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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서양화가, 문화관광해설사 김성실
장릉(莊陵)의 유래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 1441~1459)의 능이다.
단종의 이름은 홍위(弘暐)이며,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외아들로 세종 23년(1441) 7월 23일에 탄생하였다. 세종 30년(1448)에 왕세손(王世孫), 그리고 1452년 7월 20일 왕세자(王世子)에 책봉(冊封)되었다. 그 후 부왕인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1452년 5월 1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단종 원년인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국권을 장악하고 단종을 위협하자 단종 3년(1455)에 경회루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어보를 건네고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났다.
세조 2년 사육신(死六臣-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이 상왕복위운동(丙子獄事)의 실패로 참형을 당하고,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다음 해 6월 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었고, 다음날 영월(寧越) 청녕포(淸泠浦)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던 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셨다.
세조 3년(1457) 7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여섯째 삼촌 금성대군 유(瑜)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노산군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그해 10월 24일 사약(賜藥)이 내려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昇遐)하였다.
단종의 옥체가 동강에 떠내려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영월호장 엄흥도(寧越戶長 嚴興道)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위선피화오소감심(爲善被禍吾所甘心)]”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 이곳에 밀장(密葬)하였다.
중종11년(1516)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왕명(王命)에 폐허가 된 단종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었고, 중종 36년(1541)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寧越郡守 朴忠元)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고 수축봉제(修築奉祭)하였다. 1581년(선조 14)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1681년(숙종 7년)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숙종 24년(1698)에 추복(追復)하여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지 241년 만에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되었다.
능산의 석물은 추복릉의 전례에 따라 후릉(厚陵)의 예를 본받아 행하라는 교지에 의하여 봉분 주위에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각각 1쌍씩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능 양쪽에는 망주석(望柱石) 2기와 문인석(文人石) 2기, 석마(石馬) 1쌍이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없다.(실록의 근거)
다른 왕과는 달리 단종대왕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의 위판을 배향한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충신단(忠臣壇),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장판옥(藏版屋)-1791년(正祖 15) 건립하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능에 당도하기 100m 전쯤 오른쪽에 1999년 4월 9일 남양주문화원(南陽洲文化院)이 사릉(思陵, 定順王后)에서 옮겨 심은 정령송(精靈松)이 잘 자라고 있다.
⇨정자각(丁字閣)-1699년(숙종 25) 건립. 端宗大王 祭享 時 제물을 올리는 곳. 집의 모양이 정(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祭殿)으로 정자각(丁字閣)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 한다.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영조 2년(1726)에 엄흥도의 충절(忠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세웠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10.24. 조정에서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 충의공(忠毅公) 시호를 받았다.
⇨박충원 낙촌비각(朴忠元 駱村碑閣)-박충원은 중종 26년(1531) 문과에 급제하여 문경공(文景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중종 11년(1516)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하여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되었던 묘를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現夢)에 의해 봉축(封築)하고 전물(奠物)을 갖추고 제물을 지어 치제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단종의 숙부(叔父)로 왕권 탈취를 나서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권람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1453년 10월 10일 김종서 황보인 그리고 동생인 안평대군 등 단종 측근 세력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순왕후책봉(定順王后冊封)-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인 1454(단종 2년)1월에 15세인 송현수(宋玹壽)의 따님과 혼례를 올렸다. 이때 성삼문은 예법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였으나 왕실내부를 장악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死六臣 端宗復位運動-1456년(세조 2) 6월 1일 상왕(단종)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려 하였다. 이를 기회로 박팽년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세조를 처단하고 상왕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김질(金礩)의 밀고로 실패하고 극형을 받았다.
-김질(金礩)-조선 전기의 문신(1422~1478).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동지를 배반하고 그 사실을 임금께 고함으로써 사육신 사건을 일으켰다. 그 뒤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단종유배(端宗流配)-사육신 등의 단종복위운동과 함께 명나라에서는 현 황제가 폐위되고 상황(上皇) 영종(英宗)이 복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세조는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이 단종복위를 도모했다고 꾸며 1457년(세조 3) 6월 21일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는 한편 문종비 현덕왕후(文宗妃 顯德王后)를 서인(庶人)으로 삼고 그 능인 소릉(昭陵)을 파해쳐 관곽을 안산(安山) 바닷가에 내다 버렸다.
