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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0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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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지음 |
송성수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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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범부와 성인이 한 마음의 경계라면 무엇이 자재하게 출생하는데 걸림이 없는 힘인가? |
[답] 첫째는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고, 둘째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행원(行願)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셋째는 곧 중생이 믿고 아는 제 업[自業]으로 감촉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
또 통틀어 열 가지 힘을 갖춘다. 첫째는 법이 그렇게 된 힘[法如是力]이요, 둘째는 공하여 성품이 없는 힘[空無性力]이요, 셋째는 모든 부처님의 신령한 힘[諸佛神力]이요, 넷째는 보살의 착한 뿌리 힘[菩薩善根力]이요, 다섯째는 보현행원의 힘[普賢行願力]이요, 여섯째는 중생의 깨끗한 업의 힘[衆生淨業力]이요, 일곱째는 깊이 믿고 훌륭하게 아는 힘[深信勝解力]이요, 여덟째는 환술과 같은 법으로 일으키는 힘[如幻法生力]이요, 아홉째는 꿈과 같은 법으로 나는 힘[如夢法生力]이요, 열째는 지음이 없는 참 마음으로 나타내는 힘[無作眞心所現力]이다. |
또 『화엄소(華嚴疏)』에서 해석하여 말하였다. |
“하나와 여럿이 서로 부지하여 서로가 본말이 되면서 한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통틀어 열 가지 이치가 있다. 첫째는 외로이 드러나면서 혼자 서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혼자 서며 주인이 된다. 둘째는 쌍으로 나타나되 때를 같이하는 것이니, 저마다 서로가 돕고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양쪽이 다 함께 없어지는 것이니, 서로가 빼앗고 같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숨고 나타남이 때를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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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 즈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가고 오되 요동하지 않는 것이니, 저마다 근본의 법에 머무르고 제 위치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
여섯째는 힘이 없되 서로 부지하는 것이니, 힘 있는 것으로 힘 없는 것을 부지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피차가 모르는 것이니, 저마다 제 성품이 없어서 법과 법이 서로가 모르며 서로가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힘과 작용이 서로서로 통하는 것이니, 다른 체상(體相)으로 힘 있는 것에 들어가 서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니, 체성(體性)이 없어야 비로소 즉(卽)하고 들어가서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마침내 말을 떠나는 것이니, 성덕(性德)에 명합하고 과해(果海)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해석하여 보자. |
‘외로이 드러나면서 혼자 선다[孤標獨立]’고 함은, 곧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여럿 안에 하나의 성품 없고/하나에 또한 여럿이 없다./두 가지 법이 서로 없기 때문에/혼자 서게 되어 역시 하나다”라고 했다. 여럿에 즉하면 여럿일 뿐이요, 여럿이 하나에 즉하면 하나일 뿐이다. 자기를 깨뜨리고 다른 것과 같아지기 때문에 혼자 선다고 말한다. |
둘째의 ‘쌍으로 나타나되 때를 같이한다[雙現同時]’고 함은, 곧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이기 때문에 여럿임을 알고/여럿이기 때문에 하나임을 안다./하나가 없으면 여럿도 없고/여럿이 없으면 하나도 없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쌍으로 나타나서 다시는 앞뒤가 없는 것이니 마치 소의 두 뿔과 같다. |
