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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밀[波羅蜜]바라밀은 범어에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피안(彼岸)에 당도하는 것으로 역하였음.
♣ 바라이[波羅夷]계율 가운데 가장 엄하게 금한 것으로서, 이 죄를 범한 이는 승려로서의 생명이 없어지고 자격을 잃는 것이라 하며, 승려 중에서 쫓겨나 함께 살지 못한다 한다. 비구는 살생ㆍ투도(偸盜)ㆍ사음(邪淫)ㆍ망어(妄語)의 4종이 있어 ‘4바라이’라 하고, 비구니는 여기에 마촉(摩觸)ㆍ팔사성중(八事成重)ㆍ부장타중죄(覆障他重罪)ㆍ수순피거비구(隨順被擧比丘)의 4종을 더하여 ‘8바라이’라 한다.
♣ 박[駮]맹수(猛獸)의 이름. 말과 비슷하며 범을 잡아먹는다 함.
♣ 박[亳]은(殷) 나라 성탕(成湯)의 도읍지이다.
♣ 박[朴]질박하다.
♣ 박[狛]짐승 이름. 이리 비슷하다고 한다.
♣ 박계행[縛鷄行]두시(杜詩) 박계행(縛鷄行)에 “종이 닭을 시장에 팔러 가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닭이 벌레와 개미를 쪼아 먹는 것이 보기 싫어서입니다.” 하였다. 두보가 말하기를 “닭과 벌레는 같은 동물이니 어느 것에는 후하고 어느 것에는 박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닭을 풀어주라.” 하고 탄식하기를 “닭과 벌레 둘 다 온전할 수는 없다. 벌레를 살리자니 닭이 죽고, 닭을 살리자니 벌레가 죽는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잘못하는 것인가? 잘되고 못됨이 끝날 때가 없겠구나.” 하였다.
♣ 박고[薄姑]은(殷) 나라 때 제후(諸侯)의 성(姓). 사기(史記) 주기(周記)에, “成王東伐淮夷 殘奄 遷其君薄姑”라고 보임.
♣ 박고지금[博古知今]옛날 일을 널리 알게 되면 오늘날의 일도 알게 된다.
♣ 박광우[朴光佑]박광우는 조선조 연산군~명종 연간의 문신. 자는 국이(國耳)ㆍ을사사화 때 투옥, 이어 선동(仙洞) 역에 도배(徒配)되었다가 죽었음. 시호는 정절(貞節).
♣ 박괘[剝卦]주역(周易)의 박괘는 양(陽) 1획(畫)이 위에 있고 음(陰) 5획이 아래에 있어, 음이 성하고 양이 쇠하는 상(象)으로 9월에 해당하며, 10월은 음 6획인 곤괘(坤卦)가 되었다가 11월이 되면 다시 양 1획이 밑에서 생긴다. 이 때문에 양이 회복한다 하여 복괘(復卦)라 한다. 12월은 양 2획이 아래에 있는 임괘(臨卦), 정월은 양 3획이 아래에 있는 태괘(泰卦)로서 태평의 상이 있다 한다. 박괘의 상구효(上九爻)는 양 1획이 여러 음에게 실려져 있는 상이라 하여 구오 효사(爻辭)에 “군자는 수레를 얻게 된다.[君子得輿]" 하였다.
♣ 박노직[朴魯直]노직은 박로(朴▣)의 자(字)이다.
♣ 박대관[朴大觀]대관(大觀)은 박정(朴炡)의 자(字)이다. 인조(仁祖) 3년(1625) 홍문관에 재직 중 노서(老西)의 추천으로 대사헌에 임명된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다가 함평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 박대균[朴大均]연파거사(煙波居士), 박개(朴漑)의 아들로서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형.
♣ 박대포의[博帶褒衣]폭이 넓은 띠와 품이 큰 옷을 이르는 말로, 즉 선비의 옷차림을 뜻한다.
♣ 박덕우[朴德雨]덕우(德雨)는 박황(朴潢)의 자(字)이다.
♣ 박도풍[舶䑲風]초여름에 매우(梅雨)가 내릴 때에 부는 계절풍으로, 며칠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분다. 《平江紀事》
♣ 박동량[朴東亮]광해군 5년(1613)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박동량이 모반 혐의로 심문을 받던 중에, 반역 관계는 극구 부인하면서도 선조(宣祖)가 죽을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使嗾)로 궁녀들이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裕陵)에 저주했다는 무고(誣告)는 시인하는 태도를 취하였는데, 인조반정 뒤에 그의 그러한 태도 때문에 인목대비가 유폐(幽閉)되게 했다는 죄목으로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
♣ 박람강기[博覽强記]고금의 글을 널리 읽고 사물을 기억함. 넓게 보고 두루 그 내용을 잘 기억함.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함
♣ 박람구경[博覽九經]오(吳) 나라 대제(大帝) 손권(孫權)이 조자(趙咨)를 위(魏)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냈더니, 위제(魏帝) 조비(曹丕)가 묻기를, “오왕(吳王)이 학문을 아는가.” 하였다. 조자가 답하기를, “오왕이 경전(經傳)을 박람(博覽)하여 기이(奇異)한 것을 채취(采取) 합니다.” 하였다.
♣ 박랑[博浪]박랑사(博浪沙).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 장량(張良)이 한(韓) 나라 원수를 갚기 위해 철퇴로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했다가 실패한 곳. 《史記 留侯世家》
♣ 박망망[泊莽莽]아득히 먼 데 머물다
♣ 박망사[博望槎]박망후는 한(漢) 나라 장건(張騫)의 봉호. 장건은 무제(武帝) 때 대월지국(大月氏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匈奴)에게 포로가 되어 고절(苦節)을 굳게 지키다가 13년 만에야 돌아와서, 서역(西域) 제국에 국위를 크게 선양한 공으로 박망후에 봉해졌다. 뗏목의 고사에 대해서는, 한서(漢書) 장건전(張騫傳)에는 “한 나라 사신이 은하수까지 갔다.[漢使窮河源]” 한 말만이 있을 뿐인데, 이를 후인들이, 곧 장건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까지 갔던 것이라고 부회(附會)함으로 인하여, 심지어 두보(杜甫) 같은 시인도 여러 차례 이 고사를 인용하였으나, 사실 여부는 자세하지 않다.
♣ 박망사[博望槎]사신이 타고 가는 배를 말한다. 박망후(博望侯)는 한 나라 장건(張騫)의 봉호(封號)이다. 한 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을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고 한다. 《荊楚歲時記》
♣ 박망승사[博望乘槎]박망후(博望侯)는 한(漢) 나라 장건(張騫)의 봉호이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무제(武帝)가 장건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 박망역[博望役]어렵고 힘든 사신의 임무를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이 흉노를 제압하기 위하여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갔던 고사가 있다. 《漢書 張騫傳》
♣ 박망후[博望侯]박망후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신(使臣) 장건(張騫)의 봉호이다. 장건은 일찍이 대월지국(大月氏國)에 사신으로 가다가 흉노(匈奴)에게 포로가 되어 고절(苦節) 10년을 겪고, 틈을 보아 흉노에게서 탈출하여 대월지국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史記 卷一百十一》
♣ 박물지[博物志]장화(張華)는 진(晉) 나라 혜제(惠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으며 박학다식하여 참위(讖緯)ㆍ방기(方技)의 책에 이르기까지 상람(詳覽)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박물지(博物志)는 바로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저서이다. 《晉書 卷36》
♣ 박미중[朴美仲]미중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자이다.
♣ 박박[剝剝]문 두드리는 소리, 사람의 발소리
♣ 박박[拍拍]새가 날개 치는 소리의 형용
♣ 박벌[薄伐]시경(詩經)에, “오랑캐를 가볍게 쳐서[薄伐玁狁]”라는 귀절이 있는데, 주(周)의 선왕(宣王)이 오랑캐를 물리친 것을 칭송한 시이다.
♣ 박부주선료일생[拍浮酒船了一生]진(晉) 나라 필탁(畢卓)이 “수백 섬의 술을 배에다 싣고 나서 한 손엔 게 다리 한 손엔 술잔을 들고 주지(酒池)를 떠다니면서 일생을 마쳤으면 좋겠다.”고 말한 고사가 있다. 《晉書 畢卓傳》
♣ 박빙여림[薄氷如臨]마치 엷은 얼음(살얼음)을 밟는 듯함. 매우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 또는 살얼음을 걸어갈 때에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위태로운 일을 조심스럽게 함
♣ 박사[亳社]은(殷) 나라의 사당을 말한다. 은 나라가 박(亳)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보통 망국(亡國)의 사당을 뜻한다.
♣ 박사암[朴思菴]사암은 박순(朴淳)의 호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명종(明宗) 8년(1553)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장원한 뒤, 선조(宣祖) 5년(1572)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재직했는데, 동서(東西) 당쟁이 격심할 무렵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편들다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 박산[博山]중국 산동성(山東省) 박산현(博山縣)에 있는 산.
♣ 박산[博山]향로의 이름인 박산로(博山爐)를 말한다.
♣ 박산로[博山爐]옛날 향로(香爐)의 이름.
♣ 박상[搏桑]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신목(神木)을 이르는데, 또는 그 신목이 있는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 박상지[朴尙之]상지는 박서(朴遾)의 자이다.
♣ 박서[搏黍]모시(毛詩)의 황조우비(黃鳥于飛)의 주에 ‘황조는 박서새다’ 하였다.
♣ 박서[朴犀]몽고군(蒙古軍)을 격파한 고려의 명장. 고종(高宗) 18년(1231) 몽고 장수 살리타[撒禮塔]가 쳐들어왔을 때 박서가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김중온(金仲溫), 김경손(金慶孫) 등과 함께 구주(龜州)를 사수하며 한 달간이나 격전을 벌여 이를 격퇴했으며, 이에 구주를 버리고 개경(開京)을 먼저 함락시켜 고종의 항복을 받은 뒤 다시 공격해 온 몽고군을 또 다시 대파하여 그 용명(勇名)이 천하를 진동시켰는데, 마침내는 항복하라는 왕명을 받고서 항복한 고사가 있다.
♣ 박선적[縛禪寂]선적은 불가(佛家)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조용히 명상(冥想)에 잠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얽매인다는 것은 곧 그 목적인 진리는 깨닫지 못하고 행위에만 얽매임을 말한 것으로, 두보(杜甫)의 시에 “나도 승찬과 혜가를 스승삼아, 몸이 오히려 선적에 얽매였네[余亦師粲可 身猶縛禪寂].”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三》
♣ 박속방기정[薄俗防機阱]온갖 핑계를 대고 겁을 주면서 찾아 온 손님의 면회를 사절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薄俗防人面 全身學馬蹄”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0, 課小豎 鋤斫舍北果林 枝蔓荒穢淨訖移牀 2》
♣ 박송당[朴松堂]송당(松堂)은 조선 성종(成宗) 때의 무신이며 학자인 박영(朴英)의 호이다.
♣ 박수아[拍手兒]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양양(襄陽)의 어린이가 다 손뼉치며 길 막고 백동제(白銅鞮)를 부른다는 구절이 있다.
♣ 박수제창양양가[拍手齊唱襄陽歌]이백의 시에, “양양의 아이들이 손뼉치며 거리를 질러막고 백동(白銅 노래 이름)을 부른다.”는 귀절이 있다.
♣ 박순[朴淳]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으로 의정까지 되었으며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 박식[薄蝕]해와 달에 빛이 없는 것을 박이라 하고, 한쪽이 훼손되는 것을 식이라 한다.
♣ 박액[迫阨]협박과 곤궁(질투).
♣ 박약[博約]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면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不畔矣].” 한 데서 온 말이다.
♣ 박약간이[博約簡易]송(宋) 순희(淳熙) 2년(1175) 육상산과 주희가 여동래(呂東萊)의 주선으로 신주(信州) 아호사(鵝湖寺)에서 만나 학풍(學風)에 관해 3일 동안 토론했으나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결렬되었는데, 박람한 뒤 요약[博約]하려고 한 주희는 육상산을 태간(太簡) 공소(空疏)하다고 비판하고, 우선 본심(本心)을 밝혀야 함[簡易]을 강조한 육상산은 주희를 지리(支離)하다고 비판하였다.
♣ 박양[剝陽]마지막 하나 남은 양(陽)의 기운이 맨 위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 박괘(剝卦)의 시절이라는 뜻으로, 음력 9월을 가리킨다.
♣ 박연[博衍]널리 퍼지다.
♣ 박옥[璞玉]박옥은 정련(精鍊)하지 않은 옥돌.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에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세 차례나 형벌을 받아가면서까지 왕에게 박옥을 바친 일이 있다.” 하였음.
♣ 박옥혼금[璞玉渾金]박옥(璞玉)은 갈고 닦지 않은 옥, 혼금(渾金)은 아직 제련하지 않은 금. 곧 검소하고 질박한 사람을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 박옹[泊翁]박옹은 동번(東樊) 이만용(李晩用)의 아버지인 이명오(李明五)의 호이다. 자는 사위(士緯). 시에 능했음. 정종(正宗) 때 사람임.
♣ 박우[朴牛]길들인, 쟁기를 끌 수 있는 소.
♣ 박원[璞冤]춘추시대 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옥덩이를 얻어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드렸으나 가짜라는 오인을 받고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로 잘리운 다음 옥덩이를 안고 슬피 울다가 문왕(文王)의 배려로 진짜임이 밝혀졌다.
♣ 박원제[縛元濟]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켜서 오랫동안 평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있던 이소(李愬)가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눈 오는 밤중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포박하였다. 《新唐書 卷154 李晟列傳 李愬》
♣ 박이부정[博而不精]여러 방면으로 많이 아나 정통하지 못함.
♣ 박자건[朴子建]자건은 박홍중(朴弘中)의 자(字)이다.
♣ 박자흥[朴自興]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이요, 이이첨(李爾瞻)의 사위이며, 그의 딸은 광해군의 세자빈이었다.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며 자책해 마지않았던 자기 부친과는 정반대로, 형조 참판으로서 폐비절목(廢妃節目)을 작성하는 등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廢黜)에 앞장섰으며, 인조반정 뒤에 군사를 모아 광해군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려다가 부친의 만류를 받고는 마침내 부자(父子)가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 박장대소[拍掌大笑]손바닥을 치면서 크게 웃음.
♣ 박정길[朴鼎吉]박정길은 조선조 광해군 때 병조참판을 지냈고, 인조반정 후에 죽음을 당했음.
♣ 박중구[朴仲久]중구는 박장원(朴長遠)의 자(字)이다.
♣ 박중련[朴仲漣]중련은 박의(朴漪)의 자(字)이다.
♣ 박진양부생[剝盡陽復生]박은 주역(周易)의 괘 이름으로 음(陰)이 자라나서 양(陽)이 없어져 가는 괘니 간상곤하(艮上坤下)로서 음력 9월에 해당됨. 이 상구(上九)가 변해서 곤괘(坤卦)가 되면 10월에 해당하고 11월이 되면 다시 한 양이 자라나서 곤상진하(坤上震下)의 복괘(復卦)가 됨을 말함. 《周易 總目》
♣ 박천[薄天]하늘에 닿다.
♣ 박체[駁遞]벼슬아치가 대각(臺閣)의 탄핵으로 갈리는 일.
♣ 박초풍[舶超風]음력 5월에 부는 바람을 말한다.
♣ 박충원[朴忠元]자는 중초(仲初)로 판서까지 되었으며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 박취금[朴醉琴]박팽년(朴彭年)을 말한다. 그의 호가 취금헌(醉琴軒)이다.
♣ 박탁[剝啄]문을 두드린다는 뜻으로 즉 손님이 찾아옴을 뜻한다.
♣ 박탁명[剝啄鳴]손님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
♣ 박탁풍[舶趠風]계절풍을 말한다. 초여름에 매우(梅雨)가 내릴 때에는 반드시 큰 바람이 며칠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분다고 한다. 《平江紀事》
♣ 박학과[博學科]당 나라 개원(開元) 19년에 학식이 많고 글 잘하는 사람을 시험보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를 두었다. 《唐書 陸贄傳》
♣ 박학다식[博學多識]학문이 넓고 아는 것이 많음
♣ 박학심문[博學審問]두루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따져 물음. 곧, 바람직한 학문의 자세(학문 연구의 방법)를 말함
♣ 박혁현호이[博奕賢乎已]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장기와 바둑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라도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였다.
♣ 박회양[薄淮陽]한 무제(漢武帝)가 급암(汲黯)을 불러 회양태수(淮陽太守)를 제수하였는데, 급암이 사양하고 인(印)을 받지 않자, 무제가 이르기를 “그대는 회양을 박하다고 여기는가? …… 회양의 이민(吏民)들이 서로 불화하므로, 내가 그대의 중(重)함을 얻어서 편히 누워 그 곳을 다스리고자 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汲黯傳》
♣ 박효백[朴孝伯]퇴우당(退憂堂), 박승종(朴承宗)의 자로서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임.
♣ 박희[薄姬]박씨 계집이란 바로 진(秦) 나라 말기에 이왕 표(魏王豹)의 궁중(宮中)에 있었던 미천한 신분의 여자였는데, 위왕 표가 멸망한 뒤에 그가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문제(文帝)를 낳았는바, 문제가 대왕(代王)에 봉해지자 대태후(代太后)가 되었고, 문제가 제위(帝位)에 오름에 미쳐서는 황태후(皇太后)가 되었다.
♣ 반간[反間]거짓으로 적국 사람이 되어 적정을 탐지하여 본국에 알리거나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고사성어.
♣ 반강[潘江]육(陸)과 반(潘)은 모두 진(晉) 나라 때 문장(文章)이 당세에 으뜸이었던 육기(陸機)와 반악(潘岳)을 가리키는데, 양(梁) 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 “육기의 문재는 바다와 같고, 반악의 문재는 강과 같다.[陸文如海 潘藻如江]” 한 데서 온 말이다.
♣ 반경[半鏡]진(陳) 나라 서덕언(徐德言)이 진 후주(陳後主)의 매(妹) 낙창공주(樂昌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때 난리가 나서 서로 보호하기 어렵게 되자, 서덕언이 아내와 헤어지면서 말하기를 “당신 같은 재색(才色)으로는 나라가 망하면 반드시 권호가(權豪家)로 들어가게 될 것인데, 우리의 정연(情緣)이 서로 끊어지지만 않으면 다시 서로 만나기를 바라노니, 의당 신표가 있어야겠소.” 하고, 거울 하나를 반으로 쪼개서 한 쪽씩 나누어 가졌는데, 뒤에 과연 그 거울로 인하여 다시 서로 만나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반경환원[半鏡還圓]사랑하는 남녀(男女)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것을 뜻함. 진(陳) 나라 서덕언(徐德言)이 난리를 만나, 아내인 낙창공주(樂昌公主)와 서로 헤어지면서 후일의 신표로 삼기 위해 둥근 거울을 반으로 쪼개어 각각 한 조각씩 소지했다가, 난리가 끝난 후에 과연 그 거울을 가지고 서로 다시 결합하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반계[磻溪]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이 낚시하다가 주 문왕(周文王)을 만난 곳이다.
♣ 반계곡경[盤溪曲徑]소반같이 좁은 시내와 꾸불꾸불한 지름길. 정당한 방법을 취하지 않고 옳지 않은 수단을 써서 억지로 일을 한다는 뜻이다.
♣ 반계섬궁[攀桂蟾宮]과거에 급제(及第)하였다는 뜻이다. 섬궁은 달을 말한다. 당(唐) 나라 이래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섬궁에서 계수나무 가지를 꺾었다.’고 표현하였다.
♣ 반계수[磻溪叟]태공망 여상을 말함. 문왕(文王)이 반계에 와서 여상을 만났다고 함.
♣ 반계지수[磻溪之叟]반계의 늙은이는 곧 반계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을 말함. 강태공은 낚시질이나 하며 은거하다가 80세가 다 되어서 주(周) 나라에 등용되어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 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史記 卷三十二》
♣ 반계직침[磻溪直針]반계는 섬서성(陝西省) 보계현(寶溪縣)에 있는 위수(渭水)로 흘러드는 냇물. 주(周)의 여상(呂尙)이 여기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만났다.
♣ 반고[反顧]돌이켜 보다.
♣ 반곡[盤谷]골짜기 이름인데, 지금 하남성(河南省) 제원현(濟源縣) 북쪽으로서 당(唐) 나라 이원(李愿)이 반곡에 은거(隱居)하러 갈 때 한유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라는 유명한 글을 지었는데, 도통(道統)과 학(學)의 노정(路程)을 서술한 명문이다.
♣ 반곡[盤谷]반아(盤阿)와 같은 말로, 보통 은거지를 뜻한다.《詩經 衛風 考槃》 또 한퇴지(韓退之)의 우인(友人) 이원(李愿)이 숨어살았다는 지명 이름이기도 한데, 한창려집(韓昌黎集) 보유(補遺)의 ‘송이원귀반곡(送李愿歸盤谷)’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반골[反骨]뼈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말로, 모반을 뜻하는 고사성어.
♣ 반공[班公]반공은 칠인반(七人班), 즉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반열에 있는 분이라는 뜻으로, 당(唐) 나라 시인 나은(羅隱)의 시 ‘기우성왕간의(寄右省王諫議)’에 “대궐 뜨락 향초들 시든 것을 보았는데, 이젠 또 수레 몰고 칠인의 반열로 가시는가.[看却金庭芝朮老 又驅車入七人班]”라는 표현이 있다.
♣ 반과[飯顆]이백(李白)이 반과산(飯顆山)에서 두보(杜甫)를 만나 희롱삼아 지은 시에, “반과산 앞에서 두보를 만나니, 머리엔 벙거지 쓰고 해는 한낮이로구나. 묻노니 어찌하여 저리 너무 여위었노, 전부터 시 짓기 괴로워서 그리 된 게지[飯顆山前逢杜甫 頭戴笠子日亭午 借問爲何太瘦生 爲被從前作詩苦].” 하였다.
♣ 반과보[飯顆甫]이백(李白)의 ‘희증두보시(戲贈杜甫詩)’에 반과산 마루에서 두보를 만나니, 머리에 삿갓을 썼는데 해는 한낮이다.[飯顆山頭逢杜甫 頭戴笠子日正午]"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반과산[飯顆山]반과는 밥을 말한 것인데, 중국 장안(長安)에 반과산이 있다.
♣ 반과산[飯顆山]이백과 두보(杜甫)가 반과산(飯顆山)에서 만나 이백이 시를 지어 주기를, ‘반과산 앞에 두보를 만나니 머리에 삿갓을 썼는데 해는 한낮이었네. 묻노라,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여위었나, 모두 종전에 시를 애써 지은 까닭이로다.’ 하였다.
♣ 반궁[泮宮]반궁은 성균관(成均館)의 별칭이다.
♣ 반궁[泮宮]제후(諸侯)의 학궁(學宮).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즐거운 반수(泮水)에 잠깐 그 미나리를 캐었노라.” 했는데, 그 주에 “반수는 반궁(泮宮)의 물이다. 제후의 학궁을 반궁이라 하니, 동ㆍ서ㆍ남방에 물이 있어 반벽(半壁)과 같다.” 하였음.
♣ 반근[盤根]뿌리와 가지가 뒤엉키듯[盤根錯節] 복잡하게 얽혀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
♣ 반근착절[盤根錯節]걸출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렵고 복잡한 상황을 뜻한다. 소식(蘇軾)의 ‘걸탁용임예찰자(乞擢用林豫札子)’라는 글에 “반근착절의 상황에서 그를 한번 시험해 보면, 분명히 걸출한 재능[利器]을 드러내 발휘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 반근착절[盤根錯節]구부러진 뿌리와 뒤틀린 마디. 얼크러져 매우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 세력이 단단하여 흔들리지 않는 일, 몹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반남[潘南]관향(貫鄕)이 반남인 박정(朴炡)을 가리킨다.
♣ 반남[潘南]반남은 나주(羅州)의 속현이다.
♣ 반남자[潘南子]반남 박씨(潘南朴氏)인 박정(朴炡)을 가리킨다.
♣ 반남진[擧手攀南辰]남극성은 하늘의 남극 가까이에 있어 사람의 수명을 맡고 있는 별이므로, 즉 장수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 반노[反魯]공자가 이르기를, “내가 위(衛)에서 노(魯)로 되돌아온 후에 비로소 악(樂)이 바로잡아져서 아(雅)와 송(頌)이 각기 제자리를 잡았느니라.” 하였음. 《論語 子罕》
♣ 반대조삼[鞶帶遭三]주역(周易)에, “혹 반대(鞶帶)를 주나 아침결에 세 번 끄르도다.”는 말이 있다. 반대는 큰 가죽띠. 정의(正義)에, “만일 호의(好意)로 반대를 주면 받아서 길이 보유(保有)함직하거니와, 만일 송사(訟事)로 이겨 얻었으면 비록 반대를 주었더라도 끝내 오래지 못할지니, 하루아침에 끝나는 사이에 세 번이나 끌러 벗길지 모른다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다.
♣ 반도[蟠桃]반도는 동해(東海)의 선경(仙境)에 있다는 큰 복숭아인데, 두보(杜甫)의 고우시(苦雨詩)에 “나는 쇠하여 물에 뜬 허수아비 같으니 반도가 있는 동해로 건너가고 싶네[吾衰同泛梗 利涉想蟠桃]”라고 하였다. 《杜少陵集 卷一》
♣ 반도[蟠桃]선과(仙果). 연감류함(淵鑑類函)에 “동해에 도색산(度索山)이 있고 그 산에 큰 복숭아 나무가 있는데, 이것이 반도이다.” 했고, 한무고사(漢武故事)에 “서왕모(西王母)가 복숭아 7개를 내어놓고 두 개는 자기가 먹고 5개는 무제에 주었는데, 무제가 그 씨를 남겨 심으려고 하자, 서왕모가 ‘이 복숭아는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피고 3천 년 만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 지금까지 이 복숭아가 세 번 익었는데, 동방삭이 세 번 훔쳐먹었다.’ 했다.” 하였다.
♣ 반도결실[蟠桃結實]포재가 있으면 언젠가 때가 온다는 뜻이 된다.
♣ 반동[反同]고려 말기에 승도(僧徒)들이 권세가의 서장(書狀)을 빙자하여 주군(州郡)에서 받아들이던 쌀과 베를 말한다.
♣ 반두[礬頭]산수(山水)를 그리는 법. 산 위에 조그만 돌덩이가 무더기를 이룬 것을 반두라 함. 《輟耕錄 寫山水訣》
♣ 반랑[潘郞]진(晉) 나라 반악(潘岳)을 가리킨다. 무제(武帝)가 적전(籍田)에 임하여 친히 밭을 갈 때 적전부(籍田賦)를 지어 천하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晉書 卷55》
♣ 반랑고[潘郞苦]반랑은 진(晉) 나라 때 시인 반악(潘岳)을 지칭한 말로, 그가 젊어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반악은 중년에 백발이 되었는데, 송(宋) 나라 사술조(史述祖)의 제천악백발(齊天樂白髮)이란 사(詞)에, “가을바람이 일찍 반랑의 귀밑털에 들어가니, 이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에 문득 놀라노라.” 하였다.
♣ 반랑기려[潘閬騎驢]송(宋) 나라 시인 반랑(潘閬)의 소요집(逍遙集)에 “허공 속에 꽂혀 있는 삼봉이 너무 좋아, 머리 돌려 쳐다보다 당나귀 거꾸로 타게 됐네. 서로들 덩달아 크게 웃는 웃음소리, 여기에다 집 옮겨 오래오래 살까 보다.[高愛三峯揷大虛 回頭仰望倒騎驢 傍人大笑從他笑 終擬移家向此居]”라는 시가 있다.
♣ 반랑도기려[潘閬倒騎驢]송(宋) 나라 시인 그는 섬서(陝西)의 화산(華山)의 경치를 몹시 사랑하여 시를 짓기를, “화산의 삼봉(三峯)이 공중에 솟은 것을 사랑하여 머리를 쳐들고 바라보느라고 나귀를 거꾸로 탔네[高愛三峯揷太虛 昻頭吟望倒騎驢].”
♣ 반랑삼봉[潘閬三峯]삼봉은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화산(華山)의 연화봉(蓮華峯)ㆍ모녀봉(毛女峯)ㆍ송회봉(松檜峯)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은둔했던 선인(仙人) 반낭은 파리한 나귀를 거꾸로 타고 산천의 아름다움을 구경했다 한다.
♣ 반랑삼봉유[潘閬三峯遊]반낭은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시문(詩文)에 능하였는데, 일찍이 화산(華山)의 삼봉(三峯)을 유람하였다 한다.
♣ 반랑우직년[潘郞寓直年]32세를 말한다.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추풍부(秋風賦)’에 “내 나이 32세 때 벌써 머리가 희끗해졌는데, 그때 태위연(太尉掾) 겸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으로 산기성(散騎省)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하였다.
♣ 반랑이모[潘郞二毛]반랑은 진(晉) 나라 때 문장가인 반악(潘岳)을 가리키며 이모는 머리털이 희어진다는 뜻이다. 그의 ‘추흥부(秋興賦)’ 서문에 “내 나이 서른두 살 때부터 희끗희끗 백발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13》
♣ 반령[潘令]일찍이 하양 영(河陽令)을 지냈던 진(晉) 나라의 문장가 반악(潘岳)을 가리키는 말이다.
♣ 반록[班祿]목축을 하던 재산.
♣ 반뢰수[畔牢愁]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근본하여 지은 문장(文章)의 이름이다.
♣ 반룡[攀龍]용의 수염을 잡고 올라간다는 말로,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붙어서 공명(功名)을 취한다는 뜻이다.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鼎]을 주조하여 완성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태우고 승천하였는데, 이때 신하와 후궁 70여 명이 용을 타고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史記 封禪書》
♣ 반룡[蟠龍]진흙 속에 서리고 있는 용. 사람의 출세 이전을 비유한다.
♣ 반룡부봉[攀龍附鳳]용과 봉은 임금의 비유인데,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의 “용 비늘을 부여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에서 나온 말로, 조정에 들어가 임금에게 의지하여 공적을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 반린부익[攀鱗附翼]처음 창업(創業)하는 제왕(帝王)에게 붙어서 부귀(富貴)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 반마[盤馬]말에 올라타고 회선(廻旋)하는 것. 곧 무술을 연마하는 일이다. 위서(魏書) 내대천전(來大千傳)에 “대천이 항상 어개(御鎧)를 입고 대궐 앞에서 반마할 때면 감탄하지 않은 조신(朝臣)이 없었다.” 하였다.
♣ 반마[班馬]한서(漢書)의 작자 반고(班固)와 사기(史記)의 작자 사마천(司馬遷)의 합칭으로 명문 사가들이다.
♣ 반마원명추[班馬怨鳴騶]함께 동참하여 즐기지 못하는 외톨이 신세를 탄식한 말이다. 반마(班馬)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홀로 된 말을 의미한다. 《春秋左傳 襄公 18年 有班馬之聲 齊師其遁 注》
♣ 반맹견[班孟堅]맹견은 후한의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자. 그는 9세에 글을 지었고 아버지 표(彪)의 유지를 받들어 한서(漢書)를 완성했으며, 백호통의(白虎通義)를 찬진(撰進)했음.
♣ 반면[半面]잠깐 동안 서로 만난 것을 말함.
♣ 반면장[半面粧]서비(徐妃)는 양 원제(梁元帝)의 비(妃)로 이름은 소패(昭佩)인데, 원제가 한 눈이 애꾸눈이었으므로, 반면(半面)에만 화장(化粧)을 하고 임금을 맞이했다가 임금의 노염을 샀다. 그 뒤에 그녀는 임금의 근신(近臣)과 음통(淫通)하였다.
♣ 반면지분[半面之分]얼굴을 반만 아는 사이. 서로 알아는 보지만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사이
♣ 반면지식[半面之識]얼굴을 반만 아는 사이. 서로 알아는 보지만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사이
♣ 반명[盤銘]목욕반에 새겨진 명(銘)이란 뜻으로, 고대 중국 탕(湯) 임금의 반명을 말한다. 탕 임금의 반명에는 “진실로 어느 날 새롭게 했거든 날마다 새롭게 하고, 다시 계속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하였다. 《大學 二章》
♣ 반몌공련이[反袂空漣洏]춘추(春秋)의 애공(哀公) 14년 조(條)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다.[西狩獲麟]”는 내용이 있는데, 그 주(註)에 공자는 이것을 보고 “기린은 성왕(聖王)이 나오면 나타나는 상서로운 짐승인데, 나쁜 세상에 나와 잡혔으니, 나의 도가 곤궁하다.” 하고 옷소매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하였으므로 이것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 반모[斑毛]호피를 두고 한 말이다.
♣ 반모욕파[潘毛欲皤]진(晉) 나라 반악(潘岳)이 32세 때부터 백발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潘岳傳》
♣ 반목질시[反目嫉視]눈을 흘기면서 밉게 봄.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눈으로 쳐다봄.
♣ 반묘방당[半畝方塘]주희(朱熹)의 ‘관서 유감(觀書有感)’이라는 칠언 절구를 말한다. 참고로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반 이랑 네모진 못 거울 하나 펼쳐져서, 구름 그림자 하늘 빛 서로 어울려 배회하네. 묻노니 어떡하면 저처럼 맑은가, 근원의 샘물 콸콸 쏟아져 내리기 때문일세.[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 반문농부[班門弄斧]노반의 문앞에서 도끼를 자랑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실력을 생각지 않고 당치않게 덤비는 것을 말한다.
♣ 반반[媻媻]가고 오고 함, 왕래함
♣ 반반[盼盼]당(唐) 나라 상서(尙書) 장건봉(張建封)의 첩인데, 가무와 시를 잘하였다. 장 상서가 죽은 뒤에 반반이 십 년이 넘도록 개가하지 않으니 백거이(白居易)가 시를 보내어 왜 따라 죽지 않느냐고 물었다. 반반이 울면서 “첩이 죽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우리 남편이 첩을 사랑하여 따라 죽게 했다 하면 깨끗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해서였다.”고 말하고 백거이의 시를 화답한 후 열흘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한다. 《全唐詩話》
♣ 반반[半半]무엇을 절반으로 나눈 각각의 부분
♣ 반반[斑斑]물건이 고르게 잘 섞인 모양, 눈물 자국이 점점이 남아 있는 모양
♣ 반반[反反]신중하고 침착함, 되풀이 하여 익힘, 순수히 수행하는 모양
♣ 반백[攀栢]진(晉) 나라 왕부(王裒)의 부친이 사마소(司馬昭)에게 살해되자, 왕부는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옆의 잣나무에 매달려 울부짖었는데, 나무에 눈물이 흘러 그 나무가 말라죽었다 한다. 《晉書 孝友傳 王裒》
♣ 반복[反復]주역(周易) 복괘(復卦)에서 복괘의 일양(一陽)이 생(生)하는 것을 두고 이르기를 “그 도를 반복하니 7일 만에 되돌아온다.[反復其道 七日來復]” 한 데서 온 말이다.
♣ 반부[攀附]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는 뜻인데, 전(轉)하여 영주(英主)를 섬겨 공명(功名)을 세우는 비유로 쓰인다.
♣ 반부담[半負擔]짐을 반쯤 실은 말 등에 안장 없이 사람이 걸터 앉는 것. 즉 짐을 반쯤 싣고 사람이 타는 것을 말한다.
♣ 반비보보[潘妃步步]남제(南齊)의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卷)이 땅에 황금 연꽃을 깔아 놓고 총비(寵妃)인 반옥아(潘玉兒)에게 밟고 가게 하면서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나누나.[步步生蓮花]”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전한다. 《南史 齊紀下 廢帝東昏侯》
♣ 반빈[潘鬢]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의 살쩍. 반악의 추흥부(秋興賦) 서에 “내 나이 32세에 비로소 이모(二毛)가 나타났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이모는 머리에 흰 털이 나서 두 빛깔이 된 것을 말한다.” 하였으므로, 이는 곧 반악의 살쩍이 희어졌다는 뜻이다.
♣ 반사조[潘師朝]송(宋) 나라 강주(絳州) 사람. 그가 만든 강첩(絳帖)은 각첩(閣帖)을 토대로 하고 기타의 법첩(法帖)으로 보강한 것임.
♣ 반산[飯山]당(唐) 나라 이백(李白)이 두보(杜甫)를 조롱하여 비유한 말.
♣ 반산봉두보[飯山逢杜甫]이백(李白)이 반과산(飯顆山)에서 두보(杜甫)와 시로써 서로 화답하였다. 《春日懷李白》
♣ 반산청수[飯山淸瘦]당(唐) 나라 때 장안(長安) 부근에 있던 산인 반과산(飯顆山)을 말한다. 이백(李白)이 반과산에서 두보(杜甫)를 만나 두보가 고심하면서 시를 짓느라 삐쩍 마른 것을 보고 기롱하였다.
♣ 반상막의지석륵[反相莫疑知石勒]옛날 진(晉) 나라 때에 오호(五胡) 종족들이 중국에 들어와 큰 난리를 꾸몄는데, 그 전에 왕연(王衍)이란 사람이 갈(羯)족인 남의 노예로 있는 석륵(石勒)이란 자를 보고, 그에게 반역의 상(相)이 있으니, 미리 처치하지 아니하면 후일에 문제가 되리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그 후에 과연 석륵은 반란군에 참여하여 크게 출세하여 중국 북방을 모두 점령하고 조왕(趙王)이라고 자칭하였었다. 그런 것이 당 나라 현종 때에도 현종이 안녹산을 신임하고, 그때의 정승인 양귀비의 사촌 양국충(楊國忠)이란 자를 정승으로 등용하였는데, 양국충은 원래가 똑똑하지도 못한 깡패였으므로 안녹산이 항상 업신여겼다. 그래서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반역할 것이니 빨리 처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하니, 현종은 석륵이 반역할 것을 알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다. 그까짓 안녹산이 무슨 힘으로 반역을 하며 또 내가 그처럼 신임하는데 어찌 딴마음을 먹겠느냐 하고서, 듣지 않았다가 후일에 큰 변란을 당하였다.
♣ 반상서열[班常序列]양반과 상민의 서열.
♣ 반생[班生]반생은 서역(西域)을 30년 동안이나 진수(鎭守)하여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한(漢) 나라의 장군 반초(班超)를 가리킨다.
♣ 반생[潘生]진(晉) 나라의 문장가 반악(潘岳)으로, 하양 영(河陽令)을 거쳐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을 전전하였다. 《晉書 卷55》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官序潘生拙 才名賈傅多”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0 秋日寄題鄭監湖上亭》
♣ 반생랑서[半生郞署]한(漢) 나라 때 연로(年老)하도록 중랑서장(中郞署長)으로 있었던 풍당(馮唐)을 말하는데, 사람의 기구한 운명을 뜻한다.
♣ 반생불자각[半生不自覺]법화경(法華經)에 ‘어떤 장자가 아들의 옷에 값을 따질 수 없는 매우 귀한 보배 구슬을 넣어 주었는데, 이 아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구걸하며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 반생지[班生志]후한(後漢) 반초(班超)가 붓을 잡고 베껴 쓰는 일을 하며 모친을 봉양하다가, “대장부라면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騫)처럼 이역(異域)에 나가서라도 공을 세워 제후(諸侯)가 되어야 마땅하지, 어찌 붓만 잡고서 긴 세월을 그냥 보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나가 큰 공을 세운 뒤 정원후(定遠侯)로 봉해진 고사가 있다. 《東觀漢記 班超》
♣ 반생투필[班生投筆]후한(後漢) 때의 장수 반초(班超)가 관청의 대서(代書) 일을 하며 가난한 살림을 꾸려 나가다가 붓을 던지며 탄식하기를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智略)이 없으면, 그래도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鶱)처럼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워 봉후(封侯)가 된 일이라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서역(西域)의 사신으로 가 큰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班超傳》
♣ 반선계[攀詵桂]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것을 가리키는 말. 과거에 오른 것을 절계(折桂)라 하는데, 선계(詵桂)는 곧 계지(桂枝)의 별명이다.
♣ 반선지희[半仙之戲]그네 뛰는 것을 이름. 당 현종(唐玄宗) 때 한식절(寒食節)이면 궁중에서 그네를 뛰게 하여 이를 보고 즐기었는데, 현종이 그 그네 뛰는 것을 반선의 놀이[半仙之戲]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반설조[反舌鳥]반설조는 새 이름으로, 혀를 잘 굴려 여러 가지로 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전하여 소인의 참언(讒言)에 비유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의하면, 반설조는 봄에 울다가 5월이 되면 소리가 없어진다고 하였으므로, 소인의 참언도 때가 지나면 저절로 사라짐 비유한다.
♣ 반세공명포경간[半世功名抱鏡看]“훈업은 자주 거울을 본다.[勳業頻看鏡]”는 두보(杜甫)의 시(詩)가 있다. 공명(功名)은 언제 이룰지 모르고 늙어만 간다는 뜻이다.
♣ 반수[般倕]고대의 유명한 목수인 노반(魯般)과 공수(工倕)를 말한다.
♣ 반수[般倕]반(般)은 노(魯) 나라 공수반(公輸般)이고, 수(倕)는 황제(黃帝) 때 사람으로 모두 교장(巧匠)임.
♣ 반수[泮水]반궁(泮宮)과 같은 것으로 태학관을 말한다. 주(周) 시대 제후의 국학(國學)으로 향사(饗射)를 익히던 곳이다. 태학(太學) 전반(前半)의 주위에 물을 두른 것이므로 반수(泮水)라 한다.
♣ 반수[般倕]중국 상고 때의 건축가인 공수반(公輸班)과 공공(共工)을 가리킨다. 반(般)은 반(班)과 통용한다.
♣ 반수채근[泮水採芹]반궁은 제후의 학궁(學宮)으로 곧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키는데, 시경(詩經) 노송 반수(泮水)에 “즐겁다 여기 반수에서 잠깐 미나리를 캐노라.” 하였다.
♣ 반순비[反脣狒]아프리카 등지에 서식하는 비비원숭이는 발 모양이 가는 쪽의 반대 방향으로 생기었고, 웃으면 입술이 치켜올라가 눈을 가리는데, 성질이 흉포하여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 반식[伴食]당 나라 노회신(盧懷愼)이 요숭(姚崇)과 같이 재상이 되었으나, 재주가 요숭보다 못함을 스스로 알고 항상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를 “밥먹는데 짝하는 재상이라[伴食辛相].” 하였다.
♣ 반식자우환[半識者憂患]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도리어 근심거리가 된다.
♣ 반식재상[伴食宰相]재능이 없으면서 유능한 재상 옆에 붙어서 정사를 처리하는 재상을 말한다.
♣ 반신반의[半信半疑]반은 믿고 반은 의심함.
♣ 반심[班心]반심은 옛날 어사대(御史臺)의 아전들이 어사(御史)가 서는 곳을 지칭한 말이다.
♣ 반씨빈[潘氏鬢]나이 30세 전후에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짐을 비유한 말. 반씨(潘氏)는 곧 진(晉) 나라 때의 문장가인 반악(潘岳)을 가리키는데,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내 나이 삼십이 세에 처음으로 이모(二毛)를 보았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반씨천방[潘氏千房]천방은 수많은 석류(石榴) 알을 가리킨 것으로, 진(晉) 나라 반악(潘岳)이 석류를 두고 지은 한거부(閒居賦)에 “수많은 석류 알이 한 꼭지에 매달려 열 개가 모두 똑같구나.[千房同蔕 十子如一]"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반악[潘岳]반악은 진(晉) 나라 중모(中牟) 사람으로 아름다운 자태와 용모를 지녔으므로, 낙양(洛陽) 거리를 거닐면 부녀자들이 과일을 던지면서 유혹하였다 한다. 《晉書 卷五十五》
♣ 반악빈[潘岳鬢]반악(潘岳)은 진(晉) 나라의 문장가로, 인물이 잘나서 풍채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그는 32세에 귀밑머리가 세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는 말이 있다.
♣ 반악삼도원[潘岳三桃苑]반악은 진(晉) 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안인(安仁). 일찍이 하양(河陽)의 원이 되어 곳곳에 복숭아를 심었다. 삼도(三桃)는 후도(候桃)ㆍ앵도(櫻桃)ㆍ호도(胡桃)를 말하는데 그의 한거부(閑居賦)에 “삼도는 앵도와 호도의 다른 종류를 표했다.” 하였다. 《晉書 潘岳傳》
♣ 반악여[潘岳輿]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모친을 가마에 모시고 수레에 태워, 멀리 기전(畿甸)을 유람하고 가까이는 집 뜰을 돌아다녔다.[太夫人乃御版輿 升輕軒 遠覽王畿 近周家園]”라는 구절이 있다.
♣ 반악한거배판여[潘岳閑居陪板輿]노모(老母)를 모시고 나들이를 간다는 말이다. 판여(板輿)는 노인용 가마를 뜻하는데,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太夫人乃御板輿 升輕軒遠覽王畿 近周家園”이라는 구절이 있다.
♣ 반안인[潘安仁]진(晉) 나라 시인 반악(潘岳). 그의 자가 안인(安仁)이다. 하양현(河陽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온 고을에다 도리(桃李)를 심었다.
♣ 반안현[潘安縣]반안현은 하양현의 별칭으로, 반악이 일찍이 하양의 현령이 되었는데, 반악의 자(字)가 안인(安仁)이었으므로, 이를 줄여서 반안이라고 하였으며, 드디어 하양현의 별칭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 반앙[飯秧]모내기 할 때 밥을 제공하고 품삯을 그만큼 감하는 것을 밥모[飯秧]라고 하였음.
♣ 반야주이학[半夜舟移壑]만물의 변화를 주관하는 조물(造物)의 뜻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라는 말이 있다.
♣ 반야학주이[半夜壑舟移]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골짜기 속에 배를 숨겨두고는 안전하다고 여기지만 한밤중에 힘센 자가 등에 지고 달아나도 어리석은 사람은 알아채지를 못한다.[夫藏舟於壑 謂之固矣 然而夜半 有力者 負之而走 昧者不知也]”라고 하였다.
♣ 반양[潘楊]진(晉) 나라 때의 명사 반악(潘岳)이 양수(楊綏)의 고모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으로, 인척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한다.
♣ 반양[班揚]후한(後漢) 때의 문장가인 반고(班固)와 전한(前漢) 때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을 합칭한 말이다. 모두가 큰 문장들이다.
♣ 반양호[潘楊好]서로 인척(姻戚) 사이가 된 것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반악(潘岳)의 아버지와 양중무(楊仲武)의 조부와의 사이는 일찍이 구교(舊交)가 있었는데, 또 반악의 아내는 바로 양중무의 고모였으므로, 반악이 양중무와 매우 친밀하게 지냈던 데서 온 말이다.
♣ 반엄[半掩]반쯤 가리다.
♣ 반여[潘輿]반악의 ‘한거부(閑居賦)’에 “태부인(太夫人)을 판여(板輿)에 모시고서 멀리 경기(京畿) 지방을 구경하기도 하고 가까이 집 뜨락을 소요하기도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 반여부동진[潘輿不動塵]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태부인(太夫人)을 판여(版輿)에 모시고 구경하러 다닌다.”는 구절이 있다.
♣ 반여친연[潘輿親宴]모친의 수연(壽宴)을 말한다. 반여는 진(晉) 나라 반악(潘岳)이 모친을 모신 수레라는 뜻으로, 그의 ‘한거부(閑居賦)’에 “모친을 푹신한 수레에 모시고서 멀리는 기전(畿甸)을 유람하고 가까이는 집안 뜨락을 돌아다닌다.[太夫人乃御板輿 遠覽王畿 近周家園]”는 구절이 있다. 《文選 卷16》
♣ 반연연산명[班掾燕山銘]후한(後漢)의 장군 두헌(竇憲)이 북선우(北單于)를 대파한 공적을 그의 연(掾), 즉 종사관(從事官)이었던 반고(班固)가 연연산(燕然山)에 새겨 지은 비문(碑文)을 말한다. 《後漢書 卷23 竇憲傳》
♣ 반와독수[盤渦獨樹]급류와 외로운 나무.
♣ 반용세[攀龍勢]용은 왕을 비유한 것으로, 왕의 신임을 얻어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얻음을 뜻한다.
♣ 반우[飯牛]소를 먹임. 춘추 시대 제 나라 사람 영척(甯戚)이 불우하여 소를 먹였다. 제 환공(齊桓公)이 나옴을 알고 영척이 소뿔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요순을 만나지 못해 무명옷 입고 소를 먹이니 긴긴 밤 언제나 밝아지나"하니, 환공이 듣고 대화한 후 대부를 삼았다. 《蒙求中》
♣ 반우[盤杅]음식을 담는 그릇. 둥그런 모양을 반(盤), 네모꼴을 우(杅)라고 함.
♣ 반우[反隅]하나를 설명하면 그 다음을 미루어 안다는 뜻. 논어(論語) 술이 편에, “擧一隅 不以三隅反則不復也”라 하였음.
♣ 반우지지식[反隅之知識]공자의 말에, “한 귀퉁이를 들어 말하는 것은 듣건대, 세 귀퉁이로써 돌이켜 생각해 알아야 한다.” 하였다.
♣ 반원[攀轅]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이 떠날 때 백성들이 수레를 붙잡고서 못 가게 만류한다는 말이다.
♣ 반원[攀援]올라가서 따르다.
♣ 반의[斑衣]반의는 문명인이 입는 옷을 뜻한다.
♣ 반의[斑衣]색동옷으로, 색동옷을 입고서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북당서초(北堂書鈔) 제129권에,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세에 부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항상 색동옷을 입고서 어린아이 시늉을 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하였다.
♣ 반의시무훤위리[斑衣試舞萱闈裏]어린애들처럼 오색 옷을 입고 재롱을 부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함을 말한다. 고사전(高士傳)에 “노래자(老萊子)는 나이가 70인데도 오색 옷을 입고 재롱을 부리며 자식의 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하였다.
♣ 반의애일[斑衣愛日]반의(斑衣)는 나이 70에 색동 옷을 입고 재롱을 떨어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렸던 노래자(老萊子)의 고사를 가리키고, 애일(愛日)은 얼마 안 남은 어버이의 여생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 반의염치[班衣染齒]왜구(倭寇)를 가리키는 말. 왜인의 풍속이 아롱옷을 입고 이빨을 검게 물들인 데서 온 말.
♣ 반의지희[斑衣之戱]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논다는 말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반의진동[斑衣秦童]일본 사람이 아롱진 의복을 입는 것은 진시황이 삼신산(三神山)에 불사약(不死藥)을 캐러 보낸 동남동녀(童男童女)가 입고 간 아롱진 옷을 본받았다는 말이다.
♣ 반이소[反離騷]양웅이, 굴원이 지은 이소경의 뜻이 슬퍼 그를 조문하는 뜻으로 지은 글이다.
♣ 반인[伴人]신역(身役)이 없는 양인(良人)을 당상관(堂上官) 이상에게 주어 근수(根隨)로 부리게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 반자[半刺]도호부(都護府)의 통판(通判) 벼슬, 즉 판관(判官)을 가리킨다.
♣ 반자[半刺]반자는 군수(郡守)의 보좌관, 즉 통판(通判)ㆍ장사(長史) 따위. 지방 장관에 속해 있는 관원을 총칭하는 말이다.
♣ 반작[反作]조선후기 환곡(還穀)의 법이 문란해지자 아전들이 곡식은 나누어 주지도 않고 창고에 그냥 두고서 농간을 부려 이득을 취하는 것. 번질
♣ 반장[班匠]공수반(公輸班)과 장석(匠石). 모두 기예(技藝)에 뛰어났음.
♣ 반장[班張]후한(後漢) 때의 반고(班固)와 장형(張衡)을 아울러 일컬은 것인데, 이들은 모두 문장과 사부에 뛰어났다.
♣ 반장군[班將軍]함사반장군(頷似班將軍). 부귀(富貴)의 상(相)을 말한다. 반 장군(班將軍)은 동한(東漢) 때의 명신인 반초(班超). 그는 일찍이 상자(相者)에게 상을 보았더니 상자는 “당신은 제비의 턱에 범의 목이니 만리후(萬里侯)에 봉해질 것이다.” 하였는데, 그는 그 후 과연 서역(西域)을 평정한 공로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班超列傳》
♣ 반절[反切]한자의 두 자음을 반씩 따서 한 음을 만들어 읽는 법. 예를 들면, 문(文)자의 음은 무(無)의 ‘ㅁ’과 분(分)의 ‘’을 합쳐 ‘문’이 된다는 뜻으로 “無分反” 또는 “無分切”이라 함과 같음.
♣ 반정원[班定遠]후한 명제(後漢明帝) 때의 반초(班超)임. 서역(西域)의 50여 국을 항복받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七十七 班超傳》
♣ 반제[泮製]반궁제술(泮宮製述), 곧 성균관에서 제술만으로 보이는 과시(科試).
♣ 반제매형[礬弟梅兄]황산곡(黃山谷)의 수선화(水仙花)를 노래한 시(詩)를 말하는 것이다.
♣ 반조[反照]불가(佛家)의 말로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준말인데, 곧 자기의 본분(本分)을 돌아보아 아는 것을 말한다.
♣ 반중해[盤中醢]하(夏) 나라 공갑(孔甲) 때에 상제(上帝)가 그에게 네 마리의 용을 선사하였는데, 용 한 마리가 죽자 사육사인 유루(劉累)가 남몰래 소금에 절여 젓을 담근 뒤 공갑에게 먹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左傳 昭公 29年》
♣ 반증[反證]논어(論語) 술이(述而)의 “한 귀퉁이를 언급해 주었는데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임.
♣ 반직[伴直]두 사람이 당번으로 함께 숙직하는 것을 말한다.
♣ 반착[盤錯]뿌리가 서리고 가지가 엉겨 있는 것처럼 복잡한 사안(事案)을 표현하는 말이다. 반근착절(盤根錯節)을 만나지 아니하면 잘 드는 연장[利器]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반근(盤根)은 오래 된 나무의 뿌리가 굴곡(屈曲)된 것이요, 착절(錯節)은 나무의 마디가 착잡한 것이다. 이 말은 어려운 고비를 당하여야 훌륭한 솜씨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 반착기[盤錯器]반착은 반근 착절(盤根錯節)의 준말로, 복잡하게 얽힌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 반천[半千]반천은 5백 년을 이르는데, 5백 년 만에 한 번씩 현인(賢人)이 난다는 뜻에서, 당(唐) 나라 때 원여경(員餘慶)의 스승 왕의방(王義方)이 원여경을 매우 훌륭하게 여기어 일찍이 그에게 이르기를 “5백 년마다 한 현인이 나오는 것인데, 그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고, 인하여 그의 이름을 반천으로 고쳤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卷一百十二》
♣ 반첩여[班婕妤]한 성제가 조비연의 자제(子弟)를 총애하니, 반첩여는 박대받는 것을 알고서 동궁(東宮)으로 물러가 살며 환선시(紈扇詩)를 지어 스스로 슬퍼하였다. 그래서 뒷사람이 첩여원(婕妤怨)이라 하여 악부(樂府)에 편입시켰다.
♣ 반첩여[班婕妤]한대(漢代)의 여류시인(女流詩人). 한 성제(漢成帝) 때 궁녀로 있으면서 왕의 총애를 받아 첩여(婕妤)가 되었다가 후에 조비연(趙飛燕)이 총애를 받게 되자, 참소를 당하여 장신궁(長信宮)으로 물러가 태후(太后)를 모시었다. 그는 장신궁에 있는 동안 시부(詩賦)를 지어 스스로를 슬퍼하였는데, 사(詞)가 매우 애처로웠다. 《漢書 卷九十七下 外戚傳》
♣ 반초[班超]반초(班超)는 후한 때의 명장으로 일찍이 서역(西域)에 정벌을 나가 장군장사(將軍長史)ㆍ서역도호(西域都護) 등의 관직에 3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서역의 50여 나라들을 위무 안집(慰撫安集)하여 모두 한 나라에 귀순하도록 하였다. 봉호는 정원후(定遠侯)이다.
♣ 반초[班超]반초는 한(漢)나라 부풍(扶風) 안릉(安陵) 사람으로 자는 중승(仲升)인데, 명제(明帝) 영평(永平) 16년(73)에 36인을 거느리고 서역에 사자로 나가 31년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50여 개의 군소 나라를 안정시켰는데, 그 공으로 벼슬이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이르고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後漢書 卷四十七 班超傳》
♣ 반초은[反招隱]보통의 은자(隱者)와는 달리 저잣거리에 묻혀 사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왕강거(王康琚)의 시 ‘반초은(反招隱)’에 “숲 속에 사는 이는 작은 은자요, 저잣거리에 사는 이가 바로 큰 은자로세.[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22》
♣ 반초투필[班超投筆]한나라의 반초(班超)가 관리 노릇을 하면서 글씨를 쓰다가 붓을 던지며, “대장부가 마땅히 만 리 밖에 나가서 공(功)을 세울 것이지 어찌 이런 것이나 쓰고 앉았으랴.” 하고 서역(西域)에 가서 공을 세웠다.
♣ 반추하처망륙랑[班騅何處望陸郞]고악부(古樂府) 신현가(神弦歌) 명하동곡(明下童曲)에 “육랑은 얼룩말을 타고 …… 문을 바라보고도 돌아오지 않는다[陸郞乘斑騅 …… 望門不欲歸].” 한 데서 온 말인데, 혹자는 여기의 육랑을 진 후주(陳后主)의 압객(狎客)인 육유(陸瑜)였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다.
♣ 반춘[班春]지방관(地方官)이 백성들에게 춘령(春令)을 반포하는 일을 가리킨다.
♣ 반측[反側]일정하지 않다.
♣ 반통[飯筒]반통은 찐 찹쌀을 넣은 대나무통임. 초(楚) 나라 사람들이 굴원을 애도하는 뜻에서 5월 5일에 이것을 멱라연에 던져 그를 제사지냈다 함. 《續齊諧記》
♣ 반통인[半通印]한대(漢代)의 제도에서 승상(丞相)으로부터 영승(令丞)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정방형(正方形)의 인(印)을 사용하고, 색부(嗇夫) 등 말직들은 그것의 반분(半分)인 장방형(長方形)의 인을 사용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반포[反哺]까마귀 새끼는 자란 뒤에, 어미 까마귀에게서 얻어먹은 만큼의 먹이를 다시 늙은 어미 까마귀에게 물어다 먹인다 하여, 까마귀의 별칭을 반포조(反哺鳥) 또는 효조(孝鳥)라 한 데서 온 말이다. 본초(本草) 자오부(慈烏部)에 “까마귀가 처음 나면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먹이고, 자라나면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60일 동안 물어다 먹인다.” 하였다.
♣ 반포금[反哺禽]새끼가 자란 뒤에 어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까마귀를 가리킨다.
♣ 반포조[反哺鳥]까마귀
♣ 반포지효[反哺之孝]도리어 먹이는 효도.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는 속설에서 온 말.
♣ 반포타방유[潘圃詫芳荽]진(晉) 나라 때 문장가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좋은 곳에 거소(居所) 잡아 집을 짓고 못을 만들면……호유(胡荽)가 향내를 풍기리라.” 하였다. 《晉書 卷五十五 潘岳傳》
♣ 반함[攀檻]한 성제(漢成帝) 때 주운(朱雲)이 영신(佞臣)의 목을 베라고 청했다가 크게 노한 성제로부터 참수(斬首)의 명을 받고 끌려나가면서도 난간을 잡고 놓지 않으면서 계속 직언을 하여[攀檻] 마침내 난간이 부서졌던 고사가 있다. 《漢書 朱雲傳》
♣ 반형[班荊]가시풀을 땅에 깔고 앉아서 이야기하여도 아무런 스스럼없는 사이, 즉 절친한 친구간을 말한다. 초(楚) 나라의 오삼(伍參)과 채(蔡) 나라의 자조(子朝)가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아들들인 오거(伍擧)와 성자(聲子)도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 뒤에 오거가 정(鄭) 나라로 도망쳤다가 진(晉) 나라로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성자 역시 진 나라로 가다가 정 나라 교외에서 둘이 만나 형초(荊草)를 펴고 길가에 앉아서 함께 초(楚) 나라로 돌아가기를 의논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26年》
♣ 반형언지[班荊言志]춘추 시대 초(楚) 나라 오거(伍擧)가 정(鄭) 나라로 도망친 뒤, 친구인 성자(聲子)와 교외 들판에서 형초(荊草)를 깔고 앉아 고국에 돌아갈 것을 의논했던 고사가 있다. 《春秋左傳 襄公 26年》
♣ 반혼단[返魂丹]죽은 자를 살린다는 단약(丹藥).
♣ 반혼향[返魂香]서쪽 바다 끝에 취굴주(聚窟洲)가 있고 그 위에 반혼수(返魂樹)가 있는데, 그 나무 뿌리를 솥에 고아서 즙을 낸 뒤 반혼향이라는 환약(丸藥)을 만들어 죽은 이의 코에 대면 기사회생(起死回生)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上》
♣ 반화총[班花驄]오화총(五花驄). 말의 갈기털을 다섯 잎 꽃무늬 모양으로 다듬어서 장식한 말.
♣ 반화포[蟠花袍]무인(武人)이 입는 것으로, 겹겹의 꽃모양을 넣어서 만든 겉옷을 말함.
♣ 반후연함[班候燕頷]부귀 겸전의 상모를 말함. 반후(班侯)는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후한(後漢)의 명장 반초(班超)를 가리키는데, 어느 관상가가 반초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턱에 호랑이목[燕頷虎頸]이어서 일만리 후(侯)를 봉할 상이요.” 하였는데 과연 서역(西域) 50여 나라를 평정하고, 그 공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고 정원후에 봉해졌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班超傳》
♣ 반후종[飯後鐘]세상 인심의 박함을 비유한 말이다. 왕정보(王定保)의 무언(撫言)에 “당(唐) 나라 왕파(王播)가 젊어서 빈고(貧孤)하여 양주(揚州)의 혜조사(惠照寺)에 붙여서 중의 재찬(齋餐)을 얻어먹고 있을 적에, 중이 그를 싫어하여 재(齋)를 파하고 나서야 종(鍾)을 치므로, 왕파는 시를 지어 ‘중들의 식사 뒤에 울리는 종소리가 부끄럽다.[慚愧闍梨飯後鍾]’고 했다.”는 고사이다.
♣ 반희[班姬]반희는 한 성제(漢成帝)의 궁인(宮人) 반첩여(班倢伃)를 말한다. 시가(詩歌)에 능하여 총애를 받다가 허태후(許太后)와 함께 조비연(趙飛燕)의 참소를 받고는 물러나 장신궁(長信宮)에서 태후를 모시고 시부(詩賦)를 읊으며 슬픈 나날을 보냈다. 《漢書 外戚傳下 孝成班倢伃傳》
♣ 반희선[班姬扇]반첩여(班婕妤)는 한 성제(漢成帝) 때의 궁녀. 성제의 사랑을 받았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로 총애가 옮겨가자 참소당하여 장신궁(長信宮)으로 물러가 태후(太后)를 모시게 되었다. 이때 자신의 신세를 소용없는 가을 부채[秋扇]에 비겨 읊은 원가행(怨歌行)을 지었다. 《漢書 卷九十七 列女傳》
♣ 반힐치[半黠癡]어리석음과 영민함이 각각 절반씩이라는 뜻이다.
♣ 발거[拔去]타도(他道)에 가서 응시(應試)할 때에 일정한 요건(要件)을 갖추지 않으면 합격을 취소하는 일.
♣ 발구지산[發鳩之山]산 이름. 전하는 말로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장자현(長子縣) 서쪽에 있다 한다.
♣ 발군[拔群]여럿 속에서 특별히 뛰어남
♣ 발내포[鉢內布]우리 나라 육진(六鎭)에서 거두어들이던 가는 베로, 이 베 한 필은 바리 속에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발니[渤泥]서남쪽 대해(大海) 가운데 있는 나라 이름.
♣ 발당[發棠]발당은 창고를 풀어줌을 말함. 맹자(孟子)가 제왕(齊王)을 위해 당읍(棠邑)의 창고를 풀어주게 한 일에서 인용된 것이다. 《孟子 盡心章下》
♣ 발도[撥棹]게의 별칭이다.
♣ 발도[拔都]매우 용맹스러워 상대될 만한 자가 없다는 뜻.
♣ 발모[拔茅]미숙한 무당이 노련한 무당을 만나면 자신의 미숙함을 실망하여 띠를 뽑아[拔茅]버린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학문과 기예의 미숙한 자가 노련한 자를 보고는 자신에 대하여 실망감을 갖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발모[魃母]발모는 가뭄을 맡은 귀신이다.
♣ 발모[拔茅]발모는 어진 사람이 어진 친구를 뽑아 천거한다는 뜻으로, 띠[芧] 뿌리를 뽑으면 한꺼번에 여러 뿌리와 줄기가 같이 뽑혀 올라오는 데서 온 말이다. 주역(周易) 태괘(泰卦)에 “띠를 뽑아 연해서 함께 간다.[拔茅茹 以其彙征]"하였다.
♣ 발모여[拔茅茹]뜻이 맞는 인사들끼리 함께 어울려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태괘(泰卦) 초구효(初九爻)에 “풀뿌리를 뽑으니 서로 엉켜 있다. 끼리끼리 나오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征 吉]”라고 하였다.
♣ 발묵[潑墨]먹물을 뿌림. 산수(山水) 같은 것을 그릴 때 먹물로 점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우경(雨景)을 그릴 때에 사용한다.
♣ 발묵화룡[潑墨畫龍]묵화로 그린 용을 찬양한 말. 양(梁)의 유명한 화가였던 장승유(張僧繇)는 금릉(金陵)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벽에다가 용 네 마리를 그렸는데 눈알을 그리지 않고는 늘 “눈알을 그리면 날아갈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믿지 않자 눈알을 그렸더니 천둥과 번개가 일어 벽을 깨고는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한다. 《歷代畫史彙傳 二十四》
♣ 발발[撥撥]물고기가 지느러미를 힘있게 놀리는 모양
♣ 발발[孛孛]환하지 않은 모양
♣ 발발지[潑潑地]자사(子思)가 천지간에 드러난 도(道)의 쓰임을 말한 가운데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고기는 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했으니, 위아래에 드러난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는데, 여기에 대하여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활발발한 곳이다.[活潑潑地]”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 第十二章》
♣ 발본색원[拔本塞源]폐단의 근본을 뿌리뽑고 그 근원을 막음. 근원적인 처방
♣ 발부[髮賦]진(晉)의 좌사(左思)가 쓴 백발부(白髮賦). 좌사가 어느새 백살이 된 게 한스러워 백발부를 썼었음. 《淵鑑類函》
♣ 발분망식[發憤忘食]분발하여 무엇을 하는데 끼니조차 잊음. 한 가지 일을 성취하기 위해 밥 생각도 잊고 바삐 돌아다님.
♣ 발산개세[拔山蓋世]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기운은 세상을 뒤덮을 만하다. 용기와 기상이 월등하게 뛰어난 것을 비유하는 말. 원래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늠름한 힘과 기상을 비유하는 말인데, 오늘날에는 사람의 역량이 뛰어난 것을 말할 때 주로 쓰인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勢)
♣ 발산력진추불서[拔山力盡騅不逝]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서 마지막으로 패전하여 겹겹이 포위를 당한 속에서 밤에 일어나 장중(帳中)에서 술을 마시며 사랑하는 우미인(虞美人)을 잡고 울면서 노래하기를, “힘은 산을 빼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더니, 때가 불리(不利)하여 오추마(烏騅馬)가 가지 않는다.” 하였다. 오추마는 항우가 항상 타던 말이다.
♣ 발생[發生]발생은 생성(生成)ㆍ발흥(發興)ㆍ출현(出現)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지나, 여기서는 봄을 이른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봄을 발생이라 하고, 여름을 장영(長嬴)이라 하고, 가을을 수성(收成)이라 한다.” 하였다.
♣ 발섭[跋涉]육지로 가는 것을 발, 물을 건너는 것을 섭이라 한다. 시경(詩經) 풍(鄘風)에 “대부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오니, 내 마음이 근심스럽구나.” 하였다.
♣ 발섭우[跋涉憂]행로(行路)의 어려움을 말하는데 잡초가 우거진 길을 가는 것을 발, 물을 건너는 것을 섭이라 한다. 시경(詩經) 용풍(鄘風) 재치(載馳)에 “대부가 발섭하니 내 마음 시름겹네.[大夫跋涉 我心則憂]" 하였다.
♣ 발십득오[拔十得五]당서(唐書) 장구령전(張九齡傳)에 “대저 이부(吏部)의 상서(尙書)와 시랑(侍郞)은 현능함 때문에 제수된 것이니, 어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만일 사람을 알기가 어렵다면 10명 가운데 5명만 얻어서 쓰더라도 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발아찰연[孛兒札宴]혼인 등 경사에 베푸는 잔치. 원래 몽고 말인데, 그 지배하에 있을 때 고려에서도 이것을 썼다.
♣ 발양상태[發揚狀態]의식은 대체로 혼탁되어 있지 않으나 고성을 내거나 울거나 난폭하게 굴거나 자기의 주위에 대하여 분별없이 행동하는 형태
♣ 발연변색[勃然變色]왈칵 성을 내어 안색이 변함.
♣ 발운산[撥雲散]눈이 흐릿하여 잘 안 보이고 눈물이 많이 흐르는 데에 쓰는 약이다.
♣ 발저사[鉢底裟]이것은 아마도 발라야(鉢羅若)를 이렇게 쓴 것 같은데, 반야(般若)와 같은 말로서, 번역하면 지혜(智慧)가 된다.
♣ 발전치후[跋前疐後]발전치후는 시경(詩經) 빈풍(豳風) 낭발(狼跋)에서 나온 말로, 이리가 앞으로 가려 하면 턱 살이 밟히고 뒤로 가려 하면 꼬리가 밟히는 것처럼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놓인 것을 말한다.
