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카드>의 마지막 촬영은 양동근의 액션장면이었다. 경마장에서 도망치는 '퍽치기' 일당 중 한 명을 쫓던 그는 건물 2층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이 장면을 대역 없이 촬영하기 위해 양동근은 건물난간에서 자신이 뛰어내릴 높이를 가늠했다. 누구라도 몸을 사릴만한 높이었지만 슛 사인을 앞둔 양동근은 담담해 보였다. 자신의 촬영분은 일찌감치 끝났지만 멀리서 현장을 지켜보던 정진영은 양동근에게로 슬며시 다가갔다. 위험한 촬영을 앞둔 후배를 위해 그가 건넨 것은 격려의 말이나 충고가 아닌 담배였다. 중요한 촬영을 남겨놓고 그들은 그렇게 주변 둘러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정진영과 양동근의 만남은 뜻밖의 조합이었다. 영화의 설정상 9살 차이가 나는 이들은 실제로도 15살 차이가 나는 삼촌과 조카뻘 되는 나이였다. 게다가 상반된 캐릭터를 등장시켜 충돌을 보여줘야 하는 버디무비에 출연하기에 이들은 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영화 속 형사 오영달과 방제수처럼 그들이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나 역할이든 피하지 않고 부딪히는 것. 우회와 반칙을 모르는 이 두 명의 고지식한 배우는 지난 10년이 넘는 기간을 그렇게 고단하게 달려왔다.
마음속 열정을 숨기다
정진영의 머리카락은 원래 곱슬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와일드 카드>에서 인간적인 형사 오영달을 연기하기 위해 일부러 퍼머를 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들을 때가 더 많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역시 새 영화에 들어갈 때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매일 아침 드라이를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은 맡은 배역 탓이었다. <약속>에서 보스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깡패 엄기탁으로 주목을 받은 이후 그에게는 선이 굵고 냉정을 잃지 않는 역할들만이 주어졌다. 덕분에 그는 곱슬머리가 어울릴만한 역할을 맡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스님과 한족을 연기해야했던 <달마야 놀자>와 <비천무>는 제외하더라도 그가 맡아온 역할들은 의문의 사건을 추적하는 의사(<링>)와 죽음을 앞둔 사형수(<교도소 월드컵>), 킬러를 쫓는 형사(<킬러들의 수다>) 등 삶의 한없이 스트레이트한 인물들이었다.
"캐릭터 선정은 배우의 선택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것이 아니라 시동이 걸린 자동차가 내게로 오는 거죠. 저는 그 위에 올라타 운전을 잘 하기만 하면 되는 거구요." <초록물고기>의 연출부 일을 하던 중 한석규의 형으로 캐스팅 된 이야기는 정진영에게는 꽤 유명한 에피소드다. 연출을 지망했기 때문인지 그의 연기관에는 자신의 역할보다는 작품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담겨있다. 서울대라는 학력과 오랜 무대생활, 장산곶매의 작품에서 전교조 해직교사로 영화계에 발을 딛었던 이색경력과는 무관한 액션위주의 조직폭력배 역할을 맡아도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적당한 목표나 욕심만 있어도 역할을 고르고 이미지 변신을 시도할 법도 한데 그는 그 역시 할 줄 몰랐다. <와일드 카드> 역시 자신을 정식배우가 되게 해준 <약속>의 김유진 감독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현재 촬영에 들어간 <황산벌>은 <달마야 놀자>를 했던 씨네월드 이준익 대표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선뜻 출연에 응한 거였다.
"개인적으로 목표라는 말을 싫어해요. 목표란 말이 왜 흉악하냐하면 인생을 쪼그라트려요. 목표가 있는 사람은 인생을 그거 하나를 위해서 산다는 이야기거든요. 그 말은 인생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목표 같은 건 없고. 남한테도 목표를 세우지 말라고 충고하는 편이에요. 삶이란 요소 요소에 느낄 것 이 얼마나 많은데요." 낯을 가리기로 유명한 양동근은 촬영기간 내내 정진영에게 술을 먹자고 졸랐다고 한다. 영화 속 방제수는 오영달의 애처로운 표정 하나라면 다잡은 범인도 다른 관할에 넘길 수 있을 만큼 그를 존경한다. 양동근에게도 정진영은 연기는 물론 인생에 대해서도 믿고 따를 수 있는 선배이자 형이기 때문이다.
