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읍(현: 논산시)에서 남동쪽으로 난 643번 지방도로로 10분 남짓 가면 바로 관촉사 입구에 닿는다. 100m쯤의 나지막한 야산인 반야산 중턱에 있는 관촉사는 너른 연무벌을 향하고 있는데, 다 알다시피 연무는 우리나라 장정이면 한번은 거쳐야 하는 상징처럼 되어 있는 ‘논산훈련소’가 있는 곳이니 이 절에 늠름히 서 있는 관음보살상의 기상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함직하다.
이 절에는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부처가 있다. 도상 자체로는 관음보살상인데도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부른다. 미륵이 대개 상을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기보다는 조성된 내력에 따라, 또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불리게 마련이니 그 두 이름이 다 통용되어도 무방하겠다. 다만 미륵부처가 뜻하는 의미가 참으로 여러 가지임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미륵상의 다양성에서 알 수 있는데, 이 관촉사의 미륵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관제미륵 중의 하나이다.
부처 왼쪽에 있는 사적비에 따르면, 고려 4대 광종 19년(968)에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하여 37년 만인 7대 목종 9년(1006)에 완성되었는데 찬란한 서기가 삼칠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찾아오는 사람으로 저잣거리를 이룰 만큼 북적댔다고 한다. 또 머리의 화불(化佛)이 내는 황금빛이 하도 밝아 송나라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서 예배하면서 절 이름을 ‘관촉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절에는 관음보살상말고도 창건 당시에 같이 조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석등과 석탑, 그리고 연화배례석이 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논산군 논산읍 관촉리(현: 논산시 관촉동)에 있다. 야촌주유소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쌍계사에서 돌아올 때는 우회전)해 643번 지방도로를 따라 8㎞ 가면 관촉사에 닿는다.
논산읍 사거리에서는 국도 1번을 따라 대전 쪽으로 350m 가면 길 오른쪽으로 관촉사로 가는 643번 지방도로가 나온다(동성초교를 지나면 곧바로 643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3㎞ 가면 관촉사 주차장에 이른다. 숙식할 곳이 있다. 논산에서 2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
관음보살입상
계단을 따라 올라가 돌로 된 해탈문을 들어서면 안쪽에 거대한 부처가 내려다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미륵불이라는 이 부처는 온몸의 길이가 19m, 둘레 9.2m, 귀 길이 2.7m, 눈썹 사이 1.8m, 큰 갓의 가로 3.3m라는 말만으로도 그 엄청난 크기가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얼굴과 보관이 하나인 머리 부분이 한 돌, 가슴께가 한 돌, 허리 아래의 몸 해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음보살입상연꽃 가지를 들고 있고 머리 위에는 화불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해서, 교리상으로는 관음보살이나 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이 부처님은 언뜻 보기에도 온화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예사 부처님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몸체에 비해서 거대한 머리, 팽팽하게 팽창한 두 볼이 주는 긴장감, 길게 옆으로 찢어진 부리부리한 눈, 두꺼운 입술이 그 앞에 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위엄이 서려 있다.
생김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부처의 현신에서도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설화가 전한다. 광종 19년(968)에 반야산 앞마을 사제촌에 사는 한 여인이 산 서북쪽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 울음소리가 나서 찾아가 보니, 갑자기 큰 바위가 솟아나왔다. 이를 관에 알렸더니 조정에서는 “이것은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길조”라고 하며 금강산에 있는 혜명대사를 불러 부처의 조성을 명하였다는 것이다.
석공 100명을 거느리고 불사를 하던 혜명은 그 솟아나온 바위로 허리 아랫 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은 그곳에서 12㎞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의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 일꾼 1,000명을 동원하여 옮겨왔다. 그러나 이미 솟아 있는 바위가 하도 커서 머리를 올릴 재간이 없어서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냇가에서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부처를 모신다’고 하며 밑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아올려 덮고, 그 위에 가운데 부분을 올려놓고, 다시 모래를 쌓은 후 맨 윗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비로소 크게 깨달아 부처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부처는 세워진 뒤에도 신이한 행적을 많이 전한다. 고려 중엽에 거란이 침입하여 압록강을 건너올 때에 어떤 중이 얕은 내를 건너듯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따라 건넜더니 대군이 거의 몰사하게 되었다. 이에 그 대장이 크게 노하여 중을 칼로 치니 갓 한쪽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와 동시에 이 부처의 갓 한쪽이 바위 위에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떨어진 부분은 상하지도 않아 그대로 두었다가 조선 숙종 때에 다시 붙여 달았다고 한다. 외침에 관한 또 한 얘기는 일제 강점기 무렵에 있었던 것이 전한다.