♣ 발조기립치적[拔趙旗立幟赤]한신(韓信)이 조(趙) 나라를 칠 적에 거짓 패주(敗走)하자 조군(趙軍)이 성을 비우고 추격하였다. 그 사이에 한신의 군사가 조 나라 성을 점령하고 한(漢) 나라의 붉은 기를 세워 승리하였다. 《史記 卷九十二 淮陰侯列傳》
♣ 발중생련[鉢中生蓮]진(晉) 나라 때 천축(天竺)의 중 불도징(佛圖澄)이 낙양(洛陽)에 왔었는데, 석늑(石勒)이 그의 도술(道術)을 시험하려고 불렀다. 불도징이 바리때에 물을 채운 다음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니, 별안간 바리때 속에 파란 연꽃이 나타나서 햇빛에 반짝거렸다는 전설이 있다. 《晉書 卷九十五 佛圖澄傳》
♣ 발천진[發天眞]개성이 독특한 훌륭한 시문이 나오리라는 뜻이다. 천진(天眞)은 하늘에서 독자적으로 부여받은 순수한 성품을 말한다.
♣ 발청수적[拔靑樹赤]한(漢) 나라 때 한신(韓信)이 정경구(井陘口)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조(趙) 나라 성(城)에 꽂힌 기(旗)를 뽑아 버리고 한 나라의 붉은 기를 세운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九十二》
♣ 발췌초록[拔萃抄錄]여럿 가운데 뛰어난 것을 뽑아 간단히 적어 둔 것.
♣ 발하[拔河]유희(遊戲)의 일종인 줄다리기를 말함. 당 중종(唐中宗) 때에 궁녀(宮女)들이 하였던 놀이로서, 즉 삼[麻]으로 꼰 큰 동아줄의 양쪽 끝에다 각각 10여 줄의 작은 새끼줄을 매고 줄 하나마다 서너 명씩이 잡아당기되, 힘이 약해 끌려간 쪽이 진다고 한다. 《唐書 中宗紀》
♣ 발한호[潑寒胡]서역(西域)에서 전해온 무희(舞戲)의 일종으로, 대단히 추운 때에 소년(少年)들이 발가벗은 몸으로 대열을 지어 춤을 추면서 서로 찬물을 끼얹는 놀이인데, 중국에서는 당 무후(唐武后) 말년에 시작되었다 한다. 《唐書 張說傳》
♣ 발해검우[渤海劍牛]한 선제(漢宣帝) 때에 공수(龔遂)가 발해 태수(渤海太守)로 나가서 농사에 태만한 그곳 백성들에게 칼을 팔아 소를 사도록 하여 농사를 적극 권장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九》
♣ 발형도[發硎刀]새로 숫돌에 간 칼날은 소를 잡는 데에 더욱 여유만만하다는 데서 온 말로, 뛰어난 재능을 비유한 말이다.
♣ 발혜[勃磎]마음속에 일어나는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의 갈등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방 안에 빈 곳이 없으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다투게 되고, 마음이 자연의 경지에 노닐지 못하면 온갖 욕정이 갈등을 빚게 된다.[室無虛空 則婦姑勃磎 心無天遊 則大鑿相攘]”라는 말이 있고, 또 송유(宋儒)인 여대림(呂大臨)의 ‘극기명(克己銘)’에 “사욕을 이기지 못하면, 내 마음속의 공간을 군색하게 하여, 마치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갈등을 빚는 것처럼 만들 것이니, 그 나머지야 취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方其未克 窘吾室廬 婦姑勃磎 安取厥餘]”라는 말이 있다.
♣ 발호[跋扈]제 마음대로 날뛰며 행동하는 것. 작은 물고기들은 통발에 남지만, 큰 물고기들은 그것을 뛰어넘어 도망쳐버리듯 제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나 아랫사람이 권력을 휘둘러 윗사람을 벌함.
♣ 발호자[拔虎髭]옛날 신선이었던 정사원(鄭思遠)이 항상 호랑이를 타고 다녔는데, 수염 몇 개를 뽑아서 친구인 허은(許隱)에게 주어 치통(齒痛)을 치료하였다 한다. 《酉陽雜俎》
♣ 발호장군[跋扈將軍]폭풍을 의미한다.
♣ 발화[潑火]한식절(寒食節)을 뜻함. 옛날 풍속에 한식절에는 불을 금하였는데, 이 때에 내리는 비를 발화우(潑火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발화우[潑火雨]청명절(淸明節) 무렵에 내리는 도화우(桃花雨)를 달리 이른 말이다.
♣ 발휘[發揮]깊이 숨어있는 것을 파헤쳐 겉으로 나타냄.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문언(文言)에 “육효(六爻)가 발휘(發揮)한 것은 겉으로 만물의 정실을 밝힘이요.[六爻發揮 旁通情也]" 하였음.
♣ 방간[方干]당(唐) 나라 사람으로 자는 웅비(雄飛). 그 위인이 속되고 남을 모욕하기를 좋아했으며, 끝내 벼슬하지 못하고 회계(會稽)의 경호(鏡湖)에 은거하여 평생 나오지 않았음.
♣ 방거사[龐居士]방 거사의 이름은 온(蘊), 자는 현도(玄道)이며 형주(衡州) 사람이다. 대대로 유학(儒學)을 전공하여 진리(眞理)를 구하던 중, 정원(貞元) 초에 마조(馬祖)를 찾아가 “삼라만상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물으니, 그가 “너의 한 입으로 서강수를 다 마셔야 도를 깨달으리라.” 대답하자 곧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傳燈錄 龐居士傳, 輟耕錄》
♣ 방경[芳卿]선인(仙人) 주요영(周瑤英)과 노닐었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왕형(王逈)을 위해 시를 지어 주면서 소동파(蘇東坡)가 그에게 붙여 주었던 칭호인데, ‘부용성(芙蓉城)’이라는 그 시에 “방경이 사례한 글의 내용 지나치게 정중하네.[芳卿寄謝空丁寧]”라는 표현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6》
♣ 방공[龐公]제갈량(諸葛亮)이 존경했던 동한(東漢) 말의 은사(隱士)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한 번도 도회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양양(襄陽)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곡한 요청도 누차 거절하다가, 뒤에 가족을 이끌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생을 마쳤다. 《高士傳 下ㆍ後漢書 逸民列傳 龐公傳》
♣ 방공은적감유후[龐公隱跡堪遺後]후한(後漢)의 방덕공(龐德公)이 현산(峴山) 양지쪽에 숨어살면서 형주(荊州)의 유표(劉表) 초청에도 응하지 않아, 할 수 없이 유표가 그를 찾아갔더니 그는 그때 마침 밭을 갈고 있었다. 유표가 그를 보고 묻기를, “선생이 벼슬과 녹을 받으려고 않으니 자손들에게 장차 무엇을 물려주려고 그러십니까?”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남들은 모두 위태로운 것을 물려주고 있는데, 나만은 아주 안정된 것을 물려줄 것이오.” 하였음. 《尙友錄》
♣ 방공장자지[房公獎紫芝]방공은 당(唐) 나라의 방관(房琯)을 가리키며, 자지(紫芝)는 아름다운 눈썹을 말한다. 원덕수(元德秀)는 위인이 청결하매, 방관은 덕수를 볼 때마다 감탄하기를 “자지의 눈썹을 보니 공명심이 없어진다.” 하여 지극히 추장(推獎)하였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四 元德秀傳》
♣ 방공지[龐公志]방공은 한말(漢末) 양양(襄陽) 사람인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키는데, 양양 현산(峴山)의 남쪽에 은거하여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여러 번 초빙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는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영영 나오지 않았다. 곧 초야에서 자유로운 몸으로 살고 싶은 뜻을 말한다.
♣ 방공진실장[龐公盡室藏]방공은 후한(後漢) 때 제갈량(諸葛亮)이 존경했던 방덕공(龐德公)을 말한다. 유표(劉表)의 간청도 뿌리친 채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 《尙友錄 1》
♣ 방관[房琯]지덕(至德) 원년(756) 10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안녹산(安祿山)을 정벌하겠다고 자청하여 방어포동양관 병마절도사(防禦蒲潼兩關 兵馬節度使)가 되어 4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도사(陳濤斜)에서 적군과 접전하여 참패를 당했다.
♣ 방국진췌[邦國殄瘁]시경(詩經) 대아(大雅) 첨앙(瞻卯)에 “현인이 사라져 나라가 모두 병들도다.[人之云亡 邦國殄瘁]”라는 구절이 있다.
♣ 방규[芳規]전대(前代) 사람이 세워 놓은 훌륭한 규범을 말한다.
♣ 방금[邦禁]서경(書經) 주관(周官)에 “사구(司寇)가 방금을 관장하여 간악한 자들을 신문하고 난폭한 자들을 처벌한다.” 하였다.
♣ 방기[旁期]방기는 곧 방계 족친(旁系族親)으로서 기년복(期年服)에 해당하는 상복을 뜻한다.
♣ 방내[方內]방내(方內)ㆍ방외(方外)란 말이 장자(莊子)에 있는데, 방내는 세속의 법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하고, 방외는 세속의 법도를 초월한 것을 말한다.
♣ 방당[方塘]네모난 조그만 연못이다.
♣ 방덕공[龐德公]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서 양양(襄陽) 현산(峴山) 남쪽에 농사짓고 살면서 성시(城市)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로부터 수차의 부름을 받고도 끝내 나가지 않았다. 영천(潁川)의 사마휘(司馬徽), 남양(南陽)의 제갈량(諸葛亮)과 상종하였으며, 나중에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간 뒤로는 끝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유표(劉表)가 찾아가서 “선생은 벼슬을 받지 않으니 무엇으로 자손에게 남겨 주겠소?" 하니, 그가 “남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주는데 나만은 편안함을 주겠습니다.” 하였다는 말이 유명하다. 《尙友錄, 高士傳, 後漢書》
♣ 방덕채약[龐德採藥]속세를 떠나 숨어 살 생각이 있음을 말함. 후한(後漢)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을 캐면서 다시 세상에 돌아오지 않았었음. 《尙友錄 卷一》
♣ 방동[方瞳]사각(四角)으로 된 눈동자를 말하는데, 선서(仙書)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천수(千壽)를 누린다고 하였다.
♣ 방동옹[方瞳翁]방동은 눈동자가 사각(四角)으로 된 것을 이르는데, 이는 장수(長壽)의 조짐이라고 한다.
♣ 방두[房杜]당 태종(唐太宗) 때 명신인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병칭한 것이다.
♣ 방두[芳杜]방지(芳芷)와 두형(杜蘅)으로 모두 향초인데 뜻이 같고 도가 합한 친구끼리 서로 쓰는 말임.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雜杜蘅與芳芷"라는 구가 있음.
♣ 방두풍[房杜風]당나라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가 어진 정승이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각(黃閣) 20년에 맑은 바람이 일만고(一萬古)로다.” 하였다.
♣ 방락[訪落]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한 편명으로, 주 성왕(周成王)이 종묘(宗廟)에 나아가 군신(群臣)에게 도(道)를 물은 것을 칭송한 노래.
♣ 방로[龐老]나이 많고 덕이 높은 은자를 말한다. 후한(後漢) 말의 고사(高士) 방덕공(龐德公)이 유표(劉表)의 간곡한 요청도 뿌리치고 숨어살면서 가끔 제갈량(諸葛亮)의 예방만 받다가 끝내는 녹문산(鹿門山)으로 종적을 감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逸民列傳》
♣ 방릉[房陵]중종(中宗)의 능으로 곧 중종을 가리킨다.
♣ 방릉리[房陵李]방릉은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현명. 술이기(述異記)에 “방릉현 정산(定山) 주중(朱仲)의 집에 남색 오얏이 있는데, 전대에 보기 드문 기물(奇物)이었다.” 하였다.
♣ 방만리[方萬里]방만리(方萬里)는 원(元) 나라 때 사람으로 방회(方回)를 말함. 만리는 그의 자임. 방회의 동강속집(桐江續集)에 의하면, 유광(劉光)이 맨 처음 초한야좌(初寒夜坐)의 시를 지어 방회에게 보이자, 방회가 여기에 차운을 하였었다. 《桐江續集 卷二》
♣ 방맹[逄萌]방맹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였다. 봉맹(逢萌)
♣ 방명[方明]상하 사방(上下四方)의 신명(神明)의 상(象)을 이른 말이다.
♣ 방목[謗木]방목은 조정의 뜰에 목판을 깎아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임의로 정치의 득실을 쓰게 한 것을 이름.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에, “순(舜)은 비방(誹謗)의 목(木)을 세웠다.” 하였음.
♣ 방몰연[防沒宴]연회일의 개고기와 말 머리를 남겨 두었다가 그 이튿날 다시 잔치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몽고의 풍속인데 고려 때 한동안 유행하였다.
♣ 방미[防微]방미두점(防微杜漸)의 약칭으로 어떤 사물의 좋지 않은 형적이 나오는 초기에 즉시 제재를 가하여 더 이상 확대 발전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함.
♣ 방방[汸汸]많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양
♣ 방방[旁旁]왕성한 모양
♣ 방본[邦本]나라의 근본이란 뜻으로 백성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오자지가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 한 말에서 온 것이다.
♣ 방분녹촉[防奔鹿觸]모친의 묘소를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은 효자의 정성을 표현한 말이다. 진(晉) 나라 효자 허자(許孜)가 모친의 묘도(墓道)에 소나무를 심었다가 사슴 뿔에 받히자 그지없이 비통하게 여겼는데 얼마 뒤에 그 사슴이 맹수에게 잡아먹혔다는 일화가 전한다. 《晉書 孝友傳 許孜》
♣ 방불[彷彿]그처럼. 따라서.
♣ 방불[髣髴]마치. . 같다.
♣ 방사[房駟]방사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거가(車駕)를 맡은 별이다.
♣ 방사도봉래[方士到蓬萊]안기생(安期生)을 찾는 방사들을 가리킨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봉래의 안기생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다시 볼 수 없었다.”는 말이 있다.
♣ 방삭[方朔]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으로, 그의 점서(占書)에 정월 1일부터 8일까지의 점치는 대상과 기후에 따른 길흉이 기록되어 있다.
♣ 방삭기[方朔飢]양생을 하고 싶어하는 열망이 지극히 간절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동방삭(東方朔)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황제 앞에서 식사를 하고는 남은 음식을 모두 싸가지고 가면서 옷을 온통 더럽히기도 하였으며, 추아(騶牙)라는 희귀한 동물이 나왔을 때에도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해 주어야만 설명해 주겠다고 버틴 일화가 전해 온다. 《史記 卷126》
♣ 방삭삼천독[方朔三千牘]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長安)에 들어가 임금에게 글을 올릴 때 3천주독(三千奏牘)을 썼으므로, 두 사람이 함께 겨우 들고 들어갔다. 임금이 두 달 만에야 겨우 다 읽었다.
♣ 방삭영도투[方朔靈桃偸]전한(前漢) 때 동방삭(東方朔)이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심어 놓은 복숭아를 훔쳐 먹고 명이 길어 오래 살았다는 고사이다. 한무고사(漢武故事)에 “동군(東郡)에서 단인(短人)을 바쳤는데, 무제(武帝)가 동방삭을 불러 동방삭이 이르자, 단인이 동방삭을 가리키며 무제에게 말하기를 ‘서왕모가 심은 복숭아가 3천 년 만에 한 번 꽃이 피고 3천 년 만에 열매가 한 번 여는데, 이 아이가 불량하여 벌써 세 번이나 훔쳐 먹었습니다’ 했다.” 하였다.
♣ 방삭포삼도[方朔飽三桃]동방삭은 한(漢) 나라 동방삭을 말하고, 삼도(三桃)는 그가 훔쳐먹은 서왕모(西王母)의 삼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복숭아 3개를 뜻한다. 《博物志 卷 8》
♣ 방상시[方相氏]인산(因山)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의 장례에 앞서 광중(壙中)의 악귀를 내쫓는 데 쓰였던 네 눈이 있는 귀신의 가면이다.
♣ 방생[放生]불가(佛家)의 말로 잡힌 고기를 다시 놓아주는 일.
♣ 방서[謗書]중상(中傷)하는 투서.
♣ 방성[房星]28수(宿)의 하나로 말[馬]을 맡은 별이다. 이 별의 정기가 땅에 내려와 준마(駿馬)가 된다고 한다.
♣ 방성[房星]역서(曆書) 에 “10월 소설일(小雪日)에 태양(太陽)이 인석목(寅析木)의 전차(躔次)인 방성 제1도(度)에 와서 닿는다.” 하였다.
♣ 방소[方召]방소는 주 선왕(周宣王)의 현신인 방숙(方叔)과 소호(召虎)를 합칭한 말이다.
♣ 방숙[方叔]주 선왕(周宣王) 때의 경사(卿士)로서 왕명을 받아 북쪽으로 험윤(玁狁)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형초(荊楚)를 정복하여 공로를 세웠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채기(采芑)에, “방숙이 임하니 그 수레가 삼천이다[方叔涖止 其車三千].” 하였다.
♣ 방숙소호[方叔召虎]방숙과 소호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명장(名將). 선왕은 만형(蠻荊)이 반(叛)하자 방숙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는데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채기(采芑)는 그 일을 읊은 내용이며, 대아(大雅) 강한(江漢)은 소호가 강한에 왔을 때의 일을 읊은 내용이다.
♣ 방숙유하양도해[方叔踰河襄蹈海]방숙과 양(襄)은 모두 주 나라 때의 악공(樂工)으로, 주 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세상을 피해 숨었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북을 치는 방숙은 하내(河內)로 들어가고, 경쇠를 치는 양은 바다로 들어갔다.” 하였다.
♣ 방술[方術]신선의 술법을 닦는 방사(方士)의 술법.
♣ 방승[旁乘]임금을 모시고 수레 옆에 타는 것을 말한다.
♣ 방아[放衙]방아(放衙)는 시간이 되어 그날의 공무를 파하는 것이다. 송태조(宋太祖)가 어느 현령(縣令)에게, “누른 명주 이불 속에서 방아하지 말라.” 하였다. 그것은 수령이 잠만 자고 공무를 게을리 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 방아의소[倣雅依騷]유종원이 소아(小雅)를 모방하여 평회이아(平淮夷雅)를 지었고, 자기의 신세가 조정에 있지 못하고 먼 곳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억울하고 불평한 회포를 토로한 글이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 방안[牓眼]과거에서 갑과의 둘째로 급제한 사람을 이른 말이다.
♣ 방안[榜眼]진사과(進士科)에서 두 번째 급제(及第)를 말한다.
♣ 방애[芳薆]향기 부성하다.
♣ 방약무인[傍若無人]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남을 신경쓰지 않는다. 즉, 언행이 방자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또는 그러한 사람을 말한다.
♣ 방양[仿佯]머뭇거리다. 배회하다.
♣ 방어미사[魴魚尾辭]방어의 꼬리는 본디 흰 것이지만 과로하면 붉어진다는 뜻으로, 백성들의 고역(苦役)을 비유한 것이다. 《詩經 周南汝墳》
♣ 방어정미[魴魚赬尾]방어의 꼬리는 본디 흰 것이지만 과로하면 붉어진다는 뜻으로, 백성들의 고역(苦役)을 비유한 것이다. 《詩經 周南汝墳》
♣ 방예[方枘]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라는 뜻의 원조방예(圓鑿方枘)를 줄인 말로, 서로 걸맞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 끼워 넣으려 함이여, 맞지 않아 들어가지 않음을 내가 물론 잘 알도다.[圜鑿而方枘兮 吾固知其鉏鋙而難入]”라는 말이 있다.
♣ 방예인[放麑仁]어진 마음을 비유한 말인데, 맹손(孟孫)이 사슴 새끼를 놓아준 데서 온 고사이다. 《淮南子 人間訓》
♣ 방옹[放翁]방옹은 송(宋) 육유(陸游)의 호인데, 당대 유명한 시인으로 산수(山水)를 좋아했고 유독 촉(蜀)의 산수 풍토를 좋아하여 자기 시집을 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할 정도였었다. 《宋史 卷三百九十五》
♣ 방옹[龐翁]방옹은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 방옹시[放翁時]방옹은 송 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호. 육유의 시에 “六十年 問萬首詩"라고 하였다.
♣ 방외[方外]방내(方內)ㆍ방외(方外)란 말이 장자(莊子)에 있는데, 방내는 세속의 법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하고, 방외는 세속의 법도를 초월한 것을 말한다.
♣ 방외[方外]예의 법도의 밖이란 말인데 예의 법도를 초월하였다는 뜻이다.
♣ 방외범색[房外犯色]자기의 처 이외의 여자와 정을 나누는 것.
♣ 방외사[方外士]세속을 초월한 사람으로 전통적인 유교 이외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 방외십교[方外十交]당(唐) 나라 때에 시인들로서 방외십우(方外十友)로 일컬어졌던 육여경(陸餘慶)ㆍ조정고(趙貞固)ㆍ노장용(盧藏用)ㆍ진자앙(陳子昻)ㆍ두심언(杜審言)ㆍ송지문(宋之問)ㆍ사마승정(司馬承禎)ㆍ석 회일(釋懷一)을 말한다.
♣ 방우귀목야[放牛歸牧野]예전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紂)를 쳐서 평정하고 말과 소를 모두 들에 내다 놓고 다시 그런 것은 쓰지 않을 것을 보였다.
♣ 방원[方圓]방원은 모지고 둥글다는 말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지다[天圓地方]는 뜻이니 바로 천지 음양상수(陰陽象數)를 말함.
♣ 방원[方圓]방원은 북을 칠 때에 음절(音節)을 기록하는 부호(符號)인데, 예를 들면 고(鼓)를 칠 때에 음절은 방(方; □)으로 표시하고 비(鼙)를 칠 때의 음절은 원(圓; ○)으로 표시한 것을 뜻한다 《禮記 投壺》
♣ 방원도[方圓圖]방원의 그림은 주역(周易)의 육십사괘(六十四卦)를 네모지고 둥글게 배열한 그림을 가리키며, 희헌(羲軒)은 복희씨(伏羲氏)와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를 가리킨 것이다.
♣ 방윤육례[芳潤六藝]서진(西晉)의 육기(陸機)가 지은 ‘문부(文賦)’에 “수육례지방윤(漱六禮之芳潤)”이라는 말이 나온다.
♣ 방자[榜子]백관(百官)이 서로 볼 때에 사용하는 일종의 수찰(手札)로, 관직이나 씨명(氏名)을 서로 알리는 것이다.
♣ 방장[方壯]때마침 젊은 때.
♣ 방장[方丈]방장(方丈)은 동해 바다 속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 방장[方丈]방장은 사방 한 길쯤 되는 너른 식탁을 말한 것으로, 즉 권문 세가들의 호화판 식생활을 이른 말이다.
♣ 방장[方丈]옛날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거실(居室)이 사방 일장(四方一丈)이었던 데서, 즉 선사(禪師)나 국사(國師) 등 높은 중들의 처소를 말한다. 당(唐) 나라 왕현책(王玄策)이 서역(西域)에 사신가서 유마거사의 석실(石室)을 수판(手板)으로 재어본즉 10홀(笏)이 되었다 한다. 《潛確類書》
♣ 방장부절[方長不折]한창 자라는 나무는 꺾지 않는다. 앞길이 창창한 사람을 박해하지 말라, 혹은 잘 되어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
♣ 방장산[方丈山]봉래(蓬萊)ㆍ영주(瀛州)와 함께 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지리산(智異山)을 가리키기도 한다.
♣ 방장실[方丈室]주지(住持)의 거실, 즉 사원을 가리킨다.
♣ 방저[方諸]달[月]에서 물을 받아내는 그릇인데, 달밤에 구리 소반[銅盤]에다 받쳐서 받는다고 한다. 받아진 물은 방저수(方諸水), 또는 명수(明水)라고 하는데, 가장 맑고 깨끗하여 제사지내는 데 쓰였다고 한다.
♣ 방저원개[方底圓蓋]네모 진 밑바닥에 둥근 뚜껑. 사물이 서로 맞지 아니함.
♣ 방적[放迹]남긴 자취.
♣ 방주십분상수록[芳酒十分湘水綠]아주 좋은 술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 상천(湘川) 영릉현(酃陵縣)의 물이 술 빚는데 좋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謝惠連 雪賦注》
♣ 방진[方鎭]관찰사나 절도사(節度使)가 있는 진영(鎭營)을 가리킨다.
♣ 방진[芳塵]유명한 인물의 자취를 뜻하는 말로, 사당이나 서원을 가리킨다.
♣ 방초지당[芳草池塘]이는 진(晉) 나라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족제(族弟) 혜련(惠連)을 만나면 문득 아름다운 글귀가 나왔다. 하루는 꿈에 혜련을 보고 “池塘生春草"라는 글귀를 지었는데 이 글귀가 사영운 시 전집 중 제일의 가구(佳句)라 일컬었음. 그래서 뒷사람이 형제 사이를 “池塘春草"라는 말로 흔히 쓰고 있음.
♣ 방초청천[芳草晴川]당 나라 최호(崔灝)의 황학루시(黃鶴樓詩)에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라 하였음.
♣ 방촉[芳躅]전현(前賢)들의 훌륭한 행적을 말한다.
♣ 방촌[方寸]마음[心]을 이름.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徐庶辭先主而指其心曰 本欲與將軍共圖王覇之業者 以此方寸之地也 今己失老母 方寸亂矣”라 했고, 중용(中庸) 장구서(章句序)에는, “二者於方寸之間”이라 했음.
♣ 방촌[方寸]마음을 가리킨 것으로, 심장(心臟)은 크기가 사방 한 치[寸]이며 마음이 심장 속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 방촌비[方寸匕]사방 한 치[一寸]쯤 되는 약숟가락을 말한다.
♣ 방촌이란[方寸已亂]마음이 이미 혼란스러워졌다는 말로,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는 어떠한 일도 계속할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방추[防秋]오랑캐를 방어하는 것을 말한다. 오랑캐는 늦가을 무렵에 세력이 강성해져 쳐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舊唐書 陸贄傳》
♣ 방취[芳臭]방취는 향내와 악취로서 전하여 군자의 훌륭한 명성과 소인의 더러운 이름을 뜻한 것이다.
♣ 방편[方便]권도(權道)로 통달하게 하는 지혜. 보살이 여러 가지 수단 방법을 써서 중생을 진실한 대도로 이끌어 들이는 권지(權智).
♣ 방포[方袍]비구니(比丘尼)가 입는 가사(袈裟). 그 모양이 방형(方形)으로 되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방학[放鶴]진대(晋代)의 고승(高僧) 지둔(支遁)이 학을 좋아해서, 선물받은 학 두 마리가 차츰 죽지가 자라는 것을 보고는 날아가지 못하도록 이를 꺾어 버렸는데, 죽지가 상한 학이 축 처져서 울먹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그만 안된 생각이 들어서, “하늘을 나는 천성을 어찌 사람의 이목을 위해 희생시키겠는가.” 하고는, 죽지가 낫도록 잘 길러서 날려보냈다 한다.
♣ 방향[方響]아악기의 하나로, 상하 이단으로 된 가자(架子)의 장방형의 철판(鐵板)을 각각 8개씩 드리우고, 2개의 채로 쳐서 소리를 낸다.
♣ 방현령[房玄齡]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재상. 제주(齊州) 임치(臨淄) 출신이다. 이세민(李世民)의 건국사업을 도왔고, 이세민이 즉위한 후 15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두여회ㆍ위징(魏徵) 등과 함께 ‘정관의 치’라는 황금시대를 만들어냈다. 자식들이 모두 황실과 맺어졌지만 권세가 커질 것을 염려하여 재상직을 사퇴했다. 71세에 죽을 때까지 계속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저수량(遂良)과 함께 진서(晋書)를 편찬했다. ]
♣ 방현로[妨賢路]높은 벼슬자리에 한 사람이 오래 앉아 있는 것을 다른 현인(賢人)의 진출할 길을 방해한다고 이른다.
♣ 방협[謗篋]비방의 글이 가득한 상자. 위(魏) 나라 악양(樂羊)이 중산(中山)을 정벌하고 3년 만에 개선하였을 때, 위 문후(魏文侯)가 그에 대해 비방하는 글이 가득한 상자 하나[謗書一篋]를 보여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樂成》
♣ 방형[邦衡]송(宋) 나라 호전(胡銓)의 자. 금(金) 나라가 강남(江南) 지방을 조유(詔諭)한다는 명목으로 그 사신이 임안(臨安)에 이르자, 호전이 상소하여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진회(秦檜) 등과 함께 사신 왕륜(王倫) 등의 목을 베자고 주장해서 조야가 떠들썩하였다.
♣ 방형[芳馨]향기로운 꽃.
♣ 방호[方壺]신선이 산다는 섬으로 일명은 방장(方丈). 발해(渤海)의 동쪽에 있다는 오도(五島)의 하나로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호, 넷째는 영주(瀛洲), 다섯째는 봉래(蓬萊)라 한다. 《列子 湯問》
♣ 방화수류[傍花隨柳]봄날에 우거진 꽃과 버들을 따라 노니는 정경을 표현한 말로, 정이(程頤)의 시 ‘춘일우성(春日偶成)’에, “구름 엷고 바람 약한 한낮이 됐을 쯤에, 꽃과 버들 따라가다 앞 시내를 건너누나.[雲淡風輕近午天 傍花隨柳過前川]”하였다.
♣ 방회[方回]원(元) 나라 때 사람. 자는 만리(萬里).
♣ 방훈[放勳]서경(書經) 요전(堯傳)에 “옛 제요(帝堯)를 상고해 보니 방훈(放勳)이시니 공경하고 밝으며 문장(文章)이 나타나고 생각이 깊어 억지로 힘쓰지 않고 편안히 하셨네.[曰若稽古帝堯 曰放勳 欽明文思安安]" 하였다. 방훈은 요의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큰 공훈’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방훈안안[放勳安安]방훈(放勳)은 요(堯)의 별칭으로 그의 덕을 칭찬하면서, “안안(安安)하다.” 하였다. 서경(書經)
♣ 방휼[蚌鷸]대합조개와 도요새. 전하여 각기 자신의 이해에 집착하여 서로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이름. 《戰國策 燕策》
♣ 방휼상쟁[蚌鷸相爭]조(趙)가 연(燕)을 치려 하자 소대(蘇代)는 연을 위하여 조 혜왕(趙惠王)에게 말하기를 “지금 신(臣)이 역수(易水)를 지나오자니 방합[蚌]이 입을 벌리고 햇볕을 쬐고 있는데, 황새가 그 육(肉)을 쪼자 방합이 입을 꼭 다물어 황새의 부리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새가 말하기를 ‘오늘도 비가 아니오고 내일도 비가 아니오면 소라 너는 죽고 말 것이다.’ 하자 소라는 ‘오늘도 못나가고 내일도 못나가면 황새 너는 죽고 말 것이다.’ 하더군요. 이렇게 두 놈이 서로 버티고만 있더니 마침내 어부(漁父)의 손에 다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지금 연과 조가 서로 버티다가 강한 진(秦)이 어부가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戰國策 燕策》
♣ 방휼지쟁[蚌鷸之爭]조개와 도요새의 다툼. 곧 양자(兩者)가 이익을 다투고 있는 사이에 제삼자에게 이익을 가로채이고 함께 망함
♣ 배경태백삼[杯傾太白三]이백이 지은 산중대작시(山中對酌詩)를 말한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
♣ 배공수사[裵公水榭]배공은 당나라 재상 배도(裵度)를 가리키고 수사는 물가에 세운 대사(臺榭)의 뜻인데, 여기서는 배도의 녹야당(綠野堂)을 가리킨다. 배도가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나와 오교(五橋)에다 별장을 짓고 그 가운데 양대(涼臺) 서관(暑館)을 만들어 이를 ‘녹야당’이라 이름하고는 여기서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매일같이 술을 마시며 즐겼다. 《新唐書 卷一百七十二 裵度傳》
♣ 배교[环珓]조개껍질이나 대나무 등으로 만든 점복(占卜) 기구. 이것을 공중에 던졌다가 땅에 떨어진 모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데, 윷점 등이 이 종류에 속한다.
♣ 배극[北極]임금이 있는 곳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북극성이 자리를 잡고 있음에 뭇별들이 그에게로 향한다.[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하였다.
♣ 배낭[拜囊]임금에게 밀주(密奏)하는 것을 뜻함인데, 밀주를 검은 주머니에 넣어 봉하여 올렸으므로 배낭이라 한 것이다.
♣ 배도[陪都]배도는 도성(都城) 다음가는 도회지를 말한다.
♣ 배로진[拜路塵]권력자가 타고 가는 수레의 뒤에서 일어나는 먼지에 절함.
♣ 배루[培塿]흙으로 형성된 작은 구릉.
♣ 배명지구복[配命之求福]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길이 천명에 짝함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다.[永言配命 自求多福]”라 하였다.
♣ 배반낭자[杯盤狼藉]술과 쟁반이 마치 이리가 놀고 간 자리에 깔렸던 풀처럼 흩어져 있음. 한창 술을 마시고 노는 모양 혹은 놀고 난 뒤 술과 그릇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모양
♣ 배배[湃湃]물결이는 모양
♣ 배범[杯泛]옛날 배도(盃渡)라는 중은 신통한 술법(術法)이 있어, 매양 잔[盃]을 물에 띄워 그것을 타고 바다를 건너다니므로, 사람들이 그를 배도 화상(盃渡和尙)이라 불렀다.
♣ 배벽강[背碧江]한신(韓信)이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강물을 등 뒤에 두고 진(陣)을 쳤다. 싸움에 이긴 뒤에 장수들이 묻기를, “병법(兵法)에는 진을 치는 데 강물을 앞에 두고 치라 하였는데, 배수진(背水陣)을 쳐서 싸움에 이긴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한신은 답하기를, “내가 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을 하는데 강물이 앞에 있고 뒤에 육지가 있으면 군사들이 힘껏 싸우지 않고 도망해 버릴 것이 아닌가.” 하였다.
♣ 배북두두대촉[拜北斗頭戴髑]유양잡조(酉陽雜俎)에, “자호는 반드시 해골을 머리에 이고 북두성을 향해 절을 하는데, 해골이 떨어지지 않으면 화하여 사람이 된다.” 하였다.
♣ 배사[杯蛇]옛날에 두선(杜宣)이란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잔에 뱀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으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여서 술을 그대로 마셨는데, 술을 마신 뒤에 복통이 일어나 다방면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 뒤에 벽에 걸려 있던 활 그림자가 술잔에 뱀 모양으로 비쳤다는 것을 알고는 병이 즉시 나았다고 한다. 《風俗通 怪神》
♣ 배사공[裴司空]당(唐) 현상(賢相) 배도(裴度)인데 경종(敬宗)이 환관(宦官) 유극명(劉克明)에게 시해(弑害)되자 그를 죽이고 문종(文宗)을 맞아들여 당실(唐室)을 유지했으며, 문종이 그의 집에 간 일이 있었다.
♣ 배사오[杯蛇誤]아무것도 아닌 일을 쓸데없이 걱정하여 괴로와하는 일을 말한다. 진(晉) 나라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마실 때 그 친구가 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자를 보고 마음이 섬뜩하여 그로 인해 병들었다가, 나중에 그 뱀의 그림자가 벽에 걸린 활의 그림자임을 안 후 병이 절로 나았다 한다. 《晉書 卷四十四 樂廣傳》
♣ 배상응간자[拜相應看字]당(唐) 나라 때 재상 영호도(令狐綯)가 모르는 고사(故事)가 있어 온정균(溫庭筠)을 찾아가 묻자, 온정균이 “그 사실이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데, 남화경[莊子]은 벽서(僻書)도 아니니, 상공(相公)께서 국정을 보는 가운데 혹 여가가 있을 때면 꼭 고사를 열람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배성[拜星]도교(道敎)에서는 북두칠성(北斗七星)에 예배한다.
♣ 배송지[裴松之]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사학자. 자는 세기(世期), 문희(聞喜; 지금의 山西)사람. 일찍이 국자박사(國子博士), 영가태수(永嘉太守)의 직위에 올랐다. 원가(元嘉) 원년(429년) 송문제(宋文帝)의 명으로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주(註)를 달았으며, 저서에 문론(文論), 진기(晉紀) 등이 있음.
♣ 배수지진[背水之陣]물을 뒤에 두어 후퇴를 포기하고 공격하는 의도로 펼치는 진법. 필승을 기하여 목숨을 걸고 펼친 진이나 그러한 싸움 자세를 말한다.
♣ 배수진[背水陣]물을 등지고 치는 진. 어떤 일에 죽기를 각오하고 정면으로 맞섬. 중국 한나라 때 한신 장군이 쓴 전법으로 물을 등뒤에 두고 조(趙)나라 군사와 싸워 이긴 전법.
♣ 배승상[裵丞相]당(唐) 배도(裴度). 그는 문무를 겸전하여 승상(丞相)으로서 회채(淮蔡)를 토평하고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다.
♣ 배신[陪臣]신하의 신하로, 곧 천자에 대하여 제후의 신하가 일컫는 칭호이다.
♣ 배여우[裵汝友]여우는 배삼익(裵三益)의 자이다.
♣ 배오벽해체[排奡碧海掣]배오(排奡)는 교건(矯健)의 모양. 한유의 시에 “妥貼力排奡"가 있음. 고래를 끈다는 것은 시의 힘이 굉장한 것을 말한 것으로 두보의 시에 “未掣鯨碧海中"의 구가 있음.
♣ 배외[背嵬]용감하고 날랜 군사를 가리키며, 배외(背峗)라고도 한다. 운록만초(雲麓漫抄)에, “한세충(韓世忠)과 악비(岳飛)의 군중에 별도로 친수군(親隨軍)을 두었다. 이들을 배외(背峗)라고 이름하였는데, 용감하고 굳세기가 비할 데 없었다. 연북(燕北) 사람들은 술병을 외(峗)라고 부르는데, 대장이 마시는 술병은 반드시 친하여 믿을 만한 사람에게 지게 하므로, 이로써 군대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하였다.
♣ 배유협탄자[背有挾彈子]장자(莊子)가 밤나무 숲에서 이상한 까치를 발견하고 그를 잡기 위해 활에 화살을 끼우고 있었는데, 이때 보니 사마귀[螳蜋]는 신이 나게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이상한 까치가 그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으며, 또 그 뒤에서는 장자 자신이 그 이상한 까치를 노리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山木》
♣ 배은망덕[背恩忘德]은혜를 등지고 고마움을 잊음. 남한테 입은 은덕을 저버리고 잊음.
♣ 배음[排陰]동지(冬至)에 양(陽)이 처음 생겨 음을 배척하니 음이 차츰 물러난다.
♣ 배적[裴迪]후량(後梁) 사람으로 후량 태조인 주전충(朱全忠)이 당(唐)을 찬탈할 적에 적극 협찬하여 협찬공신이 되었고, 뒤에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五代史 卷四十四》
♣ 배정[陪鼎]옛날 빙례(聘禮)에 음식을 차릴 때 9정(九鼎)을 으레 사용하고, 후대하는 뜻에서 그 외에 솥 하나를 더 썼으니 그것을 배정이라 한다. 《의례》 빙례(聘禮)에, “陪鼎當內廉 東西北上”이라 하고, 좌전(左傳) 소공(昭公) 5년 조(條)에, “宴有好貨 媵有陪鼎”이라 하고, 그 주에 ‘陪加也 加鼎 所以厚殷勤’이라 한 것이 보임.
♣ 배주성구수[盃酒成仇讐]관부(灌夫)는 아첨할 줄을 모르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빈궁한 인사들에게는 깍듯이 자기를 낮추는 반면 신분이 귀하고 권세있는 사람일수록 반드시 능멸하곤 하였는데, 승상인 무안후(武安侯)에게도 술이 취한 상태에서 심하게 무안을 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두영(竇嬰)과 관부가 실세(失勢)한 뒤로 마치 부자지간(父子之間)처럼 서로 아끼며 가깝게 지냈는데, 승상인 무안후가 연왕(燕王)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던 날 초청을 받고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가, 승상의 무례함에 화가 나 있던 관부가 다른 귀인(貴人)에게 모욕을 가하면서 술자리가 끝나게 되자, 무안후가 마침내 태후(太后)의 분부를 무시한 불경죄(不敬罪)를 적용해 기시형(棄市刑)에 처하도록 하는 동시에 관부를 구출해 내려고 노력하는 위기후 역시 위에 무함하여 죽이고 말았다. 《史記 卷107ㆍ漢書 卷52》
♣ 배중사영[杯中蛇影]술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부질없이 의심을 품으면 엉뚱한 데에서 탈이 난다는 것을 비유한 말. 옛날에 두선(杜宣)이란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잔에 뱀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으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여서 술을 그대로 마셨는데, 술을 마신 뒤에 복통이 일어나 다방면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 뒤에 벽에 걸려 있던 활 그림자가 술잔에 뱀 모양으로 비쳤다는 것을 알고는 병이 즉시 나았다고 한다.
♣ 배진공[裵晉公]진공은 당(唐)의 어진 재상 배도(裵度)의 봉호이다.
♣ 배진국[裴晉國]명 나라의 명상(名相)
♣ 배창하[北窓下]도연명(陶淵明)이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에서 “북쪽 창가 아래 누워 있노라면, 서늘 바람 건듯 불어오나니, 그럴 때면 나 자신이 태고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곤 한다.[北窓下臥 遇凉風暫至 自謂是羲皇上人]”라는 표현을 한 뒤로부터, 시인들이 은일(隱逸) 자락(自樂)의 경지를 말할 때 곧잘 쓰게 되었다.
♣ 배체[俳體]해학(諧謔)을 주로 하여 짓는 시체(詩體)를 이름.
♣ 배칩[坏蟄]벌레의 배호(坏戶). 곤충의 땅 속의 번데기 집.
♣ 배풍[培風]배풍은 겹겹으로 두껍게 쌓인 바람을 말하며, 바람을 탄다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면 하늘로 9만 리를 올라가 이 배풍을 타야 갈 수 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배해[俳諧]익살과 해학(諧謔).
♣ 배해[裴楷]진(晉) 나라 학자이자 정치가. 주역(周易)에 밝았고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름. 《晉書 裵楷傳》
♣ 배해병안[裴楷病眼]진(晉) 나라 배해가 어느 날 아침 병이 들어서 일어나지 못하자, 혜제(惠帝)가 왕연(王衍)에게 병문안을 하게 하였는데, 벽을 향해 누워 있다가 돌아보는 배해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는, 왕연이 밖에 나와서 “두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이 마치 바위에 벼락이 내려꽂히는 것 같았다.[雙目閃閃 若巖下電]”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容止》
♣ 배행[輩行]나이 어린 생도(生徒)들을 이름. 선배, 후배의 순서(順序). 나이가 서로 비슷한 친구.
♣ 배행검[裵行檢]배행검의 자(字)는 수약(守約)이며, 강주(絳州) 문희(聞喜) 사람이다. 그는 음양(陰陽)과 산술(算術)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식감(識鑑)도 탁월하였다. 그가 사람을 한 번 보고 예견하면 모두 적중하여서 그가 선발한 정무정(程務挺), 장건욱(張虔勖) 등 10여 명은 모두 명장(名將)이 되었다. 자사(刺史)나 장군(將軍)이 된 자도 수십 명에 달한다. 《舊唐書 卷八十四 裵行儉列傳》
♣ 배호지충[坏戶之蟲]중추(仲秋)의 계절이 되면 기후가 쌀쌀해지므로, 벌레들이 땅속으로 들어가 그 구멍의 입구를 막는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꼼짝하지 않고 칩거함을 비유한 것이다. 《禮記 月令》
♣ 배회[徘徊]서성이다.
♣ 배휴[裴休]자(字)는 공미(公美)이니, 당(唐) 나라 때 명신(名臣). 불교(佛敎)를 숭상하여 평일에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고, 불교의 교리(敎理)를 연구하여 수만언(數萬言)을 연역(演繹)하였다. 《唐書 卷一百八十二 裵休傳》
♣ 배흥노[裵興奴]당(唐) 나라 때 특히 비파(琵琶)를 잘 타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 백가의체[百家衣體]시체(詩體)의 하나로, 옛사람의 시구(詩句)를 모아서 시를 만드는 것이다.
♣ 백가쟁명[百家爭鳴]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
♣ 백간[白簡]관리(官吏)를 탄핵하는 상주서(上奏書)를 말한다. 어사(御史)가 사람을 탄핵할 때에는 백간(白簡)에 쓴다.
♣ 백강[伯强]나쁜 기운. 역귀(疫鬼) 즉 병마(病魔)를 말한다.
♣ 백강주[白江州]당(唐)의 백거이(白居易). 그가 일찍이 강주사마(江州司馬)로 폄직 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른 말임.
♣ 백개[伯喈]동한(東漢) 시절의 문호 채옹(蔡邕)의 자(字)임. 채옹이 당시 좌중랑장(左中郞將)으로서 재주와 학식이 대단하여 조정의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었으므로 그의 대문 앞에는 항상 수레와 말이 그득했었는데, 나이 어린 왕찬(王粲)을 한 번 보고서는, 자기는 따라갈 수 없는 재주라고 하면서 언제나 그만 찾아오면 미처 신발도 챙겨신지 못하고 뛰어나가 반가이 맞았다는 것이다.
♣ 백거[伯擧]백거는 신천익(愼天翊)의 자(字)이다.
♣ 백거[白渠]중국 섬서성(陝西省) 경내에 있는 구거(溝渠) 이름. 한(漢)의 백공(白公)이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임.
♣ 백결선생[百結先生]백결선생은 그의 성명을 알 수 없는데, 그는 낭산(狼山) 아래에 살면서 집이 몹시 가난하여 여기저기 수없이 기워서[百結]마치 현순(懸鶉)과 같은 옷을 입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영계기(榮啓期)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항상 거문고를 지니고 있으면서 무릇 기쁘거나 노엽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불평스러운 일이 있을 적에는 모두 이 거문고를 타서 마음을 풀었다. 그런데 한번은 세밑이 되어 이웃에서 곡식을 방아찧는 소리가 나자 그의 아내가 방아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사람마다 곡식이 있는데 나만 유독 없으니 어떻게 해를 마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대체로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서, 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고 가는 것은 따라잡을 수도 없는 것인데, 너는 무얼 그리 상심하느냐. 내 너를 위하여 방아 찧는 소리를 만들어 너를 위로해주마.” 하고는 이에 거문고를 타서 방아 찧는 소리를 만들었으므로, 세상에서 전하여 이를 대악(碓樂)이라 하였다.
♣ 백겹[白帢]백겹은 벼슬아치가 쓰는 관의 일종이다.
♣ 백경[伯敬]백경은 명(明)의 시인 종성(鍾惺)의 자. 경릉(竟陵) 사람으로 담 원춘(譚元春)과 함께 고시귀(古詩歸)ㆍ당시귀(唐詩歸)를 뽑고 논평하였는데 이것을 경릉체(竟陵體)라 하였다. 《明史稿 卷二百六十九》
♣ 백계[白鷄]신유(辛酉)에 해당함.
♣ 백계몽[白鷄夢]자신이 죽을 것을 안다는 뜻으로 분수에 맞게 처신한다는 뜻. 진(晉)의 사안(謝安)이 병이 깊어지자, 친우에게 ‘옛날 환온(桓溫)이 살았을 때 내가 항상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했더니, 꿈에 문득 온의 수레를 타고 16리쯤 가다가 한 마리 흰 닭을 보고 그쳤던 일이 기억난다. 온의 수레를 탄 것은 그 지위를 대신함이고, 16리는 금년이 16년째이고, 백계(白鷄)는 유(酉)를 맡았는데 금년 태세(太歲)가 유에 있으니, 내 병이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곧 상소하여 위(位)에서 물러나더니, 얼마 안 되어 죽었다. 《晉書 謝安傳》
♣ 백계몽중최[白鷄夢中催]진(晋) 나라 재상(宰相) 사안(謝安)이 꿈에 흰 닭을 보았더니, 그뒤 신유(辛酉)년에 죽었다. 신유(辛酉)는 흰 닭이었다.
♣ 백고[伯高]백고는 후한(後漢) 때의 선비 용술(龍述)의 자이다.
♣ 백고근칙[伯高謹敕]백고는 후한(後漢) 때의 선비 용술(龍述)의 자이고, 근칙(謹敕)은 삼가고 경계함을 이름. 마원(馬援)이 일찍이 자기 형의 아들들을 경계시킨 글에서 “용백고(龍伯高)는 돈독하고 후중하고 주밀하고 근신하여 입에 가릴 말이 없으며, …… 청렴하고 공변되고 위엄이 있어 내가 사랑하고 중히 여기는 바이니, 너희들이 그를 본받기 바란다. …… 용백고를 본받다가 그만큼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근칙한 선비는 될 것이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五十四》
♣ 백골난망[白骨難忘]백골이 되어서도 잊기가 어려움. 죽어서도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음. 남의 큰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말.
♣ 백골신교전[白骨新交戰]두보(杜甫)의 시에 “전쟁이 새로 터져 백골이 뒹구나니, 운대의 공신들이 개척했던 저 변방.[白骨新交戰 雲臺舊拓邊]”이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1 有感五首》
♣ 백공[伯恭]백공은 송(宋) 나라 여조겸(呂祖謙)의 자(字)이다. 병석에서 논어(論語)를 읽다가, 위령공편(衛靈公篇)의 “자신의 잘못은 혹독하게 꾸짖고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해해 주도록 노력하라.[躬自厚而薄責於人]”는 공자의 말을 접하고는, 홀연히 깨달음이 생기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宋元學案 卷51》
♣ 백공[伯恭]백공은 원위(元魏) 때 고윤(高允)의 자이다. 원위 태무제(元魏太武帝) 때 요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가 뇌물을 받은 일이 발각되자, 저작랑 고윤(高允)에게 의논하기를 “주상께서 나에게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해야겠는가?”하자, 고윤이 “사실대로 자백하면 혹 용서를 받을 수도 있겠거니와, 거듭 주상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적흑자는 끝내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가 처형되었다. 그런데 또 고윤은 국서(國書)를 수찬할 때 직필(直筆)한 일로 매우 위태롭게 되자, 태자(太子)가 자기 사부인 고윤을 살리려는 생각에서 그에게 주상께 약간의 거짓말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는 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사실대로 자백하여 오히려 주상으로부터 정직하다는 칭찬을 받고 죽음을 면하였는데, 그는 물러나와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내가 태자의 지도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릴까 염려해서였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小學 善行》
♣ 백공[白公]초(楚) 나라 원왕(元王)이 목생(穆生)ㆍ백생(白生)ㆍ신공(申公)을 대부로 삼았는데, 목생이 술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술자리가 있으면 으레 따로 단술[醴酒]을 마련하였었다. 그런데 그의 손자가 즉위하고는 단술을 따로 마련하는 일이 없어지자 목생이 말하기를 “이렇게 차츰 대접이 박해지니 떠날 수밖에 없다.” 하고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신공과 백생은 억지로 나오게 하면서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다. 백생은 곧 백공(白公)을 가리킨다. 《漢書 卷三十六 楚元王傳》
♣ 백공육첩[白孔六帖]서명(書名), 이는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육첩(六帖) 30권과 송(宋) 나라 공전(孔傳)의 속육첨(續六帖) 30권을 합해서 이를 1백 권으로 나누어 놓은 것인데, 여기서는 곧 많은 분량의 서물(書物)을 의미한 것이다.
♣ 백구[白駒]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 편에, “흰 망아지가 저 빈 골짜기에 매여 있구나.” 했는데, 현명한 자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흰 망아지를 타고 산골에 들어가서 지낸다는 뜻.
♣ 백구[白溝]중국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백구하(白溝河)를 말한다. 옛날 송(宋) 나라와 거란(契丹)의 경계에 있는 강이며, 독항(督亢)도 그곳의 지명(地名)이다. 송 나라 진종(眞宗) 때에 거란이 침입하였으므로 송나라에서 백구 이북의 땅을 주고, 해마다 금과 비단을 많이 주기로 하여 강화(講和)를 맺었다.
♣ 백구[白駒]현자(賢者)나 은사(隱士)가 타고 온 말로, 전(轉)하여 현자나 은사를 뜻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깨끗하고 깨끗한 저 흰 망아지, 우리 마당 싹을 다 먹었네.[皎皎白駒 食我場苗]”하였다. 어떻게 하면 흰 망아지를 붙잡아 매어 숨어살려는 어진 사람을 벼슬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뜻이다.
♣ 백구맹[白鷗盟]백구(白鷗)의 맹세, 즉 전원으로 돌아가 살리라던 맹세.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바닷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를 몹시 좋아하여 매일 아침 갈매기와 놀았는데, 날아와서 노는 갈매가가 백 마리도 넘었다. 그의 아버지가 ‘내가 들으니 갈매기들이 모두 너와 함께 논다고 하는데, 너는 그 갈매기를 잡아오라. 나 역시 갈매기를 좋아한다.’ 하였다. 그 다음 날 바닷가로 나가니 갈매기들이 위에서 날면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다. 이를 인해서 후대에는 마음을 툭 터놓고 상대를 대하거나, 세상을 피하여 은둔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 백구소우[白鷗疏雨]작자 불명의 옛 시조에, “묻노라 저 선사야, 관동 풍경 어떻더니, 명사십리(明沙十里)에 해당화는 붉어 있고, 원포(遠浦)에 양양백구(兩兩白鷗)는 비소우(飛疎雨)를 하더라.” 하였다.
♣ 백구시[白駒詩]백구시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편을 말한다. 이 시는 현자(賢者)가 타고 온 흰 망아지가 농장의 농작물을 뜯어먹었다는 핑계로 말을 묶어 놓아 떠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인데, 곧 제왕(帝王)의 부름에 뜻이 없음을 말한다
♣ 백구식곽[白駒食藿]세상이 무도하면 어진 자가 머물러 있지 않음. 주 선왕(周宣王)이 무도하여 현자들이 다 벼슬을 버리고 떠났으므로 당시 시인이 백구(白駒)의 노래를 부르기를, “새하얀 망아지야 우리 밭에 콩잎을 먹을지어다……" 하여, 말 타고 떠나는 현자들을 붙들고 싶은 심정을 나타내었음. 《詩經 小雅 白駒》
♣ 백구재상[白鳩宰相]군사 경험이 없는 서생(書生) 출신의 장수로 얼굴이 창백한데다 성격이 옹졸함을 기롱한 말.
♣ 백구지과극[白駒之過隙]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 “천지 사이에 사람이 사는 것이란, 마치 흰 망아지가 틈 사이로 훌쩍 지나가듯 그렇게 순식간일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라는 말이 있다.
♣ 백구파[白鷗波]백구파는 하얗게 이는 파도를 말한다.
♣ 백구편[白駒篇]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 어진 선비를 불러 써야 한다는 시.
♣ 백궁[百弓]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궁(弓)은 거리의 단위로 1궁은 6척, 또는 8척의 거리라 한다. 《儀禮 鄕射禮疏, 度地論》
♣ 백규[百揆]백규는 요순 시대에 모든 관리를 통솔했던 벼슬로서 요 임금 때에 순이 이 벼슬에 등용되었다. 도시를 이룬다는 말은 순 임금이 사는 마을이 삼년 만에 사람이 모여들어 도시가 되었다는 말. 《書經 舜典》
♣ 백기[伯起]동한(東漢) 양진(揚震)의 자(字). 형주 자사(荊州刺史)로서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아 밤에 가져오는 뇌물을 물리쳤다.
♣ 백기[白起]진(奏)나라의 명장이다. 그는 조(趙)나라와 싸울 때 조나라 대장 조괄(趙括)이란 자를 속임전술로 크게 승리하고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무찔러 죽였다.
♣ 백기신[百其身]한번 죽게 되면 아무리 살리려 해도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황조(黃鳥)에 “만일 생명을 바꾸어 올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백번이라도 대신 죽으리라.[如可贖兮人百其身]"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진 목공(秦穆公)의 장사(葬事)에 어질고 훌륭한 신하 자거엄식(子車奄息)을 순장시키므로, 사람들이 그 훌륭한 신하가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하는 말이다.
♣ 백낙천[白樂天]당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로, 낙천(樂天)은 자(字)이다.
♣ 백난희[伯鸞噫]벼슬하지 않은 채 은거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한숨을 말한다. 백난은 한 나라 양홍(梁鴻)의 자이다. 양홍은 집이 가난한데도 학문을 좋아하여 벼슬하기를 구하지 않은 채 그의 부인인 맹광(孟光)과 함께 패릉산(霸陵山)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 백남[百男]임금의 덕을 기리는 뜻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사제(思齊)에 문왕(文王)의 덕을 기리면서 그 어머니인 태임(太妊)과 그 후비(后妃)인 태사(太姒)의 덕을 같이 말하였는데, 그 중에 “태사가 아름다운 덕을 이으셨으니 아들이 백 사람이 되었다[太姒嗣徽音 則百斯男]" 하였다.
♣ 백낭[白狼]요녕성(遼寧省)에 있는 한(漢) 나라의 현(縣) 이름이다.
♣ 백년가약[百年佳約]남녀가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 지낼 아름다운 언약.
♣ 백년대계[百年大計]백년의 큰 계획. 먼 장래까지 내다보면서 세우는 큰 계획. 흔히 교육(敎育)을 일컬음
♣ 백년산통[百年酸痛]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면서 그의 가속(家屬) 또한 견축(譴逐)되어, 가는 길에 소녀(小女)가 죽자 층봉역(層峯驛) 근처 산 밑에 초빈해 두었다가, 사면을 받고 환조(還朝)할 때에 그 묘에 들러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두어 가닥 등넝쿨로 목피관을 꽁꽁 묶어서 황량한 산에 초빈하니 백골도 썰렁하리라 무고한 너를 죽게 한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 백 년토록 참통하여 눈물이 줄줄 흐르는구나[數條藤束木皮棺 草殯荒山白骨寒 致汝無辜由我罪 百年慚痛淚闌干]”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十》
♣ 백년지객[百年之客]백년 만에 찾아 온 손님, 매우 반가운 손님. 아무리 스스럼이 없어져도 예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사위를 가리킴.
♣ 백년하청[百年河淸]백년을 기다린다 해도 누런 흙탕물인 황하의 흐린 물은 맑아지지 않음.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이루어지기 어려움. 또는 아무리 세월이 가도 일을 해결할 희망이 없음즉,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는 뜻
♣ 백년해로[百年偕老]부부가 오래도록 함께 늙음. 부부가 생사를 같이하고 화목하게 같이 늙어감
♣ 백노번[白露繁]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의 가을날을 표현한 말이다. 이때 음기(陰氣)가 점점 성해지면서 이슬도 흰 색깔로 변한다고 한다.
♣ 백단심[栢丹心]과부가 수절(守節)하는 것을 말한다.
♣ 백달보검[白獺補臉]오(吳) 나라 손화(孫和)가 등 부인(鄧夫人)을 총애하는데, 어느날 술에 취해 유쾌히 춤을 추다가 등 부인의 뺨을 상했다. 의원이 백달(白獺)의 뼈를 구해서 옥(玉)가루와 호박(琥珀)가루를 섞어서 바르면 상처가 없어진다고 하니, 손화는 당장에 백금(百金)을 내어 구해 발라서 나았다 함. 《酉陽雜▣》
♣ 백담[栢潭]구봉령(具鳳齡)의 호이다.
♣ 백대[柏臺]사헌부(司憲府)의 별칭. 원래는 중국의 어사대(御史臺)를 말하는데, 전용한 것이다. 사물이명록(事物異名錄) 궁실(宮室) 관해(官廨)에 “한(漢) 나라 어사부(御史府)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그 위에 까마귀가 깃들어 있었으므로 어사부를 백대 또는 오대(烏臺)라고 했다.” 하였다. 또는 백부(柏府)라고도 한다.
♣ 백대붕[白大鵬]조선 선조(宣祖) 때 사람인데 천인(賤人)이었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으나 시에 능하고 호기(豪氣)가 있었다.
♣ 백대지친[百代之親]먼 조상 때부터 친하에 지내온 친분.
♣ 백도[伯道]진(晋)나라 하동 태수(河東太守) 등유(鄧攸)의 자(字)이다. 양릉(襄陵) 사람이다. 그는 석늑(石勒)이 군사를 일으키자 가족을 이끌고 피난갈 적에 그 아우가 어린 조카를 두고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그 조카를 보전하고 자기 아들을 버리고 갔다. 그 후 백도는 끝내 자식을 못 두고 죽으니, 당시 사람들이 슬퍼하여 “하늘도 무심하여 등백도로 하여금 아들을 못 두게 하였다.’ 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傳 鄧攸傳》
♣ 백도무아[伯道無兒]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다. 백도(伯道)는 진(晉) 나라 등유(登攸)의 자(字)로, 난적(亂賊)을 만났을 때 자기 아들을 버리고 동생의 아들을 살렸는데, 뒤에 아들을 얻지 못해 제사가 끊겼던 고사가 있다. 《晉書 鄧攸傳》
♣ 백도미유자[伯道未有子]백도는 진(晉) 나라 사람 등유(鄧攸)의 자(字). 그는 석늑(石勒)의 난리를 만나, 피난을 갈 적에 죽은 아우의 아들 등유(鄧綏)와 자기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갔었으나 도저히 두 명을 데리고 갈 수가 없게 되자, 아내와 상의하고는 자기 아들을 버리고 조카를 데리고 갔었는데, 그는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하니, 사람들은 “천도(天道)가 무심하다.” 하였다. 《晉書 鄧攸傳》
♣ 백도생애[伯道生涯]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다. 백도(伯道)는 진(晉) 나라 등유(鄧攸)의 자(字)로, 난리 통에 자기의 어린 아들을 버리고 조카의 목숨을 대신 살렸는데, 뒤에 후계자를 끝내 얻지 못했다. 《晉書 鄧攸傳》
♣ 백도아[伯道兒]백도(伯道)는 진(晉) 나라 등유(鄧攸)의 자이다. 등유가 하동 태수(河東太守)로 있을 적에 석늑(石勒)의 난을 만나 자기 아들과 동생의 아들을 데리고 피난하였는데, 도중에 적을 만났다. 등유는 두 아이를 다 살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겨 자기의 아들은 버리고 동생의 아들만 살렸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의롭게 여기면서 슬퍼하여 “천도가 아는 것이 없어서 백도로 하여금 아들이 없게 했다.” 하였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 백도아[伯道兒]백도는 등유(鄧攸)의 자이다. 진(晉) 나라 등유가 난적(亂賊)을 만났을 때, 일찍 죽은 아우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을 버리고 갔는데, 그 뒤에 끝내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晉書 鄧攸傳》 한편 이와 비슷한 구절로 “中郞有女能傳業 伯道無兒可保家”라는 한유(韓愈)의 시가 전한다. 《韓昌藜集 卷10 遊西林寺 題蕭二兄郞中舊堂》
♣ 백동제[白銅鞮]백동제는 가곡(歌曲) 이름으로, 주로 송별(送別)을 노래한 것이라 하는데,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 “저녁 해는 현산 서쪽으로 뉘엿뉘엿, 거꾸로 두건 쓰고 꽃 그늘 아래 비틀비틀. 양양의 어린애들 다 함께 손뼉치며, 길을 막고 다투어 백동제를 부르누나. 구경꾼이 무얼 보고 웃느냐고 물으면 곤드레만드레 취한 산옹 우스워 죽겠단다.[落日欲沒峴山西 倒著接䍦花下迷 襄陽小兒齊拍手 攔街爭唱白銅鞮 傍人借問笑何事 笑殺山翁醉似泥]”라는 내용이 있다. 《李太白詩集 卷6》
♣ 백동파[百東坡]동파가 여럿으로 보인다는 뜻. 소동파(蘇東坡)의 범영시(泛潁詩)에 “갑자기 물결이 비늘처럼 일어, 나의 수염과 눈썹을 산란케 하네. 동파가 여러 사람으로 분산되었다가,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에 있구나.[忽然生鱗甲 亂我鬚與眉 散爲百東坡 頃刻復在玆]" 한 말에서 기인된 것이다.
♣ 백두[白頭]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에 “상말에 ‘머리가 세도록 오래 사귀어도 초면과 같기도 하고 잠깐 길거리에서 만난 사이라도 구면과 같다.[白頭如新 傾盖如故]’ 하였다.” 하였다.
♣ 백두신[白頭新]백발이 되도록 오랫동안 서로 사귀었으나 서로 간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 백두여신[白頭如新]머리가 희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사귀어도 서로 마음이 안통하고 상대방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 사귄 벗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 백두음[白頭吟]악부 가사의 이름. 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무릉(武陵)의 여자를 첩(妾)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자, 그의 아내인 탁문군(卓文君)이 “부부는 늙도록 정의가 변치 않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 노래를 지어 이혼(離婚)할 뜻을 밝혔는데, 이 노래를 듣고 사마상여는 끝내 무릉의 여자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뒤에 이백이 이 고사로 백두음 2편을 지었다.
♣ 백두음[白頭吟]악부(樂府) 초조(楚調)의 곡 이름으로, 서경잡기(西京雜記) 제3권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무릉(茂陵) 사람의 딸을 첩으로 삼으려고 할 때, 탁문군(卓文君)이 백두음(白頭吟)을 지어 절교를 하자, 사마상여가 이에 그만두었다.” 하였다.
♣ 백두음성종차결[白頭吟成從此決]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무릉(茂陵) 사람의 딸을 첩(妾)으로 두려 하였는데, 이에 탁문군(卓文君)이 백두음을 지어 결별의 뜻을 밝히자 사마상여가 취소했던 고사가 전한다. 《西京雜記 卷3》
♣ 백등[白登]백등(白登)은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 고조(漢高祖)가 흉노 묵돌(冒頓)을 치다가 여기에서 7일간 포위되어 곤욕을 당하였다.
♣ 백등대[白登臺]백등대는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 동쪽의 백등산 위에 있는데 흉노족이 출몰하는 지역이다.
♣ 백락[伯樂]춘추 시대 진 목공(秦穆公) 때 사람인데 말[馬]의 상(相)을 잘 보던 사람이다. 당(唐) 나라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백락(伯樂)이 한 차례 기북(冀北)의 들판을 지나가자 준마가 드디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하였고, 육덕명(陸德明)의 장자석문(莊子釋文)에 “백락의 성은 손(孫)이고 이름은 양(陽)인데 말을 잘 다루었다.”고 하였다. 좋은 말이 백락을 만나 세상에 알려져 그 값이 10배로 올랐다는 고사와 일찍이 우판(虞坂)을 지나가는데, 기기(騏驥)가 소금수레 아래 엎드렸다가 백락을 보고서 길게 울어대니, 백락은 수레를 내려가서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 등이 있음.
♣ 백락일고[伯樂一顧]남이 자기 재능을 알고 잘 대우함. 현명한 사람 또한 그 사람을 알아주는 자를 만나야 출세할 수 있음. 전국책(戰國策) 연책(燕策)에 “어느 사람이 백낙에게 ‘내가 말을 팔려고 하는데, 3일을 저자에 갖다 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한 번 와서 봐 달라.’ 하였다. 백낙이 가서 한 번 쳐다보니, 그 말의 값이 10배로 뛰었다.” 하였다.
♣ 백락자[伯樂子]백락의 아들이라는 말로, 어리석은 자식이란 뜻의 고사성어.
♣ 백락장[伯格長]촌락(村落)의 장(長)을 이름. ‘맥(伯)’은 천맥(阡陌), ‘락(格)’은 촌락(村落)을 가리킨다.
♣ 백란[伯鸞]부부(夫婦)간에 서로 예를 갖추며 공경하며 금슬이 좋았던 것으로 유명한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양홍(梁鴻)의 자(字).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결코 벼슬길을 구하지 않고, 어진 아내 맹광(孟光)과 함께 패릉산(覇陵山) 속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길쌈하며 살았다. 《東觀漢記 梁鴻ㆍ後漢書 逸民列傳 梁鴻》
♣ 백량대[柏梁臺]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세웠던 대(臺). 무제는 대가 완성된 뒤 잔치를 마련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칠언시(七言詩)를 지을 수 있는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게 하여, 백량체(柏梁體)라는 하나의 시체(詩體)를 남겼다.
♣ 백량대시[栢梁臺詩]연구로 된 시체의 하나로서, 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栢梁臺)를 짓고 모든 신하들로 더불어 시를 한 짝씩 짓기로 하여, 모두 25명의 신하가 한 구절씩 25구절과 무제가 지은 구절을 합쳐 26구절로 되었으며, 그 격식은 대략 다음과 같음. “日月星辰和四時(武帝詩) 驂駕駟馬從梁來(梁王詩) 郡國士馬羽林才(司馬詩) 總領天下誠難治(丞相詩)…”
♣ 백량시연[栢梁詩筵]한 무제(漢武帝)가 백량대를 낙성(落成)할 때에 군신(群臣)을 모아 놓고 연구(聯句)를 짓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 백량연[柏梁宴]대궐 연회에 참석해서 멋진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백량대(柏梁臺)를 세우고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 적에, 칠언시(七言詩)로 화답하는 노래[賡歌]를 잘 짓는 신하만 누대 위에 올라가도록 허락한 고사가 전한다. 《三輔黃圖 卷5 臺榭》
♣ 백련[白蓮]백련사(白蓮社)를 말한다. 진(晉)의 고승(高僧) 혜원법사(慧遠法師)는 혜영(慧永)ㆍ혜지(慧指) 등 여러 중과 도인(道人) 및 명유(名儒) 유정지(劉程之) 등 18명과 함께 여산(廬山)의 기슭에 결사(結社)하고는 ‘백련사’라 이름하였다. 《廬山記》 여부잡기(廬阜雜記)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편지로 도연명(陶淵明)을 부르니, 연명이 ‘나는 술을 좋아하니 술을 마시게 하면 갈 수 있다.’ 하자, 혜원이 허락했다.”는 고사가 있다.
♣ 백련[百鍊]옛날 3대 보검의 하나로 꼽혔던 칼 이름이다.