멋대로, 내 식대로 산다
양동근은 융통성이 없는 배우다. 타협이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는 듯 언제나 극과 극을 오간다. 그 동안 맡아온 역할만 봐도 그렇다. 자신이 원하는 일에 미치도록 매진하거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세상에 담을 쌓는 것이 그가 연기해온 캐릭터였다. <짱>과 <댄스 댄스>에서 힙합과 춤에 '미친' 젊음을 연기했다면 <해변으로 가다> <수취인불명> 등의 작품에서는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를 연기했다. 하지만 그가 맡은 역할은 밖의 시선이 어떠하든 결국 자신의 세계 안에 갇힌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기도 했다.
"부딪히고, 복잡한 게 제일 싫어요. 연기하는 것은 좋지만 연예인 생활은 정말 싫거든요. 어떻게 나를 평가하든 상관없어요.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그게 아니지만, 또 그가 나이기도 한 걸요." 하지만 양동근은 극단적인 두 가지 모습 안에 완벽하게 자신을 숨기지 못했다. 어느 역할을 하든 느릿하고 고저가 없는 양동근식 화법이 등장했고, 양동근식 튀는 스타일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올해로 25살인 양동근은 연기경력만 따지자면 파트너인 정진영보다도 선배에 해당된다. 87년 <탑리>라는 드라마로 브라운관에 데뷔했으니 올해로 벌써 연기경력 16년째인 베테랑 배우인 셈이다. 그 사이 7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드라마는 물론 시트콤에까지 도전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작품이나 능숙하지 못하고 어수룩하게 접근한다. 연기신동으로 불리었던 그의 진가는 잠시 후에 나타난다. 어딘가 생뚱맞고 무성의하던 말투는 놀라운 집중력과 함께 어느 새 그의 캐릭터가 된다. 어떤 캐릭터라도 자기 방식으로 변형하여 체득하는 것이다.
<와일드 카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배우 양동근에게는 새로운 스탭을 내딛는 영화다.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있던 역할을 했던 그에게 <와일드 카드>는 처음으로 형사라는 직업인을 연기하게 했으며 범죄자들은 물론 동료들과 매력적인 여인에게까지 돌진하게 만든다. 관계를 맺는 방식은 여전히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멜로연기를 소화한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데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 것만 같았다. 물론 연기가 아닌 인터뷰에서는 단답형의 대답과 묵묵부답으로 인터뷰어를 당혹스럽게 만들지만 말이다.
현재 양동근은 일부러 아무런 계획도 잡고 있지 않다고 한다. 꾸준히 작사를 하고 있지만 앨범계획도 아직 없으며 차기작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와일드 카드>가 그랬던 것처럼 양동근식 '필'이 오는 작품을 그는 본능적으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양동근의 본능은 믿을만하다. 오랜 연예인 생활 속에서도 그는 아직까지도 야성의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역할을 맡던 좀처럼 펴지지 않는 그의 머리카락처럼 말이다.
두 배우의 와일드 카드
"두 형사의 비장의 무기가 뭐냐구요? 몸뚱이잖아요."
"몸이죠. 그저 달리고 칼을 휘둘러도 손으로 잡고."
와일드 카드란 승률 100%를 보장하는 만능패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 속 두 형사들도 그랬던 것처럼 배우 정진영과 양동근에게도 와일드 카드란 존재하지 않는다. 흥행이나 평가같은 것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대비하는 비장의 무기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영화 <와일드 카드>의 미덕은 과장되지 않은 형사들의 리얼 스토리에 있다. 그렇다면 두 배우의 매력 역시 마찬가지다. 꾸미지 않지만 진정성과 투명함이 녹아있는 연기. 요즘 영화계가 두 배우를 잊지 않고 자주 찾는 진짜 이유다.
이영주 기자 | 사진·양우성 기자 | 스타일리스트·하경미,김명희, 조미애
의상협찬·trugen, royal, renoma, 카운테스마라, 페리엘리스, 알마니, Marais, 레이버스, 아디다스, 콕스, 잭앤질
첫댓글 앗 빌리님 언제나 기사 올려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제가 웹서핑을 안 하고도 진영님 정보를 많이 알 수 있는...^^
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