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동 체 와 장 애 인
2012-04
열 등 감 과 자 존 감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우리들은 날로 살아갈 때가 많다. 봄바람에 날리는 꽃의 날가루들이 우리의 표피를 간질거리며 흔적처럼 새기고 지나쳐 간다. 어떻게 보면 채 무두질을 하지 않은 도드라진 날가죽 같은 나의 살결이기에 거칠기가 한이 없다. 봄의 따뜻한 볕을 봐 가며 피어나는 솜사탕 같은 버들강아지의 모습 속에 드리워진 그 포근함은, 오래전에 어느 집 담장 곁을 지나치며 걸어갈 때의, 모락모락 피어나면서 다가오는 뜨거운 청국장 냄새의 그 아련함과 같은, 사람의 아름다움은 곰살궂을 때일 것이다. 그런데 봄바람은 피어나는 작은 잎 새들을 더욱 자라가게 하기 위하여 나붓나붓하기 보다는, 물과 뭍의 방파를 넘어대며 일어나는, 지나간 날들 속에서의 동쪽 녘에서 불어오는 샛바람을 연상케 하는 거센 바람으로, 나뭇잎을 흔들어 대듯 들어선다. 그래서 그 봄바람은 나를 흔들어대는 세찬 바람으로 다가들곤 한다. 예전이나 지금에나 사람들은 제멋에 휩싸여서들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평상을 벗어나게 되면 보통은 더 되는 극적인 연출을 해대는 “날건달”이나 혹은 “날나리”의 삶으로까지, 그저 엉성하고 단단하지 못해서 푸석푸석해져서 곧 이어서는 부스러질 것만 같은, 바람결을 따르다보면 자기만의 예쁘장하게 자아내던 고운 결 모양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사월은 되살아나는 만발의 달이다. 뒷동산에는 무채색과 다를 바 없는 갈색의 토양 속에서, 흰색 가득한 곳에 간간이 형영의 색채를 담아가니, 그 무리지음은 어느 것에 비길 바 없으리만큼 곱다. 흰색 가득함 속에 유채색이 간간히 섞여지었음에 탄복의 비성이 함께 곁들여질 것 같다. 우리는 바로 그 세상의 자연스러움에 함께 곁들여진 삶이 필요하다. 그 이름이나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동질로 여겨가는 사람살이가 필요하다. 고금과 곳곳을 통틀어서 이야기 한다 할지라도 다음의 말은 성립 될 듯하다. 비슷한 듯 여겨지면서도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있다. 가깝게는 “작다”는 말과 “적다”는 말, 그러나 “크다”는 말과 “많다”는 말로 상대어를 가져다가 마주대면 그 말들은 서로 확연해진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의 지님은 그 서로 간의 말 가운데에서 끼어져있는 “상대어”라는 말처럼 확연하다는 것이 문제점은 아닐는지? 서너 달 전에 얘기했던 “평등”과 “공평”의 미묘함도 장애인들에게는 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 한간의 초등학교에서는 달리기 경기를 열 때에 키가 작은 아이는 조금 앞에서, 더 키가 작은 아이는 더 앞에서 달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단다. 그 의도나 과정은 좋은듯하나, 앞에서 달리게 되는 작은 아이의 생각 속에는 좋은 배려라고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아이는 반대의 마음이 자리하게 되어 열등의식을 불러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정서 가운데 가슴으로 이해하기에는 과히 쉽지가 않은 말이 있다. 그것은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바로 그 말이다. 그런류의 말 가운데에는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이 있다. 차이는 그저 서로 간에 조금 다르다고 여기면 되는데, 차이를 차별처럼 확 틀리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요즈음은 눈앞의 작은 차이가 상대방에게 드러나는 열등감을 안겨다주게 되고, 차별은 그 사람의 마음에다가 크나 큰 짐을 얹어다 준다. 차이는 흰 사람과 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색다름이 틀리게 뒤틀려 저서 급기야는 백인 우월주의가 나왔다. 그것은 차이의 고유성이 퇴락하게 되면서 커다란 차별을 안겨다 주고야만, 한 예일 것이다. 그런데 성서 속에서는, 호화스럽게 지냈던 솔로몬 왕이 아가서(雅歌書)에서 검은 피부색의 술람미 여인과의 애련(愛戀)함을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다문화가정 속에서의 감미로운 모습이다.