♣ 백련[百鍊]의지(意志)가 견고함을 비유한 말. 백련은 수없이 단련(鍛鍊)한 강철(剛鐵)을 말한 것으로, 진(晉) 나라 유곤(劉琨)이 단필제(段匹磾)에게 잡혀 죽게 되었을 때 지은 시에 “어찌 뜻했으랴 백번 달군 강철이, 손가락에 감을 만큼 유약해질 줄을[何意百鍊剛 化爲繞指柔]”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六十二》
♣ 백련사[白蓮社]백련사는 동진(東晉) 때 고승(高僧)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자신의 명망을 듣고 찾아 온 여러 승도(僧徒) 및 명유(名儒)들과 함께 미륵불상(彌勒佛像) 앞에서 맹세하고 수도하기 위해 설치한 결사(結社)인데, 이 결사로 말미암아 불교가 융성하여졌다.
♣ 백련사[白蓮社]진(晉) 나라 때 고승 혜원(慧遠)이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인의 문인들과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모임을 결성하고 정토법(淨土法)을 함께 닦았는데, 동림사 안에 백련(白蓮)이 있으므로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였다 한다. 《蓮社高賢傳》
♣ 백련사[白蓮社]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를 결성(結成)하고 서신(書信)으로써 도연명(陶淵明)을 초청하니, 연명의 답서에 “나의 천성(天性)이 술을 즐기는데 법사께서 술 마시는 것을 허락한다면 곧 가겠다.” 하였다. 혜원이 이를 허락하자 연명이 마침내 찾아갔는데, 그가 입사(入社)할 것을 권유하니 연명은 눈썹을 찌푸리고 돌아갔다. 《廬阜雜記》
♣ 백련요정절[白蓮邀靖節]여부잡기(廬阜雜記)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白蓮社)를 결성(結成)하고 편지를 보내어 연명(淵明)을 초청하니, 연명이 ‘나는 술을 즐기므로 법사가 이를 허락하여 준다면 가겠다.’하였는데, 법사가 허락하였으므로 갔다.” 하였다.
♣ 백련요지[百鍊繞指]요지(繞指)는 손가락에 감긴다는 뜻으로 곧 유약(柔弱)함의 비유인데, 진(晉) 나라 유곤의 시(詩)에 “억센 강철이 요지처럼 유약해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何意百鍊鋼 化爲繞指柔]"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련유칙[白蓮遺則]동진(東晋)의 중 혜원(慧遠)이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백련사(白蓮社)를 만들어, 그의 제사와 높은 선비 유유민(劉遺民) 종병(宗炳) 등과 함께 염불(念佛)을 하였는데, 연못에 흰 연꽃을 심었으므로 백련사라 이름하였다.
♣ 백련정[百鍊精]백 번 단련된 정금(精金)이라는 뜻이다.
♣ 백령[白翎]백령은 화살 말미의 깃털이다.
♣ 백로[白露]24절기의 하나인 백로(白露)를 말한다. 양력 9월 8일경이 되면 음기(陰氣)가 점점 침중해져 이슬이 진한 백색을 띤다고 한다. 입추(立秋)가 되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뒤 5 일쯤 지나면 백로(白露)가 내리고, 다시 5일이 지나면 쓰르라미가 운다고 하였다. 《禮記 月令, 逸周書 時訓解》
♣ 백록[白鹿]송(宋) 나라 4대 서원의 하나인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가리킨다.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峯) 동남쪽에 있는데, 주희(朱熹)가 일찍이 이곳에서 학규(學規)를 개정하고 강학(講學)을 한 적이 있다. 《宋史 道學傳 三 朱熹》
♣ 백록동[白鹿洞]송 나라 때 세워진 서원(書院)의 이름으로,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다. 당 나라 이발(李潑)에 의해 세워졌으며, 송 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南康軍)의 수(守)가 되어서 직접 학규(學規)를 만들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다.
♣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백록동서원은 송 나라 때 4대 서원 가운데 하나로,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다. 당 나라 이발(李潑)에 의해 세워졌으며, 송 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南康軍)의 수(守)가 되어서 직접 학규(學規)를 만들어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다.
♣ 백룡어복[白龍魚服]옛날에 백룡(白龍)이 물고기의 형상으로 변하여 못에 나왔더니 고기잡는 예저(豫且)란 사람이 눈을 쏘아 마쳤다. 백룡이 하늘에 올라가서 천제(天帝)에게 호소하니 천제가 묻기를, “그 때에 어떤 형상을 하였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못에 내려가서 물고기 형상을 하였습니다.” 하므로 천제는, “그러면 물고기는 본시 사람을 쏘아 잡는 것인데, 예저(豫且)가 무슨 죄이냐.” 하였다. 임금의 미행(微行)의 비유로 쓰인 말이다. 《說苑. 張衡 東京賦》
♣ 백룡어복계[白龍魚服戒]귀한 신분에 있는 자가 미복(微服)으로 출행(出行)하였다가 불측한 변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설원(說苑) 정간(正諫)에, “옛날에 백룡이 맑고 차가운 연못에 내려왔다가 물고기로 화하였는데, 어부인 예차(豫且)가 그 눈을 활로 쏘아 맞혔다.” 하였다. 명 선종이 미복으로 출행하기를 좋아하여 어느날 밤에 미복으로 양사기(楊士奇)의 집에 도착하니, 양사기가 황급히 나와 맞이하면서 미행으로 나다녀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선종이 그 다음 날 내시를 보내어 양사기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는데 미행으로 나다닌다 해서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니, 양사기가 아뢰기를, “은택이 두루 흡족하지 아니하니 만약에 원망을 품은 자가 있어서 몰래 치면 어찌하시렵니까?”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에 활과 화살을 가지고 숨어서 어가(御駕)가 출행하기를 엿보고 있는 자를 잡았다. 이에 선종이 다시는 미복으로 출행하지 않았다. 《史略 卷九 宣宗章皇帝》
♣ 백룡중단[白龍中斷]한(漢) 나라에 의해 진(秦) 나라가 멸망당하였다는 뜻이다. 고조(高祖)가 일찍이 술에 취해 길을 가다가 길을 막고 있는 흰 뱀을 칼로 쳐서 죽였다. 그날 밤 어떤 노파가 길에서 울고 있다가 말하기를, “흰 뱀은 나의 아들로 백제(白帝)인데, 뱀으로 화해 있다가 적제(赤帝)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하였는데, 백제는 진 나라를 가리키고, 적제는 한 나라를 가리킨다. 《漢書 卷1上 高帝紀》
♣ 백룡퇴[白龍堆]옛날 서역(西域)의 사구(沙丘) 이름으로, 유사(流沙)가 끝나는 곳이다.
♣ 백룡퇴[白龍堆]중국 신강성(新疆省) 천산남로(天山南路)에 있는 지명.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유사(流沙)만이 쌓인 지대임. 《漢書 西域傳》
♣ 백륙[百六]1백 6년 만에 액운이 한 번씩 찾아온다는 고어(古語)로서 즉 액운을 말한다.
♣ 백륙경심기낭신[百六驚心記曩辰]1백 6년마다 돌아온다는 액운(厄運)의 시대로,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을 가리킨다.
♣ 백륜[伯倫]진(晉) 나라 패국(沛國) 사람인 유령(劉伶)의 자. 완적(阮籍)ㆍ혜강(嵇康) 등과 사이좋게 지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데, 예법을 무시하고 호방하게 술을 즐겨 마셔 현실을 도피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인용된다. 일찍이 주덕송(酒德頌)을 지었다. 《晉書 卷四十九 劉伶傳》
♣ 백륜건[白綸巾]흰 베로 만든 두건인데, 옛날 은자(隱者)나 풍류인들이 썼다고 한다.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백륜건을 쓰고 지냈다.
♣ 백륜송[伯倫頌]진(晉) 나라 때의 명사(名士)인 유령(劉伶)이 지은 주덕송(酒德頌)을 말한다. 백륜은 유령의 자이다.
♣ 백리[百里]백리혜(百里惠). 춘추 시대 진목공의 대부.
♣ 백리[百里]지방 장관의 별칭. 한 현(縣)이 사방 1백리이므로 현령(縣令)ㆍ현감(縣監)을 말한다.
♣ 백리부미[百里負米]가난하게 살면서 부모에게 효양(孝養)하는 것을 비유한 말.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일찍이 두 어버이를 섬길 적에 집이 가난하여 항상 여곽(藜藿)의 열매만 먹고살았으므로, 그가 어버이를 위하여 백 리 밖에서 쌀을 지고 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致思》
♣ 백리음서[百里音書]가까운 지역에서 보내 온 소식을 말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백리의 음서가 어찌하여 이토록 늦게야 도착했노, 늦은 봄에 지은 시를 늦가을에야 받아 봤소.[百里音書何太遲 暮秋把得暮春詩]”라는 구절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5 渭村酬李二十見寄》
♣ 백리인성용철상[百里仁聲舂輟相]백리해는 우(虞) 나라의 현신이었는데, 우 나라 임금을 버리고 진(秦) 나라로 가서 목공(穆公)을 섬김으로써 오고대부(五羖大夫)가 되었다. 조량(趙良)이 상앙(商鞅)에게 이르기를, “오고대부(五羖大夫)가 죽고 나자, 진(秦) 나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고 방아를 찧던 자들이 절구질을 하지 않았다.” 하였다. 《史記 卷六十八 商君列傳》
♣ 백리잠우구[百里潛牛口]우(虞)의 대부(大夫)백리해(百里奚)가 초(楚)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있을 때 진 목공(秦穆公)이 그의 어짐을 듣고 자기 나라 정사를 그에게 맡기기 위하여 염소 가죽 다섯 장으로 그의 죄값을 물고 데려와 국정을 맡겼는데, 그 말이 와전되어 백리해 자신이 진 목공을 만나기 위하여 염소 가죽 다섯 장에 몸을 팔아 남의 소 먹이 노릇을 하였다고 함. 《孟子 萬章上》
♣ 백리재[百里才]지방 장관 또는 현령(縣令)의 별칭이다. 유비(劉備)가 처음에 방통(龐統)을 뇌양(耒陽)의 현령으로 발령하였는데, 오(吳) 나라의 노숙(魯肅)이 이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기를 “그는 백리재(百里才)가 아니니 조정에 불러와서 천리마(千里馬)의 재질을 펼치도록 해야 한다.”고 한 고사가 있다. 《三國志 蜀志 龐統傳》
♣ 백리해[百里奚]백리해는 춘추 시대 우(虞) 나라의 현신(賢臣)으로 불우하게 떠돌아다니다가 잘못 초(楚) 나라에 억류되었는데, 이때 진 목공(秦穆公)이 그의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는 암양[羖] 가죽 다섯 벌을 초 나라 사람에게 주고 억류된 백리해를 데려와 정승으로 삼았다. 그래서 백리해를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도 한다. 《史記 秦紀》
♣ 백리후[百里侯]백리는 공후(公侯)의 나라로서 곧 한 고을의 원을 가리킨다.
♣ 백마[白馬]흉사(凶事)로, 사람이 죽은 것을 뜻한다. 이백의 고풍시(古風詩)에, “백마 탄 화산군을 평원리에서 만났네[白馬華山君 相逢平原里].” 하였다.
♣ 백마동도[白馬東到]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의 봉함을 받고서 백마를 타고 동쪽인 조선으로 왔다 한다. 《史記 卷四十八 宋微子世家》
♣ 백마조[白馬潮]하얀 물결이 세차게 일어나는 것을 흰 말에 비유한 말이다.
♣ 백마조두옹[白馬潮頭擁]오자서가 죽은 뒤에 전당강(錢塘江)의 도신(濤神)이 된 고사로, 파도가 거세게 치는 것을 형용한다. 태평광기(太平廣記) 제291권에, “오자서가 죽은 뒤 부차가 사람을 시켜서 오자서의 시신을 가죽 부대에 담아서 전당강에 버렸는데, 이때부터 전당강의 파도가 노하여서 높이 솟구쳤다. 전설에, 오자서의 영혼이 없어지지 않고 도신(濤神)이 되어서 전당강의 노한 파도를 타고 왔다갔다하는데, 사람들이 파도를 보면 오자서가 파도의 맨 꼭대기에 백마(白馬)를 타고 앉아있는 것이 보였으므로, 이로 인해서 묘사(廟祠)를 세우고서 그에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하였다.
♣ 백마청류[白馬淸流]청류는 청렴결백한 사람을 뜻함. 당(唐) 나라 때 배추(裴樞)가 주전충(朱全忠)에게 미움을 받아 농주 사호참군(瀧州司戶參軍)으로 폄척되어 나갈 적에 주전충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여 시신을 백마하에 던져 버리게 한 데서 온 말인데, 이에 앞서 주전충의 비서인 이진(李振)이 주전충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스스로 청류라 자칭하는 자들이니, 저 백마하에 던져서 영원히 탁류(濁流)로 만들어야 한다.” 하니, 주전충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唐書 卷一百四十》
♣ 백마총[白馬塚]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사상록(槎上錄)에 이르기를, “일본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倭皇)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대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오니 대판(大阪)과의 거리가 겨우 1백 리 정도였다.’라 하였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무덤이 하나 있는데 왜인들이 그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기가 바로 백마(白馬)의 무덤인데, 신라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일본 사람들이 화의를 청하여 군대를 풀고 백마를 잡아 맹약한 후 그 말을 저 곳에 묻었다.’고 한다.” 하였고,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응신 22년은 신라 유리왕(儒理王) 8년에 해당하고, 중국으로는 진(晉)의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이 되는 해인데, 그 사실이 동사(東史)에는 실려 있지 않다. 해동기(海東記)에 의하면, 달민천황(達敏天皇) 계묘년에 신라가 서비(西鄙)를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그 해는 신라 진평왕 5년에 해당하고, 또 원정천황(元正天皇) 경신년에도 신라가 서비를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때는 신라 성덕왕 19년이지만 그 사실이 이 동사에는 다 빠지고 없다. 지금 동래(東萊) 바다 절영도(絶影島)에 옛 진지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 신라 태종이 왜국을 정벌할 때 쌓은 것이라 하여, 이에 태종대(太宗臺)라고 불린다.
♣ 백마침[白馬沈]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마강에 이르렀을 때, 백제를 수호하는 용에 의해 비바람이 일고 파도가 거세어 건널 수 없자 백마를 미끼로 삼아 용을 낚아 처단하였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이다. 백마강이란 이름도 그 전설에 의해 생긴 것이다.
♣ 백면뇌[百面雷]많은 요고(腰鼓)를 말한다. 송 나라 소식(蘇軾)의 ‘석화시(惜花詩)’에, “요고 일백 개가 봄 우레 소리 같아, 양주 땅에 울리자 꽃 저절로 피누나.[腰鼓百面如春雷 打徹涼州花自開]”하였다.
♣ 백면서생[白面書生]책상물림. 밖에 나가지 않고 글공부만 하여 얼굴이 흔 선비. 곧,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을 비유.
♣ 백모[白帽]백모는 상(喪)을 치를 때 쓰는 모자이다.
♣ 백모순속[白茅純束]흰 띠로 묶다. 백모돈속 유녀여옥(白茅純束有女如玉)에서 나온 말이다. 《詩經 召南》
♣ 백모절[白旄節]소무가 해상에서 양을 치면서도 한나라의 절(節)을 들고 다녀 절의 흰 털이 다 빠졌다 한다.
♣ 백목참존[白木鑱存]흰 나무로 자루를 만든 쟁기가 있어 이것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우거동곡현작가(寓居同谷縣作歌)에 “흰 나무로 자루를 한 긴 보습이여 긴 보습이여, 내가 너를 의탁하여 생명으로 삼노라.[長鑱長鑱白木柄 我生託子以爲命]" 한 데서 온 말이다. 《杜詩批解 卷八》
♣ 백묘전[百畝田]일종의 토지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던 주 나라 때 한 농가마다 백묘의 밭을 할당받아 농사를 지었다. 곧 평범한 농부를 뜻한다.
♣ 백문[白門]남경(南京)에 있는 지명으로, 즉 금릉(金陵)을 달리 부른 말이다.
♣ 백문[白門]서남방의 별칭.
♣ 백문[白門]성문(城門)을 말한다.
♣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나음.
♣ 백문서[白文瑞]문서(文瑞)는 이황(李滉)의 제자인 백현룡(白見龍)의 자이다.
♣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같지 아니함.
♣ 백미[白眉]원뜻은 흰 눈썹을 지닌 사람으로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를 이르는 말이나 때로는 예술 작품 중에서 뛰어난 것을 지칭할 때에 쓰기도 한다. 촉한(蜀漢) 때 마량(馬良)의 5형제가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그의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마씨 5형제 가운데 백미(白眉)가 가장 훌륭하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三國志 馬良傳》
♣ 백미랑[白眉郞]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삼국 시대 때 촉(蜀) 나라의 마량(馬良) 형제 다섯이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에서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마량의 눈썹이 희었으므로 사람들이 “마씨의 아들 가운데 백미가 가장 뛰어나다.” 하였다. 《三國志 卷39 蜀志 馬良傳》
♣ 백미량[白眉良]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남을 이름. 촉한(蜀漢) 때 마량(馬良)의 5형제가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으되, 그중에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그의 눈썹에 흰털이 섞여 있었으므로, 향인들이 마씨 5형제 중에 백미가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三十九》
♣ 백반청추[白飯靑蒭]두보의 시에, “종에게는 흰 밥을 주고 말에게는 푸른 꼴을 주네[與奴飯馬淸蒭].”라는 구절이 있다.
♣ 백발백중[百發百中]배갈의 화살이 백번 다 명중한다는 뜻으로, 모든 게획이 예정대로 다 적중한다는 뜻.
♣ 백발부[白髮賦]진(晉)의 좌사(左思)가 쓴 백발부(白髮賦). 좌사가 어느새 백살이 된 게 한스러워 백발부를 썼었음. 《淵鑑類函》
♣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근심 때문에 흰 머리가 이렇게 길어졌다는 탄식의 말. 이백(李白)의 추보가(秋浦歌) 중 한 구(句)다. 늙은 몸의 서글픔을 노래할 때 자주 인용한다.
♣ 백배[百拜]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술 한 잔 권할 때 손과 주인이 백 번 절하므로 종일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술을 마실 적에도 예의를 지킴으로써 난잡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 백번[白薠]흰떼. 풀이름.
♣ 백벽[白璧]흰구슬로서 진귀한 보물. 전국 시대의 진귀한 보물인 초(楚) 나라의 화씨벽(和氏璧)을 말한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진(秦) 나라 소왕(昭王)이 열다섯 성과 맞바꾸자고 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제 위왕(齊威王)이 순우곤에게 황금(黃金) 천 일(溢)과 백벽(白璧) 십 쌍(雙)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 백벽수어목[白璧羞魚目]백벽은 현자(賢者)에 비유한 말이고, 고기 눈은 곧 사이비의 소인에 비유한 것이니, 즉 현자가 소인을 증오하는 뜻이다.
♣ 백벽쌍[白璧雙]전국(戰國) 때에 우경(虞卿)이 조왕(趙王)을 보았더니 한 번 보자 조왕이 백벽(白璧) 한 쌍을 주었다.
♣ 백벽청승[白璧靑蠅]쉬파리가 똥을 내갈겨 백옥(白玉)을 더럽힌다.
♣ 백벽환연성[白璧還連城]구슬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큰 가치를 부여받게 됨을 의미한다. 백벽은 전국 시대조 혜문왕(趙惠文王)이 소장하고 있던 화씨벽(和氏璧)이고, 연성(連城)이란 곧 그 가치가 여러 성[城]에 해당함을 말한 것으로, 당시 진 소왕(秦昭王)이 이 구슬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겨 조 혜문왕에게 15성(城)과 바꾸자고 요구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백병참[白柄鑱]두보의 시에 “장참장참백목참(長鑱長鑱白木鑱)”이란 구절이 있다.
♣ 백보천양[百步穿楊]초(楚)나라 양유기(養由基)가 활을 잘 쏘아 백 걸음 앞에서 버들잎을 겨누어서 뚫었다.
♣ 백봉[白鳳]뛰어난 시상(詩想)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이 흰 봉황[白鳳]을 토(吐)하는 꿈을 꾸고부터 사부(詞賦)가 더욱 뛰어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백봉비[白捧羆]왕비(王羆)는 북제(北齊)의 맹장이다. 남제(南齊)의 신무제(神武帝)가 한궤(韓軌) 등을 보내어 밤에 하(河)를 건너 왕비를 습격하니, 비가 모르고 있었는데 새벽에 궤의 군병들이 사다리를 타고 성에 들어왔다. 비는 아직 누워 자고 있었는데 문밖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맨발로 흰 몽둥이[白棒]을 들고 내달으며 크게 외치기를, “늙은 곰이 여기 길목에 누웠으니 어느 담비가 지나갈 테냐.” 하니, 적(敵)이 보고 놀라 물러섰다.
♣ 백부[白傅]만년에 태자 소부(太子少傅)를 지냈던 당(唐)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별칭이다.
♣ 백부[帛符]비단을 찢어 가지는 증명물.
♣ 백부[栢府]어사대(御史臺) 즉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이다. 한(漢) 나라 어사대 안에 잣나무[柏]를 줄지어 심었는데 그 위에 항상 까마귀 수천 마리가 서식하였으므로 어사대를 백부(柏府), 백대(柏臺), 오대(烏臺)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漢書 卷83 朱博傳》
♣ 백부편[白傅篇]당(唐) 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편. 백부(白傅)란 백거이가 만년에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역임했음으로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 백분[白粉]어려서부터 한 가지 재주를 익히기 시작하여 머리가 다 희도록 해도 제대로 되지 않고 어지럽기만 한 것. 《法言》
♣ 백불[白拂]백불은 짐승의 희고 긴 터럭을 묶어서 만든 먼지떨이인데 이는 흔히 중들이 소지하는 것이다.
♣ 백붕[百朋]백붕은 많은 재화(財貨)를 말하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다.[旣見君子 錫我百朋]”하였다.
♣ 백사[白社]백련사(白蓮社)를 말함. 진(晉) 나라 때 고승 혜원(慧遠)이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인의 문인들과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서 모임을 결성하고 정토법(淨土法)을 함께 닦았는데, 동림사 안에 백련(白蓮)이 있으므로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였다 한다. 곧 문인들의 청아한 모임을 가리킨다. 《蓮社高賢傳》
♣ 백사[白沙]백사는 이항복(李恒福)의 호이다. 광해군 9년(1617)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이를 극력 반대하다 관작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그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 백사마[白司馬]당 나라 문장가 백거이(白居易)를 가리킨다. 그가 강주(江州)의 사마(司馬)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비파인(琵琶引)’에 “좌석에서 제일 많이 운 사람이 누구인고, 강주 사마 푸른 적삼 눈물 젖어 축축하네.[座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라는 구절이 있다.
♣ 백사마[白司馬]당대(唐代) 후사지(侯思止)라는 혹리(酷吏)가 있었는데 무식하여 쌍스런 말을 쓰며 죄인을 다루었었다. 그는 죄인을 고문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죄인을 다스릴 때면 “이 백사마(白司馬)를 잘 받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맹청(孟靑)을 받을거다.” 하고 호통을 쳤다 한다. 백사마는 북망산(北邙山)의 사마판(司馬坂)의 별명으로 죽음을 뜻하며, 맹청은 낭야왕(琅邪王) 충(沖)을 쳐서 죽였던 장군 맹청봉(孟靑棒)에서 따온 것으로 매로 쳐죽임을 뜻한다. 《唐史 酷吏侯思止傳》
♣ 백사위인일[白社違人日]백사는 흰 띠[白茅]로 지붕을 덮은 집. 즉 옛날 은사(隱士)의 집을 말하고 인일(人日)은 정월 칠일을 말한다.
♣ 백사인[白舍人]백사인(白舍人)은 곧 당 헌종 때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
♣ 백사자[白獅子]수박[西瓜]이 원래 서역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인데, 백사자(白獅子)는 수박의 별칭(別稱)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 백산[白傘]불가의 말로 오불정(五佛頂)의 하나인 백산개불정(白傘蓋佛頂)을 가리킨다.
♣ 백상[白商]백상은 가을의 별칭이다.
♣ 백상루[百祥樓]평북 안주(安州) 북성(北城)의 안쪽 청천강(淸川江) 가에 자리잡은 조망이 좋은 누대 이름이다.
♣ 백석[白石]황초평(皇初平)이 나이 15세 때 양(羊)을 치고 있었는데, 어느 도사(道士)가 그의 착실한 태도를 보고 그를 데리고 금화산(金華山) 석실(石室) 속으로 들어갔다. 초평은 그곳에서 40여 년을 보내면서 집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나선 그의 형이 몇 해를 두고도 못 찾다가 어느 날 시장에서 도사를 만나 그가 금화산 속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길로 도사를 따라가서 그를 만났다. 형이 초평에게,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 산 동편에 있다고 하여, 가 보았으나 양은 없고 하얀 돌무더기뿐이었다. 그런데 초평이 와서 꾸짖자 그 돌들이 모두 일어나 수만 마리의 양떼를 이루었다고 한다. 《神仙傳》
♣ 백석가[白石歌]백석가는 남산지가(南山之歌), 일명 우각지가(牛角之歌)라고도 한다. 춘추 시대 위(衛) 나라 사람 영척(甯戚)이 가난하여 제 환공(齊桓公)에게 벼슬을 얻으러 가서 소뿔을 두드리면서 불렀다 한다. 그 노래는 “남산은 환하며 백석은 빛나네.[南山粲粲 白石爛爛]"로 시작한다. 《三齊略記》
♣ 백설[白雪]거문고 곡조의 이름. 그 설이 동일하지 않다. 사희일(謝希逸)의 금론(琴論)에는 “유연자(劉涓子)가 거문고를 잘 타서 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을 지었다.” 하였고, 금집(琴集)에는, “사광(師曠)의 소작이라.” 하였으며, 박물지(博物志)에는, “태상(太常)이 소녀(素女)를 시켜 오십현(五十絃)의 비파를 타는 곡조 이름이라.” 하였다.
♣ 백설[白雪]백설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도읍 영도(郢都)의 고아(高雅) 한 가곡(歌曲) 이름으로, 문선(文選)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下里)와 파인(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양아(陽阿)와 해로(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고, 양춘(陽春)과 백설(白雪)을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하였다.
♣ 백설[百舌]새 이름. 백로(伯勞)의 일종으로 일명은 반설(反舌)인데 종달새를 말함.
♣ 백설가[白雪歌]하리(下里)ㆍ파인(巴人)에 대칭되는 매우 품격이 높은 노래로, 곡조가 고상하여 예로부터 부르기 어려운 곡으로 꼽혀 온 초(楚) 나라의 가곡임. 지기지우끼리 시를 주고받을 때 흔히 상대방의 시를 찬양하는 뜻으로 인용된다.
♣ 백설곡[白雪曲]양춘곡(陽春曲)과 함께 꼽히는 초(楚) 나라의 2대 명곡으로 내용이 너무도 고상하여 예로부터 창화(唱和)하기 어려운 곡으로 일컬어져 온다. 전하여 상대방의 시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 백설부[白雪賦]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 이름이다.
♣ 백설양춘[白雪陽春]남이 흉내내기 어려운 고상한 시가(詩歌)를 말한다. 백설과 양춘 모두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가곡 이름으로, 이를 제대로 창화(唱和)하는 이가 수십 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 백설조[白雪調]거문고 곡명. 비추부(悲秋賦)로 유명한 초(楚)의 송옥(宋玉)이 쓴 송옥풍부(宋玉諷賦)에, “그 안에 거문고가 있기에 신(臣)이 그를 안고 뜯다가 유란곡(幽蘭曲)ㆍ백설곡(白雪曲)을 만들었지요.”라 하였다.
♣ 백설조[白雪操]고대의 유명한 금곡(琴曲) 이름인데, 곡이 너무 고상하여 창화(唱和)할 이가 극히 드물었으므로, 전하여 위인(偉人)을 칭찬하는 말로 쓰인다.
♣ 백설편[白雪篇]옛날에 고상하기로 유명했던 초(楚) 나라의 가곡인 양춘백설곡(陽春白雪曲)에서 온 말로, 전하여 훌륭한 시문(詩文)에 비유한다.
♣ 백성[白城]충청도 직산(稷山)의 고호임.
♣ 백성가[百姓家]불교나 도교를 믿지 않는 평범한 집.
♣ 백세지사[百世之師]백세 후에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만큼 훌륭한 사람을 일컬음.
♣ 백소부[白少傅]태자 소부(太子少傅) 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
♣ 백수[白壽]99세. 100-1=99처럼 百-一=白 ∴ 白=99
♣ 백수[白水]중국의 남양(南陽) 백수현(白水縣)으로, 왕기(王氣)가 성대하게 일어나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또한 백수진인(白水眞人)으로 일컬어졌는데, 망기(望氣)를 잘 하는 왕망(王莽)의 사자가 남양(南陽) 땅에 이르러 그가 거하는 지역인 용릉곽(舂陵郭)을 멀리 바라보고는 “기운이 성대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니, 왕자(王者)가 일어나 천명을 받을 곳임이 분명하다.”라고 감탄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光武帝紀》
♣ 백수고[柏樹枯]진(晉) 나라 왕부(王裒)는 그의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에게 죄없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이르러 절하고 곡했으며 옆에 있는 잣나무를 부여잡고 슬피 울부짖으니, 이 때문에 잣나무가 말라죽었다. 《晉書 王裒傳》
♣ 백수고지[栢樹枯枝]진(晋)나라 왕부(王裒)가 그 아버지 무덤에서 매일 슬피 울어서, 무덤 앞에 있는 잣나무가 눈물에 젖어서 잎과 가지가 말랐다.
♣ 백수달[白獸闥]백수달은 백호관(百虎觀)으로서 후한(後漢) 때 박사(博士)와 의랑(議郞) 등이 토론하던 곳이다.
♣ 백수북면[白首北面]재주와 덕이 없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스승 앞에서 북향(北向)하고 앉아 가르침을 바란다는 뜻.
♣ 백수일절[白首一節]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지절(志節)이 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백수자[柏樹子]선종(禪宗)의 화두(話頭). 어느 승려가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하자, 조주가 답하기를 “저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庭前柏樹子]” 했다고 한다. 《會元 趙州章 無門關三七則》
♣ 백수정전[柏樹庭前]어느 중이 조주(趙州)에게,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대답하기를,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다고 함.
♣ 백수존[白獸尊]뚜껑에 백호(白虎)를 그린 술잔이다. 옛날에 정월 초하룻날에 이 술잔을 대궐 뜰에 놓아두고 곧은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으니, 말하는 자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하고자 한 것이라 한다.
♣ 백수준[白獸樽]원단(元旦)의 조회(朝會) 때 직간(直諫)하는 신하에게 내려 주던 술잔 이름이다. 원래는 백호준(白虎樽)인데, 당 태조(唐太祖)의 휘(諱)를 피하여 호(虎)를 수(獸)로 바꾼 것이다.
♣ 백수준[白獸樽]육조(六朝)시대에 송나라 임금이 연회 때에 백수준(百獸樽)을 두루 두고 무공(武功)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그 술을 먹게 하였다.
♣ 백수진인[白水眞人]돈을 가리킴. 왕망(王莽)때에 전문(錢文)을 화천(貨泉)이라고 새겼는데, 천(泉)을 파자(破字)하면 백수(白水)가 되고 화(貨)를 파자하면 진인(眞人)이 되므로 이른 말이다.
♣ 백시[伯始]백시는 후한(後漢) 호광(胡廣)의 자로서, 안제(安帝)ㆍ순제(順帝)ㆍ충제(沖帝)ㆍ질제(質帝)ㆍ환제(桓帝)ㆍ영제(靈帝) 등 여섯 조정을 30여년 동안 섬겼는데 사리에 밝고 조정의 법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여 서울에서 말이 떠돌기를 “만사가 풀리지 않거든 백시에게 물어보소 천하의 중용은 호공에게 있다네.” 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四十四 胡廣傳》
♣ 백시중용[伯始中庸]한 나라 호광(胡廣)의 자(字)가 백시(伯始)인데, 경학(經學)에 익숙하고 나라의 원로(元老)로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모든 정무(政務)를 잘 처리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모든 일이 처리되지 않거든 백시에게 물어라. 천하의 중용(中庸)은 호공(胡公)에 있네.”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왕씨가 세력을 부려서 나라를 빼앗았는데도 그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몸만 보전하니, 후세에서는 이를, “호광의 중용”이라고 기롱하였다.
♣ 백신난속[百身難贖]공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 백 번 죽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황조(黃鳥)에 “대신 죽어 살려낼 수만 있다면, 백 번 죽더라도 기꺼이 하리.[如可贖兮 人百其身]”라는 말이 있다.
♣ 백아[伯牙]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는 모두 춘추 시대 사람으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일찍이 거문고를 타면서 높은 산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험준함[峩峩]이 마치 태산(泰山) 같구나.”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또 말하기를 “좋다! 양양(洋洋)함이 마치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여 백아의 생각을 종자기가 다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종자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孝行覽 本味》
♣ 백아곡[白鴉谷]백아곡은 검단산(黔丹山)북쪽에 있는데 작설차가 난다.
♣ 백아곡[白鴉谷]백아는 반포(反哺)할 줄 모른다는 까마귀이다.
♣ 백아금[白牙琴]백아는 춘추 시대 초 나라 사람으로 거문고를 잘 탔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鍾子期)가 잘 알아들었다. 백아의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높고 높은 산 같구려.” 하고, 백아의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일렁일렁 흐르는 물 같구려.” 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거문고의 줄을 끊었다 하였다.
♣ 백아유수[伯牙流水]춘추(春秋) 시대의 거문고의 명수 백아가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을 타면,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그 의미를 잘 알아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 백아절현[伯牙絶絃]전국시대(戰國時代)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이 났던 백아(伯牙)에게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인 종자기(鍾子期)가 있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슬퍼하여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더 이상 거문고를 다루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을 때의 슬픔을 이르거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지음(知音)
♣ 백아현[伯牙絃]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면 종자기(鍾子期)가 옆에서 듣고는 “마치 태산처럼 높고 높도다.[峨峨兮若泰山]”하였고, 유수(流水)에 뜻을 두면 “마치 강하처럼 양양하도다.[洋洋兮若江河]”하면서 찬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列子 湯問》
♣ 백악[白嶽]백악은 서울의 백악산으로 곧 대궐을 말함.
♣ 백안[白眼]뜻이 맞는 정겨운 벗이 찾아오면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뜻에 맞지 않는 속(俗)된 사람이 찾아오면 백안으로 대했다는 진(晉)나라 완적(阮籍)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남의 환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 백안시[白眼視]눈의 흰 부분으로 본다. 즉, 사람을 싫어하여 흘겨보는 것 또는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 백액장군[白額將軍]호랑이를 가리킨 말이다.
♣ 백야[白也]백야(白也)라는 말은 이백(李白)인데 과장된 말이다.
♣ 백야연금속[白也緣金粟]이백은 스스로 금속여래의 후신이라 칭하였다. 금속여래는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이라 하나 경문에 근거가 없다.
♣ 백양[白楊]나무 이름인데, 옛날 무덤 가에 이 나무를 많이 심었었다.
♣ 백양[伯陽]노자(老子) 이이(李耳)의 자. 어머니 뱃속에서 81년이나 있다가 태어나서 바로 말하였으며, 머리가 이미 세었다 한다. 《列仙傳》 노자는 도덕(道德)을 닦았는데, 그 학은 숨어서 이름을 내지 않는 것으로 주를 삼았다. 노자는 주(周) 나라가 쇠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떠나가다가 관문(關門)에 이르니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그대가 은거하려는 모양인데 나를 위하여 책 하나를 지어달라.” 하자, 노자가 도덕경(道德經) 상하편을 지어 주고 갔다 한다. 《史記 卷六十三》 또,
♣ 백양[伯陽]백양은 노자(老子) 이이(李耳)의 자.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 81년이나 있다가 태어나서 바로 말하였으며, 머리가 이미 세었다 한다. 《列仙傳》
♣ 백양[伯陽]한(漢) 나라 선인(仙人) 위백양(魏伯陽)을 말한다.
♣ 백양공[白羊公]해록쇄사(海錄碎事) 도석선(道釋仙)에 “황로자(黃盧子)가 그에게 도법(道法)을 전수하였는데, 그는 늘 흰 양을 타고 다녔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한다.” 하였다.
♣ 백양숙[白良叔]양숙(良叔)은 백동좌(白東佐)의 자(字).
♣ 백어[伯魚]공자(孔子) 아들 리(鯉)의 자(字).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공자가 일찍이 홀로 서 있는데 이(鯉)가 허리를 굽히고 바삐 걸어 뜰을 지나갔다.[嘗獨立 鯉趨而過庭]" 하였다.
♣ 백업[白業]불교(佛敎)에서 악업(惡業)을 흑업(黑業)이라 하고, 선업(善業)을 백업(白業)이라 한다.
♣ 백업증금침[白業證金針]사람들에게 시를 짓는 비결을 제시해 준다는 것임. 백업은 불가의 용어로 선업(善業)이란 뜻이고, 황금침은 금침도인(金針度人)의 준말임.
♣ 백연채[白燕釵]한 무제(漢武帝)가 신녀(神女)에게서 받은 옥비녀[玉釵]를 조 첩여(趙倢伃)에게 주었는데, 소제(昭帝) 때에 이르러 그 상자를 열어 보니, 흰 제비[白燕]가 나와서 하늘로 날아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미인을 가리킨 듯하다.
♣ 백열[柏悅]잣나무의 기쁨이란 곧 친구의 행운을 기뻐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에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에 타면 혜초가 탄식을 한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엽주[柏葉酒]측백나무 잎을 넣어 빚은 술인데, 원단(元旦)에 수명을 빌고 사기(邪氣)를 쫓기 위하여 가족들이 함께 마시던 술 이름이다.
♣ 백영[伯英]백영은 후한 장지(張芝)의 자(字). 초서(草書)를 잘 썼으므로 사람들이 초성(草聖)으로 일컬었다. 《後漢書 張奐傳》
♣ 백예[伯翳]순(舜)의 신하인 백익(伯益). 우를 도와 많은 치수의 공을 세웠음.
♣ 백오[百五]한식(寒食)의 별칭. 동지에서 한식까지는 1백 5일이 걸리므로 붙여진 이름임.
♣ 백오가진[百五佳辰]백오(百五)는 한식일. 동지(冬至) 후 1백 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이다.
♣ 백오요[柏烏謠]사헌부(司憲府)의 고사와 관련된 시라는 뜻이다. 한(漢) 나라 때 어사부(御史府)에 잣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 나무 위에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서식하였으므로, 어사대를 오대(烏臺)ㆍ오부(烏府)ㆍ백대(柏臺)라고 하였다 한다. 《事物異名錄 宮室 官廨》
♣ 백오정당한식천[百五正當寒食天]동지(冬至)에서 한식날까지 꼭 105일이 되므로 한식을 백오절이라고도 함
♣ 백옥[白屋]띠풀로 지붕을 덮은 집으로,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을 말한다.
♣ 백옥[伯玉]백옥은 춘추(春秋) 시대 위(衛) 나라의 현대부(賢大夫) 거원(蘧瑗)의 자(字).
♣ 백옥[白屋]흰띠[白茅]로 지붕을 한 집인데 대개 천민(賤民)의 허술한 집을 말한다. 옛날 요(堯) 임금이 이런 집에서 거처하였다고 한다. 《太平御覽 皇王部 五帝堯陶唐氏》
♣ 백옥경[白玉京]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천제(天帝)의 도성(都城)이다. 곧 황성(皇城)을 뜻한다.
♣ 백옥경[白玉京]천상(天上)의 중심에 천존(天尊)이 산다는 옥경산(玉京山)을 말하는데, 황금과 백옥(白玉)으로 꾸민 궁궐들이 있다 하여, 후에 경도(京都)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枕中書》
♣ 백옥뇌[白玉腦]귤(橘)의 씨앗을 가리키는 말인데, 즉 백옥(白玉)처럼 희고 깨끗한 용뇌(龍腦)와 같다는 뜻이다. 용뇌는 인도(印度)에서 나는 용뇌수(龍腦樹)의 줄기에서 덩어리로 되어 나오는 투명(透明)한 결정체(結晶體)이다.
♣ 백옥당[白玉堂]관리(官吏)가 있는 관서(官署)를 이름.
♣ 백옥당[白玉堂]문인(文人)이 죽은 뒤에 모여산다는 백옥루(白玉樓)를 말한다.
♣ 백옥당[白玉堂]청화직(淸華職)의 관원이 머무르는 대궐 안의 관소로 홍문관을 가리킨다.
♣ 백옥당[白玉堂]한림원(翰林院)의 별칭이다.
♣ 백옥루기[百玉樓記]당(唐) 나라 때의 시인 이하(李賀)가 죽을 적에 천사(天使)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천제(天帝)께서 백옥루를 지어놓고 그대를 불러다가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고 한 데서 온 말로, 문인(文人)의 죽음을 뜻한다.
♣ 백옥루기[白玉樓記]천상(天上)에 있는 누각인 백옥루(白玉樓)의 기문(記文). 당 나라 이상은(李商殷)이 지은 이장길소전(李長吉小傳)에 의하면, 당 나라 때 천재 시인인 이하(李賀)가 몰락한 종실의 후예로서 뜻을 펴지 못했는데, 어느 날 낮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상제(上帝)께서 백옥루(白玉樓)를 지었는데 그대를 불러 기문(記文)을 짓게 하려 한다.”라고 쓰여진 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죽었다 한다.
♣ 백옥루징기[白玉樓徵記]상제(上帝)의 백옥루에 대한 기문(記文)을 쓰게 할 목적으로, 당(唐) 나라 시인 이하(李賀)를 하늘로 데려갔다고 그의 죽음을 비유한 글이 당대(唐代) 이상은(李商隱)의 ‘이하 소전(李賀小傳)’에 나온다.
♣ 백옥봉[白玉峯]옥봉은 조선 중종(中宗) 때 사람 백광훈(白光勳)의 호. 그는 당시에 시(詩)로 이름을 날렸는데 얼굴이 아주 못생겨서 이름만 듣고 만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한다. 그가 한번은 부여의 백마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평소 그를 흠모하던 어떤 기생이 백광훈에게 “어른을 뵈오니 꼭 조룡대(釣龍臺)와 같습니다. 조룡대라 하여 굉장한 줄 알고 와서 보면 초라하여 소룡대(小龍臺)라 하듯, 어른을 뵈니 실망이 큽니다.” 하여 듣는 사람들이 웃었다 한다.
♣ 백옥삼견[白玉三見]초(楚)의 변화(卞和)가 박옥(璞玉)을 주워가지고 초왕(楚王)에게 바쳤다가, 옥이 아닌 돌로 왕을 속였다 하여 양쪽 발꿈치를 다 잘리는 형을 당했음. 《韓非子 和氏》
♣ 백옥증매채[白玉曾埋彩]남편의 죽음을 가리킨다.
♣ 백옥지비[伯玉知非]50세를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蘧伯玉年五十 而有四十九年非”라 하였다. 금시재(今是齋)라는 집 이름이 “覺今是而昨非”라는 ‘귀거래사(歸去來辭)’의 구절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여, 거백옥의 “知非”고사를 끌어다 쓴 것이다.
♣ 백온[伯溫]송 나라 소옹의 아들 소백온(邵伯溫)을 가리키는데, 그는 또 황극계술(皇極系述)ㆍ관물내외편해(觀物內外篇解) 등을 저술하였다.
♣ 백요궁[白瑤宮]달 속에 있다는 선궁(仙宮)의 이름이다.
♣ 백우[伯牛]백우는 공문 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인 염경(冉耕)의 자임. 백우가 악질에 걸리자 공자가 찾아가 위문하고 이런 사람이 이런 악질에 걸렸느냐고 애석해하였음. 《論語 雍也》
♣ 백우[伯禹]우(禹)임금. 곤(鯀)의 아들.
♣ 백우선[白羽扇]백우선은 흰 새털로 만든 부채로서 흔히 신선이 갖는 소지품으로 묘사된다.
♣ 백운[白雲]백운은 어버이를 뜻함. 당(唐) 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의 법조 참군(法曹參軍)으로 있을 적에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자기 고향 쪽에 흰 구름이 외로이 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우리 어버이가 저 구름 밑에 계신다.[吾親所居 在此白雲下]”하고는 한동안 슬피 바라보다가 구름이 딴 곳으로 간 다음에야 길을 떠났다. 《新唐書 狄仁傑傳》
♣ 백운[白雲]이규보(李奎報)의 호.
♣ 백운[白雲]형조의 관원을 가리킨다. 황제(黃帝) 때 백관을 구름으로 이름하였는데, 추관(秋官) 즉 형조는 백운(白雲)이라고 불렀다. 《漢書 百官公卿表上》
♣ 백운각[白雲閣]어버이에 대한 추억이 묻어나는 누각이라는 말이다.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을 넘어 가다가 흰 구름이 홀로 머문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 구름 아래에 우리 어버이가 계신다.[吾親所居 在此雲下]”고 말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舊唐書 卷89 狄仁傑傳》
♣ 백운간점원[白雲看漸遠]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에 있을 때에 태행산(太行山)에 올라 돌아보니, 흰 구름이 외로이 날아가는지라, “내 어버이 집이 저 아래 있는 것을,”이라 했으니 흰 구름 밑에 고향이 있다는 뜻이다.
♣ 백운봉[白雲封]백운봉은 남조(南朝) 제(齊) 나라 고제(高帝)가 산중에 은거하는 도홍경(陶弘景)에게 산중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묻자, 시를 지어 대답하기를 “산중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면 산등성이 그 위에 흰구름 많아 스스로 마음속에 기뻐할 따름 임금에게 부쳐줄 수는 없다네[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 하였는데, 나중에 소연(蕭衍)이 양(梁) 나라를 세울 때 그를 도와 공을 세웠으므로 당시에 산중 재상이라 불렸다 한다.
♣ 백운불귀[白雲不歸]주 목왕(周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 이르러 선녀인 서왕모(西王母)와 요지(瑤池) 가에서 잔치할 적에 서왕모가 주 목왕을 위하여 “백운은 하늘에 있고 ……[白雲在天……]”라는 노래를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 말한 백운은 곧 서왕모를 가리킨다.
♣ 백운사[白雲司]추관(秋官), 즉 형조나 사헌부 등의 관아를 말한다. 참고로 백낙천의 시에 “淸光莫獨占 亦對白雲司”라는 구절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9 和劉郞中望終南山秋雪》
♣ 백운사아경[白雲司亞卿]형조 참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구름에 비유하여 관직을 명명하면서, 추관(秋官)을 백운(白雲)이라고 칭했다는데, 추관은 곧 형관(刑官)을 가리킨다.
♣ 백운요[白雲謠]주목왕(周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 가서 선녀인 서왕모(西王母)와 요지(瑤池)에서 주연을 베풀고 헤어질 때 서왕모가 지어 주었다는 이별시로, “백운은 하늘에 있는데, 산릉만 절로 생기네. 길은 멀고 산천이 가로막히었나니, 원컨대 그대는 죽지 말아서 다시 오기를 바라노라[白雲在天 山陵自出 道里悠遠 山川間之 將子無死 尙能復來].”라고 한 것인데, 주 목왕은 이에 답하여 노래하기를 “내가 동토에 돌아가 중국을 잘 다스려서, 만민이 고루 태평해지거든 내가 다시 와서 너를 보리라[予歸東土 和治諸夏 萬民平均 吾顧見汝].” 하였다 한다. 그 첫 구절이 “백운재천(白雲在天)”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백운요(白雲謠) 혹은 백운편(白雲篇)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穆天子傳 卷3》
♣ 백운일재망[白雲日在望]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객지에서 백운을 바라보고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했던 고사가 있다.
♣ 백운진감의마최[百韻眞堪倚馬催]재질이 민첩하여 순식간에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원호(袁虎)가 환선무(桓宣武)로부터 포고문을 빨리 지으라는 독촉을 받고는 말에 기댄 채 종이 일곱 장의 글을 금새 지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文學》
♣ 백운편[白雲篇]두보(杜甫)의 증헌납사기거전사인징시(贈獻納使起居田舍人澄詩)에 “개인 창 아래서 백운편을 점검하도다[晴窓點檢白雲篇],” 한 데서 온 말로, 좋은 시를 뜻한 듯하나, 제가(諸家)의 해석이 구구하여 자세하지 않다. 《杜詩 卷三》
♣ 백운편[白雲篇]은거해 사는 사람이 지은 시를 뜻한다.
♣ 백운편[白雲篇]주 목왕(周穆王)이 곤륜산(崑崙山)에 갔을 때,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잔치를 베풀고 주 목왕에게 축수를 올리면서 불렀던 백운요(白雲謠)를 가리킨다.
♣ 백운하[白雲下]고향의 부모 생각하는 것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법조 참군(法曹參軍)으로 있으면서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외로이 나는 흰 구름을 보고는 좌우에게 말하기를 “우리 어버이가 저 구름 아래에 계신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운향[白雲鄕]신선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저 백운(白雲)을 타고 제향(帝鄕)에서 놀리라.[乘彼白雲 遊乎帝鄕]”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를 인해서 신선들이 사는 곳을 뜻하게 되었다.
♣ 백원[白猿]옛날 검술(劍術)로 유명했다는 백원공(白猿公)을 지칭한 것.
♣ 백원[白黿]흰 큰 자라.
♣ 백원옹[白猿翁]백원옹은 흰 빛의 원숭이란 뜻으로, 유신(庾信)의 우문성지명(宇文盛志銘)에 “백원(白猿)에게 검술(劍術)을 배워 풍운(風雲)의 뜻을 이루었다.” 했다.
♣ 백월[百越]백월은 지명 또는 종족(種族)의 이름으로 교지(交阯)에서부터 회계(會稽)에 이르기까지 7~8천 리에 걸쳐 있는 종족.
♣ 백월[百粵]옛날 중국의 절강(浙江)ㆍ민월(閩越) 지방을 가리킨다. 옛날 교지(交趾)에서 회계(會稽)까지 칠팔천 리 주위에 군소 월족(越族)들이 모여 각기 작은 나라들을 매우 많이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文獻通考 輿地考 古越南》
♣ 백월비[白月碑]신라 시대의 국사(國師)인 낭공대사(郞空大師)의 탑명(塔銘)을 새긴 비. 경북 봉화군(奉化郡) 태자사(太子寺)에 세운 것을 영주군(榮州郡)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경복궁(景福宮) 안의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백유[白楡]별을 말한다. 고악부(古樂府)의 농서행(隴西行)에, “하늘 위엔 무엇이 있는가, 가지런히 백유가 심어져 있네.[天上何所有 歷歷種白楡]”하였다.
♣ 백육재[百六災]106년 만에 돌아온다는 양구(陽九)의 액운(厄運)으로, 큰 재난을 뜻할 때 쓰는 말이다.
♣ 백육회[百六會]106년마다 맞게 되는 액운(厄運)의 시대를 말한다. 《漢書 谷永傳 注》
♣ 백은탄[백銀灘]평양 대동강 능라도(綾羅島) 바로 아래 있는 여울. 중국의 사절들이 돌아갈 때 흔히 대동강에 선유(船遊)했다.
♣ 백의[白衣]구름이 일어나는 모양을 형용하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가탄(可歎)’에, “하늘에 뜬 구름은 흰옷 같더니만, 어느새 변해 푸른 개 같아라.[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하였다.
♣ 백의[白衣]백의는 동복(僮僕)을 가리키는데 옛날에는 천한 심부름을 맡은 자는 백의를 입었으므로 이르게 된 것이다. 진(晉)의 도잠(陶潛)이 9월 9일 술이 없어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백의 입은 사람이 오고 있었다. 이른 다음 보니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도잠은 즉시 따라 마시고 취하였다. 《續晉陽秋》
♣ 백의[白蟻]주 목왕(周穆王)의 8준마(駿馬)의 하나.
♣ 백의객[白衣客]이필(李泌)을 가리킨다. 이필은 소년 시절부터 재민(才敏)으로 이름나니 현종은 태자인 숙종과 함께 포의교(布衣交)를 맺게 하였으므로 태자는 언제나 선생이라 불렀다. 뒤에 영양(穎陽)에 살고 있었는데, 마외(馬嵬)에서 숙종이 부르므로 영무(靈武)로 가 뵙자, 숙종은 크게 기뻐하여 밖에 나갈 때에는 말을 함께 타고 잘 때에는 탑(榻)을 마주하여 태자로 있을 때처럼 대우하고 그의 말이면 모두 따랐다. 《新唐書 李泌傳》
♣ 백의공백타[白衣供白墮]백타(白墮)는 진(晉) 나라 때 술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유백타(劉白墮)를 이른 말로, 전하여 좋은 술을 가리키는데, 도잠(陶潛)이 음력 9월 9일에 술이 없어 실망하고 있던 차에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백의 사자(白衣使者)를 시켜 술을 보내왔던 데서 온 말이다.
♣ 백의대사[白衣大士]33관음(觀音) 가운데 하나인 백의관음을 말하는데, 항상 흰 옷을 입고 흰 연꽃에 앉은 관음보살이다.
♣ 백의래[白衣來]도잠이 9월 9일에 술이 없어 울타리 가에 나가 바라보니 국화를 손에 따들고 흰 옷 입은 사람이 오는데,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내온 것이었다.
♣ 백의사자[白衣使者]술을 가져온 하인을 가리킨 말이다. 진(晉) 나라 때 도잠(陶潛)이 9월 9일에 술이 떨어져 술 생각이 간절하던 차,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흰 옷 입은 사환(使喚)을 시켜 술을 보내준 데서 온 말이다.
♣ 백의유령[白衣踰嶺]벼슬하려고 새재 넘는다는 말이다. 새재[鳥嶺]는 경상북도 문경군과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위치하여 서울과 지방을 통하는 길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서울 나들이하던 영남 선비들은 으레 이 재를 넘었었다.
♣ 백의인[白衣人]도연명이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마실 술이 없자 울타리의 국화를 따면서 앉아 있노라니 흰 옷 입은 사람이 찾아왔는데, 바로 강주 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병을 들려서 보낸 사람이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續晉陽秋 恭帝》
♣ 백의재상[白衣宰相]유생으로 있던 사람이 단번에 재상의 벼슬에 오른 사람.
♣ 백의종군[白衣從軍]흰옷(白衣)을 입고 군대(軍)를 따라(從) 전장에 나감,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에 나간다는 뜻의 고사성어.
♣ 백의창구[白衣蒼狗]끝없이 뒤바뀌는 인간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두보(杜甫)의 “하늘에 뜬구름 백의 같더니, 어느새 푸른 개로 모습 바꿨네.[天上浮雲似白衣 斯須改變如蒼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杜少陵詩集 卷21 可歎》
♣ 백의천사[白衣天使]흰옷을 입은 간호사를 일컫는 말.
♣ 백의탄[白衣嘆]세상 일의 빠른 변천을 한탄한 말이다. 두보(杜甫)의 가탄시(可嘆詩)에 “하늘에 뜬구름이 금방 백의와 같더니 어느새 변하여 푸른 개가 되었구나[天上浮雲如白衣 斯須改變成蒼狗]”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이[百二]1백분의 2.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말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진(秦)나라는 땅이 험고하여 2만 명만 있으면 족히 제후(諸侯)의 백만 군사를 당할 수 있다.” 하였다. 백이산하(百二山河), 백이관산(百二關山)의 준말.
♣ 백이[伯夷]백이는 중국 은(殷) 나라의 처사로서 주 무왕(周武王)이 은을 치려는 것을 말리다가 듣지 않자 주 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아우인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었는데, 이에 대해 공자가 인(仁)을 이루었다고 칭찬하였고, 맹자(孟子)는, “성인으로서 청렴한 자이다.[聖之淸者]”라고 하였다. 《史記 卷六十一 伯夷列傳, 孟子 萬章下》
♣ 백이산하[百二山河]산천의 형세가 아주 험고하다는 뜻이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진(秦) 나라는 지형이 아주 험고한 나라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똑같이 1백만의 군사가 있으면 2백만의 군사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 백이숙제[伯夷叔齊]형 백이와 아우 숙제는 은(殷)나라 고죽군의 아들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쳐 천하를 손 안에 넣자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러이 여기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살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고 한다.
♣ 백이양기[伯夷讓夔]순(舜)이 사악(四岳)에게 물어 삼례(三禮)를 맡을 인물을 추천하라고 했을 때 모두 백이(伯夷)라는 신하를 적격자로 추천했는데 이때 백이는 그것을 기(夔)와 용(龍)에게 양보하였음. 《書經 舜典》
♣ 백이전[伯夷傳]백이(伯夷)의 전기를 말함.
♣ 백이지청[伯夷之淸]백이의 청렴함.
♣ 백이채미사[伯夷採薇死]백이는 상(商) 나라 때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데, 주 무왕이 상 나라를 치자 이를 간(諫)하였고, 무왕이 천하를 차지함에 이르러서는 아우 숙제(叔齊)와 함께 의리상 주 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캐먹다가 굶어죽었던 고사이다.
♣ 백이청절[伯夷淸節]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백이는 성인(聖人) 가운데 청(淸)한 자요, 이윤(伊尹)은 성인 가운데 자임한 자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가운데 화(和)한 자요, 공자(孔子)는 성인 가운데 시중(時中)인 자이다.” 하였다.
♣ 백이추정[伯鯉趍庭]공자가 일찍이 혼자 서 있는데, 이(鯉)가 허리를 굽혀 절하고 뜰앞을 지나가니 공자가 불러서, “시(詩)와 예(禮)를 배우라.” 하였다. 논어(論語)
♣ 백이협착[伯夷狹窄]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백이는 협착하고 유하혜(柳下惠)는 불공(不恭)하니, 협착함과 불공함은 군자(君子)가 따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 백익[伯益]백익은 옛날 요순(堯舜)의 신하인데 백예(柏翳)라고도 한다. 그는 순(舜) 임금을 도와 새와 짐승들을 길들였다. 공로가 있어 영씨(嬴氏) 성을 받았는데, 이가 바로 진(秦) 나라의 시조(始祖)이다. 《史記 卷五 秦本紀》
♣ 백인[百忍]당(唐) 나라 때 9대(代)를 동거(同居)하며 화목하게 사는 장공예(張公藝)의 집을 덕종(德宗)이 친히 찾아가 그 비결을 물으니, 그가 지필(紙筆)을 청한 뒤 참을 인(忍) 자를 일백여 번 썼다는 ‘백인성금(百忍成金)’의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孝友傳 張公藝》
♣ 백일가성사십년[白日佳城四十年]40년 만에 다시 무덤을 열고 개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가성(佳城)은 묘지의 별칭이다. 옛날 등공(滕公)이 땅속에서 “답답했던 가성이 3천 년 만에 태양을 본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석곽(石槨)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다. 《西京雜記 卷4》
♣ 백일계견경류안[白日雞犬輕劉安]신선이 되는 것도 하찮게 여김을 뜻한다. 한(漢) 나라 때 회남왕(淮南王)유안(劉安)이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 할 적에 먹다 남은 선약(仙藥) 그릇을 정중(庭中)에 두었는데, 그의 개와 닭이 이 선약을 핥아먹고 쪼아 먹은 후 개와 닭도 모두 승천을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神仙傳》
♣ 백일몽[白日夢]대낮에 꿈을 꾸는 꿈으로 헛된 공상.
♣ 백일산정곡임수[白日山精哭林藪]산도깨비[山精]는 사람 모양의 괴수(怪獸)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나온다고 하는데, 산속의 보물이 없어졌으므로 대낮에도 원통해서 통곡한다는 뜻이다.
♣ 백일시[百一詩]한(漢)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 백일장[白日場]글 짓는 시험의 옛 제도.
♣ 백일황계[白日黃鷄]세월이 빠름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취가(醉歌)에 “누런 닭은 새벽을 재촉하여 축시에 울고, 백일은 해를 재촉하여 유시에 넘어가누나.[黃鷄催曉丑時鳴 白日催年酉時沒]"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자선[柏子禪]당(唐) 나라 승려 조주(趙州)를 이름. 중이 조주에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하고 묻자, 그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 하였는데, 이를 가리킴.
♣ 백장[白藏]가을의 별칭.
♣ 백장[百丈]배를 끄는 동아줄을 말함.
♣ 백저[白苧]가곡(歌曲)의 이름으로 백저(白紵)라고도 하며, 오(吳) 나라의 무곡이라 함.
♣ 백저가[白紵歌]백저무가(白紵舞歌)라고도 하는데 옛날 악부(樂府)의 가곡(歌曲)으로 춤추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어서 좋은 계절에 즐기기에 알맞은 악곡이라 한다. 《樂府古題要解》
♣ 백저가[白紵歌]중국 강남(江南)에서 유행하던 민간의 무곡(舞曲)을 말한다. 악부(樂府)에 전해 오는 오(吳) 나라의 춤 음악 이름이라고 한다.
♣ 백저사[白紵詞]오(吳) 나라의 무곡(舞曲) 이름으로, 고사(古詞)의 뜻은, 무자(舞者)의 아름다움을 성대히 칭찬하고, 또 좋은 시절에 즐겨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한 것이다.
♣ 백적[百適]백적은 백적(百讁)으로, 한(漢) 나라 때 백 번 견책을 받으면 면직되는 고사가 있었다. 공부(公府)의 연리(掾吏) 진준(陳遵)이 날마다 밖에 나가 술에 취해 업무를 폐한 나머지 백 번 견책을 받은 끝에 면직될 운명에 처했는데, 대사도(大司徒) 마궁(馬宮)이 “이 분은 대도(大度)의 인사인데, 어떻게 자잘한 법규로 문책할 수 있는가.” 하고 우대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游俠傳 陳遵》
♣ 백전[白戰]백전은 맨손으로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 백전[白戰]백전은 무기가 없이 맨손으로 싸운다는 뜻으로, 시인(詩人)들이 서로 재능을 겨루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 백전[柏殿]백전은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세운 백량대(柏梁臺)로, 이곳에서 군신(君臣)이 연회를 베풀고 시를 읊으면서 칠언시(七言詩)를 잘하는 사람만 대(臺) 위로 올라가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三輔黃圖 卷5 臺榭》
♣ 백전노장[百戰老將]여러 차례 큰 싸움을 치루었던 늙은 장군이란 뜻으로 세상일에 경험이 많아 당해내지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
♣ 백전백승[百戰百勝]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으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김.
♣ 백전시[白戰詩]상투적인 단어를 빼고서 독특한 표현으로 짓는 시를 말한다.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영주 태수(潁州太守)로 있을 때 눈 내리는 날 빈객들과 술을 마시면서 옥(玉), 월(月), 이(梨), 매(梅), 은(銀), 무(舞), 백(白) 등등의 글자를 빼고서 시를 짓도록 한 고사가 소식(蘇軾)의 ‘취성당설시병인(聚星堂雪詩並引)’에 소개되어 있다.
♣ 백전장[百錢杖]진(晉) 나라 완수(阮修)가 막대기 끝에다 백 전(百錢)의 돈을 꿰어 매고 걸어가다가 주막이 보이면 문득 들어가 혼자서 질탕하게 마시며 즐겼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任誕》
♣ 백전차중강육경[百戰車中講六經]광무제는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전쟁하는 여가에 군중(軍中)에서도 육경(六經)을 강론하였다.
♣ 백전하인병촌철[白戰何人屛寸鐵]옛날 특정한 어휘의 구사를 금하고 시를 짓게 했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읊어 본다는 뜻이다. 백전(白戰)은 송(宋) 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서, 예컨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을 경우 눈과 관련이 있는 학(鶴)ㆍ호(皓)ㆍ소(素)ㆍ은(銀)ㆍ이(梨)ㆍ매(梅)ㆍ로(鷺)ㆍ염(鹽)ㆍ동곽(東郭) 등 어휘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소식(蘇軾)이 빈객들과 함께 이를 회상하며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시 가운데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 준수하라. 손으로만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안 될지니.[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4 聚星堂雪》
♣ 백절불굴[百折不屈]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음. 아무리 꺾으려고 해도 굽히지 않음.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이겨냄
♣ 백절불요[百折不撓]백번 꺾어도 굽히지 않음.
♣ 백접리[白接䍦]백접리는 두건(頭巾)의 이름. 진(晉) 나라 때 풍류로 이름이 높던 산간(山簡)이 술을 좋아하여 매양 원지(園池) 가에 나가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돌아오므로, 당시 아동(兒童)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이 어디로 나가는고, 고양지로 가는구나. 날 저물면 있는 술 다 마시고 돌아와 곤드레가 되어 아무 것도 모른다오. 때로는 말을 타고 오면서 백접리를 거꾸로 쓰기도 하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 酩酊無所知 時時能騎馬 倒著白接罹].” 하였다 한다. 《晉書 卷四十二》
♣ 백정[白挺]옛날 백성들이 반기(叛旗)를 들 때 무기로 사용했던 몽둥이를 뜻하는데, 뒤에는 무장한 반란군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백정[白珽]원(元) 나라 때 사람으로 경사(經史)를 비롯하여 시(詩)ㆍ서(書)에도 모두 뛰어났다.
♣ 백정왜[屠子倭]임진왜란 때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상을 하던 왜병을 일컫던 말. 당시 구미 지역에 주둔했던 왜병은 조총이 없이 칼과 활만으로 무장을 했는데 성질이 잔학하여 무차별 살생을 하였으므로 ‘백정왜’라 불렀다.
♣ 백제[白帝]옛날의 신화 속에 나오는 다섯 천제(天帝) 가운데 하나로, 서방(西方)을 맡은 신이다.
♣ 백제성[白帝城]백제성은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 백제산(白帝山)에 있다.
♣ 백제소언[白隄蘇堰]송 나라 문장가 백거이(白居易)가 쌓은 제방과 소식(蘇軾)이 쌓은 제방을 가리킨다. 소식은 광동(廣東)혜주(惠州)로 좌천되었을 때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고 그것을 사들여 방생지(放生地)로 삼았다 한다.
♣ 백제재[白帝栽]흰 매화가 일찍 핀 것은 봄을 맡는 신을 억지로 먼저 끌어 온 것이나, 빛깔이 흰 것은 백제가 심었기에 그렇게 흰 것이라 하였다. 원래 백제는 가을을 맡은 신이지만 그 백제의 백(白)이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 백족[白足]세속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수도승(修道僧)을 말한다. 위(魏) 나라의 승려 담시(曇始)는 발이 얼굴보다도 깨끗했는데 흙탕물을 걸어가도 발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으므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렸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琅琊代醉篇 白足》
♣ 백족사[白足師]위(魏) 나라 때의 고승 담시(曇始)를 이름. 그는 발이 워낙 희어서 진흙탕을 건너도 발에 더러운 물이 묻지 않았으므로, 그를 백족선사(白足禪師)라 부른 데서 온 말이다.
♣ 백족화상[白足和尙]도력(道力)이 높은 승려라는 뜻이다. 후진(後秦) 구마라습(鳩摩羅什)의 제자인 담시(曇始)의 발이 얼굴보다 희었는데 진흙탕을 밟고 다녀도 더러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백족화상’이라고 불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高僧傳 神異 下 曇始》
♣ 백종처[伯宗妻]백종(伯宗)의 아내가 아침마다 백종을 경계하기를, “도둑이 주인을 미워하고 백성들이 임금을 원망하는 세상인데, 그대가 바른말을 좋아하다가는 반드시 어려움을 당할 것이요.” 하였으나 백종은 그 충고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뒤에 난을 당하였음. 《左傳 成公 十五年》
♣ 백좌칭관포[伯佐稱管鮑]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가 환공을 보좌하여 패업(霸業)을 성취하였다.
♣ 백주[柏舟]백주는 시경(詩經) 용풍(鄘風)의 편명(篇名)이다. 위(衛) 나라 태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처(妻) 공강(共姜)이 재가(再嫁)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므로 친정 어머니가 개가(改嫁)시키려 하니, 공강이 백주(柏舟)라는 시를 지어 맹세하고 절조를 지켰다 한다.
♣ 백주[柏酒]사기(邪氣)를 물리치기 위하여 설날에 마시는, 측백나무 잎을 넣어 빚은 술 이름.
♣ 백주[白洲]이명한(李明漢)의 호이다.
♣ 백주갱봉반승일[栢酒更逢頒勝日]인일(人日)을 가리킨다. 새해가 되면 백엽주(栢葉酒)로 서로 하례를 하고, 인일엔 또 화승(華勝)을 만들어 서로 보내주고 높은 언덕에 올라 시를 읊는 풍습이 있었다.
♣ 백주시[柏舟詩]백주는 시경(詩經) 용풍(鄘風) 백주(柏舟) 시이다. 이 시는 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남편이 죽은 뒤에 재가(再嫁)에 불응하고 지은 시로, 미망인(未亡人)이 죽은 남편에 대해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읊은 내용이다.
♣ 백주지조[栢舟之操]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백주(栢舟)라는 시를 지어 맹세하고 절개를 지킨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가 절개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 백주편[栢舟篇]시경(詩經) 용풍(鄘風)의 편명이다. 위(衛) 나라 세자 공백(共伯)의 아내 공강(共姜)이 남편이 죽은 뒤에 친정 부모가 개가(改嫁)시키려 하자, 이 시를 지어 절개를 지킬 뜻을 다짐하였다는 데서 남편이 죽은 뒤에 개가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 백주풍[柏舟風]남편을 여의고 굳게 수절(守節)하는 것을 비유한 말. 백주는 시경(詩經) 용풍(鄘風)의 편명인데, 이 시는 위(衛) 나라 세자(世子) 공백(共伯)이 일찍 죽자, 그의 아내 공강(共姜)이 수절을 하고 사는데 그의 친정 모친이 억지로 그를 재가(再嫁)시키려 하므로, 그녀가 죽어도 재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노래한 것이다.
♣ 백중[伯仲]백중은 형제를 가리킨다.
♣ 백중구혹차[百中彀或差]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 “명사수인 예(羿)의 사정거리 안에서 노니는 자 가운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자는 적중되기에 꼭 알맞다고 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화살을 맞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遊於羿之彀中 中央者中地也 然而不中者命也]”라는 말이 있다.
♣ 백중숙계[伯仲叔季]백(佰)은 맞이, 중(仲)은 둘째, 숙(淑)은 셋째, 계(季)는 막내라는 뜻으로 네 형제의 차례를 일컫는 말.