셋째의 ‘양쪽이 다 함께 없어진다[兩相俱亡]’고 함은 바로 앞의 것 두 가지가 다 함께 버려지는 것이다. |
넷째의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自在無礙]’고 함은 하나를 바라면 곧 하나라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요, 여럿을 바라면 곧 여럿이라 하나가 그대로 여럿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이미 그와 같다면 여럿도 이것에 준(準)하는 것이니, 항상 하나요, 항상 여럿이며, 항상 즉하고 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재하다고 한다. |
다섯째의 ‘가고 오되 요동하지 않는다[去來不動]’고 함은 하나가 여럿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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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는데도 하나로 있게 되고 여럿이 하나에 드는데도 여럿으로 존재한다. 마치 두개의 거울이 서로 맞대어 들어도 본래 모양은 요동하지 아니하고 상즉(相卽)함도 또한 그러하다. |
여섯째의 ‘힘이 없되 서로 부지한다[無力相持]’고 함은 하나로 인하여 여럿이 있고 여럿은 힘이 없으면서도 하나를 부지하며, 여럿으로 인하여 하나가 있고 하나는 힘이 없으면서도 여럿을 부지한다는 것이다. |
일곱째의 ‘피차가 모른다[彼此無知]’고 함은 두 가지가 서로서로 의지하면서도 모두가 체(體)와 용(用)이 없으므로 서로가 알지 못한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모든 법에는 작용이 없고/또한 체성이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그 온갖 것은/저마다 서로 모르느니라”고 함과 같다. |
여덟째의 ‘힘과 작용이 서로서로 통한다[力用交撤]’고 함은 곧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하나 안에서 한량없음을 알고/한량없음 안에서 하나의 이치를 안다”라고 했다. |
아홉째의 ‘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自性非有]’고 함은 서로서로가 인연으로 생기게 된 것이어서 온 체성이 공하다는 것이다. |
열째의 ‘마침내 말을 떠난다[究竟離言]’고 함은 하나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나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하나라거나 하나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고 하나가 아니라거나 하나가 아님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으며, 상즉(相卽)이라고 말할 수도 없음은 상입(相入)이기 때문이요, 상입이라고도 말할 수 없음은 상즉이기 때문이며, 상즉ㆍ상입이라고도 말할 수 없음은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요, 상즉ㆍ상입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음은 서로서로가 통하기 때문이다. |
입으로 말하려 하나 말을 잃었고 마음으로 묶어두려 하나 생각이 쉬었다. 증득하여 알 뿐이니, 물결과 바다가 같기 때문이다. 하나와 여럿이 이미 그렇다면 더럽거나 깨끗함 따위의 법이 모두 그렇지 아니함이 없다. |
또 한 마음의 원(圓)과 별(別)의 이치로서 걸림 없는 힘에서 보면, 원과 별의 두루한 이치가 미세하여 분별하기 어렵다면 반드시 차별이 있어야 능변(能遍)이요, 만약 차별되지 않고 능변으로 뚜렷하지 않다면 차별이면서 능변이 소용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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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변의 법은 하나하나가 원융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 원융(圓融)이라 함은 하나의 모임이 저 온갖 것의 모임이어서 이 모임이 곳곳마다 이르는 것도 아니다. 이것 그대로가 저것이요, 하나 그대로가 여럿이기 때문에 원융이라고 한다. |
또 소변(所遍)의 것에서 총(總)과 별(別)을 논한다면 동쪽이라는 이름이 서쪽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하면 소변의 별이요, 이 모임 그대로가 저 모임이라 하면 소변의 총이다. |
또 능변에서 원과 별을 논하면, 반드시 차별된 법을 가져야 두루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별이라 하며, 지금의 이 원융하여 차별이 없는 법은 바로 능변이기 때문에 원이라 한다. |
