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이달의 테마비평-지금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
은유로서의 풍경
장석주(시인)
풍경은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아니다. 풍경은 애써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 자의 것이다. <주위의 외적 풍경에 무관심한 <내적 인간>에 의해 처음으로 풍경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풍경은 오히려 <바깥>을 보지 않는 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단순하게 풍경을 복제하지 않는다. 복제란 풍경이 뒤집어쓰고 있는 자명성의 피동적 수락에 지나지 않는다. 풍경은 그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내적 인간>들에 의해서 다시 씌어진다. 풍경은 <거울을 깨뜨린>자에 의해서만 읽히고[의미화], 읽는 행위와 다시 쓰기는 하나로 겹쳐진다[동일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 현시이다.
나는 지금 1억 년 전의 사서史書를 읽고 있다
빗방울은 대지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돌 속에 북두칠성을 박아놓고 우주의 거리를 잰다
신호처럼 일제히 귀뚜리의 푸른 송신이 그치고
들국菊 몇 송이 나즉한 바람에 휘어질 때
세상의 젖이 되었던 비는, 마지막 몇 방울의 힘으로
돌 속에 들어가 긴 잠을 청했으리라
구름 이전, 미세한 수증기로 태어나기 전의 블랙홀처럼
시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새긴 화석이 되었으리라
나는 지금 시詩의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1억 년 전의 생명선線 빗방울을 만난다
사서史書에 새겨진 원시 적 우주의 별자리를 읽는다**
빗방울이 돌에 새겨놓은 <화석>이라니! 1억 년 전에 <마지막 몇 방울의 힘으로/돌 속에 들어가 긴 잠>을 청한 몇 낱의 빗방울을 깨어나게 하는 젊은 시인의 상상 앞에서 나는 전율과 현기증을 느낀다. 그것은 유한한 존재가 1억 년 전의 시간 앞에서 자기 초극적 계기와 만나는 황홀감에서 비롯된다. 모름지기 시인이란 풍경이 보여주는 바 자명성의 피동적 수락만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자이다. 풍경은 오히려 바깥을 보지 않는 자에 의해 발견된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은 그래서 옳다. 1억 년 전에 이 땅에 떨어진 빗방울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화석으로 남았다. 젊은 시인이 그 <빗방울 화석>에서 보는 것은 현존과 1억 년 전의 세계를 매개하는, 힘없는 빗방울이 돌에 새겨놓은 <史書>이고, 원시 시대의 <우주의 별자리>이다. 물론 <빗방울 화석>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시인이 발굴해 낸 은유로서의 풍경일 따름이다.
현존은 언제나 과거라는 블랙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의미됨의 찰라, 혹은 생성되는-현존의 찰라는 끝없이 유예된다. 우리의 현존은 주체의 인식론적 지각의 그물망에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과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현존이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에 속해 있다. 현존은 오고 있는 것, 지금 생성 중인 상태 속에 있다. 상상의 힘은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1억 년 전의 시간이 현존에게 보내오는 <푸른 송신>을 수신하게 만들고, 지금-여기 우리의 현존을 아직 오지 않은 1억 년 후의 세계로 견인해간다.
세상-풍경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精神이여. 뻗쳐 나오는 눈길이여. 풍경은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젊은 시인들의 피로가 짙게 배인 몽상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상상의 힘은 천 개의 풍경의 거울을 깨고 풍경을 넘어서 간다. 그리하여 볼 수 없는 풍경의 裏面과 深淵까지 꿰뚫어 본다. 나는 풍경의 투명성과, 풍경이 가진 천 개의 이면과 천 개의 심연을 함께 보여주는 젊은 시들을 읽고 싶다.
*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민음사, 1997년.
** 배한봉, 「빗방울 화석」, 『우포늪 왁새』, 시와 시학사, 2002.
시인 장석주
*충남 연무 출생
*시집 『햇빛사냥』『어떤 길에 관한 추억』『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