浪商에의 꿈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고교야구의 꽃'이라는 고시엔에 출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쓰모토상업에 있는한 그것은 한낱 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이발소에 갔을 때였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무심코 펼쳐든 '아사히그라프'라는 잡지에서 나는 놀라운 발견을 한 것이다. 춘계 고시엔인 선발대회(일명 센바츠)에서 우승한 나니와상업(浪華商業) 멤버의 화려한 사진에 내 눈은 빨려들 것 같았다. '그렇다. 浪商(나니쇼)으로 옮기면 될게 아닌가. 어째 여태 거기까지 생각이 못미쳤나!'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머리를 깍이면서 그 흥분은 현실 앞에 산산조각이 났다. '나니쇼라....그러자면 오사카에서 하숙을 해야 하는데...그런 돈이 어디있나!' 가난한 야구소년의 속절없는 백일몽이었다. 현재 있는 학교도 어머니가 '곱창구이' 장사에 형이 택시운전으로 근근히 벌어오는 돈으로 억지로 다니는 형편.....정녕 환상일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줄 알면서도 나니쇼에의 환상을 나는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형을 졸랐다. "너 미쳤니?" 형의 어이없는 표정. 그러나 나는 물고 늘어졌다. 나는 협박도 했다. "야구를 못할 바에야, 형도 알다시피 성질도 더러우니 깡패밖에 더 되겠어?" 사흘밤을 졸라 형의 승락을 얻어냈다. 다음 문제는 어머니. 어머니의 반응은 무자비 바로 그것이었다. "아이고! 절대로 안된다"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노릇이었다. 어서 어서 졸업해서 덤프차 운전사라도 돼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돼주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내게 부치는 꿈이었다. 하필이면 덤프차 운전사냐고? 일본에서 한국인이 할 짓이란 그것 아니면 깡패였다. 누나도 반대였다. 나는 1주일을 어머니 설득에 나섰다. 끈질기게 눌러붙었다. 마침내 "정 그렇다면...하지만 여유있는 돈은 못보낸다..." 아, 나는 마침내 승락을 얻어낸 것이다. 고시엔행 표를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不屈(불굴)의 한국인 張 勳....제2부 시련의 고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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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돌아가라
인생에는 누구나가 전기란게 있다. 나니와상업에 들어가기 위해 형과 함께 집을 나선게 나로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당시 나니와상업은 고시엔을 제패한 야구명문. 한다 하는 준재들이 모여있었다. 오사카로 향하는 야간열차 3등칸에서 내 가슴은 뛸대로 뛰고 있었다. 그때가 1956년 봄. 이미 마츠모토상업에는 퇴학계를 낸 뒤라 하늘이 조각나도 뒤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나로서는 배수의 진이었다. 오사카에 닿은 것은 이튿날 아침. 막상 나니와상업이 어디있는지 조차 몰랐다. 가까스로 찾은 교문 앞에 섰을 때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리는 것을 어쩌는 수가 없었다. 우선 야구부의 나가시마(中島春雄) 감독을 찾았다. 다행히 만나주긴 했지만 첫마디가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지 그래" 완곡한 거절이었다. 순간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듯 눈앞이 캄캄했다. 희망이 절망이 돼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돌아가다니 내게 돌아갈 학교가 어디 있는가? 형제는 체면 불구 매달렸다.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태까지도 자네같은 학생이 몇십명 몇백명 찾아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로 퇴학해 갔다네. 처음부터 아예 방향을 바꾸는게 좋아" "한번만....제발 한번만 저의 투구만이라도 봐주십시오" 우리들의 간청에 나가시마감독도 나중에는 꺽였다. 흥분과 자신으로 글러브를 끼는 나. 그 모습을 기도하듯 쫓는 형의 시선. 그러나 볼을 던지면서 마음은 평소의 연습 때처럼 차분히 가라 앉았다. 여느 때의 내 실력 쾌속구가 날았다. 한번 두번 세번..."이제 그만" 감독의 소리에 나는 제정신을 차렸다. '아, 어떤 판정이 나오려나' 목이 탔다. 그러나 감독의 얼굴이 크게 웃고 있었다.
