 공부는 다된 것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법강항마위부터는 첫 성위에 오르는지라 법에 얽매이고 계문에 붙잡히는 공부는 아니하나 안으로는 또한 심계가 있나니 그 하나는 자신의 수도와 안일만을 위해 소승에 흐를까 조심함이요, 둘은 부귀향락에 빠져 본원(本願)이 매각될까 조심함이요, 셋은 혹 신통(神通)이 나타나 함부로 중생의 눈에 띄어 정법에 방해될까 조심함이니라. 이밖에도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을 공부하여 위로 불지를 더 갖추고 아래로 자비를 더 길러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공을 쌓아야 하나니라.’”고 했다.
또한 더욱 원만한 수도인이 되기 위해서 삼학을 편수(偏修)하지 않도록 하거나, 법상(法相)에 얽매이지 않고 법가지(法可止)를 잘못하지 않도록 하거나, 남을 용납 못하는 청병(淸病)ㆍ선병(善病)ㆍ지병(知病)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등의 심계를 두는 것이다. 법강항마위에 오른 사람은 육근을 응용하여 법마상전을 하되 법이 백전백승하며 우리 경전의 뜻을 일일이 해석하고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으며 생ㆍ로ㆍ병ㆍ사에 해탈을 얻는 등 삼학공부를 세밀하게 해득해 나가는 공부인이다.
곧 “수양과는 무시선을 잘 수행하며 생사고락에 능히 초월하는 정도이며 연구과는 우리의 지정교서에 능하며 성리학(性理學)에 통하는 정도이고 취사과는 언행이 서로 대차(大差)가 없고 법이 백전백승하는 정도”(대산종사, 〈법위등급법문〉)이다. 《불법연구회회규》 행해법계(行解法階)에서는 “수양과:삼정(三正), 연구과:육각(六覺), 취사과:육선(六善)”이라 했는데 이들 삼정, 육각, 육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회보》 제8호의 예비학력고시법에 밝혀 있다.〈金聖觀〉
<성가>
111장: 조그마한 우주선에(沙工)
<공고>
<생활결의 구호>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성가>
102장 : 저희들이 이 불사로(回向의 노래)
<폐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삼대력을 얻어 성불제중(成佛濟衆)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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