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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타리: 안티외디푸스에 관한 대담(Gilles Deleuze, Félix Guatari: Entretie sur l’Anti-Oedipe avec Raymond Bellour), 1973.
- 편지들과 다른 원문들(Lettres et autres textes: LAT, 2015), éd. 라푸자드 pp. 198-239 (P.314).
번역: 들뢰즈 다양체: 편지와 청년기 저작 ... (2022)(서창현, 갈무리)
210A: 첫째 만남. 198-211.
210B: 둘째 만남. 211-239.
대담자인 벨루르(Raymond Bellour, 1939-)는 들뢰즈를 이해하는 쪽이라기보다, 정신분석학의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그 편이 아니라 하더라도, 철학사적으로 상층과 표면을 다루는 재현(표상)의 체계 속에 있다. 어떻게 대담자가 되었을까? 푸꼬의 추천으로? 그런데 이 대담은 두 차례 만난 것 같은데,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그런데 이 당시(1973) 대담임에도 세 사람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현대지에 실리지 못했고, 미출판 자료로서 남았다가 라푸자드에 의해 여기 실렸다. 내재의식의 용출/탈주(두 저자)과 무의식의 도식화(벨루르) 사이에 차히는 아페이론과 페라스, 휠레와 이데아, 선한 행동과 선한 윤리(사고), 자연과 유일신 사이만큼 심연이 사이에 놓여있다.
두 번 만남에서 하나는 대담자가 책의 평판에 관한 것에 연관해서 “흐름”과 “강도성”에 대해 다루었고, 둘째는 “애정(성)관심”에 관해서 다루었다.
여기서 첫째의 주제와 연관하여 대담자(벨)는 아마도 무의식을 무-의식으로 생각한 것 같다. 무의식은 덩어리이며 유동하는 어떤 것이며, 벩송의 표현으로 과거(기억)은 현재와 불가분으로 유동하고 있다. 무-의식은 의식의 일부로서 단편들이라 추억들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며, 자아 또는 주체에 의해 관념연합처럼 연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 단편들의 연결 또는 접속에서 결핍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요소들의 결합에서 오는 결핍의 관점은, 벩송이 설명하듯이, 요소들 또는 부분들을 아무리 모아도(접속해도 조작해도) 하나의 전체 덩어리가 될 수 없기에 결핍이라는 개념을 만들 수 있을지라도, 의식 총체로서 흐름에는 결핍이 없기에, 오히려(자족적이고 충만이기에?) 넘쳐나고 퍼져나가기에, 욕망에는 결핍이 없다는 것이 두 저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리고 이 책은 논문을 쓰는 주 원전(제1일 텍스트)과 같은 것이 아니라, 맑스, 밀러, 로런스, 말라르메, 쟈베스의 책과 같이 느낌으로 읽으라고 한다. 책의 흐름이 독자와 접속되면 읽히고 읽히지 않으면 독자와 책 사이의 연결코트(전기코드처럼)가 없기 때문에, 주체니 자아니 하지 않고 “기계”라고 칭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라깡류의 정신분석의 옹호하는 독자는 접속이 안 될 것 같은데, 공즉시색(없는 것이 없는 것 같지 않고 뭔가 있는 것 같은)을 느끼는 자는 접속이 될 것이다. 물론 무극이 태극이며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고 하다가, 도덕경을 보태어 둘이 셋을 낳고, 그리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하면서, 다시 8괘의 3항을 이중으로 포개는 논법에서도, - 기의와 기표에 관한 논의를 하지 않고서 -, 흐르듯이 읽다가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전기콘센트가 연결되는 접속과 같다. 혁명의 조직이 신문에서 나오는 도표와 계보도표에서 이루어지던 시대를 지나서, 접속의 콘센트가 다발 속에서 계열들 사이에 연결되면 불꽃이 튀고 혁명은 이루어질 것이다. 터전에서 접속의 흐름이 통하면, 그 세상에는 용출선이 마치 하늘의 번개처럼 선을 연결하고 접속은 마치 두뇌의 뉴런처럼 연결될 것이다. 저항, 나아가 혁명이리라.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들이 보기에, 약간 엉뚱한 작가로서 레이몽 벨루르(1939-) 대담자로 찾아온 것인데, 두 저자는 이 대담자에게 평이하게 또는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으로, 미발표문의 드문 자료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두 저작가 책을 막 내고 나서 많은 평들이 언급되었던 시기에, 둘은 평들에 대한 견해를 이미 정리한 상태에서 대담에 임하고 있다. 둘은 ‘우리는 학문을 전달하거나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소통하는 영역들을 탐색하고 있다. 다음 작품은 영역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또한 흐르고 파동치는 인류의 역사 시기마다 변곡점이 있었다, 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56UMDF)
[# 200] Dessins et textes divers 101-249
[210A] 들뢰즈/가타리: 안티외디푸스, 1972에 관한 대담, 대담자 레이몽 벨루(Gilles Deleuze, Félix Guatari: Entretie sur l’Anti-Oedipe avec Raymond Bellour), 1973.