나는 최근에 와서 둥그스름하면서 원숙함에 이른듯 하신 장로(長老)님을 동생으로 인하여 뵈올 수 있었다. 그 장로님 곁에는 여러 가지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이 도움과 회복을 찾아 모여 든다. 나는 지금 언뜻 그 성서구절이 떠오른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3:18-19). 나는 장로님에게 비쳐지면서, 되돌아오는 나 자신을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몸이 불편하기에 속에 열등감을 끌어안은 채, 이에 상응하는 자기방어기재로 너울을 쓴 우월감의 표출로 겉포장을 하고 있었음이 여실히 보여 졌다. 바로 번드름하게 회칠해진 무덤 안에서 움츠린 포로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나는 실재로 한쪽 눈이 더 멀어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열등감에 눌려있기에 우리들은 늘 자유를 갈구한다. 나는 장로님으로부터 책을 한권 선사 받았다.
그 책 앞부분에서 서 목사님께서 쓰신 글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 열등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심리학자 애들러는 말을 했다. 나 자신을 가만히 돌아 보건데, 긍정적 자아로 가장된 부정적 자아감이 속에 내포 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뿌리에는 비교의식이 씨앗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서 우월감이 아니면 반면에 열등감의 대조되는 양태로 태동하게 될 것이다. 그 열등감은 가정, 사회나 문화 환경, 완벽주의 등에 의해서 기인되었다.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의 굴절, 삶의 의미와 꿈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어느 경우에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초래되고, 바른 신앙이나 정서가 방해를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갈등이 심하고, 비판적이고, 칭찬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비판하는 마음이 있는데, 자신을 비판할 수 없으니, 그 대신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이 틀리다는 것을 덮어 버리고자 하는 방어책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비판과 분별은 서로 다른 말이 된다. 그 일례로 열등감과 겸손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겸손은 자신을 절대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남을 높여주고 칭찬하는 것이라면, 열등감은 세상적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 열등감이 있는데, 그 열등감을 창조적 가치로 승화해서 지내게 되면, 노래를 불러도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부르게 되지만, 반면에 그렇지 못하면 “한 만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이런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적 자아상(창세기 1:27-28), 은총적 자아상(고린도전서 15:10), 가능성의 자아상(빌립보서 4:13. 마가복음 9:23) 등을 지녀야 할 것이다(치유와 선교. 제5호.(22-27P) 한들출판사 중. 성도의 자아상-고린도전서 15:10. 서은성 목사님<상신교회>).
사월은 나에게 고난과 싹 트임의 부활을 일깨워다 주고, 더욱 마음을 낮추려고 하는 것은 20일이 장애인의 날이고, 교회에서는 그 즈음을 전후로 하여 장애인들을 생각하는 모임을 갖기도 한다. 여기에 두 곳의 성서 구절을 적어본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 그리고 서 목사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나는 사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린도전서 15:10). 바로 자존심이 아닌, “나의 나 된 것은”이라는 말처럼 자기존재의식과 함께 자존감의 회복이 중요하리라 본다.
공 동 체 소 식
.
☻ 새터 공동체 가족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김복순 지명수 권희숙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이삭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금성교회.충전교회.신평교회.김기홍.진명구.정무래.최영애.라홍채.박종만.이은주.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7인).대덕교회.양오석.채윤기(박현실).김복순.주식회사EG(이광형).그리스도의집(파리바게트.옹인숙.4회).수영교회.비래영광교회(김영모외28인).금산주부클럽(4인).반석전원교회.살림교회(박상용외14인).신건태.중부지역장로협의회(순남홍).신평교회(2인).양명신.김용환(최정숙).낭월교회(6인).이건희.임장혁(금산교회).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외4인).오정교회(최세영).금산군모란회(5인)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
* 지난 달 소식지의 제목이 “경북 예천(禮泉)을 가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래서 2000년 7월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무래(武來)의 이름이 무례(無禮)한듯 싶기도 하고, 늘상 웃음이 많기에 그 모습을 담아 “정이삭”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러보기로 한다.
임마누엘인쇄출판사 (042)253-6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