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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영광의 나라
부활신앙을 갖고 삽시다. 고전 15:12-21
할렐루야! 이 따뜻한 봄날, 만물이 약동하는 이 복된 계절에 주님께서 부활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도 회복과 부활의 은총을 내려주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 합시다. 옆 사람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부활의 축복이 임하길 빕니다.
지난 주간 우리를 때문에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좀 더 느껴 보자는 의미에서 수요일 저녁에는 성찬식을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겟세마네 기도회를 완산여고 앞동산에서 가졌는데 아주 가깝고 어둡지 않아서 내년도부터는 좀 더 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벌 받기 위해 십자가를 져 주심으로 우리들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십자가 믿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은 바로 사도들의 믿음이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비웃고 조롱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15장 1절부터 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바울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뭣대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게바란 베드로의 애칭입니다.)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맨 나중에 누구에게도 보이셨다고 하고 있습니까? 만삭되지 못하고 난 자 같은 사도 바울 자기에게도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내 죄 때문에 내 대신 죽으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에 죽음에 굴복되지 않고 사망권세를 뚫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은 세상이 믿는 모든 종교 철학 사상과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 세상에 있는 어떤 종교가 어떤 철학자가 여러분과 나를 위해 죽어주었고 나를 부활의 몸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단 말입니까? 석가모니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주었습니까? 공자가? 모하멧이? 칼 마르크스가? 로마교황이?
그런데 왜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은 믿지 않고 다 자신들의 삶을 살다 간 인간들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라면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하고 같은 사람을 믿도록 하게하는 사단이란 놈에게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12절 말씀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 는 말씀은 고린도 교인 가운데서도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미국교회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맞는다는 것을 제가 미국의 교단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를 보면서 확인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미국교회 목사들이 50%에서 30%가 된다는 글을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http://egloos.zum.com/aspire7/v/1316282)
이렇게 교회를 다닌다. 목사다 하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는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게 왜 그렇습니까? 성경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본주의, 자기중심에서 나온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거듭나지 못하고 마음이나 편하고 예수 믿으면 잘된다는 가짜 번영신학에 속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몰려들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분들 중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예수님, 제가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아직은 확신이 되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믿어지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진심으로 구하면 틀림없이 여러분에게도 믿어지도록 체험을 주실 것입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19절 말씀 같이 읽어봅시다.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이 바라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영생의 삶이 없고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맞는 얘깁니다. 불쌍한 자일뿐더러 가장 미련한 자들일 것입니다. 헛것을 믿고 모든 것을 걸고 올인(all-in)했는데 그게 정말 헛것이라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미련하고 불쌍한 자들일 것이라고 바울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그렇게 말하는 있는 것은 그 만큼 부활이 확실하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추구하고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을 똥처럼 가차 없이 버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주어진 전도자 길을 가는데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뺏는다 해도 그 길을 가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헛것을 보고 그렇게 한 미련 곰탱 일까요? 열두 제자와 120 명의 초대교회 멤버들이 다 속았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부활도 재림도 다 지어낸 이야길까요? 저도 여러분도 전 세계 수십억의 그리스도인들도 다 속은 자들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활은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씨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검고 조그만 수박씨를 심을 때 그 씨는 땅속에서 싹이 나오면서 씨앗의 몸체는 싹을 키우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썩고 매 말라 가며 사라집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으면 싹이 자라 뿌리를 내리고 덩굴을 뻗기 시작합니다. 그 덩굴에서는 작그막고 둥그런 수박을 맺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달고 맛있는 머리통보다 큰 수박이 됩니다.
수박뿐이 아닙니다. 사과 씨도 그렇고 감나무 씨도 그렇습니다. 어디 식물만 그렇습니까? 동물들도 다 그렇습니다. 수컷의 씨와 암컷의 씨. 그것을 정자와 난자라고 하지요. 개나 소 말 등을 보면 수컷의 정자와 암컷의 난자가 결합되면 그것이 자라 암컷의 자궁에서 나오면 그 때 비로소 강아지 송아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사람과 자연계 모든 동물과 식물은 씨를 남기고 죽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과 식물이 다른 것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같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 하나가 다른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은 씨를 남기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사람은 씨를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것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세 번에 걸쳐 사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어머니 자궁 속에서 열 달을 사는 태아의 삶이 있고요. 두 번째는 어머니 자궁에서 태어나 해와 달이 있는 이 지구에서 백년 이쪽저쪽을 사는 육신의 삶이 있고요 세 번째는요 영원히 살아야 하는 천당 천국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와 한 철을 사는 메뚜기와 여러 해를 사는 제비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다들 들어보셨지요?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놀다가 야 내일 놀자 라고 메뚜기가 말하니까 하루살이가 하는 말 ‘내일이란 말이 뭔데’ 그러더란 것입니다. 이번에는 메뚜기와 제비가 놀다가 제비가 ‘야, 내년에 보자’그러자 메뚜기 왈 ‘내년이 뭔데’ 그러더란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영혼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육신만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천국이야기를 하면 ‘뭐 그런 세계가 있어’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과거 육신의 것을 추구했던 생활을 포기하고 전도자가 된 것은 지금 세상과 영원한 세계를 주관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그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며 그 영생의 나라에서 살려면 부활해야만 된다는 것을 전하라고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부활한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줄 아십니까? 영원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부활, 곧 몸의 변화가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몸을 가지고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요. 예수님처럼 부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이전과 부활이후가 달랐습니다. 부활이전의 몸 예수님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은 우리들처럼 먹고 마시고 싸고, 늙고 병드는 몸이었다면 부활하신 뒤의 몸은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먹지 않아도 죽지도 약해지도 않지만 즐거움을 위해서 친구와 만나고 예수님과 만나고 서로 만나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 먹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몸이기에 걷거나 뛰고 나면 피곤한 몸이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피곤도 병도 늙음도 없는 나랍니다. 그리고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빛의 속도를 뛰어 넘지 못하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은 속도로 이동하고 벽이 산이 가로 놓여 있어도 그대로 통과하고 공중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도 있는 신비한 몸 신령한 몸으로 변하는 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왜 그렇게 기뻐하고 흥분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나도 그렇게 부활할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고난 내 고난,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 노랠 부르는 것입니다.
미국에 스탠포드 대학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학이라 칠 수 있는 명문대학입니다. 그 스탠포드 대학이 설립한 동기가 이렇다고 합니다. 그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스탠포드라는 사람인데 아주 부자였고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이었답니다. 그리고 외아들이 있었는데 이 외아들이 잘 생긴대 다가 수재여서 온갖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습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 그 때로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느 날인가 잠깐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더란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십시오.’스탠포드는 이 환상을 보고 인생관이 확 바뀌었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 아들의 소원대로 청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지금으로 말하면 얼마가 되지도 모를 그 당시에 거액 2천만 달라 거액을 바쳐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했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답니다.
이 땅을 떠나면 즉시로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달라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고통스럽게 죽는 것은 무섭지만 죽음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눈 뜨고 나면 천국인데요. 두 번째 상 받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는 심사를 하여 상 받을 일을 많이 한 사람은 더 존귀한 자리에 영광스런 신분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로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대신 기쁘고 감사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왜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아버지의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염려한다고 뭔가를 하겠다고 해서 다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세상은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 염려를 내게 맡기라고 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면 우리 마음에 소원까지 이뤄주시겠다고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기쁘게 감사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저에게도 이런 복된 부활이 날이 있음을 믿고 기뻐하며 주님께 맡은 사명 잘 감당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