* 첫째 만남 198-211.
벨: 사람들이 안티외디푸스, 1972에 대한 언론 기사들을 읽을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은, 정신분석학자들 또는 돔나쉬(Domenach)같은 철학자들의 꼭지[논조]들을 제외하고, 여러 꼭지들은 이 책에 극히 우호적이란 것입니다. 이 책은, 이 책이 쓴 사회의 내부에서 어떤 기능을 하나요? 이 책은 보충적인 안전벨브(une soupape de sûreté supplémentaire)처럼 기능하는가요? 또는 당신들의 용어로 다시 말하면, 공리 그 이상(un axiom de plus)처럼 기능하는가요? (198)
들: ... 비평들 안에는 두 종류의 글, 즉 전문가, 정신의학자, 정신분석가의 글과 비전문가, 기자, 비평가의 글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죠. 전문가들의 반응이 전혀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왜 공격적이지 않을까요? .. 현재 조건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수세에 몰려있음을 느끼고 있고, 이런 류의 책에 방어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198)
[정신]분석을 받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 이들은 어느 정도 분석에 의해 다소 구석[궁지]에 몰려졌습니다. .. 이들은 뭔가(ça) 잘못 가고 있다[고장났다]고 느끼고, 또한 정신분석학적 비열한 짓(une saloperie)이 있다고 느끼죠.. 이들은 정신분석학에 충분히 저항하여 정신분석학에 반대하여 사유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정신분석하게 반대하면서 여전히 정신분석학적 용어들로 사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책과 완전히 독립적이고 앞서가는 일종의 소문([une] rumeur)을 형성합니다. 거의 우리 책은 정신분석학에 대항하여 항의로 접속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닙니다. (199)
과: ... 지금 표면화된 위기는 지연된 위기(crise différée)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위기의 과정에서 구조주의자가 된, 프로이트의 어떤 재강독자, 특히 라깡주의, 이것은 이미 정신분석학의 어떤 파산을 봉합하는(colmater) 방식, 은폐하는(masquer) 방식이었다. (199) [과타리가 라깡 세미나를 보는 관점일 것인데... 라깡주의가 정신분석학이 파산 중인 것을 은폐하고 있다고. (56UMC)] .
벨: 제 설명이요? 저는 사회의 어떤 계층(un certain couche)에서 그 책이 일종의 밸브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합니다. (199)
과: 왜 당신이 말한 전형들[전형적인 사람들]이 넌더리를 낸다고 상상하지 않습니까? .... (199) [과는 벨이 평가한 밸브역할이란 단어에 거부감이 있다. 이 책은 균열, 폭발, 탈주의 이야기이지 압력이 낮으면 열리고 높으면 닫히는 안전 벨브의 이야기가 아니다.]
