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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묵상글 들 (부활 2주 화요일)
<이영근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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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영으로 다시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대체, 왜 오늘 새로운 쇄신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는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다시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관행에 대한 완고함 때문에, 믿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이란 마치,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처럼, 복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열의에 있어서, 방법에 있어서, 표현에 있어서 새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특색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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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철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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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화두는 인간, 디지털, 자연 셋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입니다. 하느님을 잃으면 시야를 잃습니다. 맹목적 탐욕의 야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니 하느님 안에서, 휴면 뉴딜(인간)이요, 디지털 뉴딜이요, 그린 뉴딜(자연)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평자는 코로나 이후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을 제안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 육체적 면역력을 증강하는 방향이라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의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 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 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의 바이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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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2주 화요일-우리의 소유가 꼭 필요한 건지
제가 청원장을 할 때의 얘깁니다.
청원기를 마치고 수련 들어가기 전에 저에게 하고 싶은 얘기나
후배들을 위해서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라고 하면
꽤 여러 형제가 '제발 꼭 필요하냐?'고 묻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형제들이 무엇을 사겠다고 허락을 청하러 오면 제가 거의 매번
그리고 모든 형제에게 '그거 꼭 필요해?'라고 묻곤 했는데
그거 묻지 말라는, 그것참 대답하기 곤란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후에도 계속 그 질문을 하였습니다.
괴롭겠지만 필요를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지요.
저에게 올 때는 그 형제들 말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그 필요가 꼭 필요한 것인지, 형제의 필요가 프란치스칸 가난과
사랑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지요.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거의 없었고,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생각하느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프란치스코에게 한참 못 미치는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어도 필요한 것이 많고도 많지요.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를 소유키 위해 세상의 것을 가지려 들지 않았고,
세상 것을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필요가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가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이 애긍을 청할 때 수도원에 줄 것이 하나도 없자
수도원에 하나밖에 없는 성경을 주라고 하면서 성경에 사랑을 실천하라고
쓰여있으니 성경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는데 이것이 그의 사랑입니다.
수도원에 성경이 없다면 말이 됩니까?
성경을 안 읽는 수도자가 수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도원에 꼭 필요한 성경이지만 더 필요한 가난한 사람에게
줘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저나 우리 수도원은 뭐 그렇게 필요한게 많은지,
더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지 못하는지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저께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런 면에서 우리의 이상향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욕심을 부리면 많이 가지고도 늘 궁핍한데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에는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는 궁핍한 사람이 없는 것뿐이 아닙니다.
이 공동체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궁핍함이 없고 일치와 평화를 살 뿐 아니라
은총을 누리는 천상의 삶을 미리 앞당겨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삶이 지금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까?
이런 꿈을 지금 우리가 꾸면 안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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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하느님의 숨, 기운, 바람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받은 이, 성령의 사람은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을 향해 움직이지요. 성부, 성령과 하나이신 예수님이 바로 그러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누구보다 자유로우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곳은 "십자가 위"입니다. 세속적 영광에로 '들어높여짐'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의 죄를 대속해 구원을 안겨 주시려는 자발적 '들어올려짐'입니다.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면 대개는 주어진 자유를 자기 이익이나 편의를 위해서 쓰고, 조금 더 관대하게 가족, 친구, 지인, 자기 편을 위해 사용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온전한 자유로 죽음을 선택하고 받아들이십니다. 그 희생의 목적은 믿는 이들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 신자 공동체의 생활상을 보여 줍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공동 소유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당히 낯선 개념입니다. 기초생계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수도자들의 덕목 정도로 국한해서 생각할 정도지요.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이 자청하여 가진 것을 내놓고 함께 누렸다니 참 놀랍습니다. 어떤 제도나 이념이 강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온전한 자유로 소유를 공유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영적 형제자매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소유를 처분하거나 활용하는 일은 온전히 소유자의 자유 영역이니 제 유리한 대로 사용한다 해도 누가 뭐랄 수 없지요. 그 소유한 바를 모두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고 필요한 만큼만 나누어 받는 것은 온전한 자유로 공동선 추구하는, 성숙함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룩한 결단일 것입니다.
