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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우리교회(두날개 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박석훈목사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7)
* 말 씀 : 눅2:50-52, 히5:7-10 *찬양:
* 제 목 : 순종, 시대를 거스리는 주님의 습관
*눅2;51-52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히5;7-10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는 문자 그대로 반항의 문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반항의 모습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학원에서도, 거리에서도, 관공서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반항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일관성 있게 순종의 문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순종은 가장 인기 없는 교훈이고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포기한 구시대의 가치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순종은 우리의 주되신 예수님이 삶으로 몸소 보여 주셨고, 그 제자들이 여전히 붙잡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가치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가는 바보처럼 남의 말만 따라간다고 똑똑한 이웃들에게 ‘왕따’당할 수밖에 없다고 항의할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따’의 참 의미를 아시나요? ‘왕따’는 ‘왕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여론과 상관없이 성경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왕 되신 주님의 순종의 습관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배워야 할 ‘아름다운 순종’은 어떤 것입니까?
1. 순종은 어릴 적부터 익혀야 할 습관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습관들은 어릴 적에 익히지 아니하면, 성인이 되어 익힐 때 훨씬 더 값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온 우리 속담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부당한 반항을 어려서부터 용납하면 그들은 평생을 반항의 자녀로 살아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반면 어려서부터 순종의 자녀로 키우면 평생을 순종의 자녀로 살아갈 것입니다.
*렘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순종의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주님은 나사렛에서 육신의 부모를 향하여 “순종하여 받드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계속하여 순종하고 사셨음’을 시사합니다. 즉 지속적인 순종을 드리셨다는 말입니다. 어쩌다 한번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이 그의 삶의 방식, 곧 삶의 습관이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순종은 자발적인 기쁨의 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52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해(30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의 세례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30세가 되면 전신 세례[침례]로 몸을 깨끗이 하고 제사장직을 시작하듯, 이제 인류를 위한 제사장 곧 메시야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받은 순종의 세례였습니다. 그가 물 속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들의 순종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순종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기쁨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2. 순종은 고난을 통해 학습됩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순종의 습관을 터득하기에 너무 때가 늦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 습관을 고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순종이나 반항이 학습되어진 것이라면, 어렵지만 순종도 다시 학습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 사랑하신다면 그분은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두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가 고난입니다.
*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이 불순종과 반항을 교정하고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반듯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도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엔드류 머레이는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모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여러 유형의 고난을 통해 마침내 순종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거든 원망하지 마십시오. 억지로라도 기뻐하십시오. 더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고, 내가 이 고난 속에서 배워야 할 순종은 무엇인가 묻고 기도하십시오.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더욱 온전한 성도(제자)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3. 순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습관입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순종이 이렇게도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순종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앞두고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셨습니까? 히브리서 5장 7절이 십자가를 앞두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던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 밤 그분의 기도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눅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마침내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 구속의 뜻을 이루시고자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삶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기도를 힘입어 그분의 기도를 따라, 그리고 그분의 기대를 따라 진정 순종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진정 그분의 도우심으로 지난날의 모든 반항의 악습을 버리고 순종의 거룩한 습관을 다시 학습하십시오.
[하나님은 완전함을 원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그분의 순종을 원하신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하여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주신다. -헬렌 켈러]
(말씀 적용과 실천)
1. 나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정, 직장, 교회)에 순종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2.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내가 배우고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평안 내 안에 있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네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8)
* 말 씀 : 마26:26-28, 요11:40-42 *찬양: 409장, 424장
* 제 목 : 감사, 은혜가 흐르는 통로
*마26;26-28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요11;40-42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어떤 목사님 한 분이 Thank You Therapy(감사치료법)라는 책을 적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감사는 엄청난 치료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감사했다고 합니다.
“비싼 세금고지서를 받으면 든든한 직장과 사업장으로 인해서 감사했어요.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않으면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으로 감사했고요. 세탁물이 많이 쌓여있으면 아직도 입을 옷이 많이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공간을 발견했다면 걸어서 운동할 여유를 주신 것을 감사했고요, 비난할 대통령과 정치가가 있으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교회에서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면 아직도 나의 청각이 정상적이라는 사실에 감사했고요.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이 되면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크리스천의 세 가지 덕으로 가르친 믿음, 소망, 사랑 외 하나를 더 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라인후드 니이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장 건강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늘 감사했고 감사의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감사의 치유법은 인생의 모든 문제와 질병을 치유하는 처방입니다.
1. 예수님처럼 음식 앞에서 감사하십시오.
*마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식사 전에 반드시 기도하십니까?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기도하십니까? 예수님은 최후 만찬의 장에서 식사 전 기도하셨습니다. 감사기도를 하시고 떡과 잔을 나누셨습니다.
