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3. 기독학생회 춘천시연합회장 돼
1 그 뒤 모두의 강력한 추대에 의해서 중학교 3학년생으로 회장에 당선되고 고1 한 해를 다시 회장에 중임되고 고2 에 올라가선 기독학생회 강원도 연합회 총무가 되고, 그 뒤 곧 6.25사변이 일어나서 과거의 진행사(進行事)는 일단 끝난 것이 되고 말았다.
2 나는 일찍이 중2 때 강원도 교육 전람회에서 문학상을 수상하여 한때 친구 간에 ‘누가 광렬’로 통했고, 구제품 스프링코트를 하나 얻어서 무시로 입고 다니기 때문에 ‘사시사철 스프링코트’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었다.
3 1951년 봄,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 그때 아군이 멈춘 지점, 거기서부터 종군해서 만 1년 동안 그 신문이 없어질 때까지 진중 신문(일간) 편집을 혼자 해냈다. 그때 얼마나 글을 썼던지, 전에 신문기자 몇 해 한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문장 실습을 실컷 할 수 있었다.
4 문법 수사법 관계없이 한발씩 되게 줄글을 써도 문장상 중복감이 전혀 없을 만큼 짧은 기본형 문장에서(극단적으로 말하면) 한치도 어긋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군복 입고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용하게 합격이 되었다.
5 피난 수도 부산에 가서 대학 초년생 공부를 하였다. 수복 후 어떤 때는 학교 다니면서 출판사(민교사)에서 교정보고 ‘새교육’ 잡지 기자에, 숭실고등학교 강사로, 부직을 세 가지씩 가질 정도로 바쁜 나날의 고학생 생활, 그 지독한 고학생 생활이 줄곧 내 대학 4년간의 생활을 점철했던 것이다.
6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문선명 선생님은 부산 범일동 산등성이에 움막집을 짓고 강현실 전도사를 전도하고 이요한 목사를 전도하려는 그런 시기였다. 그때 나도 같은 범일동의 개바닥에서 매일 밤 부두 노동 아닌 부두의 책커(Checker : 하물의 숫자 점검원)를 하며 학교엘 다녔고 세계주의자로서의 고뇌에 밤마다 울었다.
7 해방 후부터 종군 때까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는데 부산에서의 대학 초기부터 어느새 나는 어쩔 수도 없는 세계주의자였다. ‘미치고 싶은 마음’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 학교에서 발표하는 등, 부허(浮虛) 타락된 부산 자유시장 등 후방의 생활 앞에서 채 미치지(狂) 못한 나 자신의 한 줌 체면을 침 뱉어주고 인간의 한계성을 인하여 크게 한탄하였다.
8 비 오는 밤, 바람치는 새벽이면 용두산 꼭대기 허술한 판자집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을 것만 같아 잠을 못 이루고 뜬눈으로 새웠다. 또 무시로 눈만 감으면 열길 스무 길 깎아지른 벼랑 밑에는 무서운 바다가 소용돌이치는데, 전세계 인류가 그 벼랑에 거꾸로 발끝으로 매달려 모두들 나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환상이 자꾸만 현실인 양 떠올랐다.
9 그때 세계는 꽉 막힌 듯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어디로도 인류의 나갈 길이 없는 것 같았다. 그만 앞이 혼미하여 역사의 출구(出口)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날마다 그런 가운데서 몸부림치는 것이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