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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참된 지혜를 구하라
전도서 1:12~18 / 이규현 목사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16.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도서 1장 2~3절에 보면,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땀 흘리며 수고합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언가를 얻기 위해 땀을 흘리며 수고하지만, 모두 헛된 것입니다. 지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땀과 시간, 정력을 쏟을 만한 가치 있는 일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가치 있는 일이라면, 시간이 지나도 가치 있는 일이어야 합니다. 일의 가치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본문 전도서 1장 13~15절에 보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는 지혜의 왕이라는 명성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솔로몬은 지혜의 허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무언가를 알고자 애썼습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 힘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지식이 부족하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알아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오늘날은 지식 사회입니다. 정보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말합니다. 지식 사회, 정보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정보를 누가 먼저 습득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고급 정보를 누가 빨리 가지는가가 중요합니다. 고급 정보를 조금이라도 빨리 가지는 사람이 앞설 수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에는 모든 것이 속도와 연결됩니다.
인공지능이 동원되는 시대입니다. 사람이 하던 것을 기계가 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사람의 노동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힘을 쓰는 노동자보다 지식 근로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식 근로자에게는 지식이 힘입니다. 지식 근로자들은 이론이나 방법들을 계속 터득하고 개발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혜와 지식을 더 많이 쌓기 위해서 대학교에 진학하려고 합니다. 본문 전도서 1장 13절에 보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지식을 추구합니다. 사물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연구하면 상당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치와 사물을 연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왜 공부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여 학점을 이수하고 지식인이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는가’라고 질문하면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공부하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전도서 1장 18절에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에는 설교를 듣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고 나면 설교를 듣고 설교를 분석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비평하려고 합니다. 모를 때에는 의사의 지시에 잘 따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의학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이 의사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압니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학습하는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요가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요가에는 위험한 요소가 있습니다.
요가(yoga)는 힌두교에서 종교적 초월 명상을 하는 것으로, 절대적 존재와 연결되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요가의 동작 하나하나는 신적 존재를 모방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가 동작을 하다 보면, 정신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단전호흡, 마음수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숨을 깊이 쉬며 몸을 자유롭게 함으로 우주적으로 합일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제대로 알고 해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 책을 엄선해야 합니다. 독서를 무조건 좋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유해(有害)한 책, 위험한 책이 많습니다. 책을 읽을 때, 책을 통해 작가의 정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익한 책을 통해 감정이입을 경험하면 그 책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지혜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지혜 중에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비롯된 선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해 오늘날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되었습니다. 미국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성경을 통째로 암송할 만큼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은 놀랍습니다. 사람의 머리는 쓸수록 발달합니다. 그런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의 20% 정도만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혜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려고 합니다. 18세기에 일어난 계몽주의는 종교로부터 멀어지려는 사람의 지성주의적 시도였습니다.
계몽주의로부터 인문학이 발달했습니다. 18세기의 인문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인간의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문학은 후에 신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자유신학이 인문학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의 학문은 한계가 있습니다. 박사는 자신이 연구한 분야 외에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제한적으로 알 뿐입니다. 열심히 연구하여 새로운 것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발견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본문 전도서 1장 15절에 보면,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사람은 자원을 소비할 뿐 창조하지 못합니다. 그렇다 보니 인류가 가진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 갑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기적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천재지변을 통해 사람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지혜의 한계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배아줄기 세포를 이용하여 생명을 복제할 때,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매우 악합니다. 생명공학 기술과 현대상업주의로 인해 재앙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로봇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똑똑한 로봇이 활동하는 시대가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로봇이 난치병 퇴치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 위로부터 온 지혜가 참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가지려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질수록 하나님을 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참된 지혜입니다. 신앙이 있는 과학자는 과학을 공부할수록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연구실이 예배실이 됩니다.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갖고 삽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돈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속적인 경영자와 다릅니다. 솔로몬은 지혜도 헛되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지혜를 포기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지혜를 가져야 하는가입니다. 왜 공부하는가입니다. 왜 지혜를 가져야 하는가, 왜 공부하는가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면 의미 없습니다. 지식을 쌓으려고 하다가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공부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된 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목적이 잘못된 성경공부는 선악과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혜를 얻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는 허무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하나님을 더 알아 많은 사람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5절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지혜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비롯된 지혜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있고, 땅에서 비롯된 지혜가 있습니다. 땅에서 비롯된 지혜는 정욕적입니다. 땅에서 비롯된 지혜는 귀신의 지혜입니다. 야고보서 3장 16절에 보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비롯된 지혜, 세상적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공동체를 혼란하게 합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땅에서 비롯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식이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사람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이론은 약점이 있습니다. 세상을 혼란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혜는 다릅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에 보면,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성결합니다. 거룩합니다. 악하지 않습니다. 죄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3장 18절에 보면,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화평하게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관용합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옹졸해서는 안 됩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양순합니다. 착합니다. 그러나 악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진 사람의 마음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타적입니다. 사람이 왜 공부합니까? 왜 지혜로워지려고 합니까? 사람들을 돕고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진 사람의 마음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비롯된 지혜는 깨끗합니다. 진실합니다. 순수합니다.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비롯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편견을 만듭니다. 편을 가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을 속입니다. 음모를 꾸밉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면, 지적 만족감을 느낄 뿐입니다. 곧 허무함을 느낍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깨달은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을 실천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가 있고 똑똑한 사람은 온유해야 합니다. 날카로워서는 안 됩니다. 폭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사람은 죽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선악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선악을 온전하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온전하지 못한데도 자신의 관점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져야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화평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혼란합니다. 세상에서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거절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진 사람은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모습으로 악인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지식을 믿고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낭비하면, 우리의 삶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