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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를 시작하며
욥기 1:1~3,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오늘부터 금요일 제 설교 시간에 욥기를 강해하고자 합니다. 욥기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인간의 고난에 관한 책입니다. 인생에 찾아온 고난의 의미를 찾으려는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 신앙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욥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깨달음과 위로와 소망을 갖곤 합니다.
그런데 이 욥기는 어려운 책입니다. 욥기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은 욥에게 일어난 삶의 상황에 대한 사실적 진술들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만, 3장부터 시작된 42장 초반까지는 시적인 글, 시어로 된 논쟁이 거듭되기 때문에 그 축약된 문장들을 명백히 납득하지 못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다른 성경에서는 한번도 쓰이지 않는 단어가 100단어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고 낯선 언어들이 많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전체의 고난과 섭리의 신비에 대하여 장엄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욥기를 두고서 영국의 유명한 사학자인 카알라일은 평가하기를 “인류 역사 속에 빛나는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읽기가 힘들고 주제가 무겁지만 우리 인생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신앙의 신비를 더 깨닫고자 하는 신자라면, 이 욥기를 차분히 읽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욥기는 성경의 정경 중에 하나로 옛날부터 모든 학자들이 인정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욥기를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욥기에 이 성경은 누가 썼는가에 대한 명백한 진술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학설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이 그 말년에 썼을 것이라고 보는 학설, 혹은 모세가 썼을 것이라는 학설이 전통적입니다. 최근 학자들은 이 욥기를 이야기와 말로 내려오던 것을 후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편집하여 기록한 것이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욥이 직접 그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난 후에 차분하게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욥기는 실제 일어난 사건인가 아니면 일종의 문학적 작품으로서 작가가 상상으로 고안해낸 작품인가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 이것은 욥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실제 인물인가 아니면 상상으로 만들어진 등장 인물들인가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욥에 대한 인물을 실제적 인물로 이해하기가 쉬운 근거 구절은 다른 성경 구절에 나옵니다. 에스겔 14:14 말씀에 보면,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또 야고보서 5:10,11 말씀에 이르기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 두 구절을 보면, 욥이 지혜 문학의 가상의 상상적 인물로 보기보다는 세상 가운데 살았던 실존 인물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욥이 역사상 실재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욥기는 어떤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을까요?
욥기에 기록된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욥기는 아브라함 시대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욥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의 제약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시내산 율법의 각종 지침들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율법 이전의 족장 시대나 그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또 욥의 재산 정도를 계산할 때에 소와 양과 약대와 종들의 소유한 양으로 측정합니다. 이것이 흔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때의 재산 정도를 일컫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족장 시대와 같은 배경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욥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들로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스바 사람들이나 갈대아 사람들이 강도짓을 하면서 떠돌아다닐 수 없는 안정된 국가 체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족장 시대의 정황상 어울리는 일입니다.
또한 욥기 42:11 말씀에 보면 욥의 형제 친척과 지인들이 욥이 받은 재앙을 위로하면서 각각 ‘케쉬타’ 하나와 금고리 하나씩을 준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케쉬타’는 당시의 고대 화폐 단위인데, 이 단위는 야곱이 세겜 땅을 살 때에 세겜 추장 하몰에게서 ‘백 크시타’를 주고 샀다는 말과 일치가 되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통용 화폐 역시 족장 시대를 동일한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욥기의 배경 시대는 족장 시대이거나 그 이전으로 봄이 합당합니다.
욥기의 사용례를 돌아보면, 욥기는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초대 교회 내에서 고난 주간에 낭독을 많이 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모진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을 다루고 있는 욥기를 읽고 묵상하는 것은 의미가 컸을 것입니다. 속사도 시대에도 고통 가운데 인내하는 욥의 모범을 따르고자 경건한 수도자들이 욥기를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욥기의 주된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욥기의 기록자는 이 욥기를 통하여 어떤 영적 교훈들을 주고자 의도했을까요?
첫째, 인생의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욥은 경건한 사람으로 부요하고 풍족하고 복을 많이 받은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갑작스럽게 무서운 재난을 당하여 자녀들과 재산 일체를 깡그리 잃어버리는 화를 당합니다. 또한 그의 건강마저 완전히 망가지고 그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일을 겪습니다. 이는 욥만이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세상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잃어나곤 합니다. 갑작스러운 재난과 시련이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예기치 않게 닥치곤 합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왜 이런 재난이 내게 닥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냥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심각하게 멈춰서서 왜 이러한 재앙이 내게 닥치는가, 모든 인간들에게 왜 이런 재앙이 닥치는가 하는 점을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 인생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욥기는 바로 그 점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던져놓고 사색하게 만듭니다.