들: 수많은 사람들이 말실수(lapsus)의 권리, 실수행위(l’acte manqué)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199) [프로이는 말실수, 실수행위, 꿈이 의미 있다고 했다.]
과: 무의미(non-sens)의 권리도‥… (199)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1969)에서 무의미의 여러 파라독사들에 대해 썼다. 아마도 과타리가 들뢰즈의 이 이야기(정신분석학적 소설)를 잘 이해했을 것이다.]
들: ... 세 가지 사정들 ... [한] 전문가(직업적인자)들, 정신의학자들과 정신분석가들 ... [둘] 우호적이거나 또는 적대적일 수 있는 기자들의 꼭지들, .. [셋] 저자에게 편지를 쓴 독자들, .. 정신분석을 5년 또는 10년을 받으며 넌더리를 낸 사람(독자)들 .. (199-200)
셋째 부류인 독자들은 돈[화폐]의 수준에서 정신분석을 비판하려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여전히 매우 불층분합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이 이런 류의 비판을 수용할 준비와 완전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200) [알뛰세류들이 정신분석과 연계지은 이유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
벨: ... 기사들의 필자들[기자, 기고가]에게도 독자를 위해서도 가치 있는 것 ... 이 책은 내가 말했던 안전벨브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200) [들/과가 말하지 않는 밸브이야기를 대담자 벨루르는 여기까지 3번이나 말했다.]
들: 이런 질문은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이미 회복된 책(récupéré) 또는 회복되지 않는 책인가? (200) [안전밸브처럼: 재활용되다(récupérer, 복구하다)에 연관되었다고?]
사람들이 같은 방향에서 좀 비슷한 책을 만들어낸다면, 우리 책이 분명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우리 작업을 계속하기에 이른다면, 또한 펠릭스와 나 우리 둘에게 앙띠외디푸스와 연관하여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기에 이른다면, 우리 책은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 찰나에, 앙띠외디푸스는 회복불가능하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앙띠외디푸스는, 펠릭스와 내가 연속해서 행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측면에서 행할 것이라, 자연적으로 완전하게 넘어서게 될 것이다. 펠릭스와 나는 이점에 관해서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201)
들: 만일 사람들이 이런 효과를 최초로(les premiers)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깨뜨린다면, 그 찰나에 사람들은 회복 불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201)
과: 책-효과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더 긴 시간 주기의 수준에 위치하는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 리비도 투자를 포획할 저항이 나타나겠지요. 리비도 투자에 대한 분석은 사실상 길을 잃고 자초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정신분석도 타격을 입을 겁니다.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그것은 전투입니다. 갈 길이 멉니다. 책 한권을 냈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201)
들: ... 책은 책 밖의 수많은 연결들(connexions)과 관련해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202)
과: [이 책에는] 메시지가 없다. (202)
들: 메시지도 없고, 밸브도 없고, 복구작업(récupération)도 없다. (202)
벨: 나는 절대적 실재로 가정된, 결핍없는 욕망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포함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이의 삶의 처음 몇 주부터 눈에 띄게 몇가지 결핍요소가 마련되는 것이 보이는데, 당신들은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조차 아이의 구성방식과 관련해 너무 큰 추상화 수준을 내는 것 아닌가요? (202)
과: 그건 최악의 추상입니다. 무엇의 결핍이지요? ...
