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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무림의 맹주
무심이 얼마나 열심히 혀를 놀려댔는지 차츰 사람들의 의심은 짙어만 갔다. 처음 몇몇 정도만이 홍칠을 의심하는 눈치였는데 이젠 거의가 그런 쪽으로 몰리는 형국이었다.
'아무래도 홍칠이가 이 무림대회를 소집한 이유에는 남모를 야심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무심의 이같은 생각은 집요하게 혀끝으로 옮겨졌다.
"난 네가 꿈을 꾸면 그 해몽까지 하는 사람이다. 네가 한 짓에 대해서도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처럼 훤히 알고 있지만 네 놈의 꿍꿍이속도 이미 알고 있다. 네 놈은 지금 겉으로는 우국지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어림도 없다. 천하의 영웅들을 속이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았더냐?"
"네이놈! 네 놈이 몽골족의 앞장이라는 사실은 어린 동자들도 아는 사실이다. 요사스런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힐 생각 말고 어서 꺼져 버려라! 이 무림대회를 망쳐 종국에는 금나라 오랑캐 놈들을 돕자는 짓이 아니겠느냐?"
홍칠도 무심의 음모를 파헤쳐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려 했다.
"금나라를 위해 무심 공자가 나서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 일이란 말이냐?"
말뚝에 매어 둔 소처럼 우둔하게 생겨먹은 챵바가 느닷없이 나섰다. 무심을 옹호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도움은커녕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만 제공한 셈이었다. 여기저기서 우와 하는 웃음 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챵바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자기 말에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챵바를 향해 홍칠이 꾸짖었다.
"네 이 놈! 세상엔 좋은 일은 많고 많은데 하필이면 금나라에 빌붙는단 말이냐? 그러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뭐라고?"
그러나 챵바는 우직스럽게 계속 홍칠에게 맞서 대들었다.
"흥, 무심 공자가 그랬어. 약자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강자의 노복이 되는 게 낫다고. 네 놈은 그런 진리도 모르느냐?"
다시 귀를 찢을 듯한 폭소가 터지자 챵바가 우쭐해져서 씨익 웃어 보였다. 왕중양은 챵바의 어리석음에 슬쩍 미소지었다.
이 순간 사람들의 박장대소 사이로 웬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아장아장대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더니 곧장 단 위로 뛰어올랐다. 난쟁이였다. 그러나 사장는 아니었다. 그는 모용세가의 공자이자 왕중양과 의형제를 맺은 둘째 모용준이었다. 키가 하도 작아 단 위에 올라섰지만 그게 그거였다. 사람들은 난데없이 모용준이 모습을 보이자 모두들 숙연해졌다. 아마도 강남 모용세가의 명성에 기가 꺾인 것 같았다. 모용준은 비록 난쟁이였지만 위엄 가득한
자세는 잃지 않았다.
"나 강남의 모용준은 개방의 홍칠공이 사내대장부란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이다. 오늘 와서 보니 그 말이 과연 틀리지 않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소. 우리는 이제껏 대송의 자(子民)으로 대대를 이어오며 임금이 하사하는 녹(祿)을 먹고 또 그 임금을 섬겨왔소. 그러니 홍칠공의 말씀은 너무도 지당한 게 아니겠는지요? 금나라의 앞잡이가 되는 것은 곧 배신행위와 다를 바 없소!"
그러자 호걸들이 서서히 입을 모아 모용준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무심이 모용준이라고 그냥 뇌둘 리 없었다.
"네 놈은 또 누구인데 나서는 거냐? 난쟁이 주제에 주둥이로 짹짹거리는 꼴이 꼭 참새 같구나. 헤헤헤!"
여지없이 한방 먹은 모용준이 인상을 구겼다. 더군다나 평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난쟁이란 말에 심기가 여간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네 놈의 버르장머리가 하늘을 찌를 듯하구나!"
모용준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위엄을 보이자 무심이 더욱 호기를 부려댔다.
"네 놈이야말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난쟁이로구나!"
모용준은 임조영이 서 있는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임조영이 있는 자리라 더욱 무심을 내쳐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또한 모용세가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무심을 꼭 주저앉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앗!"
곧 모용준이 작은 키가 무색할 정도로 높이 치솟으며 무심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그의 주먹은 산맥이라도 허물어뜨릴 만한 기를 발산했다. 용케 그의 주먹을 피하긴 했지만 자기 눈앞으로 강하게 스쳐가는 돌풍을 본 무심은 속으로 몹시 떨었다. 그 주먹에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오장육부가 온전하지 못할 듯싶었다. 무심이 황금부채를 꺼내들며 다시 몰아쳐 오는 모용준의 주먹을 막아냈다.
"꼭 뱁새가 황새 걸음을 따라오는 것 같구나!"
