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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겔 23장 1절에서 4절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 텐데 오늘은 그냥 말씀만 충실히 이렇게 보려고 해요. 아무래도 여러분이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서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면 좀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오늘만은 여러분이 마음을 좀 이렇게 열고 잘 못 알아들으셔도 귀를 기울이셔서 들으시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인의 이름은 오블라와 오블리바라는 여인입니다. 오골라와 오골리바는 실제의 여인은 아니고 가상의 여인이에요. 그래서 비유법을 통해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악을 꾸짖기 위해서 하나님이 등장시킨 여인들의 이름입니다. 4절을 보면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정확하게 나옵니다. 4절 한번 같이 우리 읽겠습니다. 4절입니다. 시작
그 이름은 형은 오블라요. 아우는 오블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볼라는 사마리아요. 오볼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4절과 그 2절의 3절을 근거로 보면 오블리와 오블리바는 자매예요. 그러니까 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자매입니다. 자매이지만 이름이 다르죠. 당연히 이름이 다르죠. 그래서 이름이 다르지 다르듯 이름의 뜻도 달라요. 오블라는 사마리아를 의미하고 사마리아는 곧 북왕국의 수도잖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오블리바는 예루살렘 남왕국을 의미하고 유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 두 여인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는지 따지고 보면 사마리아, 예루살렘 이게 이름인 거예요. 물론 이름 이름에 따른 의미는 있지만 굳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름의 의미를 그냥 우리가 거론하면 남왕국, 북왕국, 이스라엘 유다 이게 이 두 여인의 이름인 겁니다. 이렇게 이름을 누가 들어도 귀에 확 들어오도록 이렇게 지은 건 이스라엘 유다와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의 죄를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꼬집기 위한 거예요. 두루뭉실하게 이름을 정하면 사람들이 이름을 듣고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정확하게 북왕국 남왕국 사마리아, 예루살렘, 이스라엘 유다라고 누가 들어도 정확하게 알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왜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오블라로, 남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오블리바로 불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어원을 보면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또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오블라와 오블리바는 장막 회막 성막을 의미하는 오해이라는 헬라어에서 만들어진 단어인 거예요. 그러니까 성막이라는 이름에서 만들어진 유래가 된 것이 오볼라와 오블리바라는 이름인 거예요. 왜 하나님이 이렇게 이름을 지어서 이스라엘에게 비유로 말씀하냐 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거예요. 오블라와 오블리바가 성막에서 났잖아요. 하나님의 장막에서 나왔잖아요. 출생지가 하나님의 성막 하나님의 장막인 거예요. 그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의 출생지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장막에서 사랑을 나누고 그곳에서 자녀를 출생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장막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이 나왔다는 거, 그러니까 유다와 그리고 이스라엘이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름을 오블라 오블리바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장막에서 나온 존재, 하나님에 의해서 나온 존재,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거예요. 성막에서 나온 사람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람이다. 너희는 성막으로부터 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오블라 오블리바라는 이름을 이들에게 지어줬던 것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근원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거예요. 너희는 사람에게서 나온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서 즉 하나님께서 나온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이름의 비유를 사용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장막으로부터 나온 존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존재 하나님이 만든 존재이기 때문에 유다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예요.
5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우리 5절입니다. 시작
오블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금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아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런데 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백성들이 만드신 이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만든 존재를 사랑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이 사모하면 안 되는 아수레를 사모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장막에서 나온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든 존재인 아수르라는 나라를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더 의지하고 더 사모했던 거예요.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오래전인 예후 때부터 아수르와 동맹을 맺어왔어요. 그러니까 긴 시간 동안 아스로와 동맹을 맺어왔고 아쓰로와 함께 했고, 아스로를 사모했던 거예요.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단순히 아수르와 군사적인 동맹만 맺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들의 힘만 필요하고 그들의 힘만 의지했던 건 아니라는 거예요. 7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그가 수로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아수라 사람들과 그들의 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육체적인 음행도 저질렀고요. 아수르의 모든 신을 섬기는 영적인 음행도 함께 저질렀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단순히 아스로와 군사적인 교류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수르의 남자들과 아수르의 여자들과 성적인 음행을 저질렀고, 그리고 아수르가 섬기던 신들을 하나님을 제켜놓고 그 신을 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수르는 단순히 군사적인 동맹만을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을 성적인 노예로 삼았고요. 북이스라엘을 영적인 노예로 삼았어요.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우상의 종으로 삼았던 거예요.
