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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머문 지도 8일째를 맞았다. 파트나에서 캘커타(나중에 콜카타)로 이동하는 13일 오전에 야마모토 신이치가 묵는 호텔에 비하르주 파트나구(區) GㆍSㆍ그레왈 장관이 찾아왔다. 터번과 수염이 잘 어울리는 장관은 구의 법원 장관이기도 했다“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곳저곳을 안내하고 싶었는데 공무가 바빠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행의 파트나 방문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정중히 사의를 표하는 장관의 성의에 신이치는 황송했다.신이치는 이번 인도 방문으로 우호와 평화를 위한 유익한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전하고 ‘훌륭한 파트나의 모습과 황금 같은 추억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회견을 마친 신이치는 파트나박물관을 견학한 다음 오후 3시 전 비행기로 인도의 마지막 방문지인 캘커타로 갔다.이튿날인 14일 오전 신이치는 캘커타가 주도인 서벵골주의 트리부반 나라얀 싱 지사 관저를 예방했다.지사는 이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빨리 끝내고 이렇게 말을 꺼냈다.“회장님께 꼭 여쭙고 싶습니다. 세계평화와 우호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추상적인 이야기나 단순한 말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실제로 무엇을 했느냐, 무엇을 할 것이냐를 묻는 것이리라.
신이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핵무기 폐기’ ‘군축 추진’ ‘문화 교류’ ‘교육 교류’ ‘민간 교류’ 등을 들었다. 그리고 항목마다 지금까지 추진한 일들과 그 의의와 확대를 설명했다.“다시 말해 우리는 현실에서 행동할 수 있는 일부터 착수했습니다. 작은 한 방울이라도 결국 큰 강이 되어 넓은 바다로 흘러 갑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먼저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진행되지 않습니다.”
희망찬 미래는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자신이 용기 있게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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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가 펼치는 평화운동은 인간의 마음속에 ‘평화의 요새’를 구축하는 일을 기본 방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걸음은 달팽이처럼 느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끈기 있게 지속했습니다. 파도가 바위를 때려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십년, 몇백년이 지나면 바위 모양이 바뀝니다. 그것이 민중이 펼치는 비폭력 혁명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창가학회가 펼치는 평화운동입니다.”
싱 지사는 석존과 인연이 깊은 바라나시에서 태어났다.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신문 편집인을 거쳐 하원의원이 되었고 공업부 장관, 철강광산부 장관 등을 역임한 뒤 1977년부터 서벵골주 지사를 맡고 있다. 일흔네살의 고령이지만 목소리는 활력이 넘쳤다.
서벵골주는 인구가 약 4600만으로 인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도시 캘커타를 포함하는 큰 주다. 가난한 사람도 많다. 고용이나 식량문제, 빈곤에 따른 범죄 등 과제도 산적해 있다.
싱 지사는 그 현실의 거친 바다에서 벵골 사람들의 생활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뇌하고 격투했다. 그런 만큼 그저 입으로 외치기만 하는 관념적인 ‘평화주의’에는 회의를 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활인을 조직해 현실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불법(佛法)을 기조로 평화운동을 펼치는 창가학회에 큰 관심을 가진 듯했다.
지사 관저는 영국 통치시대에 캘커타가 인도의 수도인 시절 총독의 관저로 쓰였다.
집무실 벽에는 상반신 알몸인 간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지사는 간디와 함께 투쟁한 일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이야기가 평화운동의 근간이 되는 이념으로 옮겨지자 지사는 자신의 신념을 힘주어 말했다.
“저는 ‘인류는 하나’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석존이 인도에서 설한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설하는 불법 법리가 인류 통합의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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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 지사가 안타깝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본디 하나여야 하는 인류가 국가나 민족, 신분 등 온갖 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정말로 무너지지 않는 평화를 구축하려면 인간이 만든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벽을 없애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신이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인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무엇이었느냐’고 지사에게 물었다.
“영국의 지배가 끝나고 인도가 독립한 지 수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많은 사람이 석존이나 간디 등 위대한 인도의 사상가가 부르짖은 가르침과 종교를 잊어버린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는 인류에게 아주 중요한 것으로 인류사에 빛나는 인도의 큰 유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도, 정신의 나라인 인도도 그것을 망각하고 물질문명화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도, 인도의 정신문명에서도 가장 슬픈 일입니다.”
정신을 지탱하는 종교성을 잃으면 사람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짐승과 같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수성(獸性)이 폭주하게 된다.
지사는 이어서 말했다.
“간디는 제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첫째로 ‘정치에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정치에는 자비 등의 이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 정치는 권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는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따라서 종교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 ‘사람들에게 다가가라!’는 실천규범을 제시하셨습니다.”
민중을 떠난 정치는 없다. 민중과 끈기 있게 나누는 대화가 시대를 바꾸는 힘이 된다.
“셋째로 ‘겸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허하냐 오만하냐 이 일념의 자세가 인생의 성패, 행불행을 결정짓는다. 오만은 자신의 욕망, 사심(邪心)을 해방시켜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그르치게 만든다. 불법은 오만을 깨부수는 자기제어의 힘이다. 정신이 공명하는 소중한 추억을 만든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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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가 이번 인도 방문에서 회담한 인도 지도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받아 인도를 이끌고 있었다.
간디는 흉탄에 쓰러졌지만 그 동지이자 제자인 그들은 하나같이 마음속에 간디를 품고 있었다. 이 정신의 수맥이 인도의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한 이 나라는 언제까지나 정신의 대국일 것이라고 신이치는 생각했다.