"잘왔어 나니쇼(浪商)에" 순간 나는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형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1학년 2학기부터 나는 나니와상업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와 전후해서 하고 넘어가야할 이야기가 하나 있다. 여태까진 밝히지 않은 극비중의 극비사건이지만.... 단바라중학 2년 선배에 다카다(高田)란 야구선수가 있었다. 이 선배가 '난카이(南海) 호크스'의 테스트를 받은 것이다. 마침 그때 나는 나니와상업에 테스트를 받으러 오사카에 갈 무렵. 이때 난카이 스카우트가 "너도 함께가서 던져보지 않을래? 나니와상업 테스트의 연습하는 셈 치고"하는 바람에 멋모르고 오사카구장에서 시키는 대로 공을 던진 적이 있었다. 사실은 내가 테스트 대상인줄은 전혀 눈치 못채고 전력투구를 했었다. 그런데.... "2군에서 2, 3년만 노력하면 좋은 선수가 되겠어. 어때 난카이에 안오겠어?" 놀란 것은 나 자신. 만일 프로구단 교섭이 고교야구연맹에 알려지는 날이면 마츠모토상업은 고시엔대회 지역예선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 사실 때문에 마츠모토상업에서 나를 퇴학시킨 것처럼 소문이 났지만 사실은 다르다. 어떻든 나는 그때만해도 프로구단에는 관심없이 오직 고시엔의 꿈에만 부풀어 있었다. 만약 내가 나니와에 안가고 난카이 호크스에 들어갔다면 내 야구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야릇한 운명의 갈림길같은 것을 가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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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6의 대결 하숙은 학교 가까운 곳에, 하루 두끼에 6천5백엔. 게다가 공납금....당시 형은 27살로 택시운전사 월급이 1만7천5백엔이었다. '곱창구이'집도 여전히 하고는 있었으나 별다른 보탬은 되지 못했다. 전적으로 집안 생계는 형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피가 스며있는 돈이 한달에 1만엔, 때로는 9천엔씩 보내져온 것이다. 술 담배도 않고 오직 동생 잘되는 것을 위해 보내온 형의 거룩한 돈. 형을 위해서도 정규멤버가 되야 겠다고 나는 맹세했다. 그러나 야구부에 나간 첫날 나는 놀라고 말았다.
1학년만도 1백50명. 그중 투수가 80명. 전 야구부원이 2백50명이나 되었다. 과연 천하의 명문 야구부였다. 워낙 큰 식구라 함께 연습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그라운드에서는 정규멤버와 고참들만이 연습할뿐, 1학년은 그라운드에도 못들어 가고 전원이 담밖에서 그저 그라운드를 향해 와와 소리치는게 고작이었다. 물론 그라운드의 광경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볼이 담너머로 날아오면 서로 이것을 잡으려고 야단법석이다. 1백50명이 보이지 않는 그라운드를 향해 와와 소리치고 있으니 어찌보면 장관이지만, 아무튼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학생들 좀 모자란게 아냐?" 장보고 오는 아주머니에게서 이런 핀잔을 들은 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꺽이지 않았다. '2백명, 3백명이면 어떠냐. 형 지켜보세요. 기어이 정규멤버가 돼 보일테니' 나는 전신이 불덩어리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
1학년에겐 조조연습이라 해서 아침 6시 부장과 감독이 보는 자리에서 캐치볼을 한다. 그래서 잘한 선수는 체크돼 하오 연습때 그라운드에 들어간다. 나는 빨랐다. 입부한지 얼마안돼 그라운드 그룹이 된 것이다. 그라운드 그룹은 50명, 여기서 14명의 주전선수가 뽑힌다. 그런데 예외적인 나의 빠른 발탁이 고참들의 눈에 거슬리게 됐다. "이봐, 풋나기가 거만해" 하루는 주전에 뽑히지 못해 불평 많은 고참 대여섯명에게 불려갔다. 야구를 하는 몸들이라 모두가 덩치들이다.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그렇다고 무릎꿇을 내가 아니었다. 단박에 치고받는 난투극...나도 맞았지만 그쪽 손해도 컸다. 이런 실랑이는 그뒤에도 두세번 있었다. 그때마다 절대로 복종을 하진 않았다. "굉장한 녀석이 들어왔어. 하리모토란 녀석 조심해" 상급생 사이에선 이런 소문이 떠돌았다. 나니와상업에서도 나는 이렇게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을뿐 아니라 1학년말에는 대망의 레귤러 14인 중에 끼는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나니쇼(浪商)는 불운한 시대였다. |