무심이 속으로는 겁을 내면서도 입으로는 연신 모용준의 속을 긁어대는 말을 쏟아놓았다. 잠시 열에 바쳐 주춤하는 사이 무심의 무채가 모용준의 앞가슴을 향해 들어왔다. 모용준의 가슴에 있는 대혈을 노린 것이었다. 비스듬히 몸을 돌린 모용준이 무심의 공격을 피하며 재빨리 그의 사혈(死穴)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심의 부채가 모용준의 손목에 탁 걸렸다. 이들은 계속 번갈아 공격을 주고받으며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이어 나갔다.
"너희 연나라는 망한 지 이미 오래인데 왜 이리 서두르는가? 이렇게 네 놈이 서두른다고 사라진 연나라가 다시 세워지기라도 하느냐?"
서로 주먹을 교차하면서도 무심의 입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나불거렸다.
이제 사람들은 무심의 말에 솔깃해졌던 심리에 변화를 일으켰다. 어디선가 무심을 죽이라는 선창이 들려오자 곳곳에서 뒤를 따르는 외침이 터졌다. 불현 위기를 직감했는지 무심은 얼른 또 다른 꿍꿍이속을 드러냈다.
"이 난쟁이놈아. 그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아라. 저게 누군인지를!"
무심이 손가락을 펴 자기 귀 뒤를 가리켰다. 곧 모용준의 눈꼬리가 묘하게 변해갔다. 왕중양이 막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사태를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나서려던 참이었다.
"둘째, 날세."
모용준은 놀랍고도 반가웠다.
"형님! 정말 형님이 맞소? 형님, 정말 반갑습니다. 저기…… 셋째도 와 있답니다. 헌데 형님은……."
"왕중양,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겠지?"
무심이 야비한 눈빛을 번뜩이며 위협조로 말했다. 그의 생각에 더 이상 말이 길어지면 일이 복잡하게 될 거라 계산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유일민을 미끼로 삼아 놓은 판국이라 자신만만했다.
왕중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일민을 확인했다. 챵바가 그녀를 움켜쥐고는 이쪽을 향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무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그녀의 목숨은 날아가리라.
"형님, 저 무심이란 놈은 악한 중의 악한이요. 제가 당장 박살을 낼 테니 잠시 물러서 계시지요."
왕중양은 선뜻 모용준의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임조영은 왜 왕중양의 태도가 불분명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중양이 다시 유일민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임조영이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깜짝 놀랐다.
"당신은 누구요?"
챵바는 세상에 자신을 몰라보고 예의 없게 구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투로 젊은 사내에게 계속 투덜댔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난 몽골에서 으뜸가는 장사 챵바다!"
그러자 젊은 사내가 흐흐흐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난 중원에서 으뜸가는 장사 주백통이라 하오. 모두들 날 실없는 사람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아무튼 날 모르겠소?"
챵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기 가슴을 턱턱 주먹으로 쳤다.
"모른다. 네 놈이 중원에서 으뜸가는 장사? 우하하하!"
"허, 이거 헛소리가 아닌데. 그래 네 눈에는 내가 그리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주백통 노완동이 또 흐흐 웃어대자 챵바가 더욱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실없이 웃기만 하는 장사도 있단 말인가. 챵바의 생각에는 그저 허우대만 멀쩡한 실성한 놈으로밖에는 비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웃기는군. 너 역시 으뜸가는 장사라면서 무슨 꼬라지가 그래?"
이렇게 노완동과 챵바가 한창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무심의 고함이 끼여들었다.
"챵바, 지금 거기서 뭣하는 거야?"
불에 데인 사람처럼 흠칫 정신을 차린 챵바가 노완동 면상에 대고 떠벌렸다.
"어쿠, 무심이 날 부르네. 난 너하고 말씨름한 겨를이 없어."
챵바가 잠시 느슨하게 풀어놓고 있던 유일민의 몸을 꽉 틀어쥐었다. 잠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왕중양에게 무심이 전음입밀법(傳音入密法)이란 초수를 이용해 그의 귀에만 들리게 뇌까렸다..
"왕중양, 네가 저 모용준을 꺼꾸러뜨리지 않으면 재미없다. 허나 반대로 저 난쟁이의 짧은 다리를 시작으로 작신작신 사지를 찢어 놓는다면 약속은 지킨다. 어쩌겠는가?"
왕중양의 시선은 또 다시 유일민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안타까운 몸짓을 해대며 왕중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형편이라 표정만 간절하게 그리고 있었다. 무심이 그녀의 아혈(啞穴)을 또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무심의 비열하기 짝이 없는 언동은 모용준에게로 옮아 갔다.
"그댄 아직도 왕중양을 큰형님으로 믿고 있겠지? 중원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대협으로 삼고 있을 테지? 허나 아무리 유명한 대협 왕중양도 지금은 우리 금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고 있지."
"뭐라고!"