⇨錦城大君 端宗復位運動-경상도 순응에 유배가 있던 금성대군은 1457(세조 3) 7월 순응부사 이보흠과 함께 영월에 있는 노산군(단종)을 복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지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고 전해지니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
신병주(건국대학교 교수)
단종(1441~1457 16세,재위 1452~1455년)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년)송씨는 남편을 어린 나이에 잃고 힘든 삶을 살아간 불운한 왕비로 기억되고 있다. 할아버지가 최고의 성군인 세종, 아버지가 적장자 출신 최초의 왕인 문종이라는 프리미엄 속에 태어난 단종. 그리고 단종과 혼인하면서 왕비의 지위에 올랐지만 정작 왕비 생활은 짧았던 정순왕후. 단종을 잃은 그녀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정작 왕비의 자리에 서 물러난 이후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정순황후는 1440년 여산송씨 송현수(宋玹壽)와 여흥민씨(어머니)의 딸로 전라도 태인(현 칠보)에서 태어났다. 단종은 1452년 문종의 승하 후 12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아직 혼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왕의 삼년사우기간에는 관례적으로 혼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종은 왕위에 올랐어도 왕비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453년 10월10일 수양대군(문종의 동생)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계유정난은 단종의 인생과 정치적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영의정 등의 직책을 차지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이 됐지만 여전히 단종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단종의 혼례를 적극 권유하면서 왕비를 들이도록 한 것이다. 훗날 조카와 왕위를 찬탈하는 야심찬 인물의 행동이라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것은 수양대군이 1452년 단종의 즉위를 알리는 사은사(謝恩使)를 직접 자청한 것에 서도 보인다. 단종이라는 왕을 적극 지원하는 삼촌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반대파들의 견제를 느슨하게 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정인지 등 여러 종친들과 함께 “지금 신민(臣民)이 복이 없어, 세종·문종께서 모두 승하하시고 전하께서 어리신 몸으로 즉위하시어, 위로는 모후(母后)의 보호하시는 힘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왕비의 조심스러운 도움이 없으시니, 어찌 국사(國事)의 큰 변례가 아니겠습니까? 이때에 있어서 왕비를 맞아들여 후사(後嗣)를 구하셔서 선왕의 혈통을 이으시고 억만세 국기(國基)를 여심이 무엇보다 중하지 않습니까?”라는 논리로 단종의 혼인을 강하게 요청했다. 수양대군의 강한 요청 속에 단종이 맞이한 부인이 바로 정순왕후 송씨였다. 1454년1월8일 창덕궁에서 실시된 처녀간택에는 효령대군·임영대군·영응대군·정인지·한확 등이 참여해, 송현수·권완(權完)·김사우(金師禹)의 딸을 뽑았다. 처녀들의 아비지는 모두 수양대군의 심복으로서 수양대군의 권력이 그만큼 막강했음을 보여준다.
1월 10일 최종 왕비로 간택된 처녀는 송현수의 딸 정순왕후였다. 그녀는 1월 22일 근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월 24일에는 왕비로 맞아들이는 봉영(奉迎)의식이 거행되었다. 1454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의 오례(五禮)중 가례(嘉禮)의식을 보면 왕비를 맞이할 때는 왕의 명령을 받는 사자(使者)를 보내, 왕비를 맞아드리는 봉영의식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왕세자의 혼례 때는 세자가 직접 세자빈을 맞이하는 친영의식을 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성종대에 조선왕실의 주요 의례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국조오례〉에도 왕의 혼례에는 봉영례가 거행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정순왕후는 조선 최초로 왕비간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봉영례에 의한 조선 최초의 왕비인 셈이다. 〈단종실록〉에는 “송씨를 효령대군의 집에서 봉영하였다.(중략) 왕비를 수행하여 대궐로 나아갔다. 동뢰(同牢)를 설치하고 교태전(交泰殿)에서 잔치하였다.”고 단종이 왕의 지위에 있어서 봉영례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왕의 혼례에도 세자빈과 같이 친영례가 적용됐다. 삼간택까지 왕비 후보로 뽑혔던 두 명의 규수는 숙의(淑儀)의 직급을 주고 후궁으로 삼았음이 나타난다. 정순왕후의 왕비 책봉은 적장자 단종이 왕의 신분이었을 때 이뤄졌다는 점에서 세자빈으로 출발하는 대부분의 왕비보다 혼례 때부터 그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이 이미 수양대군에게 넘어갔다는 점에서 왕비가 된 시점부터 정순왕후에게는 커다란 불운이 예고돼 있었다.