앞의 별(別)은 마치 줄지어선 별이 구천(九天)에 두루한 것과 같고 여기의 별은 하나의 달[月]이 백천(百川)에 떨어진 것과 같으며, 앞의 총(總)은 마치 한 낱 구름이 우주를 가득 채운 것과 같고 여기의 원(圓)은 마치 어울린 향훈이 한 방에 두루한 것과 같다. 그 때문에 총과 원은 다르다. |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기를 “이 화장계(華藏界)가 숨고 나타남이 자재함은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훌륭한 복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곧 갖춘 형상은 만 가지로 다르되, 광명은 환히 비춘다.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뜻에 취착(取着)이 없게 하면, 마치 환영의 구름이 흩어진 것과 같아서 한 물건도 얻을 바가 없는데, 있다 하면 그것은 계교(計校)하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큰 원과 지혜 힘과 법 성품의 자체는 공하여 성품이 없는 힘이므로 숨거나 나타남이 자재하다. 만약 법의 성품을 따른다면 만 가지 모양이 도무지 없고 지혜의 힘을 따른다면 뭇 모양이 따라서 나타난다. 숨거나 나타남이 인연을 따르며 도무지 짓는 이가 없는데, 범부가 집착하여 무명을 짓는다. 집착의 장애가 이미 없다면 지혜의 작용이 자재하여 하나의 참된 경계를 떠나지도 않고서 화(化)하는 거동이 백 가지로 변한다. |
그러므로 범으로 오인하여 화살로 돌을 뚫음은 공력으로는 능할 바가 아니니, 취하여 삼군(三軍)을 호령함이 어찌 누룩으로 만들어지겠으며, 죽순이 차가운 골짜기에서 돋아남은 어찌 봄날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겠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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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고기가 얼음 위로 뛰어오름이 어찌 그물 때문에 그렇게 되었겠는가? 모두가 마음의 느낌에서 이런 영통(靈通)이 나타난 것이다. |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만 가지 법의 되는 일은 모두가 제 마음의 힘일 뿐이다. 만약 믿어 받아서 이 능력을 갖춘다면 장애의 문이 널리 열리고 업(業)의 바다가 바짝 마르리라. |
그런 까닭에 『인왕경(仁王經)』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의 청정한 믿음을 능히 일으키면, 이 사람이야말로 백 겁ㆍ천 겁이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항하 모래알만큼 많은 겁의 온갖 고난을 벗어나서 나쁜 갈래에 나지도 않고 오래지 않아서 위없는 보리를 얻게 되리라”고 했다. |
그러므로 마음에 지음이 없음을 알면 이내 업의 공(空)함을 깨치게 되며, 업이 공하다고 관찰할 때에 도(道)를 얻었다고 하며, 그 도가 만약 나타나면 무슨 지혜인들 분명하지 않겠는가? 마음의 지혜가 분명할 때, 가고ㆍ서고ㆍ앉고ㆍ눕는 네 가지 행동 안에서 저절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힘이 나타나리라. |
『화엄경』에서 말씀하셨다. |
“선견(善見) 비구가 숲 속에서 거닐고[經行] 있다가 선재(善財)에게 말하였다. |
‘선남자야, 내가 거닐 때 한 생각 동안에 일체 시방이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온갖 세계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不可說不可說] 세계를 경과하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가 모두 다 깨끗이 장엄됨은 큰 원력(願力)을 성취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뭇 차별된 행이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열 가지 힘의 지혜[十力智]를 만족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몸이 모두 앞에 나타남은 보현행원의 힘을 성취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작은 티끌 수만큼 많은 여래를 공경하고 공양함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여래를 공양하는 원력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여래의 법을 받아들임은 아승기의 차별된 법을 증득하여 법륜(法輪) 다라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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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머물러 지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보살행의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깨끗한 