모용준이 어깨를 들썩이며 곧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왕중양도 인내에 한계를 느꼈는지 드디어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허튼소리! 네가 금나라 개 노릇을 한다고 중원 무림이 모두 개 노릇에 동참할 것 같으냐?"
왕중양의 노여움에도 괘념치 않은 듯 무심은 말을 잘근잘근 씹어 뱉었다.
"왕중양, 말이란 무릇 앞뒤를 잘 재어 보고 해야 하는 법인데……."
왕중양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았다. 유일민의 존재를 일깨우려는 수작이었다. 보지 않아도 유일민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두 볼 위로 흐르는 눈물과 애처롭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어린 소녀의 눈망울……. 왕중양의 가슴은 쓰리고 아팠다. 그는 좀더 시간을 갖고 무심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예상하지 않았던 빈틈이 노출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무심은 왕중양이 자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듯싶자 비겁하고 야비한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챵바에게 남모를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자 챵바가 유일민의 등에 칼을 꽂아 버렸 다.
"악!"
그녀의 비명 소리가 넓은 영주 벌판 위로 울려 퍼졌다. 그녀의 눈물로 얼룩진 눈과 마주친 왕중양은 차마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천하의 못된 놈 같으니라고! 네 놈이 그러고도 몽골에서 알아준다는 장사더냐? 어린아이의 등짝에 비수를 꽂는 네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노완동이 격분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챵바 앞까지 걸어와서는 슬쩍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챵바는 이자가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얼굴을 노완동에게로 숙 내밀었다. 그 순간 그가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어이쿠!"
어느새 노완동의 주먹이 그의 인중에 정확히 꽂혔던 것이다. 무당산(武當山) 정종권법(正宗拳法)이었다. 사람들은 혹시 이 노완동이 쓰는 권법으로 보아 무당산의 제자가 아닌가 했다. 큰 몸집에 어울리게 어기적거리며 일어선 챵바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네 놈은 원래 무당산파였구나?"
그러자 노완동이 입술 사이로 실실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흐흐, 무당산파? 그럼 이건 무슨 파인지 봐라?"
노완동의 주먹이 다시 챵바의 입 언저리에 박혔다.
"웁!"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이번엔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대단한 충격에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입 주변을 더듬던 챵바가 이마에 주름을 그으며 확인하듯 말했다.
"화산파?"
"그래? 그럼 이것은? 봐! 봐! 봐!"
노완동이 똑같은 소리를 세 번이나 내지르며 그에 맞게 연거푸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세 번 모두 다른 권법이었다. 차례대로 공동산(控동山) 칠상권(七傷拳) 중의 하나인 호낙평양(虎落平陽)과 회양문(淮陽門) 권법의 하나인 백문출입(백門出入) 그리고 산서 연씨네 필법(筆法)이 변한 쌍룡희주(雙龍嬉주)라는 권법이었다. 챵바는 계속 노완동이 뻗는 주먹에 코잔등과 두터운 입술을 내맡기고는 신통하게도 모두 알아맞추었다.
"그럼 넌…… 공동산파? 아니 회양문 권법을 쓰니까……, 어, 연씨네 권법도 있네? 아니, 그럼 도대체 어느 문파의 놈이냐?"
얼이 빠진 챵바가 횡설수설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 그럼, 알려줄테니 똑똑히 보라구."
회심의 미소를 잠깐 내비친 노완동이 힘을 다해 일격을 날렸다. 이번엔 챵바의 가슴팍을 겨냥한 결정타였다. 쿵 하는 바위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챵바의 입에서 선혈이 울컥 토해졌다. 실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챵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일찍이 사부가 무심의 말만을 믿고 따르라는 분부를 하자 지금껏 목숨을 걸고 지켜 왔던 것이다. 유일민에게 비수를 꽂은 것도 따지고 보면 무심의 눈짓을 읽고 그대로 행한 것뿐이었다. 그는 어떤 의미로 본다면 몸만 있을 뿐 머
리는 무심의 것을 쓰고 있는 기이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유일민의 등짝에 비수를 꽂아 넣을 때도 그는 죽지 않게 신중히 손을 쓰라는 무심이 사전에 당부한 말을 되새겼었다. 생각 같아서는 단칼에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끝내 사리판단을 할 수 없는 머리를 가졌기에 무심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련하기로 이미 사람들에게 확인된 그였지만 가슴에 내리꽂힌 노완동의 주먹에 그냥 쓰러질 약골은 아니었다.
"이 놈아!"
성난 황소가 뿔을 앞세우고 달려들 듯 노완동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쇠방망이를 쥐고 흔드는 것처럼 그의 주먹은 보기만 해도 묵직하고 힘이 넘쳐났. 곧 노완동과 엉겨붙은 챵바는 죽기 살기로 발버둥을 쳐댔다.
이 틈을 이용해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등에 칼침을 맞고 쓰러졌던 유일민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조심조심 중심을 잡으며 몇 걸음 옮겼다.
