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동(文同1018-1079)
북송 중기가 되면 왕안석과 사마광 으로 나뉜 신구파의 정치 파쟁이 심하였다. 지식층인 문인사대부는 정치적으로 불안해지자 문인취향적인 그림이 나타났다. 수묵화죽잡화(雜畵)로서 전통적인 화원화풍과는 다른 화풍이었다. 미점 산수화라는 묵희적 그림이 나타난 것과 시기적으로 같다. 수묵화죽화와 미점 산수는 서로 협력하여 중국화풍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이런 문인화 유파의 화가는 문동과 소식이 대표적이다ㅣ.
문동은 사천성 염정현 사람으로 자는 여가(與可)이고 호는석실선생(石室先生), 또 소소선생(笑笑先生)이다. 1049년에 진사가 되어 지방관과 중앙에서 여러 벼슬을 하였다. 문인화의 주창자인 소식의 외사촌 형이다. 소식과는 아주 가깝게 지냈으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반드시 그와 함께 한 것은 아니었다. 묵죽을 잘 그려서 이름을 날렸으며, 호주죽파(湖洲竹派)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여러 점의 묵죽도를 남겼다. 그는 묵으로 색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 대북 고궁 박물관 소장품이 제일 유명하다. 송대 문인들의 묵죽화의 전범이 되었다.
후세에 묵죽의 개조(開祖)로 추앙받는다.
<묵죽화> -- 구불구불 휘어진 대나무 가자 하나늘 그린 것으로 먹으로 색을 대신하였다. 마치 창호지에 비친 그림자 같다. 생동감이 있다. (畵史)에 의하면 먹을 검게 칠한 것은 정면이고, 약간 묽게 칠한 것은 배면을 표현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