들: 당신의 질문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단순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결핍이 있다, 어린아이는 젖가슴이 필요하다. 어린아이에게는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모든 것, 거세 그리고 신의 결핍까지도 우리에게 떠넘기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203)
과: [레이몽] 당신의 질문은 한물간 구식입니다. .... 흐름과 절단의 체계, 욕망을 절단하고 회수하고 코드화하고 탈코드화하는, 그런 다음 이 세 항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하는 체계로서 다양체 또는 강도의 체계가 있습니다. 한쪽에 아이가 있고, 다른 쪽에 엄마가 있고 그 다음 젖가슴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층위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203) - [A(아이), B(엄마), C(아이와 엄마의 교집합 젖가슴), φ(여집합, 다양체)]
들: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생산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 욕망이 자신의 대상을 생산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독특한 인격/ 욕망하는 주체의 분할은 이미 사회적 장에서 유래할 수 잇고 자연의 장에서도 유래할 수 있는 절단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동하는 흐름들을 바탕으로 한 절단이고, 욕망은 기본적으로 아무 것도 결핍되어 있지 않은 그러한 흐름의 유동입니다... (204)
심지어 사회 어떤 곳에는 결핍을, 다른 어떤 곳에는 과잉을 분배하기 위해 조직된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결핍현상은 욕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4)
벨: ... 거기서부터 동일한 문제가 둘째 층위에서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욕망이 너무 유동적이고 초인격적이며 파악불가능한 절대적 실재로 가정되어, 충만하면 할수록 그 만큼 접근하기 어려운 한에서 고전적인 정신분석의 결핍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런 욕망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204)
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치 흐름이 지각불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흐름은 어떤 식으로든 유동하기 때문입니다. (204)
건조함의 흐름 .. 그것은 자체로 현존합니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le réel)이라 불립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은 흐름 속에 있지, 사람들은 대상들에 마주하는 인격들이 아닙니다. 흐름의 관념(l’idee)은 개념(un concept)이 아닙니다. ... 무언가가 흐르는 것을 – 젖, 오줌, 정액, 돈(화폐) -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실재성입니다. ... 그게 정확하게 삶(vie)이란 거고, 사람들이 바로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말이지요. (204)
사람들에게 ‘당신은 작은 흐름이다. 그 다음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전혀 추상적인 언급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해방적(liberatoire)입니다. 우리 자신을 다른 흐름을 찾는 하나의 흐름으로 체험하다면 그것은 결핍이 아닙니다. (204)
과: ... 이행이나 기계적 변화를 있게 하는 일종의 지지이론(théorie de l’étayage)에 따라 사람들이 변증법을 첨가하는 현존의 일반적 범주를 간직한다면, 거기에서 사람들은 결핍을 수입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 .... 모든 흐름들에는 탈영토화가 있다고 하빈다. 그것은 흐름들이 그들 사이에 결핍연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하나의 흐름에서 다른 흐름으로 향하게 할 간극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바로 흐름들의 코드화를 구성하게 됩니다. (205)
예컨대 현존적 분리에서 결핍 때문에, 탄생 시 미성숙 때문에, 사랑의 흐름이 탈영토화된 연쇄의 요소들을 작동시키는 사교, 접촉, 말투, 소리, 온정 등의 흐름들로 향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205)
벨: 이 모든 접속, 이 모든 마주침은 매우 아름답군요. 그러나 어떤 주체가 흐름에 대한 만족의 경험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때, 그에게 적합한 흐름이 없다면 자동적으로 결핍문제가 재도입되는 것 같습니다. (205)
들: 그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만족(satisfaction)이나 향유(jouissnce) 같은 개념은 결핍으로 가정된 욕망과 관련하여 주조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흐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욕망을 체험하는 다른 방식입니다. (205)
그러나 개인이나 객체가 아니라, 흐름이 지나갈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적합한 흐름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결핍의 혗태로 체험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예로서] 어떤 동물이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물을 느낄 때, .. 물 쪽으로 향하도록 이끌린다고 말해야 합니다. (205-206)
