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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강 육적인가 영적인가
마음의 문제
얼마 전 젊은 사람 하나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자기 안에서 어떤 성적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나는 분명히 육욕적인 사람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하소연 했습니다.
“그래요?"라고 운을 뗀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에게 주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형제는 정상적인 남성이로군요. 그것이 바로 좋은 소식입니다. 남자로서 지극히 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제의 몸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건 생화학적인 문제랍니다.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게끔 설계된 것입니다. 그것은 음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욕구를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육적인지 아니면 영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이런 감정이 몸 안에서 일어날 때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기지 않습니다. 자기 몸을 복종시키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육체적 욕구에 지배를 받거나 통제 받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형제는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기 바랍니다.“
문제는 결국 우리의 마음입니다. 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접촉하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 5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2절).
새롭게 되는 것은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믿음 안으로 들어오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그 즉시 성령께서 다시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각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평생 미워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한 여러분의 감정을 새롭게 하십니다. 동정심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여러분은 새로운 생애의 표준, 곧 그리스도의 생애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 여러 가지 기능의 집합소
우리의 마음은 마치 대학교와 비슷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일종의 과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사고력과 관련된 영역, 식욕과 관련된 영역 등입니다. 어떤 이들은 거듭날 때 식욕에 대한 유혹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미각과 더불어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의 감각들이 있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성적인 영역은 마음의 이러한 기능들에 의해 통제됩니다. 또한 의지와 관련된 영역도 있습니다. 물론, 감정의 영역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받는 것입니까?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각, 새로운 동기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넣어 주실 때 이와 같은 새로운 것들을 넣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동기를 갖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옷 입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올바른 동기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감정을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생각도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을 이전 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성적인 자극과 관련된 영역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서두에 언급했던 그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구할 때, 뇌에서 성적 활동을 조절하는 기능은 이것에 대해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결혼 관계에서 이것은 일체감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일체감이란 삼위일체의 친밀한 관계를 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형제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젊은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일 것입니다."
성과 관련된 이 특별한 기능은 이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행동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할리우드의 영화가 무슨 장면을 찍든지, 화려한 잡지에 어떤 모습이 실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 당장 그분의 이상적인 생각을 불어 넣으실 것입니다.
식욕은 어떻습니까? 음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거나 혹은 구원의 수단으로 삼던 사람들이 식욕을 조절하는 기능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겠지만 건강을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전인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식욕에 방종하던 사람들이 식욕과 관련된 영역에서 조절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식욕에 관해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라는 생각이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식욕이 새로운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일깨워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기능들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식욕의 기능이 갑자기 변화되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식욕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식욕과 관련되는 마음속 기능들이 성화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이런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오, 그렇구나. 성화는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야. 바로 마음에서!'
내 마음의 기능이 새로운 방향으로 일하도록 일깨워지고 나의 의지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강화된다면 새로운 행동 노선을 따라 선택하게 될까요? 매일의 삶에서 규칙적으로 그런 방향을 선택하게 될까요? 그렇게 하면 마음의 기능들에 어떤 일이 명백하게 일어날까요? 마음의 기능들은 고상하게 되고 성화될 것입니다. 마침내 그것이 나의 본성적인 성향으로 굳어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자연스런 나의 성향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습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주는 기적입니다.
<시대의 소망> 668페이지에 서술된 이 아름다운 문구에 다시 주목하기 바랍니다.
모든 참된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마음의 역사였다.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분의 뜻과 일치하도록 조화를 이루신다. 이로써 우리가 그분을 순종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따라 수행하게 된다.
자, 생각해 봅시다. 만약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그분의 마음과 일치하게 하셔서 지금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일을 함에 있어서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생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생각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불어 넣으신 것에 대하여 습관적으로 반응함으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회심 후에 진실하고 영적인 신자들의 삶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은 어떤 감정을 갖고 있습니까? 어떤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어떤 태도로 신앙합니까? 반면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신자들의 경험이나 특징은 무엇이니까?
육적 아니면 영적, 중간은 없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육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쪽 아니면 저쪽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에게서도 아주 흥미로운 특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중 일부는 그런 특성들을 육적인 것이라고 혼동할 여지가 있습니다. 나를 찾아 왔던 그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그는 전혀 육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영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세속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로마서 5장에서 8장은 이 문제를 참으로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7장 21절에서 8장 8절 사이에 있는 말씀들은 바울이 언급했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 21~25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장 1~8절).