♣ 백중지간[伯仲之間]둘의 우열에 차이가 없이 어금버금 맞서는 사이. 난형난제(難兄難弟)
♣ 백중지간[伯仲之間]백중이란 형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로 형제는 비슷하고 닮았기에 비교 평가하여 우열을 각리 수 없다는 뜻으로 서로 비슷비슷하여 낫고 못함이 없는 사이를 가리킴.
♣ 백중지간[伯仲之間]서로 어금버금하여 낫고 못함이 없는 사이. 백중지세(伯仲之勢)
♣ 백중지세[伯仲之勢]형제인 장남과 차남의 차이처럼 큰 차이가 없는 형세. 우열(優劣)의 차이가 없이 엇비슷함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에 형제의 순서를 백(伯)ㆍ중(仲)ㆍ숙(叔)ㆍ계(季)로 일컬었었다.
♣ 백지애매[白地曖昧]까닭 없이 죄를 받아 재앙을 입음.
♣ 백착가[白著歌]백착은 일정한 조세(租稅) 이외에 불법으로 더 징수하는 것을 이름. 옛날 고운(高雲)의 백착가에 “상원의 관리는 백성 벗기기만을 힘써서 강회의 백성들에겐 백착이 많다오[上元官吏務剝削 江淮之人多白著]”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창[伯昌]주의 문왕.
♣ 백창경[白彰卿]창경은 백광훈(白光勳)의 자(字)이다.
♣ 백척간두[百尺竿頭]백 척 길이의 대가지 위에 서 있는 상태.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 이름을 뜻한다.
♣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더욱 분발함을 뜻.
♣ 백척난간[百尺欄干]아주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
♣ 백척루[百尺樓]백척루(百尺樓)는 높은 누각으로, 전하여 높은 좌석에 비유한 것이다. 삼국(三國) 시대에 유표(劉表)가 유비(劉備)와 함께 천하의 인물을 논평할 적에 허범(許氾)이 말하기를 “일찍이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다 원룡(元龍)을 만나 보니, 그는 호해의 기백이 있는 선비라, 주객(主客)의 예의가 전혀 없어, 한참동안을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은 큰 와상으로 올라가 눕고 손님은 아래 와상에 눕게 하였다.”고 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그가 만약에 당신을 소인으로 간주했다면 자기는 백척루 위에 높이 눕고 당신은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니, 어찌 위와 아래 침대의 차이뿐이었겠는가.[如小人 欲臥百尺樓上 臥君於地 何但上下牀之間耶]”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三國志 卷七 陳登傳》
♣ 백첩[白疊]무명[木棉]을 가리킨다.
♣ 백첩[白帖]서명(書名)인 백공육첩(白孔六帖)의 준말로, 이는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육첩(六帖) 30권과 송(宋) 나라 공전(孔傳)의 속육첨(續六帖) 30권을 합해서 이를 1백 권으로 나누어 놓은 것인데, 곧 많은 분량의 서물(書物)을 의미한다.
♣ 백첩[白帖]인이 없는 첩을 말함. 상급관사에서 백첩으로 해당 관할 각사에다 영을 내리면 아전들이 이것을 이용하여 간사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금하게 되었음.
♣ 백첩건[白疊巾]무명으로 만든 두건
♣ 백초[白草]변새(邊塞)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를 가리킨다. 백초는 서역(西域)의 목초(牧草)로서 다 자라면 희게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참고로 당(唐) 나라 장적(張籍)의 시 양주사(涼州詞)에 “봉림관 물 하염없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백초와 황유는 예순 해를 넘겼도다.[鳳林關裏水東流 白草黃楡六十秋]”라는 구절이 있다.
♣ 백치[白雉]백치는 곧 흰꿩으로 상서로운 새[祥鳥]라 한다. 소왕이 백치를 구하러 남으로 갔다는 고사가 있다.
♣ 백치[百雉]성 위의 조그마한 담[女墻]을 치(雉)라 함. 《文選 鮑照蕪城賦》
♣ 백치금성[百雉金城]길이 1 백 장(丈), 방(方) 5 백 보(步) 규모의 견고한 성곽을 이름이니, 1치는 높이 1장(丈), 길이 3장이다. 일설에는 길이가 5장이라고도 한다. 《禮記 坊記》
♣ 백치성[百雉城]큰 성을 말한다. 1치(雉)는 높이가 1장(丈), 길이가 3장이라 한다.
♣ 백타[白墮]백타(白墮)는 진(晉) 나라 때 술을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유백타(劉白墮)를 이른 말이다.
♣ 백타전[白打錢]제기 놀이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는 돈을 말한 것인데, 제기 놀이를 백타라 한다.
♣ 백탁타[白橐駝]당(唐) 나라 때의 재상 가서한(哥舒翰)이 일찍이 청해(靑海)를 진무할 적에 서울과 거리가 워낙 멀었으므로, 항상 사자(使者)에게 흰 낙타를 주어 일을 주달(奏達)하게 한 데서 온 말인데, 흰 낙타는 하루에 5백 리씩을 달렸다고 한다.
♣ 백탑[白塔]요양(遼陽)의 구요동성(舊遼東城) 광우사(廣祐寺)에 있는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는 탑인데,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요동을 경략할 때 울지경덕(尉遲敬德)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 왕래하는 우리나라 사신들이 경유하던 곳이다.
♣ 백태부[白太傅]백거이(白居易)의 벼슬 칭호. 그가 소나무를 사랑하여 벗으로 불렀다.
♣ 백토공[白兎公]팽조(彭祖)의 제자라고 전해지는 선인(仙人)의 이름이다.
♣ 백판[白板]하얀 판자로 만든 쟁반을 말한다.
♣ 백팔[百八]다리가 여덟 개 달린 게를 말한다. 《淸異錄 黃大》
♣ 백팔반[百八盤]본디는 산길이 구불구불하여 험난함을 형용하는 말인데, 흔히 고달픈 인생길을 비유한다.
♣ 백팔번뇌[百八煩惱]108가지의 번뇌. 눈, 코, 입, 귀, 몸, 뜻의 육근(六根)에 각각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어 18가지가 되고 거기에 탐(貪), 무탐(無貪)이 있어 36가지가 되며 이것을 다시 현재, 과거, 미래에 풀면 108가지가 됨.
♣ 백팔음중지일심[百八音中只一心]불가(佛家)에서는 인간 세상의 뭇 번뇌를 모두 108가지로 정리하고서, 이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108번씩 염주를 돌리고 종을 치는 의례가 있다.
♣ 백패[白牌]생원이나 진사를 뽑는 과거시험인 소과(小科)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는 흰 종이의 증서.
♣ 백패[白牌]일을 알리기 위하여 미리 보내는 공문.
♣ 백편지서[百篇之序]한(漢) 나라 때 공안국(公安國)의 고문상서(古文尙書) 서(序)에 “상고의 글을 상서라 하는데, 백 편의 뜻을 세상에서 들을 수가 없다.[以其上古之書 謂之上書 百篇之義 世莫得聞]" 한 데서 온 말이다.
♣ 백포[白袍]거인(擧人)을 말함. 당(唐) 나라 때 선비들이 과거(科擧)를 볼 적에 모두 흰 도포를 입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 백하[白下]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서북에 있는 성(城) 이름. 이곳은 백석(白石)이 많고 지대가 험고(險固)하여 외적(外賊)을 방어하기에 매우 좋은 요새라 한다.
♣ 백하[柏下]묘지(墓地)를 가리킨다. 옛날 묘소에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백하골[柏下骨]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이른 말로, 두보(杜甫)의 촉상(蜀相) 시에 “승상의 사당을 어느 곳에서 찾을꼬, 금관성 밖에 잣나무가 늘어선 곳이로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栢森森]" 한 데서 온 말인 듯하다.
♣ 백학[白鶴]후한서(後漢書) 왕교전(王喬傳) 주(注)에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晉)이 피리를 잘 불었는데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과 숭산(崇山)에서 놀기도 하였다. 죽은 지 10년 뒤에 다시 그 산 위에 와서 환량(桓良)에게 ‘우리집 사람들에게 7월 7일 구씨산(緱氏山)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하라.’ 하였는데, 과연 그날 백학을 타고 왔다.” 하였다.
♣ 백학귀[白鶴歸]단구(丹丘)는 우인(羽人)이 죽지 않고 산다는 선경으로, 사람이 득도(得道)를 하면 몸에 모우(毛羽)가 돋아난다는 전설이,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遠游)’의 주(註)에 소개되어 있다.
♣ 백향산[白香山]향산(香山)은 백거이(白居易)의 별호. 당(唐) 나라 사람. 자(字)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섭유옹(囁嚅翁), 시호는 문(文). 한림(翰林)에 들어가 학사(學士)가 되고, 좌습유(左拾遺)로 옮겼다가 뒤에 죄를 받아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고, 뒤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함. 만년에 뜻을 시주(詩酒)에 붙여 취음선생이라 칭하고, 또 향산(香山)의 중 여만(如滿)과 향화사(香火社)를 맺어,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음. 문장과 시가 정교하였고, 특히 시는 평이한 것이 특색이었음.
♣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의 호로, 이경석은 인조 24년(1646)에 사은 겸 진주 정사로 청나라에 갔으며, 이때 김육은 부사로 갔다.
♣ 백호[白琥]백호는 호형(虎形)으로 된 백옥(白玉)으로 제사(祭祀)에 쓰는 옥임.
♣ 백호[白毫]불가(佛家) 용어로서 부처의 32상(相)의 하나. 부처의 미간(眉間)에 있어 빛을 발하여 무량세계(無量世界)를 비춘다는 흰 털을 말한다. 부처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 백호관[白虎館]궁전 이름. 후한 장제(後漢章帝) 때에 박사(博士)ㆍ의랑(議郞)ㆍ제생(諸生) 등을 여기에 모아 놓고 오경(五經)의 이동(異同)을 논의하여 바로잡게 했었다.
♣ 백호광[白毫光]석가 삼십이상(三十二相) 중의 하나인 호상(毫相)인데 발산하면 밝은 빛이 나온다 함.
♣ 백호담경긍수정[白虎談經肯數丁]한 나라 때에 백호전에서 불경을 강론하는데, 정봉(丁封)이라는 사람도 참례하였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 백호부[白虎符]옛날 임금이 외방의 장수에게 주던 호랑이 모양의 병부(兵符)로, 반쪽은 조정에 보관해 두었다.
♣ 백호수[白虎宿]28수(宿) 중 서쪽 일곱 별인 즉, 규(奎)ㆍ누(婁)ㆍ위(胃)ㆍ묘(昴)ㆍ필(畢)ㆍ자(觜)ㆍ삼(參)의 총칭, 백호는 범[虎]으로 나타내며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함.
♣ 백호준[白虎樽]백호의 형상을 새긴 술그릇을 말하는데, 이는 곧 언관(言官)이 거리낌없이 백호처럼 용맹하게 직언을 하도록 상징한 것이라 한다. 송서(宋書)에, “신정(新正) 원회(元會)에 백호준(白虎樽)을 전정(殿庭)에 설치하는데 뚜껑 위에다 백호를 만들었다. 만약 곧은 말을 아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중에 든 술을 먼저 마시게 한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맹렬하기 범과 같아서 겁냄이 없으란 뜻이다.” 하였다.
♣ 백호통[白虎通]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찬한 책으로 모든 고증의 근본이 된다.
♣ 백혼무[伯昏瞀]춘추 때 사람으로 백혼 무인(伯昏無人)이라고도 하는데 초(楚) 나라의 은사(隱士)로서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스승이었다. 《莊子 德充符 列禦寇》
♣ 백홍관일[白虹貫日]사기(史記) 추양전(鄒陽傳)에는 “옛날에 형가(荊軻)가 연(燕) 나라 태자 단(丹)의 의리를 사모하여 길을 떠났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白虹貫日] 일이 성사되지 않을 줄 알고 태자가 두려워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 백화[白花]끓여낸 차에 뜬 거품을 말함. 노동(盧仝)의 다가(茶歌)에 “碧雲引風吹不斷 白花浮光凝碗面"이라 하였음.
♣ 백화[白華]시경(詩經)의 편명. 효자의 결백을 노래한 것인데, 본시(本詩)는 없어졌다.
♣ 백화난만[百花爛漫]온갖 꽃이 활짝 피어 아름답게 흐드러짐.
♣ 백화제방[百花齊放]많은 꽃이 일제히 핀다는 뜻으로 갖가지의 예술이나 학문이 함께 활발하는 것을 비유함.
♣ 백화향[百和香]여러 가지 향(香)을 합해서 제조한 향을 말한다.
♣ 백후[伯厚]김육(金堉)의 자(字)이다.
♣ 백휴[伯休]후한(後漢) 한강(韓康)의 자(字)이다. 장안(長安)의 저잣거리에 몸을 숨기고 30년 동안 똑같은 값으로 약을 팔아 생활하였는데, 아녀자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진 것을 알고는 패릉(霸陵)의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조정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後漢書 卷113》
♣ 백희[百戱]갖가지 곡예, 잡기
♣ 번간몽[墦間夢]번간은 무덤 사이를 말한 것으로, 즉 남에게 주육(酒肉)이나 얻어먹는 것을 비유한 말임. 옛날 제(齊) 나라의 한 천부(賤夫)가 날마다 동곽(東郭)에 나가 무덤에 제사지낸 주육들을 배가 부르게 얻어먹고 다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下》
♣ 번경리간[煩鏡裡看]두보(杜甫)의 시 ‘강상(江上)’에 “훈업 세울 일 생각하며 자꾸만 거울보고, 진퇴(進退) 결정하느라 홀로 누대에 기대섰네.[勳業頻看鏡 行藏獨倚樓]”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5》
♣ 번계[翻階]사조(謝朓)의 ‘직중서성(直中書省)’이라는 시에 “붉은 작약 섬돌 아래 펄럭이고, 푸른 이끼는 돌층계 따라 올라오네.[紅藥當階飜 蒼苔依砌上]”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 번계약[翻階藥]사현휘(謝玄暉)가 중서성(中書省)에 입직(入直)하여 지은 시에, “붉은 작약은 뜰에 펄럭인다[紅藥當階飜].”라는 구(句)가 있다.
♣ 번롱[樊籠]짐승이 갇혀 있는 목책(木柵)과 새가 갇혀 있는 동우리를 말한 것이다.
♣ 번문[番文]한자 이외의 소수 민족이 쓰는 문자를 말한다.
♣ 번문욕례[繁文縟禮]번거롭고 까닭이 많으며, 형식에 치우친 예문(禮文).
♣ 번번[幡幡]경솔한 모양, 박 잎이 나부끼는 모양
♣ 번번[旛旛]깃발이 펄럭이는 모양
♣ 번복[飜覆]변하는 세태(世態)를 말한 것이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다시 젖혀 비 내리네[翻手作雲覆手雨]”라는 표현이 있다.
♣ 번복수[翻覆手]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으면 구름 되고 손 엎으면 비가 된다[翻手作雲覆手雨]” 한 데서 온 말로, 세인들의 교정(交情)의 변화 무상함을 비유한 말이다. 《杜少陵集 卷二》
♣ 번상[樊上]지금의 서울 번동(樊洞)인데 권돈인(權敦仁)의 별장임.
♣ 번상[飜觴]추양(鄒陽)의 주부(酒賦)에, “술을 실컷 먹고 미쳐서 사발을 쏟고 잔을 뒤엎는다.” 하였다.
♣ 번상격양림[繁商激楊林]상성(商聲)은 오음(五音) 가운데 하나로 음조가 굳세고 경쾌한 것으로서 사시(四時)로 말하면 가을에 해당하고, 양림(楊林)은 버들 숲으로서 봄에 해당하니, 즉 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뜻하는데, 전하여 사람도 젊은 시절이 다 지나가고 늙어짐을 비유한 말이다.
♣ 번성[繁聲]음조(音調)가 복잡한 음악을 이른 말이다.
♣ 번소[樊素]중국 중당(中唐)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첩(侍妾)으로, 소만은 춤을 잘 추고 번소는 노래를 잘했었는데 백거이가 늙고 병들었을 때 빚에 의하여 부득이 번소를 놓아주게 되어 서로 이별을 매우 아쉬워했다 한다. 백거이의 작품에 “앵두 같은 번소의 입이요 버들 같은 소만의 허리로다.”라는 시가 있다.
♣ 번수[樊須]공자(孔子)의 제자 이름이다. 언젠가 공자에게 농사일을 물어보자, 공자가 자기는 늙은 농사꾼보다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論語 子路》
♣ 번수작상로[翻手作霜露]권세와 위엄이 대단함을 비유한 말이다.
♣ 번수작운우[翻手作雲雨]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을 짓고 손 엎어 비를 짓는다[翻手作雲覆手雨].” 한 데서 온 말로, 세인(世人)들의 변화무상한 교정(交情)을 비유한 말이다. 《杜甫詩集 卷二》
♣ 번승[幡勝]입춘일(立春日)에 머리에 꽂는 채색(彩色) 조화(造花)를 가리킨다.
♣ 번승완불사[樊蠅]시경(詩經) 소아(小雅) 청승(靑蠅)에 “오가는 쉬파리 무엇을 찾는지 울타리에 많이들 붙어 있다.” 했는데, 이욕에 휩쓸리는 소인들을 비유한 시이다.
♣ 번안[飜案]옛사람의 시문(詩文)을 원안으로 하여 이리저리 고침.
♣ 번약[繁弱]번약은 옛날 하후씨(夏后氏)가 썼다는 명궁(名弓)의 이름이다.
♣ 번여[煩拏]어지럽다. 번거롭다.
♣ 번여[璠璵]노(魯) 나라의 보옥(寶玉)으로, 일찍이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아름답도다, 번여여! 멀리서 바라보면 광휘가 찬란하고, 가까이서 보면 곱기도 하구나.” 하였다. 보통 미덕(美德)을 지닌 현재(賢才)를 지칭한다.
♣ 번연삼빙[幡然三聘]이윤이 처음에는 출세할 생각이 없었다가 은(殷)의 임금 탕(湯)이 세 번이나 사자를 보내어 초빙한즉 그는 맘을 돌려서, “나는 장차 이 백성들을 요순(堯舜)의 백성으로 만들겠다.” 하고 나왔다.
♣ 번영[繁纓]번(繁)은 말의 배대끈이고 영(纓)은 굴레인데, 제후의 말 장식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 번옹해사[樊翁解事]번옹은 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을 지칭한 말로 그의 호가 번천(樊川)이다. 그가 양주(楊州)에서 회남(淮南) 절도사우승유(牛僧孺)의 막료로 있으면서 몰래 기루(妓樓)를 출입할 때 지은 견회(遣懷)란 시에, “십 년에 한 번 양주 꿈을 깨니, 청루에서 박정하다는 이름만 실컷 얻었네.[十年一覺楊州夢 嬴得靑樓薄倖名]”하였다.
♣ 번운복우[飜雲覆雨]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을 만들고 손 엎어 비를 만든다[飜手作雲覆手雨]” 한 데서 온 말로, 쉽게 잘 변하는 세상 인정을 비유한 말이다.
♣ 번원[煩寃]귀찮음, 우울함. 회오리 바람이 부는 모양
♣ 번유[藩維]번국(藩國). 나라와 조정을 수호하는 사람에 비유한 말.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개인(价人)은 울타리며 태사(太師)는 담장이다.” 하였고, 대아 판(板)에 “덕이 많은 사람은 번병이다.” 하였다
♣ 번음[繁淫]번잡하고 음탕한 악(樂)을 이름인데, 즉 정위(鄭衛)의 속악을 의미한 것임.
♣ 번절[藩節]’藩’은 ‘藩屛’의 뜻으로 왕성(王城)을 옹위하는 제후국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나라의 도백(道伯)에 해당함.
♣ 번중[樊重]후한(後漢) 때 사람. 온후한 천성에 법도가 있었다. 《後漢書 樊重傳》
♣ 번지[樊遲]공자 제자이다. 번지가 공자에게 벼를 심는 방법과 채마밭 가꾸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그것이라면 내가 그 방면에 늙은 사람만 못하다.”라고 대답하고, 이어 그가 예를 힘쓰지 않고 세쇄한 일에 힘쓰는 것을 나무랐었다. 《論語 子路》
♣ 번지모경운[樊遲慕耕耘]공자의 제자 번지가 농사일을 배우고 싶어하자 공자가 “나는 노련한 농사꾼보다 못하다.”고 한 내용이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실려 있다.
♣ 번질[反作]조선후기 환곡(還穀)의 법이 문란해지자 아전들이 곡식은 나누어 주지도 않고 창고에 그냥 두고서 농간을 부려 이득을 취하는 것.
♣ 번천[樊川]번천은 당나라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그는 인물 잘 생기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번천집(樊川集) 권2의 독작(獨酌) 시에 ‘옹로개주항(擁爐開酒缸)’이라는 구절이 있다.
♣ 번쾌[樊噲]한(漢)나라 패현(沛縣) 사람으로 유방(劉邦)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많이 세웠다. 홍문(鴻門)의 모임에서 항우(項羽)가 유방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몄을 때 문지기의 저지를 뚫고 들어가 항우를 맹렬히 꾸짖고 유방을 탈출시켰다. 《史記 卷九十四 樊噲傳》
♣ 번쾌용순옹[樊噲龍楯擁]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홍문에서 잔치를 할 때 항우가 유방을 죽이려고 하자, 번쾌(樊噲)가 칼과 방패를 들고 춤을 추면서 막은 고사를 말한다. 사기(史記) 제7권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유방이 진의 서울인 함양(咸陽)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파견하여 함곡관(函谷關)을 지켰는데, 얼마 뒤에 항우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여 와서 홍문(鴻門)에 주둔하였다.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이 화해시키자 유방이 직접 홍문으로 와서 항우를 만나보았다. 이에 항우와 유방이 술을 마셨는데, 연회 도중에 범증(范增)이 항장(項莊)에게 명하여 유방을 죽이려고 하자, 항백이 일어나서 칼춤을 추면서 몸으로 유방을 가렸다. 최후에는 번쾌가 칼을 들고 방패를 잡고서 뛰어들어가자, 유방이 그 틈에 탈출하였다.” 하였다.
♣ 번풍[番風]이십사번 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을 말함.
♣ 번형[薠蘅]향초(香草)
♣ 번호[藩胡]북쪽 변경에 사는 오랑캐들을 말한다. 조선시대 때 함경북도의 오랑캐로서 두만강 건너 변보(邊堡) 가까이 살며 조선과 무역을 하고 공물을 바쳤음. 백두산 북쪽에 살면서 조선에 친부(親附)하지 않은 오랑캐인 ‘심처호’가 변방에 침입하려 할 때면 번호가 즉시 조선에 연락하거나 이들을 막거나 구원을 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조선초기부터 번호들을 우대해 왔다. 그런데 명종ㆍ선조 연간부터 변방의 방어가 점차 소홀해져 번호가 차츰 강성해지는데도 이들을 제대로 무마하지 못하게 되자 심처호와 함께 자주 조선에 반기를 들었음.
♣ 번화[繁華]성대하고 화려함.
♣ 번후[樊侯]주(周)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인 중산보(仲山甫)의 작호(爵號). 나무심은 일은 미상.
♣ 벌가[伐柯]시경(詩經) 빈풍 벌가(伐柯)에 “도끼자루를 찍음이여 그 법칙이 어이 멀다 하리.[伐柯伐柯 其則不遠]"하였는데, 즉 그 자르는 나무의 길이는 손에 쥔 도끼 자루를 표준으로 삼아야 하므로, 그 표준이 바로 눈 앞에 있음을 이른 말로서, 곧 도(道)가 멀리 있지 않음을 뜻한 것이다.
♣ 벌단[伐檀]시경(詩經) 위풍(魏風)의 편명(篇名)인데, 조정의 관원이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국록(國祿)만 축내면서 현자(賢者)의 벼슬길을 막고 있는 것을 풍자한 시이다.
♣ 벌단편[伐檀篇]시경(詩經) 위풍(魏風)의 편명으로, 탐학스러운 자가 시위소찬(尸位素餐)하고 어진 자가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것을 풍자한 시인데, 그 시에 “저 군자여, 소찬하지 않는구나.[彼君子兮 不素餐兮]”하였다.
♣ 벌목[伐木]벌목은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서로 벗을 찾는 새들의 울음소리로 흥을 일으켜 사람 사이의 우정을 노래하고 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서(伐木序)에 의하면, 벌목편은 친구간에 연락(燕樂)하는 노래로서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서로 친목하며 저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 벌목구우[伐木求友]빈객을 초청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쩡쩡 나무를 찍거늘, 새가 앵앵 울도다. ……저 새를 보니, 새도 벗을 부르는데, 더구나 우리 사람들이 벗을 찾지 않을쏜가.[伐木丁丁 鳥鳴嚶嚶……相彼鳥矣 猶求友聲 矧伊人矣 不求友生]" 한 데서 온 말이다.
♣ 벌목시[伐木詩]친척과 벗들을 모아놓고 연회할 적에 부르는 시임. 친구에 대한 그리운 생각.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무를 벰이여! 새들이 우는구나. 새들이 움이여! 그 벗을 부르는 소리구나[伐木丁丁 鳥鳴嚶嚶 嚶其鳴矣求其友聲].” 하였음.
♣ 벌목장[伐木章]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친구간의 우정을 읊은 시이다.
♣ 벌목편[伐木篇]친구간의 우정을 노래한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그중에 “저 새들을 보게나, 저들도 벗을 찾지 않나. 하물며 사람인 우리들이 벗을 찾지 않을손가.[相彼鳥矣 猶求友聲 伊人矣 不求友生]”라는 표현이 있다.
♣ 벌무[伐武]武勇을 뽐냄.
♣ 벌봉전[罰捧(俸)錢]관인이 지은 죄가 파직될 정도가 아니어서 송서(送西)하는 자에게 그의 녹을 죄과의 경중에 따라 차등있게 징수하는 것으로, 김안로가 건의하여 중종30년 10월에 법으로 제정됨.
♣ 벌성지부[伐性之斧]생명 해치는 도끼. 특히 여색(女色)을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 벌수[伐樹]벌수의 화는, 공자가 제자들과 나무 밑에서 예(禮)를 익히고 있을 때, 송(宋) 나라 환퇴(桓魋)가 나무를 뽑아 공자를 해치려고 했던 것을 말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 벌제위명[伐齊爲名]실속은 없는 데도 명분만을 위해 제(齊)나라를 친다. 뭔가를 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을 일컬는 말로 쓰인다.
♣ 벌주[罰籌]벌로 마시는 술잔의 숫자를 말한 것으로, 즉 벌주(罰酒)를 의미한다.
♣ 범[凡]범나라. 창범(刱凡)과 같다.
♣ 범간[帆竿]물가에 세워둔 배의 돛대.
♣ 범경[泛梗]물에 뜬 나무 장승[木梗]. 즉,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을 말한다. 전국(戰國) 때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이 진(秦) 나라에 가려 하자 문객(門客)이 들어와 “제가 올 때 치수(淄水)를 지나오다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와 목경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목경은 흙허수아비에게 ‘자네는 원래 흙으로 허수아비가 되었으니, 큰 비가 와 홍수가 나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하자 흙허수아비는 ‘나는 허물어지면 나의 참모습을 되찾는다. 그러나 자네는 동원(東園)의 복숭아 나무로 목경이 되었으니, 장마로 홍수가 나면 반드시 자네는 끝없이 떠내려 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戰國策 齊 第三》
♣ 범공오매[范公烏昧]범공은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키고 오매초(烏昧草)는 풀 이름이다. 송 나라 인종(仁宗) 명도(明道) 2년에 범중엄이 “굶주린 백성들 가운데는 오매초를 먹는 자가 있으니, 그 풀을 뜯어다가 진어(進御)하소서. 그리고 이를 육궁(六宮)의 귀척들에게 보이어 그들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경계시키소서.” 하였다. 《續資治通鑑 宋仁宗 明道 2年》
♣ 범공징청[范公澄淸]후한(後漢)의 범방(范滂). 그는 지방 수병들의 탐오(貪汚)를 적발하는 임명을 받고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며 개연(慨然)히 천하를 맑힐 뜻이 있었다.
♣ 범관[范寬]송(宋) 나라 때의 화가이다.
♣ 범관설보[范寬雪譜]범관은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했다. 그의 저서 중에 설보(雪譜)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곧 두보(杜甫)의 열(熱) 시에 “궁전 북쪽의 쌓아둔 눈에 바람 부는 문이 서늘하게 열렸음을 상상하노라.[想見陰宮雪 風門颯沓開]" 한 고사에 비유하여, 설보만 보아도 서늘함을 느낄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杜詩批解 卷十七》
♣ 범국[泛菊]음력 9월 9일 즉 중양절(重陽節)에 국화를 술잔에 띄워 마시는 잔치를 말한다.
♣ 범국진[泛菊辰]음력 9월 9일, 즉 중양절(重陽節)에 국화를 술잔에 띄워 마시는 잔치가 있으므로 이른 말이다. 범국회(泛菊會).
♣ 범노[范老]범로는 소범 노자(小范老子)의 준말로,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그가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있다가 섬서 경략사(陝西經略使)로 나가 수 년 동안 변방을 지킬 때에, 강족(羌族)이 그를 존경하여 용도 노자(龍圖老子) 혹은 소범 노자(小范老子)라고 부르면서, “그의 흉중에 수만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고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했던 고사가 있다.
♣ 범도화[泛桃花]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고사(故事)를 연상한 것인데, “어부(漁父)가 냇물에 복사꽃이 떠 오는 것을 보고 물을 따라 올라가서 선경(仙境)을 발견하였다.” 한다.
♣ 범두선[犯斗仙]한(漢)나라 장건(張鶱)이 대하(大夏)에 사자로 갈 때, 떼[槎]를 타고 하(河)의 근원까지 갔는데, 전설에 그가 은하수에 올라 직녀(織女)를 만나서 지기석(支機石)을 받아 엄군평(嚴君平)에게 보였더니, 그가 말하되, “아무날 객성(客星)이 두우성(斗牛星)을 범하더니 그대가 은하에 올랐었군.” 했다 한다.
♣ 범람[氾濫]물이 흘러 넘친다. 여기서는 뜬구름이 뭉게뭉게 떠가는 모양을 말한다.
♣ 범래무[范萊蕪]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범염(范冉)이 내무(萊蕪)의 장관으로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고, 그 뒤 누차 태위부(太尉府)와 시어(侍御)로 임명받았어도 나아가지 않은 채, 적빈(赤貧)을 감수하며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시루 속에 먼지 나는 범사운이요, 솥 속에 물고기 헤엄치는 범래무로다.[甑中生塵范史雲 釜中生魚范萊蕪]”라고 노래하였다 한다. 사운(史雲)은 범염의 자(字)이다. 《後漢書 卷111》
♣ 범려[范蠡]춘추 시대 월(越)의 대부로 자는 소백(少伯). 월왕 구천(越王句踐)을 도와 적국인 오(吳)를 멸망시키기 위한 계획으로 서시(西施)라는 미인을 오왕 부차(吳王夫差)에게 바치니, 부차는 서시에게 고혹되어 정치를 돌보지 않다가 끝내 월에게 망하였다. 공을 이룬 다음 “큰 명예 밑에는 오래 있기 어렵다.” 하고는 오궁(吳宮)에 있던 서시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배를 띄워 제(齊) 나라에 가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변성명하고 많은 돈을 벌었다. 제 나라에서는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승상(丞相)을 삼으려고 했지만, 그는 재물을 흩어버리고 다시 제 나라를 떠나 도(陶)란 곳에 머물러 살며,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는 도에서도 많은 돈을 벌어 큰 부자로 살다가 그 곳에서 천명으로 죽었다 한다. 《史記 范蠡傳》
♣ 범려주[范蠡舟]범려(范蠡)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인데, 일찍이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서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월(越) 나라를 떠나 미인 서시(西施)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떠 놀았다 한다.
♣ 범련[泛蓮]훌륭한 막료(幕僚)로 등용됨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유고지(庾杲之)가 재상 왕검(王儉)의 막료가 되었을 적에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보낸 편지에 “성부(盛府)의 원료(元僚)는 실로 잘 가려야 할 자리인데, 유경행(庾景行)은 마치 푸른 물에 떠서 연꽃에 의지한 것[泛綠水依芙蓉]과 같으니, 어쩌면 그리도 화려하단 말입니까.”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庾杲之傳》
♣ 범련인[泛蓮人]상부(相府)의 막료(幕僚)를 이른 말.
♣ 범로[范老]송(宋)의 범중엄(范仲淹)을 말한 것. 중엄이 재주가 높고 뜻이 원대하여 늘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삼아왔으며, 이미 현달한 뒤에는 더더욱 선을 좋아하고 베풀기도 좋아하여 의전(義田) 제도를 만들어 두고 주위의 겨레붙이들을 돌보아 모두 요부하게 만들었음. 《宋史 卷314》
♣ 범로요주[范老饒州]범로는 북송(北宋) 시대의 범중엄(范仲淹)을 높여 이른 말. 범중엄이 일찍이 재상 여이간(呂夷簡)과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여이간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나 지요주(知饒州)로 좌천되었었다. 《宋史 卷三百十四》
♣ 범로흉리갑[范老胸裡甲]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이 토벌에 나섰을 때, 원호(元昊)의 반란군들이 “뱃속에 수만의 갑병이 들어 있다.[腹中自有數萬甲兵]”고 하면서 무서워했다고 한다. 《名臣傳 范仲淹》
♣ 범망[凡亡]춘추 시대에 범 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였는데, 초왕(楚王)과 범군(凡君)이 서로 만난 자리에서 초왕의 신하가 ‘범 나라는 망한다.’는 말을 세 번 되풀이하자, 범군이 말하기를 “범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의 존재는 잃게 할 수 없다. 범 나라가 망하여도 나의 존재를 잃게 할 수 없고 보면, 초 나라의 존재함도 존재함이 되기에 부족하다. 그렇다면 범 나라는 애당초 망한 것이 아니요, 초 나라도 애당초 존재한 것이 아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田子方》
♣ 범방비[范滂轡]난세(亂世)에 정치를 혁신하여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당고열전(黨錮列傳) 범방(范滂)에, “이때 기주(冀州)에 기근이 들어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범방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안찰하게 되었다. 범방은 수레에 올라타 말고삐를 고쳐 잡고는 개연히 천하를 맑게 할 뜻을 품었다.” 하였다.
♣ 범범[氾氾]물에 둥둥 뜨는 모양. 널리 대중을 사랑하는 모양
♣ 범범[汎汎]물에 표류하는 모양, 물이 넓게 차란차란 흐르는 모양
♣ 범범[泛泛]표류하는 모양, 가득 차는 모양, 들떠서 침착하지 못한 모양
♣ 범범[渢渢]중용의 소리, 알맞은 소리
♣ 범부무곤[范婦無褌]범씨는 진(晉) 나라의 은자 범선(范宣)을 가리킨다. 그는 집이 무척 가난하였는데, 한번은 예장 태수(豫章太守)가 많은 비단을 보내 주었으나 하나도 받지 않았다. 태수가 두 길쯤 되는 비단을 끊어주면서 “어찌 부인으로 하여금 속옷이 없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자 그는 그제야 웃으며 받았다.
♣ 범부생진[范釜生塵]범염(范冉)의 솥 안에 먼지만 쌓이다.
♣ 범비[范轡]후한(後漢) 때 지사(志士) 범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로 기주(冀州)에 내려갈 적에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는, 흐린 세상을 한번 징청(澄淸)시키려는 개연(慨然)한 뜻을 두었다.
♣ 범석호[范石湖]범성대(范成大). 석호는 호(號). 송(宋) 나라 오현(吳縣) 사람. 문장으로 유명하고 34권의 석호집(石湖集)이 전해짐. 임금이 ‘석호(石湖)’ 두 글자를 친필로 써주니,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가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 범성대[范成大]송(宋) 나라 시인. 자는 치능(致能), 호는 석호 거사(石湖居士). 시에 능하여 양만리(楊萬里)와 병칭됨. 저서에 석호집(石湖集)ㆍ오선록(吳船錄)이 있음.
♣ 범수[范睢]전국 시대 위(衛) 나라 사람으로 진 소왕(秦昭王)을 섬겨 승상(丞相)이 되고, 응후(應侯)의 봉작(封爵)까지 받았다가, 자기와 가까운 왕계(王稽)가 죄를 져 죽음을 당하자, 채택(蔡澤)을 추천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고 벼슬을 그만두었음.
♣ 범숙[范叔]전국 시대의 위(魏) 나라 사람 범수(范睢)를 이른다. 범수는 수가(須賈)의 고자질로 매를 맞고 진(秦)으로 망명하여 뒤에 진의 재상이 되었다. 뒤에 수가가 진에 오자 범수는 복수할 마음을 갖고 일부러 한미한 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수가를 만났는데, 수가는 그의 한미한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두꺼운 옷 한 벌을 그에게 주었고, 그로 인하여 범수도 수가를 달리 대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 범숙한편고[范叔寒偏苦]전국 시대 위(魏) 나라 범수(范睢)의 자(字)가 숙(叔)이다. 그는 중대부(中大夫)수가(須賈)를 섬기다가 진(秦) 나라로 도망하여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고치고 재상이 되었다. 그 후 수가가 위 나라 사신(使臣)으로 진 나라에 갔는데, 범수가 낡은 옷을 입은 누추한 모습으로 찾아가자 수가가 동정하여, “범숙은 늘 추위에 떠는 것이 이와 같은가.” 하면서 제포(綈袍)를 주었다 한다. 《史記 范睢傳》
♣ 범십삼[范十三]범 십삼은 범씨(范氏)로서 자기 배항(輩行) 가운데 13번 째에 해당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범씨당감[范氏唐鑑]당감은 송(宋)의 범조우(范祖禹)가 찬한 것으로 모두 24권인데, 당 고조(唐高祖)에서부터 소제(昭帝)ㆍ선제(宣帝)까지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한 다음 아울러 평론을 가하였다.
♣ 범씨주[范氏舟]송(宋) 나라의 명상(名相)인 범순인(范純仁)을 가리킨다. 범순인은 범중엄(范仲淹)의 아들로, 자가 요부(堯夫)인데, 일찍이 기근이 들자 위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상평창(常平倉)의 곡식을 풀어 배로 운반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314 范純仁列傳》
♣ 범양이가[范楊二家]범양 이가는 송(宋) 나라 때에 특히 시문(詩文)으로 명성이 높았던 범성대(范成大)와 양만리(楊萬里)를 합칭한 말이다.
♣ 범염[范冉]후한(後漢) 때 지사(志士)로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시루에서는 티끌이 일고 솥에서는 물고기가 산다는 노래까지 지었다.
♣ 범영시[泛潁詩]소동파(蘇東坡)가 조정에서 쫓겨나 영수(潁水)에서 뱃놀이하면서 지은 시로, 그의 시집 34권에 ‘범영(泛潁)’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 범옹[范翁]범옹은 이수준(李壽俊)의 별호임. 이제신(李濟臣)의 아들로 자는 태징(台徵), 호는 용계(龍溪)ㆍ지범재(志範齋)이며 성혼의 문인이다. 이수준은 동지사(冬至使)로 명 나라에 다녀오던 중 3월에 봉산(鳳山)에서 죽었는데, 이때 48세였다.
♣ 범옹[泛翁]신숙주(申叔舟)의 호이다. 신숙주는 세종 24년(1442)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으며, 이때 본 것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하였다.
♣ 범왕가[梵王家]불교 사찰을 말한다.
♣ 범왕궁[梵王宮]사바 세계를 지키는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대범천왕(大梵天王)의 궁전인데, 여기서는 절을 뜻한다.
♣ 범장소거[范張素車]소거는 흰 천을 씌운 수레이며, 범장(范張)은 후한(後漢) 때 사람인 범식(范式)과 장소(張劭)이다. 범식과 장소는 친하게 지냈는데, 장소가 죽어 장사 지낼 때 범식이 미처 도착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발인하여 폄관(窆棺)하게 되었는데, 상구가 움직이려 하지 않다가 범식이 도착하여 상여 끈을 잡고서 끌자, 이에 상구가 움직여서 장사 지낼 수가 있었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式》
♣ 범조[凡鳥]봉(鳳) 자를 분해하면 범상한 새[凡鳥]가 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서로 친하여 언제나 생각만 나면 천리라도 달려가곤 했었다. 어느 때 여안이 혜강을 찾았으나 집에 있지 않고, 그 아들 희(喜)가 나와 맞이하자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문 위에다 봉(鳳) 자를 써놓고 갔는데 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좋아했다.” 하였다.
봉이 아니라 범조, 곧 보통 새라는 뜻으로, 혜희를 폄하하는 말인데 친구 방문의 고사로 흔히 쓰인다.
♣ 범존초망[凡存楚亡]옛날 강대국인 초(楚) 나라 임금이 약소국인 범(凡) 나라 임금과 함께 앉아있을 때, 초왕의 신하가 “범 나라는 망한다.”는 말을 세 번이나 하므로, 범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범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의 존재를 잃게 하지는 못한다. 범 나라가 망하여도 나의 존재를 잃게 하지 못한다면, 초 나라의 존재하는 것 또한 계속 보존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렇게 본다면 범 나라가 애당초 망한 것도 아니요, 초 나라가 애당초 존재한 것도 아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즉 외형적인 존망(存亡)은 진아(眞我)와는 관계가 없음을 뜻한다. 《莊子 田子方》
♣ 범중엄[范仲淹]한기와 쌍벽을 이루었던 송조의 명신. 자(字)는 희문(希文). 《宋史 卷三百十四》
♣ 범지화[梵志華]불법을 구할 뜻을 지닌 자에게 설법하는 것.
♣ 범채[范蔡]범수(范睢)와 채택(蔡澤)으로 전국시대 인물들이다.
♣ 범초[凡楚]춘추 시대 강대국인 초 나라와 그의 속국인 범 나라를 합칭한 말.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초왕(楚王)이 범군(凡君)과 함께 앉았을 때 초왕의 좌우에서 ‘범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자, 범군이 말하기를 ‘우리 범 나라가 망한다 해도 내 자신의 존재를 잃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초 나라가 존재하는 것도 결국 존재하는 것이 되지 못하니, 이것으로 본다면 범 나라가 애당초 망한 것이 아니요 초 나라도 애당초 존재한 것이 아니다.’고 했다.” 한 데서 온 말로, 원 뜻은 즉 존망(存亡)의 진리를 판정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강자와 약자, 또는 나아가서 온 세상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 범초개호래[凡楚皆蒿萊]춘추 시대 강대국인 초(楚) 나라 임금과 약소국인 범(凡) 나라 임금이 사생존망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즉 강자와 약자의 뜻으로 쓴 것이다. 《莊子 田子方》
♣ 범초존망[凡楚存亡]초왕(楚王)과 범군(凡君)이 마주 앉아 사생 존망의 진위(眞僞)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데서 온 말인데, 자세한 것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나타나 있다.
♣ 범택부가[泛宅浮家]배를 집으로 삼아 물 위를 떠돌며 사는 생활을 말한다. 장지화가 안진경(顔眞卿)에게 “나의 소원은 배를 집 삼아 물 위에 살면서 소계(苕溪)와 삽계(霅溪)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願爲浮家泛宅 往來苕霅間]”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新唐書 隱逸傳 張志和》
♣ 범파정[泛波亭]강원도 홍천현(洪川縣) 동남쪽의 남천(南川)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 범패[梵唄]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 양고승전(梁高僧傳) 경사편론(經師篇論)에, “天竺方俗 凡歌詠法言 皆稱爲唄 至於此土 詠經則稱爲轉讀 歌讚則號爲梵唄”라고 보임.
♣ 범포한[范袍寒]전국 때 위(魏)의 범수(范睢 范叔)가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고자질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쫓겨나서 진(秦)에 간 뒤에 상국(相國)이 되었는데, 그때에 수가가 진(秦)에 사신(使臣)으로 왔다. 범수는 남루한 옷으로 수가를 찾았다. 그가 보고 가엾게 여겨, “범수 몹시도 춥겠구나.” 하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 도포[綈袍]를 벗어 주었다. 《史記 范睢傳》
♣ 범한[范韓]송 나라 때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가 변방에 나가 서하(西夏)를 막으니 군중에서 그들을 칭송하여 노래하기를, “군중에 한 범이 있으니, 서적이 듣고 놀래어 간담이 깨어지네. 군중에 한 한이 있으니 서적이 듣고 마음과 간담이 서늘하리.[軍中有一 范西賦聞之驚破謄軍中有一韓 四賦聞之心膽寒]”하였다.
♣ 범희문[范希文]범희문(范希文)은 송(宋) 나라의 명상(名相)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킨다. 희문은 그의 자이다. 범중엄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옛날 어진 사람은 사물(事物)로써 기뻐하지 않고 자신의 일로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 있을 적에는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江湖)의 먼 곳에 있을 적에는 임금을 걱정하는 것이라, 조정에 나아가도 근심이요 물러나와도 근심이니, 그렇다면 어느 때에 즐거울 것인가? 그것은 반드시 ‘천하의 근심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남보다 뒤에 즐긴다.’는 것이다.”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법가[法家]관자(管子)⋅한비자(韓非子)⋅상앙(商鞅) 등.
♣ 법가[法駕]어가(御駕)의 이칭. 임금이 거둥할 때 타는 수레로, 문묘(文廟)ㆍ단향(壇享)ㆍ전시(殿試) 등에 나아갈 때 사용한다.
♣ 법국은사[法局隱士]은사이기는 하지만 조정에서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은사를 말함. 법국은 ‘뻐꾹’이라는 말인데,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적에 술래가 오래도록 못찾으면 ‘뻐꾹’하는 소리를 내어 빨리 자기를 찾으러 오게 하는 놀이를 빗대어 한 말.
♣ 법궁[法宮]경복궁의 별칭(別稱).
♣ 법라[法螺]불교에서 수험도(修驗道)에 쓰는 일종의 악기. 사미라(梭尾螺)의 껍데기에 금속(金屬)으로 만든 취구(吹口)를 달았는데 경행(經行)ㆍ법회(法會) 때에 사용한다.
♣ 법랍[法臘]불교에서는 중이 된 뒤 연수(年數)를 헤아려서 법랍(法臘)이 몇 살이라고 한다.
♣ 법뢰[法雷]불법(佛法)을 우레에 비유한 말.
♣ 법뢰음[法雷音]여기선 범패(梵唄), 옥명(玉明)이 취라(吹螺)에 능(能)했으므로 나화상(螺和尙)의 별명이다. 《金馹孫, 釣賢堂記》
♣ 법륜[法輪]부처의 교법(敎法)을 이름. 불법(佛法)의 힘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산악(山岳)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보륜(寶輪)의 힘에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수레바퀴가 부딪치는 것을 갈아서 부수듯 불법이 모든 번뇌(煩惱)를 굴려서 부순다는 뜻인데, 대개 설법(說法)하는 것을 법륜을 굴린다고 말한다.
♣ 법문[法門]원래 불가(佛家)의 용어인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준말인데,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독보적인 경지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으로 되었다.
♣ 법부[法部]법곡(法曲). 당(唐) 나라 때 사원(寺院)에서 연주하던 악곡(樂曲)의 이름. 법곡이 당(唐) 나라에서 일어났는데, 당 명황(唐明皇)은 법부곡을 몹시 좋아하여 좌부기(坐部伎) 자제(子弟) 3백 인을 선발하여 이원(梨園)에서 법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 곡 중에 파진악(破陣樂)ㆍ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ㆍ장생악(長生樂)ㆍ적백도리화(赤白桃李花)가 있다. 《唐書 禮樂志》
♣ 법부주함소[法部奏咸韶]궁중의 정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함지(咸池)는 요(堯) 임금의 음악이고 소호(韶頀)는 순(舜) 임금의 음악이다. 법부는 원래 법곡(法曲)으로서 악곡(樂曲)의 이름인데, 여기에서는 음악을 담당하는 부서(部署)의 뜻으로 쓰였다.
♣ 법부현[法部絃]아름다운 음악을 말한다. 법부는 당 현종(唐玄宗) 때의 이원성(梨園省)을 말한다. 현종은 법곡(法曲)을 무척 좋아하여 이원성을 두어 전적으로 법곡을 익히게 하였다.
♣ 법사[法事]법사는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공양(供養) 등의 행사를 말한다.
♣ 법삼장[法三章]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통일을 한 후 제정한 삼장(三章)의 법률. 진(秦)나라의 가혹했던 법률을 모두 폐지해버리고, 살인, 상해, 절도에 대해서만 지극히 간략하게 삼장으로 제정하여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 법성퇴사[法星退舍]법성은 곧 형혹성(熒惑星)을 가리키는데 이 별이 형법을 맡았다 하여 법성이라 이른다. 이 별이 나타나면 재앙이 생긴다고 하는데, 춘추 시대 송 경공(宋景公) 때에 형혹성이 나타나자 경공이 자위(子韋)에게 물으니, 자위가 “재앙이 임금에게 내렸습니다. 그러나 재상에게로 옮길 수는 있습니다.” 하였다. 경공이 “재상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니 안 된다.” 하자, 자위가 “백성에게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백성이 죽어버리면 내가 누구를 데리고 임금노릇을 하겠는가.” 하였다. 자위가 “해[歲]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하자, 경공이 “흉년이 들면 백성이 굶어죽으리니, 백성 죽인 사람을 누가 임금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자위가 “임금께서 덕 있는 말씀을 세 번 하셨으니, 하늘이 반드시 임금에게 세 번 상을 내리시어 형혹성이 반드시 세 자리[三舍] 옮길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어 무사했다 한다. 《呂氏春秋傳》
♣ 법식[法食]불가어인데 불법에 일중식(日中食)을 말함. 삼매경(三昧經)에 “佛與法惠 菩薩說四時食 午時爲法食"이라 하였음.
♣ 법안[法眼]불교에서 말하는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 보살이 중생(衆生)에서 벗어나 일체의 법문(法門)을 비추어 보는 눈을 말한다.
♣ 법언[法言]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논어(論語)를 모방하여 지은 책. 내용은 학행(學行)ㆍ수신(修身)ㆍ문신(問神) 등 총13편으로 구성되었는데, 공자를 높이고 왕도(王道)를 담론한 것임. 그 주석서에는 진(晉) 나라 이궤(李軌)와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주가 있음. 이 말은 문신(問神) 편에 보임.
♣ 법연[法筵]예식을 갖추고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는 자리로서 조정을 뜻함.
♣ 법온유하[法醞流霞]법온(法醞)은 궁중에서 만든 술이고, 유하주(流霞酒)는 신선의 술이다.
♣ 법왕[法王]절에서 받드는 부처를 말한다.
♣ 법운[法雲]불법(佛法)이 일체(一切)를 두루 덮는다는 뜻인데, 전하여 승려를 가리킨 말이다.
♣ 법유[法乳]불가(佛家)의 용어인데 정법(正法)의 자미(滋味)로 도를 배우는 자의 법신(法身)을 기르기를 마치 모유(母乳)가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한다 해서 이른 것임. 곧, 스승에게 불법(佛法)을 받는 것이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젖을 받아먹음과 같다는 말이다.
♣ 법의[法衣]임금의 예복을 말한다.
♣ 법전[法殿]궁금(宮禁)의 별칭. 국법이 나오는 곳이므로 한 말임.
♣ 법종[法從]임금의 수레를 수행하는 사람. 임금의 행차에 호종(扈從)하는 일을 말한다.
♣ 법좌[法座]본디 부처가 설법하는 자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제왕이 있는 자리를 뜻한다.
♣ 법해[法海]법해는 불법(佛法)을 말한다.
♣ 법희[法喜]법열(法悅), 불법을 듣고 희열을 느끼는 것. 즉 진리에 도취되어 일어나는 기쁨을 말한다. 유마경(維摩經)에 “법희를 아내로 삼고, 자비를 딸로 삼는다[法喜以爲妻 慈悲以爲女]”라고 하였으며, 소식(蘇軾)의 시 가운데 “室空惟法喜 心定有天游”라는 구절과 “雖無孔方兄 顧有法喜妻”라는 구절이 있다.
♣ 벽[壁]별 이름인데 천하의 문서(文書)를 주관한다고 한다.
♣ 벽강[辟彊]임금의 호칭이다.
♣ 벽계[碧雞]벽계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물(神物)이다.
♣ 벽계금마[碧鷄金馬]한선제(漢宣帝)가 왕포(王褒)를 촉(蜀)나라에 보내어 벽계(碧鷄)ㆍ금마(金馬)의 신(神)을 맞아 오게 하였다.
♣ 벽계방[碧鷄坊]벽계방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度)시내의 동네 이름이다. 현종의 안녹산의 반군을 피해서 사천으로 가서 성도에 있었다.
♣ 벽곡[辟穀]도술의 하나로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ㆍ대추ㆍ밤 등을 조금씩 먹고 사는 방법. 논형(論衡) 도허(道虛)에 “세상에서는 곡식을 먹지 않는 이를 도술하는 사람이라 한다.” 하였다. 또는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생식(生食)만 하는 것을 말한다.
♣ 벽골[碧骨]벽골은 김제(金堤)의 고호이다.
♣ 벽골제[碧骨堤]백제(百濟)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김제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대의 관개용(灌漑用) 고대 저수지이다.
♣ 벽기가[癖嗜痂]옛날 유옹(劉邕)이 부스럼 딱지를 즐겨 먹었는데,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자, 다 기호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한다. 특이한 기호를 뜻한다. 《宋書 劉穆之傳》
♣ 벽라[薜蘿]담쟁이나 칡덩굴 따위 또는 칡덩굴로 짠 베를 가리킨다. 전하여 은자(隱者) 또는 은자의 의복을 말한다.
♣ 벽라[薜蘿]벽(薛)은 줄사철나무이고 라(蘿)는 나무에 기생하는 덩굴식물인 여라(女蘿)인데 그 잎과 줄기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흔히 은자(隱者)의 행색을 뜻한다.
♣ 벽라의[薜蘿衣]벽(薜)은 줄사철나무이고 라(蘿)는 나무에 기생하는 덩굴식물인 여라(女蘿)인데 그 잎과 줄기로 만든 옷이라는 뜻으로, 흔히 은자(隱者)의 행색을 뜻한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산귀(山鬼)의 “벽려로 옷 해 입고 여라의 띠를 둘렀도다.[若有人兮山之阿 披薜荔兮 帶女蘿]”라 한 데서 온 말이다.
♣ 벽락[碧落]벽락은 하늘이라는 뜻의 도가(道家) 용어이다.
♣ 벽락관조차시랑[碧落官曹借侍郞]안연(顔淵)과 복상이 지하(地下)에서 수문랑(修文郞)이 되었다 하고, 당 나라 이장길(李長吉)은 천상(天上)에서 백옥루(白玉樓) 기문(記文)을 지으려고 불러 갔다는 말이 있으므로 여기서도 이렇게 말한 것이다.
♣ 벽락시랑[碧落侍郞]진(晉) 나라 심희(沈羲)가 백성을 위해 재해(災害)를 없애주고 병을 고쳐 주면서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자, 천신(天神)이 감동한 나머지 그를 하늘로 영접하여 벽락시랑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神仙傳 沈羲》
♣ 벽려[薜荔]만목과(蔓木科)에 속하는 상록수(常綠樹)인데, 은자(隱者)의 옷을 말한다. 초사(楚詞)에 “벽려를 입고 여라를 띠었다[被薜荔兮帶女蘿]" 하였다.
♣ 벽려의[薜荔衣]벽려는 향기 나는 나무 덩굴 이름으로, 은자(隱者)가 입는 옷을 말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벽려의 떨어진 꽃술 꿰어 몸에 두른다.[貫薜荔之落蘂]”고 하였다.
♣ 벽력수[霹靂手]공무 처리에 비상한 능력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배염지(裵琰之)가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수백 통의 문건들을 순식간에 처리하여 끝내버리자 사람들이 벽력수(霹靂手)라고 불렀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舊唐書 裵漼傳》
♣ 벽력화선[霹靂火仙]송 나라는 화덕(火德)의 운을 탔다 하는 음양설이 있으므로, 여기서 벽력화선은 송 나라를 대표하는 신령이요, 금(金) 나라가 송 나라를 빼앗았으므로 화(火)를 이기는 수덕진군은 금나라를 대표하는 신령이다.
♣ 벽릉풍[稫稜風]빽빽이 들어선 벼논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을 이름. 박삭풍
♣ 벽립만인[壁立萬仞]세설신어(世說新語)에, “王公目太尉 巖巖淸峙 壁立千仞”이라는 것이 보임. 절벽이 만길이나 된다는 뜻으로 즉 사람의 기개를 비유함.
♣ 벽문[璧門]한 무제가 지은 건장궁(建章宮)의 정문인데 임금의 궁문을 뜻한다.
♣ 벽보[璧堡]욋가지를 세우고 그 안팎에다 벽 모양으로 진흙을 발라 놓은 보루(堡壘)를 말한다. 본격적인 성(城)을 쌓지 못할 경우 간단하게 이것을 쌓고 성 대신으로 썼는데, 설비가 워낙 약하기 때문에 자주 무너져서 개축을 해야 하는 등 문제가 많았었다.
♣ 벽복[薜服]벽라(薜蘿)로 엮어 만든 옷을 이르는데, 전하여 은자(隱者)의 옷을 의미한다.
♣ 벽사[甓社]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벽사호(甓社湖)를 이름. 벽사호 속에는 크기가 주먹만한 구슬이 있어 빛이 10여 리를 비춘다는 전설이 있다. 송(宋) 나라 손각(孫覺)이 벽사호(甓社湖)에서 밤에 찬란히 빛나는 큰 구슬을 보고 그 해에 등제(登第)하였으므로, 흔히 과거 급제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게 되었다. 그 구슬을 인재(人材)에 비유하기도 한다.
♣ 벽사[碧紗]당(唐) 나라 때 왕파(王播)가 빈궁하여 양주(揚州)의 혜소사(惠昭寺)에서 얻어먹고 있을 적에 중들이 그를 싫어하여 밥을 먹고 난 다음에 종을 치곤 하므로, 그가 시를 한 수 지어 벽에 붙여 두고는 그곳을 떠났다가, 뒤에 그가 재상이 되어 다시 그 절을 찾아가 보니, 자기가 지어 붙여 놓았던 시를 푸른 깁에 잘 싸서 보관하고 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벽사롱[碧紗籠]무언(撫言)에 “왕파(王播)가 젊어서 반고(盤孤)하여 양주(揚州) 목란원(木蘭院)에 붙여 있으면서 중과 함께 재식(齋食)하니 중이 싫어했다. 뒤에 왕파가 이 땅을 진수(鎭守)하게 되어 옛날에 노니던 곳을 찾아가 보니, 지난날 읊은 시(詩)들이 모두 벽사(碧紗)로 감싸져 있으므로 왕파는 다시 시를 짓기를 ‘삼십년이 지나도록 먼지가 가득터니, 이제야 비로소 벽사로 감쌌구려.[三十年來塵撲面 而今始得碧紗籠]’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벽사롱[碧紗籠]척언(摭言)에 “왕파(王播)가 외롭고 가난하여 일찍이 양주(揚州) 목란원(木蘭院)의 객이 되어 중을 따라 재밥을 얻어먹고 있으니 중이 싫증을 내어 마침내는 재가 파한 뒤에야 종을 쳤다. 그 후 20년 뒤에 왕파는 중한 지위로부터 양주 태수(揚州太守)로 나가 지난날 지은 시의 ‘上堂已散各西東 慙愧闍黎飯後鐘’이라는 글귀를 찾아보니 벌써 푸른 비단으로 감싸놓았다. 그래서 왕파는 끝구를 지어 달기를 ‘二十年來塵撲面 而今始得碧紗籠’이라 하였다.” 하였음.
♣ 벽사창[碧紗窓]얇은 청색 깁을 바른 창, 즉 여인의 침실을 말한다.
♣ 벽사천록[辟邪天祿]두 짐승의 이름이다. 집고록(集古錄) 후한천록벽사자(後漢天祿辟邪字)에 “종자(宗資)는 남양(南陽) 안중(安衆) 사람인데, 그의 무덤에 돌로 만든 짐승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천록이라 하고 하나는 벽사라 한다.” 하였다.
♣ 벽사홍수[碧紗紅袖]송(宋) 나라 때 위야(魏野)가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절에 가 놀면서 똑같이 시를 써 붙여 놓았다가, 뒤에 다시 함께 그 절을 찾아가 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관하고 있고, 자신의 시는 먼지가 잔뜩 낀 채 그대로 있으므로, 그들을 따라갔던 관기(官妓)가 붉은 소매로 그 먼지를 털어 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벽산거[碧山居]한가로이 물러나 책이나 읽고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백(李白)이 벽산(碧山) 아래에서 독서하였는데, “問余何意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이라는 산중문답(山中問答) 시의 구절은 특히 유명하다.
♣ 벽상사[壁上蛇]동진(東晉) 때,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나눌 적에 벽에 뱀모양을 조각하여 칠해 놓은 각궁(角弓)을 놓았는데 그것이 친구의 잔 속에 비치자 친구는 뱀이 잔 속에 든 줄 알고 마음이 섬뜩하여 병이 들었다 한다. 《晉書 卷四十三 樂廣傳》
♣ 벽선[碧鮮]대나무를 가리킨다. 그 색깔이 벽옥(碧玉)처럼 선윤(鮮潤)한 데에서 나온 이칭(異稱)이다.
♣ 벽성[碧城]김제(金堤)의 옛 이름이다.
♣ 벽송정[碧松亭]서울 성균관(成均館) 북쪽에 있었던 정자. 소나무가 울창했다.
♣ 벽수[璧水]벽수는 물이 빙 둘러 있는 태학(太學)을 가리킨다. 원래 주대(周代) 귀족 자제들의 교육 기관으로서 보통 성균관을 뜻하기도 한다.
♣ 벽수[壁宿]벽수는 28수의 하나로 현무(玄武) 7성(星)의 끝 별이다. 관상현점(觀象現占)에 “벽성(壁星)의 두 별은 동벽 도서지부(東壁圖書之府)로서 도서를 맡은 별이다.” 하였다.
♣ 벽안[碧眼]고승(高僧)은 벽안(碧眼)이 많다 한다.
♣ 벽안도리[碧眼闍梨]달마대사(達摩大師)를 벽안호승(碧眼胡僧)이라 호칭한 데서 온 말이다.
♣ 벽양묵지광란[闢楊墨之狂瀾]이단(異端)의 학문을 말한다. 양주는 위아설(爲我說)을, 묵적(墨翟)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하여 유학자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았다.
♣ 벽양후[辟陽侯]벽양후는 심이기(審食其)의 봉호로 여씨(呂氏)와 친분이 깊은 그를 육가(陸賈)가 주선하여 평원군(平原君)과 교제를 갖게 하고 도와준 것을 말한다. 《史記 卷九十七 酈生陸賈列傳》
♣ 벽여[薜荔]줄사철나무인데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상록 만목(常綠蔓木)이다. 산과 들에 자생하는데 관상용으로 심기도 한다.
♣ 벽온단[辟瘟丹]섣달 그믐날 밤 벽온단을 술에 타서 마시면 다음해 일 년 동안 온역(瘟疫)을 피한다는 전설이 있다.
♣ 벽온단[辟溫丹]정월 초하루 새벽에 벽온단(辟溫丹)을 먹으면 일 년간 온역(瘟疫)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 벽옹[辟雍]주(周) 나라 때 천자(天子)가 도성(都城)에 세운 태학(太學)으로, 주위가 벽(璧)과 같이 둥글고 물이 둘러 있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 아, 즐거운 벽옹이여.”라 했고, 예기(禮記) 왕제(王制)에는 “소학(小學)은 공궁(公宮) 남쪽 왼편에 있고, 태학은 교외에 있는데, 천자는 벽옹, 제후는 반궁(泮宮)이다.”라고 하였다.
♣ 벽용[碧筩]연잎으로 만든 술잔을 뜻한다.
♣ 벽용배[碧筩杯]연엽(蓮葉)을 맞붙여 만든 술그릇이다. 《酉陽雜俎 酒食》
♣ 벽우대어선[碧藕大於船]태화산(太華山)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그곳의 연꽃은 큰 배 만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벽운[碧雲]시승(詩僧) 혹은 시승의 작품을 뜻하는 말이다. 남조 송(宋)의 시승인 혜휴(惠休)의 시 중에 ‘일모벽운합(日暮碧雲合)’이라는 명구(名句)가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벽운가구[碧雲佳句]남조 양(南朝梁)의 시인 강엄(江淹)이 지은 ‘혜휴 상인 원별시(惠休上人怨別詩)’에 “해 저물녘 푸른 구름 서로들 만나는데, 그리운 님 왜 이다지 오지를 않나.[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라는 구절이 있다.
♣ 벽운모[碧雲暮]육조(六朝) 때에 시승(詩僧) 혜휴(惠休)의 시에, “해 저물고 푸른 구름 합했는데 가인이 오지 않네[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 하는 명구(名句)가 있다.
♣ 벽운편[碧雲篇]강문통집(江文通集) 권4 휴상인원별시(休上人怨別詩)의 “저물녘 푸른 구름 뭉쳐 있는데 고운 사람 오히려 아니 오누나[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에서 나온 말로, 멀리 헤어져 있는 정겨운 사람을 그리는 뜻으로 지은 글을 뜻한다.
♣ 벽운하[碧雲騢]벽운하는 송 태종(宋太宗)의 어마(御馬)로 입가에 푸른 구름무늬가 있었으므로 명명하였는데, 하루에 천 리를 달렸고 태종이 죽자 따라 죽었다. 《玉壺淸話》
♣ 벽운합[碧雲合]친구를 그리워하는 말이다. 강엄(江淹)의 시에 “해 저물어 푸른 구름 모이는데, 가인은 자못 오지를 않누나[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 하였다.
♣ 벽유[碧油]청유막(靑油幕)과 같은 말로, 대장군의 막사를 뜻한다.
♣ 벽유거[碧油車]청록색의 기름을 바른 수레로, 호화로운 수레를 뜻한다.
♣ 벽유당[碧油幢]군막(軍幕)에 쓰이는 벽색 유막(碧色油幕)을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군막을 말한다.
♣ 벽유재자[碧油才子]막부(幕府)의 종사관(從事官)이라는 뜻으로, 감사를 수행하여 따라가는 이 도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벽유는 청유(靑油) 혹은 유막(油幕)으로도 쓰는데, 막부를 지칭한다.
♣ 벽의[薜衣]은자(隱者)의 옷을 뜻함.
♣ 벽제고[鷿鵜膏]벽제는 농병아리과에 속하는 물새. 이 새의 기름을 도검(刀劍)에 바르면 녹이 슬지 않는다고 한다.
♣ 벽진[碧珍]성주(星州)의 고호임.
♣ 벽체[碧砌]푸른 섬돌.
♣ 벽통[碧筒]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정각(鄭慤)이 삼복중(三伏中)에 피서(避暑)하면서 연잎[蓮葉]에다 술 서되를 담아서 잠(簪)으로 연잎의 줄기를 찔러서 마시면 술 향기가 맑고 시원하였는데, 그것을 벽통주(碧筒州)라 하였다.
♣ 벽통배[碧筩桮]벽통배는 여름에 연잎으로 만든 술그릇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정각(鄭慤)이 한창 더운 여름에 역성(歷城)의 북쪽에 있는 사군림(使君林)에서 손님들과 어울려 피서하면서 줄기가 달린 커다란 연잎에 술 두 되를 담고 잎과 줄기가 서로 통하게 비녀로 구멍을 뚫은 다음, 그 줄기를 코끼리의 코처럼 잡아 올려 여러 사람이 서로 돌려가며 빨아마셨다 한다. 곧 풍류가 넘치는 술자리를 말한다. 《酉陽雜俎 卷七 酒食》
♣ 벽파정[碧波亭]울산(蔚山) 팔영(八詠)의 하나로, 정포(鄭誧)와 이곡(李穀)의 시가 특히 유명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2 蔚山郡》
♣ 벽한서[辟寒犀]한기(寒氣)를 없애주는 나무의 이름. 유사(遺事)에 “당 현종(唐玄宗) 때 교지국(交趾國)에서 벽한서 한 그루를 진상해 왔다. 그 사신(使臣)의 말대로 금반(金盤) 위에 올려 전내(殿內)에 놓아두었는데, 빛은 황금같이 누렇고 따뜻한 기운이 사람에게 접근해 왔다. 임금이 그 까닭을 묻자 벽한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그 사신에게 상(賞)을 후히 내렸다.” 하였다.
♣ 벽한진[辟寒珍]추울 때에 그것을 집 안에 두면 추위를 모른다는 보물(寶物)이다.
♣ 벽허[碧虛]창공이나 강물을 뜻하는 시어이다.
♣ 벽혈[碧血]주(周) 나라 경왕(敬王)의 대부였던 장홍(萇弘)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한스럽게 여겨 자결을 하였는데, 그 피가 맺혀 벽옥(碧玉)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莊子 外物》
♣ 벽혈[碧血]충신 열사 등 정대한 이들이 흘린 피를 말한다. 주(周) 나라 장홍(萇弘)이 진(晉) 나라 범중행(范中行)의 난에 죽었는데 그 피를 3년 동안 보관해 두니 나중에 푸른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莊子 外物》
♣ 벽환[碧環]푸른 바다가 산주변을 감돌고 있다는 것. 소식의 과내주설후망삼산시(過萊州雪後望三山詩)에 “동녘바다 푸른 고리 같으니 서북의 등주 내주를 감싸도다.[東海如碧環 西北卷鄧萊]"라 하였음.
♣ 변가상여채[便可償汝債]범성대(范成大)의 범석호집(范石湖集) 매치애사(賣癡獃詞)에 “노인께서 사신다면 돈은 아예 필요 없소, 백 년 천 년 동안 외상으로 드릴테니[兒云翁買不須錢 奉賖癡獃千百年]”라는 구절이 있다.
