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한문학, 「추도기성적의종(追悼岐城謫毅宗)」 고려의종을 추모하며> 해암(海巖)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고려시대 무신의 난으로 거제도로 찬축(竄逐)되었다가 죽은 고려 의종(毅宗)을 추모하며 지은 ‘기성(거제) 유배 고려의종을 추모하며’ 「추도기성적의종(追悼岐城謫毅宗)」과 ‘그대 그리워’ 「사군(思君)」 등 2편의 한시를 소개하겠다. 이번 2편의 한시는 모두 1173년 고려 의종이 거제섬에서 경주로 나갔다가 이의민(李義旼)에게 살해되고 난 후, 그가 거처했던 거제도에서 그를 추모하고자 읊은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의 2011년 작품이다. 비록 그가 다시는 돌아오진 못하지만, 해마다 새봄이 돌아오면 산천은 다시 푸르니 더 이상 슬퍼하진 말자고 노래하였다. 이 시들은 거제시 둔덕기성(屯德岐城)과 견내량, 그리고 오양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 한편 1170년 고려 의종이 거제도에 도착한 후, 한 달이 지날 때까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가 동래(5년 8개월)에서 이배되어, 거제현 오양역에서 13년 10개월째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고려 의종과 정서는 거제도에서 재회한 후에 약 한 달가량 함께 보내며 지은 고려가요가 <정과정곡(鄭瓜亭曲)>이다. 의종은 삼남대로(통영별로)를 이용해 견내량을 건너 오양포에 도착, 오양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당시 서해안 뱃길은 너무 위험하고 또한 수백 명의 문무백관과 가솔들, 각종 화물을 싣고 오기가 힘들었으며, 왜구가 남해 서해안에 득실하던 때라 안전한 육로를 이용했다.
◉ [고려의종 거제유배] 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이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 하는 일이 잦았다. 1146년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대로 대관전에서 고려 18대왕에 올랐다. 그이 나이 20세였다.
1170년 무신정변으로 거제도로 추방된다. 당시 고려초기에 개설된 역원 중에는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역(驛)이 오양역이라, 산남도 역길을 따라 거제 오양역으로 보내졌다. 당시 오양리 일대는 역의 재정을 꾸려나가는 공해전이라, 거제현령의 권유로 신라시대부터 이어 온 둔덕기성에서 약 2년 9개월을 보낸다. 이 당시 그가 멀리 유배 보냈던 정서(정과정)가 인근 오양역에서 20년째 유배되어 있었는데, 대사면령이 내릴 때까지 고려 의종과 정서는 거제도에서 약 한 달가량 함께 보내게 된다. 이때 지은 작품이 <정과정곡(鄭瓜亭曲)>이다.
의종이 거제도에 있는 동안의 역사기록은 현재까지 전무하다. 그러나 황제에서 폐위된 후, 먼 변방 작은 성(城)에서의 삶은 참으로 혹독했으리라 여겨진다.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는 물론이거니와, 개경에서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재복귀의 유혹에 빠져 경주로 나갔다가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이때가 1173년 10월이며 향년 47세였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 다음 ‘微’와 ‘支’ 자를 통운(通韻)한 오언율시 「추도 기성적의종(追悼岐城謫毅宗)」은 거제시 고전학자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의 작품이다. 이 글은 2011년 10월에 지은 측기식 한시로, 거제도로 유배되었던 의종이 경주로 나갔다가 죽은 후, 그를 추도(追悼)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 한시다.
내용은 이러하다. 고려 의종이 개경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 무신의 정변으로 찬축되어 천 리 먼 변방 거제도로 쫓겨왔었다. 바다 물결과 구름이 끝없이 펼쳐진 거제섬 달밤에 홀로 잠 못 이루며, 아무도 봐주지 않는 외딴 거제도에서 어이 살거냐하며 결국 재복귀의 희망을 품고 육지로 나갔다가 죽고 말았다. 그러나 비록 그가 죽었지만 늘 그렇듯 새봄이 돌아오면 산천은 옛 같이 푸르니 슬퍼하진 말자고 읊었다.
1) 「추도 기성적의종(追悼岐城謫毅宗)」 / 고영화(高永和)
不向普賢飛(불향보현비) 어찌하여 보현원(普賢院)에 날아가지 않고서,
岐城見者稀(기성견자희) 보아 주는 이 없는 기성(거제)에 사는고?