"모두 큰 은총을 받았다"(사도 4,33).
모두, 누구도 소외됨 없이 큰 은총을 누렸다고 하니,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말씀인지요! 사실 악이 탐욕과 이기심, 질투와 욕정을 거느리고 인간 세상에 스며들기 전까지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으로 지으신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은총을 누리고 만끽했습니다.
차별과 소외, 착취와 수탈로 소유의 불균형이 시작되고 권력과 기회의 치우침이 심화되면서 인간은 받은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불안과 빈곤, 질병과 죽음의 위협,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가 은총을 누리던 복된 상태에서 우리를 점점 더 멀리 떼어놓고 말았지요.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 4,34).
받은 이는 궁핍에서 벗어나고, 그렇다고 내놓은 이가 궁핍해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얻은 이와 덜어낸 이가 함께 더불어 자유를 얻지요. 복음 속 예수님과 독서 안 신자들의 모습에서 모든 걸 훌훌 털어낸 홀가분하고 큰 자유가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의 극단적 치우침 현상이 함께 더불어 은총을 누려야 할 인간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오늘날, 말씀이 우리를 새 질서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처럼 목숨을 내놓거나 초대 교회 신자들처럼 가진 걸 내놓는 건 아니라도 분명 각자의 영역에서 가능한 부분이 있겠지요.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자유는 비움의 산물입니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영의 바람에 실려 자유와 은총을 쟁취하고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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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3,7)
'또 하나의 탄생!'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탄생', 곧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탄생의 의미는 바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되는 것,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성당 옆에 조그마한 텃밭을 만들어 여러 채소들을 심었습니다. 상추, 쑥갓, 토마토, 가지, 고추, 파프리카, 부추 ㅎㅎ
앞으로 이 친구들이 쑥쑥 자라나 아낌없는 사랑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입니다.
오전에 채소를 심고, 점심 식사 후에 산책을 하면서 생명 넘치는 피조물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 피조물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조건 없이 자신의 전부를 너를 위해 내어놓는 사랑,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나무에 들어 올려 진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보다 자연의 피조물들이 새 계명을 더 잘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도 내 것으로 소유하면서, 너를 위해 내어놓는 것을 주저하는데.
피조물들은 항상 겸손하게 내어놓는 사랑을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나 탈렌트들을 내어놓는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 같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니 이것저것 따지거나 조건을 달지 말고, 서로가 너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나무가 됩시다!
우리도 예수님이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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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4,32-37
요한 3,7ㄱ.8-15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납시다!
초막절에 열린 유다 최고의회에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변호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까지 치렀던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계속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요한 복음 3장 7~8절)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유일한 비결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땅에 하강(下降)하시고, 상승(上昇)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 신앙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행위인 세례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례로 거듭 나야만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그 결과 하느님을 뵐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로서 율법이나 지적인 측면에 있어 최고봉에 서있던 니코데모였지만,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여전히 알쏭달쏭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의문 부호를 찍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요한 복음 3장 9절)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재생을 말씀하시는데, 니코데모는 육체적 재생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재생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짧막하게나마 성령의 존재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성령은 마치 바람같다고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동서남북 어디로든 자유자재로 부는 것처럼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도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하느님의 성령도 바람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도 마치 바람같습니다.
나름 버틴다고 두 다리에 힘을 딱 주고 지상에 서있지만, 성령의 세찬 바람이 언제, 어디에서
확 불어올지 모릅니다.
그 바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더 머물러 있고 싶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성령께서 ‘자 때가 되었다! 일어나자!’
