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여행지 어디 없을까?'
직장동료나 친구들은 가끔씩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내가 여행을 많이 다니기 때문에 내 입에서 신선한 장소라도 나오길 기대하지만, 사실 나라고 뾰족한 수는 없다. 여행이 대중화되면서 하늘 아래 더이상 새로운 곳은 없어졌고, SNS속에는 멋진 여행지가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천천히 들여다볼 수록 좋아지는 여행지는 어때?'라고.
평범하지만 볼수록 정이 드는 여행지가 있다. 익숙하지만 은은한 멋이 있다. 충남 예산이다.
예산은 수도권에서는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토요일 일찍부터 서두른다면 하루에도 충분히 여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차분히 봐야할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많아 하룻쯤 머문다면 더없이 좋다.
수덕사&덕숭산
수덕사는 예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백제 말에 창건됐으니 족히 1,500년이 넘는 천년고찰이다.
수덕사 입구에는 수덕여관과 선미술관이 있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의 고택이다. 그는 이곳에서 수덕사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 프랑스에 머물던 중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 옥고를 치른 뒤 수덕여관에 머물렀다. 부인 박귀희는 이혼했지만 지극정성으로 그를 옥바라지한다. 부인이 죽고 방치된 수덕여관을 예산군에서 매입해 복원했다. 수덕여관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전문 미술관인 선미술관이 있다. 고승들의 선묵, 선서화 등을 볼 수 있다.
너른 마당에는 덕숭산을 병풍으로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국보 49호로 지정되어있다.
수덕사의 초대 주지는 벽초 스님이다. 만공스님을 따라 출가하여 수덕사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30여년간 주지스님을 맡으며 굳은 일을 도맡아했다. 그는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이르는 길에 손수 1080개의 돌계단을 쌓아올렸다.
만공스님은 덕숭산에 머물며 선불교의 진흥에 힘썼다. 그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 총독이 한국과 일본 불교의 통합을 주장하자 그자리에서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백범 김구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와주었으며, 만해 한용운과도 교류했다.
대웅전 뒷편으로 벽초스님이 쌓았다는 1080돌계단이 있다. 여기서부터 덕숭산 산행이 시작된다. 덕숭산은 492.5m로 낮지만 산림청 100대 명산 중 하나다. 돌계단 끝에는 아담한 소림초당이 나온다. 마치 삼국지 제갈공명이 살것 같은 분위기다. 초당 앞에는 7m나 되는 미륵불 입상이 있다. 만공스님이 세웠다. 등산 초보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덕숭산에서 수덕사의 여운을 좀 더 느껴보면 어떨까.
봉정사,부석사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덕숭산 정혜사까지는 벽초스님이 손수 쌓았다는 1080개의 돌계단이 이어져있다
만공스님이 만든 거대한 불상
덕숭산 정상 풍경
추사 김정희 고택&추사 기념관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 실학자다. 추사체를 썼다. 하지만 정작 추사체가 뭔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암기 위주의 역사교육의 한계다.
유홍준 교수는 추사체를 이렇게 평가했다.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글씨"
참 멋진 말이다.
김정희는 9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를 그렸다. 평범한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에 처하면 무너지지만 그는 이 기간동안 학문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았다. 고난이 학문의 완성을 이끈 셈이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는 그의 유배지가 남아있다.
신암면에는 그가 태어나고 살았다는 고택이 남아있다. 건축 당시에는 53칸 규모의 거대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안채, 사랑채, 사당 등 일부만 남아있다.
특히 고택에 있는 매화가 아름다워 매화철이 되면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추사 고택 옆에는 추사 기념관이 운영된다. 추사체나 세한도 등 주옥같은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 더없이 좋다.
추사기념관
예당호 출렁다리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예산에 온 이상 꼭 봐야 할 자연절경이 예당호다. 예당 평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지만 주변 풍경이 수려하다. 최근에는 출렁다리가 개통되고 느린 호수길, 모노레일 등이 조성되면서 더욱 많은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주말에는 단체 여행객들로 발디딜틈이 없이 북적거리지만, 탁트인 호수 풍경 만큼은 여유롭고 고즈넉하다. 특히 밤에는 출렁다리 둘레로 조명이 켜지며 야경명소가 됐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노레일 기차는 예당호 풍경을 여유롭게 즐기기에 좋다. 낭만적인 이름의 윤슬의 숲, 빛의 조각, 달의 연하, 술의 연희, 달의 영휴 등을 거친다.
예당호 모노레일
모노레일을 타고 보는 풍경
내포보부상촌
보부상은 요즘으로 치면 보따리 장수다. 그들은 전국 시장을 떠돌며 물건을 사고 판다.
그래서 소식통이기도 하다. 각 지역 소식이 보부상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보부상들은 목화솜이 달린 패랭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여기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말 이성계가 장수 시절에 여진족과 전투 중 화살에 다리를 맞아 부상을 입는다. 마침 백달원이라는 보부상이 목화솜을 상처에 대어 응급조치를 했다.
훗날 이성계는 왕이 된 뒤 감사의 뜻으로 백달원에게 전국의 보부상을 관할하는 직인을 내려준다. 이때부터 목화솜은 보부상들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왜 예산에 보부상촌이 있을까. 그 답은 예산의 지역적 특징에 있다.
예산, 당진 일대는 넓은 내포평야가 있어 예로부터 농산물이 풍부했다. 그래서 상거래가 활발했다.
1850년경에는 예산에 예산, 덕산, 면천, 당진 4개 고을이 연합한 가장 큰 보부상 조직이 생겨났다.
보부상들의 삶을 볼 수 있는 보부상촌 박물관을 비롯해, 옛날 주막을 재현한 식당과 놀이기구 등 다양한 볼거리로 가족 나들이에 좋다.
윤봉길 기념관&자헌당
내포보부상촌에서 5분 거리에 윤봉길 기념관이 있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파티에 도시락 폭탄을 던졌고 그해 총살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고작 24살이었다.
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념관과 생가(관헌당과 자헌당)가 예산에 있다.
아담한 기념관안에는 윤봉길이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 야학 선생시절 썼던 일기, 일왕에게 던진 도시락 폭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회중시계 앞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뭉클해진다.
윤봉길은 홍커우 공원에 가기 전 백범 김구의 시계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시계가 아주 낡았네요. 선생님, 제 시계와 바꾸시죠. 저에게는 좋은 시계가 필요없습니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쓸 수 없으니까요"
백범 김구는 이 시계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품에 지니고 있었다. 그 시계는 김구가 남긴 19개의 유품 중 하나가 됐다.
예산에서 바쁘게 여행했다면, 온천욕을 하며 피로를 풀면 어떨까. 예산은 온천을 겸비한 호텔이 많아 하룻밤 머물며 힐링을 하기에 좋다.
윤봉길은 거사 전 백범 김구에게 자신의 회중시계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