俗世身早蜕(속세신조태) 속세에 일찌감치 벗어난 뒤로,
歲寒且安歸(세한차안귀) 추운 겨울 오면 어디로 돌아가리.
浩浩雲濤闊(호호운도활) 구름과 바다물결 끝없이 펼쳐 있고
殘月海上窺(잔월해상규) 새벽달은 바다 위를 살피네.
春回山舊靑(춘회산구청) 돌아 온 봄, 산은 옛 같이 푸르니
不肖復爲悲(불초부위비) 다시는 슬퍼하지 않으리.
[주1] 둔덕기성(屯德岐城) : 거제지역 국가사적지정 제509호 문화재, 해발 326m 우봉산 자락에 위치, 신라시대부터 내려 온 성(城)으로 고려의종(약3년간)과 조선태조 때 고려 왕씨들의 유배지. 기성(岐城)은 거제의 별호.
[주2] 보현원(普賢院) :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 다음 ‘先’ 운목(韻目)의 칠언절구 「사군(思君)」은 거제시 고전학자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의 작품이다. 이 글은 2011년 10월에 지은 측기식 한시이다. 1170년 거제도에 유폐되어 있다가,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의종을 계림(鷄林, 경주)에 거처하게 했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의종은 이의민(李義旼)에게 살해되었다.
이 한시는 의종이 죽은 후, 밝은 달밤에 그가 거처했던 거제도에서 견내량을 바라보며 지었다. 그의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마음에 잠 못 이룬다는 내용을 묘사한 글이다. 이 시는 거제시 둔덕기성(屯德岐城)과 견내량, 그리고 오양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2) 「사군(思君)」 그대 그리워 / 고영화(高永和)
見乃梁雲看漠然(견내량운간막연) 견내량의 구름, 막연히 보이는데
逸韻忙情遠汀連(일운망정원정연) 빼어난 소리와 애타는 정이 멀리 물가로 이어지네.
送君鷄林不敢忘(송군계림불감망) 계림으로 보낸 그대, 차마 잊을 수가 없어
不眠深夜月孤懸(불면심야월고현)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외로운 달만 걸렸구나.
◉ 1550년대 거제시 고현동 유배객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유배작품 「우거즉사(寓居卽事)」에 의하면, “푸른 눈썹처럼 떠 있는 한 섬에서 4년간 거주하며 휘파람 불고 노래했다. 산하는 일본과 통하고 성곽(둔덕기성)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분수에 편히 하려고 함이 오늘뿐만 아니지만 실망하는 이 운명을 어찌하랴. 밝은 달은 동쪽 기둥에 기대고 돌아온 기러기 서쪽으로 가는 소리 들리네.(一島浮眉碧 四年住嘯歌 山河通日本 城郭自新羅 安分非今爾 向隅是命何 月明倚東柱 回鴈聽西過)”라며 둔덕기성이 신라 때부터 있었음을 언급하였다.
○ 참고로 의종은 정치보다 놀이를 좋아했다. 의종(毅宗)이 상림원(上林苑)에 놀이를 나가서 작약(芍藥)꽃을 구경하다가 시 한 편을 지었는데 모신 신하들 가운데서 이를 갱운(更韻)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문신 황보탁(皇甫倬)이 한 편의 시를 지어서 올렸는데, 왕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나중에 그는 궁궐 벼슬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 [거제시 둔덕기성(屯德岐城) 지역 역사기록] ① 거제군읍지(1899년), 기성유사(岐城遺事) [高麗毅宗爲鄭仲夫所廢處此出麗史] 고려 의종 정중부 난으로 폐처에 귀양 왔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②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卷之三十二) 거제현 고적지(巨濟縣 古蹟條), 屯德 岐城 在縣西三十七里 石築周一千尺 內有一池 世專 本朝初 高麗宗姓 來配之處 둔덕기성 고현성에서 서쪽 37리, 석축 둘레 1000 척, 성내 못 1개, 조선초기 1392년 고려 종성(왕씨들)이 유배 온 곳이라 전한다. ③ 《경상도여지집성》 거제군읍지 고적조(巨濟郡邑誌 古蹟條), 岐城 遺事 高麗 毅宗 爲 鄭仲夫 廢此出麗史 기성(거제) 유사(전하는 사적)에는 고려 의종이 정중부에 의해 이곳에 폐출되었다고 고려사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