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신물이 날 때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라. 정치혐오로 인한 구역질이 웃음으로 변할 테니…" <교양>(Bildung)의 작가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충고다.
그렇지만 그 웃음은 쓴웃음일 수밖에 없다. 성공회 신부인 조너선 스위프트 자신도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하려고 쓴 소설’이라고 실토했다. 출판된 책은 곧 금서(禁書)로 지정됐다.
영어단어 Gull은 갈매기 또는 바보라는 뜻이다. Ver는 진리·진실이라는 라틴어 Veritas·Verum의 어원(語源)이니, 걸리버(Gulliver)라는 이름의 의미는 '진실(Ver)을 말하는 바보(Gull)’쯤 될 터이다.
걸리버가 여행한 소인국, 대인국, 공중 섬나라, 말(馬)의 나라는 당시 영국의 정치와 사회상을 야유한 풍자이지만, 그 풍자는 소설 속 가상의 세계를 뛰쳐나와 오늘 우리의 현실을 가리키는 듯하다.
소인국의 관료들은 줄타기 솜씨로 선발되는데, 저들 중에 한국의 어느 약삭빠른 관료․정치인․폴리페서들을 이길 만한 줄타기 선수가 있을까?
축제의 거리에서 150여 명의 풋풋한 젊은이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지 한 달도 더 지났건만, 책임을 절감하고 스스로 물러난 치안 관련 고위공직자가 단 한 명도 없다니… 한 번 잡은 줄을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버티는 줄타기 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굽 높은 구두 파(派)와 굽 낮은 구두 파로 갈라진 소인국의 싸움은 상복(喪服) 입는 기간을 두고 벌어진 조선의 예송(禮訟)논쟁뿐 아니라, 그보다 더 하찮은 일로 피 터지게 싸우는 우리 정치권을 연상시킨다.
누가 해외에서 찍은 사진이 무슨 포르노인지 아닌지, 조명기구를 썼느니 안 썼느니 하는 따위의 하잘것없는 논쟁 말이다.
걸리버가 만난 정의의 여신은 칼과 저울 대신 칼과 황금주머니를 들고 있다. 칼과 황금주머니로 법치의 엄정한 상벌(賞罰)을 나타낸다지만, 넌지시 억압과 뇌물을 암시하기도 한다. 우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칼과 저울이 아니라 법전과 저울을 들고 있다. 오늘의 우리 사법부가 그처럼 법정신과 공평의 이념에 충실한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는 법관이 과연 얼마나 될지…
달걀의 둥근 모서리를 깨는 쪽과 뾰족한 모서리를 깨는 쪽의 다툼 때문에 벌어진 종교전쟁에서는 비행기의 추락으로 대통령이 비명횡사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어느 성직자의 증오 서린 표정이 어른거린다..
공중 섬나라 라퓨타는 수학·음악·천문학 말고는 어떤 실용적 지식도 학문으로 여기지 않는 공허한 망상(妄想)의 나라다.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과 영화 ‘아바타’의 떠다니는 할렐루야 섬이 라퓨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이에서 햇빛을 뽑아내려는 과학자, 인분(人糞)으로 음식재료를 만들려는 연구가, 늘 사색에 잠겨 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학술원 회원을 등장시킨 것은 뉴턴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조롱으로 읽힌다. 지금 한국의 학계, 지성계는 결코 허망한 공리공론에 빠져있지 않으리라...
다만, 소설의 삽화에 동해가 한국해(Sea of Corea)로 표기되어 있어 '3백 년 뒤의 일본을 미리 조롱한 것 아닐까’하는 지레짐작으로 엉뚱한 위안을 얻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손에 전쟁과 강제노역으로 혹사당해온 말들이 다스리는 나라 휴이넘, 거기에는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짐승 야후(Yahoo)의 무리가 살고 있다. 성서의 신(神) 야훼(Yahweh)와 이름이 비슷한 야후에게서 인간의 위선적이고 표리부동한 모습을 발견한 걸리버는 깊은 절망과 수치심에 빠져든다. 세계 최대라는 검색포털의 이름을 야후라고 지은 것은 얼마나 냉소적인 작명인가?
그렇지만 절망도 수치심도 아직 모자라다. 니체라면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야후 같은 마부의 채찍질에 울부짖는 말을 끌어안고 함께 울부짖던 니체는 끝내 정신병원으로 실려간다.
야후들의 공격을 받은 걸리버를 구해준 것은 선량한 말이었다. 그 말의 하인이 된 걸리버는 주인인 말에게 영국의 법치를 이렇게 소개한다.
“변호사는 '어떻게 하면 흰 것을 검게, 검은 것을 희게 보이도록 만드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상대편 변호사에게 두 배의 비용을 쥐여 주면 재판에서 쉽게 이길 수 있다... 법관들은 진실과 정의에 대한 편견으로 재판한다... 법률가란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서는 가장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들이다.”
18세기의 영국만이 아니다. 이 땅의 법조인들, 특히 법조계 출신 정치인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새겨들어야 할 비판이다
스위프트는 정치인들을 서슴없이 강도·깡패·소매치기라고 불렀다. 성직자의 발언치고는 여간 도발적인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비명횡사를 빌고 또 비는 저주의 사제(司祭)는 아니었다.
스위프트가 오늘 이 나라에 와서 강도·깡패·소매치기보다 더 악질적인 정치판의 범죄자들을 만난다면, 어떤 유능한 퇴마사라도 쫓아내지 못할 간교한 악령의 선동꾼들과 맞닥뜨린다면, 또 어떤 도발적인 여행기를 쓰게 될까?
슈바니츠의 충고대로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펼쳐야겠다. 정치에 구역질이 나는 시절이기에.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걸리비 여행기
Houyhnhnms
'Sea of Corea' (Gulliver's tra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