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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국보 200호 `금동보살입상`이 부산시립박물관의 얼굴이 된 까닭은?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94 14.07.29 05: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국보 200호 '금동보살입상'이 부산시립박물관에 있게 된 까닭은?

 

 

'뒷방 늙은이를 위원장에 앉힐 때는 뭔가 노린 게 있었을 것 아닌가.'

'소장하고 있는 물건이 한 점도 없는데 위원장이 됐으니 구입해서라도 한 점은 내놔야 하지 않겠나.'

지난 78년 봄 부산시립박물관이 문을 열기 전 부산시청 2층 회의실에서 가진 시립박물관 자문위원회 회의를 마친 뒤 당시 부산시 기획관리실장이던 김화섭 씨와 문화재과장이던 김부환 씨가

원로기업인 김지태 회장이 찾는다는 말에 불려 올라가 들은 말이다.

당시 부산시립박물관은 유물 한 점 없이 거의 맨주먹으로 개관을 준비하던 때였다.물론 부산시에서 시립박물관을 대표할 유물은 이미 점쳐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그래서 부산시는 시립박물관의 발전을 지원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재력가들을 중심으로 자문위원회를 결성했다.삼화고무와 한국생사를 운영하다 경영일선에서 손을 뗀 김회장을 비롯,성창기업의 정태성 회장,김위상소아과의 김위상 씨 등이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그리고 김회장이 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이들로부터 협조를 얻어 이 유물을 구입하겠다는 것이 부산시의 작전이었다.

그런데 김회장이 먼저 말을 꺼낸 것. 김회장은 대뜸 '좋은 물건이 뭐 없느냐'고 말을 이었다.김과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있긴 있는데 가격이 비싸서…' 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사람아,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도대체 얼마짜린데.'

김과장은 갑자기 일이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 1억원 정도 됩니다' 이말에 김회장의 반쯤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잠시 뒤 김회장은 '나흘만 말미를 주게'라고 말하곤 깊은 생각에 빠졌다.그 나흘동안 김회장은 그 유물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유물에 대한 평가를 부산대 모 교수 등에게 부탁했다.

나흘뒤 김회장은 '내가 장사꾼 아닌가,장사꾼이 달라는대로 주나… 30%만 깎게. 돈은 회사돈이 아니라 내돈으로 준다고 하게' 라며 김과장을 불러 말했다.

결국 그 유물은 7천만원에 흥정이 됐고 김회장은 7천만원짜리 수표 한장을 건네주며 물건을 구입해 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그래서 78년 7월11일 부산시립박물관은 무사히 개관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이 유물이 바로 국보 200호로 지정돼 부산시립박물관의 얼굴이 된 금동보살입상.

부산시가 금동보살입상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71년 동산문화재 등록을 통해서.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일제히 등록하던 과정에서 금동보살입상을 소유하고 있던 오재균 씨도 등록신청을 했다.

전북 고창 출신으로 목포에서 염색공장을 하면서 목포일보사 운영위원,목포상의 회장을 역임 하기도 했던 오씨는 한국전쟁 뒤 부산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벼루와 관련된 책을 출판할 정도로 벼루 감정에 일가견이 있던 오씨는 고려자기와 다른 문화재에도 관심이 많아 젊을때부터 부지런히 문화재를 수집했다.

금동보살입상은 해방전 목포의 일본인 골동품상이 갖고 있던 것을 해외로 빼돌리기 전에 오씨가 입수한 것.

천의 자락이 두 어깨에 걸쳐 발 아래까지 부드럽게 늘어져 있는 금동보살입상은 왼쪽 천의의 일부분이 끊어져 손상된 채 발견됐다.

하지만 지리산 남단의 어느 사찰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할 뿐 구체적인 경위는 알지 못하고 있다.

다만 손상된 불상은 한지로 고이 싸서 오동나무함에 넣고 이를 다시 석함에 넣어 사찰 경내에 묻는 것이 불교계의 관행인데 누군가 사찰에 묻는 것을 보곤 이내 파내 골동품상에게 팔았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뿐이다.

금동보살입상의 가치를 알고 있던 오씨는 부산시를 통해 문화재등록을 하면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해 주기를 원했다.

부산시는 2년에 걸친 오랜 감정을 거쳐 73년 문화재관리국에 지정신청을 했지만 뒤로는 심사보류를 거듭 요청했다.국보로 지정되면 시세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

부산시는 인수를 준비중이니 시에서 유물을 확보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협조요청을 했다.

김회장의 기증으로 유물을 확보한 뒤 부산시는 79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신청을 했고 나흘만에 국보 200호로 지정됐다.그 뒤 30억원을 주고도 못살 물건을 부산시가 거저 주웠다는 말이 골동품상 주변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이런 점에서 금동보살입상이 부산시립박물관에 있게한 또 다른 공헌자는 물론 오씨다.

호암미술관 등 서울에서 유물을 팔라는 교섭이 수차례 있어 외부로 반출될 수도 있었지만 수십년을 그대로 간직했다가 헐값이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김회장에게 팔았던 것.

당시 중앙동에 시가 1억5천만원대의 빌딩을 갖고 있던 서울의 건물주가 이 건물과 불상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오씨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불상이 부산에 남아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인들의 증언이다.

신라금관을 녹여 금으로 팔기도 했던 당시의 열악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에 비한다면 금동보살입상의 소장자였던 오씨와 기증자인 김회장의 아름다운 마음은 더욱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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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조성은 예배의 대상으로 위엄과 자비,당당함,인자함을 잘 나타낸다.뿐만 아니라 불상을 통해 조형기술과 미적 표현은 물론 당시의 문화상까지 알게 해 준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불상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수작은 국보가 39점 보물이 165점에 이른다.

국보로 지정된 불상 가운데 금동으로 만든 불상이 20점으로 가장 많고 석조(마애 석굴 비상(碑像) 포함) 11점,금제 철조 목조 소조(塑造)가 각 2점 씩이다.국보 불상 가운데 입상은 20점이고 나머지는 반가상이며 여래와 보살의 구분은 거의 반반이다.

금동보살입상으로는 국보가 4점 보물이 3점 지정돼 있는데 이 중 부산시립박물관 소장품을 으뜸으로 치는 데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부산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200호 금동보살입상은 시대(8세기) 규모(소형) 출토지(지리산 부근) 등으로 미뤄보아 통일신라 초기 불국사 황룡사 석굴암 대불 등에서 엿볼 수 있는 문화의 중앙집중화에서 해인사 송광사 화엄사 범어사 창건 등 문화의 지방화로 점차 변화해가던 시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금동불 조각의 절정기 양식을 보여주는 가작(佳作)으로 손꼽힌다.

상호(相好:보살의 눈 코 입 등 얼굴전체)표현이 뚜렷하고 자연스럽게 늘어진 천의(天衣), 신체의 굴곡,가슴을 펴고 발을 약간 벌림으로서 당당하고도 안정된 자세 등이 광배와 보관이 없어지고 천의가 일부 탈락되고 도금상태가 다소 퇴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중량감을 주고 있다.움직이는 듯한 손의 모습은 불상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어 조성될 당시의 형상은 비례와 균형이 완벽에 가까웠다고 보인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기의 대중문화 수준과 특성을 알게 하며 이를 제작한 장인의 심미안과 조형예술의 완숙한 경지를 느끼게 하는 등 당시의 문화수준을 짐작케하는 수작이다.

 

*************************************************(박유성/부산시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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