온갖 행이 인다라망(因陀羅網)과 같은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모든 삼매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하나의 삼매문에서 온갖 삼매문에 들어가 모두 원력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모든 근(根)의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모든 근의 끝을 분명히 알아서 한 근의 가운데서 온갖 근을 보는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며,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작은 티끌 수와 같은 때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온갖 때에 법륜을 굴리는 중생 세계에서 법륜을 그지없이 굴리는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요, 한 생각 동안에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온갖 세 세상의 바다가 모두 다 앞에 나타남은 온갖 세계 안의 온갖 세 세상의 분위(分位)를 분명히 아는 지혜 광명의 원력을 얻었기 때문이니라. 거닐 적에 이미 그러한지라, 앉고 서는 데도 그러하느니라.’” |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불자야, 이 자리에 머무르면/바로 이는 부처의 수용(受用)이니/언제나 그 가운데 있으면서/거닐며 그리고 앉고 눕는다”고 했다. |
[문] 이 『���종경록(宗鏡錄)』 중에 덕용(德用)이 되는 원인에는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 모든 법으로 하여금 혼융(混融)하여 걸림이 없게 하는가? |
[답] 화엄종(華嚴宗)에서 보면 그것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 |
첫째는, 마음만으로 나타난다는 것[唯心現者]이다. 온갖 모든 법은 참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어서 마치 큰 바닷물의 온 바탕이 물결을 이루는 것처럼 온갖 법은 한 마음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크거나 작은 것들의 모양은 마음을 따라 회전하고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걸림이 없다. |
둘째는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것[無定性者]이다. 이미 마음만으로 나타나고 인연을 따라 생겨 결정된 성품이 없고 성상(性相)을 다 함께 여의었다. 작은 것이 결정된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을 용납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니, 큰 것과 같아지면서 바깥이 없는 까닭이다. 큰 것이 결정된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티끌을 들이면서도 사이가 없는 것이니, 작은 것과 같아지면서 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하늘의 작은 티끌과도 같으면서 티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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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같이 많은 넓은 세계도 함유하거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는 결정적인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온갖 것일 수 있고, 여럿은 결정적인 여럿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하나일 수 있으며, 가장자리는 결정적인 가장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중간일 수 있고, 중간은 결정적인 중간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가장자리일 수도 있다. 늘이고 오므리고 고요하고 어지러움 따위가 하나하나 모두가 그러하다. |
셋째는 연기로 서로 말미암는다는 것[緣起相由]이다. 곧 법계 안의 연기법해의문(緣起法海義門)은 한량없거니와 간략하게는 열 가지 문이 있다. 자세히는 아래 권(卷)의 법성인연(法性因緣) 중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
넷째는 법 성품의 융통한 문이라는 것[法性融通門]이다. 사(事)에서만 보면 서로서로가 장애하여 상즉상입할 수 없고 만약 이(理)에서만 보면 하나의 맛일 뿐이어서 상즉상입이 없거니와 지금은 이와 사가 융통하여 걸림 없음을 갖추었는지라 이(理)와 다르지 않은 하나의 사(事)이다. |