生面不知의 라이벌 내가 나니쇼에 들어간 그해 학교에서 불상사가 났다. 고참의 하급생 주먹제재 사건이 표면화해서 고교야구연맹에서 2년간 공식경기 금지 제재를 받은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면 나로서는 단한번 3학년 여름대회밖에 고시엔 출전 찬스가 없게되는 셈. 이가 갈리게 원통했다. '그렇다. 전혀 기회가 없는건 아니다' 스스로를 달래며 먼 훗날의 여름을 위해
나는 오로지 연습에만 열중했다. 연습이 끝나면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주머니를 뒤졌더니 달랑 10엔짜리 한개와 5엔짜리 동전 한개. 그것이 전재산이었다. '15엔... 빵을 사먹나,목욕을 가야하나....' 마음은 빵쪽으로 끌렸다. 이런 나날들.... 15엔의 귀중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것은 형이 잠을 설쳐가며 벌어 보내준 돈이다' 15엔의 동전을 하숙에서 혼자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형의 편지는 귀절마다 돈을 많이 못보내 미안하다는 애정어린 내용뿐. 형의 편지를 되풀이 되풀이 읽고는 눈이 젖어오는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패스포트 속에 간직한 어머니, 형, 누나의 사진을 꺼내 바라보며 히로시마를 그리워 했다. 2학년이 되자 귀도 넓어져 전국의 에이스 소문이 들려왔다.
그중에서 내 신경을 건드린 것이 와세다실업(早稻田實業)의 좌완투수 王貞治였다. 어느틈엔지 王貞治는 가상의 적수로서 내 머리속에서 점점 커다랗게 자라갔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최대의 라이벌. 사실 王貞治는 노와인드업 모션을 무기로 봄 고시엔인 센바츠(選拔大會)에서 4경기에 등판 3경기를 완봉함으로써 고치상(高知商)을 격파, 우승기는 王貞治에 의해 처음으로 도쿄로 넘어갔다. 방어율 0.75란 놀라운 피칭이었다. 피는 뛰는데 고시엔에 나갈수 없는 몸. "白球가 나의 영원한 애인입니다. 인생에 두 애인은 사치입니다"...57년 6월에 형에게 보낸 편지중의 한 귀절이다. 한창 사춘기이면서도 내 눈에는 야구밖에 없었다. 형도 형수를 맞이했다. 그러니 생활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그런데도 꼬박꼬박 돈을 보내주니.....생각이 이에 미치자 형에게서 온 편지를 누워 읽다 갑자기 죄송해져서 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번은 형의 편지에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누나가 취직해 1천엔을 보내온 것이다. "배가 고플테니 빵이라도 사먹어라"....그 알량한 월급에서 보내온 정성, 어두워진 방. 나는 형과 누나의 편지를 움켜쥐고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넘쳐나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고 또 훔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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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진군(巨人軍)서온 최초의 교섭 나는 더욱 더 분발했다. 고시엔 출전...그때의 꿈은 오로지 이 한가지뿐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나니쇼의 나가시마감독이 "교진의 미즈하라(水原) 감독이 너를 자기네 피쳐로 탐내고 있더라"고 귀뜸하는게 아닌가. 나는 펄쩍 뛰며 귀를 의심했다. 흥분으로 가슴은 두근두근. 즉시로 형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렇게 동경하던 교진에서 교섭이 오다니! 이게 꿈이 아닌가. 그러나 형의 의견은 달랐다. "고교만은 나와 달라. 그런 뒤에 어딜 가건 간섭않겠다. 생각해 봐라. 뭣때문에 내가 고생하고 있겠니? 너에게 야구재능이 있다면 그때부터 프로를 시작해도 늦지 않을거다...." 형의 편지로 나는 정신이 확 드는것 같았다. '그렇다. 형은 무슨 타산으로 고교를 보내주는게 아니다. 고교만은 졸업하자. 그뒤라도 늦지는 않을테니까...'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나 버렸지만 나는 자신이 생겼다. 그무렵 존경하던 가네다(金田正一.