♣ 변계량[卞季良]조선조 초기의 문신. 세종 때 20여 년간이나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면서 대부분의 국가 중요 문서를 도맡아 처리했으며 과시(科詩) 체제를 처음으로 정비했다고 함. 《世宗實錄》
♣ 변두[籩豆]제사에 쓰는 제기(祭器)이다. 예의 범절을 뜻한다.
♣ 변모[弁髦]쓸모가 없어져서 내버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동자(童子)가 관례(冠禮)를 할 때 잠깐 썼다가 관례를 마치고는 즉시 버렸다.
♣ 변발[辮髮]오랑캐를 말한다. 변발은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가운데만 남겨 뒤로 길게 늘이어 땋는 북방 민족의 풍습을 말한다.
♣ 변병비오[辨竝飛烏]시비를 가리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시경(詩經) 소아(小雅) 정월(正月)에 “모두가 제가 옳다고 하나니, 누가 까마귀의 자웅을 알아낼꼬.[具曰予聖 誰知烏之雌雄]" 한 데서 온 말이다.
♣ 변복[邊腹]글을 잘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변소(邊韶)는 문학(文學)으로 매우 이름이 높았는데, 하루는 그가 낮잠을 자는 척하고 누워 있자, 그의 제자(弟子)가 혼잣말로 “변효선(邊孝先)은 배[腹]는 비대(肥大)해 가지고 글은 안 읽고 낮잠만 자는군.” 하고 조롱하므로, 변소가 그 말을 듣고는 즉시 응답하기를 “변효선의 비대한 배는 곧 오경(五經) 상자이다.” 하였다.
♣ 변상[變相]불가의 말로 초상화를 가리킨다.
♣ 변상벽[卞尙璧]변상벽은 숙종 시대의 화가로서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는데, 특히 닭ㆍ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한다.
♣ 변성[邊聲]오랑캐족이 부르는 노래 또는 변방 진영 군사들의 소리를 말한다.
♣ 변수[卞隨]은자(隱者)로서, 탕(湯)임금이 천하로써 양보하였으되 거절하고 주수(椆水)에 투신 자살했음.
♣ 변어로[辨魚魯]어(魚)와 노(魯)의 글자가 비슷하여 무식한 자가 잘 분별하지 못한다.
♣ 변풍[變風]시경(詩經) 대서(大序)의 국풍(國風) 가운데 패(邶)에서부터 빈(豳)까지의 13국(國)에서 지어진 시 작품을 말하는데, 시경(詩經) 대서(大序)에 “왕도(王道)가 쇠하고 예의가 없어지고 정치가 잘못되면서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였다.
♣ 변풍지호예의[變風止乎禮義]시경(詩經)에 정풍(正風)과 변풍(變風)의 구별이 있는데, 변풍은 음란하고 원망하는 시가 많다. 그러나 그것도 뜻이 마침내는 예의(禮義)에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 한다.
♣ 변하금람[汴河錦纜]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변하(卞河)에 배를 띄워 광릉으로 놀러가면서, 많은 배에 비단 뱃줄을 늘이고 갖은 호화를 부리면서 백성을 못살게 괴롭혔으므로,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망하였다.
♣ 변화[卞和]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형산(荊山)에서 옥돌을 발견하고 초(楚) 나라 왕에게 바쳤다는 사람이다. 이 옥돌을 가공한 결과 보옥(寶玉)을 얻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화씨벽(和氏璧)으로 일컫게 되었다 한다. 《韓非子 和氏》
♣ 변화무쌍[變化無雙]더없이 변화가 많음.
♣ 변화삼헌[卞和三獻]참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당하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 변화(卞和)가 산속에서 옥돌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쳤다가 왼쪽 발을 잘리고, 무왕(武王)에게 바쳤다가 다시 오른쪽 발을 잘린[刖] 뒤, 세 번째로 문왕(文王)에게 바쳐 진가(眞價)를 인정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 변화읍[卞和泣]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서 초 문왕(楚文王)에게 바쳤는데, 문왕이 옥공(玉工)을 불러서 보였더니, 돌이요 옥이 아니라 하므로 변화에게 형벌을 주었더니 변화는 옥을 안고서 형산에서 울었다.
♣ 변화헌옥삼견월[卞和獻玉三見刖]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산중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왕에게 바쳤다가 좌우의 발목을 모두 잘리고 원통해서 울었다는 ‘변화읍벽(卞和泣璧)’의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和氏》
♣ 변흑초[變黑貂]전국 시대에 소진(蘇秦)이 진왕(秦王)에게 열 차례나 글을 올렸으나 설득시키지 못한 채 흑초구(黑貂裘)가 헐고 백근의 황금이 다 떨어져서 일단 되돌아온 것을 빗대어 인용한 것이다.
♣ 별[鷩]꿩과에 속하는 새 이름. 목은 푸르고 등은 노랗고 배는 붉고 색깔이 매우 선명함.
♣ 별가[別加]벼슬의 자급을 올리는데 있어 나라에서 은상(恩賞)이 있어 주는 것을 별가(別加)라 한다.
♣ 별부[別付]북로(北路) 연변의 기생들이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원들과 동침하는 것을 말한다.
♣ 별서왕유[別墅王維]당 나라 사람으로 망천(輞川)에 별장이 있었는데,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그 풍경을 노래한 왕유의 시로도 유명하다.
♣ 별세[別歲]송년(送年)과 같음.
♣ 별승[別乘]태수(太守)의 다음 자리인 별가(別駕)의 별칭이다. 즉 조선(朝鮮) 시대 판관(判官)에 해당한다.
♣ 별시[鼈廝]소식(蘇軾)의 동파집(東坡集) 광리왕소(廣利王召)에, “내 일찍이 취하여 누워있는데 꿈에 어두귀신(魚頭鬼身)으로 생긴 자가 해중(海中)으로부터 와서 광리왕(廣利王)이 부른다고 말하여 내가 따라서 수정궁전(水精宮殿)에 나아갔었다. 광리는 패검관복(佩劍冠服)으로 나오고 뒤이어 동화진인(東華眞人) 및 남명부인(南溟夫人)이 나와 한 발 남짓한 교초(鮫綃)를 내놓으면서 나에게 명하여 시를 쓰라고 하기에 나는 부(賦)하기를 ‘天地雖虛廓 惟海最爲大 聖王皆祀事 位尊河伯拜 祝融爲異號 怳惚聚百怪……若得明月珠 可償逐客債’라 하여 써서 올리니 광리 제선(廣利諸仙)이 보고 모두 묘(妙)를 칭(稱)하는데, 옆에 한 관잠자(冠簪者)가 있어 별상공(鼈相公)이라 이르며 진언(進言)하기를 ‘객(客)이 기휘(忌諱)를 피할 줄 모릅니다. 축융(祝融)이란 글자가 왕(王)의 휘(諱)를 범했습니다.’ 하자, 왕이 대로(大怒)하였다. 나는 물러나와 탄식하기를 ‘가는 곳마다 상공(相公)의 시괴(廝壞)를 당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음.
♣ 별재위체[別裁僞體]두보(杜甫)의 희위육절(戲爲六節)에 “위체를 구별하여 제거하니 풍아에 가깝구나. 갈수록 많은 스승 이것이 너의 스승이네[別裁僞體親風雅 轉益多師是汝師]" 한 데서 온 말로, 진체(眞體)가 아닌 위체(僞體)를 제거하여 선현(先賢)의 풍아(風雅)에 가까워짐을 뜻한다.
♣ 별재집[別裁集]청(淸) 나라 학자 심덕잠(沈德潛)이 찬(撰)한 오조시별재집(五朝詩別裁集)을 이름이다.
♣ 별족아권[鱉足兒拳]고사리의 모양이 마치 자라의 발이나 어린애의 주먹과 같이 생겼으므로, 고사리를 비유한 말이다.
♣ 별천지[別天地]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시에 “복사꽃 아득히 물에 떠서 흐르는 곳,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가 펼쳐졌네.[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다.
♣ 별파[撇波]서법(書法)의 별과 파를 말하는데 별은 왼쪽으로 삐친 것이고 파는 파임임.
♣ 별학[別鶴]악부(樂府)의 금곡(琴曲) 이름이다. 상릉목자(商陵牧子)가 아들을 두지 못해 장차 개취(改娶)하려 할 적에 아내가 슬피 노래하는 것을 듣고서 지었다고 한다. 《古今注 卷中 音樂》
♣ 별학조[別鶴操]별학조는 악부(樂府) 금곡(琴曲)의 이름으로, 상릉(商陵)의 목자(牧子)가 장가든지 5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어 그의 부형(父兄)이 그를 다시 장가들이려 하자, 그의 아내가 그 사실을 알고 밤중에 일어나 문에 기대어 휘파람을 슬피 불므로, 목자가 그 소리를 슬피 여겨 거문고를 가져다가 노래한 것을 후인이 취하여 악장(樂章)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 병[病]매우 피곤하다.
♣ 병[邴]병 땅은 춘추시대 정(鄭)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山東) 비현(費縣)지방이다.
♣ 병가상사[兵家常事]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보통의 일. 실패는 흔히 있는 일이어 낙심할 것이 없다는 뜻.
♣ 병간공작[屛間孔雀]당(唐) 나라 두 황후(竇皇后)의 아버지 의(毅)가 일찍이 비범한 자기 딸을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하여, 병풍 사이에 공작(孔雀) 두 마리를 그려놓고 청혼자(請婚者)들에게 화살 두 개씩을 쏘아서 공작의 눈을 맞힌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던바, 수십 명의 청혼자가 모두 그 눈을 맞히지 못했는데, 당 고조(唐高祖)가 최후에 활을 쏘아 각각 눈 하나씩을 맞힘으로써 마침내 두 황후가 고조에게 시집을 가게 된 데서 온 말이다. 《唐書 竇皇后傳》
♣ 병간금작[屛間金雀]당 고조(唐高祖)의 후비인 두 황후(竇皇后)의 아버지 의(毅)가 일찍이 자기의 비범한 딸을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 하고, 병풍 사이에 공작(孔雀) 두 마리를 그려 놓고 청혼해 온 자들에게 화살 두 개씩을 쏘아 공작의 눈을 맞힌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수십 명의 청혼자가 모두 활을 쏘았으나 다 맞히지 못했는데, 최후에 활을 쏜 당 고조가 두 눈을 쏘아 맞힘으로써 마침내 두 황후가 당 고조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병경치뢰[甁罄恥罍]시경(詩經) 대아(大雅) 육아편(蓼莪篇)의 “병술은 언제든지 항아리에서 공급되는 것이므로 병술이 완전히 없어짐은 항아리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甁之罊矣 維罍之恥]"라는 대목에서 인용된 문자다.
♣ 병곡[並轂]함께 달리다.
♣ 병길[丙吉]병길은 노국(魯國)사람으로 자는 소경(少卿)인데, 한 나라 때 선제(宣帝)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조부 위태자(衛太子)의 일로 하옥되었을 때 정위감(廷尉監)으로 있으면서 그를 살려내었고, 소제(昭帝)가 죽자 대장군 곽광(霍光)에게 건의, 선제를 맞아들여 황제로 세웠다. 박양후(博陽侯)에 봉해지고 승상을 지냈다.
♣ 병덕[秉德]그 독립의 덕을 잡고 있어 사사로운 마음에 흔들리지 않음.
♣ 병두국[幷頭菊]줄기 하나에 두 송이 꽃이 핀 국화.
♣ 병란[兵欄]무기(武器)를 걸어두는 틀. 한서(漢書) 흉노전에, “矢四發 棨戟十……”라고 보이고, 그 주에, ‘棨戟 有衣之戟也 棨音啓’라 하였음.
♣ 병롱승재물정참[病聾丞在勿停參]한(漢) 나라 때 황패(黃霸)가 영천태수(潁川太守)로 나갔을 적에, 허씨(許氏) 성을 가진 아전이 늙어 귀가 어두웠으므로, 독우(督郵)가 그를 쫓아내자고 황패에게 말하자, 황패가 말하기를 “허승(許丞)은 청렴한 아전으로, 비록 늙었으나 빈객 접대도 잘하니, 내보내지 말고 그를 잘 도와주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八十九》
♣ 병만용[邴曼容]만용(曼容)은 한(漢) 나라 병단(邴丹)의 자(字)이다. 항상 자신의 덕을 닦으며 관직 생활을 하는 중에 6백 석 이상의 자리에는 결코 몸담으려 하지 않다가 왕망(王莽)이 집권하자 바로 사직을 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漢書 卷72》
♣ 병몽[帲幪]장막으로 차일과 휘장 등을 말한다. 위에 치는 것을 병, 덮는 것을 몽이라 한다.
♣ 병무[騈拇]변무는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과 합해져서 완전히 하나처럼 되어버린 상태를 말한다. 《莊子 騈拇》
♣ 병문원[病文園]병든 효문원령(孝文園令). 한(漢) 나라 때 효문원령이 된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소갈증(消渴症)을 앓았으므로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천자(天子)를 따라 장양궁(長楊宮)에 이르러 사냥을 하였던바, 이 때 천자가 한창 스스로 웅시(熊豕) 등의 야수(野獸)를 쫓아 잡기 좋아하였으므로, 사마상여가 상소(上疏)하여 천자를 간(諫)하였다. 《漢書 卷五十七》
♣ 병문졸속[兵聞拙速]용병(用兵)할 때는 졸렬하여도 빠른 것이 좋다는 뜻의 고사성어.
♣ 병발[甁鉢]중이 손을 씻기 위해 물을 담아 두는 항아리.
♣ 병부[秉桴]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내가 떼를 타고 바다에 뜨고자 하노라.”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章)
♣ 병불염사[兵不厭詐]전쟁에서는 모든 방법으로 적군을 속여서라도 적을 이겨야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병사[甁史]원굉도의 저서로 병화(甁花)에 대한 기록인데, 병화의 삽법(揷法)을 논한 것이다.
♣ 병사경한로[丙舍驚寒露]병사(丙舍)는 사당을 가리키니, 곧 사당에 의지하여 조상을 생각함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가 내려 초목이 영락(零落)하면 이것을 본 군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조상을 생각하며 놀라고 슬퍼한다.” 하였다.
♣ 병사지야[兵死之也]전쟁은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해야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병상여[病相如]상여는 한나라 때의 문인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키며, 문인(文人)이 병들어 누워 있는 것을 뜻한다. 사기(史記) 제117권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 “상마상여가 평소에 소갈증(消渴症)을 앓았는데, 탁문군(卓文君)과 결혼하고는 재산이 많아졌다. 이에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공경들과 더불어 정사를 논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병들었다 핑계 대고는 한가롭게 지내면서 관작을 흠모하지 않았다.” 하였다.
♣ 병석[甁錫]승려들이 사용하는 병발(甁鉢)과 석장(錫杖)으로, 곧 승도(僧徒)를 뜻한다.
♣ 병성[帲箵]병성은 수레 위에 먼지를 막는 대자리임. 후한(後漢) 때 공순(孔恂)이 주(州)의 별가(別駕)로 있었는데, 별가의 수레에는 본디 병성이 있었던바, 이 때 자사(刺史)가 마침 부(部)를 순행하려면서 날이 저물자 자사가 노하여 별가의 수레에 있는 병성을 제거하려 하므로, 공순이 말하기를 “명사군(明使君)께서 스스로 늦게 출발하면서 국가의 제도인 병성을 제거하면 되겠는가. 별가는 버릴 수 있어도 병성은 생략할 수 없다.” 하며 완강하게 거부하니, 자사가 마침내 사과하고 병성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 병수[甁水]인도(印度)의 풍속에 손님을 맞으면 이쑤시개[楊枝]와 향수(香水) 등을 내놓기 때문에 중들이 수도할 때도 손님이 오면 그렇게 하는데, 이것을 양지정수(楊枝淨水)라 한다.
♣ 병수복수[甁收覆水]엎지러진 물 병에 담는다는 말로 강태공(姜太公)의 전처(前妻)가 일찍이 강태공이 미천했을 때 태공을 버리고 갔다가 태공이 부귀한 뒤에 다시 합하기를 원하자, 태공이 엎지러진 물은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다는 뜻으로 그를 거절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병안시[病眼詩]백거이(白居易)의 병안화시(病眼花詩)를 이르는데, 백낙천시후집(白樂天詩後集) 권10에 나타나 있다.
♣ 병야비위빈[病也非爲貧]공자 제자 원헌(原憲)이 너무 청빈했는데, 어느 날 자공(子貢)이 성대한 차림으로 그를 찾았다. 원헌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와 자공을 맞이하자 자공은, 선생께서 어찌 그리 병이 들었느냐고 하였다. 이에 원헌이 대답하기를, “내가 들은 바로는, ‘재물이 없으면 그를 일러 가난하다고 하고, 배우고도 그대로 실천을 못하면 그를 일러 병들었다’고 한다는데,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은 아니오.” 하여 자공이 부끄러워했다고 함. 《莊子 讓王》
♣ 병예[屛翳]바람 귀신, 즉 풍사(風師)의 이름이다. 일설(一說)에는 풍신(風神), 뇌신(雷神), 우신(雨神)의 총칭이라고도 한다.
♣ 병예현명[屛翳玄冥]병예는 풍백(風伯), 현명은 우사(雨師)를 말한다.
♣ 병위[丙魏]병길(丙吉)과 위상(魏相)인데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 명재상이다. 《漢書 卷 74 魏相丙吉傳》
♣ 병유마[病維摩]석가(釋迦)와 동시대 사람인 유마(維摩)가 병을 이유로 석가가 설법(說法)하는 곳을 가지 않고 석가로 하여금 여러 비구(比丘)ㆍ보살(菩薩)을 시켜 자기 병상으로 문병을 보내도록 하였음. 《維摩經 方便品》
♣ 병일취[倂日炊]날마다 밥을 짓지 못하고 이틀, 사흘 만에나 한 번씩 밥을 짓는 것을 이른 말로, 즉 양식이 없어서 끼니를 늘 거르는 것을 의미한다.
♣ 병입고황[病入膏肓]병이 고황에까지 들었다. 고황(膏肓)은 심장과 격막 사이의 부분. 신체 부위 중에서 고황에 병이 들면 침이나 약으로도 치료할 가망이 없었다 해서, 병이 위중하여 치료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고치기 어려운 오류(誤謬)에 비유하기도 한다.
♣ 병장[屛障]병풍을 말하는데, 호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晉書 卷四十九 院籍傳》
♣ 병절[幷節]합절(合節). 절주에 맞추다.
♣ 병조[兵曹]조선 시대 병조에서는 무관(武官)의 전형(銓衡)을 맡았음.
♣ 병종구입[病從口入]병은 입으로 들어옴. 禍從口出과 대구.
♣ 병주[幷州]병주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현(太原縣) 부근인데 전국 시대 조(趙)의 명장(名將) 이목(李牧)이 여기에 있으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수비를 잘하여 명성을 떨쳤다.
♣ 병주[幷州]옛날 중국의 구주(九州) 중 하나로, 북방의 변지(邊地)를 뜻하는 말이다.
♣ 병주고향[竝州故鄕]오랫동안 살던 타향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길 때 하는 말.
♣ 병주도[幷州刀]병주의 가위(剪刀)가 유명하다.
♣ 병주쾌전도[幷州快剪刀]날이 예리한 가위를 말한다. 병주는 지명으로, 여기에서 생산되는 가위는 날이 예리하기로 유명하다.
♣ 병체[病遞]벼슬아치가 신병으로 인해 관직에서 체직되는 일.
♣ 병초공색[倂超空色]공색(空色)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 병촉[秉燭]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부생(浮生)이 꿈과 같으니, 즐길 날이 얼마런가. 옛 시인이 촛불 잡고 밤에 논다던 것이, 참으로 까닭이 있구나.” 하였다.
♣ 병촉[秉燭]춘추 때 사광(師矌)의 말에, “소시(小時)에 공부하는 것은 뜨는 해의 밝음과 같고, 늙어서 공부하는 것은 밤에 촛불을 켜는 밝음과 같다.” 하였다.
♣ 병촉고인유[秉燭古人遊]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옛날 사람들은 봄이면 촛불을 잡고 밤에 놀았다.” 하였다.
♣ 병촉유[秉燭遊]고시(古詩)에 “낮은 짧고 밤이 몹시도 기니, 왜 촛불 잡고 놀지 않으랴.[晝短苦夜長 何不秉燭遊]"한 데서 온 말로, 밤에 술 마시며 흥겹게 논다는 뜻이다.
♣ 병편작목[秉鞭作牧]채찍을 잡고 목자가 되다.
♣ 병풍[屛風]수규(水葵)로 행채(荇菜)인데 줄기는 보라색이다.
♣ 병향란[秉香蘭]향란(香蘭)을 잡았다는 말은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진수와 유수는 바야흐로 넘실거리는데 남녀들은 모두 난초를 손에 잡았도다.[溱與洧方渙渙兮 士與女方秉蘭兮]"란 데서 보이는데, 그 집주(集註)에 의하면 “정(鄭) 나라 풍속은 3월 상사일(上巳日)이면 남녀들이 모여 물 위에서 난초를 캐어 불상(不祥)을 불제(祓除)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 병혈[丙穴]가어(嘉魚)가 나는 동혈(洞穴)의 이름. 중국 섬서(陝西) 약양현(畧陽縣) 동남쪽에 있는 대병산(大丙山)의 동혈(洞穴)이다. 좌사(左思)의 촉도부(蜀都賦)에 “좋은 고기가 병혈에서 난다.” 한 주(註)에 “병(丙)은 지명인데, 여기에 고기가 나는 두 개의 동혈이 있다.” 하였다.
♣ 병혈어[丙穴魚]잉어 비슷한 맛 좋은 가어(嘉魚). 면수(沔水) 남쪽 병혈(丙穴)에서 잡힌다고 한다. 《本草 嘉魚》
♣ 병협군[騈脅君]갈비뼈가 붙은 임금이란 진문공(晉文公)을 말한다. 진 문공이 개자추 등과 망명했다가 돌아와 왕이 된 후에 개자추에게만 상을 내리지 않자, 용사지가(龍蛇之歌)를 지어 용은 문공에, 뱀은 자신에 비유하여 부르며 면산(綿山)에 숨었다. 문공이 뒤에 깨닫고 불렀으나 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질러 나오게 했는데도 나오지 않고 타죽었으므로 해마다 그날이면 찬밥을 먹으며 애도하였다.
♣ 보[簠]바깥이 모나고 안이 둥근 것을 보(簠)라 하는데, 여기에는 도량(稻粱)을 담는다.
♣ 보각공첨용도비[寶閣恭瞻龍圖祕]송사(宋史) 신종기(神宗紀)에 “보문각(寶文閣)에 학사(學士)ㆍ직학사(直學士)ㆍ대제(待制)를 두었다.” 했고, 문헌통고(文獻通考) 직관고(職官考) 직학사(直學士)에 “송(宋) 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때에 용도각(龍圖閣)을 회경전(會慶殿) 서쪽에 세워 태종(太宗)의 어서(御書)ㆍ어제(御製)ㆍ문집(文集)과 전적(典籍)ㆍ도화(圖畫)ㆍ보서(寶瑞)를 간직하게 했다.” 하였다.
♣ 보거상의[輔車相倚]불가분(不可分)의 밀접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순망치한(脣亡齒寒)과 같은 말이다.
♣ 보거상의[輔車相依]보(輔)는 협보(頰輔) 곧 볼, 거(車)는 아거(牙車) 곧 아래턱뼈,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 좌전(左傳) 희공(僖公) 5년에, “속담에 이른바, ‘볼과 턱뼈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말을 우(虞)와 괵(虢)을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 보건[補蹇]서로 의지함을 말함. 공공은 공공거허(蛩蛩巨虛)라는 잘 달리는 짐승이고 궐(蟨)은 앞발은 쥐의 발 같고 뒷발은 토끼의 다리와 같아서 잘 달리지 못하므로 공공이 늘 궐을 위해 먹이를 구해주고 급한 일이 있으면 업고 달아난다고 함. 《淮南子 道應訓》
♣ 보경원[輔慶源]경원은 주자(朱子)의 문인인 보광(輔廣)의 본관(本貫). 자는 한경(漢卿), 호는 잠암(潛庵).
♣ 보곤[補袞]곤직(袞職)은 임금의 직책으로 임금의 결점을 바로잡아 나간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대아 증민(烝民)에 “곤직에 궐실(闕失)이 있으면 중산보(仲山甫)가 메꾸어 나간다.” 하였다.
♣ 보곤견거[補袞牽裾]보곤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는 일이고, 견거는 임금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직간(直諫)하는 것을 의미한다.
♣ 보광[普光]부처가 보광명장(普光明藏)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설하였다. 보광명은 부처의 덕이 두루 밝다는 뜻이다.
♣ 보광[葆光]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부어도 가득차지 않고 떠내도 다하지 않아서 그 소유래를 알 수 없는 것을 ‘빛을 감추는 것[葆光]’이라고 한다.” 하였다.
♣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함
♣ 보궐습유[補闕拾遺]임금을 보좌하여 임금의 직책의 소루한 점을 보충하고 임금의 언행의 유실을 바로잡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보통 대간(臺諫)의 책무를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이다.
♣ 보궤[簠簋]보궤는 주 나라 종묘에 쓰는 그릇이니 그릇 중 가장 귀한 것이다.
♣ 보덕왕[報德王]고구려의 종실인 안승(安勝)을 가리킨다. 일찍이 고구려(高句麗)가 당 나라에 멸망당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고구려의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新羅)에 귀부(歸附)하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안승을 금마(金馬)에 살게 하여 보덕왕(報德王)으로 삼고, 이어 형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 보력[寶曆]황제의 지위를 가리킨다.
♣ 보련소학사[步輦召學士]유사(遺事)에 “명황이 편전(便殿)에서, 요원숭(姚元崇)의 시무론(時務論)을 깊이 음미하고 있었다. 마침 칠월 십오일이었다. 궂은비가 계속 내려 진흙이 신발을 덮었는데 임금이 근시에게, 보련을 메고 가서 학사를 불러오라고 하였다. 그때 요원숭이 한림학사로 있었다. 조야(朝野)가 다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겨 부러워했으니, 예부터 어진 이를 대우하는데 이러한 예는 없었다.” 하였다.
♣ 보렬성[步列星]헤아리다.
♣ 보로[寶璐]아름다운 옥을 말함.
♣ 보록[寶籙]보록은 도가(道家)의 부록(符籙)을 가리킨다.
♣ 보류일단[報劉日短]진(晉) 나라 이밀(李密)이 조모의 손에서 자랐고 조모가 90여 세가 되었는데, 조정에서 밀을 벼슬로 불렀다. 밀이 조모를 모시기 위하여 사양하여 올리는 글에, “신이 폐하께 절개를 다할 날은 길고, 조모 유(劉)를 갚을 날은 짧습니다.” 하였다.
♣ 보리[甫里]당(唐) 나라 때의 시인 보리선생(甫里先生)이라 호칭한 육귀몽(陸龜蒙)을 말한다. 항상 배에다 책과 다기(茶器)와 낚시 도구를 싣고서 강호(江湖)를 떠돌아 노닐었다.
♣ 보리[甫里]보리(甫里)는 당(唐) 나라 때의 은사 육귀몽(陸龜蒙)의 호임. 육귀몽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손수 농사를 지어서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전답 수백 묘(畝)는 모두 아주 낮은 지역에 있었으므로, 장마가 지면 곡식이 다 떠내려가서 항상 굶주렸다고 한다. 《唐書 卷一百九十六》
♣ 보리[甫里]보리는 소주(蘇州)에 있는 진명(鎭名)인데, 산수의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당(唐) 나라 때의 시인 육귀몽(陸龜蒙)이 여기에 거주하였다.
♣ 보리수[菩提樹]인도(印度)에서 나는 나무인데, 석가(釋迦)가 이 나무 아래서 득도(得道)하였다 한다.
♣ 보리자[菩提子]1년생의 풀. 열매가 둥글고 단단한 껍질이 있다. 세속에서 염불하는 구슬로 삼는다. 여기서 인용한 뜻은 보리자가 결실하는 것처럼 불법을 닦으면 복을 반드시 받는다는 것이다.
♣ 보망[補亡]시경(詩經)에 제목(題目)만 있고 글이 없는 것이 두어 편 있다. 그것을 진(晋) 나라 속석(束晳)이 보충하여 지었는데 이것을 보망시(補亡詩)라 한다.
♣ 보명쟁전[普明爭田]전지(田地)를 가지고 형제간에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북제(北齊) 때 소경(蘇瓊)이 남청하 태수(南淸河太守)가 되었는데, 을보명(乙普明) 형제가 전지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이에 소경이 그들 형제를 불러서 타이르기를, “하늘 아래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이고 구하기 쉬운 것이 전지인데, 전지를 얻었더라도 형제를 잃는다면 어떻겠는가.” 하니, 두 형제가 잘못을 빌면서 분가하여 산 지 10년 만에 합쳐서 살았다. 《小學 卷6 實明倫》
♣ 보문[普門]불법을 깨닫도록 열어 놓은 문
♣ 보문장실[普門丈室]한 문속에 모든 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문이라 하는데, 장실은 그 장로가 있는 곳이다.
♣ 보백[甫白]당 나라 때 시와 문장으로 유명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 보벌[寶筏]불교에서 깨달음의 길을 뗏목의 항해에 비유하여 보벌(寶筏)이라 한다.
♣ 보병[步兵]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보병교위(步兵校尉)를 지낸 적이 있는 위(魏) 나라 완적(阮籍)을 가리킨다. 위 나라와 진(晉)나라의 교체기에 살면서 현실이 불만스러워 세상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술을 즐겨 마시며 노장(老莊)의 설에 심취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였는데, 산수를 유람하러 나갔다가 길이 막히면 언제나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한다. 《晉書 卷四十九 阮籍傳》
♣ 보보[步步]한걸음 한걸음, 걸음마다
♣ 보본[報本]보본은 근본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조상 숭배를 말함.
♣ 보부금성비[寶符金星祕]옛날 우(禹) 임금은 부적을 갖고 산에 들어가니 잡귀(雜鬼)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한다.
♣ 보불[黼黻]보불은 관복(官服)에 수놓은 무늬이다. 전하여 유창하고 화려한 문장(文章)의 비유로 쓰임.
♣ 보불문장[黼黻文章]보불은 옛날 예복(禮服)의 화려한 문채로 지극히 아름답고 격조 높은 문사(文辭)를 뜻한다.
♣ 보산[寶山]보산은 보배가 쌓여 있는 산으로 불가의 말인데, 심지관경(心地觀經)의 “사람이 만일 손이 없으면 보산에 간다 하여도 끝내 아무런 소득이 없다.” 하였다.
♣ 보살만[蓄薩蠻]옛 사패 이름. 일명 자야가(子夜歌) 또는 무산일편운(巫山一片雲)이라고도 하며 44자로 되어 있음. 《詞律 卷四》
♣ 보삽[黼翣]옛날 출상(出喪)할 때 사용했던 도끼 모양 그림의 관(棺) 장식이다.
♣ 보서삼조[報書三鳥]세 마리의 새.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삼조에게 말을 붙이려 해도 빨리 가버려 잡을 수 없다.” 한 주에 “첫째는 기러기, 둘째는 학, 셋째는 제비이다.” 하였다.
♣ 보소[寶蘇]보소는 청 나라 때 금석학자(金石學者)의 옹방강(翁方綱)의 실명(室名)이다.
♣ 보솔[普率]넓은 하늘[普天] 아래 닿는 데까지의 땅[率土]의 백성이 모두 황제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 보순상[補舜裳]신하가 임금을 돕는 것을 곤직(袞職)의 궐실(闕失)이 있는 것을 깁는다[補] 하는데 곤상(袞裳)은 임금이 입는 옷으로 순(舜)이 처음 만들었다.
♣ 보시[布施]깨끗한 마음으로 법(法)이나 재물을 아낌 없이 사람에게 베품. 스님에게 베풀어 주는 금전이나 물건. 포시(布施)
♣ 보압[寶鴨]오리의 형태로 만든 향로에 대한 미칭. 고대(古代)에는 오리 모양의 향로가 많았으므로 보압 또는 금압(金鴨)이라 하였다.
♣ 보염사[補艶司]취홍원(聚紅院)과 뇌영원(蕾英院)에 뽑혀 들어온 여인들의 의복을 만들던 곳이다.
♣ 보왕[寶王]불타(佛陀)에 대한 존칭이다.
♣ 보요[步搖]부인(婦人)의 머리에 올리는 장식품인데, 걸어다닐 때 매달린 구슬이 흔들리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보우[普愚]고려말의 중. 그가 일찍이 삼각산에 태고사(太古寺)를 지었다.
♣ 보우지탄[보羽之嘆]너새 깃의 탄식이라는 말로, 신하나 백성이 전역에 종사하여 부모님을 보살피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는 것을 비유하는 뜻의 고사성어.
♣ 보원이덕[報怨以德]원수 갚기를 덕으로써 하라. (老子 道德經)
♣ 보은단[報恩段]비단의 이름. 조선조 선조 때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중국으로 사신가는 길에 통주(通州)의 청루(淸樓)에 들려 부모의 장례비를 마련하기 위해 창관(娼館)에 나온 어느 고관의 딸을 3백 금으로 구해 주었는데, 그 여자가 나중에 예부시랑(禮部侍郞) 석 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어 자기를 구해 준 은혜의 보답으로 손수 짠 비단 끝에 ‘보은(報恩)’이란 글자를 수놓아서 은인인 홍순언에게 준 것이라 함. 홍순언이 귀국하자 사람들이 비단을 사러 그의 집에 모여드니 그가 살던 동네를 또 ‘보은단동(報恩段洞)’이라 하였다 한다.
♣ 보은오대[報恩五臺]명 나라 성조(成祖)는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를 위하여 보은사를 세웠다. 《世宗實錄》 고제후(高帝后)를 위해서는 오대산 등지에 대재(大齋)를 베풀었다. 《明史 卷331 西域列傳》
♣ 보의[黼扆]자루가 없는 도끼를 그린 빨간 비단 병풍을 말함. 천자(天子)의 어좌(御座) 뒤에 치는데, 도끼는 위엄을 상징한 것이고, 자루가 없는 것은 이것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전하여 천자를 가리킨다.
♣ 보이경[報以瓊]시경(詩經)에, “나에게 목도(木桃)를 주는데 경요(瓊瑤)로써 갚으리라.” 하는 구절이 있다.
♣ 보이국사[報以國士]남을 국사로 대우하면 자기도 또한 국사로서 대접을 받는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의 은혜에 감동하는 말로 쓰인다.
♣ 보장[保障]백성을 위해 조세를 경감하고 너그러운 정사를 펴는 일.
♣ 보장[步障]옛날 귀족들이 밖에 나가 머물 때 바람과 먼지 같은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하던 병풍 같은 행막(行幕)으로 대나무를 세워 간살을 만들고 붉은 비단을 드리워 길 양쪽에 치던 것이다. 진(晉) 나라 때의 석숭(石崇)은 귀족들과 서로 사치를 경쟁하였는데, 왕개(王愷)가 자주빛의 비단 보장 40리 길이를 마련하자, 석숭은 붉은 비단 보장 60리 길이를 마련하였다 한다. 《晉書 石崇傳》
♣ 보장풍상[保章馮相]주대(周代)의 관직을 맡은 보장씨(保章氏)ㆍ풍상씨(馮相氏). 둘 다 춘관(春官)에 소속되어 천체(天體)의 운행을 관측하여 인간의 길흉(吉凶)을 미연에 알아내는 직책을 맡았음. 《周禮 春官 保章氏ㆍ馮相氏》
♣ 보전[寶篆]전(篆)은 피우는 향(香)을 말한 것이다. 전반향
♣ 보정[報政]지방관이 임기를 만료하고 조정에 돌아가 자기의 정적(政績)을 보고하는 일을 말한다. 지방장관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 보정[寶鼎]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맨 처음 구주(九州)의 쇠를 한데 모아서 이 보정(寶鼎)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은(殷)ㆍ주(周) 시대까지 전해 오다가, 진 시황 때에는 없어졌으므로 한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진 시황 28년에 사수(泗水)에서 주정(周鼎)을 꺼내고자 하여 천여 명의 인부를 물속에 투입시켜 찾아내도록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 보정귀전지[寶鼎貴顚趾]솥이 엎어지면 솥발도 뒤짚히는데 그리 되면 솥 안에 있던 오물들이 다 쏟아져나와 새로운 물건을 앉힐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임. 《周易 鼎卦》
♣ 보좌[寶座]금강좌(金剛座)ㆍ사자좌(獅子座) 등 불(佛)ㆍ보살(菩薩) 등의 상을 모시는 상좌(床座)를 말한다.
♣ 보좌[黼座]도끼 무늬 병풍 앞에 설치된 임금의 좌석을 말한다.
♣ 보주[甫州]예천(醴泉)의 고호임.
♣ 보지선사[寶誌禪師]양(梁) 나라 때의 고승.
♣ 보천[補天]보천은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옛날에 사극(四極)이 폐해지고 구주(九州)가 갈라져서 하늘이 덮어주지 못하고 땅이 실어주지 못하였다. 이때에 여와(女媧)가 오색(五色)의 돌을 정련해서 보천(補天)하고, 자라의 발을 잘라서 사극을 세웠다.” 하였다. 전하여 임금을 보좌하여 국가에 큰 공로가 있음을 비유한다.
♣ 보천입극[補天立極]상고 시절의 여제(女帝)였던 여와(女媧) 때 그의 제후(諸侯)인 공공씨(共工氏)가 축융(祝融)과 싸워 싸움에 패하자, 화가 나서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받아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하늘 기둥이 부러지고 지구를 매놓은 끈이 끊겼는데, 이때 여와씨가 오색돌을 녹여 기둥을 만들어서 하늘을 고이고, 큰 자라 등에 얹혀 흔들거리는 지축을 고정시키기 위해 자라의 네 발을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동서남북의 위치를 고정시켰다고 함. 《司馬貞 補史記 三皇本紀》
♣ 보천지수[補天之手]중국 신화(神話)에 옛날 하늘 기둥이 꺾어지고 땅이 이지러졌을 때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단련하여 하늘을 기웠다 한다.
♣ 보천탄[寶泉灘]보천탄은 해평현(海平縣) 서쪽 5리쯤에 있는데, 바다의 장사치들이 봄가을마다 이곳에 배를 대고서 물건을 팔아 가지고 돌아간다.
♣ 보춘휘[報春暉]맹교(孟郊)의 시에, “한 치 길이 풀잎의 마음으로, 봄날의 포근한 햇살에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 했는데, 부모의 사랑에 비하여 자식의 정성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말.
♣ 보취[步驟]진보(進步)가 빠름.
♣ 보타권[寶唾卷]타인의 시집(詩集)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欬唾成珠”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 보필[輔弼]충신의 보좌.
♣ 보허곡[步虛曲]악부잡곡가사(樂府雜曲歌辭)의 이름. 중선(衆仙)의 표묘 경거(縹緲輕擧)의 미(美)를 읊은 것으로, 도관(道觀)에서 창(唱)한다.
♣ 보허술[步虛術]도사(道士)가 공중을 걸어다니는 술법으로, 즉 신선술(神仙術) 일반을 가리킨다.
♣ 보현[普賢]문수보살과 함께 석가여래의 협사(脇士)로 유명하며,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진 보살. 보현보살.
♣ 보후[甫侯]보후는 보국(甫國)의 후(侯)임. 시경(詩經) 大雅 崧高에 “거대한 사악의 명산 하늘 높이 우뚝한데 그 산들이 신령 내려 보후(甫侯) 신백(申伯) 탄생했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하였음. 숭(崧)은 총(蔥)과 상통함.
♣ 복[復]일체의 무역과 세금을 면제하는 것이다.
♣ 복거부[卜居賦]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들어 있는 시편(詩篇)이다.
♣ 복거지계[覆車之戒]먼저 간 수레가 엎어졌음을 보고 경계함. 앞사람의 실패를 뒷사람이 교훈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 복고여산[腹高如山]배가 산같이 높다는 뜻으로 임심한 여자의 부른 배를 형용하거나 혹은 돈 많은 부자의 교만스러움을 형용하기도 한다.
♣ 복곡[伏鵠]복곡은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의 “월 나라 닭은 홍곡(鴻鵠)의 알을 품을 수 없는 법이다.[越鷄不能伏鵠卵]”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복곡란(伏鵠卵)이 닭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 복과재생[福過災生]복이 너무 지나치면 도리어 재앙이 생긴다는 말.
♣ 복관[服官]벼슬하여 정사를 행한다는 뜻.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50에 대부에 임명되어 정사를 행한다.” 하였다.
♣ 복구[覆甌]복구는 금구복명(金甌覆名)의 준말로, 당 현종(唐玄宗)이 재상을 선정하여 그의 이름을 써서 금사발로 덮어 가려놓고 신하에게 알아맞추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복금와리[宓琴臥理]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 마루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없이 거문고만 연주했는데도 잘 다스려지며 교화가 이루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察賢》
♣ 복납[伏臘]여름철의 삼복(三伏)과 겨울철의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 이름인데, 보통 이날 술을 마시기 때문에 다정한 술자리를 말할 때 시어(詩語)로 많이 쓰인다.
♣ 복노[伏弩]복노는 매복(埋伏)된 쇠뇌를 이르는데, 자획(字畫)이 힘차서 기세가 충천함을 비유하기도 한다.
♣ 복도[複道]아래와 위 이중으로 나 있는 길이다.
♣ 복랍[伏臘]복랍(伏臘)은 여름의 복(伏)과 섣달의 납향(臘享)을 말함인데 복은 한여름이요, 납은 깊은 겨울이므로 여름 제사[夏祭] 겨울 제사[臘祭]를 말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삼복(三伏)과 납일(臘日).
♣ 복래경자[鵩來庚子]문인(文人)이 불행한 일을 당하였다는 뜻이다. 복조는 올빼미를 말한다. 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스승이 된 지 3년이 되던 해 4월 경자일에 올빼미가 날아와서 가의의 곁에 앉았는데, 올빼미는 불길한 조짐의 새였다. 이에 가의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면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 복래일[鵩來日]한 나라의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스승이 된 지 3년 만에 올빼미가 날아와서 가의의 곁에 앉았는데, 올빼미는 불길한 조짐의 새였으므로 가의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면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 복력[伏櫪]말이 마판에 엎드려 있다는 말로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비유한다. 환온시(桓溫詩)에 “늙은 기마가 마판에 엎드렸어도 뜻은 천리 길에 있다.[老驥伏櫪志在千里]" 했다.
♣ 복력기[伏櫪驥]천리마가 늙어서 마구간에 매여 있다는 뜻으로, 나이는 늙었으나 장한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말한다.
♣ 복력사천리[伏櫪思千里]좋은 말은 하루 천 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이미 늙어서 마굿간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만은 천리 가는 데에 있다고 한다.
♣ 복렵지재[卜獵之載]사냥하여 잡은 짐승을 싣고 돌아옴.’복렵’은 사냥하기 전에 점을 친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문왕(文王)이 장차 사냥을 떠나려 하여 점을 치니 ‘곰도 아니요, 용도 아니며……패왕(霸王)을 보좌할 인재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문자이다.
♣ 복령[茯苓]땅속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균류(菌類)의 하나로 한약재로 쓰인다. 사기(史記) ‘귀책열전(龜策列傳)’에 “천 년 묵은 복령을 복용하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 복례위인유극기[復禮爲仁由克己]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사욕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 하루라도 사욕을 이기고 예로 회복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신에 달린 것이지 남에게 달린 것이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顔淵》
♣ 복로[服老]고봉의 숙부(叔父)인 복재(服齋) 기준(奇遵)을 말함.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하였음.
♣ 복로[茯老]조선 영조ㆍ정조 때의 문신인 이기양(李基讓)의 호가 복암(茯菴)이므로 그를 높이어 이른 말이다.
♣ 복리진편[腹裡陳編]가슴속에 품고 있는 학문을 말한다. 한 나라 때 변소(邊韶)가 뱃속에다가 오경(五經)을 모두 품고 있었다고 한다.
♣ 복백[復魄]사람이 죽었을 때, 높은 데에 올라가 포백(布帛)을 가지고 죽은 이의 넋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의식을 이른 말이다.
♣ 복번운우[覆翻雲雨]반복 무상한 인정 세태를 말한다.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에 “손 뒤집어 구름이요 다시 뒤쳐 비로세.[翻手作雲覆手雨]”라는 구절이 있다.
♣ 복복[卜卜]딱딱다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
♣ 복비[宓妃]복비는 본래 복희씨(伏羲氏)의 딸인데 낙수(洛水)에 익사하여 수신(水神)이 되었다 한다.
♣ 복비[虙妃]복희씨(伏羲氏)의 딸로서 물에 빠져 죽은 다음 하(河)의 귀신이 되었음.
♣ 복비말생진[宓妃襪生塵]복비는 복희씨(伏羲氏)의 딸로서, 낙수(洛水)에 빠져 죽어 수신(水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당(唐)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시에 “일찍이 들으니 복비의 버선이, 물을 건너면 먼지가 나는 듯했다 하네[嘗聞宓妃襪 渡水欲生塵].” 한 데서 온 말이다.
♣ 복사[蝮蛇]복사는 독이 있는 큰 뱀을 말하는데,, 염토(炎土) 지대에는 이런 것들이 사람을 많이 해친다는 뜻으로, 초사(楚辭) 초혼(招魂)의 “복사가 쌓여 있고 봉호는 천리에 우글거린다[蝮蛇蓁蓁 封狐千里].” 하였다.
♣ 복사[鵩舍]한 문제(漢文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 가의(賈誼)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어 있을 때 흉조로 알려진 올빼미가 가의의 집으로 날아들어왔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귀양살이하는 집을 뜻한다. 《史記 卷八十四 賈誼傳》
♣ 복삼임[腹三壬]귀상을 말한다. 위지(魏志) 관로전(管輅傳)에 “내가 ‘이마 위에 나온 뼈가 없고 배에도 삼임(三壬)이 없으니 장수하지 못할 징조이다.’했다.” 하였다.
♣ 복상맹[卜商盲]복상은 공자의 제자로 자가 자하(子夏)인데, 일찍이 아들을 잃고 울다가 실명(失明)을 하였다 한다.
♣ 복상비[卜商肥]복상은 공자의 제자인 자하(子夏)의 성명임. 자하가 일찍이 증자(曾子)를 만나 보았는데, 자하가 한번은 수척했다가 한번은 살쪘으므로, 증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자하가 대답하기를, “나와서는 부귀(富貴)의 즐거움을 보고서 그것이 하고 싶고, 들어가서는 선왕(先王)의 도를 보고 또 그것을 좋아하니,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싸우므로 몸이 수척해지고, 끝내는 선왕의 도가 이겼으므로 살찐 것이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淮南子 精神訓》
♣ 복상비척[卜商肥瘠]복상은 자하(子夏)인데, 자신의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한다.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에 “자하가 증자를 만났는데, 증자가 ‘어찌 그리 살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하므로, 증자가 ‘무슨 뜻이냐?’ 하니, 답하기를 ‘내 마음 속에 선왕(先王)의 의(義)와 부귀의 즐거움이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말랐었는데, 이제 선왕의 의가 이겼기 때문에 살쪘다.’ 했다.” 하였다.
♣ 복상상간[濮上桑間]망국(亡國)의 음악으로, 음란한 음악을 말한다. 상간은 지명(地名)이다. 《禮記 樂器》
♣ 복상생송[腹上生松]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정고(丁固)가 배 위에 소나무가 난 꿈을 꾸고서 송(松) 자를 분석해 보니 십팔공(十八公)이 되므로, 18년 후에 공(公)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해몽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 복상승진[鵩上承塵]하마터면 유배지에서 죽을 뻔하였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권신(權臣)의 배척을 받고 장사(長沙)로 쫓겨났을 때, 죽음을 예고하는 복조(鵩鳥)가 승진(承塵)에 모여든 것을 보고는 ‘복조부(鵩鳥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史記 賈生列傳ㆍ西京雜記 卷5》
♣ 복생[伏生]복생은 곧 복승(伏勝)을 이름.
♣ 복성[復性]그 심성(心性)을 회복함을 이른 것임. 당(唐) 이고(李翶)의 복성서(復性書)에 “誠者 聖人性之也 復其性 聖人脩之"라 하였음.
♣ 복성[福星]목성(木星), 또는 세성(歲星)이라고도 하는데 그 별이 비치는 곳에는 백성이 복을 받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복성[福星]복성은 희망과 행복을 주는 사람이란 뜻으로,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직책을 말한다. 산당사고(山堂肆考) 신직(臣職) 전운사(轉運使)에, “철종(哲宗)이 선우신(鮮于侁)을 동경 전운사(東京轉運使)로 삼자,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복성(福星)이 내려가게 되었다. 어찌하면 선우신과 같은 사람 백 명을 얻어서 천하에 배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다시 선우신을 전운사로 삼은 것은 참으로 마땅치 않은 듯하다. 그러나 동쪽 지방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면 선우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되니, 이 사람은 일로의 복성이다.’ 하였다.” 하였다.
♣ 복성동[福城東]화엄경(華嚴經)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두루 다니다가 복성 동쪽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났다.
♣ 복성서[復性書]당(唐) 나라 이고(李翶)가 지은 글로서 총 3편인테, 내용은 대략, ‘사람의 성(性)은 착하지만 칠정(七情)이 착한 성품을 가리게 된다. 그러므로 정(情)을 이기면 본래의 성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들이다.
♣ 복소무완란[覆巢無完卵]후한(後漢) 때 공융(孔融)에게 9세와 8세의 두 아이가 있었는데, 공융이 조조(曹操)로부터 체포되어 갈 적에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나 혼자만 죄를 받기 바란다. 내 두 아이는 면할 수 있겠는가?" 하자, 그 아이가 여쭙기를 “아버지께서는 엎어진 새집 아래 완전한 새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하였는데, 과연 그들도 체포되어 화를 당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言語》
♣ 복소완란[覆巢完卵]멸족(滅族)의 화를 당한 가운데에서도 어린 자손 하나만은 다행히 살아 남았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공융(孔融)이 사형을 당할 때 8세와 9세 된 두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 주기를 원했는데, 이때 두 아들이 “둥지가 깨질 때 알이 무사했던 적이 있었습니까?[大人豈見覆巢之下 復有完卵乎]”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 복소완아[覆巢完兒]아버지는 화를 당했으나 자식은 온전함을 비유한 말.
♣ 복송생[腹松生]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정고(丁固)가 배 위에 소나무가 난 꿈을 꾸고서 송(松) 자를 분석해 보니 십팔공(十八公)이 되므로, 18년 후에 공(公)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해몽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복상생송(腹上生松)의 고사이다.
♣ 복수[濮水]복수는 중국 하북성(河北省) 복양현(濮陽縣)에 있는 강이다.
♣ 복수[覆水]엎질러진 물. 한번 결과가 저질러진 것은 복구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든 신중을 기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음. 한번 떠난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음. 강태공(姜太公)의 부인이 어려운 시절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다가, 강태공이 재상(宰相)이 되자 돌아왔다. 강태공이 물을 엎지르며 부인에게 말하기를 그릇에 물을 도로 담아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번 결과가 저질러진 것은 복구할 수 없으니 무슨 일이든 신중을 기하라는 뜻으로 쓰인다.
♣ 복승[伏勝]복승은 진 시황(秦始皇)이 분서(焚書)할 때 백 편의 상서를 벽 속에 감춰 두었다가 한 나라가 일어난 뒤에 이 글을 찾아보니, 다 없어지고 29편만 남았으므로 이를 가지고 후진을 가르친 결과, 구양생(歐陽生)ㆍ공안국 등에게 전수되었다 한다 《漢書 卷八十八》
♣ 복신[茯神]식물 이름. 산 속의 소나무 뿌리 밑에서 기생하는 식물로 겉은 검고 속은 희거나 혹은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괴구상(塊球狀)이며 속에 소나무 뿌리의 심이 박혀있는 것을 복신(茯神)이라 하고, 심이 없는 것은 복령(茯苓)이라고 함. 《本草 茯苓》
♣ 복양초세[濮陽超世]춘추 시대 장주(莊周)가 복수(濮水)에서 낚시질할 때, 초왕(楚王)이 사신을 보내어 장주에게 초 나라 정승이 되어달라고 하자, 장주가 돌아본 체도 않으면서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겨 귀하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살아서 저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니, 나 역시 벼슬자리에 속박되지 않고 산 거북처럼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련다.” 하였다. 《莊子 秋水》
♣ 복억[鵩臆]가의(賈誼)가 지은 복부(鵩賦)에 말하기를, “복(鵩)은 불길한 새인데 집에 들어왔으므로, 주인이 점을 쳐보고 복에게 물은즉, 복은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하였다.
♣ 복유오거서[腹有五車書]독서를 많이 하여 지식이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천하(天下)에 나오는 혜시(惠施)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 복일양[復一陽]동지가 된 것을 뜻한다. 동지가 되면 음기는 다 사라지고 양기가 다시 생긴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복자[覆刺]복자는 곧 복자구서(覆刺具書)의 준말로, 즉 글을 갖추 써서 명함을 다시 들여보낸다는 뜻이다.
♣ 복자구서[覆刺具書]글을 갖추 써서 명함을 다시 들여보낸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때 고표(高彪)가 마융(馬融)을 찾아보러 갔으나 만나주지 않자, 고표가 명함을 다시 들여보내면서 “옛날에 주공(周公) 같은 이는, 문왕(文王)의 아버지요, 무왕(武王)의 형이요,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는 귀한 이로서 목욕 한번 하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머리를 움켜잡고 나왔으며, 밥 한 그릇 먹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고 나와서 선비들을 맞았으므로 천하가 그의 덕에 감복하였지만, 지금 그대야말로 보지 못한 것이 타당하다.”고 글을 써 보내니, 마융이 크게 부끄러이 여겨 사람을 보내 사과를 하고 만나기를 청하였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卷八十 文苑傳 高彪》
♣ 복자일금[宓子一琴]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란 사람인데, 단보(單父)라는 지방의 현령으로서 거문고를 타서 백성의 인심을 화평하게 만들었다.
♣ 복자하[卜子夏]복자하는 공자의 제자. 복자하가 삼년상을 마친 뒤 공자를 보고 거문고를 타며 절절하게 슬퍼했던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
♣ 복장[覆醬]아무 가치도 없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 유흠(劉歆)이 태현경(太玄經)을 보고는, 공연히 고생만 하였다고 양웅에게 말하면서, 뒷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간장 항아리를 덮는 데[覆醬]에나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얘기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揚雄傳下》
♣ 복장부[覆醬瓿]자운(子雲)은 한(漢) 나라 양웅(揚雄)의 자(字)이다. 양웅이 저술한 태현경(太玄經)에 대해서 유흠(劉歆)이 비평하기를 “오늘날 학자들은 역(易)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태현경(太玄經)을 어떻게 또 알겠는가. 뒤에 가서는 사람들이 장독을 덮는 데에나 쓰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하였다. 《漢書 揚雄傳 贊》
♣ 복재적선화재적악[福在積善禍在積惡]복(福)의 근원은 선(善)을 쌓는 데 있고, 화(禍)의 근원은 악(惡)을 쌓는 데 있다.
♣ 복조[鵩鳥]올빼미와 비슷하게 생긴 새로서 상서롭지 못한 요조(妖鳥)로 일컬어져 온다.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장사(長沙)로 유배된 뒤 그 열악한 풍토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복조부(鵩鳥賦)’를 지었었다.
♣ 복조부[鵩鳥賦]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장사(長沙)로 귀양가서 있을 때에 하루는 복조(鵩鳥)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서 자리의 구석에 조용히 앉았다. 가의는 그것을 불길하게 여겨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 복조비[鵩鳥飛]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참소를 입고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쫓겨나 있을 적에, 하루는 복조(鵩鳥)가 거처하는 집에 날아들어 오자, 복조가 날아드는 것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스스로 복조부(鵩鳥賦)를 지어 자신을 위로했는데, 그후 오래지 않아서 가의가 과연 요절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十八》
♣ 복주[卜晝]신하가 임금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여는 것을 복주(卜晝)라 한다. 안자(晏子)가 임금을 초대하였더니 해가 저물었는데도 즐거워하여 그대로 계속하자 하니, 안자는, “신(臣)이 낮 연회를 하기를 점쳤을 뿐 밤 연회는 점쳐 보지 않았습니다.” 하고, 사절하였다.
♣ 복주[福州]안동(安東)의 옛 이름.
♣ 복중금갑[腹中金甲]복중서(腹中書)와 같은 말로 공부를 많이 하여 지식이 풍부함을 말함.
♣ 복중사[腹中笥]속에 품고 있는 학문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한 나라 때 변소(邊韶)가 뱃속에다가 오경(五經)을 모두 품고 있었다고 한다.
♣ 복지[福地]복지는 신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 복지[鵩止]수명(壽命)이 길지 못함을 알리는 흉조(凶兆)라는 뜻. 문선(文選) 가의(賈誼) 붕조부서(鵬鳥賦序)에 “가의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있은 지 3년째 되던 해에 부엉이가 날아와 가의의 자리 옆에 앉자 자신의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을 알고 비감에 젖어 붕조부를 지었다.” 하였다.
♣ 복지[福地]신선이 산다는 명산승경(名山勝境)을 이른 말이다. 도교(道敎)에 72복지의 설이 있다. 보통 도관(道觀)을 가리키는데, 사찰의 뜻으로도 쓰인다. 중국 천태산(天台山)에 신선이 사는 복지(福地)가 있었다 한다.
♣ 복지곤괘[復之坤卦]복지곤괘란 곧 복괘와 곤계가 합한 괘상으로서 매우 길한 괘상이다.
♣ 복지부동[伏地不動]땅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음. 가만히 앉아서 시키는 일만 하고 월급만 받음. 나태한 공무원의 행동을 비유
♣ 복차지계[覆車之戒]먼저 간 수레가 엎어졌음을 보고 경계함. 앞사람의 실패를 뒷사람이 교훈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 복천[福川]동복(同福)의 고호(古號)이다.
♣ 복천존장[福川尊丈]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있던 김부륜(金富倫)을 가리킨다.
♣ 복철지계[覆轍之戒]앞의 수레가 엎어지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가 이를 보고 경계함
♣ 복파[伏波]복파는 화란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 복파[伏波]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마원은 건무(建武) 연간에 변경 지방을 정복하여 한 나라의 국경을 넓혔다.
♣ 복파거안[伏波據鞍]나이가 많이 들었으면서도 젊은이 못지 않게 기운이 왕성한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늙은 몸으로 안장에 걸터앉아 자신의 기력을 과시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54》
♣ 복파귀[伏波貴]복파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복파장군 마원(馬援)임.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 각종 전투에서 매번 승리하여 무제의 신임을 받아 복파장군이 되고 신식후(新息侯)에 봉해지는 등 죽을 때까지 존귀함을 누렸다. 《後漢書 卷二十四 馬援傳》
♣ 복파동주[伏波銅柱]서역(西域)을 정벌한 후한(後漢)의 복파 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이르러서 한 나라의 국경선을 획정하기 위해 세운 구리 기둥이다. 《後漢書 馬援傳》
♣ 복파취미[伏波聚米]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외효(隗囂)를 치기 위하여 친정(親征)했을 때, 제장(諸將)의 의견이 엇갈리자, 농서(隴西)에서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불러 자문을 구했는데, 마원이 쌀을 모아 쌓아 놓고 산과 골짜기 등 지형을 그림처럼 만들어 보여 주자,[聚米爲山谷 指畫形勢] 광무제가 “오랑캐가 내 눈 안에 들어왔다.”고 기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24 馬援傳》
♣ 복포[伏蒲]한 원제(漢元帝) 때에 황제가 병이 난 것을 기화로 태자(太子)를 폐하려 하였는데, 이때 사단(史丹)이란 신하가 청포 위에 엎드려 간함으로써 그 일을 막았다. 이로부터 올바르게 간하는 것을 “복포(伏蒲)"라 부르게 되었다. 《漢書 卷八十二 史丹列傳》
♣ 복피[襆被]낭관(郞官)의 별칭이다. 진(晉) 나라 위서(魏舒)가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무능한 낭관을 도태시킨다는 소문을 듣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고 곧장 행장을 정리해서 떠난[襆被而出]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魏舒傳》
♣ 복피이출[襆被而出]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을 떠나는 행동을 취했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위서(魏舒)가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낭관을 도태시킨다는 말을 듣고는 자진해서 행장을 꾸려서 나갔던[襆被而出] 고사가 있다. 《晉書 魏舒傳》
♣ 복행장[卜行藏]굴원(屈原)이 복거사(卜居辭)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점치는 정첨윤(鄭詹尹)에게 가서 어떻게 처세할까를 물은 것인데, 행(行)은 출세하는 것이요, 장(藏)은 몸을 감추어 숨어사는 것이다.
♣ 복형[復亨]운수가 회복되면 다시 형통하게 됨.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괘사(卦辭)에 “복(復)은 형(亨)하니 출입(出入)에 나쁜 것이 없다.”란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한 정전(程傳)에 ‘복형은 이미 회복되면 형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 복홀생송[腹忽生松]높은 작위(爵位)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장발(張勃)의 오록(吳錄)에 “정고(丁固)가 자기 배 위에 소나무가 나는 꿈을 꾸었는데, 누가 이르기를 ‘송(松) 자를 파자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되니, 18년 뒤에 틀림없이 공작(公爵)이 될 것이오.’ 했다.” 하였다.
♣ 복희선천[伏犧先天]복희씨가 임금이 되자 용마(龍馬)가 그림을 지고 하수(河水)에서 나왔다. 복희씨는 이 그림을 보고 법받아서 팔괘(八卦)를 그었는데, 이것을 ‘복희선천(伏犧先天)’이라 한다.
♣ 복희심[伏羲心]복희씨가 팔괘(八卦)를 그었다.
♣ 복희씨[伏犧氏]복희씨는 중국 상고 시대의 임금이다.
♣ 본각[本覺]현상계의 제상(諸相)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궁극의 깨달음.
♣ 본궁[本宮]그 궁. 옛 궁. 특히 출계(出繼)하여 즉위한 임금이 본디 살던 궁. 곧 여느 사람에 있어서 본가(本家)를 뜻하는 말.
♣ 본말전도[本末顚倒]일의 근본과 지엽적인 것이 거꾸로 됨. 즉, 일의 주가 되는 중요한 것과 대수롭지 않은 것을 뒤바꿔 잘못 이해하거나 처리한다는 말로, 일의 원줄기를 잊고 사소한 부분에만 사로잡힘
♣ 본병[本兵]병조(兵曹)의 별칭.
♣ 본초경[本草經]신농씨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이름으로, 약초 3백 65종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 봉[蓬]봉(蓬)이란 풀은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에 비유한다.
♣ 봉[封]하늘에 제사지내는 단(壇).
♣ 봉가[鳳駕]왕의 수레. 봉련(鳳輦).
♣ 봉가[鳳歌]초광(楚狂) 접여(接輿)가 공자의 문을 지나가며 부른 노래. “봉이여 봉이여, 어찌 이리 덕이 쇠하노.[鳳兮鳳兮 何韓之衰也]”하였다. 《論語 微子》
♣ 봉각[鳳閣]중서성(中書省)을 봉각(鳳閣)이라 한다.
♣ 봉간[封干]비간(比干)은 은 나라의 포악한 임금 주(紂)에게 간(諫)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인데, 주 무왕이 주를 쳐서 멸하자 비간의 무덤을 봉해 주었다.
♣ 봉개[鳳蓋]천개(天蓋)가 달린 수레로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 봉거[鋒車]임금이 신하를 급히 부를 때에 내리는 경쾌한 수레를 말한다.
♣ 봉격[捧檄]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벼슬하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효자 모의(毛義)가 집안이 빈한하여 모친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다가 현령(縣令) 임명장을 받들고서[奉檄] 그지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모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관직을 그만두고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9 劉平等傳 序》
♣ 봉격희동안[奉檄喜動顔]벼슬길에 나아가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한다는 뜻이다. 후한(後漢)의 모의(毛義)가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긴다고 소문이 나자, 장봉(張奉)이 그의 이름을 흠모하여 찾아갔다. 얼마 동안 함께 앉아 있을 때 모의를 현령으로 삼는다는 격문이 오자, 모의의 얼굴에 좋아하는 기색이 가득하였다. 이에 장봉은 이를 천하게 여기고서 그곳을 떠났다. 그 뒤에 모의는 어머니가 죽자 벼슬을 내던지고 상복을 입었으며, 여러 차례 불러도 나가지 않으니, 장봉이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을 탄식하였다. 《後漢書 卷69 竇何列傳》
♣ 봉계[鳳溪]길재(吉再)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다.
♣ 봉고파직[封庫罷職]창고를 봉하고 관직을 파함(그만두게 함). 암행어사(暗行御史)나 감사(監司)가 바르지 못한 관리(수령)를 파면시키고 관가의 창고를 잠그던 일
♣ 봉구봉[鳳求鳳]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蜀)나라 부호(富豪) 탁왕손(卓王孫)의 집 연회(宴會)에 초대받았다. 그 때에 탁왕손의 딸 문군(文君)이 새로 과부가 되었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음율(音律)을 좋아한다는 것을 사마상여가 알고, 거문고로 숫봉이 암컷을 구하는 곡조[鳳求鳳曲]를 탔더니 과연 문군이 밤에 상여에게 달려 와서 서로 부부(夫婦)가 되었다고 한다.
♣ 봉구약수관[蓬邱弱水寬]모두 멀다는 뜻인데, 봉래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고 약수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江)으로 길이가 삼천 리나 되고 물의 부력(浮力)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 봉구황[鳳求凰]금곡(琴曲)의 이름. 봉황(鳳凰)은 화목한 부부의 상징으로 많이 쓰임.
♣ 봉궐[鳳闕]봉궐은 한(漢) 나라 때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는 궁궐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궁궐 또는 조정을 가리킨다.
♣ 봉기불탁속[鳳饑不啄粟]봉은 굶주려도 좁쌀을 쪼지 않음. 굳은 지조
♣ 봉노[烽櫓]봉로는 봉화대(烽火臺)를 말한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민가 위에 씩씩하게 서 있는 기정이요, 해자(垓字)에 어린 봉로 그림자[旗亭壯邑屋 烽櫓蟠城隍]”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3 入衡州》
♣ 봉단[鳳團]좋은 차[茶]를 가루로 반죽하여 용이나 봉처럼 뭉쳐 놓은 것이다.
♣ 봉당[封堂]묘소를 말한다.
♣ 봉대곡[鳳臺曲]악부(樂府) 곡사(曲辭)의 하나인데,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당시에 퉁소를 잘 불던 소사(簫史)라는 사람과 서로 좋아하므로, 마침내 그에게로 시집을 보냈는데, 나중에는 농옥도 퉁소를 배워 봉황(鳳凰)의 울음소리를 잘 냄으로써 봉황이 그의 집에 모여들자, 마침내 봉대를 짓고 부부(夫婦)가 그곳에서 살다가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봉황을 따라 신선(神仙)이 되어 갔다는 내용을 노래한 것이다.
♣ 봉덕[鳳德]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공자의 문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그리도 덕이 쇠했는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그는 공자를 봉에 비유하여 태평 시대도 아닌데 숨지 않고 세상에 나온 것을 기롱한 것이었다. 《論語 微子》
♣ 봉덕지쇠[鳳德之衰]초(楚) 나라의 은자(隱者) 접여(接輿)가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새여, 봉새여, 어찌 그리 덕이 쇠한고[鳳兮鳳兮 何德之衰].”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봉새란 세상이 도가 있을 때에만 나타나고 무도한 때에는 숨어버리는 것이므로, 접여가 이 봉새를 공자에 비유하여, 공자가 그 무도한 세상에 은거하지 않는 것을 기롱한 것이다. 《論語 微子》
♣ 봉도[奉道]도교를 믿다.
♣ 봉도[蓬島]선인(仙人)이 살고 있는 해도(海島).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 봉도연하[蓬島煙霞]봉래산(蓬萊山) 즉 금강산을 끼고 있는 간성(杆城)의 선경(仙境)을 비유한 말이다.
♣ 봉두난발[蓬頭亂髮]봉두는 본래 쑥대머리를 가리키는 말로 웃자란 쑥의 줄기같이 긴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진 모양을 가리킴.
♣ 봉두이면[蓬頭黧面]흐트러진 머리와 때묻은 얼굴로, 여기서는 초라한 모습을 뜻한다.
♣ 봉랍[鳳蠟]봉황새의 모양을 그려 넣은 납촉(蠟燭)을 말함.
♣ 봉래[蓬萊]신선이 산다는 해도(海島)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 봉래각[蓬萊閣]중국 산동성(山東省) 봉래현(蓬萊縣) 단애산(丹崖山) 위에 있는 누각 이름으로, 예로부터 문인 학사들이 많이 모여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 봉래궁[蓬萊宮]당 나라의 궁전 이름으로, 장안(長安)의 동쪽 봉래지(蓬萊池) 옆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대명궁(大明宮)이었는데 고종(高宗) 때 봉래궁으로 바꿨다. 전하여 왕궁(王宮)의 뜻으로 쓰인다.
♣ 봉래도[蓬萊島]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서 선인이 산다는 곳임.
♣ 봉래산[蓬萊山]발해(渤海)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 봉래산[蓬萊山]중국에서 가상적으로 이름 지은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신선이 살고 불로초(不老草)와 불사약(不死藥)이 있다는 영산(靈山).
♣ 봉래오색[蓬萊五色]봉래궁(蓬萊宮)은 당(唐)나라 대명궁(大明宮)인데, 여기서는 우리 궁궐에 비유하여 쓴 것. “천자(天子)의 정궁(正宮)이어서 그 뒤에는 항상 오색의 서운(瑞雲)이 떠 있다.” 하였다.
