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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태일 목사
어느 날 어떤 왕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신하들에게 훌륭한 철학서들을 모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0여 년이나 걸려 신하들이 수백 권의 책을 모았지만, 그것들은 너무 방대하여 일일이 다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다시 그 중에서 가장 잘 된 서너 권의 책을 뽑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뽑느라 10여 년이 지났는데, 신하들이 책들을 추리고 추려서 서너 권의 책을 왕에게 바쳤지만 왕은 이미 병석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라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책들의 내용을 서너 줄로 요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신하들은 왕의 부탁대로 한 장의 종이에 그 내용을 적어 왔습니다. 적혀진 내용은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여러 가지 고통을 받다가 죽는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인생은 여러 가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무덤을 향하게 합니다.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인생관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시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康健)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
오늘 본문 전도서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왕 솔로몬이 기록한 책입니다. 솔로몬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왔던 사람이며 왕이 된 후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누려 본 사람입니다. 이것 저것 다 누려보고 나서 그의 인생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절을 보면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깊이 연구하며 살펴보았다” 했습니다. 그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고민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이 사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구하고 살피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고 솔로몬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지혜와 비결을 이야기한 것이 바로 전도서 9장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보는 관점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인생관을 한번 솔로몬처럼 살펴보시기 바람니다. 요즘처럼 우리의 생의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생의 의미가 실추한 시대에 모든 부귀영화를 모두 누렸던 솔로몬의 인생을 보는 눈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유념해 보아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또한 올바르고 참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1절)
9:1절을 보면,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 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말씀합니다.
세상의 부와 귀와 영화를 다 누린 한 인간으로서 솔로몬이 자신이 가진 지혜를 다 동원하여 열심히 연구하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많은 지위와 명예를 권력을, 세상의 온갖 쾌락을 누리며 산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의 미래는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이나 지혜 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모든 인생의 주권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의인과 지혜자의 행한 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그의 살고 죽는 것도 그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가지고 누리고 있다해서 내 맘대로 다 되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솔로몬은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우리 인생의 모든 것, 생명이나 구원이나 사랑이나 은혜나, 건강이나 물질이나 사람을 높이거나 낮추거나 세우고 멸함이 바로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기가 세상에 나서 어떻게 자랍니까? 어린 아기를 그냥 내버려두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핏덩어리로 세상에 나서 어떻게 자라납니까?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손이 이 핏덩어리를 거들어 주고 젖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목욕시켜 주고 재워 주고 어머니의 손이 모든 것을 다 해 줍니다. 이 어머니의 손 때문에 핏덩어리 어린애가 자랍니다.
♬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에 이를까요? 거듭나 영적으로 갓태어난 심령들이 어떻게 자라나며 구원에 이릅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어린 심령을 붙들어 줍니다. 이 아버지의 손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생명수로써 먹여 주십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원수 마귀가 올 때는 능력의 팔로 막아 주십니다. 시험에 빠지려고 할 때는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까지 우리의 믿음을 보존하고, 이렇게 연약한 심령이지만 아주 멸망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늘나라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인정하시기 바람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밤에 물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있다가 물 위에 무엇이 보이니까 처음에는 무슨 요물인 줄 알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내니 두려워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인 것을 알아차린 제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때 성미 급 한 베드로는 너무 반갑기도 하고 흥분이 되어서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가게 해달라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럼, 이리 오라. 말씀하심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베드로에게는 담대한 믿음이 생겨서 감격한 가운데 예수님만 쳐다보고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물결 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예수님은 안보이고 물결만 보이니까 성난 물결에 그만 겁이 질렸습니다. 겁에 질리는 순간 그러니까 예수님 잊어버린 순간 베드로는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소리쳤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14:31-32절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님은 즉시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물에 빠져 죽게 된 베드로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체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죄악 세상에서 무서운 죄악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고 나아가지만 갑자기 인생의 풍랑이 일고 바람이 불고 죄악의 큰 물결이 밀어닥치면 그 순간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겁이 나서 무서워서 그만 그 물결에 빠져들어 가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주 죄악의 물결에 휩싸여 빠져 멸망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찬양합니다.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구주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심을 믿고 영접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보호받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십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영광을 빼앗길 염려가 있습니까? 모든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사41:10에 말씀하심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능력의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도와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때로 세상의 거센 풍파 속에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속합니다. 시37:24절을 보면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여기서 ‘아주’라는 말은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신앙의 사람들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완전히,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넘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에스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에스라7:9에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즉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고백입니다.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이제 후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을 알고 깨닫고 인정하며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삶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지혜로운 삶이요, 이것이 바로 인생을 참되고 성공적으로 이끄는 첫번째 열쇠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사가,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의 삶을 붙드시고 계신 것을 믿으십니까?”
2.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2-3절)
2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알반이로다”
이 말씀은 의인이나 악인, 깨끗한 자나 깨끗지 못한 자나, 제사를 드리는 자나 드리지 아니하는 자나 선인이나 죄인이나 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선인이나 죄인이나 인간은 결국은 다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그 최후가 지배당한다는 점에서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죽음이나 고난이 인내를 배우게 합니다. 죄를 깨닫게 합니다. 신앙을 굳게 합니다. 담대하게 합니다. 소망을 더욱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3절 말씀처럼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죽음이 있음을 깨달을 때 그 죽음에 직면할 것을 생각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비참한 죽음에 지배당하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의 고통과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 술마시고, 싸우고, 난폭해지고 필요없는 돈을 허비하고 향락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죽음을 이기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결코 피하여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써 이러한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진실해진다고 합니다.