순종 3년(1909)에 일본 사람 셋이 불공을 드린다며 와서 절에서 여러 날을 묵었다. 이중으로 갓을 쓰고 있는 부처의 큰 갓 위에 금동화불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관 끝에 놓여 있던 그 금부처를 모두 훔쳐 가고, 이마에 있는 광명주마저 깨뜨려 놓았으니 이제 관촉사 은진미륵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신이한 이야기들은 죄다 신통력 넘쳐 보이는 미륵의 생김새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이 부처의 조성배경에서 그 괴력이 뜻하는 바를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부처가 모셔진 자리는 멸망한 백제의 최후의 보루였던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가 그 뼈를 묻었으며 후백제의 근거지로서 강성했던 후백제군을 왕건이 고려를 세우면서 창과 칼로써 제압한 황산벌을 굽어보는 자리이다. 또 광종은 각처의 호족 세력을 연합하여 연계를 맺어 세운 고려의 정권에 법제를 정비하고 국가체제를 마련하여 왕권 강화를 확립한 왕이다. 그러므로 백제이자 후백제의 유민으로서의 의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이곳 사람들에게 고려의 강력한 왕권을 과시할 상징이 필요했고, 왕권의 화신으로서 그처럼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소유한 듯이 보이는 상징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백호를 수리할 때 먹으로 쓴 글씨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正德 十六年 辛巳 四月 十五日”이라 하였으니 그해가 바로 광종 19년인 968년이다.
얼굴 생김도 그러하거니와 이 부처의 강력함은 오히려 아래쪽에서 잘드러난다. 몸통 자체가 거의 큰 바윗덩어리처럼 뚝심 있게 서 있으니, 그 몸을 받치고 있는 발을 보면 어떤 강력한 힘이 밀어붙여도 끄덕도 않는다는 듯이 든든하게 땅을 거머쥔 발가락이 앞에 나와 있다.
사실감을 나타내려 한 흔적이 전혀 없는 얼굴 생김에 견주어 가슴께에 얹은 두 손의 조각은 무척 섬세한 편으로 연꽃 가지를 들고 있고, 머리 위에 화불이 있었던 흔적 등으로써 이 부처가 관세음보살임을 알게 한다. 아래쪽의 몸 부분은 다시 음각으로 옷 주름 모양만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해탈문을 들어섰을 때에 먼저 만나는 관음전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지 않다. 법당 안에 들어가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법당의 뒤쪽 벽에 길게 유리창을 두어 미륵불이 보이도록 했다. 예불할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부처의 얼굴 부분이 창을 채운다. 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시는 배려이다.
관음전 안에서 바라본 미륵불관음전 안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유리창을 두어 법당 안에서도 밖에 있는 불상이 보이게 하였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4월이면 관촉사 가는 큰길 양쪽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나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조용한 가운데서 관촉사를 돌아보려면 벚꽃이 피는 철을 피하는 것이 좋다.
석등
미륵보살 앞쪽에 석등이 한 기 있는데 부처 못지않게 힘이 좋아 보이는 것이 미륵보살과 같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높이 5.45m, 둘레 4m로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큰 석등으로 꼽힌다. 흔히 미륵불의 위엄과 힘에 눈이 빼앗겨 부처만 보다 오는 수가 많은데 이 석등도 듬직하고 볼 만하다. 보물 제232호이다.
석등미륵보살 못지않게 힘이 좋아 보이는 석등으로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크다.
지대석 위에 단단한 복련으로 기둥을 받쳤는데 기둥 중간에는 띠를 둘러 대마디 모양을 새기고 네 잎 꽃 여덟 송이를 꽂은 듯이 조각해 놓아 이 무뚝뚝한 석등에 다소나마 부드러운 느낌을 돌게 했다. 그러나 네모진 판석을 받친 앙련 역시 힘차며,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우면서 동시에 뚫린 곳을 화창을 삼아 시원한 맛을 보이고 그 위에 덮은 지붕돌에는 귀꽃이 번쩍번쩍 솟아올라 고려 초기의 강성한 힘이 넘쳐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상륜을 바로 올리지 않고 거기에 2층 누각처럼 화사석을 형식적으로 하나 더 얹어 넘치는 힘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같은 사각 석등은 고려 시대 석등의 특징이다. 우리나라 석등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은 팔각 간주에 팔각형 화사석이 얹혀, 팔각이 기본 형태이기 때문이다.
오층석탑
석등 앞쪽에 창건 때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이 있다. 다른 절에서라면 이만해도 우람한 축에 들겠지만 여기에서는 원체 듬직한 부처와, 부처를 밝히는 데 힘을 준 석등이 경내를 차지하고 있어 석탑이 오히려 왜소해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석탑도 높이 4.5m, 둘레 3.6m의 꽤 다부진 몸매를 하고 있다.
오층석탑과 배례석석불과 석등에 가려 왜소해 보이지만 꽤 다부진 몸매를 하고 있다. 석탑 앞에는 연꽃 세 송이가 가지에 걸린 듯이 조각된 배례석이 있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차지하고 든든한 이중기단에 5층을 올렸다. 몸돌의 높이에 비해 지붕돌은 넓지 않은 편이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왜소해지는 느낌을 준다. 중원의 월악산 세계사 미륵대원에 있는 오층석탑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고려 때에 지방마다 독특하게 정립해 가는 탑으로서 토속적인 맛을 지니고 있다.
석탑 옆에는 폭 0.4m, 길이 1.5m의 긴 댓돌이 놓였는데, 그 위에 잎이 여덟인 연꽃 세 송이가 연가지에 달린 듯이 조각되어 있다. 이 연화대석은 부처에 제물을 바칠 때에 쓰는 배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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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관촉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