♣ 봉래원교[蓬萊圓嶠]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산이다. 발해(渤海)의 동쪽에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그 안에 대여(岱輿), 원교(圓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선산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바다에 떠 있으므로 항상 조수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므로 상제(上帝)가 사방으로 떠내려갈까 걱정스러워서 열다섯 마리의 자라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떠받치고 있게 하였는데, 3교대로 하여 6만 년마다 한 번 교대하게 하였다. 이에 다섯 선산이 비로소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용백국(龍伯國)에 거인이 있어서 한 번 낚시질을 하여 여섯 마리의 자라를 잡아서 이를 짊어지고 그 나라로 돌아가자, 대여와 원교 두 산이 북극으로 흘러가서 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 봉래전각과금오[蓬萊殿閣跨金鰲]금오(金鰲)는 금빛으로 생긴 큰 자라. 신선(神仙)이 사는 해중(海中)에서 사는데, 이 자라가 신선이 거처하는 봉래전(蓬萊殿) 밑을 머리로 이고 있다는 고사이다.
♣ 봉래천[蓬萊淺]한(漢) 나라 때의 신선(神仙)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자, 마고가 봉래산(蓬萊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 뒤에 마고가 와서는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이미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네. 이번에 봉래산에 가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적보다 바닷물이 반으로 줄어들었더군. 그러니 어찌 다시 육지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神仙傳 麻姑》
♣ 봉래청천[蓬萊淸淺]벽해(碧海)가 상전(桑田)이 되는 큰 변천이 있으리라는 말이다. 봉래는 동해(東海) 가운데 있는 섬 이름인데, 선녀(仙女)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그대를 접대한 이후로 동해가 세 번 상전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는데, 지난번 봉래도(蓬萊島)를 가보니 물이 얕아져서 전에 우리가 서로 만났을 때보다 대략 반쯤 더 얕아졌으니, 아마도 동해가 다시 육지로 바뀔 듯합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봉래풍악[蓬萊楓岳]금강산의 별칭. 여름철엔 봉래, 가을엔 풍악이라 한다.
♣ 봉력[鳳曆]옛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때에, 봉(鳳)새가 천시(天時)를 안다 하여 봉조씨(鳳鳥氏)로써 역정(曆正)을 삼았으므로, 세상에 기년(紀年)을 봉력(鳳曆)이라 한다.
♣ 봉련[鳳輦]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 봉루[鳳樓]금중(禁中)에 설치한 아름다운 누각(樓閣)을 가리킨다.
♣ 봉류[封留]한 고조(漢高祖)가 개국공신 장량(張良)을 유후(留侯)에 봉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봉릉[鳳綾]당 현종(唐玄宗) 때 영왕(寧王)이 기왕(岐王)ㆍ설왕(薛王) 이하를 거느리고 주청(奏請)하여 승여(乘輿) 앞에 붓을 놓고 행재(行在)의 일을 적어 천보(天寶) 10년에 3백 권을 지어 바치니, 현종이 보고 자주[紫] 용봉릉(龍鳳陵)에 책 표제를 쓰게 하여 별각(別閣)에 두게 했다.
♣ 봉린노위[封隣魯衛]노(魯) 나라는 주공(周公)의 봉국(封國)이고 위(衛) 나라는 주공의 동생 강숙(康叔)의 봉국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노 나라와 위 나라의 정사는 마치 형제처럼 비슷하다.[魯衛之政 兄弟也]”라는 말이 있다.
♣ 봉마[蓬麻]봉생마중(蓬生麻中)의 준말.
♣ 봉마공장[蓬麻共長]다른 사람의 영향의 받아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대가 삼 속에서 나면 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며, 흰 모래가 검은 흙 속에 있으면 저절로 검어진다.” 하였다.
♣ 봉마붕[蓬麻朋]그와 사귀게 되면 자연히 바르게 되는 친구를 말한다. “쑥이 삼대 밭에 나면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아진다.[蓬生麻中 不扶而直]”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荀子 勸學》
♣ 봉마토사상전도[蓬麻兎絲相顚倒]부부(夫婦)의 이별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신혼별(新婚別) 시에, “새삼 덩굴이 쑥대 삼을 타고 오르니, 이 때문에 덩굴이 길게 뻗지 못하네. 딸을 원정군에게 시집보내려거든, 차라리 길가에 버리는 게 나으리라[兎絲附蓬麻 引蔓故不長 嫁女與征夫 不如棄路傍].” 한 데서 온 말로, 새삼 덩굴은 본디 소나무나 잣나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하찮은 쑥대와 삼을 타고 올라가기 때문에 자랄 수가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7》
♣ 봉명전[奉明殿]민간 출신의 제왕(帝王)이 자기 친부모의 묘소를 개장하는 일을 말한다. 봉명전(奉明殿)은 한(漢) 나라 선제(宣帝)의 생부(生父)인 사황손(史皇孫)의 묘소가 봉명현(奉明縣)에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漢書 卷63ㆍ文選 卷10 西征賦 注》
♣ 봉명화[鳳鳴和]춘추(春秋)시대 때에 진경중(陳敬仲)이 제(齊) 나라에 망명하여 갔는데 의중(懿仲)이 그에게 딸을 주려고 점을 쳤더니 점괘에, “숫봉 암봉이 날아 화합하게 울음운다. 팔대(八代)를 지나면 더할 수 없이 높겠구나.” 하더니 과연 그 뒤에 그 자손이 제(齊) 나라 임금이 되었다.
♣ 봉모[鳳毛]봉황의 터럭 하나라는 말로, 부조(父祖)의 유풍(遺風)을 이어받은 걸출한 인물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진(晉) 나라 왕소(王劭)와 남조 제(齊)의 사초종(謝超宗)이 각각 환온(桓溫)과 제 무제(齊武帝)로부터 “봉모(鳳毛)를 확실히 이어받아 가지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容止ㆍ南齊書 卷36 謝超宗列傳》
♣ 봉모[鳳毛]자식이 아버지의 훌륭한 풍채를 닮았음을 비유한 말이다. 진(晉) 나라 때 왕소(王邵)가 자기 아버지인 왕도(王導)의 풍채를 닮았는데, 그가 시중(侍中)이 되어 공복(公服)을 입고 들어오자, 환온(桓溫)이 그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원래 봉의 터럭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故自有鳳毛]”고 하며 찬탄을 했던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容止》
♣ 봉목시성[蜂目豺聲]벌과 같은 눈, 승냥이 같은 소리. 흉악(凶惡)한 인상(印象)
♣ 봉미[鳳尾]대나무 가지의 별칭. 대나무 가지 끝에 한들거리는 여러 개의 잎들이 봉황 꼬리와 비슷하므로 붙여진 이름임.
♣ 봉미[鳳尾]파초의 일종. 봉미초(鳳尾蕉). 그 잎이 봉의 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輟耕錄》
♣ 봉미초[鳳尾草]상록목본(常綠木本)의 식물 이름. 여름에 꽃이 피는데 단성(單性)이며 화피(花被)도 없다고 함. 《本草 無漏子》
♣ 봉방의질[蜂房蟻垤]벌이나 개미들도 각자 하나씩의 방을 차지하고 있듯, 이 세상의 어떤 존재이든 간에 대소(大小)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서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 봉번이효[奉蘩以孝]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제사를 정성껏 받든다는 것. 시경(詩經) 소남(召南) 채번(采蘩)에 “어디서 다북쑥 캐나 저 여울가 못가로세[于以采蘩 于沼于池]"라고 하였음.
♣ 봉봉[唪唪]열매가 많이 달린 모양
♣ 봉봉불불[蓬蓬拂拂]다같이 바람이 부는 모양을 말하는데, 즉 북풍(北風)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 봉봉연[蓬蓬然]봉봉연은 바람이 일어나 거칠 것 없이 불어제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바람이여, 지금 그대는 북해에서 쌩쌩 일어나 남해로 쌩쌩 들어가고 있다.[今子蓬蓬然起於北海 蓬蓬然入於南海]”는 말이 있다.
♣ 봉비[葑菲]시경(詩經) 패풍(邶風) 곡풍(谷風)의 “무 캐고 순무 캐네. 뿌리가 맛 없다고 잎까지 내버릴까.[采葑采菲 無以下體]”에서 나온 말로, 비루하지만 하나의 좋은 덕(德)을 자기도 가지고 있다는 뜻의 겸칭(謙稱)이다.
♣ 봉비불유[葑菲不遺]무는 본디 뿌리와 잎을 다 먹는데, 뿌리는 혹 좋은 때도 나쁜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잎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전하여 무슨 물건이라도 좋은 점은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詩經 邶風, 谷風》
♣ 봉비하체인소열[葑菲下體人所悅]순무와 무[葑菲]는 두 가지 다 잎도 뿌리도 먹을 만한 채소인데, 그 뿌리는 때에 따라 맛이 있을 때가 있고 맛이 없을 때도 있다. 따라서 그 채소를 캐는 사람은 꼭 그 뿌리만을 보고 캐서는 안 되듯이 인간 부부 사이도 얼굴이 젊고 예뻤을 때가 있었는가 하면 늙고 병들 때도 있는데, 지금 늙고 병들었다 하여 옛날 젊어 함께 고생하던 시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임. 《詩經 邶風 谷風》
♣ 봉사[鳳社]강원도 고성군(高城郡) 오대면(五臺面) 금강산에 있는 건봉사(乾鳳寺)를 가리킨다.
♣ 봉사[封事]누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밀봉하여 천자에게 올리는 서장(書狀).
♣ 봉산[蓬山]동래(東萊)의 고호이다.
♣ 봉산[蓬山]본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이르는데, 전하여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인 봉관(蓬館)의 뜻으로도 쓰인다.
♣ 봉산[鳳山]황해도 봉산. 그 이름에 의하여 명사(明使) 호부낭중(戶部郞中)가 정작 봉이 나타난 산으로 보아 성대(聖代)의 상서를 부(賦)로 노래했음.
♣ 봉산관[蓬山館]호당(湖堂), 즉 독서당(讀書堂)을 가리킨다.
♣ 봉산장실[蓬山藏室]모두 장서실을 가리킴. 후한 때 장서실인 동관(東觀)을 가리켜 노씨장실(老氏藏室)ㆍ도가봉래산(道家蓬萊山)이라 일컬은 데서 온 말인데, 즉 노씨장실은 옛날 노자(老子)가 장실주하사(藏室柱下史)를 지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도가봉래산은 곧 봉래산의 선부(仙府)에는 유경 비록(幽經祕錄)이 다 쟁여져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後漢書 卷二十三》
♣ 봉상위녀섬[縫裳魏女攕]시경(詩經) 위풍(魏風) 갈구(葛屨)에, “가녀린 여자의 손이여, 가히 치마를 지을 만하도다.[摻摻女手 可以縫裳]”하였다.
♣ 봉생마중[蓬生麻中]훌륭한 벗을 둔 것을 말함. 《荀子》 勸學에 “쑥이 삼대 속에 나면 붙잡지 않아도 곧다.[蓬生麻中 不扶而直]" 하였음.
♣ 봉선[封禪]옛적에 제왕(帝王)이 천하가 태평한 공을 이루면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하고 옥첩(玉牒)을 땅에 봉하는 것이니, 이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 봉선서[封禪書]사기(史記)의 편명(篇名)이다. 황제가 태산(泰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봉(封)이라 하고, 태산 아래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 봉성[鳳城]봉화(奉和)의 고호이다.
♣ 봉성[鳳城]장안(長安)에 대한 이칭으로 제도(帝都)를 가리킨다.
♣ 봉소[鳳沼]대궐 안에 있는 못. 중서성(中書省)을 가리키는 봉황지(鳳凰池)와 같은 말로, 조정을 가리킨다.
♣ 봉소성단채운수[鳳簫聲斷彩雲愁]혼령이 이미 하늘 위로 멀리 떠나갔다는 말이다. 소사(蕭史)와 농옥(弄玉)이 피리를 불면 봉황이 날아오곤 하였는데, 뒤에 봉황을 타고서 채운(彩雲) 위로 날아 올라갔다고 한다. 참고로 당(唐) 나라 심전기(沈佺期)의 시 ‘봉소곡(鳳簫曲)’에 “昔時嬴如厭世紛 學吹鳳簫乘彩雲”이라는 구절이 있다.
♣ 봉수[鳳髓]값비싼 식품으로 치는 것이나, 값진 가야금 줄의 뜻으로도 쓰인다.
♣ 봉수[鳳髓]봉황의 골수로, 뛰어난 사람이 남긴 진귀한 글을 가리킨 듯하다.
♣ 봉수[鳳髓]봉황의 골수인데 진미(珍味)의 뜻으로 쓰인다. 이함용(李咸用)의 부귀곡(富貴曲)에 “하얀 구슬잔엔 봉수가 무르녹고, 불그레한 상저에는 성순이 가늘어라.[雪暖瑤杯鳳髓融 紅施象筯猩脣細]" 하였다.
♣ 봉수[鳳髓]송 나라 진복령(秦茯苓)의 아칭(雅稱)
♣ 봉시[封豕]큰 돼지라는 뜻인데, 성질이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4년 조(條)에, “오(吳)가 봉시와 큰 뱀이 되어 상국(上國)을 범한다.” 하였다.
♣ 봉시상호[蓬矢桑弧]봉시는 쑥대로 만든 살이며 상호(桑弧)는 뽕나무로 만든 활. 고대에는 남자를 낳으면 활을 문 왼쪽에, 여자를 낳으면 문 오른쪽에 베풀었으며, 세자(世子)를 낳으면 사인(射人)이 상호에 봉시로 천지와 사방에 쏘니 이는 원대한 뜻을 품으라는 뜻이라 한다. 《禮記 內則》
♣ 봉시상호[蓬矢桑弧]아들을 처음 낳을 때에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사방으로 쏘고는 문에 거는 풍속이 있는데, 그것은 남자는 사방에 다니면서 사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 봉심[蓬心]강직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 봉심[蓬心]원리에 통달하지 못하는 마음. 《莊子 逍遙遊》
♣ 봉아[蜂衙]벌집 즉 봉소(蜂巢)를 말한다. 꿀벌들이 아침저녁으로 군아(軍衙)처럼 때를 정하여 집을 드나드는 것을 이른 말로, 관리들이 조석으로 아참(衙參)하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 봉안역[奉安驛]광주(廣州)의 속역(屬驛)이다.
♣ 봉암[鳳巖]이경여(李敬輿)의 호이다.
♣ 봉액[縫腋]공자가 송 나라에 살 때에는 그 곳에서 쓰는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노(魯) 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縫腋衣)를 입었다 하여 후세에서 유학(儒學)하는 이의 의관(衣冠)을 이것으로 말하였다.
♣ 봉액[逢掖]봉액은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옷을 말한다.
♣ 봉액[鳳掖]봉액은 한림원(翰林院)을, 가리킨다.
♣ 봉액[縫掖]유자(儒者)가 입는, 겨드랑만 꿰매어 옆이 넓게 터진 옷.
♣ 봉억[鳳臆]천리마의 별칭.
♣ 봉연[鷄人]봉연은 제왕의 가마임.
♣ 봉영[逢迎]만나는 사람들마다 병사(兵使)의 눈치만 보며 비위를 맞추려 한다는 뜻이다.
♣ 봉영[蓬瀛]봉래산(蓬萊山)과 영주산(瀛洲山)을 말하는데 신선이 산다고 한다.
♣ 봉영이매[逢迎魑魅]소동파(蘇東坡)가 먼 곳으로 귀양가서 임금에게 올린 글에, “이매(魑魅)가 바다 위에 마중 나왔으니,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리이까.”라는 구절이 있다.
♣ 봉옥[封屋]임금의 교화가 사해에 두루 미쳐 풍속이 아름다워지니 집집마다 모두 덕행(德行)이 있어서 정표(旌表)할 만하다는 말이다.
♣ 봉요[蜂腰]벌의 허리처럼 한 가운데가 가늘다는 뜻이다. 시를 지을 때 칠언시의 4번째 자가 평성(平聲)이고 그 앞뒤의 자가 측성(仄聲)인 경우 또는 오언시에 2번째 글자가 평성(平聲)이고 그 앞 뒤 자가 측성(仄聲)인 경우 허리가 짤록한 벌과 같다하여 봉요(蜂腰)라고 하며 이를 피한다.
♣ 봉우장집[鳳羽長戢]군자(君子)가 출세(出世)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 봉우진[封于秦]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갔다가 비를 만나 소나무 밑에 피하고, 그 소나무를 대부(大夫)로 봉했다.
♣ 봉원[蓬原]동래(東萊)의 별칭이다.
♣ 봉유[封留]전한(前漢)의 공신(功臣) 장량(張良)이 유후(留侯)에 봉해진 것을 말한다. 한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에 공신을 봉하면서 장량에게 제(齊)나라 땅에 삼만 호(三萬戶)되는 지방을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니, 그는 ‘신이 처음 폐하(陛下)를 유(留)에서 만났으니 유후(留侯)로 봉하면 족합니다.” 하였다.
♣ 봉유족[封留足]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공신들을 봉(封)할 적에, 장량(張良)의 공이 가장 크다 하여 그에게 삼만호(三萬戶)를 봉해주려고 하자, 장량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신(臣)은 유(留) 땅에 봉해진 것만으로 만족하고, 삼만호는 감히 당치 않습니다.” 하여, 마침내 장량을 유후(留侯)로 봉해준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五十五》
♣ 봉의[縫衣]옛날 유자(儒者)가 입던 소매가 넉넉한 옷이다.
♣ 봉이[封姨]풍신(風神)의 이명(異名)이다.
♣ 봉익[鳳翼]봉황의 날개로, 대궐 처마를 가리킨다.
♣ 봉인[封印]밀봉한 자리에 도장을 찍음. 또는 그 도장.
♣ 봉인[封人]변방을 지키는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 봉인[奉引]임금의 앞에서 수레를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 봉인[封人]주(周)나라 때 사도(司徒)에 소속된 벼슬로, 제왕의 사직단과 경기 지방의 수호를 맡았다.
♣ 봉일[捧日]송나라가 망할 때에 황태후인 가씨(賈氏)의 꿈에,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것을 어떤 선비가 받아서 받들고 있었는데, 깨어서 그 꿈에 보았던 선비를 찾다가 육수부(陸秀夫)라는 사람을 발견하여 발탁 등용하였는데, 그 후에 과연 육수부는 원(元)나라 군사에 쫓기면서도 어린 8세 황제를 모시고 충성을 다하다가 최후에는 그 어린 황제를 업고 물로 뛰어들어 같이 죽었다.
♣ 봉입금지[鳳入禁池]중서성(中書省)을 봉황지(鳳凰池)라 한다.
♣ 봉입금지교[鳳入禁池翹]요직(要職)에서 벼슬한 것을 말한다. 중서성(中書省)이 금중(禁中)에 있어 중요한 정무(政務)를 처리하여 임금의 총애를 많이 받기 때문에, 중서성을 봉황지(鳳凰池)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는 문하성(門下省)을 지칭한 것이다. 문선(文選) 사조 직중서성시( 謝眺 直中書省詩)에 “여기가 상봉지라는 곳이지, 패옥소리 쟁그랑쟁그랑 울리네.[玆言翔鳳池 鳴珮多淸響]" 하였다
♣ 봉자[鳳觜]십주기(十洲記)에 “도가(道家)에서 봉의 부리와 기린의 뿔을 합하여 달여 만든 아교를 속현교(續絃膠)라고 하는데 이를 사용해 끊어진 활줄을 잇는다.”고 하였다.
♣ 봉자[鳳姿]임금의 자태
♣ 봉자서로[鳳觜犀顱]신체적으로 특이함. 봉의 부리, 무소 두개골은 관상학(觀相學)에 있어 모두 귀인(貴人)의 상에 속함.
♣ 봉장추[鳳將雛]봉황이 새끼를 거느리고 있다는 뜻. 어버이와 자식이 함께 있는 것을 노래한 옛 악곡의 이름이다. 고악부(古樂府) 농서행(隴西行)에, “봉황새 추추히 우는구나, 한 어미 아홉 새끼 거느리고[鳳凰鳴啾啾 一母將九雛].”라 했음.
♣ 봉전[葑田]줄풀[菰]이나 마름[菱]이 여러 해 동안 자라며 썩은 진흙이 쌓여서 밭이 된 것을 말한다.
♣ 봉조[鳳詔]봉조는 임금의 조칙(詔勅)이다.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이 오색지(五色紙)에다 조서(詔書)를 써서 나무로 만든 봉(鳳)의 입에 물려서 반포(頒布)하였다.
♣ 봉조부지상중니[鳳鳥不至傷仲尼]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봉황새가 오지 않고 하도가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그만인 모양이다.[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라고 한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봉주[鳳咮]연석(硯石)의 이름이다. 송(宋) 나라 때 용배산(龍焙山)은 마치 나는 봉황이 고개를 숙여 물은 마시는 형상과 같았는데, 그 봉황의 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결이 옥(玉)같이 고운 창흑색(蒼黑色)의 돌이 있어, 그 돌로 만든 벼루를 소식(蘇軾)이 봉주(鳳咮)라고 이름한 데서 온 말이다.
♣ 봉주[鳳州]현재의 섬서성(陝西省) 봉현(鳳縣).
♣ 봉지[鳳墀]궁전(宮殿) 또는 궁궐의 뜰을 말한다.
♣ 봉지[鳳池]당(唐) 나라 중서성(中書省)이 있는 못 이름인데, 전하여 중서성을 일컫는다. 우리나라 한림원(翰林院)에 해당함.
♣ 봉지[鳳池]봉지(鳳池)는 궁궐에 있는 봉황지(鳳凰池)로서 즉 금중(禁中)을 말한다.
♣ 봉지완공영[蓬池阮公詠]완공은 진(晉) 나라 때 완적(阮籍)을 가리킴. 완적의 영회시(詠懷詩)에 “봉지 가에서 배회하고 다시 머리 돌려 대량을 바라보네[徘徊蓬池上 還顧望大梁].”라고 한 것을 말하는데, 봉지는 즉 진(晉) 나라의 장군 조적(祖逖)이 비분강개하여 후조 황제(後趙皇帝)를 참칭한 오랑캐 석륵(石勒)과 싸웠던 곳이다. 《文選 卷二十三》
♣ 봉창[篷牕]뜸을 걸어 놓은 배[船]의 창을 말한다.
♣ 봉책[鳳柵]봉책(鳳柵)은 봉황성(鳳凰城)을 가리킨다.
♣ 봉천[奉倩]봉천은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순찬(荀粲)의 자임.
♣ 봉천위[奉天圍]당 덕종(唐德宗)이 봉천(奉天)으로 피난을 갔다가 주자(朱泚)의 반군(叛軍)에게 포위를 당한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12》
♣ 봉천조[奉天詔]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당하여 봉천(奉天)으로 쫓겨가 있을 때, 주자의 군대는 철통같이 봉천을 포위하였고, 양식도 거의 다하여 상황이 매우 다급해지자, 덕종이 장리(將吏)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여 스스로 위망의 지경에 빠졌으니, 이는 실로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경들은 아무 죄도 없으니, 의당 일찍 투항을 해서 처자를 구해야 할 것이다.”고 한 것을 말한 것이다. 《資治通鑑 卷二百二十九 唐德宗紀》
♣ 봉체[封遞]벼슬아치가 암행어사의 봉고(封庫)로 인해 체직되는 일.
♣ 봉춘군[奉春君]유경(劉敬)의 봉호(封號).
♣ 봉취[鳳吹]생황(笙篁)이나 퉁소 등의 악기. 여기서는 임금의 행차에 연주하는 음악을 뜻한다.
♣ 봉침[縫針]옷을 꿰매는 바늘.
♣ 봉태[逢殆]액을 당하다.
♣ 봉패위[逢覇尉]한(漢) 나라 때의 명장(名將) 이광(李廣)이 한때 파직되어 초야에 있을 적에, 하룻밤에는 기병(騎兵) 하나를 데리고 나가 어떤 이와 전간(田間)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패릉정(霸陵亭)에 이르렀을 때, 패릉위(霸陵尉)가 취하여 이광을 못 가게 하자, 이 광의 기병이 “옛 이 장군(李將軍)이다.”고 말하니, 패릉위가 말하기를, “지금의 장군도 밤에 다니지 못하는데, 무슨 까닭이냐?”하고는, 강제로 이광을 패릉정 밑에서 자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九》
♣ 봉해[蓬海]봉해는 봉래도가 있는 바다를 말한다.
♣ 봉해천[蓬海淺]봉해는 봉래도가 있는 바다를 말한다. 동한(東漢)환제(桓帝) 때 선인(仙人) 왕원(王遠)이 채경(蔡經)의 집에 내려와 선녀 마고(麻姑)를 불러왔는데, 마고가 말하기를 “내가 선인을 모신 이후 동해가 세 번 뽕밭이 된 것을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 보니 물이 또 그전에 모일 때보다 절반가량 얕아졌었습니다.”에서 나온 것이다.
♣ 봉현[鳳絃]가야금 줄을 말한다.
♣ 봉혜[鳳鞋]봉황새를 수놓아 꾸민 부인(婦人)의 신을 말한다.
♣ 봉혜하덕쇠[鳳兮何德衰]논어(論語)에, “접여(接輿)가 공자 앞을 지내 가며 노래 부르기를, ‘봉이여, 봉이여, 어찌 덕이 쇠한고.’ 하였다.” 했다.
♣ 봉호[蓬壺]바다 속에 있다는 신선들이 사는 산인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습유기(拾遺記) 고신(高辛)에, “삼호(三壺)는 바로 바다 속에 있는 세 산으로, 첫 번째는 방호(方壺)인데 이는 방장산(方丈山)이고, 두 번째는 봉호(蓬壺)인데 이는 봉래산이고, 세 번째는 영호(瀛壺)인데 이는 영주산(瀛洲山)으로, 모양이 마치 술병과 같이 생겼다.” 하였다.
♣ 봉호[封胡]봉호갈말(封胡羯末)의 약칭으로 진(晉) 나라 사씨(謝氏) 집안의 사소(謝韶), 사랑(謝郞), 사현(謝玄), 사천(謝川)의 자(字)인데, 모두 훌륭한 인물들이었다.
♣ 봉호[封狐]봉호는 큰 여우를 말하는데, 염토(炎土) 지대에는 이런 것들이 사람을 많이 해친다는 뜻으로, 초사(楚辭) 초혼(招魂)의 “복사가 쌓여 있고 봉호는 천리에 우글거린다[蝮蛇蓁蓁 封狐千里].” 하였다.
♣ 봉호몰인[蓬蒿沒人]후한(後漢) 장중울(張仲蔚)이 “蓬蒿沒人”한 집에서 영명(榮名) 대신 양성(養性)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인정해 주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유공(劉龔)만은 알아주었다고 한다. 《高士傳 中 張仲蔚》
♣ 봉화여산하[烽火驪山下]주나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란 미인에게 미혹하였는데, 포사는 평생에 웃는 일이 없었다. 왕은 한 번 웃기기 위하여 거짓으로 여산에 봉화(烽火)를 올렸더니 사방의 제후(諸侯)들은 참으로 난리가 난 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가 헛걸음을 하니 그제야 포사가 한 번 웃었다. 그 뒤에 정말 외적이 침입하였을 적에 봉화를 드니 제후들이 믿지 않고 군사가 오지 않아 국도(國都)가 함락되었다.
♣ 봉황대[鳳凰臺]경주(慶州)에 있는 누대(樓臺)로, 일본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들르던 곳이다.
♣ 봉황대[鳳凰臺]봉황대는 금릉(金陵)에 있는데, 이백이 시를 짓고 놀던 명승지이다. 이백(李白)이 금릉(金陵) 봉황대에 올라서 지은 시에, ‘삼산은 반이나 푸른 하늘 밖에 떨어졌고, 두 물은 백로주(白鷺洲)를 가운데로 나누었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는 구절이 있다.
♣ 봉황대[鳳凰臺]이백(李白)이 황학루(黃鶴樓)에 갔다가 최호(崔顥)의 황학루 시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지어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짓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후 금릉(金陵) 봉황대(鳳凰臺)에 가서 봉황대(鳳凰臺) 시를 지었는데, 그 구성은 황학루 시를 모방하였다. 황학루 시에 “옛사람은 황학을 타고 떠나버리고, 이곳엔 텅 빈 황학루만 남았네[昔人巳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하였다.
♣ 봉황령[鳳凰翎]대나무 잎을 말함.
♣ 봉황명고강[鳳凰鳴高岡]시경(詩經) 대아(大雅)권아(卷阿)에 “봉황은 저 고강에서 울고[鳳凰鳴矣于彼高岡]”이라 하였다. 이는 주성왕(周成王)을 경계한 시다.
♣ 봉황모[鳳凰毛]문재(文才)가 뛰어난 것의 비유이다.
♣ 봉황비천인[鳳凰飛千仞]봉황은 높이 천 길 위에 날아서 굶주려도 곡식을 쪼아먹지 않는다 한다.
♣ 봉황주[鳳凰州]당(唐) 나라 도성인 장안성(長安城)을 봉황성이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 봉황지[鳳凰池]금원(禁苑) 안의 연못.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금원에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고 중요 기무를 관장하여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게 하였으므로, 중서성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 봉황함서[鳳凰銜書]임금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가는 사신의 행차를 뜻하는 말이다. 주(周) 나라 때 봉황이 천서(天書)를 입에 물고 문왕(文王)의 도읍지에 날아와 노닐었으므로 무왕(武王)이 봉서(鳳書)의 기(紀)를 받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藝文類聚 卷99 引 春秋元命苞》
♣ 봉홰조양[鳳噦朝陽]일반적으로 어진 인재가 때를 만나 일어나는 때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오동나무가 자라날 때를 말한다. 조양은 아침 해가 뜨는 동산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우는도다. 오동이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는도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矣 于彼朝陽]”하였다.
♣ 봉후골[封侯骨]먼 변방에서 큰 공을 세워 귀하게 될 골상(骨相)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에 종군(從軍)하여 만년에 정원후(定遠侯)로 봉해졌는데, 일찍이 관상가(觀相家)가 그의 연함호두(燕頷虎頭)의 상을 보고 만리후(萬里侯)가 되리라고 예언했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47》
♣ 봉희[封豨]봉희는 큰 멧돼지처럼 생긴 괴물이다.
♣ 부[父]①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 ; 先大人(선대인), 先考丈(선고장) ②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 ; 先親(선친), 先考(선고), 先人(선인) ③ 살아 계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 ; 椿[春]府丈(춘부장), 令尊(영존), 尊堂(존당), 椿堂(춘당), 椿丈(춘장) ④ 살아 계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을 때 ; 嚴親(엄친), 父親(부친), 家大人(가대인), 家嚴(가엄), 家親(가친), 家父(가부), 嚴君(엄군)
♣ 부[鳧]물오리는 갈매기와 함께 자기 현재의 분수를 잘 지키는 사람을 상징하는 새로 일컬어져 왔었음. 《詩經 大雅 鳧鷖》
♣ 부[負]배반하다. 저버리다.
♣ 부[賦]시체(詩軆)의 하나. 그 일을 서술하여 그 일을 바로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여섯 가지 체가 있으니, 곧 풍(風)ㆍ비(比)ㆍ부(賦)ㆍ흥(興)ㆍ아(雅)ㆍ송(頌)이다. 시나 산문이 아닌 운문인 점에서는 사와 비슷하나 서술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사와 구별되는데, 이소(離騷)와 풍부(風賦)같은 것은 부인지 사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 부[仆]앞으로 고꾸라지다. 쓰러지다.
♣ 부가[夫家]남녀(男女)와 같음.
♣ 부가[浮家]물 위에 뜬 집. 곧 배를 집으로 삼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뜻함.
♣ 부가[浮家]사람이 배(舟)안에서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 부가대[不可帶]허리를 맬 수 없다. 부드러운 연꽃 홑옷을 걸쳤으나 몸에 맞지 않아 허리를 맬 수 없다는 뜻.
♣ 부가상자행[附葭常自幸]가부지친(葭莩之親)과 같은 말이다. 가부는 갈대의 줄기에 있는 엷은 막(膜)으로, 아주 먼 친척을 비유한 말이다.
♣ 부가진[付家珍]불서(佛書)에, “어리석은 아들이 어릴 적에 부모를 버리고 나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부모가 사람을 시켜 그 아들을 데려오려 하나 바로 제 집인 것을 말하면 도망할 것이므로 남의 집에 품팔이하는 것이라고 속여서 일을 시키고 밥을 먹이다가 점점 익숙하매 집안의 보물 있는 데를 알게 하고, 끝내 집안 보물을 전부 전하여 주었다.”는 비유가 있는데, 그것은 부처가 미혹(迷惑)을 지도하여 처음에는 소승경(小乘經)을 가르치고 반야경(般若經)을 가르치는 것은 보물 있는 데를 알리는 것이고, 법화경(法華經)을 가르치는 것은 집안 보물을 전부 전하여 주는 것을 비유하였다.
♣ 부간부담[附肝附膽]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함
♣ 부개[瓿蓋]장독 뚜껑.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 “유흠(劉歆)이 양웅이 지은 법언(法言)을 보고 ‘왜 세상에서 알지도 못하는 글을 이토록 애써 지었을까. 나중에는 장독 뚜껑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했다.” 하였다. 대개 자기의 저술을 겸칭(謙稱)하는 말이다.
♣ 부개자[傅介子]한(漢) 나라 소제(昭帝) 때 누란의 왕이 한 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대완국(大宛國)으로 가는 한 나라의 사신을 자주 죽였는데, 부개자가 대완(大宛)에 사신으로 갔다가 누란왕(樓蘭王)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돌아와 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 《漢書 傅介子傳》
♣ 부견[苻堅]전진(前秦)의 3대 임금. 이름은 문옥(文玉), 자는 영고(永固). 시호(諡號)는 세조(世祖). 저족(氐族) 출신. 2대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법제(法制)를 정비‧확립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씀. 376년 화북(華北; 황하 중‧하류 지방)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음. 국력이 신장되자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 383년 동진을 쳤으나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함.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음.
♣ 부견편[符堅鞭]부견(符堅)은 전진(前秦)의 임금. 대거(大擧)하여 동진(東晉)에 침구(侵寇)할 때에 큰 소리 쳐 말하기를, “나의 숱한 군사로 채찍만을 강에 던져도 족히 흐르는 강물을 끊으리라.” 하였다.
♣ 부고발계[婦姑勃磎]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방안에 공간이 없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장소를 서로 다투어 반목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부곡[部曲]사신을 수행해서 간 군사(軍士)를 말한다.
♣ 부공헌납[富公獻納]부공은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부필(富弼)로, 부필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헌(獻) 자와 납(納) 자를 쓰는 일을 가지고 거란의 임금과 다툰 일을 말한다.
♣ 부과침리[浮瓜沈李]여름철의 우아한 노닒을 이른 말. 위 문제(魏文帝)가 오질(吳質)에게 준 글에 “단 오이를 맑은 샘에 띄우고, 붉은 오얏을 찬물에 담근다[浮甘瓜於淸泉 沈朱李於寒水].” 하였다.
♣ 부곽전[負郭田]성(城)을 등지고 있는 전지(田地). 전국 시대 때의 소진(蘇秦)은 집이 가난하여 고향을 떠나 육국(六國)의 왕을 유세(遊說)하다가 육국의 정승이 되었다. 고향에 다니러 와서 탄식하기를, “내가 부곽전(負郭田) 수경(數頃)만 있었더라면 어찌 육국 정승의 인(印)을 찰 필요가 있었겠느냐.” 하였다.
♣ 부광[扶光]부상은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막 떠오르는 아침 해를 가리킨 말이다.
♣ 부괴[桴蕢]흙을 쌓아서 만든 북. 부고(拊鼓)라고도 하며, 괴초(蒯草)를 묶어서 만든 괴부(蕢桴)라는 북채로 연주하였으므로 이른 말임.
♣ 부괵[俘聝]포로, 또는 죽인 적(敵)의 왼쪽 귀.
♣ 부구[浮丘]고대의 선인(仙人) 부구공(浮丘公)을 말한다.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고도 하고 주 영왕(周靈王) 때 사람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 설(說)이 있다.
♣ 부구공[浮丘公]주 영왕(周靈王) 때 선인(仙人). 일찍이 왕자 진(王子晉)과 함께 학을 타고 생황을 불며 숭산(嵩山)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太平府志》
♣ 부구광성[浮丘廣成]부구공과 광성자는 모두 황제(黃帝)때의 선인(仙人)이다.
♣ 부구씨[浮丘氏]옛 선인(仙人)인데, 혹은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 하고, 혹은 주 영왕(周靈王) 때 사람이라고도 하며, 혹은 한(漢) 나라 초기의 부구백(浮丘伯)이라고도 한다.
♣ 부굴[富窟]유사(遺事)에 “왕원보(王元寶)는 도성(都城) 안의 큰 부호(富豪)로서 금은(金銀)으로 옥벽(屋壁)을 만들고 그 외부는 홍니(紅泥)로 발랐다. 또 집 안에 한 채의 예현당(禮賢堂)이 있는데, 침향목(沈香木)ㆍ단향목(檀香木)으로 마루를 만들고 무부(碔砆)로 지면(池面)을 깔고 금문석(錦文石)으로 주추를 만들었으며, 동선(銅線)으로 돈[錢]을 꿰어 후원 꽃길[花徑]에 깔았으니, 이는 비가 와도 미끄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에 사방의 빈객(賓客)들이 마치 자기집 찾아들듯 했으므로 사람들이 왕가(王家)의 부굴이라 했다.” 하였다.
♣ 부귀김장[富貴羨金張]한(漢) 선제(宣帝) 때의 고관이었던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인데 부귀한 가문이다.
♣ 부귀화[富貴花]모란(牡丹)을 가리킨다.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隱逸者)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자(富貴者)요, 연(蓮)은 꽃 중의 군자자(君子者)이다.”라는 말이 있다.
♣ 부규비간[剖竅比干]비간은 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숙부인데 주왕의 황음무도함을 극간하자, 주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성인의 심장(心臟)에는 일곱 구멍이 있다더라.” 하고서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殷紀》
♣ 부근[付根]우리 나라의 풍속으로 관부(官府)에 설치하여 신에게 제사하는 사당으로 중종 12년 8월에 사헌부(司憲府)가 각사(各司)에 공문을 보내어 불사르게 하였다.
♣ 부금[覆錦]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말이다. 연감류함(淵鑑類函) 용현(用賢)에 “위수(韋綬)가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을 적에, 제(帝)가 한림원에 거둥하자 비(妃)도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위수가 잠이 들었기에 제는 비의 촉힐포(蜀襭袍)로 덮어주고 갔다.” 하였다.
♣ 부기[附驥]기(驥)는 하루에 천리 길을 달릴 수 있는 좋은 말인데, 파리가 그 말꽁지에 붙어 있으면 그 파리도 천리를 갈 수 있다하여 위대한 인물에 붙어 있으면 그 사람도 잘 된다는 말로 쓰인다.
♣ 부기미[附驥尾]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의 “안연이 학문을 독실하게 하긴 했지만, 공자라는 천리마 꼬리에 붙어서 치달렸기 때문에[附驥尾] 그 행실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이다.
♣ 부기행[附驥行]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간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배 혹은 뛰어난 인물과 함께 어울리는 자신에 대한 겸사이다.
♣ 부남난취[浮嵐暖翠]송 나라 때 호구(湖口) 사람 이정신(李正臣)이 괴이한 돌을 쌓아 구봉(九峯)을 만들었는데, 소동파(蘇東坡)가 호중구화(壺中九華)라 이름 짓고 시를 읊었었다. 그 후에 이정신이 이 시를 가지고 황정견(黃庭堅)을 찾아갔더니, 이미 그 돌도 볼 수 없고 동파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황정견이 감탄한 나머지 그 시에 차운하여 “어느 사람 밤중에 산에서 나가니 뜬 남기(嵐氣)와 따스한 취미(翠微)마저 텅 빈 듯하여라.” 하였다. 이는 모든 경물(景物)은 주인될 만한 사람이 있을 때 빛이 나고 그 사람이 없어지면 빛을 잃는다는 뜻이다.
♣ 부노피은영[負弩被恩榮]고을 수령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였다는 뜻으로, 옛날에 귀빈(貴賓)이 고을을 지나갈 때에는 고을의 수령이 쇠뇌를 등에 지고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였다. 한(漢) 나라 때 촉(蜀) 땅 사람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중랑장(中郞將)에 제수되어 촉 땅에 사신으로 가자, 촉 땅의 태수(太守) 이하가 모두 나와 영접하였는데, 현령(縣令)이 쇠뇌를 지고서 앞장서서 달려가 길을 열었다고 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 부당책[斧撞責]송 태조(宋太祖)가 후원에서 참새를 잡으려는데 군신(群臣)들이 “급한 일로 뵙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다. 태조는 빨리 와서 보니 급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크게 노하여 힐문하니 그 사람은 “새를 잡는 것보다는 급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태조는 더욱 노하여 도끼자루로 그를 쳐서 이 2개가 부러졌다. 《祕笈》
♣ 부덕사명[婦德四名]부인의 심덕[心德]ㆍ부인의 언어[婦言]ㆍ부인의 자태[婦容]ㆍ부인의 일[婦功] 등 부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을 말한다. 《禮記 昏義》
♣ 부동미[不同味]먹을 것이 많아서 맛이 다른 것. 보통 사람과 다른 취미.
♣ 부동심[不動心]마음이 어떤 일이나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동요되는 일이 없음.
♣ 부량가[浮梁賈]차[茶]를 파는 장사꾼. 부량(浮梁)은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차가 많이 나는 곳임. 《唐書 食貨志》
♣ 부령[腐令]한 무제(漢武帝) 때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염을 사서 부형(腐刑 ; 宮刑)을 당한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그가 저술한 사기(史記)를 말하기도 한다.
♣ 부로행간로면유[父老行看露冕遊]후한 때 곽하(郭賀)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으면서 대단히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서 그를 칭송하기까지 하였으므로, 현종(顯宗)이 순수(巡狩)차 그곳에 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특별히 그에게 삼공복(三公服)과 면류관(冕旒冠)을 내리면서, 그로 하여금 부(部)를 순행할 때에 수레의 휘장을 다 걷어 그의 공복 입고 면류관 쓴 모습을 백성들이 보고 모두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하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二十六》
♣ 부릉[涪陵]부릉은 파촉(巴蜀) 남쪽의 땅 이름이다.
♣ 부림[傅霖]은(殷)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상(相)으로 명(命)하던 말. 세상을 건지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라는 말이다. 서경(書經) 열명상(說命上)에 “고종(高宗)이 이르기를 ‘만약에 가뭄이 들거든 너[傅說]를 써서 장마비[霖]를 내리게 하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 부마[駙馬]임금의 사위. 공주의 부군(夫君).
♣ 부묵자[副墨子]문자(文字)를 이름. 장자집해(莊子集解)에는, “宣云文字是翰墨爲之 然文字非道 不過傳道之助 故謂之副墨 又對初作之文字言 則後之文字 皆其孶生者 故曰副墨之子”라 했음.
♣ 부미거위[扶微去危]서경(書經)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라는 말이 있는데, 위태로운 인욕(人欲 人心)을 버리고 미묘한 천리(天理 道心)를 붙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 부미금[付美錦]지방관에 임명된 것을 비유한 말. 춘추 시대 정(鄭) 나라 대부 자피(子皮)가 윤하(尹何)를 어느 읍재(邑宰)로 삼으려 하자, 자산(子産)이 윤하의 부적합함을 지적하여 자피에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을 경우 사람을 시켜 그 비단으로 옷 짓는 일을 배우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襄公三十一年》
♣ 부민가[阜民歌]순(舜) 임금의 남풍시(南風詩)에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많이 쌓을 수 있도다[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한 데서 온 말이다.
♣ 부반목[腐蟠木]용렬한 자품을 말한다.
♣ 부배[浮杯]산서(山西)의 한 고승(高僧)이 한 조그만 잔을 타고 하수(河水)를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배도(盃渡)라 불렀다. 고승전(高僧傳) 제11권에, “옛날에 배도(杯度)란 중이 있었는데, 그의 본래 이름은 알 수 없었고, 항상 나무로 만든 술잔[木杯]을 타고 물을 건넜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배도가 북방의 어느 집에 기숙하고 있다가 그 집에 불상(佛像)이 있는 것을 보고서 이를 훔쳐 달아났는데, 그 주인이 뒤쫓았으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황하(黃河)의 맹진(孟津)에 이르렀을 때 배도가 목배를 타고 건너는데,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하였다.
♣ 부백[浮白]벌주(罰酒)를 마신 다음 잔을 들어 고하는 것을 말하는데, 직접 벌주를 칭하기도 한다.
♣ 부보[符寶]부보랑(符寶郞)을 말하는데, 고려시대 왕부(王府)의 인신(印信)을 맡아보던 벼슬이다.
♣ 부복[賦鵩]복(鵩)은 올빼미를 말한다. 한(漢) 나라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스승이 된 지 3년 만에 올빼미가 날아와서 가의의 곁에 앉았는데, 올빼미는 불길한 조짐의 새였기에 가의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면서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다. 후대에는 문인(文人)이 불행한 일을 당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 부복자[賦鵩者]복조는 흉조(凶鳥)로 알려진 올빼미임. 한 문제(漢文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있던 가의(賈誼)가 바른말을 자주 한 이유로 대신의 미움을 받아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어 있을 때 올빼미가 집으로 날아들어오자, 자기의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을 예측하고 슬퍼하다가 복조부를 지어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史記 卷八十四 賈誼傳》
♣ 부봉[附鳳]봉과 용(龍)을 성철(聖哲) 또는 영주(英主)에 비유하여, 제자가 성철(聖哲)로 인하여 이름을 전하거나, 신하가 영주(英主)를 좇아 공업을 세움을, “용을 휘어잡아 따르고, 봉에 붙어 따른다[攀龍鱗 附鳳翼].” 한다. 《後漢書 光武帝紀》
♣ 부부[敷敷]넓게 이어져 있는 모양
♣ 부부[扶扶]소아의 어린 모양
♣ 부부가[拊缶歌]한 선제(漢宣帝) 때 평통후(平通侯) 양운(楊惲)이 죄에 걸려 폐서인(廢庶人)이 된 후로는, 죄를 받은 데에 불만을 품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 산림을 일으키면서 자기 친구인 손회종(孫會宗)에게 답한 편지에 “농사짓는 일이 무척이나 수고롭기에 세시 복랍(歲時伏臘)이 되면 양(羊)을 삶아 안주로 삼고 두주(斗酒)를 마시어 스스로 위로하고, 술이 거나해지면 하늘을 우러러 질장구를 치고 노래를 들으며 즐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六》
♣ 부부유별[夫婦有別]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일과 아내는 아내로서의 일의 분별이 있어야 함을 뜻함.
♣ 부부자자[父父子子]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을 함.
♣ 부불능득어자[父不能得於子]아비로도 능히 자식을 제어하지 못한다.
♣ 부비엽[鳧飛葉]후한 현종(後漢顯宗) 때에 왕교(王喬)가 섭현의 원[葉令]이 되었는데, 신술(神術)이 있어 매월 초하루에 대(臺)에 나와 조회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주 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어 엿보니 올 때에 쌍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왔다. 그물을 쳤으나 다만 한 쌍의 신을 얻었다 한다.
♣ 부사[父師]부사(父師)는 태사(太師)와 같은 말로 주 무왕(周武王) 때 조선후(朝鮮侯)로 봉해졌던 은 태사(殷太師) 기자(箕子)를 말하기도 한다.
♣ 부상[扶桑]동방 신목(神木) 이름.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徑)에 “양곡(暘谷)에 부상이 있으니 열 해[日]가 멱감는 곳이다.” 하였고, 십주기(十洲記)에는 “부상은 푸른 바다 가운데 있으니 키가 몇천 길, 천여 아름인데 해 뜨는 곳이다.”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돋아 함지(咸池)에서 목욕하고 부상에서 솟는다.” 하였다.
♣ 부상[扶桑]옛날 나라의 이름이다. 양서(梁書) 부상국전(扶桑國傳)에 “부상은 대한국(大漢國) 동쪽 2만여 리에 있는데 그 지역이 중국의 동쪽에 있다. 그 땅에 부상목(扶桑木)이 많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위치와 방향을 살펴보면 일본과 맞먹기 때문에 후세에 일본의 대칭(代稱)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부상국[扶桑國]동쪽 바다 속에 있다는 전설의 나라.
♣ 부상대견[扶桑大繭]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28 조령안최백대도폭경삼장(趙令晏崔白大圖幅徑三丈)의 “부상의 큰 누에고치 항아리와 비슷한데 천녀가 은하수에서 비단깁을 짰다네[扶桑大繭如甕盎 天女織絹雲漢上].”에서 나온 것이다.
♣ 부상역[扶桑域]부상은 동쪽 해 돋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인데, 남사(南史) 이맥전(夷貊傳)에 “부상국(扶桑國)은 중국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 부생모육[父生母育]아버지가 낳고 어머니가 기름
♣ 부생원[桴生員]전체생원(傳遞生員). 할 일 없이 각 고을에 몰려다니며 수령들을 위협해서 민폐를 끼치는 양반들을 일컬음. 중종때 생원 윤양우(尹湯佑) 등이 벗들과 결탁하고 떼를 지어 지방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자, 수령들이 그들에게 비방당할까 두려워하여 영접과 위로를 극진하게 하고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부생원’이라고 한 것은 떼로 모여 횡행하기 때문에 부벌(桴筏)에 비유한 것이며, ‘전체생원’이라고 한 것은 각 고을에서 타고 싣는 말과 딸린 종들을 전체하여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 부생유은[浮生有垠]장자(莊子)에, “생(生)은 가이 있고, 아는 것은 가이 없다[生也有涯 知也無涯].” 하였는데, 인생이 뿌리가 없이 뜬 것과 같다는 뜻이다.
♣ 부서[扶胥]광동성(廣東省) 번우현(番禺縣)의 바닷가에 있는 지명인데, 한유(韓愈)의 남해신묘비문(南海神廟碑文)에 ‘부서의 어귀 황목의 물굽이[扶胥之口 黃木之灣]’라는 말이 있으므로, 전하여 여기서는 남쪽 바다를 의미한다.
♣ 부서[腐鼠]부서는 천한 물건을 비유한 것임. 《莊子 秋水》
♣ 부서[賦芧]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주는 숫자를 가지고 원숭이를 속인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를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고 수고를 하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조삼(朝三)이라고 한다. 무엇을 조삼이라고 하는가. 옛날에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내었다. 이에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명분이나 사실에 있어서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성내는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 이 때문이다.” 하였다.
♣ 부서혁군[腐鼠嚇君]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의하면, 남방에 원추(鵷鶵)라는 새가 있어 남해(南海)를 출발하여 북해(北海)로 날아갈 적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물이 나오는 샘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는데, 이때 소리개는 썩은 쥐를 물고 있으면서 마침 그 위를 날아가는 원추를 보고는 제 썩은 쥐를 빼앗길까봐 꿱 하고 으르대었다는 고사가 있다.
♣ 부석[鳧舃]오리의 신발로 지방 수령을 고상하게 부르는 칭호임.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 왕교(王喬)에, “왕교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섭령(葉令)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臺)에 나와 조회하였다. 황제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태사가 엿본 뒤에 왕교가 올 때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상방(尙方)에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전에 상서원(尙書院)의 관속들에게 하사한 신발이었다.” 하였다.
♣ 부석[鳧舃]지방관원의 행차를 이른 것. 후한(後漢)의 왕교(王喬)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매월 초하루 보름이면 반드시 조정에 와 조회를 하고 갔는데 뒤따라 온 거기(車騎)도 없었다. 그를 이상히 여긴 황제는 태사(太史)에게 밀령을 내려 자세히 지켜보게 하였던 바, 그가 올 때쯤 해서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방에서 날아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오리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그물을 던져 잡았더니 그물 속에는 오직 신발 한 짝이 있더라는 것이다. 《後漢書 方術傳》
♣ 부석임[傅錫任]玉樹로 가득찬 숲이라 함
♣ 부설[負絏]말고삐를 잡는다는 뜻으로, 임금을 모시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左傳 僖公 二十四》
♣ 부설기기미[傅說騎箕尾]재상의 죽음을 말한다. 은(殷) 나라 무정(武丁)의 현상(賢相) 부열(傅說)이 죽어서 기미성(箕尾星) 위에 올라탔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것이다. 《莊子 大宗師》
♣ 부세[附勢]유자후가 처음에 왕비(王伾)와 왕숙문(王叔文)의 세력에 붙었다가 그들이 패하자 유자후가 귀양간 것을 말한다.
♣ 부소[膚訴]남을 참소하는 형용사임. 논어(論語) 안연(顔淵) 편에, “침윤(浸潤)의 참소와 부수(膚受)의 하소연이 행하지 아니하면 밝다[明]할 수 있느니라……”하였음.
♣ 부소[扶蘇]부소는 부여(扶餘)에 있었던 백제(百濟)의 옛 도성(都城)이다.
♣ 부소[扶蘇]진 시황(秦始皇)의 장자(長子)로 성품이 인자했으나, 시황의 노여움을 사, 북쪽으로 보내어 장군 몽염(蒙恬)의 군사를 감시하게 되었는데, 뒤에 이사(李斯)ㆍ조고(趙高)에 의하여 거짓 조칙(詔勅)으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차자인 호해(胡亥)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이세(二世)였는데, 이사ㆍ조고 등의 폭정(暴政)으로 말미암아 진 나라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史記 秦始皇本紀》
♣ 부소산[扶蘇山]개성에 있는 산이다.
♣ 부소산[扶蘇山]부여현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이름이다.
♣ 부소산[扶蘇山]임천현의 아문이 있던 산 이름으로, 북쪽 절벽은 백제(百濟)가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할 때 삼천 궁녀가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落花巖)으로 유명하고, 남쪽에는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등 세 충신의 위패를 모신 삼충사(三忠詞)가 있다.
♣ 부송영[鳧送影]후한(後漢)의 왕교(王喬)가 섭(葉) 땅의 수령이 되었는데,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두 마리의 물오리를 타고 왔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後漢書 方術傳上 王喬》
♣ 부수[斧繡]예전에 어사(御史)는 주로 탄핵하는 것을 담당하였으니, 지금의 감찰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는 임금이 수놓은 옷을 하사하고 관청에 나올 때에는 앞에 도끼를 들려가지고 감으로 부수(斧繡)라 한 것이다.
♣ 부수지소[膚受之愬]논어(論語)에, “젖어드는 참소와 살에 닿는 참소.[浸潤之譖 膚受之愬]”란 말이 있다.
♣ 부승구지초[負乘寇之招]주역(周易) 해괘(解卦) 육삼효사(六三爻辭)에 “짐을 지고 또 수레를 타면 도둑이 오게 된다.[負且乘 致寇至]” 한 데서 온 말인데, 짐을 지는 것은 소인의 일이고 수레를 타는 것은 군자의 일이므로, 소인이 분에 넘치게 수레를 타면 남의 질시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 부승어[府丞魚]관리의 청렴함을 비유한 말. 후한 때 양속(羊續)이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있으면서 매우 검소한 생활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는데, 한 번은 부승(府丞)이 생선을 갖다 바치므로, 양속이 이를 받아 뜰에 걸어놓았다가, 뒤에 부승이 또 생선을 바치자, 그때는 이전에 받은 생선을 가져다가 부승에게 보이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三十一》
♣ 부시[罘罳]궁문(宮門) 밖에 있는 담장에 낸 그물 친 창(窓)을 말한다.
♣ 부식[賦式]나라의 쇠미(衰微)함을 탄식한 시로, 즉시경(詩經) 패풍(邶風) 의 식미편(式微篇)을 가리킨다.
♣ 부신상자채[負薪常自採]두보(杜甫)의 시에, “자신이 나무를 지고 황정(黃精)을 캔다.”는 말이 있다. 황정은 약초 이름.
♣ 부신채신[負薪採薪]모두 자기의 병(病)을 겸손하게 칭하는 말임.
♣ 부암[傅岩]고종(高宗)의 현상(賢相) 부열(傅說)이 숨어 살던 곳
♣ 부암로[傅巖老]옛날에는 조미료로 소금과 매실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국정을 다스리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부암의 늙은이는 부열(傅說)을 말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에 임명하면서 “내가 만약 술을 만들거든 그대가 누룩의 역할을 해 주고 국을 끓이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의 역할을 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書經 說命下》
♣ 부앙불참[俯仰不慚]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위를 쳐다봄에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를 굽어봄에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仰不愧於天俯不怍於人]”는 말이 나온다.
♣ 부양[斧壤]강원도 평강(平康)의 고호임.
♣ 부여[夫如]김화(金化)의 옛 이름.
♣ 부열[傅說]부열은 은 고종(殷高宗) 때의 현상(賢相). 그는 공사장 일꾼에서 재상으로 등용되어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서경(書經) 열명(說命)은 바로 고종이 부열에게 명령한 것을 기록한 내용인데, 여기에 “만일 크게 가물거든 네가 장마비가 되어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 하여, 그의 교훈을 바란 말이 있다.
♣ 부열기기[傅說騎箕]부열은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꿈을 꾸고서 공사장에서 얻어 재상으로 발탁한 인물인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이 도를 얻어 …… 죽은 뒤에 기미성에 올라탔다.[傅說得之 …… 騎箕尾]”는 구절이 있다.
♣ 부열성[傅說星]은(殷) 나라 어진 재상 부열(傅說)이 죽어서 하늘에 별이 되었다. 《莊子》
♣ 부열임[傅說霖]부열은 은 고종(殷高宗)인 무정(戊丁)의 현상(賢相)인데 고종은 그에게 “만약 크게 가물면 네가 장마비가 되어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 하였다. 《史記 殷本紀, 書經 說命》
♣ 부열조갱[傅說調羹]은 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명하는 말에 “단술을 만들면 네가 누룩이 되고 국을 조화하면 네가 염매(鹽梅)가 되어 달라.” 하였다. 《書經 說命 下》
♣ 부염기한[附炎棄寒]더우면 붙고 차가우면 버림. 즉, 권세가ㆍ재력가를 붙쫓다가 그들이 쇠퇴하면 떨어져 나간다는 뜻으로, 인정의 부박함을 개탄하여 이르는 말
♣ 부염추열[附炎趨熱]막강한 권세에 빌붙어 아부하는 것을 말한다.
♣ 부예[鳧鷖]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바로 태평한 임금이 능히 왕업(王業)을 잘 지킴으로써 조상의 영혼들이 그것을 안락하게 여기는 뜻을 노래한 것이다.
♣ 부옥[蔀屋]가난한 오막살이 다북대로 만든 집이다. 서민을 뜻함.
♣ 부옥봉[斧屋封]예기(禮記)에 장사지낼 때에 무덤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봉분(封墳)을 당(堂)과 같이 하는 이를 보았고, 하옥(夏屋)을 덮은 것같이 하는 이를 보았으며, 도끼의 형상과 같이 하는 것도 보았다.” 하였다. 부옥봉(斧屋封)은 무덤을 말한 것이다.
♣ 부옥홀봉경[斧屋忽封扃]무덤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부옥은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도끼 모양의 봉분(封墳)으로, 묘소의 별칭이다.
♣ 부온[富媼]지신(地神)을 말한다.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에 “후토(后土)의 부온이 삼광(三光)을 밝힌다.” 했는데, 그 주에 “온(媼)은 노모(老母)를 칭하는 말인데, 땅[坤]이 모(母)가 되므로 온이라 한다.” 하였다.
♣ 부옹[涪翁]부옹은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인 황정견(黃庭堅)의 호임. 황정견의 ‘차운중옥수선화(次韻中玉水仙花)` 시에는 “진흙 속에서도 흰 연꽃을 피울 줄 알고, 더러운 땅에서도 황옥화를 피우는구려.[淤泥解作白蓮藕 糞壤能開黃玉花]"하였다. 《黃山谷詩集 卷十五》
♣ 부옹시[涪翁詩]황정견(黃庭堅)의 시. 부옹(涪翁)은 황정견의 호이다.
♣ 부요[扶搖]붕새[鵬]가 북명(北冥)에서 남명(南冥)으로 옮아갈 제 회오리바람을 치고 9만리로 올라갔다 한다.
♣ 부요소대붕[扶搖笑大鵬]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3천 리이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올라가 6개월을 가서야 쉰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부용[芙蓉]연(蓮)의 이칭(異稱)
♣ 부용검[芙蓉劍]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지녔다는 보검 이름이다.
♣ 부용막[芙蓉幕]연막(蓮幕)과 같은 말로, 장수의 막부(幕府)를 뜻한다. 남제(南齊)의 왕검(王儉)이 고제(高帝) 때 위장군(衛將軍)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의 막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마치 붉은 연꽃과 푸른물이 서로 어울려 빛나는 것 같다는 뜻에서 연꽃 못에 들어갔다고 말하였다. 연화막(蓮花幕)이라고도 한다.
♣ 부용막부[芙蓉幕府]연막(蓮幕)이라고도 한다. 남북조(南北朝) 때에 유경행(庾景行)이 왕검(王儉)의 부중(府中)에서 장사(長史)가 되었는데, 소면(蕭緬)이 왕검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귀부(貴府)의 속료(屬僚)로 뽑히기는 참으로 어려운데, 경행(景行)은 푸른 물에 떠서 부용(芙蓉)에 의탁한 것과 같다.” 하였다.
♣ 부운[浮雲]논어(論語) 술이(述而)에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나에겐 마치 뜬구름[浮雲]처럼 보이기만 한다.”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부운한[賦雲漢]시전(詩傳)에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에 가물어서 비를 빌던 것을 노래한 시이다.
♣ 부원[浮源]시원하다. 서늘함.
♣ 부원손숙오[不願孫叔敖]고관대작을 지내고도 집안이 너무 청빈함을 말함. 춘추(春秋) 시대 초(楚) 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가 장왕(莊王)을 도와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장왕이 결국 패업(霸業)을 달성하게 되었는데, 손숙오는 천성이 청렴결백했으므로 그가 죽자 그의 처자(妻子)는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당시 해학의 명수였던 초 나라 악공인 우맹(優孟)이 손숙오 차림을 하고 장왕을 찾아가 손숙오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하자, 장왕은 깜짝 놀라 그를 다시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우맹은 사양하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 노래 끝구절에, “초 나라 재상 손숙오는 죽도록까지 청렴했으나 지금 그의 처자식은 가난하고 곤궁하여 땔나무 팔아 끼니 메우니 그 재상 해서 무엇하리.” 하였음. 《史記 滑稽列傳》
♣ 부월[鈇鉞]부월(鈇鉞)은 형벌에 쓰는 작두와 도끼로, 역사서에서 포폄(褒貶)을 가해 기리고 내치는 것을 말한다.
♣ 부월[斧鉞]부월은 도끼. 곧 생살권을 가진 장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 부월[鈇鉞]작은 도끼와 큰 도끼인데 형벌의 기구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제후는 천자가 궁시(弓矢)를 하사해야 정벌할 수 있고 부월을 하사해야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였다.
♣ 부위부강[夫爲婦綱]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
♣ 부위자강[父爲子綱]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
♣ 부유[鳧臾]부여(扶餘)를 부유로 표기한 것인데, 여기서는 백제(百濟) 왕의 성씨(姓氏)가 부여이므로 일컫는 말이다.
♣ 부유대분[蜉蝣戴盆]하루살이가 동이를 이다.
♣ 부을[鳧乙]물오리와 제비. 남제서(南齊書) 고환전(顧歡傳)에 “옛적에 기러기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데 아득하여 분별하기 어려운 까닭으로, 월(越) 나라 사람은 물오리라 하고, 초(楚) 나라 사람은 제비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초 나라ㆍ월 나라 사람의 구분이 있어도 기러기는 언제나 한 가지다.” 하였다.
♣ 부을[鳧乙]부새와 을새를 말하는데, 이 두 새는 서로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새이다. 장융답주옹서(張融答周顒書)에 “도교와 불교는 서로 현격하게 다른 것으로, 하나가 부새라면 하나는 을새이다.” 하였다.
♣ 부음[抔飮]손으로 물을 받아서 마시는 것을 이름. 예(禮) 예운(禮運)에 “汙尊而抔飮"이란 대문이 있음.
♣ 부익[附翼]후환서(後漢書) 광무기(光武紀)에 “지금 여러 사람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왕을 따르는 것은 용의 비늘을 더위잡고 봉의 날개에 붙어 그 뜻한 바를 이루려 함입니다.” 하였다.
♣ 부인기원야[不忍棄原野]전자방(田子方)은 전국 시대 때 위 문후(魏文侯)의 스승이었던 현인(賢人)이다. 일찍이 들판에 버려지려고 하는 늙은 말을 보고는 말하기를 “힘 있을 때 마구 부려먹고는 늙고 병들자 내팽개치는 것은 인자(仁者)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속백(束帛)을 주고 데려왔는데, 이에 궁사(窮士)들이 심복하며 귀의하였다고 한다. 《淵鑑類函 卷433 馬部》
♣ 부자[鳧茈]오우(烏芋), 즉 올방개로 오리가 잘 캐먹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부자[夫子]자네의 뜻임.
♣ 부자유친[父子有親]가정윤리의 실천덕목인 오륜(五倫)의 하나.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도리는 친애함에 있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여 그 사이에 진정한 친애의 정이 이루어짐
♣ 부자장[夫子墻]자공(子貢)이 자신의 담장 높이는 어깨 높이이고, 부자의 담장은 몇 길이나 된다고 하였다. 《論語 子張》
♣ 부자필변[夫子必變]논어(論語) 향당(鄕黨)에 “빠른 우레 맹렬한 바람이 일면 공자가 반드시 낯빛을 변하였다.” 하였다.
♣ 부장[斧斨]목베는 도끼
♣ 부장사[釜場師]가마 장사. 황형(黃衡)이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을 때에 군졸(軍卒)에게 속바치기를 독촉하니, 가난한 백성은 제 집의 가마솥까지 팔아서 바쳐야 했으므로, 황형을 비꼬아 별명 붙인 말.
♣ 부재역사[不材櫟社]늑사(櫟社)의 큰 나무는 재목이 못되는 까닭으로, 수명(壽命)을 오래 보전한다. 《莊子 人間世》
♣ 부재자전[不材者全]나무가 재목감이 되지 못하여 누가 베어가지 않음으로써 제 명대로 살 수 있다는 뜻으로 즉 사람도 무능한 사람이 화를 면할 수 있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莊子 山水》
♣ 부재저[不材樗]고약한 냄새가 나고 옹이가 많아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일찍 해침을 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수명을 누리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나무 이름이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와 인간세(人間世)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 부전자전[父傳子傳]아버지의 것이 아들에게 전해짐.
♣ 부전조인[跗傳祖印]전등록(傳燈錄)에 “불(佛)이 사라진 뒤에 제1조인 가섭(迦葉)이 쌍림(雙林)의 숲 사이에 가서 부르짖어 울기를 마지아니하니 불은 금관(金棺) 안에서 두 발을 나타내 보였다.” 하였음.
♣ 부절[符節]고대(古代)에 군수(郡守)에게 동(銅)으로 만든 부(符)를 주었는데, 두 쪽으로 쪼개어 오른 쪽은 임금이 지니고, 왼쪽 것은 군수에게 주었다.
♣ 부정[不庭]왕실(王室)에 내조(來朝)하지 않는 나라를 말한다. 시경(詩經) 대아 한혁(韓奕)에 “내조하지 않는 나라를 바로잡아 너의 임금을 보좌하라.[榦不庭方 以佐戎辟]" 한 데서 온 말이다.
♣ 부정섭[不庭讋]부정은 내조(來朝)하지 않는 자를 가리킨 말로, 즉 한(漢) 나라가 당시 내조하지 않던 대완왕(大宛王)을 죽이고 그곳에서 천마를 얻어 왔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부족치치하간[不足置齒牙間]이빨 사이에 두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말로, 입에 올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부주[不周]곤륜산(崑崙山) 서북쪽에 있다고 하는 산 이름이다. 옛날에 공공(共工)이 전욱(顓頊)과 더불어 임금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화가 나서 부주산을 들이받자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끊어졌다고 한다. 《淮南子 天文訓》
♣ 부주[不住]부주(不住)의 법은 머물러 정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부주[涪州]조정으로부터 쫓겨난 처지를 비유한 말. 송(宋) 나라 때 정이(程頤)가 당쟁(黨爭)에 의하여 부주(涪州)로 유배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宋元學案 卷十五》 또는 송 나라 황정견(黃庭堅)이 일찍이 부주로 유배되어 부옹(涪翁)이라 자호한 사실이 있기도 하다.
♣ 부주산[不周山]곤륜산(崑崙山) 서북쪽에 있다고 하는 산 이름이다. 열자(列子)에, “공공씨(共工氏) 전욱(顓頊)이 서로 싸워서 부주산에 부딪쳐서 천주(天柱)가 꺾어졌다.” 하였다.
♣ 부주소릉구[鄜州少陵句]부주는 서안(西安)의 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두보의 처자식이 있던 곳이다. 두보의 시 ‘월야(月夜)’에, “오늘 밤 부주의 하늘에 뜬 달, 규중에서 단지 혼자 바라다보리.[今夜鄜州月 閨中只獨看]”하였다.
♣ 부죽[符竹]군수(郡守)에게 주는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를 말한다.
♣ 부죽빈[剖竹頻]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한(漢) 나라 때 지방 장관을 내보낼 적에는 죽부(竹符)를 나눠주어 신표(信標)를 삼게 하였다.
♣ 부중감포사[賦重甘捕蛇]독사에게 물리면서도 뱀을 잡아 바치는 것이 농사지어 세금 바치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柳宗元 捕蛇者說》
♣ 부중생어[釜中生魚]솥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오래 계속되지 못할 일.
♣ 부중어[釜中魚]생활이 몹시 빈곤함을 비유한 말. 후한 때 일찍이 내무장(萊蕪長)에 제수되었던 범염(范冉)이 워낙 빈핍하여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까지 하였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시루 속에 먼지가 쌓인 범사운(范史雲)이요, 가마솥 안에 고기가 사는 범내무로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獨行傳》
♣ 부중지어[釜中之魚]삶아질 것도 모르고 솥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눈앞에 닥칠 위험도 모른 채 쾌락에 빠져 있음.