이것은 최후 만찬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에 앞서 그분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 주심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감사해야 할 이유는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2003년 통계에 따르면 세계 인구 8억 4천 2백만이 기아 인구라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인구 14%, 그러니까 7-8명 중 한 사람은 하루 한 끼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 중 매년 2천 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현실이라면 한 기 식량을 앞에 놓고 하는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얼마나 절실한 일상의 기도이겠습니까?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식사 전 기도함으로 나의 생존 원천이 그분이신 것을 잊지 말고 고백하십시오. 또한 동시에 나처럼 먹지 못한 이웃들에게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 예수님처럼 축복 앞에서 감사하십시오.
우리말로 성경 번역에서 예수께서 식사 전에 ‘감사하셨다’는 것을 믾은 경우 “축사 하시고”라고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감사’와 ‘축복’이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식량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아셨고, 그래서 식전 ‘감사기도’는 동시에 그 축복이 다시 나누어지기를 소원하신 ‘축복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 기도는 다시 축복을 나누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오병이어 기적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기적의 현장을 보겠습니다.
*마14: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사실 이 상황에서의 감사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무리들의 필요는 엄청났는데[실제 먹은 사람은 약 2만 명] 한 아이가 가져온 점심은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라도 감사할 수 있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 기적의 정체는 바로 ‘감사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처럼 삶의 위기 앞에서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은 언제 감사하셨습니까? 식사 전과 축복을 인지하셨을 때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위기 앞에서 감사하셨습니다. 두 개 본문의 공통점은 다 삶의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 마26장 최후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의 감사
26...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8: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 최대 최후의 위기인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예) 일본 기업 내쇼날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집안의 몰락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포 점원으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온몸으로 살벌한 세상을 배워가며 570개 기업, 13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자리에 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가난', '허약한 몸', '못 배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것들을 불평의 조건으로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가난 때문에 부지런히 일했고, 몸이 약했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아 몸을 아꼈고, 못 배웠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만들어 배우는데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힘들 때에도, 위기 속에서도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2)요11장 예수님의 사랑스런 친구(나사로)가 직면한 위기에서
친구가 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물론 그분은 친구의 죽음이 부활 현장이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슬픈 것이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친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이내 감사로 이어졌습니다.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 죽음의 마당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실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었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도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배후에 존재하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십시오.
오늘은 보이지 않고 이해도 안 되지만 내일 드러나고 이루어질 그 선하신 뜻을 믿고 기다라십시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미래의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지금까지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영적생활에 더욱 진보를 가져다준다.- 윌리엄템플]
(말씀 적용과 실천)
1. 최근에 내가 가장 감사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2.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직접 감사의 마음을 전해 보십시오.
찬양/ 감사 찬양
1.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이 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2.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심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에도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감정 이 맘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에 감사 내일에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반복)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19)
* 말 씀 : 사53:7, 마27:12-14 *찬양: 88장, 93장
* 제 목 : 침묵, 삶을 지키는 큰 울림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27;12-14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수년 전 이정향 감독이 만든 국산 영화 [집으로]를 ‘침묵’이라는 관점에서 성찰한 영화 평론가가 있었습니다. 주인공 상우는 수많은 소음과 말에 둘러싸여 살아가던 도시 아이였습니다. 상우에게 침묵은 무엇보다 낯선 것이었습니다. TV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침묵의 산골에서 온 종일 침묵하는 벙어리 할머니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처음 상우는 산골 생활 초기에 온 종일 오락기가 내는 그 익숙한 전자음으로 위안을 얻고자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 변화 없는 위안거리에서 싫증을 느낀 상우는 로봇 그림엽서를 보며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 침묵을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 애절하고 안타까운 모습은. 어쩌면 온갖 소음의 도구에 휩쓸려 살면서도 위로를 얻지 못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집으로]가 보여주는 놀라운 변화는 이런 어린 상우가 침묵을 배우면서 행복한 아이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현대인들이 침묵의 미학을 배우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침묵의 중요성을 몸으로 가르치고자 하신 분이 예수님이었던 것을 아십니까? 침묵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1. 침묵은 창조적인 지혜를 모색하는 방편입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셨다고 해서 일체의 말을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되도록 말을 아끼셨고, 더 많은 경우에 침묵하셨습니다. 마27장에서 대제사장들에게 고발당하시기에 앞서 26장62절에 보면 데제사장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그 다음 63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침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마침내 침묵을 깨시고 64절에서 대답하셨습니다.
*6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
그분은 결정적인 때에도 대답을 회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때에는 분명히 해야 할 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꼭 필요했던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시성 괴테는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을 기초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막스피카르트는 그의 명저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
위대한 말, 필요한 말, 참으로 깊이 있는 말은 침묵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침묵은 우리에게 창조적인 지혜를 공급합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율법은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침묵 속에 허리를 굽히시고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2. 침묵은 인간적 실수를 예방하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말의 실수가 많습니까?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들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들도 언어의 실수에 관한한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지나치게 말씀을 강조하다가 말에 책임을 못 지는 실수의 굴레에 스스로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지혜의 책 잠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의 초점이 바로 우리의 언어생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잠언 18장은 특히 우리 언어생활에 대한 예리한 경고로 가득 차 있습니다.