그래도 북이스라엘은 아수르가 좋다고 아스로와의 동맹을 끊고 있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거죠. 아수르를 사랑하다가 이스라엘이 아수르를 사모하다가 그들의 종이 되고 그들의 노예가 된 거예요.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영적인 영향을 미칠까라고 잘 생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실은 사랑 내가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 지나면 나를 자기의 종으로 부려요. 내가 자식을 너무 사랑하면 자식은 나를 종으로 부리고요. 내가 회사를 너무 사랑하면 물론 회사를 사랑해야 하죠. 회사가 나를 종으로 부려요. 내가 아내를 너무 사랑하면 남편을 너무 사랑하면 남편과 아내가 나를 종으로 부려요. 신기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종으로 삼더라고요.
그처럼 이스라엘의 사모였던 아수르는 단순히 군사적인 힘만 이 이스라엘에게 제공했던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성적으로도 노리개 삼았고, 이스라엘을 영적으로도 노리개를 삼았습니다. 그래서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영적으로도 유린당했던 것입니다.
남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유다도 아수르를 사모했어요. 성경에 보면 북쪽 이스라엘도 남쪽 유다도 아수르를 사모했다 연애했다 이렇게 기록됐어요. 아수르와 동맹을 맺은 것이 당연히 그냥 동맹이라고 하나님이 생각한 게 아니었어요. 연애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 아수르를 연애했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가 그의 이웃 아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오,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남유다도 아수르와 군사적인 동맹을 맺었어요. 그랬더니 동일하게 남유다는 조금 북이스라엘과는 또 도드러진 특징이 있어요. 유다의 도시가 수도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에는 성막이 있는 거잖아요.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좀 다른 훨씬 더 의미가 깊어요. 유다의 범죄는 이스라엘의 범죄보다 훨씬 더 의미가 깊어요.
그런데 남유다도 아수르를 연애했고 자기를 연애하는 남 유다를 아수르는 어떻게 했을까요? 동일하게 성적인 노리개로 삼았고 그리고 또한 영적인 놀이개로 삼았어요. 그래서 아수르가 섬기는 많은 우상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에 유입됐던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자기를 만든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따르지 않고 그들이 사랑하는 연애하는 남자들의 우상인 신인 우상들을 섬기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근데 성경은 말하기를 남유다의 죄가 북이스라엘보다 더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더 많은 신들이 남유다에 유입이 되었고요. 더 많은 우상의 노예가 되고 우상의 종들이 됐습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 더 늦게 망했어요. 그러니까 아수르를 연애하다가 아수르에 의해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이 이스라엘이 파괴당하는 것을 보고도 보고도 예루살렘은 남유다는 회개하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매를 맞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건 비정상적인 사고의 사람들인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아수르가 예루살렘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어요. 이 장면을 남쪽 유다의 모든 백성이 다 봤어요. 그런데도 아스로와의 동맹을 끊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깊이 생각할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곧 나의 우상이 되어서 나에게 명령하는 것들이 되고 이게 더 오랜 기간 쌓이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곧 나를 파괴하는 것이 돼요. 그러니까 이 사실을 마음에 우리가 잘 새겨야 됩니다. 내가 뭔가를 사랑해요. 그러면 어느 날부터 이 사람의 명령을 내가 듣기 시작해요. 그랬더니 하나님의 명령보다 그 사람의 명령이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해요. 어느 날 그 사람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파괴하는 사람으로 변해요. 그런데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안 멈추는 것이 인생의 비극인 거예요. 나를 해치고 나를 멸망시키는 것들을 향해서 계속 사랑하고 있는, 그러니까 정작 사랑해야 될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 정도 나누고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먼저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하는 존재인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사모하는 것이 있으면 안 돼요. 정확하게 말합니다. 안 되면 안 됩니다. 안 돼요. 있으면 안 돼요. 왜요? 오늘날 그것들은 나에게 명령하는 것들로 바뀌고 그러나 그것은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바뀌어요.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이 여러분을 괴롭히니 자주 일어나던가요? 안 일어나죠? 공직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게 업무상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경찰이나 군인이나 등등 이런 분들을 제외하고는 일상적인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로 예를 든다면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은 나를 그렇게 괴롭히지 않아요. 실제로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정성을 들이고 내가 수고하고 내가 시간을 들인 것이 내가 사모하는 것이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과 제가 똑똑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모해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냐면 그게 맞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더 나아가서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인 거예요. 나를 명령하는 존재들에게 충성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게 아니라 나를 만드신 내게 충성하는 것이 내가 참 기쁨을 얻는 길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것이 우리 영혼이 참 만족을 얻는 길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를 다녀도 이렇게 영혼의 만족을 누리기가 되게 어렵죠. 어떻게 보면 교회 다니는 성도들이 불만이 더 많은 것이 맞을 수 있어요. 교회에 와서 뭔가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많은 들은 말씀이 내 삶에 잘 경험되어지지는 않아요. 그래서 그 욕구와 현실이 되게 괴리감이 있어요. 거리가 있어요. 바라는 건 많은데 정작 이룬 건 없고 이 말씀을 많이 들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알지만 정작 하지는 않는 이 영적인 공허와 괴리감이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더 많이 있어요.