♣ 부지소종[不知所從]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어느 때인지 알 수 없음. 언제 될 지 그 기한을 알지 못함
♣ 부차승[負且乘]재주에 걸맞지 않은 직위에 있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해괘(解卦)에, “등에 지고서 또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오게 한다.[負且乘 致寇至]”하였다.
♣ 부착적[斧鑿迹]즉 도끼와 끌의 자국. 공인(工人)이 목석(木石)을 다룰 때는 도끼와 끌을 사용하여 반드시 흔적이 있으므로, 시문(詩文) 따위에도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오히려 모순을 남기는 비유로 쓰인다. 그래서 시문 따위가 아주 완숙한 것을 들어 ‘부착의 흔적이 없다’고도 한다.
♣ 부창부수[夫唱婦隨]남편이 창을 하면 아내도 따라 하는 것이 부부 화합의 도리라는 것. 그 남편에 그 부인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 부초[夫椒]부초(夫椒)는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에 있는 산 이름인데, 춘추 시대에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여기에서 오왕 부차(吳王夫差)와 싸워 그를 잡아죽이고 오 나라를 멸망시켰다.
♣ 부춘산[富春山]중국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서쪽에 있는 산으로, 동한(東漢) 때 엄광(嚴光)이 이곳에 은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양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낚시질을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 부친[父親]살아 계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음.
♣ 부판[蝜蝂]부판은 아주 작은 일종의 벌레인데, 이 벌레는 몸은 작으나 물건을 잘 짊어지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만두지 않는다고 한다.
♣ 부판충[負版虫]벌레 이름. 항상 자기 힘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다가 엎어진다 한다.
♣ 부평[富平]부평은 부귀영화를 극했던 한 나라의 부평후(富平侯) 장안세(張安世)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漢)나라의 성제(成帝)가 사복(私服)을 입고 다니면서 스스로 부평후(富平侯)의 가인(家人)이라 일컬었다.
♣ 부평초[浮萍草]부평초는 뿌리도 없이 물 위를 떠다니는 하찮은 수초(水草)이다.
♣ 부하고단학하장[鳧何苦短鶴何長]장자(莊子)에,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의 다리는 짧은데, 긴 것을 끊어도 안되고 짧은 것을 이어도 안 된다.” 하였다.
♣ 부한[富韓]송(宋) 나라의 명재상인 부필(富弼)과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 부함[傅咸]진 혜제(晉惠帝) 때 사람. 글을 잘 지었음.
♣ 부해[桴海]공자가 이르기를,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는지라, 떼를 타고 바다에 뜨려 하노니 나를 쫓을 자는 그 유(由[子路])인저.” 하였다. 논어(論語)
♣ 부해[浮海]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탄식한 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 부해고인[浮海高人]전국시대 제(齊) 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이 뜻이 고고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남을 위해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길 좋아하였는데, 연(燕) 나라 장수가 요성(聊城)을 점거하여 제 나라가 1년 동안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노중련이 연 나라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함으로써 함락되었다. 제 나라 왕이 그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자, 그는 “내가 부귀를 누리며 남에게 굽혀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빈천하더라도 세상을 우습게 보고 자유롭게 살겠다.” 하고, 동해로 도망가 숨어버렸다 한다. 《史記 卷八十三 魯仲連傳》
♣ 부해상니성[浮海傷尼聖]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의하면,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겠다.”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다.
♣ 부해심[浮海心]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이르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은데, 나를 따르는 자는 아마 유(由)일 것이다.’ 하였다.” 하였음.
♣ 부해지탄[浮海之歎]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내가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려 한다.”고 한 공자의 이른바 부해지탄(浮海之歎)이 나온다.
♣ 부혁[傅奕]당 고조(唐高祖) 때 태사령(太史令)으로서 상소하여 불교를 극력 반대한 사람.
♣ 부현[傅玄]부현은 진(晉) 나라 학자로 자는 휴혁(休奕). 그는 박학다식하고 글을 잘했으며, 음률(音律)에도 밝아, 진(晉) 대의 종묘(宗廟)와 조정의 악장(樂章)이 거의 그의 손에서 나왔다 함. 저서에는 부자(傅子)가 있음.
♣ 부형청죄[負荊請罪]형(荊)은 가시나무.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때려 주기를 바란다. 즉, 사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 부화[浮華]겉보기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음.
♣ 부화[浮花]부화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쓸데없는 꽃이란 뜻이다.
♣ 부화[浮花]흐르는 물 위에 뜬 꽃을 말함.
♣ 부화뇌동[附和雷同]천둥이 치면 모든 사물이 덩달아 같이 울림. 자기 주관이 없이 경솔히 남의 의견을 쉽게 따르고, 무턱대고 남의 행동을 따라 함.
♣ 부회[傅會]어거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 하는 것.
♣ 부휴[浮休]잠시 왔다 가는 무상한 인생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각의(刻意)의 “삶이란 물 위에 떠 있는 거품과 같고, 죽음이란 피곤한 몸을 휴식하는 것과 같다.[其生若浮 其死若休]”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부휴동관착춘야[復携童冠着春夜]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이 춘복(春服)를 입고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을 데리고 놀러 가겠다던 고사(故事)를 인용하였다.
♣ 북고[北固]지금 단도현(丹徒縣) 북쪽에 있는 산이름. 삼면(三面)에 물이 둘러 있고 형세가 험준한 곳으로 유명하다.
♣ 북고[北姑]한북(漢北)에 있는 지명
♣ 북고사[北固寺]당(唐) 나라 때의 절로, 좋은 대가 자라는 곳이다. 이덕유(李德裕)가 그 절의 중을 시켜서 매일 대나무가 잘 있는지를 보고하게 하였다.
♣ 북궁영아[北宮嬰兒]북궁영아는 전국(戰國) 시대 제(齊) 나라의 효녀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조 위후(趙威后)가 제나라 사신에게 ‘북궁영아는 무고한가.’하고 안부를 물었다.” 하였다.
♣ 북궁유[北宮黝]전국 시대의 역사(力士)로 남에게 지지 않고 임금 찌르기를 거지 찌르듯 하던 자.
♣ 북궐[北闕]임금의 대궐은 남향(南向)이므로 북궐(北闕)이 된다.
♣ 북극[北極]대궐 쪽의 하늘을 가리킨다. 조정이 위치한 서울을 비유한 말이다.
♣ 북극[北極]북극성. 진리.
♣ 북극성[北極星]임금을 상징하는 말이다. 참고로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 “덕으로 정치하는 것이,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모든 별들이 그곳을 향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 북당훤[北堂萱]위풍(衛風) 백혜(伯兮)에 “어디서 원추리 하나 얻어, 집 뒤켠에 심어 볼꼬.[焉得萱草 言樹之背]”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모친의 거처를 북당(北堂) 혹은 훤당(萱堂)이라고 하게 되었다.
♣ 북두[北斗]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리키는 말. 북두칠성이 모든 별들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에 비유하고 있음.
♣ 북두남기[北斗南箕]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남쪽엔 키라는 별이 있으나 곡식을 까부르지 못하고 북쪽엔 말이라는 별이 있으나 주장을 뜰 수가 없도다[維南有箕 不可以簸揚 維北有斗 不可以把漿]”하였다.
♣ 북두불가읍[北斗不可挹]북두는 임금을 상징한 것으로, 여기서는 요로(要路)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 모시지 못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북두우[北斗牛]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북방의 두성과 우성임.
♣ 북두작창명[北斗酌滄溟]북두성(北斗星)이 말[斗] 모양으로 생겼으므로 그것으로 바닷 물을 푸겠다는 말이다.
♣ 북등선우대[北登單于臺]한 무제(漢武帝)가 18만 병력을 직접 이끌고 장성(長城)을 나와 북쪽으로 가서 선우대에 올랐던 것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元封 元年 冬十月 …… 行自雲陽 北歷上郡西下五原 出長城 北登單于臺”라는 기록이 있다. 선우대는 지금의 수원성(綏遠省) 귀화성(歸化城) 서쪽에 있다고 한다.
♣ 북령욕[北嶺辱]은자(隱者)가 아닌 사람이 은자인 척하며 산을 더럽힘을 뜻함. 북령은 곧 북산(北山)을 가리키는데,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푸른 산을 재차 욕되게 하고, 붉은 절벽을 거듭 때묻게 한다.[碧嶺再辱 丹崖重滓]” 한 데서 온 말이다.
♣ 북로어[北路魚]송(宋) 나라 서군천(徐君蒨)이 유흥을 좋아하였는데 양(梁) 나라 상동왕(湘東王)의 참군(參軍)이 되자 수레에 기생들을 싣고 형초(荊楚)의 산천을 빠짐없이 유람하였다. 그 때 양양(襄陽) 어홍(魚弘)도 호방하고 사치스럽다고 일컬어졌으므로 부중(府中)에서 노래하기를, “북쪽에는 어씨이고 남쪽에는 서씨이네.[北路魚 南路徐]”라고 하였다. 《南史 卷 15 徐君蒨傳》
♣ 북리[北里]북방에 있는 촌리(村里)를 이르는데, 또는 창부(娼婦)가 있는 곳을 말하기도 한다.
♣ 북리지무[北里之舞]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음탕하고도 화사한 무악(舞樂)의 이름이다. 《史記 殷紀》
♣ 북린[踣麟]사필(史筆)을 꺾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다. 기린은 성군(聖君)의 시대에만 출현한다는 성수(聖獸)인데, 혼란한 춘추 시대에 나와 사냥에 잡혀 죽게 되자, 공자가 이 대목에서 절필(絶筆)하였다는 내용이 서진(西晉) 두예(杜豫)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서문(序文)에 나온다.
♣ 북망산[北邙山]낙양현 북쪽에 있는 망산을 말하는데, 한(漢) 나라 이후로 이곳이 유명한 묘지(墓地)이므로, 전하여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 북면[北面]북쪽을 향함. 북면은 제자가 스승에게 공경하는 예임. 한서(漢書) 우정국전(于定國傳)에 “우정국이 정위(廷尉)로 있을 적에 스승을 맞아 춘추(春秋)를 배우면서 몸소 책을 갖고 북면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하였음.
♣ 북면배명산[北面背冥山]반대쪽으로 가면 갈수록 다른 반대쪽과는 그만큼 더 멀어짐. 남쪽을 가는 자가 초(楚)의 수도인 영(郢)까지 오고 나면 아무리 북을 바라보아도 극북에 위치한 악부해제(樂府解題)에서 명산(冥山)이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명산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莊子 天運》
♣ 북명[北溟]북쪽 끝에 있다는 큰 바다를 말한다. 북명(北冥)이라고도 한다.
♣ 북명곤[北溟鯤]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북쪽 바다에 곤어라는 고기가 있는데, 곤어의 크기는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도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큰 인물을 비유한 것이다.
♣ 북명어[北溟魚]북해(北海)에 있다는 물고기. 그 이름이 곤(鯤)인데, 이것이 변화하면 붕새[鵬]가 된다고 한다. 《莊子 逍遙遊》
♣ 북문시[北門詩]시경(詩經) 패풍(邶風)의 북문(北門)으로, 어진 자가 난세에 처해 어두운 임금을 섬겨서 뜻을 얻지 못한 것을 탄식하면서 읊은 시이다.
♣ 북문지탄[北門之歎]북문에서 한탄함. 북문(北門)은 궁궐의 상징어이다. 즉, 벼슬 자리에 나가기는 하였으나 뜻대로 성공하지 못하여 살림이 곤궁함을 한탄하는 말이다.
♣ 북방지강[北方之强]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무기와 갑옷을 깔고 지내면서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 사람의 강함이다.[袵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 第十章》
♣ 북백[北伯]관북(關北)의 방백(方伯), 즉 함경도 관찰사의 별칭이다.
♣ 북비미[北鄙靡]주(紂)는 음악을 ‘북쪽 변두리의 음탕한 소리[北鄙靡靡之聲]’로 만들었다. 예기(禮記)
♣ 북산[北山]남경(南京)에 있는 종산(鍾山)으로, 은자(隱者)가 은거하여 사는 산을 말한다. 육조(六朝) 때 송(宋) 나라의 공치규(孔穉圭)가 주옹(周顒)이 자신과 함께 종산에 은거하다가 벼슬길에 나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종산에다가 이문을 새겨 주옹으로 하여금 다시는 종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 북산령[北山靈]남조 제(齊)의 주옹(周顒)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벼슬에 나아간 뒤 다시 이 산을 거쳐서 가게 되자, 공치규(孔稚珪)가 북산의 산신령을 가탁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이라는 글을 지어서 그의 변절을 풍자한 바가 있다.
♣ 북산문[北山文]끝까지 은거하지 못함을 비유한 말. 남제(南齊) 때에 공치규(孔稚圭)가 주옹(周顒)이 일찍이 북산(北山)에 은거하다가 끝까지 은거하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간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북산이문을 지어 그를 책망한 데서 온 말이다.
♣ 북산송초[北山竦誚]남제(南齊) 때 주옹(周顒)이 처음에는 북산에 은거(隱居)해 있다가 조서(詔書)를 받고는 바삐 나와서 해염현령(海鹽縣令)이 되자 공치규(孔稚珪)가 산령(山靈)의 뜻을 가탁(假托)하여 “여러 동학(洞壑)이 비웃고 많은 산봉우리가 꾸짖는다.”는 등의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조롱하였다.
♣ 북산시[北山詩]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주(周) 나라의 유왕(幽王) 때 역사(役使)가 고르지 못하여 자신만이 일을 하느라 수고로워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읊은 시이다.
♣ 북산이문[北山移文]남제(南齊) 때 공덕장(孔德璋)이 지은 글로, 은사(隱士) 주옹(周顒)의 변절을 몹시 나무란 내용이다.
♣ 북산이문[北山移文]육조(六朝) 시대 송(宋) 나라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에 은거하다가 나중에 관직을 제수받고 나가자, 함께 은거했던 친구인 공치규(孔稚圭)가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북산 신령의 이름을 가탁하여 관청의 통문(通文)을 본떠 이문(移文)을 써서, 주옹이 두 번 다시 북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북산지감[北山之感]북산에서 느끼는 감회. 북산(北山)은 궁궐의 상징어이다. 나라 일에 힘쓰느라고 부모봉양을 제대로 못한 것을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 북산참[北山慚]남제(南齊) 때 주옹(周顒)이 처음 북산에 은거하다가 나중에 뜻을 바꾸어 벼슬길에 나가자, 공치규(公稚珪)가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 북산 신령의 뜻을 가탁해서, 주옹이 변절하여 북산에 수치를 끼쳤다는 뜻으로 그를 배척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북산편[北山篇]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주(周) 나라의 유왕(幽王) 때에 역사(役使)가 고르지 못하여 자신만이 일을 하느라 수고로워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읊은 시로 “대부가 균평하지 못하여서, 나 혼자만 종사케 해 홀로 어질다 하네.[大夫不均 我從事獨賢]”하였다. 《詩經 小雅 北山》
♣ 북수[北首]머리를 북으로 함. 신하가 임금을 못 잊어하는 뜻.
♣ 북수[北叟]북쪽 국경 밖의 늙은이. 새옹(塞翁)과 같은 말.
♣ 북수남능[北秀南能]선종(禪宗)의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해묵은 논쟁. 당(唐) 나라 때 육조 대사(六祖大師) 혜능(慧能)은 5조(祖) 홍인(弘忍)의 의발을 전수받고서 남쪽에 내려와 돈오(頓悟)의 교설을 펼쳤고, 홍인의 수상좌(首上座)였던 신수(神秀)는 북쪽에서 점수(漸修)의 교리를 전개했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우리나라 불교는 혜능의 선맥(禪脈)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宋高僧傳 卷8》
♣ 북시[北寺]대내(大內)의 북쪽에 있는 관사(官司)라는 뜻으로 대리시(大理寺)의 별칭이다. 대리시는 특별사법관청(特別司法官廳)으로서, 좌시(左寺)는 지방의 탄핵 및 대죄(大罪)의 의옥(疑獄)을 다스리고, 우시(右寺)는 서울에 있는 각 관청의 형옥(刑獄)을 심판하였다. 《明史 職官志》
♣ 북신[北辰]여기에도 북두칠성을 말하는 것인데, 북두성이 하늘의 왕좌이므로 세상의 제왕도 북두성에 비유하고, 임금 있는 곳을 북두성 있는 곳이라 한다.
♣ 북우남린[北羽南鱗]북우와 남린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붕(鵬)이라는 새와 곤(鯤)이라는 물고기를 가리키는데, 한유(韓愈)의 시에 “북극에는 홀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남명에는 깊이 숨은 큰 물고기 한 마리. 대륙의 강물 줄기 그 사이를 가로막아, 그림자도 못 보고 메아리도 안 들리네. 그러나 바람 구름 한번 만나면, 변화해서 한 몸뚱이 합쳐지누나. 거리가 멀다고 누가 말할까, 감동하여 격발하면 귀신처럼 빠른 것을.[北極有羇羽 南溟有沈鱗 川源浩浩隔 影響兩無因 風雲一朝會 變化成一身 誰言道里遠 感激疾如神]”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2 北極一首贈李觀》
♣ 북운[北雲]북쪽 구름은 이별의 정을 상징한다.
♣ 북원[北苑]남당(南唐) 동원(董源)의 자(字).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山水畫)에 능하였음. 《十國春秋》
♣ 북의춘현[北宜春縣]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여남현(汝南縣) 서남부에 있음. 전한(前漢) 때에는 ‘의춘(宜春)’이라 했다가 후한(後漢) 때 ‘북의춘(北宜春)’으로 개명함.
♣ 북정[北征]두보가 46세 때에 지은 대표적인 오언 고시(五言古詩). 난증의 행재소(行在所)인 봉상(鳳翔)에서 출발, 처자가 있던 부주(鄜州)에 이르기까지의 기행시(紀行詩).
♣ 북정편[北征篇]두보가 당 숙종(唐肅宗) 2년(757) 4월에 봉상(鳳翔)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좌습유(左拾遺)를 제수받은 뒤, 8월에 부주(鄜州)의 집으로 돌아갈 때 지은 시이다. 서울에서 봉선으로 갈 때 회포를 읊은 시[自京赴奉先詠懷詩]와 함께 그의 2대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 북제[北帝]북제는 겨울을 맡은 신(神)이다.
♣ 북제[北第]북제는, 한 혜제(漢惠帝) 때 하후영(夏候嬰)이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북제 가운데 가장 좋은 저택을 하사받았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왕이 있는 북궐(北闕)에 인접한 집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공신의 집을 가리킨다.
♣ 북종첩[北宗帖]북종화(北宗畵)의 화첩인데, 북종화는 중국 회화사상의 2대 유파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의 이사훈(李思訓)ㆍ이소도(李昭道) 부자를 비조(鼻祖)로 하여 송대(宋代)에 와서 전성하였으나, 원(元) 나라 이후에는 남종화에게 압도되었는데 물체의 표현과 색채의 선명함을 주로 하여 누대(樓臺)와 금벽(金碧)을 세밀하게 나타내는 것이 특색이다.
♣ 북지[北地]촉한 후주(蜀漢後主)의 아들 북지왕(北地王) 심(諶)을 말한다. 촉한이 위장(魏將) 등애(鄧艾)에 의해 항복하게 되자, 그는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옳다면서 항복을 반대하고 소열묘(昭烈廟)에 들어가 통곡하다가 자살하였다.
♣ 북지[北至]하지(夏至)의 별칭이다. 태양이 이날 적도(赤道)의 최북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북창고와[北窓高臥]도연명이 여름날 한가로이 북창(北窓) 아래 누워 있는데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오자 스스로 복희씨(伏羲氏) 이전 시대의 사람이라 하였음.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에 도연명의 고사를 인용하여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복희 시대 사람이라 하네”하였음.
♣ 북창고침[北窓高枕]태평 무사하게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글에 “오뉴월 중에 북창 아래에 누워 있노라면[北窓下臥] 서늘 바람이 잠시 스쳐 지나가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희황(羲皇) 시대의 사람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라는 명구(名句)가 있다. 《陶淵明集 卷7 與子儼等疏》
♣ 북창금운[北窓襟韻]전원에서 한가로이 즐기는 은일(隱逸)의 정취를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이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여름철 한가로이 북창가에 잠들어 누웠다가 삽상한 바람이 불어 와 잠을 깨고 나면 문득 태고적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夏月虛閑 高臥北窓之下 淸風颯至 自謂羲皇上人]”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隱逸傳 陶潛》
♣ 북창삼우[北窓三友]북쪽 창가의 세 친구. 거문고와 시와 술을 일컬음.
♣ 북평태수[北平太守]한나라 북평태수 이광(李廣)이 활을 잘 쏘아 범을 잡았다.
♣ 북풍기량[北風其涼]시경(詩經) 패풍(邶風) 북풍(北風)에 “북풍이 차갑게 불어오며 함박눈이 펑펑 내리도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이와 손 잡고 함께 길을 가리라.[北風其涼 雨雪其雱 惠而好我 携手同行]”하였는데, 이는 국가에 혼란이 닥쳐오게 되었으므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감을 읊은 시이다.
♣ 북풍시[北風詩]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으로, 임금의 정치가 포학하여 백친(百親)이 불친(不親)함을 읊은 시이다.
♣ 북풍장[北風章]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인데, 국가가 혼란할 것을 걱정하여 뜻을 같이한 사람들끼리 피난할 것을 읊었다.
♣ 북풍파남극[北風破南極]북은 음기운이고 남은 양기운으로, 북풍이 남극을 깨뜨렸다는 것은 소인(小人)의 도가 자라고 군자의 도가 소멸된다는 뜻이다.
♣ 북풍편[北風篇]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한 편 이름. 심한 학정(虐政) 때문에 백성들 마음이 흩어지고 국가에는 위난(危難)이 곧 닥쳐올 것을 북풍과 눈보라에 비유하여 슬프고 걱정스러운 뜻을 나타낸 내용의 시. 《詩經 邶風》
♣ 북풍한설[北風寒雪]몹시 차고 추운 겨울 바람과 눈.
♣ 북학[北學]북쪽의 발달된 문명을 배우는 것.
♣ 북학[北學]주(周) 나라 때 서울에 설치하였던 최고 학부(學府) 가운데 하나로, 학부 내에는 동ㆍ서ㆍ남ㆍ북의 사학(四學)과 태학(太學)이 있었다고 한다.
♣ 북해[北海]공 북해(孔北海), 즉 북해 상(北海相)을 역임한 후한(後漢) 말의 문학가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당시에 금주령(禁酒令)을 내린 조조(曹操)에 반대하여 주덕(酒德)을 찬양하면서 “자리에 빈객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 속에 술이 비지 않는다면, 나에게 무슨 근심이 있으랴.[座上客恒滿 尊中酒不空 吾無憂矣]”라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조조의 미움을 받아 죽었다. 《後漢書 卷70 孔融列傳》
♣ 북해빈[北海賓]북해상(北海相)을 지낸 후한(後漢)공융(孔融)이 손님을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자리에는 손님이 늘 가득하고 술독 속에 술만 바닥나지 않으면 내 다른 걱정은 없노라.” 하였다는 것이다. 《蒙求》
♣ 북해상휘[北海觴揮]북해는 후한(後漢) 때 북해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을 가리키는데, 그는 본디 빈객을 좋아하여 그가 한직(閑職)에 물러나 있을 적에는 빈객들이 날로 문에 그득하였으므로, 그가 항상 감탄하여 말하기를 “자리에는 빈객이 항상 그득하고, 항아리에는 술이 항상 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북해준[北海樽]공북해(孔北海)는 한(漢) 나라 때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북해 상(北海相)을 지낸 공융(孔融)을 가리킨다. 공융은 성품이 너그럽고 거리낌이 없었으며, 선비들을 좋아하였고 후생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다. 한직(閑職)으로 물러난 다음에는 빈객들이 항상 집에 가득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주전자엔 술이 빌 때가 없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後漢書 孔融傳》
♣ 북행[北行]명 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사행길을 말한다.
♣ 북행[北行]나라에서 귀가(貴家) 자제(子弟)들을 천조(天朝)에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 북황[北荒]북쪽 끝에 있는 황량하고 먼 지역을 말한다.
♣ 분각간서[焚却諫書]임금에게 간(諫)한 내용의 초고(草稿)를 남이 알지 못하도록 불태워 없애는 것을 말한다.
♣ 분갱모[焚坑謀]진(秦)나라 승상(丞相)은 처음에는 유학자(儒學者) 순황(荀況)의 제자인데, 후일에 진시황(秦始皇)을 권하고 모두 서적(書籍)을 불태우며, 유생(儒生)을 잡아서 무찔러 죽였다. 송나라 소식(蘇軾)이 순경(荀卿 순황(荀況))론을 지어서 말하기를, “순경이 기발하고 높은 말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의 성품은 악하다. 천하를 요란하게 하는 자는 자사(子思) 맹가(孟軻)다’ 하는 등의 해괴한 의론을 하였으므로, 그 폐단으로서 그로부터 배운 이사(李斯)가 끝에 가서는 서적을 불사르는 해괴한 일을 저질렀다.” 하였다.
♣ 분견대신[分遣臺臣]수령(守令)이나 관리들의 탐포(貪暴)와 민생(民生)의 질고(疾苦)를 규찰(糾察)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헌부(司憲府)의 관리. 이때 파견되는 감찰(監察)ㆍ장령(掌令)ㆍ지평(持平) 등 일정치 않다.
♣ 분경[紛更]한(漢) 나라 장탕(張湯)이 법령을 고쳐 개혁 정치를 추진하려고 하자, 급암(汲黯)이 “어찌하여 고황제의 약법 삼장(約法三章)을 뜯어 고쳐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가.[何乃取高皇帝約束紛更止爲]”라고 비판한 고사가 있다. 《史記 汲鄭列傳》
♣ 분곤[分閫]옛날 장군을 보내어 출정할 때에 임금이 그 수레바퀴를 밀어 주며, “성문턱 이내는 내가 통제하고 성문턱 밖은 장군이 통제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외방의 병권(兵權)을 맡아서 나가는 것을 분곤(分閫)이라 한다.
♣ 분골쇄신[粉骨碎身]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함. 그렇게 힘써 일함 또는 목숨을 걸고 힘을 다함
♣ 분관[分館]문과(文科) 급제자를 승문원ㆍ성균관ㆍ교서관의 3관(館)에 나누어 배치시켜 실무를 익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박사(博士) 3인으로 하여금 급제자들을 채점하게 한 뒤 3점(點)을 얻으면 승문원에, 2점을 얻으면 성균관에, 1점을 얻으면 교서관에 보내게 되어 있었다. 《國朝人物考 中》
♣ 분군망국총부여[奔軍亡國總不與]공자가 확상에서 활쏘기를 할 때 자로(子路)를 시켜서 고하기를, “패전한 장수나 나라를 망친 대부, 붙어서 남의 후사가 된 자는 들어오지 말고, 그 밖의 사람은 모두 들어오라.” 하였다. 《禮記 射義》
♣ 분대[分臺]분견대신(分遣臺臣)의 약칭. 수령(守令)이나 관리들의 탐포(貪暴)와 민생(民生)의 질고(疾苦)를 규찰(糾察)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헌부(司憲府)의 관리. 이때 파견되는 감찰(監察)ㆍ장령(掌令)ㆍ지평(持平) 등 일정치 않다.
♣ 분대[粉黛]분묵(粉墨)과 같은 뜻으로 쓴 것임.
♣ 분락[汾樂]분수(汾水)의 즐거움. 한 무제(漢武帝)가 분수(汾水)의 뱃놀이에서 추풍사(秋風辭)를 지었다.
♣ 분모[分茅]띠를 나누어 줌, 곧 큰 공신의 봉함을 받는 일. 큰 공신을 봉할 때 받는 사람이 띠[茅]에다 대사(大社)의 흙을 싸가지고 받았던 고사에서 나온 말.
♣ 분모토[分茅土]제후(諸侯)의 신분이라는 뜻. 옛날 천자가 제후를 봉할 적에 그 지방의 알맞는 색깔의 흙을 흰 띠에 싸서 나누어주면, 제후는 이 흙을 받아 사직단(社稷壇)을 만든 데서 나온 것이다.
♣ 분민치[分澠淄]민(澠)과 치(淄) 두 물이 다 지금 중국의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물인데, 옛날 제(齊)의 역아(易牙)가 그 두 물을 맛을 보고 구별하였다고 함. 《列子 說符》
♣ 분방[芬芳]쌍성자로 아름다움을 이름.
♣ 분부[分符]왕에게 부절(符節)을 나눠 받았다는 뜻으로 보통 군현(郡縣)의 수령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 때 조정에서 지방관을 임명하여 내보낼 때 부절(符節)을 둘로 쪼개 오른쪽의 것은 서울에 보관하고 왼쪽의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 신표(信標)로 삼게 하였다. 두보가 소주목사(韶州牧使)가 되어 떠나는 위초(韋迢)를 전송하는 시에 “좋은 명망 있는 이가 먼저 부절 나누니 같은 관아의 나 또한 빛이 난다네[分符先令望 同舍有輝光].” 하였음. 《杜詩批解 卷二十五 潭州送韋員外迢牧韶州》
♣ 분부독자양제봉[分符獨自讓齊封]유방(劉邦) 후에 크게 성공하여 한(漢) 나라가 건국될 때 여러 공신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그 공을 갚으려 하였다. 장량에게 제(齊)에서 3만 호 백성이 있는 땅을 베어 주마고 하였으나 장량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분분[憤憤]마음에 맺혀서 풀리지 않는 모양, 번민하는 모양, 마음 속이 편하지 않은 모양, 분개하는 모양
♣ 분분[奔奔]서로 싸워서 추한 모양, 새가 암수의 관계가 일정하여 그 유별을 어지럽히지 않는 모양
♣ 분분[雰雰]서리나 눈이 희게 내린 모양.
♣ 분분[忿忿]성내는 모양
♣ 분분[噴噴]소리를 거칠게 하여 야단치는 모양
♣ 분분[棼棼]어지러운 모양
♣ 분사[分司]경연청(經筵廳)을 말한다.
♣ 분사[汾社]애일당 이현보(李賢輔)를 가리킨다. 이현보가 분천(汾川)에 살았다.
♣ 분사어사[分司御史]자운은 이원(李愿)의 집 기생이며, 분사어사는 두목(杜牧)을 가리킨 다.
♣ 분생희노[紛生喜怒]옛날에 저공(狙公)이 잔나비를 여러 마리 기르는데, 잔나비들에게, “아침에는 밤[栗] 세 알을 주고 저녁에는 밤 네 알을 주겠다.” 하니, 잔나비들이 모두 성을 내었다. 저공(狙公)은 다시, “그러면 아침에는 네 알을 주고 저녁에는 세 알을 주겠다.” 하니, 잔나비들은 기뻐하였다. 이것은 실상은 일반인데 공연히 기뻐하였다 성내었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莊子)에 있는 말이다.
♣ 분서[汾西]박미(朴瀰)의 호이다.
♣ 분서[粉署]백색(白色)으로 칠한 관서(官署), 한(漢) 나라 때 여러 성중(省中)에 모두 호분(胡粉)으로 벽을 발랐기 때문에 여러 성을 분서라 하였는데, 전하여 제조(諸曹)의 낭관(郞官)을 일컫기도 한다.
♣ 분서[粉署]흰가루로 벽을 바른 집으로, 부인의 거실을 뜻한다.
♣ 분서객[焚書客]이사(李斯)를 가리킨다. 진시황 때 이사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박사관(博士官)의 직책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시서(詩書) 및 백가(百家)의 서책들을 모두 모아 불태우도록 의논을 올려서, 진시황으로 하여금 모든 서책을 불사르게 하였으며, 선비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게 하였다. 《史記 卷六 秦始皇本紀》
♣ 분서갱유[焚書坑儒]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정부를 비방하는 언론을 봉쇄하기 위해 서적을 불사르고 선비를 생매장하는 등 가혹한 법(苛法)과 혹독한 정치(酷政)를 하였다.
♣ 분서도위[汾西都尉]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한 박미(朴瀰)를 가리킨다. 분서(汾西)는 그의 호이다.
♣ 분섬[分陝]섬(陝)을 나누는 것. 지방장관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섬은 중국 지역 이름. 주(周) 나라 때 주 소공(周召公)과 주공(周公)이 섬을 중심으로 하여, 주공은 동에서 치정(治政)을 하고 소공은 서에서 치정을 하여 마침내 큰 공을 이루었다. 《公羊傳 隱公》
♣ 분성[粉省]상서성(尙書省)의 별칭.
♣ 분성당[粉省堂]상서성(尙書省)의 이명(異名). 상서성의 벽(壁)에는 분(粉)으로 옛날의 현인(賢人)ㆍ열사(烈士)들을 그려 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하여 출세(出世)의 뜻으로 쓰인다.
♣ 분소조[焚巢鳥]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여괘(旅卦)에, “새는 그 둥지를 태우고, 나그네는 먼저 웃고 나중에는 울부짖는다.[鳥焚其巢 旅人先笑後號]”하였다.
♣ 분속[奔屬]빨리 따르다.
♣ 분수[汾水]물 이름. 산해경(山海經) 북산경(北山經)에 “관잠산(管涔山)에는 초목이 없고 옥(玉)이 많은데 분수가 그곳에서 발원(發源)하여 서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 하였다.
♣ 분수[汾水]산서성(山西省) 서남쪽에 위치한 강인데 수(隋) 나라 말기에 왕통(王通)이 그 지역에서 방현령(房玄齡)ㆍ위징(魏徵)ㆍ이정(李靖)ㆍ정원(程元)ㆍ두위(竇威) 등을 위시하여 천여 명의 제자를 가르쳤으므로 많은 제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뜻함.
♣ 분수우림[芬樹羽林]깃일산은 곧 새의 깃으로 장식한, 의장(儀仗) 등에 사용하는 거개(車蓋)를 말한다.
♣ 분수포시[分水舖詩]포(舖)는 역관(驛舘)의 뜻이니 곧 분수(分水)에 있는 역관. 이 제목이 《주문공문집》 제4권에는, “分水舖壁間讀趙仲績留題二十字戱續其後”로 되었음.
♣ 분순[噴筍]북몽쇄언(北夢鎖言)에 “동파(東坡)가 말하기를 ‘문여가(文與可)가 내 시를 보고 하는 말이 요득청빈참태수(料得淸貧饞太守) 위천천무재흉중(渭川千畝在胸中)이라 하였으므로 웃음이 터져서 분순만안(噴筍滿案)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였음.
♣ 분실[賁實]탐스러운 과일을 말함. 시경(詩經) 國風 桃夭에 “싱싱한 복숭아나무 탐스러운 열매 맺었네[桃之夭夭 有賁其實]" 하였음.
♣ 분암[墳菴]분묘(墳墓)를 수호하는 자의 암실(菴室)을 이름.
♣ 분야[分野]하늘의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에 맞추어 지방의 경계를 구분함을 말한다.
♣ 분양[汾陽]당 나라 화주(華州) 사람 곽자의(郭子儀)이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다. 그의 자손들이 이름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인사를 드리면 턱만 끄덕였다고 하여, 세상에서 다복한 사람을 말하려면 곽영공(郭令公)이라고 일컬었다. 《新唐書 卷 137 郭子儀傳》
♣ 분양[湓陽]분양은 당(唐) 나라 때 분수(湓水) 가에 살았던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가리킨다.
♣ 분양복[汾陽福]분양은 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의 봉호(封號)로 그는 역대에 드물게 부귀(富貴)를 누리고 또 많은 자손이 모두 현달(顯達)하였으므로 복록(福祿)이 가장 뛰어났던 인물로 꼽힌다.
♣ 분어[焚魚]두시비해(杜詩批解) 권22 백학사모옥(柏學士茅屋)의 “푸른산의 학사가 은어를 태워 버리고 흰말 타고 달려와 바위 밑에 사는구나[碧山學焚銀魚 白馬却走身巖居]"에서 나온 말이다.
♣ 분여광어동벽[分餘光於東壁]제(齊) 나라 서오(徐吾)란 여인이 이웃 여자와 밤에 길쌈을 하는데, 서오는 가난하여 촛불을 계속하지 못하므로 다른 여자들이 거절하였다. 서오가 말하기를, “한 방에 한 사람이 더 있어도 촛불의 빛은 일반인데, 어찌 동녘벽의 남은 빛[東壁餘]을 아끼는가.” 하였다. 《列子》
♣ 분오[奔吳]한희재는 후당(後唐) 동광(同光) 중의 진사(進士)로, 경락(京洛) 간에 문명(文名)을 떨쳤는데, 그의 부친 광사(光嗣)가 명종(明宗)에게 주살(誅殺)되자, 강남(江南)의 오(吳) 나라 땅으로 도망쳐 남당(南唐)에서 벼슬살이만 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 《宋史 卷478》
♣ 분오외[奔吳畏]분오외는 오(吳)나라로 도망갈 때의 두려움이란 뜻이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오자서(伍子胥)가 송(宋)나라 태자 건(太子建)과 진 경공(晉頃公)의 요청으로 정(鄭)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으로 정 나라에 들어갔다가 일이 누설되어 태자 건이 잡혀 죽었다. 오자는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건의 아들 승(勝)과 함께 오 나라로 도망가던 중 국경의 관문인 소관(昭關)을 통과할 때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길을 달렸다 한다. 《史記 卷六十六 伍子胥傳ㆍ戰國策》
♣ 분온[轒轀]고대 중국의 북방 민족이 사용하던 전차(戰車) 이름이다.
♣ 분용[分龍]피서잡록(避暑雜錄)에 “오ㆍ월(吳越)의 풍속이 5월 20일을 분룡이라 한다.” 하였음.
♣ 분우[分憂]지방관(地方官)으로 나가는 것을 분우(分憂)라 한다.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 맡는다는 뜻이다.
♣ 분우구원[賁于丘園]구원(丘園)은 황폐한 초야로서 은거하는 자가 머무는 곳을 말함. 《易》 賁卦에 “구원을 꾸민다.[賁于丘園]" 하였는데, 순상(筍爽)의 주(注)에 “간(艮)은 산(山)이고 진(震)은 임(林)이다. 그 정위(正位)를 잃고 산림에 있으면서 언덕배기를 다듬어 채마밭을 만드니, 은사(隱士)의 상(象)이다.” 하였음.
♣ 분유[雰糅]눈이 부슬부슬 어지러이 내림
♣ 분유[紛糅]매우 번잡하다. 어지럽다. 무성하다.
♣ 분유[枌楡]한 고조(漢高祖)가 고향인 풍(豐)에 느릅나무 두 그루를 심어 토지신(土地神)으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다. 후세에 제왕(帝王)의 고향으로 전용(轉用)되었다.
♣ 분유지[枌楡地]고향을 이름. 옛날 한 고조(漢高祖)가 고향인 풍(豐)에다 느릅나무 두 그루를 심어서 토지(土地)의 신(神)으로 삼았던 데서 온 말이다.
♣ 분육[賁育]옛날의 용사(勇士)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힘에는 오획(烏獲), 날래기는 경기(慶忌), 용맹은 분과 육.”이라는 말이 있다. 한서(漢書)
♣ 분음후토[汾陰后土]분음(汾陰)은 분수(汾水) 남쪽의 지명으로, 한 무제가 이곳에서 보정(寶鼎)을 얻었으므로 여기에 후토사(后土祠)를 세우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漢書 武帝紀》
♣ 분의기동산[奮衣起東山]은거하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고 나감을 뜻함.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동산에서 오래도록 은거하다가 뒤에 나라의 부름을 받고 나가서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르렀다.
♣ 분전[墳典]삼황 오제의 책으로, 삼분오전(三墳五典)의 약어인데 삼분(三墳)은 삼황(三皇)의 글이요, 오전(五典)은 오제(五帝)의 글이라 한다. 일반적으로는 고서(古書)의 뜻으로 쓰인다.
♣ 분접[粉蝶]흰 나비.
♣ 분정[汾亭]수(隋) 나라 때의 대유(大儒)인 왕통(王通)이 은거하면서 강학하고 쉬던 정자 이름으로 여기서는 왕통을 가리키는 듯하다.
♣ 분조[分朝]조정을 나누는 일 또는 나뉜 조정을 말한다. 분조(分朝)란 임진왜란을 계기로 생긴 용어이다.
♣ 분주맹명[焚舟孟明]맹명은 춘추 시대 진(秦)의 현신(賢臣) 백리해(百里奚)의 아들 백리시(百里視)의 자(字). 사기(史記) 진세가(秦世家)에 “목공(穆公)이 패전했던 맹명 등을 다시 후대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晉) 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맹명은 황하를 건너 진(晉) 나라의 선박을 불태우고 크게 이겼다.” 하였다.
♣ 분주선후[奔走先後]주자집주(朱子集註)에, “所以奔走 以趨君之所嚮而或出其前 或追其後 以相導之者 欲其有以躡先王之遺迹也”라 했음.
♣ 분진[汾津]분진은 통진(通津)의 옛 이름이다.
♣ 분탁[粉籜]죽순(竹筍)의 껍질에 생기는 흰 가루를 말한다.
♣ 분택탈참[分宅脫驂]집을 나눠주고 말을 풀어 줌.
♣ 분통정[分痛情]형제간의 깊은 정을 말한다. 송(宋) 나라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형제간의 정이 아주 깊었는데, 태종이 병을 앓자 태조가 가서 병세를 살펴보고는 직접 뜸을 뜨면서 태종이 아파하면 자신의 몸에도 뜸을 떠서 아픔을 함께 하였다. 《宋史 卷1 太祖本紀》
♣ 분포[湓浦]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琵琶行)’ 서문에 “구강군(九江郡) 사마(司馬)로 좌천되어 내려간 이듬해 가을, 분포(湓浦) 어구에서 손님을 전송하였는데, 그때 배 안에서 한밤중에 비파 뜯는 소리가 들렸다.” 하였다.
♣ 분포선중청[湓浦船中聽]백거이의 비파행(琵琶行) 서에 “원화(元和) 10년에 내가 구강군 사마(九江郡司馬)로 좌천되어, 다음 해에 분포구(湓浦口)에서 손을 전송하는데, 배에서 밤에 비파 타는 소리가 나기에 한참 듣다가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는 본디 장안(長安)의 창녀로 일찍이 비파를 배웠고 젊은 시절에는 홍등가(紅燈街)에서 호화롭게 지내다가 늙어지자 어쩔 수 없이 장사꾼 아내가 되었는데, 이제 이 남편에게서도 버림을 받고 이렇게 강호(江湖)를 떠돌아다닙니다.’ 하기에 느낌이 있어 비파행을 지어서 주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분포읍청삼[湓浦泣靑衫]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가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와 있다가 거기서 객을 전송하던 중 배 위에서 비파 타는 장안(長安) 유락녀(流落女)를 만나 유명한 ‘비파행(琵琶行)’을 지었다. 그 글귀에, “좌중에 흐느낀 울음 누가 제일 많았나. 강주사마 푸른 소매 모두 젖었네.” 하였다. 분포는 곧 강루이다.
♣ 분포청시사마읍[湓浦聽時司馬泣]당 나라의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늙은 기생이 타는 비파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린 고사를 말한다. 백낙천이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상소를 올렸다가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는데, 분포에서 손님을 전송하다가 늙은 기생이 뜯는 비파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것을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리고는 비파행(琵琶行)을 지었다. 《古文眞寶 前集 琵琶行》
♣ 분합수[分陜樹]주(周) 나라 초기에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이 섬(陝)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 동쪽과 서쪽 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에 소공을 서백(西伯)이라고 불렀는데, 선정을 베푼 서백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휴식을 취했던 감당(甘棠)나무를 백성들이 보호하고 노래를 지어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詩經 召南 甘棠》
♣ 분해사[焚骸士]타죽은 선비는 개자추(介子推)이다. 진 문공이 개자추 등과 망명했다가 돌아와 왕이 된 후에 개자추에게만 상을 내리지 않자, 용사지가(龍蛇之歌)를 지어 용은 문공에, 뱀은 자신에 비유하여 부르며 면산(綿山)에 숨었다. 문공이 뒤에 깨닫고 불렀으나 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질러 나오게 했는데도 나오지 않고 타죽었으므로 해마다 그날이면 찬밥을 먹으며 애도하였다.
♣ 분행역[分行驛]경기도 과천(果川) 양재역(良才驛)에 속한 역. 《輿地勝覽》
♣ 분형[汾兄]호가 분서(汾西)인 박미(朴瀰)를 가리킨다.
♣ 분호[分虎]분호는 지방 목민관이 됨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宦者傳序에 “동호부(銅虎符)를 나누어 제후(諸侯)에게 준다.”는 말이 있다.
♣ 분화출자하[紛華黜子夏]자하(子夏)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인데 문학으로 드날렸으므로 그 문학을 분화라 하여 물리친다고 한 것이다.
♣ 분황[焚黃]벼슬을 얻은 뒤에 묘전(墓前)에서 행하는 의식. 황지(黃紙)로 된 제서(制書)를 가지고 가묘(家廟)에 고한 뒤 이를 태워 버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송대(宋代)로부터 시작되었다.
♣ 분황[焚黃]조선(祖先)이 조정에 증직(贈職)을 받았을 때에 그 관직의 고명(誥命)을 황지(黃紙)에 써 가지고 선영(先塋)에 가서 불사른다.
♣ 불가구약[不可救藥]일이 만회할 수 없을 지경에 달하였다는 뜻의 고사성어.
♣ 불가사의[不可思議]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함.
♣ 불가승[不可勝]손자(孫子) 군형(軍形)에, “옛날에 싸움을 잘 하는 자는 먼저 상대가 자신을 이길 수 없는[不可勝] 형세를 만들어 놓고 상대를 이길 수 있기를 기다렸으니, 상대가 이길 수 없는 형세는 자신에게 있고, 자신이 이길 수 있는 형세는 적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싸움을 잘하는 자는 능히 상대가 자신을 이길 수 없는 형세를 만들어서 적으로 하여금 반드시 이길 수 없게 하였다.” 하였다.
♣ 불간지서[不刊之書]영구히 전하여 없어지지 않는 양서(良書).
♣ 불감[佛鑑]거울같이 맑고 깨끗한 부처의 마음.
♣ 불감[不減]줄어들지 않다. 변함없다.
♣ 불견채의래[不見綵衣來]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다는 말이다. 옛날 주(周) 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70에 이르렀음에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高士傳》
♣ 불경[不更]진(秦) 나라 때의 작위(爵位)의 이름이다.
♣ 불계[祓禊]불계는 신(神)에게 빌어 재액(災厄)을 떨어버리는 일을 말함. 옛날 곽우(郭虞)라는 사람이 3월 3일 상신일(上辰日)에 두 딸을 낳았고, 상사일(上巳日)에 한 딸을 낳았는데, 세 딸을 모두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세속에서 그날을 크게 꺼리어, 3월 상사일이 되면 모두 집에 있지 않고 동류수(東流水) 가로 나가 신에게 기도하고 따라서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를 했었다는 고사가 있다. 춘계(春禊)라고 한다.
♣ 불골[佛骨]불골은 석가불(釋迦佛)의 뼈로서 불사리(佛舍利)를 말함. 당 헌종(唐憲宗)이 불사리를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오자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불교를 비판하면서 극간(極諫)하였는데, 이에 황제가 격노하여 한유를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시켰음. 조양은 바로 조주임.
♣ 불골표[佛骨表]당 헌종(唐憲宗) 때 불골(佛骨)을 대궐로 들여오자,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 절대로 불(佛)을 신봉해서는 안 된다고 극간했다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된 일에서 온 말이다. )
♣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한 하늘 아래에 같이 살 수 없는 원수. 어버이의 원수.
♣ 불과[不過]“지나치지 않는다” 곧 “ 어느정도 밖에 안된다”라고 해석 하지요.
♣ 불관진일월[不管陳日月]진(陳) 나라 후주(後主)가 주색(酒色)에 빠져서 밤낮으로 음탕하게 놀기만 하다가 나라를 망쳤다.
♣ 불구대천[不俱戴天]하늘을 같이 이지 못한다는 뜻으로, 같이 살 수 없을 만한 큰 원한을 비유. 아버지의 원수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수 없으므로 세상에 살려 둘 수 없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 친구의 원수는 같은 나라에서 살 수가 없으니 역시 죽여야 한다.
♣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하늘을 함께 머리에 일 수 없는 원수. 즉,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 부모의 원수.
♣ 불구심해[不求甚解]뜻을 풀기가 어려운 곳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 불궤[不軌]궤도(軌度)의 밖으로 벗어났다는 뜻으로 즉 불법(不法)을 말한 것임.
♣ 불귀지구가[不歸知久假]맹자(孟子)의 말에, 오패(五覇)는 인(仁)을 빌린 자이다. 빌린 것도 오래 하여 돌리지 않으면 제것이 안될 줄을 어찌 알랴.” 하였다. 이것은 처음에는 공리(功利)를 위하여 인의(仁義)를 표방하였으나 끝까지 실행하면 된다는 뜻이다.
♣ 불극[不克]불극은 무슨 일을 해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 불급[不及]미치지 못한다.
♣ 불급설[駟不及舌]말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불담왕[不談王]왕도(王道)를 담론(談論)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벼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불당[佛幢]불당은 절 앞에 세운 쇠로 만든 당간(幢竿)이다.
♣ 불도징[佛圖澄]진(晉) 나라 때의 중으로, 본래 천축국(天竺國) 사람인데 낙양(洛陽)에 와서 북조(北朝)의 불법을 크게 일으킨 자이다. 도안(道安) 등의 제자를 길렀다. 그는 현술(玄術)에 묘통(妙通)하였다 한다.
♣ 불두방분[佛頭上放糞]이 말은, 본질은 선(善)한데 좋지 못한 것이 붙어 있다는 것을 비유함. 전등록(傳燈錄)에, “鳥雀 於佛頭上放糞”이란 말이 보임.
♣ 불려[拂廬]토번(吐蕃) 사람들이 사는 장막이다.
♣ 불렵현훤[不獵懸貆]시경(詩經) 위풍(魏風) 벌단(伐檀)에 “애써 뛰고 달려 사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네 집 뜰에 오소리가 매어 달릴꼬.[不狩不獵 胡瞻爾庭有懸貆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저자 자신이 사냥을 않고도 돈을 주고 고기를 사 먹을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 불로장생[不老長生]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 뜻의 고사성어.
♣ 불률[不律]불률은 붓의 별칭임. 진(秦) 나라 때 몽염(蒙恬)이 맨 처음 토끼의 털로 붓을 만들었으므로, 한유(韓愈)의 모영전(毛潁傳)에서 이 고사를 인용하여 “토끼의 털을 취하여 붓을 만들어 간독(簡牘)을 쓰면 천하에 문자를 같이하게 될 것이니, 진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겠도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불립문자[不立文字]말이나 글을 세워 말하지 않고, (말이나 문자에 의한) 가르침 밖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음. 곧 진리는 마음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받아들여진다는 말. 이는 선종禪宗의 요체를 나타내는 말의 하나로, 모든 언어나 경전[글]에 의하지 않고, 석가가 깨달은 불도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以心傳心) 것을 말함
♣ 불망고불식[不妄故不息]“성(誠)은 무망(无妄)인데, 무망한 때문에 쉬지 않는다.”는 말이 경(經)에 있다.
♣ 불망지은[不忘之恩]잊지 못할 은혜.
♣ 불매령[不昧靈]사람의 마음은 공허하여 형체가 없으나, 그 기능은 거울처럼 맑고 환함을 이른다. 대학(大學) 경일장(經一章) 명덕(明德)의 주석에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난 것으로, 허령불매하여 뭇 이치[衆理]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 불면[紱冕]고관(高官)이 허리에 두르는 띠와 머리에 쓰는 관을 가리킨다.
♣ 불면불휴[不眠不休]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는다는 뜻. 조금도 쉬지 않고 애써 일함.
♣ 불모지지[不毛之地]초목이 나지 않는 메마른 땅.
♣ 불문가지[不問可知]묻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음.
♣ 불문곡직[不問曲直]옳고(直) 그름(曲)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일을 처리함.
♣ 불반[不反]돌아오지 않다.
♣ 불벌부덕[不伐不德]자기의 공적을 뽐내지 않음.
♣ 불봉광막수장호[不逢廣漠誰藏瓠]쓸모 있는 재능은 있으나 그것을 쓸 곳이 없음.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하는 말이, 위왕(魏王)이 자기에게 박씨를 주어 그것을 심었더니 박이 열리기는 하였으나 너무 커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또 나무도 큰 놈이 있는데 너무 못생겨서 쓸모가 없다고 하자, 장자는, 그 큰 박은 그대로 강호(江湖)에다 띄우면 될 것이고, 그 나무는 무하유(無何有)의 고장 광막(廣莫)한 들에다 심으면 될게 아니냐고 하였음. 《莊子 逍遙遊》
♣ 불부몽주공[不復夢周公]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너무 쇠했구나. 다시는 꿈에 주공(周公)을 보지 못하네.” 하였다. 공자는 늘 주공의 예악(禮樂)을 다시 일으키려고 사모하였던 것이다.
♣ 불부임하[不負臨賀]옛 정리를 저버리지 않음. 당(唐)의 양빙(楊憑)이 친구를 가려 사귀고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그가 경조 윤(京兆尹)으로 있다가 어사중승(御史中丞) 이이간(李夷簡)의 탄핵을 받아 임하위(臨賀尉)로 폄직이 되었는데, 그가 일단 죄를 얻자 누구 하나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평소 잘 지냈던 서회(徐晦)가 남전(藍田)까지 가서 그를 위로하고 전별하였다. 이를 본 당시 재상 권덕여(權德輿)가 그에게 묻기를, “그대가 임하(臨賀)를 전송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대에게 누가 되지 않겠는가?”하니, 그는 “내가 포의(布衣)로 있을 때에 임하가 나를 알아주었는데 지금 와서 어찌 차마 버릴 것인가.” 하는 내용의 대답을 하였다. 덕여는 그의 충직에 감탄하여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렸더니 이이간이 대뜸 표(表)를 올려 그를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삼았다. 서회가 그를 찾아가서, 자기를 추천한 까닭을 물었더니, 이간이 하는 말이, “그대가 양 임하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국가를 배신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는 것이다. 《唐書 卷一百六十》
♣ 불불[弗弗]바람이 세게 부는 모양, 수긍하지 않음
♣ 불불[昢昢]성한 모양
♣ 불불[沸沸]액체가 끓어오르는 모양
♣ 불비불명[不蜚不鳴]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말로, 큰 일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뜻의 고사성어.
♣ 불사[不死]육신이 죽지 않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한다.
♣ 불사문[不死文]사람이 죽지 않고 장생할 수 있는 방술이 적힌 글을 말한다.
♣ 불사삼입사[不辭參入社]진(晉) 의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때 은사(隱士) 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과 승도(僧徒) 등 1백 23명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란 모임을 조직했던 고사이다. 《梁高僧傳 卷六》
♣ 불상린[不祥麟]춘추 때 노애공(魯哀公)이 서쪽 벌판에 사냥가서 기린을 잡으니, 공자가 보고 말하기를, “기린은 어진 짐승, 왕자의 아름다운 상사이어늘 어째서 왔는고.” 하며 소매를 뒤집어 얼굴을 씻으며 울어 줄줄이 옷깃을 적시었다. “기린이 기린된 소이는 덕으로서요 형상으로서가 아니니, 기린의 남이 성인을 기다리지 않으면 상서롭지 않다 해도 또한 마땅한저.” 《韓愈 獲麟解》
♣ 불성삼와[不成三瓦]영만(盈滿)을 경계하는 뜻이다. 사기(史記) 귀책전(龜策傳)에 “사물을 어떻게 완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늘도 오히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을 짓는데도 기와 석 장을 덜 얹어서 하늘에 응하는 것이다[物安可全乎 天尙不全 故世爲屋 不成三瓦而陳之 以應之天].” 하였다.
♣ 불성즉무물[不誠則無物]중용(中庸) 제25장에 “성은 물의 처음과 끝이므로 성하지 않으면 물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천하의 사물이 모두 실리(實理)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이 실리를 얻은 다음에야 이 사물이 있게 되므로 인심(人心)이 조금이라도 부실함이 있으면 비록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불세지재[不世之才]대대로 드문 큰 재주, 세상에 드문 큰 재주.
♣ 불세출[不世出]세상에 나지 않음. 너무나 재주가 빼어나서 그와 비슷한 사람이 세상에 다시 나타날 수 없을 정도라 여겨지는 뛰어난 인재
♣ 불수수형전[不數水衡錢]대단한 거부(巨富)를 뜻한다. 수형은 한대(漢代)에 천자의 사유의 금전을 관리하는 기관인데, 여기에는 금전이 많이 쌓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불수진[拂鬚塵]수염에 붙은 티끌을 털어 줌. 곧 윗사람이나 권력자에게 아첨함.
♣ 불수하간전[不數河間錢]부귀영화를 하찮게 여김을 비유한 말.
♣ 불순명[不純命]천명무상(天命無常)
♣ 불승의[不勝衣]옛날 섭공 자고(葉公子高)가 왜소한 데다 병으로 수척해진 나머지 옷을 입고 걸을 힘도 없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荀子 非相》
♣ 불식난위애[不識蘭爲艾]세상이 인재를 몰라줌. 초(楚)의 삼려 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이 쓴 이소경(離騷經)에, “집집마다 쑥을 허리춤에 가득 차고 다니면서 유란(幽蘭)은 찰 것이 못 된다고 한다네.[戶服艾以盈腰兮 謂幽蘭其不可佩]" 하였음.
♣ 불식부지이순제지칙[不識不知而順帝之則]나도 몰래 하늘 법을 순종함[不識不知 順帝之則]. 하늘이 분부한 양심대로 행하면 스스로 하늘[帝]의 법칙에 맞는다는 말이다.
♣ 불식태산[不識泰山]인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불심[不審]잘 알지 못하다. 무게와 분양을 다는 기구를 잘 알지 못함을 괴로워한다.
♣ 불양인[不讓仁]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인을 당하여선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하였음.
♣ 불어[拂魚]장송(葬送)할 때, 대나무로 만든 물받이통 장식[池] 밑에 달아맨 동어(銅魚). 상여가 움직이면 이 동어가 흔들리어 뛰놀면서 물받이통을 건드린다. 《禮記 喪大記》
♣ 불엄[不埯]오래 머물지 않다.
♣ 불여귀[不如歸]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두견새 소리로, 불여귀거(不如歸去)의 준말이다.
♣ 불여환여아융담[不如還與阿戎談]남의 아들을 크게 칭찬하는 말이다. 아융은 남의 아들을 일컫는 칭호이다. 동진(東晉) 때 왕혼(王渾)의 친구인 완적(阮籍)이 자기보다 20세나 아래인 왕혼의 아들 왕융(王戎)과 다시 교의(交誼)를 맺었는데, 그가 왕혼의 집에 갈 때마다 잠깐씩 들렀다 나오곤 했으나, 그의 아들인 왕융을 보고는 오랫동안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나와서 왕혼에게 “그대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융과 이야기하는 것만 못하네.” 하였다. 《晉書 卷四十三 王戎傳》
♣ 불예[不豫]마음이 즐겁지 않은 것. 즉 질병이 있을 때를 이름. 맹자(孟子) 양 혜왕 하에, “吾王不豫 吾何以助”라 하고, 그 집주(集註)에, ‘豫 樂也’라고 하였음.
♣ 불외방언동마자[不畏謗言同馬子]남의 비방을 개의하지 않는다는 말.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교지 태수(交趾太守)로 있을 때, 교지의 율무가 알이 굵고 특히 장기(瘴氣)를 치유함에 효험이 크다 하여, 돌아올 때 수레에 싣고 왔다. 그 뒤 비방하는 자가 수레에 가득 싣고 온 것이 다 뇌물로 받은 명주(明珠)라고 참소하였다. 그래서 수뢰(受賂)의 비방을 받는 것을 의이지방(薏苡之謗)이라 한다. 《後漢書 卷五十四》
♣ 불요불굴[不撓不屈]곤란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한번 결심한 마음이 흔들거리거나 굽힘이 없이 억셈. 불요불굴(不搖不屈).
♣ 불용[不容]용납하지 않다.
♣ 불용지[不容軹]수레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조정의 소명에 응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 불원천리[不遠千里]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아니함.
♣ 불원천불우인[不怨天不尤人]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명자불원천, 지기자불원인(知命者不怨天, 知己者不怨人)
♣ 불위득기화[不韋得奇貨]불위(不韋)는 진(秦)의 대상(大商) 여불위(呂不韋). 당시 진(秦)의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아들 자초(子楚)가 조(趙)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곤욕 중에 있었는데, 여불위가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하면서 그 사실을 알고는 자초를 천하에 값어치 있는 보물로 여기고 천금(千金)의 돈을 들여 자초를 볼모로부터 본국으로 빼돌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여불위는 한단의 절세 여인을 얻어 함께 살다가 그가 임신 중인 것을 알고는 그를, 뒤에 장양왕(莊襄王)이 된 자초에게 바쳐 아들을 낳게 했는데, 그 아들이 바로 뒤에 시황(始皇)이 된 정(政)이었다. 따라서 여불위는 결과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영(贏 진 나라 성씨)을 차지한 격이 되었으며 진시황은 뒤에 그를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고 불렀던 것이다. 《史記 呂不韋傳》
♣ 불음주인주[不飮主人酒]진(晋)나라 왕자유(王子猷)가 대[竹]를 좋아하였는데, 남의 집에 좋은 대 밭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가서 바로 대 밭에서 놀았다. 주인은 술을 준비하여 기다렸더니 왕자유는 주인도 보지 않고 바로 나왔다.
♣ 불응폐[不應廢]황폐되지 않음. 현자가 살던 곳은 황폐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자(程子)의 안락정시(顔樂亭詩)에 “물을 차마 폐지하지 못하고 땅도 차마 황폐하게 되지 못한다[水不忍廢 地不忍荒]"는 말이 있다. 《性理大全 卷七十六》
♣ 불이문[不二門]대승교(大乘敎)의 별칭인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준말로, 전하여 불문(佛門)을 이른 말이다. 불이문은 바로 한결되고 실상된 이치를 말하는데, 피차(彼此)의 분별이 없으므로 불이문이라 한다.
♣ 불이법문[不二法門]불이법문은 절대 평등의 유일무이한 지도(至道)로, 불가(佛家)의 최고 경지를 가리킨다. 유마에게 찾아온 보살들이 각자 불이법문에 대해서 해설을 하자 마지막에 문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無言說]”고 하였는데, 유마는 그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불이법문의 경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고 한다. 《維摩經 入不二法門品》
♣ 불이불혜[不夷不惠]“백이(伯夷)는 성(聖)의 청자(淸者)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의 화자(和者)”라는 말이 있다. 《孟子 文公》
♣ 불이증문수[不二證文殊]둘이 아니다는 것은 문수보살과 유마힐(維摩詰)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로 불이법문(不二法門)이란 문수보살을 가리키고 문수 또한 문수보살임.
♣ 불인[佛印]송(宋) 나라 때의 고승(高僧)으로 시(詩)에 능했고 특히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과 친밀했다.
♣ 불일[佛日]부처의 지혜. 불교의 진리. 법력(法力)이 널리 중생을 제도함이 마치 대지를 고루 비추는 태양과 같다는 말이다.
♣ 불입호혈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을 수 없다. 모험 없이는 이득도 없다는 의미.
♣ 불장유자현경구[不將遊子炫輕裘]호화로운 옷을 입고 부귀를 뽐내는 일은 전혀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화(子華)가 가볍고 따뜻한 옷[輕裘]과 살진 말[肥馬]을 타고서 제(齊) 나라로 가자, 공자가 “군자는 급한 처지의 사람을 보살펴 주지, 저렇게 부귀한 사람은 더 이상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論語 雍也》
♣ 불장일검경소년[不將一劍輕少年]한신이 처음 천하게 살 때에 회음(淮陰) 시중(市中)에 갔더니 백정[屠中] 소년들이 한신을 모욕하여 가랑이를 벌리고 서서, “한신이 네가 죽음으로 결단하려거든 너의 찬 칼로 나를 찌르고 그렇지 못하거든 나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거라.” 하니, 한신이 적이 보다가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니 시중(市中)의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비겁하다고 웃었다. 그 뒤에 한신이 초왕(楚王)이 된 뒤에 그 소년들을 불러서 “그 때에 한 칼로 죽이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죽이는 것이 이름이 없는 것이므로 참았다.” 하였다.
♣ 불정한창천[不整恨蒼天]죽었다는 말. 좌전(左傳) 애공(哀公) 16에 “하늘이 돌보지 않아서 한 노성인(老成人)을 남겨 두지 않는구나.” 하였다.
♣ 불제[佛齊]나라 이름임.
♣ 불제정초간생의[不除庭草看生意]마음이 어짊을 말한다.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자기 뜰 앞에 나는 풀을 제거하지 않으므로 혹자가 그 사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자가(自家)의 의사와 일반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즉 자신이나 풀이 다같이 생명을 가졌으므로 살고 싶어하는 생각은 다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近思錄 卷十四》
♣ 불조삼[不弔三]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겁이 나서 자살한 경우와 압사(壓死)한 경우와 익사(溺死)한 경우는 죽어도 조문을 하지 않는다.[死而不弔者三 畏厭溺]”고 하였다.
♣ 불지유한[不知有漢]도잠(陶潛)의 (桃花源記)에 “乃不知有漢 無論魏秦"이라 하였음.
♣ 불집필자분[不戢必自焚]무력을 계속하여 쓰면 자신마저 파멸시킨다는 뜻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4년 조(條)에, “무릇 병(兵)이란 불과 같은 것으로, 그치지 않으면 장차 자신마저 불태울 것이다.” 하였다.
♣ 불징간[佛澄肝]불징은 축불도징(竺佛圖澄)을 가리킨다. 축불도징은 본디 천축(天竺) 사람으로, 진(晉) 나라 회제(懷帝) 때 낙양(洛陽)에 가서 여러 가지 신이(神異)를 나타내어 불법(佛法)을 포교하였다. 그는 젖가슴 주위에 4, 5촌쯤 되는 구멍이 있어서 뱃속이 다 들여다보였는데, 책을 읽을 적에는 그 구멍을 통하여 빛이 나왔으며, 재일(齋日)에는 그 구멍을 통하여 내장을 꺼내 물가에 가서 씻은 다음 다시 집어넣었다고 한다. 《高僧傳 卷9 竺佛圖澄》
♣ 불참금[不慚衾]혼자 잘 때에도 조심함을 말한다.
♣ 불철주야[不撤晝夜]밤낮을 가리지 않음.
♣ 불초[不肖]자기의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말로, 매우 어리석다는 뜻이며 자식이 부모에게 낮추어 부른다는 뜻의 고사성어.
♣ 불초지부[不肖之父]선대(先代)의 덕망을 닮지 못한 어리석은 아버지.
♣ 불치불린[不緇不磷]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아무리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단단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결백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라고 공자가 자신을 비유한 말이 나온다.
♣ 불치하문[不恥下問]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님. 즉,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
♣ 불타청성[不唾靑城]고시에 “不敢唾靑城"이라는 시가 있음.
♣ 불탐양락[不貪羊酪]양락은 곧 양유(羊乳)인데, 진(晉) 나라 때 육기(陸機)가 일찍이 왕제(王濟)를 찾아뵙자, 왕제가 양유 수곡(數斛)을 육기 앞에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경(卿)이 사는 강동(江東)에는 무엇으로 이것과 맞먹을 것이 있는가?”하니, 육기가 대답하기를 “천리호(千里湖)의 순갱(蓴羹)과 평강(平江) 말하(末下)의 염시(鹽豉)가 있을 뿐입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言語》
♣ 불편부당[不偏不黨]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중정(中正), 공평(公平)함. 늘 그러한 자연의 길(道)의 본질을 말한다.
♣ 불편불의[不偏不倚]중용(中庸)의 중(中) 자에 대한 뜻을 풀이한 말이다. 주자(朱子)는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 않아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용(庸)은 평상(平常)한 것이다.[不偏不倚 無過不及之謂中 庸平常也]" 하였다. 《中庸章句 題辭》
♣ 불평명[不平鳴]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대저 만물은 평정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 하여, 시문(詩文)을 짓는 것에 비유하였다.
♣ 불평지명대성희[不平之鳴大聲希]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대저 어떤 존재이든 간에 온당함을 얻지 못하게 되면 밖으로 표현해내기 마련이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이라 하였고, 고사성어고(故事成語考) 송옥(訟獄)에 “세상 사람은 불만스러우면 떠들어대지만, 성인은 함께 따지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世人惟不平則鳴 聖人以無訟爲貴]”라고 하였으며, 노자(老子) 41장에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이라고 하였다.
♣ 불한이율[不寒而慄]춥지 않아도 벌벌 떨 정도로 몹시 두려운 상황을 일컫는 고사성어.
♣ 불호[佛毫]부처의 사리에서 나오는 광채. 식소편(識小篇)에 “영락(永樂) 연간에 불경을 반포하러 대보은사(大報恩寺)에 이르렀더니, 그날 밤 본절의 탑에서 사리의 빛이 보주(寶珠)처럼 보이고, 또 오색 호광(毫光)이 나타났다.” 하였다.
♣ 불혹[不惑]40세. 마음이 미혹되지 않는다. 마음에 의혹됨이 없다. 판단에 혼란이 없음. 사물의 이치(事理)나 인간의 도리(道理)를 판단하는 안목이 명백해지고, 아는 것이 분명해져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마음에 한 점의 의혹도 일어나지 않게 됨. 논어(論語)에 공자(孔子)가 “나는 40세가 되어서는 의혹하지 아니하였다.[四十而不惑]”라고 하였다.
♣ 불화[不花]토인(土人) 야선불화(也先不花)를 말하는데 그는 원(元) 나라 궁중의 급사(給事)로 공을 쌓아 그 공으로 향관(鄕貫)을 승격시켜 현으로 복구시켰다. 그 뒤에 야선불화가 사명을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와 말하기를 “본현의 흥복천사(興復遷徙)에 대하여 비가 없을 수 없다.” 하므로 최해가 그 비문을 지었음.
♣ 불환[不還]돌아가지 못한다.