싱 지사의 따뜻한 배웅을 받고 관저를 뒤로 한 신이치 일행은 빅토리아기념관을 견학했다. 인도 황제를 겸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해 20세기 초에 흰 대리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기념관을 견학한 뒤 밖으로 나오자 교사가 인솔해서 견학하러 온 초등학교 4, 5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아이들이 신이치 주위에 모여들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일행은 그곳에서 차로 싱 지사가 총장을 맡고 있는 라빈드라바라티대학교에 도서를 증정하러 갔다. 이 대학은 시성 타고르의 사상과 정신을 잇기 위해 타고르의 생가가 있는 터에 세운 교육의 성(城)이다.
타고르는 시가를 비롯해 소설과 희곡, 음악, 회화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예술가이자 사상가, 교육자이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의 영예에 빛난 위대한 벵골인이자 동양과 서양의 융합을 바라는 ‘세계시민’이기도 했다.
타고르는 압정에 허덕이는 인도 민중의 소리를 대변해 인간성의 승리와 평화를 노래했다. 40대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아이들까지 잃었지만 비애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고향 벵골을 분할하려는 영국의 횡포에 맞서 반대 운동에 앞장서서 고난의 폭풍우 속으로 돌진한다.
‘비애가 없는 인생은 없다. 산다는 건 그 비애를 이겨내고 환희를 쟁취하는 일이다.’
이것이 시성의 혼이 담긴 외침이다.
타고르의 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감싸 안고 격려한다.
타고르가 인도 국가를 작사, 작곡한 사실은 유명한데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한 방글라데시의 국가인 ‘나의 금빛 벵골’도 타고르가 작사, 작곡한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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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가 간디를 ‘마하트마’(위대한 혼)라고 불렀다. 그리고 간디는 타고르를 ‘구르데브’(신성한 스승)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의견이 서로 다를 때도 있었으나 평화, 비폭력, 진리 탐구라는 신념으로 맺은 ‘진정한 벗’이었다.
여기에 근대 인도의 새벽을 연 정신의 광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후 3시 반, 프라둘 찬드라 굽타 부총장이 라빈드라바라티대학교에 도착한 신이치를 온화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대학 안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풍격 있고 산뜻한 타고르 생가도 남아 있어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가득했다. 도서증정식에는 많은 교직원과 학생이 참석했다. 굽타 부총장이 앞으로 나가 조금 높은 목소리로 물이 흐르듯 말하기 시작했다.
“타고르는 1916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본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부총장은 타고르가 일본 그림을 본 소감을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소개했다.
“우리 벵골의 새로운 회화법에 힘과 용기와 고매함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
교류는 혼을 촉발하고 눈을 뜨게 한다. 문화는 서로 교류해야 발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끝맺었다.
“타고르가 일본문화에서 받은 영향이 근대 인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를 여는 첫 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보아도 정치적인 연대는 결코 길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연대에는 영원성이 있습니다.”
문화는 인간의 정신을 촉발하고 마음을 연결한다. 그러므로 학회는 문화의 대도(大道)를 열고 나아간다.
부총장의 인사가 끝나자 대학 관계자가 ‘우토리오’라고 부르는 숄처럼 길고 화려한 천을 인도방문단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것은 타고르가 처음 시작한 것으로 최고 빈객을 맞이할 때 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또 타고르의 사진과 친필 시 사본 등 진심 어린 기념품도 일행에게 증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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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 일행은 굽타 부총장의 인사에 고마움을 표한 뒤 변변치 않은 이번 도서 증정을 기점으로 대하처럼 도도히 흐르는 교육∙ 학술 교류의 흐름을 만들고 싶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기증 도서 일부와 100권의 도서 목록, 기념품을 부총장에게 전달했다.
이후 강당에서 일행을 환영하는 민족무용 등의 공연을 열었다. 학생과 교수가 하나가 되어 준비한 공연이었다.
자연을 찬미하는 타고르의 시가 흘렀다. 타고르가 창작한 우아한 ‘타고르 춤’을 선보이고 전통악기인 시타르도 연주했다. 전통극 ‘용감한 사냥꾼’에서는 우주에 내재하는 악과 격투하는 모습을 표현하듯 청년이 힘차게 춤췄다.
타고르의 시는 인도 민중의 혼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발산하는 희로애락의 목소리는 타고르가 내뿜는 지성의 빛을 얻어 보편적인 예술로 승화하고 ‘영원한 것’과 융합한다. 고뇌하는 한 사람을 향한 시성(詩聖)의 철저한 사랑은 벵골을 비롯해 전 인도 나아가 전 인류를 향한 사랑의 빛이 되어 세계를 비췄다.
때로는 웃기도 하고 눈물짓기도 한 이 무대는 위대한 ‘문화의 거장’을 계승하는 대학에 잘 어울리는 훌륭한 종합예술이었다. 열연하는 학생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부총장과 노교수들의 모습에서 따스한 인간애를 느꼈다.
신이치는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교수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황금빛 노을이 내려앉은 라빈드라바라티대학교와 이별을 고했다.
소카(創價)대학교 창립자이기도 한 신이치의 이번 방문으로 두 대학 간 교류의 길이 열렸다. 신이치는 우호의 묘목을 정성을 다해 소중히 끈기 있게 키웠다.
방문한 지 사반세기 뒤인 2004년 2월 라빈드라바라티대학교가 신이치에게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또 학위 수여를 위해 일본에 온 바라티 무카지 부총장과는 그 뒤 대담집 ‘새로운 지구문명의 노래를− 타고르와 세계시민을 말한다’를 출간한다.
지속적인 교류가 한걸음 한걸음 쌓여 신뢰와 우정의 꽃을 피운다.
신인간혁명 제29권 제4장 -원류-(59-64).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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