이의 성품[理性]을 골고루 겸한 때에는 그로 하여금 이(理)와 다르지 않은 많은 사(事)가 소의(所依)의 이(理)에 따라 모두 하나 가운데서 나타나게 한다. 만약 하나 가운데서 이(理)를 모두 포섭하지 아니하면 참된 이(理)는 분한이 있어서 상실되고, 만약 하나 가운데서 이(理)를 모두 포섭하여 많은 사(事)가 따라 나타나지 아니하면 사는 이(理) 밖에 있으면서 상실된다. 지금은 이미 하나의 사 가운데 온전히 이(理)를 다 포섭되었거늘, 많은 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나타나지 않겠는가? |
「화장품(華藏品)」의 게송에 이르기를 “화장 세계의 있는 바 티끌에/낱낱 티끌 가운데서 법계를 본다”고 했다. 이 법계는 곧 사(事)의 법계이다. 이것은 바로 총괄적인 뜻이다. |
따로 또한 10현문(玄門)을 갖추었다. |
첫째, 이미 참된 이(理)는 온갖 법과 함께 상응하면서 이(理)를 남음 없이 포섭하였으니, 바로 모든 문과 모든 법이 동시에 구족한 문[具足門]이다. |
둘째, 사(事)가 이미 이(理)와 같이 능히 포섭하고 또 이(理)와 같이 넓고 두루하여 좁은 모양조차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넓고 좁고 순수하고 뒤섞임이 있는 걸림 없는 문[無礙門]이다. 또 성품은 언제나 평등하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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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고 널리 모든 법을 포섭하기 때문에 뒤섞인다. |
셋째, 이(理)가 이미 온갖 많은 사에 두루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로 하여금 이(理)에 따라 온갖 것 안에 두루하게 한다. 두루한 이(理)가 온전히 하나의 사에 있으면 온갖 것은 이(理)에 따라 하나의 사 안에 있다. 때문에 하나와 여럿이 있으면서 서로 용납하는 문[相容門]이다. |
또 티끌같이 제 모양은 바로 하나인데, 스스로 하나인 것이 동요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두루할 수 있고 여럿을 이루어야 되거니와, 만약 동요하면 스스로 하나인 것이 이내 두루함과 여럿이어야 함을 잃으므로 역시 하나조차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둘ㆍ셋 모두가 그와 같다. |
또 하나와 여럿은 서로가 말미암아 성립되는데, 하나가 완전히 여럿과 같아야 비로소 하나라 하게 되고, 또 여럿이 완전히 하나이어야 비로소 여럿이라 하게 된다. 여럿 밖에 따로 하나는 없으므로 여럿 안의 하나임을 분명히 알며, 하나 밖에 따로 여럿은 없는지라 이는 하나 안의 여럿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
진실로 여럿이 아니로되 하나가 여럿이 될 수 있고, 하나가 아니로되 여럿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성품 없음[無性]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하나가 여럿이라는 지혜가 있게 된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비유컨대 산수법(算數法)은 하나를 더하면/무량(無量)까지 이르게 되는 것 같나니/모두 다 이것은 근본의 수로되/지혜 때문에 나누며 갈라진다”라고 했다. |
넷째, 참된 이(理)는 이미 모든 법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하나의 사(事) 그대로가 참된 이(理)이다. 참된 이는 바로 온갖 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하나가 바로 저것의 온갖 사요, 온갖 것이 하나인 것은 위와 반대로 알아야 한다. 때문에 상즉해서 자재한 문[自在門]이다. |
다섯째, 참된 이(理)는 사(事)에 있되 저마다 전혀 본분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것에 있을 때에는 저것은 이내 숨게 된다. 그 때문에 숨고 나타남이 있는 문[隱顯門]이다. |
여섯째, 참된 이는 널리 모든 법을 포섭하므로 저 능의(能依)의 사를 띠면서 하나의 가운데 단박에 있게 되기 때문에 미세함이 있는 문[微細門]이다. |
일곱째, 이것은 완전히 이(理)를 포섭하기 때문에 온갖 것을 능히 나타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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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저것은 완전히 이(理)를 포섭하여 이것과 같이 단박에 나타난다. 이것이 저것을 나타나는 때에 저것의 능현(能現)과 소현(所現)은 다 함께 이 가운데서 나타나고, 저것이 이것을 나타내는 때에 이것의 능현과 소현 역시 그 가운데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겹겹이요 그지없기 때문에 제망이 있는 문[帝網門]이 있다. 진여는 마침내 그지없는 까닭이다. |