그 한 마디면 그걸로 끝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과 축복은 놀랍습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로 다시 태어난 우리 영혼과 육신은 마치도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평소 잘 들리지 않았던 부드러운 주님 음성을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벼워진 몸을 성령의 바람에 내맡겨 어디로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서든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지긋지긋하던 십자가가 사실은 가장 큰 하느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지루하고 고달프게 만들었던 일상생활이
눈부신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새로 나게 될 때 그리도 우리를 성가시게 했던 이웃들이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말끔하게 정화되어 순수해진 영혼의 눈으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들어있는 값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나게 될 때 주변 모든 사물들이 다 스승으로 변할 것입니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들, 푸른빛을 더해가는 대나무 숲, 출렁이는 물결,
고요한 호수, 황금빛 석양...이 모두는 다 인생의 진리를 말해주는 스승이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예수님은 더 이상 멀고먼 옛 사람, 이천년 전의 나자렛 사람이 아니라, 오늘 내 일상생활 전체를 동반하시는
‘나의 주님, 나의 스승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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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4,32-37
요한 3,7ㄱ.8-15
우리를 하늘로 끌어올리는 성령의 바람은 십자가다
1500년대 프랑스 카푸친 수도회에 성인으로 추앙받는 암브로시오란 수사 신부가 있었습니다.
어깨에 손바닥과 같은 특이한 점을 가진 채 수도원 앞에 버려져 아기 때부터 수도원에서만 산 수도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함은 같은 수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고해성사를 보는 수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원장 수녀에게 말하여 아주 심한 벌을 받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마귀가 암브로시오 수사를 넘어뜨리기 위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그 수도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오 수사에게 조금씩 명예와 건강에 신경 쓰는 사람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쾌락의 맛을 느끼게 해 줍니다.
결국, 그는 한 여인을 좋아하게 되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여동생입니다.
마귀는 암브로시오 수사가 그 여인을 범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때 어머니가 들어와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까지 살해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을 찌르는 수도사의 어깨를 보고는 자기가 철 모를 때 수도회에 버린
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암브로시오 수사는 어머니까지 죽이게 된 자신을 보며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암브로시오 수사에게 화형이 선고됩니다. 죽기 전에 그는 사탄과 타협을 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줄 테니까 자신 때문에 미쳐버린 여동생을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여동생은 정상으로 돌아오고 암브로시오 수사는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며 죽어갑니다.
영화 ‘더 몽크(수도사)’(2011)의 줄거리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어차피 사제가 되기로 한 것, 존경받는 사제가 되자!’ 라는 마음으로 산 적이 있었습니다.
극도의 절제 생활을 하였습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혼자 성체조배 하였고, 식사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하루 한 끼만 먹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15킬로가 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암브로시오 수사의 초기 모습과 비슷했다고 생각됩니다.
내 안에서 어둠의 힘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사는 삶이 ‘나 자신’을 높이기 위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늘로 오르는 삶은 나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높여주는 삶입니다.
암브로시오 수사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들어 높여짐이 아닌, 자신이 피해를 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자신을 잊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되어도 결국 자신이 들어 높여지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면 실제로는 낮아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오 수사에게 어머니의 피는 그 자아가 완전히 죽는 독이 되었습니다.
그 피는 암브로시오를 십자가에 못 박아 만인들 앞에 죄인으로 서게 했고 결국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성령은 십자가로 마치 엘리야를 들어 올린 바람처럼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립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이어지며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새로 태어남에 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행동을 바꿔서가 아니라 새로 태어남을 통해 구원에 이릅니다.
이는 니코데모와 같은 바리사이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새로 나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새로 나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새로 나셔서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뱀에 물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뱀을 보며 상처를 치유하였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각자를 물어 죽이는 뱀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그 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 혹은 당신 뜻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늘로 올려짐을 받으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들어 올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항상 이런 기도가 울려나올 것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은 아무래도 좋으니 우리만 구해 달라고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매다셨습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를 보며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이웃의 행복을 위해 우리 자신을 못 박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자아의 독은 누군가의 자아에서 흘러나온 피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리 뱀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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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 양주 올리베따노
요한 3, 7. 8-18(부활 2 화)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드러내줍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hayah)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qum, heqis) 라는 뜻을 나타내는 용어들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을 드러내주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셨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죽었는데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당혹스런 것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다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드높여졌다고 합니다. 분명 누명을 쓰고 죽는 실패인데도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겨 승리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 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바로 ‘이 놀라운 변화’, 역전의 대전환을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위’란 무엇인가?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를 말합니다. 두 가지 방식, 곧 그 질서 안에 놓인 특별한 방식을 말합니다. ‘아래’ 질서의 통치원칙은 자기중심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위’ 질서의 통치원칙은 사랑의 성령입니다. 이는 우리는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위”로부터 태어날 수 있는가?