"꼼짝 마라!"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났는지 공교롭게도 불쑥 귀낭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잽싸게 다가오더니 유일민의 막혔던 아혈을 열어 놓았다. 그리곤 왕중양을 불렀다.
"왕 공자, 여기를 보시오. 이 아이가 할말이 있다고 하오."
왕중양이 고개를 돌리자 유일민이 왈칵 참았던 눈물을 다시금 쏟았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왕 공자님, 어떡하면 좋아요. 왕 공자님이 금나라를 위해 충성하지 않으면 나를 죽인다고 해요. 그러나……."
유일민은 아픔을 참아 가며 한마디 한마디 어렵게 이어 갔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지금 자기 등뒤에는 귀낭자의 손이 버티고 있는 형편이었다. 조금만 어긋나게 입을 놀리면 끝장이라고 협박을 받은 유일민은 그러나 자신이 사랑했던 왕중양이 비열한 짓을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왕 공자님, 저는 당신과 함께 한평생을 보내려고 했지요. 하지만…… 흑,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윽!"
순간 유일민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는 입으로 피를 내뿜었다. 그녀는 이들의 말을 듣지 말고 대장부의 기개를 펼치라는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귀낭자가 이미 알아차렸는지 장을 날려 유일민의 등을 부셔 버렸다.
"이 더러운 놈들아! 어린아이에게 그게 어디 할짓이더냐?"
싸움을 멈춘 노완동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온 사방에 대고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괜히 그 앞에 있던 챵바가 얼떨결에 대꾸를 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난 그저 무심 공자가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고."
범상하지 않은 기운을 담은 사람들의 눈길이 하나 둘 무심을 향해 날아갔다. 무심도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고는 자기 가슴을 텅텅 치며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그래, 모두 내가 한 일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그러면서 귀낭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유일민을 아예 죽여 버리라는 신호였다. 무심의 의도를 읽은 귀낭자가 유일민의 등에 손을 얹으며 왕중양을 쳐다보았다.
"왕 공자님, 이 아이의 최후를 보시겠어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왕중양이 화가 나서 고함을 내질렀지만 귀낭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 공자님, 이 아이나 저나 여인이긴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이 애가 갖고 있는 건 나 역시 빠짐없이 지니고 있다구요. 내가 이 아이를 대신하면 안될까요?"
싱글싱글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이죽거리던 귀낭자가 갑자기 유일민의 등을 향해 장을 날렸다. 유일민이 욱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모두들 잘 보았겠지? 금나라와 맞서는 자는 모두 저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무심은 저 혼자 마구 지껄이더니 곧 몸을 솟구쳤다. 그는 메뚜기가 뛰어오르듯 통통 튀며 제법 멀리 날아갔다. 무심이 달아난 것을 깨달은 챵바가 또 사부의 말이 떠올라 다급히 무심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와 같이 가야지!"
챵바가 우왁스런 몸짓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무심의 뒤를 쫓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미 사람들은 무심의 행동에 격분해 있던 터라 남아 있는 챵바를 짓밟으려 했다.
"이것들이!"
챵바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미련하긴 하지만 그의 힘은 대단했다. 그가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을 하자 호걸들 몇몇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뒤로 날아갔다. 겨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챵바는 무심의 뒤를 쫓아 재빨리 달아났다. 거의 동시에 쓰러진 유일민의 몸을 타넘은 귀낭자가 무리를 벗어났다.
모두들 귀낭자가 도망치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렇지만 귀낭자는 곧 멈칫 설 수밖에 없었다. 귀낭자 앞으로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자가 터억 막아선 것이다. 모용준이었다.
"듣자하니 귀낭자는 손만 쓰면 독이라는데 어디 구경 한 번 해볼까?"
모용준의 빈정거림에 귀낭자는 오히려 실눈을 떠 가며 간사스런 웃음을 내보였다.
"호호호, 제가 알고 있기로는 강남에서 여인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분이라 하더군요. 침대 위에서의 기교도 대단하시다던데 저는 어떤지요?"
"그대가 있기에 무심이 더 포악스럽게 날뛴다는 것을 모르는가?"
귀낭자가 미처 대꾸를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에 모용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모용준으로서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그녀가 독을 쓰기 전에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불행히도 모용준의 첫번째 공격은 빗나갔다. 귀낭자와의 거리가 좀 있었기에 몸을 피할 틈을 준 셈이었다.
"어머, 정말 저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실 건가요?"
귀낭자는 계속 아양을 떨어대며 모용준에게 연막을 치려 했다. 모용준은 대답해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먹을 연거푸 귀낭자의 면상을 향해 퍼부었다. 귀낭자는 요리조리 몸을 날리며 주먹을 피하기만 했다.