장례식에 참석하면 숙연해지는 것이 어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평상시엔 죽음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을 아무렇게나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온갖 죄악된 행동들을 서슴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일의 승패도 결국은 하나님께 있으며,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지금 이후의 시간은 오직 주님의 손안에 있는 시간입니다. 앞으로 얼마를 살다가 가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되든지 다 미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이 다스리시고 그 분이 주장하시며 그 분이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는 그 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3.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사실입니다(3절).
솔로몬은 본문에서 인간이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것처럼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3절에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이 말씀에서 인생이란 악을 품고 살며 일생을 미친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은밀한 곳에 악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아무리 착하고 믿음으로 충만하고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악이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나 사도 바울이나 다 내속에 또 다른 하나의 법이 있어 싸운다 고백합니다. 때로는 옆에서 믿는 형제들이 이성을 잃고 분노하면서 다툴 때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십시오. 눈이 돌아갔습니다. 미친 마음을 품었습니다. 돈 것처럼 제정신이 아님니다.
병원마다 정신병동이 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 청량리 하면 정신병원, 용인하면 정신병원 그랬는데 요즘에는 효자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정신병원에서 설교를 하시게 되었는데 예배에 나오도록 허용된 사람들은 비교적 증세가 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마구 웃기 시작합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를 쿡 찌르면서 하는 소리가 "얘 미쳤어요, 미쳤어요" 미친 사람이 미친 사람보고 미쳤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그 목사님도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강대상에서 설교하던 목사님이 갑자기 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신병자 한 사람이 목사님을 보고 "저 사람도 미쳤다 미쳤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목사님은 자신이 미친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머리 끝부분부터 발끝까지 성한데가 한군데도 없는 만신창이가 된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의 안목을 통해서 바라본 인간의 깊고 어두운 부패의 진상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인생관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또한 알아야 합니다.
딤후 3:13에 보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악한 자들이 점점 더 악해지는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들의 수법도 날로 더해가고 결국 자신도 남에게 속임을 당하고 마는 현실입니다. 공장의 기업주가 생산 원가를 줄일 생각으로 산업 폐수를 몰래버릴 생각을 하면 이것은 악한 생각이요, 그것을 비가 오는 날 밤에 몰래 버리면 이것은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친 행위입니다. 무엇에 미쳐서 그렇습니까? 돈에 미쳐서 그런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온 나라가 물 때문에 난리가 났을 때 어느 신문에 낙동강 물에 307종의 오염 물질이 들어 잇고, 그 중에 발암물질이 9종, 농약성분이 40여종이나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물을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습니까? 요즘 한창 문제가 되는 중국산 김치의 납성분, 이제는 무슨 수치 이상의 기생충까지 검출되어 전량 완전 수거 폐기시킨다고 합니다. 중국산도 문제지만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수입하는 우리 나라 사람 악덕 기업주가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수입을 안하면 되는데 돈만 된다면 수단 방법, 유통기한도 안지킴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기주의 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이 인간 부패의 현주소입니다.
미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죽는 악인의 번영을, 부귀영화를 부러워 하지 마시기 바람니다. 정신 이상자와 같은 노력, 굉장하고 요란스러운 것 같아도 머지 않아 다 허세가 되고 끝이 곧 옵니다.
여러분!
우리의 악한 성품에 새로운 영을 부어주시기를 바람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 마음속에 주의 영을 부어 주시고 새 마음을 심어 주십니다. 마음으로 새롭게 하셔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성품을 통해서 옛 성품을 다스리길 원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거슬려 우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내 속에서 주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음과 생각과 인격을 지배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요 주의 말씀으로 삼갈지니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 때 부패한 본성으로 자유합니다. 벗어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4.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4-6절).
4절을 보면,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낫다" 함은(4절 하반), 이 말씀은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올바로 살아볼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사자와 개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 동물이고, 개는 천한 동물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는 동물이지만 아무리 가치 있는 사자라도 죽으면 소용없고, 도리어 살아 있는 개만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살아 있음이 귀한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기회, 즉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명 호흡이 있어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회개할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믿을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원을 위해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낮이니 우리가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죽으면, 죽은 다음에는 부모도, 부부도, 자식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쾌락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서 주신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아직도 생명 주시고 기회 주실 때 선용해야 합니다. 교회 봉사도, 기도도, 전도도 모든 것이 살아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개와 같이 아무리 죄 많은 인간도 아직 살아 있는 동안은 회개할 기회가 있고 바로 될 소망이 있지만, 사자 같은 영웅도 일단 죽은 다음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5절 말씀역시 보면,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산 자는 죽을 줄을 알기 때문에 경성하여 새로운 각오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죽은 자는 상급을 바라보고 행동할 만한 깨달음도 없습니다.
죽을 줄을 안다는 것은 이 땅에 남아 있을 날을 계수할 때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살게 될뿐 아니라, 죽음 또한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죽음은 곧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바로 영원한 삶을 준비하기 위한 희망입니다. 아직 내가 죽지않고 살아 있다는 것, 아직 남아 있는 이 삶이 너무나 귀하다는 삶의 가치를 느끼는 자는 참으로 희망찬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름니다.
살아있는 성도는 하늘의 상을 바라고 삽니다. 영원한 분복을 기대하며 살아 갑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살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삶을 귀하게 여기는 인생이 됩시다. 이것은 영생이 있다는 소망에서만 이런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올바르고 참된 삶을 살기위해 먼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들을 기억하시기 바람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하심을 인정하시기 바람니다. 우리 인간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입니다.(히9:27) 유한한 세상을 살지만 영생이 있음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분비해야함을 알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부끄러움 없이, 우리의 남은 인생을 올바르고 참되게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참되고 올바른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본문 말씀 통해 은혜 나누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