곧 ‘위’로 올라가는 일이 가능한가?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서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영으로 다시 새로 태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대체, 왜 오늘 새로운 쇄신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는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다시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관행에 대한 완고함 때문에, 믿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이란 마치,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처럼, 복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열의에 있어서, 방법에 있어서, 표현에 있어서 새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특색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했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고,
죽었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했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숨겨져 있는 저의 생명이 당신과 함께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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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는 예루살렘에 있던 초기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해 주며, 그 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복음에 충실하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완벽하게 복음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보다는,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려면 본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시하려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먼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물질의 나눔’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합법적인 재산의 소유를 부정하지 않으며 온전히 자기 결단에 따라 각자의 재산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내놓았습니다. 그 나눔을 실천하는 바탕에는 “한마음 한뜻”이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한뜻’은 단순한 친구 사이의 공유를 넘어 믿는 사람들
곧 신자들의 공통적인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히브리식 개념인 ‘한마음’이 더해집니다.
유다인들은 전통적으로 기도의 시작을 알려 주는 표지로 ‘한마음’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주님과 이루는 일치와 구성원 간의 친교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기도할 때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야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을 보면, 세속적인 개념의 차원에서 물질 그 자체에 얽매여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니코데모가 등장합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니코데모는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그 외아드님 예수님에 대한 우리 믿는 이들의 한마음 한뜻이야말로, 물질을 넘어 친교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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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새벽을 열며.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빠다킹신부님
한 청년이 배가 너무 고파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가난한 청년이었기에 주머니를 탈탈 털어 간신히 햄버거 하나를 주문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햄버거가 나왔고, 이 청년은 야외 벤치 그늘에 앉아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햄버거 가게 앞에 멈췄습니다. 차에서는 비서인 듯한 여자가 나오더니 햄버거 가게 안으로 들어가 햄버거 세트를 구매한 뒤에, 차 안으로 이 세트를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모두 보고 있었던 청년은 생각했습니다.
‘아~ 나도 누가 사다 주는 햄버거를 저렇게 멋진 승용차 안에서 편히 앉아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사람도 벤치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나도 저 청년처럼 다리가 건강해서 햄버거를 사 먹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서로가 상대방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세상일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힘든 세상일이라며 불평불만을 갖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세상일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제대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에서 태어나서 하늘 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하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이해력의 부족만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도 탓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며, 따라서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영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 어떤 순간에서도 희망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진심으로 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오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주님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행복의 길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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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삶을 변화시켜 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가? 거울을 보라(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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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신앙, 날강도 신앙
언젠가 어느 분이 거리에 있는 자판기를 두드리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자판기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환불을 받든지 아니면 어떤 조치를 받겠지만 누가 관리하는지를 알 수 없는 거리에 세워져 있는 자판기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겠지요. 결국 이분은 화만 내다가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자판기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자판기식 신앙’과 결별해야 한다는 글을 쓰셨습니다. 즉,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 원하는 물건을 취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원하는 바를 청해서 들어주시길 요구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못한 신앙은 아닐까요?
거리의 자판기에는 돈이라도 넣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요구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자판기에 돈도 넣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쏟아내라고 화를 내는 것만 같습니다. 기도나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실천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자기가 필요한 것만 달라고 합니다.