그러나 주체는 흐름 앞에 있는 누군가가 아닙니다. 주체 자체가 흐름의 집합체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산다면, 그렇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 자체로 우리가 가진 욕망의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tout)가 변합니다. (206)
과: ... 탈영토화된 흐름들 – 그것들은 모두 서로에 대해 탈영토화된 흐름들입니다. - 중에서 어떤 것, 예컨대 추상량의 흐름들, 자본의 흐름들에는 분명 무언가가 상실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어딘가에 달러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는 영토와 노동력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가장 탈영토화된 흐름은 생산하는 개체들의 구성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재영토화되려고 합니다. 결국 흐름들의 미분체계는 언제 욕망하는 벡터의 구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206)
들: ... 사람들은 종종 작가를 예로 든다고 우리를 비난했지만, 그런 이유로 우리를 비난한 것은 정말 바보(le vrai connerie) 같은 짓입니다. 로런스(Lawrence, 1885-1930)[마흔다섯] 같은 사람은 단지 작가로서만 그런 방식으로 산 게 아닙니다. 그는 태양을 사랑하는 괴짜, 결핵환자, 여성을 매우 사랑하는 매우 현실적인 남자 등등의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흐름의 형태로 살았습니다. (207)
과: 블룸(Bloom)을 예로 들어보지요. 작가들은 다른 사람들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 인간은 모두 유랑자, 모나드입니다. 이 유랑이 염소처럼 말뚝 주위를 맴도는 것인지, 아니면 욕망하는, 탈영토화하는 탈주[용출] 지점들과 연관하여 자기 위치를 탐지하는 욕망하는 유랑인지를 아는게 문제입니다. (207)
벨: 베케트(Beckett, 1906-1989)의 소설의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에 그러한 배회와 유랑이 있다는 것, 미쇼(Michaux, 1899-1984)의 단편 여기저기에서도 그것이 발견된다는 것, 더블린에서 블룸의 하루는 그런 유목생활이아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207)
과: 또 바보 같은 말을 하려고 하는군요! 문장을 끝맺으세요. (207-208)
벨: 맞아요. 바보 같은 생각을 말해 보려해요. (208)
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문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들: ... 로런스, 아르토 (Artaud, 1898-1948) 등이 문학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208)
과: 플로베르(Flaubert, 1851-1880)의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 1869)은 문학이 아닙니다. (208) - [이런 말을 한 것은 천개의 고원(1980)에서 “리토르넬로”(1837)와 “단편문학”(1874)을 새로운 관점의 사유하기로 부각시킨 것과 같은 맥락이다. - 20세 영미문학에서 코스모폴리탄(사해동포주의) 또는 들뢰즈의 표현으로 까마라드리(동지애)의 소설들은 단순히 소설영역의 것만이 아니다.]
들: 다시 말하지만, 결핍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 플라톤부터 라깡까지 모두 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 그건 결핍(manque)과 만족(satisfaction, [자족])의 문제이다. 그래서 플라톤부터 라깡까지, 우리는 예배를 드리지요. (208)
들: 자본을 포함해서 그 점이 우리가 훨씬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본은 흐르고 탈주[용출] 합니다. ... 그러나 자본가들의 이름으로 깊이에 진행하는데…. 그것들은 인격들(des personnes)이 아니라, 흐름들이며 탈주들(des fuites, 용출들)입니다. (208)
벨: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바로, 왜 그것이 욕망이라고 불리는가 하는 거예요. (208)
과: 간단히 말해 욕망의 장 속에 있으면서, 가족, 부부, 또는 다른 상황속에 있는 사람을 본적이 있나요? 모든 것은 정확히 반대로 조직됩니다. 그것[모든]이 항상 흐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 그것에 균열이 일어날 때,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욕망이 접속합니다. (209)
들: ... 단절과 균열(les cassures)이 왜 일어날까요? (209)
벨: 나는 그것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일종의 마술적 조작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규정된, 통일된 개체들과 함께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난다. 전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흐름, 더 많은 흐름이다. 모든 흐름들, 우리는 이것을 욕망이라 부른다. 전에 우리가 그것으로 살았던 모든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욕망이 아니다.’ (209)
과: ... 따라서 그것은 두 가지 개체가 아니라, 두 가지 정치, 두 가지 철학입니다. [하나] 당신은 재중심화를 향해, 좌표계를 향해, 같은 것에서 같은 것으로, 동일한 것, 비슷한 것, 유사한 것, 부엌세간으로 갑니다. [다른 하나] 또는 다른 정치로 갑니다.