♣ 불환[佛鬟]산의 별칭.
♣ 붕[鵬]장자(莊子) 逍遙遊에 “북쪽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이름은 곤(鯤)이다. 변화해서 새가 되었는데 이름은 붕(鵬)이다. 붕새의 등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으며 날면 날개가 하늘을 덮는 구름과 같다.” 하였는데 사람이 큰 뜻을 품은 것에 비유한다.
♣ 붕거[鵬擧]송조(宋朝)의 충신 악비(岳飛). 붕거는 그의 자(字)임.
♣ 붕격수삼천[鵬擊水三千]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에서 옮겨갈 때에는 물을 3천 리를 치고 힘차게 날아 9만 리를 올라간다.” 하였다.
♣ 붕남사[鵬南徙]북해(北海)의 대붕새[大鵬鳥]가 남해로 옮긴다. 장자(莊子)
♣ 붕당[朋黨]뜻을 같이한 사람끼리 모인 단체.
♣ 붕배부요여척지[鵬背扶搖如尺咫]의기(意氣)가 원대함을 뜻함. 붕새의 등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붕새가 남쪽 바다로 갈 적에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9만리나 올라가 6개월을 가서야 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 붕우유신[朋友有信]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붕익[鵬翼]붕새의 날개. 곧 아주 먼 길을 난다는 비유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날개를 치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은데,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 타고 9만 리나 날아 올라간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붕정[鵬程]붕은 곤(鯤)이 변하여 되었다는 전설상의 가장 큰 새로서 붕정구만리(鵬程九萬里)의 준말. 《莊子 逍遙遊》
♣ 붕정만리[鵬程萬里]붕새가 날아가는 하늘길이 만리로 트임. 곧 전도가 지극히 양양한 장래.
♣ 붕정음기[鵬程音氣]장자(莊子)에, “대붕(大鵬)새는 날개가 천 리나 되는 큰 새이므로 북해에서 남해로 옮길 때에는 구만 리로 날아 올라간다.” 하였다. 여기서는 전정(前程)이 멀다는 뜻이다.
♣ 비[批]내려 치다.
♣ 비각권적[臂角拳啇]각(角)과 상(商)은 다 오음(五音) 중의 명칭이나 방위(方位)로도 논하는데, 산세(山勢)의 길형(吉形)을 말하는 풍수가들의 용어.
♣ 비간[比干]비간(比干)은 상(商) 나라의 충신이다. 상나라 임금 주(紂)가 음란함과 포학(暴虐)함이 극도에 달하였으므로 비간이 바른 말로 간(諫)하였더니, 주가 노하여, “성인(聖人)의 심장을 한 번 시험해 보리라.” 하고, 비간을 죽여서 배를 갈라 보았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를 쳐 죽인 뒤에 비간의 무덤을 찾아 봉축(封築)하여 표창하였다.
♣ 비간[比干]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숙부. 주(紂)의 음란함을 간(諫)하여 3일을 가지 않으니 주가 “성인(聖人)은 뱃속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하니 참 그런지 보자 하고 드디어 비간을 처형시켜 배를 갈라 보았다.” 한다. 은(殷)의 3인(仁) 중의 한 사람. 《史記》
♣ 비간고어상신[比干刳於商辛]상(商)의 주(紂)가 자기를 간하는 비간(比干)에게 “나는 성인(聖人)의 심장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고서 그의 배를 갈랐다고 한다.
♣ 비강[粃糠]쭉정이와 겨를 이르는데, 전하여 쓸모없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에 “고야산(姑射山)의 신인(神人)은 그의 찌꺼기를 가지고도 요순(堯舜)을 만들어[陶籌] 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 비격우모망[飛檄羽毛忙]격문(檄文)은 군사상 공문을 말함인데 그 격문에 새의 깃을 꽂으면 급한 공문이라는 표시가 되었으므로 우격(羽檄)이란 말이 생겼다.
♣ 비견계종[比肩繼踵]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뒤꿈치를 이음.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잇달아 속출함을 말한다. 여러 사람을 줄지어 세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비견수[比肩獸]비견수는 앞발이 워낙 짧아서 달리지 못하므로, 항상 공공거허(邛邛岠虛)와 나란히 다니면서 공공거허에게 감초(甘草)를 먹여 주어, 혹 위기를 만나면 공공거허가 그를 등에 업고 도망친다고 한다.
♣ 비결발호[秘訣發瓠]호리병박 속에서 나온 비결. 서희(徐熙)가 황로(黃老)의 학문을 좋아하여 진망산(秦望山)에서 숨어살았는데, 어느 도사(道士)가 그곳을 지나다가 물을 마시고는 호리병박 한 통을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 자손이 장차 도술(道術)로 세상을 구제할 것이요.” 하였다. 그리하여 그 박을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 편작(扁鵲)의 경경(鏡經)이 들어 있었다고 함. 《南史 徐熙傳》
♣ 비경[飛瓊]전설 속의 선녀(仙女) 허비경(許飛瓊)을 가리킨다.
♣ 비경명자안인성[飛卿名字安仁姓]비경은 당 나라 문장가 온정균(溫庭筠)의 자(字)이며, 안인(安仁)은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자(字)이니, 반정균의 이름이 온정균과 같고 성이 반악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 비경사[飛瓊詞]비경은 옛 선인(仙人)으로, 서왕모(西王母)의 시녀(侍女)인 허비경(許飛瓊)을 이르는 데, 옛날 허혼(許渾)이란 사람이 꿈에 곤륜산(崑崙山)에 올라가 두어 사람이 술마시는 것을 보고 시를 읊기를 “새벽에 요대를 들어오니 이슬 기운 맑은데 좌중에는 오직 허비경만이 있구려 속된 마음 끊이지 않고 세속 인연 남았는데 십 리라 하산에 부질없이 달만 밝구나[曉入瑤臺露氣淸 座中唯有許飛瓊 塵心未斷俗緣在 十里下山空月明]”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비공[碑孔]비공은 곧 옛날 천자(天子)나 제후(諸侯)의 장례 때, 큰 나무를 깎아 목비(木碑)를 만들고 그 목비 상단에 구멍을 뚫어 새끼줄을 묶고 다시 새끼줄의 한쪽 끝을 관(棺)에 매어서 하관(下棺)을 서서히 안전하게 하도록 했던 일종의 장구(葬具)였다.
♣ 비공장[費公杖]비공은 후한(後漢) 때의 도인(道人) 비장방(費長房)을 가리킨다. 그는 신선 호공(壺公)을 따라 산에 들어가서 선술(仙術)을 배웠는데, 호공을 하직하고 나올 적에 호공이 그에게 부적(符籍) 하나를 주면서 그것을 가지고 지상(地上)의 귀신들을 자유로이 부리도록 해 주었으므로, 그는 과연 그 방법에 따라 채찍으로 귀신을 매질하여 마음대로 부렸다고 한다.
♣ 비공투[費公投]비공(費公)은 후한(後漢) 사람 비장방(費長房)을 말한다. 비장방이 신선술을 배우고 대나무 지팡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지팡이를 갈피(葛陂)에 던지자 지팡이가 용으로 변하였다. 《後漢書 卷 82下 費長房傳》
♣ 비관[鼻觀]불교(佛敎)의 용어로서 비단백(鼻端白)을 관(觀)하는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 즉 스스로 자신의 코끝을 관찰하는 법. 그리하여 연기처럼 드나드는 콧속의 기(氣)를 관찰하다보면 신심(身心)이 안으로 밝아지고 연기가 점차 사라져서 비식(鼻息)이 많아진다고 한다. 능엄경(楞嚴經) 권5에 “세존(世尊)이 나와 구시라(拘絺羅)에게 ‘코 끝에서 나오는 흰 연기를 보는 참선법[觀鼻端白]’을 가르쳐 주셨다.”는 말이 나온다.
♣ 비관[鼻觀]콧구멍을 말함. 소식의 소향시(燒香詩)에 “不及聞思所及 且令鼻觀先叅"이라 하였음.
♣ 비관혁[非貫革]논어(論語) 팔일(八佾)에 “활쏘기에 과녁 뚫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옛날의 도다.” 하였는데, 그 주에 “활쏘기란 덕을 보는 것이므로 맞추는 것을 중시하고 과녁 뚫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힘이 강약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 비광[斐狂]공자는 타국에 있을 때 말하기를, “돌아가야겠다. 우리 고향의 소자(小子)들이 광간(狂簡)하여 비연(斐然)히 문장을 이루었으나 재단할 바를 모른다.” 하였다. 광(狂)은 실천이 높은 뜻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요, 비연은 문장이 빛난다는 뜻이다.
♣ 비광[斐狂]비는 환하게 문채가 나는 것을 말하고, 광은 뜻이 너무 커서 언행이 상규에 어긋나는 것을 이른 말로, 공자(孔子)가 진(陳)에 있을 적에 이르기를 “돌아가야겠구나! 오당(吾黨)의 소자(小子)들이 광간(狂簡)하여 비연(斐然)히 문장을 이루었으나 재단할 바를 모르는도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公冶長》
♣ 비굉원우[碑轟元祐]송(宋) 나라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한 문인과 학자 등 309인을 간당(姦黨)으로 몰아 천하에 반포한 비석. 원우당적비(元祐黨籍碑)라고 한다.
♣ 비구[臂鞲]일하는 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 옷소매 위를 싸는 비의(臂衣)를 가리킨다.
♣ 비구절[臂九折]초사(楚辭) 구장(九章) 석송(惜誦)에 “충성스러운 말을 했다가 원망만 자초했다는 말을 내가 옛날에 듣고서, 그것은 지나친 말이라고 내가 대뜸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아홉 번이나 팔뚝을 부러뜨려 의사가 다 되고 나서는, 이제 그 말이 참으로 맞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게 되었다.[吾聞作忠以造怨兮 忽謂之過言 九折臂而成醫兮 吾至今乃知其信然]”라는 말이 나온다.
♣ 비궁[閟宮]본디 노(魯) 나라의 종묘(宗廟)를 이른 말인데, 전하여 사당을 가리킨다.
♣ 비궐부립[碑蹶復立]태종이 위징이 죽은 뒤에 비석을 세워 주었다가 그 뒤에 위징이 평일에 직간(直諫)한 초고(草稿)를 집에 남겨 둔 것을 보고,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었다고 격노하여 비석을 넘어뜨리라 명하였다가, 뒤에 고구려에게 패하고 와서 뉘우치고 위징을 생각하여 다시 세웠다.
♣ 비극당위태[否極當爲泰]주역(周易)에 비(否) 괘는 운이 나쁜 괘요, 태(泰)는 운이 트이는 괘인데 비괘(否卦)의 뒤에는 태괘가 된다.
♣ 비근[飛根]비근은 나무뿌리 밑에서 솟아나는 샘. 운급칠전(雲笈七籤)에 “口啜皇華 仰餐飛根"이라 하였음. 수옥은 나는 샘이 암석에 부딪혀 옥의 소리를 낸다는 말임. 육기(陸機)의 초은시(招隱詩)에 “山溜何冷冷 飛泉潄鳴玉"이라 하였음.
♣ 비금주수[飛禽走獸]날짐승과 길짐승.
♣ 비기[丕基]아름다운 터전
♣ 비기출동원[秘器出東園]비기(秘器)는 관곽(棺槨) 등의 장구(葬具)를 말한다. 한대(漢代)에 제왕(諸王)과 공신 등이 죽으면 으레 동원(東園)의 비기를 하사하였던 고사가 있다. 《漢書 孔光傳》
♣ 비남붕조[啚南鵬鳥]붕새[大朋]는 한 번 날면 9만 리를 날아서 북극에서 남극을 단숨에 난다고 한다. 누가 붕새와 같은 큰 인재냐 하는 의미의 말이다.
♣ 비단백[鼻端白]연기처럼 코 끝을 출입하는 하얀 숨결이라는 뜻으로, 명상의 지극한 경지에 들어가면 그 기운이 보인다는 불교 수행법 상의 용어이다. 코 끝에 정신을 집중하고 오랫동안 호흡을 가다듬으면 내쉬는 숨결이 마치 연기처럼 흰 기운으로 변하면서 심신이 맑아져 득도(得道)하게 된다고 하는 일종의 참선법(參禪法)이다. 《楞嚴經 卷5》
♣ 비단성풍수[鼻端成風手]뛰어난 재능과 기교를 비유한 말이다. 옛날 영인(郢人)이 코 끝에다 마치 파리 날개만한 악토(堊土)를 바르고는 장석(匠石)을 시켜 그 악토를 깎아내게 하자, 장석이 바람소리가 휙휙 나도록 자귀를 휘둘러 깎아냈는데 악토만 깨끗이 다 깎이고 코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다. 《莊子 徐無鬼》
♣ 비단유백[鼻端有白]마음이 항상 산동(散動)하여 무루(無漏)를 얻지 못하니, 세존(世尊)이 나에게, ‘코끝의 흰 것을 보라.’고 가르쳤다. 나는 처음으로 살펴보노라니, 삼칠일(三七日)이 지나서야 코 속의 기운이 연기와 같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몸과 마음이 안으로 밝아서 원동(圓動)하는 세계가 두루 허정(虛淨)을 이루어서 마치 유리와 같았다. 연기가 차츰 사라지고 콧김이 하얗게 되며, 마음이 열리고 누(漏)가 다하고 모든 드나드는 숨이 화(化)해 광명(光明)이 되어 시방 세계(十方世界)에 비춘다. 《楞嚴經》
♣ 비단참[鼻端參]불교에서 신체를 수련하고 불성(佛性)을 기르는 법의 한 가지로, 21일 동안 코끝을 응시하고 있으면 코속에 드나드는 기운이 연기처럼 뽀얗고 신심(身心)이 밝아지며 온 세계가 텅 비고 맑아져 마치 유리와 같으며, 결국에는 드나드는 모든 숨결이 빛으로 화하여 시방세계를 비추고 아라한(阿羅漢)을 얻는다고 한다. 《楞嚴經 卷五》
♣ 비덕쇠[悲德衰]초(楚)나라 사람 접여(接予)가 공자의 수레 앞을 지나면서 노래하기를, “봉(鳳)이여 봉이여 어찌 덕이 쇠한고.” 하였다.
♣ 비동의[飛動意]두시비해(杜詩批解) 권4 증고식안(贈高式顔)의 “평소에 높이 날아 움직인 뜻은 너를 보니 없지를 아니 하도다[平生飛動意 見爾不能無].”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활기차게 생동하는 기백을 말함.
♣ 비래방장[飛來方丈]전라북도 완주군 고달산 경복사(景福寺)에 있던 승방(僧房)인데, 원래는 고구려의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있던 것을 보장왕 26년에 보덕(普德)의 신통력에 의하여 이곳으로 날라온 것이라 한다.
♣ 비래봉[飛來峯]원래 날아온 산이라는 뜻으로 생긴 이름인데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다. 진(晉) 나라 때 중 혜리(慧理)가 이 산에 올라서 탄식하기를 “이 산은 본래 천축국(天竺國) 영취산(靈鷲山)의 작은 봉우리였는데 언제 이곳에 날아왔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한다. 《輿地記》
♣ 비렴[飛簾]유학(幼學)으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이는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희귀하므로, 유가(遊街)할 때 인가(人家)에서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 비렴[飛廉]전설 속에 나오는 바람을 일으킨다고 하는 신수(神獸)의 이름이다. 또는 풍신(風神)을 가리키기도 한다. 풍백(風伯)이라고도 한다.
♣ 비렴[蜚廉]주(紂)의 총애를 받으며 몹쓸 짓을 도맡아 한 신하 이름.
♣ 비렴신[飛廉神]본시 신령한 새 이름인데, 전(轉)하여 풍백(風伯).
♣ 비렴악래[飛廉惡來]비렴은 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영신(佞臣)이었는데, 자기 아들인 악래(惡來)와 함께 주왕을 섬기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부자가 똑같이 주왕의 총애를 받았었다. 비렴은 달음질을 잘하고 악래는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 비례물동[非禮勿動]예(禮)가 아니면 행동으로 옮기지도 말아라.
♣ 비례물시[非禮勿視]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보지를 말라는 뜻. 도리에서 벗어나는 남의 행동은 본받을 점이 없기에 눈여겨 볼 필요가 없다.
♣ 비례물언[非禮勿言]예(禮)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아라.
♣ 비로[毗盧]비로차나불(毘盧遮那佛)의 약칭. 부처의 진신(眞身). 본뜻은 광명편조(光明遍照)이다.
♣ 비로해장[毗盧海藏]비로자나(毘盧遮那)는 광명변조(光明遍照)라 번역되는데 본성(本性)이 청정(淸淨)하여 일체법(一切法)을 낸다.
♣ 비룡[飛龍]현재의 임금을 뜻함
♣ 비마염곡명금랄[肥馬厭穀鳴金埒]진(晋)나라 왕제(王齊)는 사치스럽고 말[馬]을 사랑하여 뜰 안에다 말 다니는 마당을 돈을 엮어서 만들었다.
♣ 비만[飛輓]군량 운송을 말한다.
♣ 비만봉장석[鼻墁逢匠石]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어떤 토수(土手)가 토역을 하다가 흙덩이가 코에 떨어지므로 대목을 시켜 닦으라고 했는데, 대목은 큰 자귀를 갖고 바람이 날 정도로 그 흙덩이를 깎아버렸으나 코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하였다.
♣ 비만퇴[鼻墁堆]비만퇴는 코에 발린 진흙덩이를 말한다. 옛날 초(楚) 나라 영인(郢人)의 코 끝에 파리 날개[蠅翼] 만한 진흙덩이가 묻었는데 석수(石手)를 시켜 그 진흙을 깎아내라고 하자, 석수는 곧 도끼를 가지고 그 진흙을 깎아서 떼어냈는데도 영인의 코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듣고 송 원군(宋元君)이 석수에게 자기 코도 깎아 보라 하자 석수는 대답하기를 “영인(郢人)의 코만을 깎을 수 있는데 지금 그가 죽고 없으니 다른 사람은 깎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莊子 卷六 外篇 徐无鬼》
♣ 비목[批目]관리의 인사발령(人事發令)을 기록한 문서. 정목(政目)과 같은 말.
♣ 비목내익존[卑牧乃益尊]겸손으로 기르면 더욱 높아짐. 주역(周易) 겸괘(謙卦)에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 기른다.” 하였다.
♣ 비목어[比目魚]눈을 나란히 하는 물고기란 뜻으로, 외눈박이 물고기를 뜻한다. 이 물고기는 눈이 하나씩밖에 없어서 암수 두 마리가 모여 두 눈을 나란히 해야만 온전한 구실을 할 수가 있다. 즉, 둘이 떨어져서는 살 수 없으므로 부부 사이로 비유되는 것이다
♣ 비몽[羆夢]곰을 꿈꾸는 것. 곧 생남(生男)의 징조를 뜻하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길한 꿈이 무엇인가 큰 곰 작은 곰이다.” 하였다.
♣ 비몽사몽[非夢似夢]꿈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함.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어렴풋한 상태.
♣ 비박[菲薄]보잘것없다.
♣ 비방지목[誹謗之木]헐뜯는 나무라는 뜻의 고사성어.
♣ 비백[飛白]서체의 하나. 팔분(八分)과 비슷한데 필세(筆勢)가 나는 듯하고 붓자국이 비로 쓴 자리같이 보이는 서체.
♣ 비병[痞病]배꼽 언저리가 띵띵하고 누르며 아픈 병.
♣ 비복[非復]회복되지 않음.
♣ 비봉[批鳳]비봉은 봉각(鳳閣)에서 비답(批答)을 수정하는 학사(學士)들을 가리킨다.
♣ 비부[秘府]금중(禁中)의 도서와 비기(祕記)를 보관해 두는 곳으로 후세에는 비서성(秘書省)을 가리켰다.
♣ 비분강개[悲憤慷慨]슬프고 분한 느낌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음.
♣ 비비[斐斐]가벼운 모양, 무늬가 화려한 모양
♣ 비비[匪匪]거마의 행렬이 아름답고 정연하게 나아가는 모양
♣ 비비[騑轡]곁마의 고삐.
♣ 비비[非非]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것, 즉 꺼림없이 시비(是非)를 밝힌다는 말이다. 불가(佛家)의 말로는 비상(非想)ㆍ비비상(非非想)을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지극히 현묘(玄妙)함을 이른다.
♣ 비비[駓駓]내닫는 모양.
♣ 비비[朏朏]동이 트려고 어슴푸레 한 모양, 동틀 무렵, 티끌이 쌓인 모양, 짐승 이름, 흰 꼬리에 갈기가 있는, 너구리 비슷한 짐승인데 이를 기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함
♣ 비비[悱悱]마음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말로써 표현해 내지 못하는 모양
♣ 비비[淠淠]많은 모양
♣ 비비[丕丕]몹시 큰 모양
♣ 비비[霏霏]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모양.
♣ 비비[卑卑]스스로 힘씀
♣ 비비[沸沸]액체가 끓어오르는 모양
♣ 비비[菲菲]향기가 풍기는 모양.
♣ 비비[比比]흔히, 자주, 모두, 낱낱이, 무엇이든지
♣ 비비[咇咇]슬피 욺
♣ 비비낙설[霏霏落屑]훌륭한 언론(言論)이 유창함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왕징(王澄)이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 “언국(彦國)은 훌륭한 언론을 뱉는 것이 마치 끊임없이 쏟아지는 톱밥과 같아서 참으로 후진(後進)들의 영수(領袖)가 될 만하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비비유지[比比有之]드물지 않음.
♣ 비사[悲絲]묵자(墨子) 소염(所染)에 “흰 실이 노랑ㆍ빨강 등으로 물들여지는 것을 보고, 사람도 그와 같이 환경에 따라 변해지는 것을 슬퍼했다.” 하였다.
♣ 비사[毗沙]불법을 말함.
♣ 비사주석[飛沙走石]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린다는 뜻으로, 세찬 폭풍(暴風)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
♣ 비상사태[非常事態]심상치 않은 큰 사태.
♣ 비상지변[非常之變]보통의 상태가 아닌 특별하게 일어난 변고의 뜻으로, 뜻밖에 일어난 재앙이나 사고의 의미.
♣ 비색[否塞]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도학이 밝지 못한 탓으로 사특하고 요망한 말이 다투어 일어나 백성의 귀와 눈을 막음으로써 천하를 더러움에 빠뜨렸다. 이는 바른 길의 장애물이 되니, 열고 넓혀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음.
♣ 비생육[髀生肉]유비(劉備)가 형주(荊州)에 머무를 때에 유표(劉表)의 자리에서 일어나 뒷간에 갔다가 넓적다리에 살이 찐 것을 보고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 돌아와 앉았다. 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비가 말하되, “내가 항상 몸이 말 안장을 떠나지 않아 넓적다리 살이 다 스러졌더니, 이제 다시 말을 안 타 넓적다리에 살이 생겼는지라, 세월은 달리는데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했으니 그러므로 슬퍼하오.” 하였다.
♣ 비서[費誓]비는 서경(書經) 비서편(費誓篇)에 나오는 지명. 노후(魯侯)가 서융(徐戎)과 회이(淮夷)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모아 놓고 훈시한 곳이다.
♣ 비서감[祕書監]경적(經籍), 도서(圖書), 저작(著作) 등의 일을 관장하는 비서성(祕書省)의 장관을 말하는데, 이태백(李太白)을 처음 만나 보고 나서 바로 적선(謫仙)이라고 찬탄하며 자신의 관인(官印)을 끌러 술값을 치르면서 함께 통음(痛飮)했던 당(唐) 나라의 비서감 하지장(賀知章)을 가리키기도 한다.
♣ 비석[飛錫]승려가 거처할 곳을 얻어 머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응진이 석장(錫杖)을 날려 몸을 싣고서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라는 말이 있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비석[飛舃]후한(後漢) 때 왕교(王喬)가 섭현령(葉縣令)이 되어 그 먼 곳에서 매월 삭망(朔望) 때마다 반드시 조회를 오므로, 임금이 그가 거기(車騎)도 없이 자주 오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가 오는 것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그가 올 때에 오리 두 마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오자 그물을 쳐서 그것을 잡아 놓고 보니 신 한 짝만이 걸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方術傳》
♣ 비석나한[飛錫羅漢]서천(西天)의 도승(道僧)이 흔히 석장(錫杖)을 날려 왕래했다 한다. 중국의 고승(高僧) 은봉(隱峯)도 오대(五臺)에 놀 때에 회서(淮西)에 나와 석장을 던지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며, 신라(新羅) 때에도 양지(良志)가 만든 석장이 절로 날아 단월(檀越)의 집마다 다니며 쩔렁쩔렁했다 한다.
♣ 비석자능선야학[飛錫自能先野鶴]양(梁) 나라 무제(武帝) 때 승(僧)과 도사(道士)가 한 도량(道場)을 놓고 서로 다투자, 무제가 말하기를, “먼저 그곳에 도달하는 자가 그것을 차지하라.” 하였다. 이에 도사가 백학(白鶴)으로 화해 먼저 소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잠시 뒤에 허공을 뚫고 지팡이가 날아왔는데, 그 소리가 골짜기를 울리었는바, 바로 승이 던진 지팡이였다. 그러자 백학이 놀라서 달아나 드디어 승이 도량을 얻었다.
♣ 비석지심[匪石之心]돌과 같이 자유로이 구르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확고불발(確固不拔)한 절조(節操)가 굳은 마음의 의미.
♣ 비성비현[非聖非賢]“술꾼이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 한다.” 하였다. 《鮮于輔의 말》
♣ 비성여뢰[沸聲如雷]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다는 뜻으로,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가 우레와 같이 심하듯이 전쟁의 참상을 비유하는 말.
♣ 비소[誹笑]비웃는 웃음
♣ 비슬산[琵瑟山]현풍현(玄風縣) 동쪽의 비슬산인데 옛 이름은 걸산(乞山)이다. 《輿地勝覽》
♣ 비승비속[非僧非俗]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 한 얼치기를 비유하는 말. 반승반속(半僧半俗)
♣ 비실[篚實]옥백(玉帛)을 담는 광주리.
♣ 비심[裨諶]춘추 시대 정(鄭) 나라의 대부(大夫). 문안을 창안해 내는 슬기가 있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외교 문서를 만듦에 비심이 초안을 작성하고……" 하였다.
♣ 비심[裨諶]춘추 시대 정(鄭) 나라의 대부(大夫)인데, 그는 꾀를 내는 데에 유능했으되, 반드시 초야로 내려가야만 좋은 꾀가 나왔으므로, 외교(外交) 관계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는 반드시 초야로 가서 그 일에 대한 가부를 꾀하게 했다 한다. 《左傳 襄公三十一年》
♣ 비심[裨諶]춘추 시대(春秋時代) 모사(謀事)에 능했던 사람. 그런데 그의 모사도 교외에서는 잘 맞았지만 성내에서는 잘 맞지 않았다 한다. 《淮南子 說林訓》
♣ 비아몽육[匪莪蒙育]시경(詩經) 소아 요아(蓼莪)에 “쑥이 무성히 자란다 하였더니, 쑥이 아니라 흰 쑥이었네. 가련하신 우리 부모 나를 낳아 키우시느라 수고하셨네.[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劬勞]" 하였는데, 이는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고 지은 시로서, 부모가 자기를 키울 적에는 큰 기대를 걸었으나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하니, 이는 마치 쑥인 줄 알고 먹으려 하였으나 자라고 보니 먹을 수 없는 흰 쑥인 것과 같다는 뜻이다.
♣ 비아부화[飛蛾赴火]나방이 날아 불로 달려든다는 뜻으로, 스스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화를 자초한다는 의미. 《梁書》 ☞ 비아투화(飛蛾投火), 야아부화(夜蛾赴火)
♣ 비야[毗耶]비야는 비야리(毗耶離)의 준말로 석가모니 당시에 유마 거사(維摩居士)가 병을 핑계대고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설했던 성(城). 또는 유마거사가 설한 불이법(不二法)을 말한다. 유마경(維摩經)에 “伊時毗耶大城中有長者 名維摩詰"이라 하였음. 진병ㆍ가병은 유마힐의 병을 말함.
♣ 비야리[毗耶離]인도 비야리성(毗耶離城)의 장자(長者)로서 석가(釋迦)의 교화를 도왔던 유마거사(維摩居士)를 말한다. 그의 소설(所說)을 기록했다는 유마경(維摩經)의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은 특히 유명하다.
♣ 비야사[毗耶師]율사(律師)의 뜻이다. 비야(毗耶)는 비나야(毗奈耶)의 준말로서 부처가 제정한 율법(律法)을 의미한다.
♣ 비야의상탈천화[毗耶衣上脫天花]중의 가사(袈裟)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이다. 비야의 옷이란 곧 중의 옷을 뜻하고, 하늘꽃이[天花]이 흩어졌다는 것은 곧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 비양[飛颺]비양(飛揚)과 상통함. 날아가다, 흩날리다.
♣ 비양거[飛鍚去]양(梁)나라 보지선사(寶誌禪師)가 백학도사(白鶴道士)와 산에 터 잡이로 서로 다투다가 약속하기를, 도사는 학을 날려 그 자리로 보내고, 보지선사는 주석 지팡이[錫杖]를 날려보내어 먼저 그 자리에 도착하는 자가 터를 차지하기로 되었는데, 주석 지팡이가 도사의 학보다 먼저 갔다.
♣ 비양발호[飛揚跋扈]날아오르고 밟고 뛴다는 뜻으로, 날랜 새가 날고 큰 물고기가 날뛰는 것처럼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횡행(橫行)함을 비유하는 말.
♣ 비어[緋魚]비어는 조관(朝官)이 입는 붉은색 관복이다.
♣ 비어묵씨[非於墨氏]묵가(墨家)에서는 음악도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것으로서 비생산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였다.
♣ 비연[飛燕]한 나라 성제(成帝)의 후궁인 조비연(趙飛燕). 장안(長安) 사람으로 한 성제의 총애를 입었음. 절세의 미인으로서 몸이 가벼워 바람에 날아갈 듯하였다고 한다.
♣ 비연소자광[斐然小子狂]공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광(狂)하고 간(簡)하지만 문채 있고 아름다운[斐然] 바탕[章]을 이루었다고 한 말에 유래한 것이다.
♣ 비연접료[飛鳶跕潦]한(漢) 나라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정벌할 당시, 한증막 같은 무더운 날씨를 견디다 못해 하늘을 날던 소리개가 물속으로 떨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東觀漢記 馬援》
♣ 비염소사[悲染素絲]흰 실은 검은 빛으로나 붉은 빛으로나 다 물들일 수 있으므로, 이것이 마치 사람의 성품이 착하게도 악하게도 될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묵적(墨翟)이 흰 실을 보고 슬퍼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비영[蜚英]비영등무(蜚英騰茂)의 준말로, 명성과 실제가 훌륭하게 서로 부합되는 것을 말한다. 《漢書 司馬相如傳下》
♣ 비예[睥睨]성 위에 있는 여장(女墻)을 말한다.
♣ 비예중[睥睨]눈을 흘기며 욕심내어 엿본다는 말이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으로 회계(會稽)에 놀러 갔을 때에 항우(項羽)가 어린 나이에 그것을 멀리서 구경하다가, “저것을 빼앗아 내가 할 수 있겠구나.” 하였고, 유방(劉邦)이 진 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에 역부(役夫)로 갔다가 멀리서 진시황을 바라보고는, “대장부가 마땅히 저와 같이 될 것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이 시는 그런 사실을 가리켜 한 말이다. 진시황이 처음 천하를 통일하고는 만세에 무궁토록 전하겠다고 한 말이 있었다.
♣ 비오토[非吾土]왕찬(王粲)의 등루부(登樓賦)에, “강산이 아름다우나, 내 고향이 아니로세.”라는 구절이 있다.
♣ 비오하[非吳下]급작스레 성장된 학식을 칭찬하는 말이다. 오지(吳志) 여몽전 주(呂蒙傳 注)에 “노숙(魯肅)이 여몽(呂蒙)을 만나서 ‘나는 그대가 무략(武略)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학식까지 대단한 것을 보니 이전 오하의 그대가 아니다.’고 하자 여몽이 ‘선비란 서로 헤어진 지 사흘만 되어도 학식이 몰라보게 달라진다.’고 했다.” 하였다. 오하는 소주(蘇州) 일대를 말한다.
♣ 비옥[比屋]비옥은 집집마다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 《漢書 王莽傳》
♣ 비옥가봉[比屋可封]집들마다 모두 작위를 봉할만하다는 뜻으로, 요순 때 사람들이 모두 착하여 집마다 표창할 만한 정도로 모든 백성이 성군에 감화되어 태평한 시대를 구가한다는 의미. 요순시대(堯舜時代), 태평성대(太平聖代)
♣ 비옥가주[比屋可誅]집들마다 모두 죽일만하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들이 벌받을 만한 악인인 정도로 걸주(桀紂)의 백성들이 모두 악덕에 물들었다는 뜻에서 비옥가봉의 상대 의미로 사용됨.
♣ 비옥개가봉[比屋皆可封]요순 시대의 백성들은 성인의 덕화를 많이 입음으로 인하여 집집마다 봉작(封爵)을 받을 만한 인물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王莽傳》
♣ 비옹[悲翁]홍무적을 가리킨다.
♣ 비우[備雨]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창문을 단단히 얽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인간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기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비운극[飛雲屐]육유(陸游)의 화성원시(化成院詩)에 “飛屐到上方 漸覺所見寬"이라 하였음.
♣ 비웅[非熊]비웅은 곰이 아니라는 뜻으로, 주 문왕(周文王)이 사냥을 나가려고 점을 치니 그 점사에 “ ……곰도 아니요 큰곰도 아니며 …… 얻을 것은 패왕(霸王)의 보좌이다.”고 했는데, 과연 위수(渭水) 가에서 여상(呂尙)을 만나 수레에 싣고 돌아왔던 데서 온 말이다. 《十八史略 周紀》
♣ 비웅능협복[非熊能叶卜]예전 주(周)나라의 문왕이 내일 사냥을 가려할 때에 꿈에 이상스러운 짐승을 보고, 이튿날 점을 쳐보니, “곰도 아니요[悲熊], 큰 곰도 아니요, 얻는 것은 큰 현인(賢人)을 얻어 국가가 창성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강태공을 얻어서 그를 스승으로 하여 국가가 창성하였다.
♣ 비웅전[非熊畋]주 문왕이 사냥하려 할 때 점을 치니, “큰 것을 잡으리니 검은 곰도 아니고 누른 곰도 아니니, 하늘이 너의 스승을 보내리라.” 하더니, 위빈(渭濱)에 사냥 나가서 거기서 낚시질하는 강 태공을 만났다.
♣ 비위[費褘]촉한(蜀漢) 사람, 자는 문위(文偉).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위병(魏兵)을 막게 된 때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 내민(來敏)이 바둑을 두자고 청하였다. 이에 두말 없이 대국(對局)하여 게을러지거나 염증을 느끼는 표정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내민이 “잠시 그대의 의지를 시험해 본 것인데 그대는 참으로 무던한 사람이다. 반드시 적을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비육[鄙育]비육(鄙育)은 전국 시대 진(秦)의 역사(力士)인 임비(任鄙)와 주(周)나라 때 위(衛)의 용사(勇士)였던 하육(夏育). 《史記 卷七十一 范睢傳》
♣ 비육개소[髀肉皆消]넓적다리 살이 모두 빠짐.
♣ 비육대주[肥肉大酒]살찐 고기와 맛좋은 술이라는 뜻으로, 호화스러운 요리의 의미.
♣ 비육지탄[髀肉之嘆]넓적다리에 살이 찐 것을 탄식함. 영웅이 공을 세우지 못하고 안일하게 허송세월을 하고 있음을 한탄함. 삼국지(三國志)에 촉(蜀)의 유비(劉備)가 말타고 전쟁에 나간 지 오래되어 넓적다리에 군살만 찐 것을 탄식한 고사가 있다.
♣ 비육후주[肥肉厚酒]맛좋은 고기와 술
♣ 비은[費隱]비(費)는 널리 쓰여지는 것이고 은(隱)은 감추어 숨겨진 것이다. 중용(中庸)에 “군자의 도는 비하면서도 은하다.[君子之道 費而隱]”하였는데, 주자(朱子)는 비는 도의 용(用)이고 은은 도의 체(體)로 해석하였다. 즉, 비는 용(用)이 아주 큰 것이고 은은 체(體)가 아주 작은 것으로, 성인의 도가 두루 미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 비응주구[飛鷹走狗]매를 날리고 개를 달리게 한다는 뜻으로, 사냥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
♣ 비이경래태우래[否已傾來泰又來]비(否)와 태(泰)는 모두 주역(周易)의 괘(卦) 이름인데, 비는 막힘을 의미하고 태는 통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물이 막혀 통하지 아니함이 극도에 달하면 천운(天運)이 순환하여 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 비이부주[比而不周]치우치고 두루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논어에서 공자가 소인배들은 사사로움에 치우치므로 특별한 사람만 친할 뿐 널리 사귀지 못함을 비유한 말.
♣ 비이회태[否而回泰]비와 태(泰)는 모두 주역(周易)의 괘(卦) 이름인데, 비는 막힘을 의미하고 태는 통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물이 막혀 통하지 아니함이 극도에 달하면 천운(天運)이 순환하여 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 비익[比翼]날개를 나란히 하다.
♣ 비익연리[比翼連理]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란 뜻으로, 부부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는 말. 부부가 합쳐서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비익조[比翼鳥]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의 새.《山海經 第六 海外南經》 부부가 합쳐서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목어(比目魚)
♣ 비인부전[非人不傳]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음. 인간 됨됨이가 안 된 사람에게는 학문이나 도道ㆍ전통을 전하지(가르치지) 않음
♣ 비일비재[非一非再]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뜻으로, 한 두 번이 아니라 번번이 그러하다는 의미로 쓰이거나, 한 둘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로 사용됨.
♣ 비입허무장[飛入虛無藏]허무(虛無)는 강물을 가리킨다. 뇌환(雷煥)이 용천검은 장화(張華)에게 보내고 태아검은 자신이 간직했는데, 장화가 죽은 뒤 용천검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뇌환이 죽은 뒤 태아검은 그의 아들이 차고 다녔다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연평진(延平津)을 지날 때 갑자기 칼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는데, 잠시 후에 보니 두 마리의 용이 유유히 강물을 헤엄쳐 사라지더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晉書 卷36》 두보(杜甫)의 시에 “다시 허무 속으로 돌아가더니, 길고 누런 교룡으로 변하였도다.[復歸虛無底 化作長黃虯]”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4 奉同郭給事 湯東靈湫作》
♣ 비장[飛將]한 무제(漢武帝) 때 이광(李廣)의 별칭이다. 이광이 장군이 되어 안문(雁門)으로 나가 흉노(匈奴)와 접전하다 패하여 적에게 사로잡혀 들것에 실려갈 때 거짓으로 죽은 체하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갑자기 들것에서 뛰어, 말을 타고 가는 적을 밀어뜨리고 말을 빼앗아 남쪽으로 수십 리를 달려와 다시 패잔병을 수습하였다 한다. 《史記 卷一百九 李廣傳》
♣ 비장군[飛將軍]비장군은 한(漢) 나라 때의 대장군 이광(李廣)을 가리킴. 이광이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임명되자 흉노족이 그의 용맹을 두려워하여 “한(漢)나라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면서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고사가 있다. 《漢書 李廣傳》
♣ 비장방[費長房]비장방은 후한(後漢) 사람으로 일찍이 시장의 아전이 되었었는데, 시장에서 약 파는 한 늙은이가 병 하나를 가게 앞에 걸어놓았다가 시장이 파하자 그 병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를 따라 산에 들어가 도술(道術)을 배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 늙은이는 그에게 대나무 지팡이와 부적을 주니, 이것으로 온갖 도술을 부려 백귀(百鬼)를 부렸으나 끝내 부적을 잃고 뭇 귀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다. 《後漢書 費長房傳》
♣ 비장사석[飛將射石]비장군은 흉노(匈奴)들이 한 나라 장수 이광(李廣)을 부른 칭호로, 사기(史記) 제109권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 “이광이 우북평(右北平)에 있자 흉노들이 이를 듣고는 ‘한 나라의 비장군’이라고 부르면서 몇 년 동안을 피하면서 감히 우북평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하였다. 영평부(永平府)에서 동쪽으로 6, 7리쯤 되는 곳에 사호석(射虎石)이 있는데, 이광이 북평 태수(北平太守)로 있을 때에 사냥을 나가서 바위를 호랑이로 착각하고 화살을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에 꽂혔다고 한다.
♣ 비장즉답[轡長則踏]고삐가 길면 밟힌다는 뜻으로 나쁜 짓을 계속하면 끝내 들키고 만다는 말.
♣ 비전불행[非錢不行]돈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뇌물을 쓰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는 관기(官紀)의 문란함을 비유한 말.
♣ 비전우막초[匪轉憂莫悄]시경(詩經) 백주(柏舟) 편에, “나의 마음이 돌이 아니니 굴릴 수도 없고 …… 시름이 그지없으니 뭇것들이 미워한다네.” 하였다.
♣ 비점[批點]시나 글을 꼲을 때에 아주 잘 된 곳에 적는 둥근 모양의 점
♣ 비정공휴승위호[鄙鄭功虧乘韋犒]비정은 정 나라를 차지하여 자기의 고을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정 나라 사람의 꾐에 빠진 진 목공은 정 나라를 차지하려고 맹명ㆍ서걸술ㆍ백을병을 시켜 공격하게 하여, 활(滑) 땅에 이르렀는데, 정 나라의 상인(商人) 현고(弦高)가 장사차 주(周) 나라에 가다가 이들을 만나자 4마리의 가죽과 12마리의 소를 바쳐 호군(犒軍)하게 하고는 “우리나라 임금이 주는 것이다.” 하고 거짓말하였다. 이에 진 나라의 세 장수들은 정 나라에서 이미 자기들이 공격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으니 방비가 튼튼할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정 나라 공격을 포기하였다. 《左傳 僖公 三十三年》
♣ 비조[鼻祖]태아가 생길 때 코가 가장 먼저 형상을 이룬다는 것에서, 세상이 주목할 만한 중요한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나, 모든 사물의 시초를 의미함. 시조(始祖), 원조(元祖), 창시자(創始者).
♣ 비조사환[飛詔賜環]옛날에 대부(大夫)가 임금에게 죄를 얻고 국경에서 처분을 기다릴 때에 임금이 환(環)을 주면 그것은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환(環)과 환(還)의 음이 같기 때문이다.
♣ 비조이손[鼻祖耳孫]시조와 후손.
♣ 비조진양궁장[蜚鳥盡良弓藏]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이 저장된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귀하게 쓰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매몰차게 버림받음을 비유하는 말.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 토사구팽(兎死狗烹)
♣ 비주부휼월[飛走不獝狘]백성들의 생활이 풍족해진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봉(鳳)을 가축으로 삼자 새들이 길들여져 날아가지 않고, 기린(麒麟)을 가축으로 삼자 짐승들이 길들여져 달려 도망치지 않았다.” 하였다.
♣ 비지중물[非池中物]연못 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뜻으로, 용이 때를 만나면 물을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듯이 영웅도 때가 되면 세상에 나와 뜻을 편다는 것에서 장차 대성할 인물을 비유함. 삼국지에서 주유(周瑜)가 유비(劉備)을 평가한 말.
♣ 비천[飛泉]곤륜산 남쪽에 있는 해지는 곳.
♣ 비천곡[飛泉谷]곤륜산(崑崙山) 서남쪽에 있다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 비천분통[飛天噴筒]대통[竹筒] 속에 화약을 넣고 특수한 약품으로 떡처럼 빚어 통구(筒口)를 봉한 다음 약선에 불을 붙여 발포시키는 무기이다.
♣ 비천청비[譬天聽卑]고어(古語)에 천고청비(天高聽卑)라는 말이 있음.
♣ 비추구[悲秋句]송옥(松玉)의 구변(九辯)에, “슬프다 가을의 기운됨이여”하였음.
♣ 비추부[悲秋賦]전국 시대의 초(楚) 나라 사람인 송옥(宋玉)이 지은 초사(楚辭) 구변(九辨)을 말한다. 송옥은 굴원(屈原)의 제자로서 그 선생이 쫓겨남을 민망히 여겨 이 글을 지었다.
♣ 비탁양공현[碑托羊公峴]진(晋)나라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에 진수(鎭守)하여 은덕이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연산(峴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지나며 울었다는 비[隋淚碑].
♣ 비태[否泰]모두 주역(周易)의 괘 이름인데, 비괘(否卦)는 건(乾)이 위에 있고 곤(坤)이 아래에 있어 상하(上下)가 통하지 못하므로 비색(否塞)의 뜻이 되며, 태괘(泰卦)는 이와 반대여서 상하가 서로 통하므로 안태(安泰)의 뜻이 된다. 즉, 운명의 좋고 나쁨과 사정의 순탄 역경을 말함.
♣ 비태박복[否泰剝復]비ㆍ태ㆍ박ㆍ복은 모두 역(易)의 괘(卦)이름. 천지비(天地否 ☰☷)와 지천태(地天泰 ☷☰), 산지박(山地剝 ☶☷)과 지뢰복(地雷復 ☷☶)은 서로 반대되면서 서로 순환하는 괘다. 박(剝)괘는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다하는 괘인데, 다시 복(復)괘로 순환된다. 복(復)은 음(陰)이 극성(極盛)한 중에 다시 밑에서 일양(一陽)이 나는 괘인데, 이것은 동지(冬至)에 해당되는 것이다.
♣ 비토[飛兎]비토는 하루에 만 리 길을 토끼처럼 빨리 달려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 비통[飛筒]비천분통(飛天噴筒)의 준말. 대통[竹筒] 속에 화약을 넣고 특수한 약품으로 떡처럼 빚어 통구(筒口)를 봉한 다음 약선에 불을 붙여 발포시키는 무기이다.
♣ 비통[郫筒]술통 이름. 또는 술 이름. 비현(郫縣)에 큰 대나무가 많아서 그것을 잘라 술통을 만들었으므로 이를 비통 또는 비통주(郫筒酒)라 한다.
♣ 비파시[琵琶翅]귀뚜라미는 날개로 우는데 그 소리가 비파처럼 아름다움을 말한다.
♣ 비파행[琵琶行]당나라 백낙천(白樂天)이 심양(潯陽; 湓浦)에 귀양가 있을 때에 밤에 강 위에서 비파소리를 들었는데, 비파 타는 그 여인은 장안(長安)의 기생으로 상인(商人)에게 시집와서, 남편이 장사하러 간 사이에 비파로 시름을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백낙천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비파행(琵琶行)이다.
♣ 비폭면금[飛瀑眠琴]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졸졸거리는 돌샘물 소리가 거문고 소리 같아라. 졸음 속에 가만히 들으니 티끌 마음이 씻기네.” 하였다.
♣ 비풍[匪風]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 비풍(匪風)장을 말함. 이 시는 망국(亡國)의 한을 읊은 시로, 회가 작은 나라로 정사가 문란하여 주실(周室)의 도(道)를 그리워한 소국(小國)이 대국을 향모(嚮慕)한 시(詩)이다. 그 첫 구는 다음과 같다. “匪風發兮 匪車偈兮 顧瞻周道 中心怛兮”
♣ 비풍참우[悲風慘雨]인생이나 생활이 비참함을 이르는 말.
♣ 비필충천[飛必沖天]날면 반드시 하늘을 꿰뚫듯 높이 난다는 뜻으로, 한 번 일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큰 일을 해냄을 비유하는 말.
♣ 비하정사[鼻下政事]코밑의 정치라는 뜻으로, 코 앞에 닥친 일만 그때그때 처리하는 임시미봉(臨時彌縫)의 정치나, 겨우 먹고 살아가는 상황을 의미함.
♣ 비해[裨海]구주(九州) 즉 중국 밖의 작은 바다이다.
♣ 비해[裨海]구주(九州)를 에워싸고 있다는 자그마한 바다로 소위 현해탄(玄海灘)을 가리킨다. 《史記 孟軻傳》
♣ 비해요[飛海鰩]요(鰩)는 날치라는 바다물고기로서 일명 비어(飛魚)라고도 한다.
♣ 비현령 이현령[鼻懸令 耳懸令]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음
♣ 비호[費壺]비장방(費長房)이 호공(壺公)이란 사람을 만나 따라가 보니, 시장 거리에서 약을 파는데, 두 가지 값을 부르지 않고 병이 모두 나았으며, 지붕에 항아리를 달아 놓고 해가 지면 그 속으로 들어가므로, 따라 들어가 보니 하나의 별천지였다. 그는 지팡이를 하나 얻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 지팡이를 짚으면 가고자 하는 곳에 저절로 갈 수 있었으나, 나중에 이 지팡이는 용이 되어서 가 버렸다고 한다.
♣ 비호[非虎]주 문왕(周文王)이 사냥을 나가려 할 새 점을 치니 점괘에, “장차 큰 것을 잡으리니 범두 아니요 곰도 아니요, 패왕(覇王)을 보좌할 사람이다.” 하더니, 과연 여망(呂望; 강태공)을 만났다.
♣ 비홍[飛鴻]남원(南原)의 속원(屬院)이다.
♣ 비홍[飛鴻]열을 지어 날으는 기러기가 군대의 행렬과 같다 하여 거기(車騎)가 출동할 때는 반드시 비홍기(飛鴻旗)를 내거는 데서 온 말이다.
♣ 비황녹이[飛黃騄耳]모두 준마(駿馬)의 이름이다.
♣ 비황소전섬[飛黃笑殿蟾]실력이 서로 격차가 있음. 처음 출발은 똑같았으나 노력하고 않고에 따라 용마와 두꺼비 같은 차이가 나는 것.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나이 서른 뼈대가 굵어지면, 하나는 용 하나는 돼지가 되고, 쏜살처럼 달리는 용마로서는, 두꺼비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는단다.[三十骨骼成 乃一龍一猪 飛黃騰踏去 不能顧蟾蜍]⋯⋯"라 하였음.
♣ 비회풍[悲回風]가을의 회오리 바람이 향초를 말려 죽이는 것을 슬퍼한다는 뜻.
♣ 비후[費侯]공자(孔子) 제자 민자건(閔子騫)을 가리킴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계씨(季氏)가 민자건에게 사신을 보내어 비재(費宰)를 삼으려 했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비휴[貔貅]맹수(猛獸)의 이름. 범과 곰을 닮았는데, 고대에는 이것을 길들여 전쟁에 썼다 한다. 전하여 용맹한 군대의 뜻으로 쓰인다.
♣ 비흥[比興]시경(詩經)의 육의(六義) 가운데 비(比)ㆍ흥(興)을 말한 것임. 즉 시의 성격을 나타낸 것인데, 이를테면 비는 저 물건을 이 물건에 비유하는 것이고, 흥은 먼저 다른 물건을 말하여 읊고자 한 말을 끌어 일으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 읊는 것을 뜻한다.
♣ 빈개[賓介]손님 중 제일 윗자리에 모실 분을 빈(賓), 그 다음을 개(介), 기타를 중빈(衆賓)이라 한다. 옛날에는 연회의 모임에서 빈이 그 좌석의 법도를 주관하고, 개가 빈을 보좌하여 직접 실행하였다.
♣ 빈경대도장[貧傾大道漿]대도는 곧 불도(佛道)를 말한다. 즉 불도를 탐내어 신봉하기 때문에 주장(酒漿)처럼 들이마셨느냐고 조롱하는 말이다.
♣ 빈계신[牝鷄晨]서경(書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이 망할 징조다.’ 하였다.
♣ 빈계신명[牝鷄晨鳴]암탉이 새벽에 운다는 뜻으로, 집안에서 여자가 세력을 부리면 집안이 망한다. 빈계지신(牝鷄之晨)
♣ 빈계지신[牝鷄之晨]암탉이 새벽을 알린다는 뜻. 여자가 남편을 업신여겨 집안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함.
♣ 빈과[贇科]과거의 일종. 거자(擧子)에게 문ㆍ무과의 과목(科目)을 아울러 시험보여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선출하는 제도였으나 시행되지 않은 듯함.
♣ 빈교[貧交]서로 빈천(貧賤)했을 때에 사귄 친구를 말한다.
♣ 빈교[邠郊]조선(朝鮮) 창업의 터전이라는 말이다. 주(周) 나라 창업의 시조(始祖)인 태왕(太王)이 빈(邠) 땅에서 살았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 빈만삼천[牝滿三千]시경(詩經) 정지방중(定之方中)에 “사람의 마음가짐 성실할 뿐만이 아닌지라, 우람한 말 삼천 마리 들어찼도다.[匪直也人 秉心塞淵 騋牝三千]”하였다.
♣ 빈명은가소[牝鳴殷家素]은(殷) 나라 주왕(紂王)의 아내인 달기(妲己)가 집정(執政)하여 은 나라가 망했음을 말한 것이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옛사람의 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말아야 하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비색해진다.’ 하였는데, 이제 상왕 수(商王受; 紂)가 오직 부인의 말만 따른다.” 하였다.
♣ 빈번[蘋蘩]빈(蘋)은 개구리밥이고 번(蘩)은 흰 쑥인데 모두 식용(食用)의 채소로서, 전하여 변변치 못한 제수(祭羞)의 뜻으로 쓰인다. 좌전(左傳) 은공 삼년(隱公 三年)에 “신의가 없으면 볼모를 잡아도 아무 이익이 없는 것이니, 예의를 지킨다면 볼모가 없은들 누가 이간하랴. 진실로 신의만 있다면 빈번온조(蘋蘩薀藻)의 채소와 행료(行潦)의 물도 귀신에게 올리고 왕공(王公)에게 공궤할 수 있다.” 하였다.
♣ 빈복[頻復]자주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끊임없이 개과천선하려 노력하고 또 같은 실수를 저질러 다시 후회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 육삼효(六三爻)에 “자주 되돌아오니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으리라.[頻復 厲 无咎]”하였다.
♣ 빈비병[貧非病]공자의 제자 원헌(原憲)이 위(衛) 나라의 초택(草澤) 사이에 몹시 곤궁하게 지낼 적에 마침 위 나라의 재상이 된 자공(子貢)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곤궁함을 애처롭게 여겨 말하기를 “부자(夫子)는 어찌 그리도 병(病)되이 지내십니까?”하니, 원헌이 대답하기를 “나는 들으니, 재물이 없는 사람을 가난하다 하고, 도를 배우고도 행하지 못한 사람을 병(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난한 것이요, 병이 아니라오.”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六十七》
♣ 빈빈[彬彬]글의 내용과 수식이 서로 알맞게 갖추어져 있는 모양
♣ 빈상[儐相]빈객들을 유도하는 등 주인을 도와 일을 거드는 사람을 말한다.
♣ 빈시병[貧是病]공자의 제자 원헌(原憲)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는 자공(子貢)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병든 생활을 하고 있느냐.[先生何病]”고 묻자, 원헌이 “재산이 없는 것을 빈(貧)이라 하고, 배우고서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病)이라고 하니, 나는 빈(貧)할 뿐 병(病)이 든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하여 자공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莊子 讓王》
♣ 빈신[嚬呻]빈신은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하는 것을 이르는데, 한유(韓愈)의 허국공신도비문(許國公神道碑文)에 “ …… 공은 그 사이에서 임금을 위하여 간소배들을 책망하고 그 찡그리고 신음하는 것을 살피었다.[公居其間 爲帝督姦 察其嚬呻]”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十二》
♣ 빈실[牝室]노자(老子)에 도(道)를 현빈(玄牝)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생산(生産)하는 암컷이란 뜻이다.
♣ 빈아[豳雅]빈아는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이르는데, 주례(周禮) 춘관(春官) 약장(籥章)에 의하면 “무릇 나라에서 신농씨(神農氏)에게 풍년을 기원할 적에는 빈아를 피리로 연주한다.” 하였다.
♣ 빈아[豳雅]시경(詩經)의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을 가리킴. 주(周) 나라의 선조 공유(公劉)가 빈(豳)에 살았는데,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할 때 공유의 풍화(風化)를 기록해서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였다.
♣ 빈양[賓暘]빈양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희중(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가 뜨는 양곡(暘谷)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寅賓出日]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 빈양[頻陽]빈양은 진(秦) 나라 장수 왕전(王翦)이 병을 이유로 물러나와 은퇴한 고을 이름이다. 《讀史方輿紀要 陜西 西安府 富平縣》
♣ 빈여사[鬢如絲]귀밑머리털이 실처럼 희게 변하다.
♣ 빈연배황궁[賓筵拜貺弓]임금이 유공(有功)한 제후(諸侯)에게 활을 준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 동궁(彤弓)에 “붉은 활을 갈무리해 놓았노니, 내 아름다운 손님이 있어 진심으로 준다.[彤弓弨兮 受言藏之 我有嘉賓 中心貺之]" 하였다.
♣ 빈왕[賓王]주역(周易) 관괘(觀卦)에, “나라에 관광(觀光)하여 왕에게 손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후세에는 이것을 과거 보는 선비에게 인용했다.
♣ 빈읍후량[豳邑餱糧]유랑 생활을 면치 못함. 후직(后稷)의 증손인 공유(公劉)가 하(夏)나라로부터 박해를 받고 빈(豳)을 찾아 떠날 때 마른 쌀[餱糧]을 전대ㆍ주머니 등에다 담아 가지고 길을 떠났는데, 그것이 뒤에 주실(周室)이 일어나게 된 발판이 되었음. 《詩經 大雅 公劉》
♣ 빈이낙도[貧而樂道]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긴다는 뜻으로, 몸은 곤궁하더라도 도를 닦아 즐기는 진정한 삶을 의미함. 빈이낙도 부이호례(貧而樂道 富而好禮)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함. 《論語》
♣ 빈이무원[貧而無怨]가난하나 원망하지 않음.
♣ 빈일[賓日]빈일은 돋는 해를 공경히 맞는 것으로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자세히 보인다.
♣ 빈자소인[貧者小人]가난한 자가 소인이 된다는 뜻으로, 가난하면 굽히는 일이 많아 굳은 지조나 절개가 없으면 소인이 되기 쉽다는 의미.
♣ 빈자일등[貧者一燈]가난하더라도 정성을 다해 부처님에게 바친 등불 하나가 부귀한 사람들이 바친 만개의 등불보다 공덕이 크다는 뜻의 고사성어.
♣ 빈자일등[貧者一燈]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하나라는 말로 부귀한 사람들의 호화로운 등불보다 성의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 정성의 소중함을 뜻한다.
♣ 빈종참담옹수의[賓從驂驔擁繡衣]복마(服馬)도 아닌 하찮은 곁말이 수놓은 옷을 입었다는 뜻으로, 즉 재능 없는 사람이 분수 밖의 은총을 입었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의사(義士) 노중련(魯仲連)이 맹상군(孟嘗君)에게 말하기를 “군(君)의 마구간에는 수놓은 옷을 입고 숙속(菽粟)을 먹지 않는 말이 없는데, 이들이 어찌 다 준마(駿馬)이겠는가.” 하였다. 《戰國策 齊策》
♣ 빈주[邠州]빈(邠)은 빈(豳)과 통하는데, 지금 섬서성(陝西省) 순읍현(栒邑縣)에 있는 곳으로 고대 주(周) 나라 선조 공류(公劉)가 빈국(豳國)을 세워 주 나라의 발상지가 되었다.
♣ 빈지여귀[賓至如歸]손님이 와서 마치 돌아온 것처럼 한다는 뜻으로, 손으로 온 것이 제 집에 돌아온 것처럼 조금의 불편도 없는 자연스럽고 편안하다는 의미.
♣ 빈척호[頻陟岵]행역(行役) 나간 효자(孝子)가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그리워함을 이름. 시경(詩經) 위풍(魏風) 척호(陟岵)에 “저 민둥산에 올라서 아버지를 바라보도다[陟彼岵兮 瞻望父兮]” 한 데서 온 말이다.
♣ 빈천불능이[貧賤不能移]빈천도 옮기게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대장부(大丈夫)는 빈천한 처지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바른 뜻으로 굽히거나 어기지 않는다는 의미. 빈천불능이 위무불능굴 차지위대장부(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빈천도 옮기게 할 수 없고, 위엄과 무력도 굽히게 할 수 없는 것을 대장부라고 말한다. 《孟子》
♣ 빈천지교[貧賤之交]가난하고 천할 때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빈천했을 때 사귀던 친구는 부귀해져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후한서(後漢書)에 “빈천지교는 잊지 말아야 하고 조강을 함께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는 말이 있다.
♣ 빈천친척리[貧賤親戚離]빈천하면 친척마저 떨어진다는 뜻으로, 인정이 야박함을 비유함
♣ 빈파[頻婆]과일 이름인데, 빈파(蘋婆)라고도 쓴다.
♣ 빈파[頻婆]벚나무의 별칭이다.
♣ 빈풍[豳風]시경(詩經) 국풍(國風)의 하나인데, 빈풍의 칠월편(七月篇)은 특히 주공(周公)이 옛날 주(周) 나라의 선조인 후직(后稷)과 공류(公劉)가 빈(豳) 땅에서 친히 농사에 힘써 백성들을 잘 살게 하였던 사실을 노래하여 성왕(成王)을 경계시킨 글이다.
♣ 빈풍시[豳風詩]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가리키는데, 농가의 연중 행사를 시로 읊었다.
♣ 빈풍화[豳風畫]송(宋) 나라 조맹부(趙孟頫)가 시경(詩經)의 빈풍 칠월(豳風七月), 즉 농사짓는 일을 내용으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 빈희[賓戲]문장(文章)의 이름. 후한(後漢) 때 반고(班固)가 지은 답빈희(答賓戲)의 준말로 손의 조롱에 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文選 卷四十五》
♣ 빙견기서[憑犬寄書]진(晉) 나라의 육기(陸機)가 서울에 와 있을 적에 집 소식이 오랫동안 끊기었다. 이에 웃으면서 개에게 “네가 편지를 가지고 가서 소식을 알아가지고 올 수 있겠느냐?" 하자, 개가 꼬리를 치면서 응답하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이리하여 편지를 써서 대통에 넣어 개의 목에 매달아 주었더니, 개가 마침내 그의 집에 이르러 답장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五十四》
♣ 빙공영사[憑公營私]공사(公事)를 이용하여 사리(私利)를 꾀함. 관청이나 공적인 일을 빙자해 개인의 이익을 꾀함.
♣ 빙군[聘君]장인(丈人).
♣ 빙금[凭衾]이불을 덮다.
♣ 빙기설장[氷肌雪腸]얼음 같이 맑은 피부와 눈 같이 깨끗한 장이라는 뜻으로, 몸도 마음도 결백함을 의미함.
♣ 빙로[聘魯]춘추(春秋) 때에,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노(魯) 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주(周)의 음악[樂]을 보기를 청하였다.
♣ 빙로회거강동[憑鱸膾去江東]진(晉)의 장한(張翰)은 강동(江東) 지방인 오군(吳郡) 사람으로 다사마(大司馬)인 제왕 경(齊王冏)의 동조연(東曹掾)이 되었었는데, 가을바람이 일자 갑자기 자기 고향의 명물인 순채국[蓴羹]과 농어회가 생각나므로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晉書 張翰傳》
♣ 빙륜[氷輪]달의 이칭. 소식(蘇軾)의 시에 “설봉의 이지러진 곳에 빙륜이 오른다.[雪峯缺處上氷輪]" 하였다.
♣ 빙망[騁望]사방을 바라보다.
♣ 빙물발언[憑物發言]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8년에 “진(晉) 나라 위유(魏楡)에 있는 돌이 말을 하였는데 진후(晉侯)가 사광(師曠)에게 ‘돌이 무슨 까닭에 말을 하는가?’ 하니, 사광이 ‘돌은 말을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신이 돌을 의지하여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이 잘못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에 맞지 않는 일을 하여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되면 말 못하는 물건이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한 데서 인용한 것임.
♣ 빙벽[氷檗]얼음물을 마시고 황벽(黃檗)을 먹는다[飮氷食檗]는 뜻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삼 년 세월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얼음물을 마시고 황벽을 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
♣ 빙빙[淜淜]물 소리
♣ 빙빙[憑憑]성한 모양
♣ 빙사[聘士]학행(學行)이 있어 조정에서 부른 선비, 징사(徵士).
♣ 빙산[氷山]빙산은 얼음 산으로, 아무리 크고 단단하더라도 태양을 만나면 금방 녹아버린다 하여 한때 혁혁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는 권세. 아부파들이 의지해 있는 권세 있는 자를 비유한 것임. 《開元天寶遺事 依氷山》
♣ 빙산요[氷山謠]권세의 덧없음을 노래한 것으로, 빙산(氷山)은 즉 당(唐) 나라 때의 양국충(楊國忠)을 가리킨 말이다
♣ 빙산일각[氷山一角]빙산(氷山) 중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아주 조그만 부분. 아주 많은 것 중의 조그마한 부분.
♣ 빙생어수한우수[氷生於水寒于水]후생(後生)과 제자가 전인(前人)이나 스승보다 나은 것을 말하는데, “얼음이 물에서 나되 물보다 차고, 퍼렁이 쪽[藍]에서 나되 쪽보다 푸르다[氷生於水寒于水 靑出於藍靑於藍].” 《荀子 勸學》
♣ 빙설용[氷雪容]신선(神仙)을 이름. “막고야산(藐姑射山)에는 신인(神人)이 사는데, 피부가 마치 빙설처럼 하얗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 빙소무산[氷消霧散]얼음이 녹고 안개가 흩어짐.
♣ 빙소와해[氷消瓦解]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어진다는 뜻으로, 아주 자취도 없이 소멸한다는 의미.
♣ 빙수[氷叟]빈한(貧寒)한 늙은이. 소식(蘇軾)의 시(詩)에 “어떻게 빙수로 벼슬할 수 있으리[曷從氷叟來游宦]" 하였다.
♣ 빙식하동번[憑軾下東藩]전국 시대에 역이기(酈食其)가 편안하게 수레를 타고 유세하면서 제 나라의 70여 성을 항복받았던 고사인데,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음. 《漢書 食其傳》
♣ 빙애[砯厓]물이 암석에 부딪혀 흐르는 절벽을 말함.
♣ 빙자[氷子]우박의 이칭(異稱)이다.
♣ 빙자옥질[氷姿玉質]얼음같이 투명한 모습과 옥과 같이 뛰어난 바탕. 용모와 재주가 모두 뛰어남을 비유하는 말이다. ☞ 선자옥질(仙姿玉質)
♣ 빙자옥질[氷姿玉質]얼음처럼 맑디맑은 모습에 옥같은 바탕. 매화를 상징하는 말
♣ 빙주[冰柱]당(唐) 나라 때 한유(韓愈)의 친구 유차(劉叉)가 한유를 처음 찾아가서 지었다는 시(詩)의 이름인데, 노동(盧仝)ㆍ맹교(孟郊)의 시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 빙지목가천풍렬[氷枝木稼天風烈]제철이 아닌 때에 일어난 기상이변으로 대신이나 현인이 죽을 징조라는 뜻이다. 당 나라 영왕(寧王) 이헌(李憲)과 송 나라 명재상 한기(韓琦)가 죽을 임시에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한다. 《石林詩話 韓琦挽詞》
♣ 빙진석[憑秦石]진시황(秦始皇)이 놓았다고 하는 석교(石橋)를 말한다. 진시황(秦始皇)이 해 돋는 곳을 보고자 하여 돌다리를 놓으려고 하였는데, 해신(海神)이 나타나서 다리 기둥을 세워 주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이를 고맙게 여겨 만나 보려고 하니, 해신이 말하기를, “내 모습이 추하니 내 모습을 그리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만나겠다.” 하였다. 이에 진시황(秦始皇)이 들어가 해신과 만났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몰래 해신의 발을 그렸다. 그러자 해신이 성을 내면서 빨리 나가라고 하여 진시황(秦始皇)이 말을 타고 곧장 나왔는데, 말 뒷다리가 석교에서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석교가 무너졌다. 《藝文類聚 卷79》
♣ 빙청[氷淸]빙청은 장인을 말한다. 진서(晉書) 위개전(衛玠傳)에 “개의 장인 악광(樂廣)이 명망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장인은 얼음처럼 맑고 사위는 옥처럼 윤이 난다.’했다.” 하였다.
♣ 빙청옥결[氷淸玉潔]얼음같이 맑고 옥처럼 깨끗하다는 뜻으로, 맑고 깨끗한 덕성(德性)을 비유하는 말.
♣ 빙청옥윤[氷淸玉潤]얼음처럼 맑고 구슬처럼 윤이 난다. 장인과 사위의 인물이 다 같이 뛰어남을 말한다.
♣ 빙탄간[氷炭間]얼음과 숯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의 성질이 정반대여서 도저히 서로 융합될 수 없는 사이라는 뜻의 고사성어.
♣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 군자와 소인이 같이 한 곳에 있지 못함을 상징. 서로 반대되는 것들끼리는 근본적으로 어울릴 수 없음을 뜻한다. ☞ 빙탄불동기(氷炭不同器), 빙탄불상병(氷炭不相竝)
♣ 빙탄불용[氷炭不容]서로 용납할 수 없는 얼음과 숯. 두 사물이 서로 화합할 수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
♣ 빙탄상애[氷炭相愛]얼음과 숯불이 서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얼음과 숯이 서로 본질을 보전한다는 의미에서 친구끼리 서로 훈계해 나감을 비유하기도 함.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
♣ 빙탄지간[氷炭之間]얼음과 숯의 사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 견원지간(犬猿之間)
♣ 빙하용[馮河勇]무모한 용기를 말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다가[暴虎馮河]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자와는 내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빙하폭호[憑河暴虎]용맹만 있고 꾀가 없음.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맨손으로 범을 잡고 하수를 막 건너며[暴虎憑河] 죽어도 후회가 없는 자를 내가 용하다 하지 않노라.” 하였다. 《論語 述而》
♣ 빙함[氷銜]청현(淸顯)한 관직을 말한다.
♣ 빙호[氷壺]물을 담아 놓은 옥병(玉甁)인데 깨끗한 인품을 비유한 것이다.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거촌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또 이어서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