욥기 5:6,7 말씀에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나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찾도록 욥기는 질문을 던집니다.
두번째, 통속적인 고난과 응보 신학은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욥이 극심한 고난 중에 깊이 낙망하여서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듯이 투덜거리며 탄식합니다. 그러자 욥의 세 친구들은 욥에게 그의 고난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거듭 말해줍니다. 욥기 4:7~9 말씀에 보면 엘리바스라는 벗이 이렇게 욥에게 충고해줍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욥이 죄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징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회개를 요청합니다. 숨겨놓은 죄를 털어놓으라고 욥을 추궁합니다. 그러나 욥은 한사코 이러한 친구들의 강요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욥기 1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인정한 대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경건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욥도 절대적으로 완전한 의인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았기 때문에 그에게 닥친 재난이 그의 범한 은밀한 큰 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욥의 세 친구의 주장은 욥에게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사람은 꿋꿋하고 끈질기게 그래서 좀 지루하기까지 욥을 몰아부칩니다. 욥은 이 세 친구의 추궁과 비난과 맞서다 보니 더욱 격렬하게 자기의 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원망하며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리고 욥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욥을 그 세 친구보다 더 의롭다고 말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악에는 반드시 징벌하시고 선한 행위에는 반드시 상을 내리신다는 율법 원리가 항상 맞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난과 시련의 경우를 만날 때, 욥의 세 친구들의 생각처럼 하나님께서 선한 일에는 상을 주고 악한 일에는 벌을 준다는 원리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교훈을 얻게 됩니다. 얼마든지 세상에는 고난이 일어나며 그것이 반드시 선한 일에는 상이 주어지고 악한 일에는 벌이 주어진다는 원리에 따라 다스려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세번째, 까닭없는 고난 중에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욥은 자기에게 임한 그 가혹한 시련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원망 불평합니다. 하나님께 따지려고 도전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시고 법정을 연다면 자기 입에 자기를 변호할 많은 말들을 가득히 채워서 하나님 앞에서 변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욥기 23:1~9 말씀에 보면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한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면 자기의 일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따져서 자기의 억울함을 풀고 자기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찾아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묵묵 부답하십니다. 그러는 사이에 친구들은 계속하여 비난합니다. 세상은 조롱합니다. 그의 억울함은 세상 어디에도 풀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욥과 같이 까닭없는 고난에 떨어지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이 온통 우리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조롱하며 손가락질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 때에 우리도 욥과 같이 행동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따지고 묻고 원망하며 불평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일까요? 욥기는 욥이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하여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친히 폭풍우 가운데 임재하신 후에 그를 책망하신 것을 보면, 그의 행동에 대하여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따지지 못합니다. 도리어 욥은 회개하면서 낮은 자세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고자 했으며 다시 더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 속에 그의 주권적 결정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까닭이 없는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 우리는 납득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묵묵히 그를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난을 포함한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신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그 고난의 신비를 하나님께서 다 설명해줄 의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설명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따질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고난의 이유에 대하여 자상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때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어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입니다. 욥은 자꾸만 하나님께 이것 저것 따지고 물었으며 하나님의 처사가 불의하다고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욥에게 그의 인간으로서의 비천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크고 드높음을 알리시는 데 집중하십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욥 38:1~5)
전도서 5:2 말씀에 이르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스승이 아니요 제자입니다. 스승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는 것이 의무가 아닙니다. 그가 친절하게 다 설명해준다면 그것은 제자에 대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삶에 닥친 까닭 없는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 원망하며 따지기보다는 그러한 고난 속에서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을 묵상하며 묵묵히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놀랍게 욥은 이성적으로 따지고 변론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는 많은 말을 할 때 고난의 늪에서 한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크신 영광을 뵙고 난 후에 모든 많은 말들을 다 내려놓았고 고난의 고통과 슬픔과 원망도 다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욥의 모든 고난이 해결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삶에 닥친 비합리적인 시련 등을 극복하는 길은 누군가로부터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와 신학적으로 합리적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고난의 해답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앎, 하나님의 크심을 알고 나의 작음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은혜에 의하여 우리는 인생의 고난의 늪에서 벗어나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을 얻게 됩니다. 할렐루야.