7: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 모두 시편 기자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141편 3절입니다.
3: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우리 모두 예수님의 침묵의 습관을 배운다면 인간적인 많은 실수들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침묵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방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특별히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십자가를 지심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침묵으로 수용하신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우리가 구차한 변명과 방어를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강력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침묵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에서 해명하고 있습니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침묵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그 뜻을 수용하는 아멘의 침묵이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대제사장 앞에서도, 빌라도 앞에서도 주님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마27;12-14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오늘 우리에게 이런 침묵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 시끄러운 소음의 시대에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몸짓은 바로 침묵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만 떠들고 침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앞에서 잠잠히 침묵하며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구차한 변명도, 화풀이도, 고발도, 원망도 그만하고 그분의 임재,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며 잠잠히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잠잠하면 그분이 친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침묵을 연습할 때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혀를 묶어 두어야 할 최선의 시간은 당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한다고 느낄 때이다.- 주쉬빌링스]
(말씀 적용과 실천)
1. 최근에 침묵의 사간을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2.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어 주님과 함께 하는 조요한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20)
* 말 씀 : 마11:28-30, 막6:30-32 *찬양: 43장, 57장
* 제 목 : 안식, 새로운 창조를 위한 멈춤
*마11:28-30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막6:30-32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세상 모든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은 일 곱 째날 안식하셨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장면은 창2:3절에 안식입니다.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생의 쉼을 아시기에 안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뛰어 난다 해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낮에 일을 했으면 밤에는 쉬어야 합니다. 생체리듬도 쉼을 통해 다시금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매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안식, 쉼은 또 다른 삶의 에너지라고 봅니다. 휴가 때만이 아니라 일정한 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훨씬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쉼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잠깐, 한적한 곳에서 쉼을 가져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막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미쳐 숨도 고르지 못한 채 헐레벌떡 전도 보고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전도 보고를 중단하시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막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쉼을 취하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쉼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쉼을 추구하면서도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원인이 영적인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쉼을 상실한 원인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영적인 해결 없이는 진정한 쉼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참된 쉼, 안식의 처방은 무엇인가?
1) 다 내게로 오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이 언급하신 수고의 짐은 죄의 짐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수고는 죄의 결과 인류의 삶의 장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첫 사람 아담에게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했고, 하와에게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창3:16)이라고 했습니다.
# 그렇다면 누가 우리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이 수고로운 인생의 짐을 해결하고자 하나님은 메시야(구세주)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바로 우리의 죄와 수고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오늘도 수고의 짐을 지고 안식을 모르는 인생들을 초대합니다. “내게로 오라”
-여기서 우리가 “주게 온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종교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또 다른 짐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적 신앙은 종교에의 예속이 아닌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생의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닌 자유를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요8:32,36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톨스토이의 간증.....55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참 마음의 안식을 누림.[신앙론]
오늘 우리에게 이런 안식, 영혼의 쉼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구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오셔야 합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 내게 와서 배우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 배우라”는 말이 다시 스트레스를 주지 않습니까? 예수님 앞에 왔으면 되었지 다시 배워야만 합니까? 물론 예수님에게 나아온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안식인 구원을 선물로 주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영적 안식은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선물로 받음으로 주어진 마음의 평화요 안식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식이 우리 속에 계속 유지되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안식의 선물이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배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배움을 노동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나의 행복을 위한 즐거운 여가선용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즐겁게 놀이하듯 학습하는 사람들, 주님은 그들에게 마음의 쉼을 누리라는 평생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이런 학습이나 훈련을 힘든 또 하나의 수고로 오해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첨부하신 말씀이 30절입니다.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3. 안식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가장 위험한 차는 브리에크가 고장 난 차입니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면 사고가 납니다. 인생의 쉼표는 인생의 브레이크입니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추어 가며 동시에 더 행복한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영혼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예) ‘잠시 쉼표가 주는 여유’[이현주] -별지 참조
-성경이 약속하는 쉼은 단순한 활동의 중지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입니다.
‘쉼’은 헬라어로 ‘아나포신’입니다. 이는 ‘다음 단계의 행동을 위한 멈춤’이란 뜻입니다.
쉬고 나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안식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최근에 많이 익히는 책 중 [행복한 멈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본래 제목은 ‘행복한 멈춤’이 아닌 ‘능력 있는 멈춤’이라는 책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하루에 단 3분이라도 멈추어 서서 행복한 시간을 하고 그 생각이 이루어진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경이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 휴식을 찾기까지 행복은 결코 없다.- 성 어거스틴]
(말씀 적용과 실천)
1. 나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난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그 중 쉼을 갖는 시간은 언제?