여러분 이런 괴리감과 공허를 줄이는 비결이 뭐냐 하면 오늘 말씀이에요. 나를 만드신 존재를 사랑하는 자리로 내가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만드신 존재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니까 만드신 분이 내게 주신 만족을 내가 누리지 못해 하나님께는 세상에 그 누구가 줄 수 없는 평안도 있고 만족도 있고 은혜도 있고 긍휼도 있어요. 이걸 경험하면 이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공허함은 다 사라져요.
새벽 기도를 오래 드렸는데 여전히 마음에 공허함이 있어요. 내가 왜 새벽 기도를 계속 가야 될까 예배를 수십 번 수백 번 했는데도 내가 예배를 통해 뭘 얻을까 그냥 내가 집사니까 내가 직분자니까 습관적으로 다녔으니까 내가 교회를 가야 되나 아마 이런 생각은 한두 번쯤 다 해봤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블라와 오블리바의 어원은 오 성막이라는 단어가 어원이에요. 그러니까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성막에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북이스라엘이 그리고 남쪽 유다가 아수르를 사랑했던 거예요. 악수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남자들을 사랑하고 그 땅에 있는 신들을 사랑했어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절망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오게 된 것입니다. 사모하지 말아야 될 것, 연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모하고 연애했기 때문에 오게 된 절망이라는 겁니다.
시편 2장 2편 7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낳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례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이 나를 낳았어요. 그래서 우리 인생의 유례는 하나님께 하나님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모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감과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사야 43장 7절입니다. 시작
무릎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인 거예요.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택된 존재들인 거예요.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또 하나님을 막 연애해야 될 사람이라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했어요. 여러분 이사야 43장 7절의 말씀으로 좀 우리의 신앙을 좀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됩니다라는 말을 엄청 많이 듣잖아요. 근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걸까 잘 못 알아들어요. 근데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인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거예요. 다른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고, 다른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사모했고 다른 나라를 사모했고, 다른 신을 섬겼고 다른 나라를 섬겼습니다. 결국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그들이 사모하는 것들에 의해서 멸망을 당합니다.
참 이게 무서운 일인 거예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결국 나를 해치는 것이래. 그렇지 않나요?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여러분에게 정말 좋은 명령을 내리던가요? 여러분이 자녀를 사랑했어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하나님께 합당한 명령을 내리든가요? 엄마 오늘 교회 안 가면 안 돼 엄마가 왜 그렇게 새벽 기도를 많이 해? 엄마 교회는 엄마밖에 없어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내게 내리는 명령이에요.
여러분 우리 인생에 인생에 필요한 명령을 내리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내게 올바른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에요. 내 사랑하는 것들이 나에게 그런 명령을 어느 순간 내려. 그리고 우리는 그 명령을 마침 하나님의 음성처럼 여기고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정말 여러분이 사모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잘 되길 바란다면 그들의 명령을 거절하십시오. 자녀들이 여러분이 하는 명령을 거절하십시오. 우리 남편과 아내가 하는 명령을 거절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들이 하는 명령을 거절해야 돼요. 여러분 그렇게만 되어도 그렇게만 되어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존재로 변화 되어지는 것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결국 사모하는 이방 나라와 이방신들에 의해서 난도질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모하면 안 되는 것들을 사모하다가 이꼴이 난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앞에 있는 너무 매력적인 것들에 이끌리지 마십시오. 그것들 우리가 사모하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앞에 너무 자극적인 것들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대부분 사랑하면 안 되는 것들이에요.
여러분 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아스르 라데 바벨론, 그다음에 애굽과의 동맹을 맺으려고 했을까요? 이 동맹에는 군사적인 의미도 분명히 있어요. 근데 이 동맹에는 동맹을 주로 맺는 사람이 누구예요? 남자들이잖아요. 그럼 이 남자들은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여인과 아니면 남자들과 성적인 교합을 할 수 있었어요? 몰라요. 저는 그 시대로 안 돌아가 봐서 제가 이렇게 설교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렇다면 정말 군사적인 이유로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아수르를 사랑했을까요?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성적인 것 때문에 악수를 사랑했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앞에 있는 매력적인 것에 여러분 너무 이끌리지 마십시오. 언젠간 여러분이 그것에 걸려서 크게 넘어지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어요. 누구에게도 명령을 허락하면 안 돼요. 여러분 우리가 이제 분대로 예를 들면 나는 오직 내가 섬기는 나의 부대의 지휘관의 명령만 들어야 됩니다. 옆 사무관의 명령을 들으면 안 돼요. 나의 지휘관의 명령만 들어야 돼요.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하나님의 명령만 들어야 될 사람인 거예요.
