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편백
글·사진 / 강판권 (쥐똥나무,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길과 도(道)
길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지만 없지도 않았다. 도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지만 없지도 않았다. 이 세상 자체가 길이면 길이고, 도면 도일 뿐이다. 이 세상 자체가 길 아니면 길 아닌 것이고, 도 아니면 도 아닐 뿐이다. 세상에는 가지 않는 길도 없고, 간 길도 없다. 없던 길도 내가 가면 길이고, 있던 길도 내가 가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춘원(春園) 임종국(林種國) 선생은 처음부터 길이 아닌 길을 걸었던 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분들이 그분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나도 얼마 전 그분이 걸었던 길을 가족과 함께 밟았다. 나는 춘원이 만들었던 길을 걸으면서 숲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춘원이 조성했던 편백숲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로 많은 질병을 치유할 수 있거나 관광객을 불러들여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숲길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 자연을 닮을 때만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임종국 선생은 이름부터 숲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외람되지만 임종국은 ‘숲을 나라에 심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분이 조성한 ‘축령산휴양림’(전라북도 장성군/고창군)의 편백숲을 두고 ‘조림왕’이라 부른다. 이런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단순히 숲을 가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단순히 1956년부터 1987년까지 사재를 털어 숲을 가꾼 것이 아니라 ‘생명’을 키운 것이다. 그분은 한국전쟁 직후 황폐한 한국의 산하를 30년 동안 울창한 숲을 통해 이 땅에 희망과 꿈을 심고 떠나셨다. 인류의 역사에서 숲은 부국의 기준이었다. 한국이 지금처럼 세계에서 상당히 인정받고 있는 것도 숲과 무관하지 않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인류의 문명은 숲의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임종국 선생은 한국을 지금처럼 만든 주인공이다.
나무처럼 살다
나는 새해를 가족과 함께 장성 축령산휴양림으로 떠났다. 나는 그곳 숲을 걸으면서 견자(견者)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다. 견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견자는 공자가 중용의 도를 얻은 사람 다음으로 광자(狂者)와 함께 칭찬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중용의 도를 얻은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렇다고 견자처럼 자신의 일에 미쳐 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임종국 선생은 바로 견자가 아닐까.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나무에 미쳐서 평생을 숲 가꾸기에 보낸다는 것은 실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나무를 심어 돈을 버는 것도 아닌 그저 심어서 가꾸기만 하는데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결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임종국 선생은 이 분야의 선구자이면서도 ‘영웅’이다. 그런데 나는 편백숲을 거닐면서 임종국 선생의 가족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임 선생의 가족 얘기를 알지 못한다. 다만 임 선생님의 가족도 선생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인간의 고집에는 반드시 가족의 희생과 보살핌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성의 편백숲은 곧 임종국 선생 자체다. 선생은 나무처럼 아낌없이 주고 떠나셨다. 인간이 나무를 아낌없이 주는 존재로 칭송하는 것은 치열하게 살기 때문이다. 선생도 오로지 모든 것을 바쳐 나무를 사랑하다가 가셨다.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만든 숲에서 행복을 만끽할 수 있고, 편백숲 초입에 위치한 선생의 기념비도 전혀 낯설지 않다.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기념비 주위에는 그분의 기상을 닮은 잣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겉과 속이 같은 배롱나무는 그분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그분의 기념비에서 산 아래로 향하면 편백숲이다. 그 숲은 곧 천국과 극락으로 가는 길이다.
편백숲 따라 희망 따라
측백나뭇과 편백(扁柏)은 넓적한 혹은 납작한 측백나무라는 뜻이다. 잎을 강조한 이름이다. 일본 원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학명[Chamaecyparis obtusa (Sieb. et Zucc.) Endlicher]에는 원산지 표시가 없다. 우리나라에는 1904년경 도입했다. 늘푸른큰키나무인 편백은 남부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나처럼 대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흔하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임 선생 덕분에 편백을 한없이 봤다. 숲을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온몸이 일본에서 히노키(ひのき)라 부르는 편백 향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숲에 한 번 다녀오기만 해도 몸속이 향기로 가득하거늘, 숲 가꾸길 평생하신 임 선생의 몸은 어떨까.
축령산 편백숲은 늘푸른나무라서 다른 나무와 확연하게 다르다. 특히 겨울의 편백은 한층 돋보인다. 공자가 말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의 뜻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임 선생의 기념비 가까이 다가가면 산기슭에 자리 잡은 편백이 길손의 눈을 사로잡는다. 어린 편백과 어른 편백이 어우러진 곳은 비단처럼 아름답다. 특히 황토 땅에서 올라오는 편백의 어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황홀하다.