두 가지 욕망의 정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 파시즘적, 편집증적,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적, 재영토화하는 정치, 즉 좌표화하고 통괄조정하고 영토화하는 정치가 있고, [다른하나] 무언가가 삐걱거리고 탈주하는 순간, 그것에 투자하는 다른 정치가 있습니다. (209)
벨; 물론(Absolument). (209)
과: 그것을 전제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것, 욕망하는 에너지, 역사 속에, 시간 속에 새겨지는 것, 실재적 욕망의 현상학으로 돌아가는 것, 편집증적 욕망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탈주하는 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행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 어떤 경우에는 버팀목을 세우고, 사람, 역할, 기능을 분쇄하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 다른 경우에는 기계적 과정에 접근하는 문제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행은 탈영토화의 측면에서 발생합니다. (209-210)
벨: ... 다시 말해 두 가지 정치(deux politiques), 두 가지 옵션이 있다는 것이지요. (210)
들: 그러나 그 선택은 무의식[내재의식] 자체의 선택입니다. 그것은 결단에 의한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넌더리가 날 때 하는 선택입니다. ... (210)
그러나 우리는넌더리가 난 사람들, 소년, 소녀들과 막연한 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나는 자아나 주체에 넌더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작별을 고할 것입니다. ‘잘 가요, 벨루르….’ (210)
과: 감금된 주체와 함께, 갈망하는 존재와 함께….
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펠릭스와 나는 동맹군(des alliés)을 찾고 있습니다. 거의 비밀스런 구인 광고(des petites anninces under-ground)를 내듯이 그러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넌더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 우리는 그저 그들과 일종의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느낄 뿐입니다. (210)
밸: 들뢰즈 당신의 말 .. ‘둘째 책은 첫째 책과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책에서 우리는 입장과 포괄적 실존체계들보다는 개념들을 논의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 맞아요 그것은 들뢰즈의 잘못(faute)입니다. (210) - [이 책이 개념 중심으로 된 것은 들뢰즈의 잘못입니다.]
들: .. 펠릭스의 잘못도 있고 내 잘못도 있습니다. 이 책의 학구적인 측면은 모두 내 잘 못입니다. 이 책이 여전히 너무 학구적인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210)
학구적이지 않은 책, 예컨대 맑스(Marx, 1818-1883), 헨리 밀러((Henry Miller, 1891-1980), 로런스의 책을 마치 그것이 학구적인 책인 것처럼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학위논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책의 기의(signifie)를 찾는 것, 그리고 추가적인 노력을 한다면 책의 기표(signifiant)을 찾는 것입니다. 이 경우[후자] 책은 책으로 다루어지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는 세상 끝은 책이라고 설명합니다. 말라르메(Mallarmé, 1842-1898)가 이미 그렇게 말했듯이 말입니다. (210-211)
과: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 1912-1991)! (211)
들: .. 책을 읽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 존재합니다. 그 방식은 다시 말하자면, 책을 책 아닌 것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모든 페이지마다. 모든 문장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만일 잘 흘러가면, 읽는 사람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 개념이 무엇인지, “흐름(flux)”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관들 없는 신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단지 그에게 무언가를 생각나게 할 뿐이죠. 바로 그런 까닭으로 우리가 “기계(la machine)”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기 콘센트와 같은 영역입니다. 기계가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콘센트나 다른 기계가 필요합니다. 우리 책이 그렇습니다(Eh bien, notre livre, c’est ça). (211)
(7:28, 56UMD)(8:17, 56UME) (8:25, 56U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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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록 및 고유명사.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공산주의 혁명가, 혁명적 사회주의자, 철학자, 언론인, 역사가. 자본론 제1권: 자본의 생산방식(Das Kapital. Buch I: Der Produktionsprocess des Kapitals, 1867)
1821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51-1880) 프랑스 작가,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 1857), 감정교육(L'Éducation sentimentale, 1869).