근데 어느 순간 우리가 다른 것들을 사모해서 다른 것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자리에까지 가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기회를 매번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잘못 사랑하면 가정이 파탄이 나고 관계가 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면 인생이 파탄이 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사모하지 말아야 할 것에 여러분의 관심이 요즘 집중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에 것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드신 이에게 충성하고 만드신 이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지녀야 될 모습입니다.
여러분 헛된 것을 따르다가 수렁에 빠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거 하면 안 되는 것을 사랑하다가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면 어느 순간 그것들은 나를 향해서 칼과 창과 활을 겨눕니다.
은혜라는 것은 사랑할 것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 은혜인데, 두 번째로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북이스라엘은 아수르와 동맹을 맺었고, 남유다는 아수르뿐만 아니라 바벨론, 그다음에 애굽까지 동맹을 맺었어요. 세상적으로 보면 대개 정치적인 수환이 좋은 곳으로 보일 수 있어요. 야 정말 정치적인 수단이 좋구나. 그런데 이 동맹이 과연 옳은 건지 나쁜 건지를 알려면 이 동맹의 결론을 보면 되네요. 이 동맹의 결론 결론이 좋으면 동맹이 좋은 거잖아요.
근데 동맹을 맺은 아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요. 동맹을 맺었던 바벨론이 남유다를 멸망시켰어요. 그럼 이 동맹은 잘못된 것이고 이 동맹은 틀린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동맹이 지혜롭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이었다면 동맹을 맺은 나라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지 않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유다도 이스라엘도 동맹을 맺은 나라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역사상 한 번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어요. 하나님을 항상 사랑하고 있었어요. 재단에 불이 꺼진 적도 없고요. 제사를 드리지 않는 적도 없었어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적도 없었고요. 남유다가 북이사이 그랬어요.
그런데 단 한 가지 실수가 있었어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던 거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애굽의 군대보다 더 강력해서 출애굽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죠. 하나님을 의지해서 출애굽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힘은 하나님인 겁니다. 애굽의 군대보다 이스라엘 군대가 더 강력해서 출애굽한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다윗의 통치가 강력했던 것은 다윗이 강했기 때문이 아닌 거예요.
여러분 북적 이스라엘에도 다윗만큼 강력했던 왕들은 있었어요. 근데 다윗이 그들보다 더 강력하게 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힘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이고 실력이었습니다.
따라하겠습니다.
나의 실력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한번 더 따라하겠습니다.
나의 능력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능력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가 목사의 능력인 거예요. 성도의 능력도 성도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느냐가 성도의 능력인 거예요. 성도가 세상의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 세상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느냐가 그 성도와 목회자와 그 교회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나라 우상을 의지하는 것을 불륜에 비교하셨어요. 영적인 불륜, 육체적인 불륜 그러니까 그만큼 싫어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을 불륜이라는 거 하셨을까요? 그만큼 싫다는 거예요. 그만큼 싫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불륜이 우리 주변에 없지 않아 있잖아요. 있지만 있다고 해서 불륜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고 이게 불륜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가장 싫은 거다라는 사인을 메시지를 주고 싶으셔서 계속 불륜에 비교하신 거 이렇게 내가 싫어하는거야 이렇게 내가 미워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주어집니다. 성도의 영광도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주어지고, 목회의 영광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주어집니다. 성도의 영광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버릴 때 주어지고요. 교회의 영광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버리면 주어지고, 목회의 영광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면 하나님 미워하는 것을 철저히 미워하면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목회의 영광을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모해야 되는 것이 여러분과 저의 삶의 근본인 거예요. 나는 하나님을 사모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근본은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성전에서 만들어진 존재고 우리의 출생지는 성마귀예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출발이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시작이에요. 그처럼 나는 나의 인생의 완성도 곧 하나님이에요. 그럼 우리가 사망하고 갈망할 분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거예요. 내가 출세하는 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겁니다. 할렐루야 그럼 우리는 출세를 위해 살지 않아도 돼요.
너무 좋지 않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자꾸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셨어요. 그럼 여러분과 저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거예요. 뭘 더 안 해도 되는 거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거잖아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교회가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쏟아부으십시오. 그러면 영광과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울 때 성도의 근본인 하나님을 사랑할 때인 거예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예배 때도 나타나고 교회를 섬긴 일에도 나타나고 여러분의 일상의 삶에서도 나타나고 그래서 우리에 있는 모든 자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