2. 최근에 주님 안에서 푹 쉬어 본적이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잠시 쉼표가 주는 여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아기를 보고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식구들 얼굴을 마주보고도
살짝 웃어 주지 못한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
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바쁘다 는 말만 하고
끊었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도
소리만 들릴 뿐 마음에
감동이 흐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기 위해
한번 더 뒤돌아 보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 좋은생각 중에서>
09.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21)
* 말 씀 : 마11:28-30, 막6:30-32 *찬양: 56장, 424장
* 제 목 : 질서, 형상을 회복하는 길
*눅9;13-17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고전14;39-40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미국에 오랫동안 사시다 국내에 들어와 목회를 시작하던 시기 때 에피소드입니다.
[ 전철에서 앉을 자리를 찾다가 빈자리 두 자리가 보여 다가가 앉으려고 하는데 한 아줌마가 재빠르게 저를 밀치고 제 앞에 앉더니 “오, 주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옆 빈자리에 자기 핸드백을 던지면서 소리치는 말이 “권사님 빨리 와, 여기 앉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제 속에서 나온 말도 “오, 주여!”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 크리스천의 질서의식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예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큰 소리로 예언하고, 또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큰 소리로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예배 집중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결코 예언이나 방언을 금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앞의 39절을 읽어보십시오.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문제의 핵심은 무질서와 무례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질서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우리가 질서를 지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주님의 존재 양식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예배 상황의 무질서를 지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그분의 중요한 존재 양식을 선언합니다.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배의 질서 의식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당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분명하게 나타는 특성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눅9:14
이 기적의 현장에는 남자만 5,00명,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약 2만 명. 이 배고픈 2만 여명의 군중들에게 음식이 주어질 경우 대혼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다시 말하면 50여 명을 한 단위로 질서 정연하게 이 군중을 배열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그분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남은 것들을 열 두 바구니에 거두시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과연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서를 존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방하고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마귀란 말은 헬라어로 ‘디아볼레’ ‘사이에 끼어 들어가 깽판을 친다’는 뜻입니다.
마귀의 이미지는 줄 서 있는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끼어들어가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입니다.
우리말로는 ‘참소자’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다만 본래 질서의 파괴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질서를 깨뜨릴 때 우리는 마귀를 따르는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예배의 질서를 지키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예배를 아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습관의 주인이신 주님의 제자라면 질서를 추구하고 질서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습관의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질서를 배려하며 창조하셨습니다.(창1장)
첫째 날-빛..............................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을
둘째 날-하늘과 바다 ...............다섯째 날- 새와 물고기
셋째 날- 땅 ...........................여섯째 날- 짐승과 사람
하나님은 깊이 생각하시고 질서 있고 조화롭게 코스모스(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창조의 과정이 끝나실 때마다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아름답게 살기 원하십니까?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을보면 어떻게 느끼십니까? 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 이 시대는 포스트모던 시대 : 파괴와 해체 / 인터넷 문화-악플, 리피 문화....조롱의 글?
성경은 우리에게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고전14;40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십시오.
3.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의 나눔
왜 질서를 지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것이 이웃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이웃의 유익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왜 질서를 깨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까?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무질서의 밑바닥에는 우리의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고전13:5)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고전15:5)
& 퓰러 신학교 총장이신 리처드 마우가 쓴 [무례한 기독교]
무례는 무질서입니다. 헬라어로 무례는 ‘아스케모네’인데 ‘아’(없음) +‘스케마’(틀,모양)
즉 모양이 없는 매력 없는 삶의 모습을 뜻합니다. 제발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지 맙시다.
-이 반대의 삶이 무엇입니까? 잘 모양이 갖춰진 삶(유스케마)입니디. 앞에서 본 고전14:40절 ‘품위 있는 삶’입니다. *고전14;40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십시오.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크리스천의 향기를 발해 보십시오. 예배의 자리에서도 남을 배려해서 앞자리 부터 앉아 보십시오. 꼭 끝자리에 앉아 남들보고 자기를 넘어가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 대영제국의 예절.....“예절을 지키십시오”.........“하나님의 아들답고 딸답게 사십시오”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를 통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조화로워지는 일에 앞장서십시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으로서 거룩한 습관의 인생을 사는 모습입니다
[질서는 하늘의 으뜸가는 법률이다 - 알렉산더 포프]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말씀 적용과 실천)
1. 나도 모르게 쉽게 범하는 무질서한 모습은 무엇인가?
2. 내 안에 잘못된 무질서, 무례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찬양/ 1.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에 팔로 덮으소서
폭풍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2. 주님 안에 나 거하리 주 능력 나 잠잠히 믿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