이때서야 한쪽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었다. 그들은 적당하게 공간을 만들어준 형태로 두 사람을 에워쌌다. 이들은 모용준의 동작보다는 귀낭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눈길을 모았는데 이유는 그녀의 독 때문이었다. 언제 그녀가 독을 쏠지 모르는 일이었다. ㅁ약에 모용준이 그녀의 독을 피하고 엉뚱하게 구경을 하던 사람들에게 날아든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공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귀낭자가 모용준의 주먹 피해 살짝 주저앉았다 일어서며 입을 놀려댔다.
"씨끄럽다!"
"들으셔야 해요. 왜냐하면 흥미롭게도 공자님 집안에 대한 일이기 때문이죠."
귀낭자가 잠시 가느다란 눈으로 묘용준의 반응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제가 어디를 갔었는데 글쎄 그곳에 그럴듯한 궁전이 하나 있지 뭐예요."
모용준의 안색이 창백하게 돌변했다. 이런 모용준의 태도를 확인한 그녀가 더욱 여유 있는 어투로 계속 나불거리려 했다.
"또 혀를 놀렸다가는 아예 잘라 버리겠다!"
하며 모용준이 귀낭자를 덮쳤다.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모용준의 양팔 사이로 빠져나가며 비아냥거렸다.
"난쟁이의 장점은 몸이 빠르다는 거지. 호호호, 아무튼 조만간 다시 만날 일이 있을 테니까 오늘은 이만. 호호홋!"
간드러진 웃음을 남긴 귀낭자 역시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왕중양에게 안겨 있는 유일민은 이미 소생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심맥은 겨우 뛰는 듯 위태롭게 들려 왔고 얼굴에는 핏기가 거의 가신 뒤였다. 유일민의 눈을 들여다본 왕중양은 곧 유일민이 죽을 거란 예감에 안타까웠다. 그녀의 입술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무슨 소리를 내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지?"
왕중양이 그녀의 입에 귀를 바싹 대고 물었으나 그뿐이었다. 왕중양을 향하고 있는 유일민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을 잠시 둘러보더니 이내 왕중양에게로 고정시켰다. 겨우겨우 안간힘을 쓰며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왕중양이 얼른 귀를 더욱 바싹 갖다 댔다. 그녀가 입술 사이로 어렵게 몇 마디의 말을 흘렸다.
"난…… 난 죽어도 당신의…… 당신의 사람……."
유일민은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 그녀의 고통을 바라보던 왕중양은 차라리 고통 없이 어서 눈을 감게 해달라고 간절히 속으로 빌었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유일민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끝맺지를 못했다. 그녀의 입 주변은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왕중양에게 임조영에 대한 비밀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 속을 맴돌 뿐 입 밖에 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옆에 서 있던 임조영의 가슴 역시 유일민의 고통을 옮겨 받은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임조영은 한편으로는 왕중양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소식을 기다리던 왕중양이었는데 막상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말 한마디 건넬 수 없는 입장 또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유일민이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반벽강산…… 반벽강산…… 인생은 고되고 짧…… 아……."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시는 유일민의 그 작고 동그스름한 입술은 열리지를 않았다.
왕중양의 가슴으로 참았던 슬픔이 가득 북받쳤다. 슬픔이 극에 도달해서 그런지 눈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싸늘해져 식어 가는 유일민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늘 애틋한 마음을 전하려고 애쓰던 유일민이었다. 어린 소녀였지만 그 마음은 아름다웠었다. 그러나 차마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던 자신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일단 방해하는 무리들도 사라졌고 유일민의 시체도 수습한 사람들은 다시 대사를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단 위로 오른 사람은 왕중양이었다. 그는 더 한층 비분강개해진 태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하나가 되자고 역설했다.
"금나라 오랑캐들이 우리 중원을 침범하여 창생들을 도탄에 밀어넣고 있는데 대송의 자민으로서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소이까?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칩시다!"
"왕 공자의 말이 옳소!"
"백번 천번 지당한 말이요!"
왕중양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곧 와와 하는 함성으로 무림대회의 꽃을 피우려고 할 때였다.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일제히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금나라 기병들이 뿌우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역적 놈들을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무리의 맨 앞에서 달리고 있던 한 사내가 이렇게 외치자 곧 넓은 대열로 벌어졌다. 그러더니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좁혀 왔다.
"개방의 형제들이여! 어서 저 놈들을 막아냅시다!"
홍칠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개방 사람들은 저마다 타구봉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개방 사람들이 움직이자 금나라 기병 쪽에서 다급한 명령이 떨어졌다.
"활을 쏘아랏!"
핑 핑 핑…… 빗발치듯 화살이 개방 사람들을 향해 쏟아졌다.
"욱!"
"악!"
화살에 벌써 개방 사람 몇몇이 고꾸라졌다.