1842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와 더불어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주도했다. 상징주의의 창시자.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 1877), 주사위 던지기 (Un coup de dès, 1897),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 주사위에 관한한 니체가 먼저일까?]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l'inconcient"(1915), in Métapsychologie,. 자아와 이드(Das Ich und das Es, 1923; Le Moi et le Ça), Cinq psychanalyses, fr. 1935(1. Dora, 1905; 2. Le petit Hans, 1909; 3. L'Homme aux rats, 1909;, Le Président Schreber, 1911; L'Homme aux loups, 1918).
1882 조이스(James Joyce,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1941), 아일랜드 더불린 출신 영국작가. Dubliners (1914)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1916) Ulysses (1922) Finnegans Wake (1939)
1885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마흔다섯] 영국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Lady Chatterley's Lover, 1928: L'Amant de lady Chatterley, 1928), 수필 묵시록(Apocalypse, 1931)
1891 헨리 밀러(Henry Valentine Miller, 1891-1980) 미국의 소설가. 북회귀선(北回歸線), 1934), 그는 다섯 번 결혼했다.
1898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8-1948) 프랑스 시인, 연출가.
1899 미쇼(Henri Michaux, 1899-1984) 벨기에 작가, 시인, 화가, 1955년 이후 프랑스 국적.
1901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1906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1912 쟈베스(Edmond Jabès, 1912-1991) 프랑스 작가, 시인. 이집트 태생 프랑스어 사용 유태인 가정출생,
1922 돔나쉬(Jean-Marie Domenach, 1922-1997) 레지스탕스(우파), 프랑스 작가, 지식인, 인격주의 흐름의 대표자들 중의 하나. 엠마뉘엘 무니에(1905-1950)와 알베르 베갱(1901-1957)과 더불어 Esprit잡지의 사무총장.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심층, 표면, 상층, 제도 속에서 토지, 국가(제국), 자본으로 위상을 규명하다.
1926 푸꼬(Paul-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푸코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미의 논리』를 묶어 ‘철학극장(Theatrum Philosophicum)(Critique, no 282. novembre 1970, pp. 885-908)’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썼다. 거기에서 첫 문단 끝에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Mais un jour, peut-être, le siècle sera deleuzien.”였다.
1930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프랑스 정신과의사. 공산주의자 들뢰즈와 함께 안티외디푸스, 카프카, 리좀, 천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까지 같이 작업하였다.
1939 벨루르(Raymond Bellour, 1939-) 프랑스 작가, 비평가, 이론가. 앙리 미쇼와 마찬가지로 영화에 관한 시론들로 알려졌다. Alexandre Astruc, 1963, [Alexandre Astruc, 1923-2016, 프랑스 영화감독, 작가] - 들루즈나 과타리 연관의 단행본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대담을 했을까? 푸꼬의 추천으로? - Henri Michaux ou une mesure de l’être, 1965 [미쇼(Henri Michaux 1899-1984): “앙띠외디푸스”에서 들뢰즈가 미쇼를 인용하고 있기에?]
1964 라푸자드(David Lapoujade, 1964) 프랑스 철학자. 파리1대학 교수. 벩송과 들뢰즈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 전문가. Puissances du temps. Versions de Bergso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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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Bloom):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의 Ulysses (1922)의 주인공, 유대인 광고업자의 하루, 더블린 시내를 떠도는 이야기.
블룸스 데이: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벌이는 이 축제는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의 주인공인 유대계 광고업자 레오폴드 블룸(Leopold Bloom)의 이름을 따서 '블룸스 데이'라 부른다. 이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더블린 시내를 돌아다녔던 소설 속 블룸의 행로를 따라 더블린을 누빈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은 오스카 와일드, 사뮤엘 베케트, 버나드쇼, 예이츠…같은 걸출한 작가들을 탄생시킨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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