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子 曰魚도 我所欲也며 熊掌도 亦我所欲也언마는 二者를 不可得兼인댄 舍魚而取熊掌者也로리라 生亦我所欲也며 義亦我所欲也언마는 二者를 不可得兼인댄 舍生而取義者也로리라 生亦我所欲이언마는 所欲이 有甚於生者라 故로 不爲苟得也하며 死亦我所惡언마는 所惡 有甚於死者라 故로 患有所不辟也니라 如使人之所欲이 莫甚於生이면 則凡可以得生者를 何不用也며 使人之所惡 莫甚於死者면 則凡可以辟患者를 何不爲也리오
由是라 則生而有不用也하며 由是라 則可以辟患而有不爲也니라 是故로 所欲이 有甚於生者하며 所惡 有甚於死者하니 非獨賢者 有是心也라 人皆有之언마는 賢者는 能勿喪耳니라
一簞食와 一豆羹을 得之則生하고 弗得則死라도 嘑爾而與之면 行道之人도 弗受하며 蹴爾而與之면 乞人도 不屑也니라
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하나니 萬鍾이 於我何加焉이리오 爲宮室之美와 妻妾之奉과 所識窮乏者 得我與인저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宮室之美하여 爲之하며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妻妾之奉하여 爲之하며 鄕爲身엔 死而不受라가 今爲所識窮乏者 得我而爲之하나니 是亦不可以已乎아 此之謂失其本心이니라
<家苑 譯 >
맹자 가라사대,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건마는 두 가지를 가히 함께 얻지 못할진댄 물고기를 놔두고 곰발바닥을 취하리라. 삶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건마는 두 가지를 가히 함께 얻지 못할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라. 삶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건마는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있으므로 (삶을) 구차히 얻지 아니하며, 죽음 또한 내 미워하는 바이건마는 미워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므로 환란을 피하지 않는 바가 있느니라. 만일 사람으로 하여금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한 것이 없다면 무릇 가히 삶을 얻은 것을 어찌 쓰지 않을 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미워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함이 없다면 무릇 가히 환란을 피하는 것을 어찌 하지 않으리오.
이로 말미암는지라 곧 살더라도 쓰지 아니함이 있으며, 이로 말미암는지라 곧 가히 환란을 피하더라도 하지 아니함이 있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원하는 바가 삶보다 심함이 있으며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함이 있으니, 유독 어진 자만이 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 있건마는 어진 자는 능히 잃지 않을 뿐이니라.
한 대나무 그릇의 밥과 한 나무그릇의 국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더라도, 거칠게 말하면서 주면 길을 가는 사람도 받지 아니하며, 발길로 차서 주면 걸인도 달갑게 여기지 않느니라.
만종이면 예의를 분별하지 아니하고 받나니 만종이 나에게 무슨 보탬이리오. 궁실의 아름다움과 처첩의 받듦과 궁핍함을 아는 자가 나를 얻기 위함이로다. 접때에 자신을 위하여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궁실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하며, 접때에 자신을 위하여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처첩의 받듦을 위하여 하며, 접때에 자신을 위하여서는 죽어도 받지 않다가 이제 궁핍함을 아는 자가 나를 얻어서 하나니, 이 또한 가히 그만두지 못하는가. 이것을 일러 그 본심을 잃었다고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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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註>
舍 버릴 사, 捨와 통함 嘑 거칠게 말할 호, 성을 내면서 말하는 소리 蹴 찰 축 萬種 곡록(穀祿) 6만 4천섬(공손추하편
제10장 주석 참조) 鄕 접때 향, 嚮과 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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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苑 說 >
앞 장이 군주의 지혜로움을 다룬 글이라면, 이 장은 ‘君臣有義’에서 신하의 의리를 다룬 대목이다. 善과 不善, 仁과 不仁, 義와 不義, 이 두 가지는 한 정치공간에서 양립하기가 어려운 命題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만을 取捨選擇할 수밖에 없다. 仁義만이 모두를 삶으로 이끄는 길이다.
理義之心은 누구에게나 있고 是非之心과 羞惡之心 또한 누구에게나 있기에 환란을 당했을 때 舍生取義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자만이 이를 잃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걸인조차 발로 차서 주는 음식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데 사람이 살면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 것은 왜일까?
한때 자신을 위하여서는 예의에 벗어난 짓을 하지 않다가 사치[宮室之美]와 향락과 안일[妻妾之奉]과 권력에 기생하는 아첨꾼들[所識窮乏者]의 공교로운 말에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本心을 잃을 수밖에 없다. 현자는 본심을 잘 보존하여 길렀기 때문이다.
子張이 덕을 높이고 미혹됨을 분별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공자는 “충신을 주장하며 의리로 옮김이 덕을 숭상함이라. 사랑함이란 그 살고자 함이고 미워함이란 그 죽고자 함이니 이미 그 살고자 하면서 또 그 죽을 짓을 하니 이것이 미혹됨이라. 진실로 부하게도 못하고 또한 다만 괴이한 짓만 한다(子張이 問崇德辨惑한대 子曰主忠信하며 徙義 崇德也니라 愛之란 欲其生하고 惡之란 欲其死하나니 旣欲其生이오 又欲其死 是惑也니라 誠不以富요 亦祇以異로다 - 『논어』 안연편 제10장).”고 했다.
그러면서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면서 인을 해침이 없고, 자신을 죽여서 인을 이룸이 있다(子曰志士仁人은 無求生以害仁이오 有殺身以成仁이니라 - 『논어』 위영공편 제8장).”고 했다. 또한 환란의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군자는 목숨을 다하여 뜻을 이룬다(象曰澤无水困이니 君子 以하여 致命遂志하나니라 - 『주역』 澤水困卦 大象傳).”고 했다. ‘殺身成仁’과 ‘致命遂志’를 맹자는 ‘舍生取義’로 받았다.
출처 : 孟子易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