"개방의 형제들이여! 저 금나라 오랑캐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 중원 사람들은 끝장이다. 우리는 싸우다 죽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개방의 장로인 노옥기(魯玉基)가 사람들을 향해 다짐했다. 이 노옥기가 선두에 서서 돌진해나가자 개방 사람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타구봉을 휘둘러댔다. 와아 하는 함성이 영주 벌판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시 장대비 같은 수많은 화살들이 쏟아졌다. 개방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섭게 돌진했다. 그러나 그만 선봉에 서서 타구봉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던 노옥기가 허리를 반으로 꺾었다. 뒤에서 그를 따르던 개방 사람들이 얼른 쓰러진 노옥기를 뒤쪽으로 옮겨 놓았다. 화살은 정확히 그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군가 다가와 화살을 뽑으려 하는데 홍칠이 막았다.
"화살을 뽑는 즉시 장로는 죽게 돼!"
노 장로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홍칠을 찾았다.
"방주님, 저 개만도 못한 금나라 놈들에게 절대로 굴복해선 안 되오."
"염려마시오. 우린 하나가 남고 그 하나가 목숨을 다하는 순간까지 싸울 것이오."
홍칠이 새롭게 의지를 다지자 개방 사람들이 하나로 입을 모았다.
"우리들도 최후의 하나가 될 때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습니다!"
노 장로가 손을 허공으로 내저으며 사그라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홍칠골, 내 아들에게…… 내 아들에게 금나라 놈들과 싸우다 죽었으니 꼭 원수를……."
노 장로는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노 장로가 말한 아들이란 개방의 사대 제자인 노유각(魯有脚)을 말한 것이다.
홍칠은 벌개진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끈 쥐어진 그의 주먹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기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개방 사람들은 계속 화살에 하나 둘 넘어갔다. 금나라 기병들은 조금 거리를 둔 상태로 화살만 퍼부어 대고 있었기에 개방 쪽이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왕중양 앞으로 온 모용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큰형님!"
왕중양도 모용준의 목소리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를 절감했다. 굳게 다문 입을 약간 움찔거리던 왕중양이 화살에 쓰러져 가는 개방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래, 저 금나라 오랑캐들을 어떻게 쳐없앨 수 있겠는가?"
모용준이 격분한 가슴을 주체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장수로 보이는 놈을 먼저 쳐야 나머지들이 물러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보다 앞서 누군가 금나라 기병들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게 아닌가. "야앗!"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느새 공중으로 튀어오른 한 물체가 쉬지 않고 회전을 하며 그쪽으로 날아갔다.
"나를 막는 놈들부터 목을 따줄 것이다!"
드높은 공중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대단한 내공이었다. 그 물체가 바닥으로 막 내려앉을 때였다.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다시 치솟은 그는 가까이 있던 금군 중 한 놈의 머리를 단칼에 날렸다. 놈의 머리는 바위처럼 데굴데굴 굴러 저 멀리 달아났다. 그가 비로소 땅에 사뿐히 내려앉자 왕중양의 눈빛이 빛났다. 얼굴을 가린 여협이었다. 반벽산장에서 만난 무공이 뛰어난 복면의 여인, 그러나 왕중양은 그 이상은 알지를 못했다. 왕중양은 여협의 무공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놀라움에 넋을 놓고 있던 금나라 장수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활을 더 쏴라! 어서!"
이번엔 복면을 한 여협, 즉 임조영에게로 화살이 쏟아졌다. 임조영이 얼른 몸을 피하긴 했지만 차츰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화살과 창을 피하기 위해 공중으로 뛰어오른 임조영은 곧 지쳤다. 그녀는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자 검으로 자신을 겨우 가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또 한차례 하늘을 덮을 듯한 화살들이 임조영에게로 발사되었다. 그녀는 검을 회전시키며 화살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그중 화살이
한 개가 득달같이 날아와 다리에 푹 박혔다. 그녀가 한쪽으로 막 쓰러지려고 할 때였다.
"간다!"
왕중양이 뛰어들었다. 그가 쓰는 경공은 실로 놀라운 경지에 이른 절기였다. 이미 그는 선천신공에 익숙해진 몸이라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공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그는 임조영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고는 즉시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하지만 왕중양이 향하고 있는 곳은 금군의 장수 막아발(莫兒勃)이 있는 쪽이었다.
막아발은 중원 무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극도로 거만한 작자였다. 그는 엉뚱하게도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왕중양을 보자 깜짝 놀랐다. 다급해진 그가 부하들에게 화살로 방어하라는 말을 외치려는데 번쩍하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치듯 엄청난 기운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으로 내리꽂히는 게 아닌가. 그 괴력이 떨어진 곳을 보니 한 길은 족히 파여 있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요행히 비껴 갔기에 망정이지 머리에 맞았더라면 살아 남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사지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뒤늦게 그는 왕중양이 내뿜은 장력이란 사실을 깨닫고는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정신을 못 차렸다. 그는 주위를 얼른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기 앞으로 날아오던 왕중양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어서 활을 가져와랏!"
