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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그린 “파이프를 든 소년”이라는 그림이, 뉴욕의 경매장에서 한화로, 약 1,200억에 팔렸고, 빈센트 반 고흐의 “닥터 가셰”의 초상화는, 약 120억에 팔렸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그림이 있지만, 각 그림의 가격은 천차만별입니다. 그것은,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조각품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의 작품입니까? 부모님의 작품입니까? 본문 밖의 16절을 보시면,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출 4: 22에서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마 5: 48을 보시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했고, 6: 1에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6: 9의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합니다. 이 호칭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갈 3: 26을 보시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은총이 어떤 것입니까? “해리 아이런 사이드” 박사가 “이것이 은총입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인이 남장을 하고 침입했다가 체포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 대한 재판이 열립니다. 그런데, 그 곳에, 여왕이 직접 나와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문을 받던 여인은, 여왕에게 “내가 나쁜 사람에게 속아,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제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왕은 여인의 말을 듣고,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댓가로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조건이 있는 것은 은총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말 한 마디에 생명이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인의 말을 잠잠히 생각하던 여왕은, 아무런 조건없이 여인을 석방시킵니다. 훗날,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자객이었던 여인은, 여왕의 은총을 입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나, 스스로 여왕의 종이 되어, 일평생 그 은총에 보답하면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여왕에게 이처럼, 성실하고, 헌신적인 여종은 없었습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은총” 또는, “은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은총이나 은혜를 말함에 있어서, 어떤 이유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은총이나 은혜는,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이나 저, 우리 모두는 이러한 선물을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그 분은 아무런 조건없이,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이로써,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왕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제 2의 삶을 살았던 여인처럼, 우리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분만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시 116: 12 - 14을 보시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지내오시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바라기는, 우리에게 주신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이사야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회고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한 번 택한 이스라엘에 대해 끝까지 사랑하며, 책임지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려운 곤경 속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이사야가 믿었고, 의지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동일함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7절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고 합니다. 자비와 사랑의 은총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자비”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는,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강제로 유산을 상속받아 타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는, 방탕하게 살다가 모두 탕진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러한 불효자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신을 신지도 않고, 달려가서, 그를 끌어안고, 입 맞추었습니다. 또,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신분을 나타내는 반지도 끼워줬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헤세드”입니다. 또, “사랑”의 히브리어는, “라함”입니다. 이 의미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사랑” 이 단어 속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제시된 이유는, 당시의 상황이, 에돔과의 전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는 형제였습니다. 그러기에,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에돔은 지원군으로 와서, 이스라엘을 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들로 인해 고통과 혼돈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사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이, 본문 앞의 1 - 6절입니다. 1절을 보시면,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고 합니다. 이 “붉은 옷”은 “장군의 군복”입니다. 곧,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전하고 귀국하는 개선장군입니다. 2절을 보시면,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라고 합니다. 장군의 군복이 적군의 피로 물들었다는 것으로, 이 전쟁이 매우 치열했지만, 결국, 모든 적을 섬멸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을 거역했을 때는, 그들이 다시, 돌이켜서, 말씀 안에서의 삶,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시련의 징계를 주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으심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를 훈계한 뒤에는, 사용했던 회초리를 부러뜨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고 갔던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고국으로의 귀환을 이끄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이사야는 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찾아 깊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가, 신앙의 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우리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가 날마다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 27: 1을 보시면,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하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많은 위험과 위기가 우리 곁을 지나갑니다. 이는, 천로역경에서 순례자로 나오는 크리스챤이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한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지자, 자신이 얼만큼 왔는가를 보려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것은, 자신이 밤새도록 걸어온 길은, 한 발짝이라도 실수했다가는 끝도 없이 떨어지는 절벽의 외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밝은 대낮에 보았다면, 결코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들을 보내고도, 지금까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찬송가 301장을 보시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합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가, 오늘, 우리의 감사의 이유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한 주간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은총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라고 합니다. 구원의 은총입니다.
본문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는 말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토록 신실했습니까? 이스라엘이 과연 거짓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바알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강한 신으로 섬겼습니다. 바알을 반대하는 자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던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믿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실함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현재는 죄악 가운데 있지만, 징계 가운데 있지만, 그들이 죄 가운데서 회개하고 돌아옴으로, 하나님의 징계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8: 12을 보시면,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히 1: 5을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라고 합니다. 또, 고후 6: 16을 보시면,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합니다.
무디가 탄광촌을 방문하면서, 전도할 때 였습니다. 이 때, 이 곳의 책임자는 무디가 전하는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인한 구원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와서 전하는, 율법으로 구원 받음과도 같았습니다. 책임자는, “그토록 귀한 구원이 너무 싼 것이 아닙니까?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조금 더 비싸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물었습니다. “오늘 갱에 들어갔습니까?” “들어갔습니다” “얼마나요?” “수백 피트죠”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그야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죠” “갱에 들어가기 위해서 승강기를 사용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까?” “회사에서 설치했으니, 그저 사용만 하면 되죠”라고 답하자, 무디는, “바로 그겁니다. 선생님이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의지하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친히 달리심으로, 자신을 희생하신 희생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심을, 당연하듯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백성”이라는 말과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심을 선포합니다. 신 31: 8절을 보시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총이 오늘날 우리에게 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의 공로, 우리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선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되돌아보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정결합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순간의 믿음이, 우리의 영원한 믿음입니까? 우리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요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순간의 믿음은, 오늘 안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안으로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자격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은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시해하려 했던 여인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슴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구원의 은총이 희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구원의 은총에 대한 확신을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왕을 시해하려 했던 여인이, 자신을 살려줌에 대해, 평생 여왕에게 충성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충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서부터 이스라엘이 겪는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음을 말합니다. 마 1: 23을 보시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동참하신다고 했습니다. 렘 11: 14을 보시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며,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반박하여,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심은 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 49: 15 - 16을 보시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지만 나는 세상을 위해 다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저를 일깨워 주고자, 저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내 힘으로 못 고치는 것을 고칠 수 있도록, 내 힘으로 떠나지 못하는 것을 떠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권고하심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건 속에서,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도록, 내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닫도록 강하게 역사하셨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빗나갈 때는 채찍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채찍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이 속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가 겪는 환난 속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죄로 인한 환난이든, 나의 영적성장을 위한 환난이든, 그 곳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환난을 겪는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때, 그 곳에,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바위를 터서 생수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 곳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임마누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