여덟째, 곧 사(事)는 이(理)와 같기 때문에 하나의 사를 들음에 따라 바로 참된 법문이다. 그 때문에 사에 의탁함이 있는 문[託事門]이다. |
아홉째, 진여는 낮과 밤ㆍ날과 달ㆍ해와 겁이 두루 있어서 모두가 온전히 있기 때문에 날[日]이라는 때에 있으면 겁에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다. 그 때문에 열 세상이 다르게 이루어짐이 있는 문[異成門]이다. 더구나 때는 법으로 인하여 있으므로 법이 혼융하거늘 때가 혼융하지 않겠는가? |
열째, 이 사(事)가 이(理)에 즉할 때에는 걸리지 아니하고 그 밖의 온갖 것과 항상 상응하기 때문에 주동자와 동반자가 있는 문[主伴門]이다. |
또 티끌은 법계의 체에서 분제(分劑)가 없어서 널리 일체에 통하므로 이것은 주동자이며, 곧 그 모두는 각각 따로따로이므로 이것은 동반자이다. 동반자는 주동자와 다르지 않으므로 반드시 주동자가 있어야 동반자를 이루며, 주동자는 동반자와 다르지 않으므로 역시 동반자가 있어야 주동자를 이루게 된다. |
주동자와 동반자는 서로서로 돕고 포섭한다. 만약 서로가 포섭되면 피차가 서로 없어서 따로 온갖 것이라 말할 수 없고, 만약 서로가 돕는다면 피차가 서로 있어서 똑 같이 온갖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모두가 주동자 그대로 동반자다. 그러므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주동자 안에는 주동자이기도 하고 동반자이기도 하며, 동반자 안에는 동반자이기도 하고 주동자이기고 하는 줄 알 것이다. |
그러므로 나의 이(理)로 융통하여 열 가지 문이 갖추어졌다. 그 때문에 이 이(理)에는 티끌티끌마다 두루 갖추고 생각생각마다 원융하여 하나의 법도 미치게 되지 아니함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
『화엄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
“그때 저 보구중생묘덕야신(普救衆生妙德夜神)이 선재동자(善財童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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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보살로서 중생을 조복하여 해탈시키는 신통력을 나타내어서 모든 상호(相好)로 그의 몸을 장엄하고 두 눈썹 사이에서 지등보조청정당(智燈普照淸淨幢)이라는 큰 광명을 놓았는데, 한량없는 광명이 함께 하였다. 그 광명은 일체 세간을 널리 비추고 세간을 비추고 나서 선재의 정수리로 들어가자 그 몸에 꽉 찼다. |
선재는 그 때 이내 구경청정륜삼매(究竟淸淨輪三昧)를 얻었는데, 이 삼매를 얻자마자 두 신(神)의 양쪽과 중간에 있는 온갖 땅의 티끌ㆍ물의 티끌ㆍ불의 티끌과 금강ㆍ마니 등의 뭇 보배의 작은 티끌이며 꽃ㆍ향과 영락의 모든 꾸미개 등의 이러한 온갖 것을 모두 보았으며, 모든 티끌의 낱낱 티끌 중에서 저마다 부처님 세계의 작은 티끌 수같이 많은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도 보았으며, 그리고 온갖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의 모든 원소가 쌓여 모인 것을 보았고, 온갖 세계가 잇닿아서 모두 지륜(地輪)에 유지되어 있는 것도 보았으며, 갖가지의 산과 바다ㆍ가지가지의 강과 못ㆍ여러 가지의 나무숲과 여러 가지의 궁전 등, 이른바 하늘 궁전ㆍ야차 궁전에서부터 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들의 궁전 집과 지옥ㆍ출생ㆍ염라왕(閻羅王) 세계의 온갖 사는 처소와 모든 갈래[趣]에서 윤회하고 생사하면서 오가는 것이며 업을 따라 과보를 받는 각각 차별된 것도 모두 보지 아니함이 없었다. |
또 온갖 세계의 차별된 것도 보았으니, 이른바 혹은 세계가 더럽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깨끗하기도 하며 혹은 세계가 더러운 데로 나아가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깨끗한 데로 나아가기도 하며 혹은 세계가 깨끗하다가 더러워지기도 하고 혹은 세계가 더러웠다가 깨끗해지기도 하며 혹은 세계가 한결같이 깨끗하기만 하고 혹은 세계가 그 형상이 편편하기도 하며 혹은 엎어져 있기도 하고 혹은 기울어 섰기도 하는, 이러한 모든 세계와 온갖 갈래 안의 것을 다 보았으며, 이 보구중생야신이 온갖 때와 온갖 처소에서 모든 중생의 행모와 언사와 행해(行解)의 차별에 따라 방편의 힘을 써서 널리 그의 앞에 나타나 마땅한 대로 교화하고 제도하는 것을 모두 보았다.” |
다섯째는 환술과 같고 꿈과 같다는 것[如幻夢者]이다. 마치 요술쟁이가 한 물건을 변화시켜 여러 가지 물건으로 만들고 여러 가지 물건을 한 물건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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