곧 곁에 있던 친병(親兵)이 무지막지하게 생긴 활을 대령했다. 이 활은 대여섯의 장성들이 힘을 모아 당겨도 끄덕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대단한 활이었다. 활을 건네 받은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왕중양을 찾았다. 왕중양은 엉뚱하게도 벌써 반대쪽에 내려 유유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왕중양 곁에는 다리에 화살이 박힌 채로 비스듬히 엎드려 있는 임조영도 보였다.
"네이놈! 어디 이 살에 저승 구경이나 하거라!"
활에 걸린 화살 역시 보통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겨냥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로 서둘러 그 화살을 날렸다. 이 막아발의 활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있는 실력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도 날아가는 매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금군의 신궁수(神弓手)였다.
모두들 화살이 날아가는 쪽을 주시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막 왕중양의 가슴에 꽂힐 찰나였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왕중양은 화살촉이 가슴에 박히려는 순간 가볍게 한 손으로 툭 내쳤다. 더욱 놀라운 일은 방향을 튼 그 화살이 왕중양의 무공에 감탄해 입을 벌리고 서 있던 한 금나라 군사의 입 속에 박힌 것이다. 놈은 졸지에 당한 일이라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자신의 화살이 헛물만 켜자 대노한 막아발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가 너를 맞히지 못하면 네 놈의 아들이다!"
다시 화살을 뽑아든 그가 시위에 천천히 올려 놓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살기에 젖어 이글이글 불길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니!"
그 불길이 일순 사그라들었다. 눈앞에 버티고 서있던 왕중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화살에 맞아 고통을 참고 있는 임조영만 있을 뿐 왕중양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리둥절해진 막아발이 막 고개를 들려는데 다시 청천벽력같은 굉장한 소리가 귀청을 뚫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그의 왼쪽 어깨를 스쳐 땅에 꽂히긴 했지만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막아발은 그 충격으로 저도 모르게 방향 없이 시위를 놓았다. 피웅 하며 화살이 하늘 높이 솟았다. 하지만 구름에 닿을 듯 치솟은 왕중양이 내려오면서 검으로 그 화살을 반으로 보기좋게 반으로 갈랐다. 촉이 달려 있는 쪽은 땅에 떨어져 깊숙히 박혔고, 다른 한 쪽은 어디론가 까마득히 날아가 찾을 길이 없었다.
이윽고 땅에 소리 없이 내려앉은 왕중양이 검으로 닥치는 대로 금군의 머리를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금군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떨어져 굴렀다. 왕중양의 검은 보이지 않았고, 휙 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만 들려 왔다. 그때마다 영락없이 금군의 머리가 떨어져나갔다. 금군들은 곧 전의를 잃고는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말을 타고 있던 기병들과 그 뒤를 따르던 군사들 할 것 없이 우왕좌왕하며 제 살길을 찾기에 바빴다.
때를 기다려 홍칠이 소리쳤다.
"추격이다! 저놈들의 목을 남김없이 쳐라!"
금군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있던 무림 호걸들은 신명이 나 앞으로 돌진해갔다. 이들은 각기 손에 들고 있던 병장기를 휘둘러 금군의 목을 잘랐다. 대열에서 물러나 있던 막아발이 눈을 부라리며 왕중양을 향해 비황대우(飛惶大羽)를 한 발 쏘았다. 왕중양은 무려 여섯 명의 금군을 상대로 도륙에 정신이 팔려 있어 미처 그 화살을 발견하지 못했다. 화살은 왕중양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얏!"
비황대우 화살은 왕중양의 몸에 닿기 직전에 툭 힘없이 떨어졌다. 다리에 박힌 화살을 뽑고 번개같이 달려온 임조영이 막아낸 것이다.
"고맙소!"
왕중양의 말에 사실 임조영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가 못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그런 것이었지만 생면부지의 남에게 감사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막아발은 매번 쏜 화살이 허탕을 치자 고삐를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말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를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기이한 일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던 막아발의 눈이 휘둥그러졌다. 체구가 우람한 한 사내가 말꼬리를 잡고 용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한 막아발은 약이 올라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꼼짝을 하지 않았다.
"내빼긴 어딜 내빼려고 그래?"
노완동이었다. 더욱 애가 탄 막아발이 힘껏 말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히히힝! 말이 별안간 앞발을 들더니 발버둥을 쳤다. 말은 뒷발이 땅에 박혀 있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막아발의 눈이 더욱 튀어나올듯 커지고 만 것은 이때였다. 자세히 보니 말 뒷다리에 예리한 비수가 꽂혀 있는 게 아닌가. 말은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버둥거렸던 것이다. 노완동이 잡고 있는 말꼬리는 말에게 더욱 고통을 주려는 속셈이었다.
"이 치사한 놈아! 그래 내 말에 칼을 꼽고도 무사할 것 같더냐?"