자판기 신앙을 뛰어넘어 ‘날강도 신앙’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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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제2주간 화요일
2020년은 인류 역사에 새로운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코로나19를 대하는 방법으로 나눠질 거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는 전염성이 강하고,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망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의료체계가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막는 방법으로 단절과 봉쇄를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경을 봉쇄합니다. 시민들에게 집에 머물도록 명령합니다. 재택근무를 유도합니다. 필수적인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설은 강제로 문을 닫게 합니다. 단절과 봉쇄는 고립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기에 가짜뉴스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경제활동과 무역이 위축됩니다. 자영업자와 소 상공인의 피해가 심각해집니다. 세계 경제도 엄청난 피해를 맞이합니다. 의료체계가 열악한 나라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병실이 모자라고, 치료할 의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물건을 사재기하고, 이웃은 잠재적인 전파자가 됩니다. 개인의 자유와 행동은 감염병 방지의 일환으로 제약을 받게 됩니다. 국경의 봉쇄는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국경을 봉쇄한 국가에서도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국민의 귀국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막는 방법으로 연대와 협력을 이야기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 의료진을 파견하고, 의약품을 지원하는 겁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권고합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지키며, 손을 자주 씻도록 합니다. 증상이 의심되면 자발적인 자가 격리를 지키고, 의료진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경제와 방역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단시약을 개발하고, 증상이 있는 사람을 신속하게 검사합니다. 경증의 환자는 자가 격리를 하거나, 국가에서 지정한 시설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습니다. 중증의 환자는 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바이러스의 확산을 저지할 수 있고, 중증의 환자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동요도 적고, 사재기와 같은 혼란도 막을 수 있습니다. 국가와 의료진이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완치될 수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제안했고, G20의 정상들이 화상회의를 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해서 연대와 협력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한국은 국경을 봉쇄하지 않았고, 시설을 폐쇄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선제적인 검사를 통해서 바이러스 확산을 늦출 수 있었고,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면서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자발적인 시민의 협력으로 사회적인 혼란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분명 바이러스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방법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떤 방법을 선택하면 좋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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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넓힙시다
-자아 초월超越의 여정-
코로나 사태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마지막 전화위복의 기회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많은 식자들이 코로나 사태 이전과 코로나 사태이후로는 다를 것이라 합니다. 획기적 ‘전환점(turning point)’이라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물론 부활축제시기까지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의 여파가 더욱 우리의 경감심을 촉구하며 깨어 겸허한 마음으로 회개의 삶을 살게 합니다.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 치러진 4.15총선도 참 의미가 깊습니다. 2020년 4.15총선은 한마디로 ‘한국 정치 주류의 교체’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45년 분단 이래 장기간 한국 국내 정치의 주류로 독보적 지위를 누리던 보수진영은 2020년 4.15총선을 통해 진보진영에게 자리를 넘겨 줌으로 한국 정치 주류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거국적인 회개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며 신인류의 출현이 기대되는 시기입니다.
코로나 19위기 이후, 지속가능한 경제 구축을 위한 과감한 발전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는 글에도 공감이 갔습니다.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미래를 위해 ‘휴먼 뉴딜’,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을 포괄하는 전환적 뉴딜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휴먼 뉴딜은 만인의 존엄과 인격의 평등을 보장하는 사람 우선 사회로의 전환입니다.
디지털 뉴딜로 산업경쟁력 강화와 사회문제 해결의 동력으로서 디지털 전환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며, 그린 뉴딜로 에너지 자원 순환 경제를 실현하여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을 억제함으로 지구를 살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적절한 진단입니다.
결국 미래의 화두는 인간, 디지털, 자연 셋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입니다. 하느님을 잃으면 시야를 잃습니다. 맹목적 탐욕의 야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니 하느님 안에서, 휴면 뉴딜(인간)이요, 디지털 뉴딜이요, 그린 뉴딜(자연)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평자는 코로나 이후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을 제안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우리 모두의 정신적, 육체적 면역력을 증강하는 방향이라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의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 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 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의 바이러스’이다.”
바로 코로나 사태이후로의 작금의 상황에 대한 진단이며 더욱 회개를 통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전환을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대로 우리 모두 위에서, 영에서 태어나야 할 시기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 면역력을 키우는데 우선적이 일이 위에서, 영에서 태어나는 일이겠습니다.
