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문구(021) - 제 1 서품 - 무념(無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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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龍恭敬 不以爲喜
천과 용이 공경할지라도 기뻐하지 아니하며,
수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념(無念)이다.
무슨 생각이 없는가?
망념이 없다.
망념이 없는 것은 생하지 않는[不生] 것이며,
멸하지 않는 [不滅] 것이다.
더럽지 않은[不垢] 것이며,
깨끗하지 않은[不爭] 것이다.
늘어나지 않는[不增] 것이며,
줄어들지 않는[不減] 것이다.
옳은 것이 아니며,
그른 것이 아니다.
선이 아니며,
악이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망념이 없어야 비로소 자성의 청정한 진여묘성(眞如妙性) 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무념이면 “나는 염이 없다.”고 말할수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나는 염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여전히 한 생각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무념이라면 “나는 생각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무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바로 그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이며 [降伏其心], 바로 마군의 무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념은 가장 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하늘과 용이 공경하는데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바로 무념이기 때 문이며, 인욕을 가지고 있고 생인(生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인은 남들이 당신을 공경하고 공양해도 교만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무념하다면 남이 때리고 욕하거나 혹은 훼방하고 파괴하려고 해도 참을수 있다.
불법을 배우는 여러분이 이 무념을 배우면 일체의 번뇌도 없을 것이며, 일체의 번뇌가 없으면 이것이 바로 깨달음[菩提]이다.
깨달음이 곧 번뇌이며, 번뇌도 곧 깨달음이다.
이것을 쓸 줄 알면 바로 깨달음이며, 쓸 줄 모르면 곧 번뇌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卽心卽佛],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본다[明心見性].”는 것은 결코 번뇌를 떠나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떠나 다른 번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번뇌가 보리이고 보리가 번뇌이며, 생사가 곧 열반이며 열반이 생사이다.
무념할 수 있으면 바로 열반이며, 유념이면 곧 생사이다.
그러므로 무념의 법문은 제일이며 가장 묘하다.
만약 일념도 생하지 않으면 전체가 드러난다.
그러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만약 무념의 정도에 이르지 못하면 생사를 마치지 못한다.
만약 무념의 경계에 도달하면, 귀신도 너희를 어지럽힐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하늘과 용이 공경해도 기뻐하지 않는다[天龍恭敬 不以爲喜]고 하는 것이다.
왜 기뻐하지 않는가?
깊은 선정에 들어가서 무념의 경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무념의 경계에 이르면, 일체의 모든 것은 반본환원(返本還原)하여 우리가 가진 본래면목, 즉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회복한다.
일체의 모든 것은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다.
바로 하늘과 용이 공경하는 것도 본래 있던 경계이니,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선화상인 <법화경강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