막아발이 악에 바쳐 낭아봉(狼牙棒)을 노완동의 머리를 향해 내리치려고 높이 쳐들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노완동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낭아봉이 노완동의 정수리에 내리꽂히기 직전이었다. 임조영에게 한 번 도움을 받은 왕중양이 똑같이 몸을 던져 이번엔 노완동을 구했다. ㅉ 굉음을 내며 막아발의 낭아봉이 왕중양의 검에 걸렸다. 자기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놀란 노완동이 엉겹결에 잡고 있던 말꼬리를 놓쳤다. 그러자
말이 사납게 날뛰며 사정없이 발길질을 했다. 히히잉! 히잉!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말이 방향 없이 날뛰자 타고 있던 막아발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어, 어!"
막아발은 한동안 미친 듯 날 뛰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허공으로 한차례 솟구치더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 품속에 있던 비수를 꺼내든 노완동이 그를 향해 비수를 던졌다. 비수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휘젓던 막아발의 명치에 그대로 박혔다.
"으……."
막아발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러자 기세가 꺾인 금군은 서둘러 후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전사자만을 남기고 멀리 물러가는 금군을 바라보던 홍칠이 입을 열었다.
"왕 공자님, 왕 공자님의 무공은 천하의 으뜸입니다. 우리 중원이 금나라를 막아내는 일에 공자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나 왕중양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손을 저었다.
"아니요. 그런 말 마십시오. 나는 덕도 없고 능력 또한 부족하여 그런 대사를 이끌 수가 없소이다. 제 생각으로는 개방에서 영도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곁에 몰려있던 사람들은 웅성웅성 저마다 풀리지 않는 의구심으로 한마디씩 걸고 넘어졌다. 이들은 아직 무심이 남기고 간 말 때문에 홍칠에 대한 의문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가뜩이나 세력이 비대해진 개방이 주도를 한다면 천하 제일의 무리가 될 것 같아 미심쩍은 태도를 비쳤다.
그중 한 사내가 왕중양을 향해 정중히 권고했다.
"금나라 오랑캐를 물리치는 공자님을 보면서 저희 결심했소이다. 두말 마시고 맹주가 되어 오랑캐 무리를 전멸하는데 앞장을 서 주시오!"
그러자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왕중양이 맹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홍칠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전음입밀공을 써 왕중양에게 전했다.
"왕 공자님이 사양하신다면 이번 대회는 무산돼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중원 사람들 뿐만 아니라 조상에 대한 죄를 짓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왕중양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과연 그럴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가 망설여졌다. 왕중양도 홍칠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허나 과연 내가 중원 무림의 맹주가 될 자격이 있겠소이까?"
"우리 36만의 개방이 왕 공자님의 뒤를 받치고 있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소? 그리고 공자님의 무공을 크게 떨치지 않고 그대로 썩힐 생각입니까?"
왕중양이 한동안 두 눈을 지긋이 감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는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대의를 생각한다면 기꺼이 맹주가 되어 오랑캐 무리를 쳐부수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왕중양이 이윽고 눈을 떴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왕중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좋소!"
비로소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옆에 있던 홍칠도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중양이 우리 천하 무림의 맹주이다! 왕중양을 옹호하자!"
한 사내가 외치자 모두들 한뜻으로 왕중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왕중양은 이들과 삼혈지맹(三血之盟)을 맺고 다 함께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향해 맹세를 했다.
"왕중양을 비롯한 중원의 모든 사람들은 중원의 금수강산이 금나라의 마수에 하루하루 썩어 들어가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금일 영주 들판에서 이 맹세를 하나이다. 우리는 종남산 사람 왕중양을 맹주로 삼고 일심으로 금나라 오랑캐를 쳐 물리치며 우리 대송 강산을 지키고 수복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늘은 가차없이 천벌을 내려 엄히 다스려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나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지는 환성을 내질렀다.
차츰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는 왕중양이 단 위로 뛰어올라 손을 들었다.
"우리 금수강산이 금나라에 유린당하고 있는 이때, 나 왕중양은 이제부터 여러분과 더불어 한 뜻으로 금나라 오랑캐를 쳐없애겠소이다. 만약 오랑캐들을 치지 못하면 나 왕중양은 스스로 활사인 묘에 들어가 영원히 빛을 보지 않겠소이다!"
이같은 왕중양의 결의에 찬 외침에 사람들은 모두 격정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러나 임조영은 왕중양의 결심에 긴 한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이미 금나라가 대송의 심장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독을 내리고 있는 처지인데 과연 이 무리를 이끌고 대의를 성사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은……!"
왕중양의 안색이 묘하게 변해 갔다. 우연히 임조영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살에 맞고 또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날리는 가운데 임조영을 감추고 있던 면사포가 벗겨 버렸던 것이다. 임조영 역시 경황이 없어서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저 여협이…… 나의 셋째 동생이란 말인가!'
왕중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굳은 상태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