이 성경들은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특히 7장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살펴보면 분명히 그 말씀의 진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성경절을 깨닫는데 25년이나 걸렸지만 사실 이처럼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7장 25절을 주목해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구절은 바울이 육적인 동시에 영적이라는 것을 전혀 제시하지 않습니다. 25절을 전후하여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울이 말한 것을 육적인 동시에 영적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바울이 그 이전과 그 이후에 무슨 말씀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구절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동시에 섬긴다는 말이지?"라고 의아해 합니다.
당연히 여러분은 동시에 육적이거나 영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25절은 바로 앞 절과 그 다음에 오는 절을 통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문맥을 주의 깊이 연구하면 바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해석의 열쇠는 이 구절 안에 들어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도 바울의 기록 중에 가장 오해를 많이 받고 있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자들 사이에 2천 년 동안 논쟁거리였고,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신학교에 있을 때 교수들도 이 문제를 놓고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한 교수는 로마서 7장 25절은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의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다른 교수는 바울이 회심한 이후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간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꽤 흥미 있는 사실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7장 16~18절로 돌아가 봅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여러분은 방금 이 구절을 읽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육욕적인 사람이 자신의 그런 육적인 면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영적인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이 책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던 중요한 사상은 우리의 근본적인 상태가 어떠한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할 만한 힘도 없고, 더욱이 죄 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상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깨닫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바로 이것이 인류의 절대다수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깨우침의 정점입니다. 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아주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죄가 그의 인간 본성에 어떤 일을 해 놓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장 18절).
누군가 자기 안에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무엇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육신의 생각[육적인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로마서 8장 7절).
그러나 여기를 보면 그는 옳은 일을 하고자 원합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 죄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옳은 일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투쟁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친숙한 모습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솔직한 상태를 시인했습니다. 진심으로 믿는 영적인 자라 할지라도 내면에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새로워졌습니까? 나는 신자가 되기 전에는 그런 투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죄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사실 그것이 죄인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인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신자가 되고나서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영적인 신자들의 내면에도 늘 투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진실로 믿는 사람들의 삶 속에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투쟁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 로마서의 문맥을 주의 깊이 살펴보고 로마서 7장 25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투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사도 바울의 글에서 찾아봅시다.
우선 7장 25절 이전의 21~23절을 먼저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말씀을 보면, 한편으로는 '내 마음의 법'이 있습니다. 나의 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 육신의 지체' 안에 '죄의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7장 25절 이후에 나오는 8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7장 25절의 '죄의 법'을 나의 육신의 지체 가운데 있는 법' 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속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 '내 마음의 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이 두 가지 상치되는 법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를 이해한다면 여러분의 생애가 혁명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문제로 투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감히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러한 투쟁이 오직 참된 영적인 사람, 곧 회심하고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 거듭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이런 영적인 부류의 사람들만 그런 갈등을 겪습니다. 이런 영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불안정한 상태에 빠질 위험성이 매우 높기도 합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마치 쑥대밭이 된 집안처럼 평생을 헤매고 불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깨달은 대로 살지 못할 때 불안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수년이 걸려서 깨달았습니다. 그런 상태는 사람들의 마음에 혼란을 야기합니다.
바울은 그 투쟁을 해결하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신자들의 경험 가운데는 매우 심각한 현실적인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갈등인지 알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법'과 '내 육신의 지체 가운데 있는 법'사이에서 일어나는 투쟁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곧 내 마음 안에 있는 법과 죄와 사망의 법' 곧 내 몸의 지체 안에 있는 법 사이에 있는 투쟁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알려 주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신자들의 삶에 있는 투쟁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이 거하는 마음과 죄와 사망의 법' 아래로 우리를 이끄는 몸의 지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뜻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제22장에서 바울이 가르치고자 하는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에 대해 더욱 자세히 연구하겠습니다.
내용복습
1.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어느 부분과 접촉하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2. 마음이 대학교와 비슷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어떻게 여러분 마음에 있는 기능들이 성화됩니까?
4. 어떻게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됩니까?
5.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이 여전히 육신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육적인 사람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사람은 무엇을 소망합니까? 로마서 7장 16~18절을 보십시오.
7.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투쟁에 대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로마서 7장 21절~8장 2절 참조
8. 이 투쟁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