1454년 1월 적장자 단종의 비가 됐지만, 왕비로 살아갈 정순왕후의 삶은 극히 짧았다. 불과 1년 5개월 정도 되는 왕비로서의 생활을 마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의 압박을 받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이다. 1455년 윤 6월 11일의 일이었다. 〈단종실록〉에서는 “숙부는 선왕의 아우님으로서 일찍부터 덕망이 높았으며 국가에 큰 훈로(勳勞)가 있어 천명과 인심의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이 무거운 부하(負荷)를 풀어 우리 숙부에게 부탁하여 넘기는 바이다”고 선의가 자의에 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계유정난 이후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예정된 수순에 지나지 않았다.
왕위를 넘긴 단종은 상왕이 되면서, 정순왕후 역시 형식상의 대비인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됐다. 이후 정순왕후의 삶은 단종의 수난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 1456년 6월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상왕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종에 대하는 세조의 경계심은 더욱 커갔다. 1457년 6월 21일 송현수와 권완의 역모 사건까지 일어나자 세조는 드디어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유배를 결정한다.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은 첩첩산중 오지였고, 특히 청령포 지역은 사면이 산으로 막혀 있는 곳이었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단종은 1457년 6월 22일 세조의 전송 속에 창덕궁을 출발했다.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한 곳이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견해가 있다. 단종이 유배된 후에도 순흥(順興)으로 귀양 갔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자, 세조는 결국 1457년 10월 21일 단종의 처형을 명했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기록했지만, 세조에 의한 타살임은 나만갑의 〈병자록〉등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淵)이 세조가 보낸 사약을 전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단종 스스로 활시위를 목에 감고 옆에 심부름하던 사람을 시켜 활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권력에 의해 기획된 죽음이었던 만큼 단종은 시신마저 방치됐다.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수습해 조성한 무덤 자리가 현재의 장릉(莊陵)이다.
단종이 노산군이 되면서 정순왕후 역시 부인으로 강등됐고, 동대문 밖에서 거처하며 불교에 의지한 채 외롭고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밑에 샘물의 흔적이 보인다. 자지동천은 ‘자줏빛 물감이 넘치는 샘물’이란 뜻으로, 흰 옷감을 샘물에 넣으면 자줏빛으로 염색이 됐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옷감을 물들이는 일을 한 곳으로, 왕비에서 일순간 평민으로 전락한 그녀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서려 있다.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정순왕후는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궁궐에서 은퇴한 여인들이 자주 찾은 절인 정업원(淨業院)은 그녀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옛 정업원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에도 영조가 친필로 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이 남아 있으며, 정업원 인근 산봉우리에는 정순왕후가 동쪽인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해 ‘동망봉(東望峯)’으로 불리고 있다. 정순왕후는 18세 때인 1457년 단종과 사별한 후 숱한 시련 속에서도 64년을 더 살았고, 중종 때인 1521년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세종 때 출생한 그녀는 문종부터 중종까지 무려 8명의 왕과 함께 한세상을 보냈던 셈이다. 무덤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아들 정미수(鄭眉壽) 집안 종중(宗中)의 산이 있는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대군 부인의 묘로 조성돼 있다.
정순왕후가 왕비의 위상을 찾은 것은 사후 무려 177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 때였다. 단종이 복권되면서 그녀도 정순왕후로 추복됐고, 무덤 또한 ‘사릉(思陵)’이 됐다. 긴 시간 동안 단종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조선의 왕과 왕비 중 그 무덤이 가장 멀리 떨어진 사례가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이다.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연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기 위해서일까? 1999년 4월 9일에는 사릉의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해, 장릉으로 옮겨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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