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下] 사업은 나라를 위한 것
전 재산 사회 환원 구두 두 켤레 남기고 떠나①
- 미국 유학 가기 직전 부친 유기연과 함께
일제 말기 배일사상 혐의로 구금되었던 임직원들은 풀려나 회사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일제의 부당한 간섭 없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 활기찬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광복을 맞이한 한국에
이데올로기적 시련이 다가왔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미국과 소련에
분할 점령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유한양행은 38선 이북과 과거 만주 및
중국대륙까지 진출해 기업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지역 모든 상권을
일시에 잃고 말았다. 대륙에 구축하고 있던 기업자산은 유한 전체 자산의 80%에
이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편 미 군정 시기에 미국 의약품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미제 의약품은 품질이 좋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개발된 약품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나 한국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제품들이었다. 항생제인 다이야진·페니실린이나 결핵치료제로 쓰이는
파스 등은 그 효력이 경이적이었다. 국내에서 생산해 내는 제품은 그 질이나 가격으로는
도저히 미국 제품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46년 7월 유일한은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다. 그 무렵 한국의 기업가들은 대한
상공회의소를 결성하고, 유일한에게 초대 회두(會頭)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한국 기업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유일한이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뜻밖의
부탁에 유일한은 고심했지만, 이 일은 해방된 조국에서 절실한 재계를 건설하는
가치 있는 사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국내 상공업계를 공정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유한양행 사장직을 사임했다. 이때 일한은 구영숙을 사장으로 영입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이 되었다. 유일한과 구영숙은 미국의 한인소년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며, 구영숙은 성품이 곧고 강직하며 패기와 능력이 있어서
유일한은 일찍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구영숙은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의학계에 몸담고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면 자기가
일일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잘 운영되어 가리라 믿었다.
유일한은 대한상공회의소 회두 자격으로, 그 무렵 이화장(梨花莊)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을 인사차 방문했다. 이승만과는 미국에서 여러 차례 만난 일이 있었으나 가까이
모신 일은 없었다. 이승만은 유일한을 정중히 맞아주었다. 그 자리에는 조병옥을
비롯 저명한 정치인들이 함께했다. 이때에 이승만은 그에게 상공부 장관 입각을
권했으나 유일한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그해 12월 유일한은 돌연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계속되는 입각 강권 때문이었다.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며 한국 역사의 오점이다. 그 상흔은 휴전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 아닌 전쟁, 민족상잔의 동란으로 남북한 전 지역은 황폐해졌다. 북한군은 한때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으로 쳐들어왔으며, 군인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까지도
수백만 명이 죽고 가족은 흩어졌다. 산업시설은 파괴되고 특히 경인지역 공장지대가 입은
피해는 물론, 전 국토가 잿더미로 뒤덮였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
꾸준히 본사 직원들과 연락, 지시를 내리며 회사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유한양행은 전쟁 초기 시설과 자재에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보관하고 있던 약품은
징발되었으나 북한군은 공장시설을 파괴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으로 회사는 활기를 되찾는
듯했으나 그해 겨울 다시 중공군 참전으로 정부와 국민들은 서울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한양행은 가까스로 시설 일부와 약품원료를 피란지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 도착한 유한양행은 범일동 삼광제약 사옥을 얻어 가까스로 업무를 시작했다. 부산
피란지에서의 제약 사업은 수많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유한양행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간유(肝油)에서 비타민을 추출, 정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창의적인 생각과 기술개발은
언제 어느 때에도 성공의 비결임을 절감케 했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