네 번째, 욥이 고난 중에 요청한 중보자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큰 차이가 있고 하나님을 자기가 만나서 따져본들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음을 안다고 좌절감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 9:1~4)
이를 보면, 욥은 하나님을 줄곧 찾으면서도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할 줄을 알았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가진 의로움을 가지고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그의 고백 중에서 종종 자기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중보자로서 도와주실 자는 간절히 찾습니다. 욥기 16:19 이하의 말씀에 보면 욥의 간절한 소원이 이렇게 피력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느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욥 16:19~22)
욥은 자기 아내도, 친척도, 다정한 친구들도 다 자기를 버리는 중에, 자기 편이 되어줄 자, 하나님과 자기 사이 중간에 서서 자기를 변호해줄 자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욥기 19:25 이하에서도 이렇게 소원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나는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에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 19:25~27)
여기서 ‘대속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삶이 다 파산이 되었을 때 그를 대신하여 모든 빚을 다 청산해주시는 고마운 친척을 가리킵니다. 그는 지금 사랑하는 자녀들도 다 없고 아내는 그를 등졌고 친척들도 다 조롱하고 다정했던 오랜 친구들조차 그를 다 외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욥은 자기의 모든 파산된 상태를 다 회복시켜줄 진정한 친족 대속자가 있다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도 이러한 법적 중보자가 필요하며 자기의 모든 빚을 청산해주고 자기를 파멸에서 구출해줄 능력과 사랑의 구원자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이 욥의 소망은 모든 고난 중에 고통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절대 절망에 빠진 모든 인간이라면 이러한 소망을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욥의 이러한 간절한 바람은 아브라함의 계보 밖인 이방인 출신의 경건한 신앙인 이 욥에게도 주어져 있었던 것은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죄와 저주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자를 바라는 모든 인류의 소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욥기에서도 우리의 ‘고엘’ 구원의 친척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이렇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욥기 전체를 문학적으로 분석할 때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점을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욥기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일관성 있게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논들이 있는데, 제가 볼 때에는 그 중에 ‘법정 논쟁 이론’이 매우 흥미롭게 생각됩니다.
법정 논쟁 이론이란 욥기를 법정에서 논쟁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발을 당하는 자요, 고발하는 자는 사탄이요 사탄의 증인, 협조자들은 욥의 아내와 욥의 세 친구들입니다. 물론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1장과 2장에서 사탄은 욥이 조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욥을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를 걸고 욥의 고발 건을 접수합니다. 그리하여 욥의 모든 재산을 사탄이 다 망가뜨리도록 허락합니다. 욥은 피고인으로서 자기의 결백을 입증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법 제도에서는 검사가 그 고발의 이유에 대하여 입증해야 합니다만, 옛날에는 피고가 입증해야 하였습니다. 마치 요셉이 정체를 숨기고 형제들에게 애굽에 온 스파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습니까? 갑자기 피고가 된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무고함을 입증하여야 할 책임이 주어져 결국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했습니다. 사실 요셉의 말은 억지로 혐의를 씌운 것인데, 약자인 그 형들이 자기들의 무죄함을 입증하려고 애를 태웁니다. 이처럼 욥도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사탄이 공연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축복하기 때문에 경외하는 것이지, 그 모든 소유물과 건강을 치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날 것이라고 혐의를 씌웁니다. 그 결과 욥은 졸지에 피고가 되어 자기의 신앙의 진실함을 입증해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승리했지만, 욥의 세 친구가 다시 고발자 사탄의 입장에 서서 욥을 향하여 번갈아 가면서 죄를 지적합니다.
욥은 세 친구에 대하여 계속하여 반박하며 자기의 신앙의 진실함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3장부터 27장까지의 변론입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친 논쟁 끝에 28장부터 31장까지 욥은 피고로서 최후 진술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홀로 고합니다. 그런 다음에 32장부터 37장까지는 그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엘리후라는 젊은 지혜자가 나서서 욥을 또 다시 공격합니다. 이는 검사의 최후 논고와 같습니다. 그런 후에 자연스럽게 재판장이 등장합니다. 38장부터 42장 초반부까지 폭풍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법정의 재판장으로서 최종 판결을 내리시기 위하여 욥을 불러 선고하시기 위하여 욥에게 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욥기 마지막 종결부에서 그 하나님의 재판 선고가 옳으시다는 욥의 회개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욥을 사하시고, 욥의 세 친구들에게도 잘못을 책망하시고 욥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주고 욥에게는 잃었던 것을 두 배로 받게 보상해줍니다. 이로써 공정한 재판이 끝이 납니다. 욥의 의로움은 인정되고 그 의로움과 신앙은 합당한 보상을 받았고 사탄은 패배당하고 세 명의 친구들 역시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이렇게 법정 논쟁 이론은 욥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익한 관점을 제시한다고 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욥기의 전체적인 소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욥기에는 인간의 고난의 신비에 대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은 우리 인생에 담긴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알아가는 복된 은혜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욥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모두 각자의 인생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며 다가오는 고난을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가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