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태워 공양하는 소신공양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 문
경전에 보면 시방삼세에 부처님이 가득 차 계시다고 하는데요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방법 중에 자기 몸을 태워서 공양하는 방법이 있다던데
이런 분신공양, 소신공양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 답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이렇게 말하잖습니까?
시방(十方)이라는 것은 열 가지 방위로서, 온 우주, 온 누리 이런 뜻이고
삼세(三世)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그러니까 저 무한겁전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고
또 무한겁의 미래에 이르도록 시간적으로 통틀어서 부처님이 계시는데
상주일체.. 항상 계시는데.. 어떻게 계시느냐..
'제망(帝網)'이라는 것은 제석천의 그물입니다.
이 그물은 팔만사천의 보배로운 구슬로 되어 있는데,
아라비아 숫자로 84,000이 아니고 무한히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수한 구슬이 꿰어져 있을 뿐만 아니고, 하나 하나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다 비친다고 합니다.
하나 속에 전체가 다 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법성게에서 말하는
'일중일체 다중일, 일미진중 함시방'의 도리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 하나 하나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면
그것이 그대로 진여(眞如)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 나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분별하고 삽니다.
왜 나쁜 사람인가? 그 사람이 사람을 때렸다, 뭐 나쁜 짓을 했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다.. 이럽니다.
우리는 그가 '나쁜 사람'이고, 그래서 내가 '나쁘다'고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붉은 색 안경으로 흰 벽을 보면 벽이 붉게 보입니다.
그럴 때 나는 '벽이 원래 붉은 색이라서 붉게 보인다'라고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 내 안경으로 인해서 '내 눈에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실제는 붉은 게 아니다, 그러나 내 눈엔 붉게 보였다.. 이런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저건 붉은 것'이다 라고 하면, 상(相)을 짓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살아갑니다.
자기 눈에 비친 것을 '객관적이다, 진실이다' 이렇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색(色)이라 하기도 하고, 상(相)이라 하기도 하고, 반야심경에선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시비하는 것은 '상대가 잘못했다' 해서 시비하는 건데..
상대의 잘못이 없다면 왜 시비를 하겠어요..
그게 상대의 잘못이다 하는 상을 짓기 때문에 시비를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떠하냐?
그 붉은 색깔은 내 안경에서 온 것이지, 벽이 붉은 것은 아니다.
벽 자체는 색깔이 없다.. 이걸 공(空)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붉은 색으로 보입니다.
첫째 해결책은 안경을 벗으면 됩니다. 이렇게 안경을 벗는 것을,
깨닫는다, 한 생각 돌이킨다, 상을 타파한다, 업장을 소멸한다.. 등 여러 말로 표현합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 자체는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데
내 입장에서 볼 때, 내 업식에서 볼 때에는, 그것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내가 지은 상(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걸 내가 자각하게 되면, 비록 내 눈에 잘못된 걸로 보인다 하더라도
'잘못 됐다'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행동을 보고 나는 나쁜 감정이 생겼다'
'내 눈에는 그르게 보였다'.. 이렇게 주관을 주관이라고 분명히 알게 됩니다.
상(相)을 상(相)이라고 알게 됩니다.
분별심을 갖고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중생계'인데
분별심을 떠나서, 상(相)을 여의고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진여의 세계입니다.
지옥이다 천당이다.. 이게 다 우리 분별심 상(相)으로 짓는 세계이지
실제로는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냥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진여의 세계, 부처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그대로 다 부처님의 세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곳에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공경하듯이 어떤 일을 하게 되면
하는 일마다 다 불공이 된다.. 꼭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만 불공이 아니고,
남편을 부처님으로 알고 공양을 올리면 그것도 불공이 되고
길 가는 거지를 잘 보살펴도 그것도 불공이 됩니다.
하는 일마다 다 공덕을 짓는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을 해도, 이렇게 깨닫고 하면 하는 일마다 다 공덕이 되지만
분별심을 일으켜서 행하면 하는 일마다 다 업(業)이 됩니다.
이러한 도리를 알게 된다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일이니까,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어려움도 뛰어 넘어서 행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 죽음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마음으로 행할 때
우리가 '이 몸을 부처님께 바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육신을 불사르는 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이런 이치를 깨닫고
몸에 집착함이 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정진할 때, 불공을 할 때
이것이야말로 '몸을 버려 불공을 올린다'라고 할만 하다..
이렇게 오히려 이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법륜스님 - 정토회 지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