바로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이들이 바로 신인류의 출현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매일 평생 회개를 통해 성령의 은총과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위에서, 영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두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한 교구사제와의 면담고백성사시 나눈 대화입니다.
“결국은 내문제입니다. 함께 사는 이들은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넓혀 나가는 것이 답입니다. 서로의 상처는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을 때 영적 성장과 더불어 치유도 이뤄질 것입니다.”
바로 요즘 읽은 영어 말마디, “Expanding Our hearts in Christ(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기)” 에서 착안한 조언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적절한 처방의 말마디인지요! 바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넓혀가는 일이 위에서, 영에서 태어나는 구체적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들입니다.
어제 수도 형제와 나눈 일화도 소개해 드립니다. 동영상에서 미사봉헌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모습이 너무 거룩하고 아름다워 사진을 찍어 전송하자 즉시 답이 왔고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교황님, 미사장면이 참 거룩하고 아름답네요!”
“20년전에 사신 스와치 손목시계 때문에 더 거룩해 보입니다.”
“아, 손목시계를 발견했네요! 스와치 손목시계가 저렴합니까?”
“하나에 십여만원 하는 대중시계입니다. 참고로 요한 바오로 2세 시계와 베네딕도 16세 시계는 고가高價의 명품입니다.ㅎㅎ”
“아, 너무 대조적이라 비밀로 해야할 것 같네요.ㅎㅎ. 색깔과 향기는 다 달라도 세분 다 위대한 성인 교황님들이시니 애교와 취향으로 봐드려도 좋을 것 같네요. 하느님 앞에서야 금액들은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성향과 취향도 있겠고, 하느님은 세분 다 귀엽게 보실 것입니다. 사실 고가의 명품시계라 해도 교황님들은 전혀 집착이 없는 무욕의 자유로운 삶이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최고로 사랑하여 모신 분들인데 집착이 있을 수 없지요. 평생을 온통 하느님께 봉헌한 분들인데 그까짓 고가의 시계들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성 바오로 2세 교황은 물론, 베네딕도 16세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세분 다 위대한 성인 교황들입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성인 교황들입니다. 이런 자랑스런 교황님들의 존재 자체가 빛나는 복음 선포요, 우리에겐 위로와 평화가 되고, 치유와 구원이 되며, 기쁨과 희망이 됩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 역시 바로 신인류를 상징하는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분들로 평생 영적 분투奮鬪한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분도회 출신 성 안셀모 역시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빛나는 모범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만능의 천재 성인이었습니다. 위대한 아빠스, 대주교, 정치가,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 신학자, 철학자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이에 위치한 참으로 빛나는 최고의 지성을 지닌 성인으로 평가합니다. 성인의 저술 서문의 구절도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은혜롭습니다.
“작은 자여, 지금 와 잠시 네 바쁨을 내려 놓고 네 어지러운 생각들에서 벗어나 잠시 내 피신처에 머물라. 네 염려를 던저 버리고 무거운 분심의 짐들을 기다리게 놔두라. 하느님으로부터 여유를 취하라. 그분안에 잠시 쉬라. 지금 온마음으로 하느님께 말하라. ‘나는 당신의 얼굴을 찾습니다. 오 주님, 당신의 얼굴을 나는 찾습니다.’”
주님과 늘 함께 사셨던, 바로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안셀모 성인이심이 분명합니다. 기념하고 기억만 하라 있는 성인들이 아니라 우리 역시 부단히 위에서, 영에서 태어나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고, ‘보고 배워 닮으라’ 있는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유일한 ‘하늘길’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 볼 때 마다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복된 신분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모두가 성령의 은총과 자기 비움으로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성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ㄱ).
바로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공동체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사도행전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하나하나 모두가 위에서, 영에서 태어나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성인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위에서, 영에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주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는 성인들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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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1일 화요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_문희종 요한 세례자 주교집전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0년 4월 21일 화요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Tuesday of the Second Week of Easter
문희종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대리구장) 집전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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