임 선생이 키운 한 그루의 편백은 곧 희망의 나무다. 이제 20m가 넘는 어른으로 자란 편백은 때론 하늘마저 가리지만, 나무를 안고 하늘을 바라보면 그분의 정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편백의 가지들은 곧 그분의 영혼이다. 그런데 편백숲에 편백만 사는 것은 아니다. 편백숲에는 낙우송과의 삼나무도 적지 않게 살고 있다. 편백과 삼나무는 얼핏 보면 닮았지만, 겨울에는 육안으로도 금방 구분할 수 있다. 누런 모습을 띤 것은 삼나무이고, 푸른빛을 띠면 편백이다. 이곳에는 삼나무 외에도 길가에서 층층나무를 보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층층나뭇과의 층층나무는 갈잎큰키나무다. 잎 떨어진 층층나무를 안고 하늘을 보면 무척 아름답다. 하늘과 겹친 가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거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한 마리 새가 앉아 있다고 상상하면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다.
쉼터에서 만난 우물
편백숲을 걸으면서 고흐의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사이프러스와 밀밭> 등을 생각하는 것은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낯선 상상은 아니다. 숲은 치유의 숲이자 상상의 숲이기 때문이다. 숲에서 상상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숲은 신화의 보고이자 스토리텔링의 산실이다. 장성의 편백숲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숲에서 무한의 상상을 즐기지 않는다면 숲의 가치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 아니다.
상상을 즐기다 어느 정도 지겨울 법한 시간에 이 숲의 쉼터를 만날 수 있다. 겨울인데도 내가 간 날 이곳 쉼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쉼터에는 우물이 있었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우물이 아니지만, 나는 우물가에 앉아 임 선생의 삶도 샘 같다고 생각했다. 샘은 끝없이 물을 위로 올릴 때만 그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샘터의 물 한 모금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이곳을 찾은 분들도 편백숲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가니 임 선생은 곧 우리에게 샘물이다.
쉼터 주위에는 편백 외에도 단풍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 다양한 종류가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뿌리가 드러난 층층나무 한 그루가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산 속에서 쓰러진 나무를 보면 마음이 애잔하다. 그런데 쓰러진 나무는 완전히 땅에 누운 것이 아니라 15˚각도 정도는 서 있는 모습이다. 저 모습으로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무의 마음은 어떨까. 살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길을 가다 보면 쓰러져 비스듬히 살아가는 나무를 종종 만난다. 그런데 나무는 그런 모습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살아간다. 그 이유는 그런 자세일지라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온갖 힘을 다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뿌리가 뽑혔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에 흐르는 눈물 때문에 입에 넣은 귤이 목에 걸린다.
쉼터에서 다시 길을 나서면 이곳에서 가장 키 큰 편백이 길가에서 키를 재보라고 보챈다. 나처럼 키가 작은 사람일수록 편백은 돋보인다. 이럴 때 난 키 작은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한다.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무를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나무를 안고 찬찬히 줄기를 보면 홍갈색의 수피를 볼 수 있다. 얇게 조각으로 떨어지는 수피가 삶의 무게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곧게 뻗은 모습에서 일본 오사카의 여러 성과 사찰, 일본 천황이 직접 참석하는 미에(三重)현 이세(伊勢)시에 있는 ‘이세신궁’의 건축물을 떠올리는 것은 다소 불순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이 편백을 심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큰 편백에서 다시 길을 나서서 잠시면 탁 트인 언덕에 도달한다. 이곳에서야 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다. 이곳 나무 쉼터에는 편백으로 보이는 ‘해골’이 겨울의 한기를 더해준다. 그러나 이곳은 나무의 주검이 어떤 모습인지 일깨워준다. 나무는 죽어서도 아름답다. 나무가 죽어서도 아름다운 것은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치열하게 살지 않은 자가 죽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는 경우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렸다. 더 이상 걸어서 갈 시간도 없었거니와 인생이란 어차피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길은 편백의 다른 쪽을 볼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다. 아울러 돌아가는 시간은 올 때와 시간이 달라서 나무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숲 속에서 하루 종일 보내더라도 한순간도 지겹지 않는 것은 나무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나무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이 다양한 모습으로 볼 수 있어야 나무의 모습도 그렇게 보인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숲에서 가족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집에서 보는 가족과 숲에서 보는 가족은 같은 가족이지만 한층 사랑스럽다. 특히 숲을 걷는 두 딸의 뒷모습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나무와 함께하는 모습이 곧 쉼(休)이지만, 쉼은 단순히 쉰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나무에서 쉰다는 것은 곧 사악한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인간은 숲에서 정신을 치유할 수 있다. 숲은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치유의 선물을 선사하지 않는다.
겨울 산은 비어 있어서 아름답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산은 비어 있기 때문에 허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산이 비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오늘도 나는 마음에 나무가 들어올 수 있도록 쓰레기를 분리수거함에 넣는다.
편백과 삼나무는 얼핏 보면 닮았지만, 겨울에는 육안으로도 금방 구분할 수 있다
늘 푸른 큰키나무인 편백은 남부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뿌리가 드러난 층층나무 한 그루
편백숲 쉼터에 있는 우물
편백으로 보이는 ‘해골’이 겨울의 한기를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