당시 고쿠테쓰 스왈로즈) 투수와 같은 명투수가 되겠다고 마음 속에 거듭거듭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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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者로 가는 길 나니쇼(浪商)의 투수는 하루 3백구에서 4백구를 던진다. 6월의 어느날, 릿쿄대(立敎大) 포수인 가다오카(片岡宏雄)선배가 모습을 보였다. 나를 찾더니 던져 보라는 것이었다. '포수의 지존이라 불리는 가다오카선배가 내 공을 받아주다니!' 그런 영광이 없었다. 이미 연습을 끝낸 뒤였지만 감히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럭저럭 던진게 그날 1천구 정도는 됐다. 그러나 이것이 어깨를 망가뜨릴 줄이야! 이튿날 잠에서 깨면서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어깨를 꼼짝도 할수 없었다. 다음날도...다음날도... 야구에의 꿈이 무참하게 시들어 갔다. 고시엔도 교진군도...아득히 사라져 갔다. 그렇게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가족들... 너무나 기가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젠 틀렸구나' 꿈이 컸기에 절망도 컸다. 열흘뒤 나가시마감독에게 야구부를 그만 두겠다고 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감독은 저녁때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넌 사실은 투수보다 타자에 더 소질이 있어" 엉뚱한 소리였다. "너를 위로하려는 말이 아냐, 속는 셈치고 내말을 믿어봐" 너무나 진지한 얼굴이라 거짓말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좋다. 한번 더 걸어보자' 내 마음은 금새 가벼워졌다. 공대신 쥔 배트. 한달 가량의 조심스런 연습으로 나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뒤로 이어진 타자 특훈. 거짓말처럼 공이 잘맞아 준다. 타자로 전향, 2개월만에 나는 4번타자를 맡았다. 수비는 중견수. 나가시마감독이 '타자로서의 소질'을 꿰뚫어 봐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나는 무엇이 되어 있었을까. 덤프트럭 운전사가 되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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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고시엔에의 꿈
희망에서 절망, 실의에서 광명을 찾았다 싶기가 무섭게 어두운 그림자는 또 비치기 시작했다. 나를 아끼던 나가시마감독이 그만두고 T코치가 신임 감독이 된 것이다. 그동안 한신, 주니치, 교진 등의 구단에서 내게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쳐왔다. 나는 여전히 나가시마감독을 찾아가 상의를 하곤 했었는데 이것이 T감독의 눈에 거슬렸다. 이게 T감독과의 반목으로 이어져 결국은 야구선수 등록명부에서 내 이름이 말소당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때는 마침 2년간의 대외 경기금지의 제재도 풀려 3학년 여름의 고시엔(甲子園)대회를 노려 전팀이 의욕을 불태우고 있을때. 그런데 또 불행하게도 야구부에서 하급생 린치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나는 부(副)캡틴. 하기야 그 자리에 있었긴 했어도 나는 절대로 손을 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10월21일, 아무런 사전양해도 없이 내 이름이 등록명단에서 지워지고 만 것이다. 말할것도 없이 이것은 T감독이 나 하나에게만 책임을 씌워 주모자를 처벌했다는 대의명분을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게다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녀석은 폭력선수다. 조센진(朝鮮人)은 별수 없다"라는 예의 중상적인 소문. 나는 증오의 눈물을 흘리며 T감독을 저주했다. 아무도 없는 요도가와(淀川) 강가. 어둠속에 감독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새끼!" 나는 그 얼굴을 향해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T감독, 네가 사람이냐. 치사한 놈..." 나는 줄줄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 하지도 않고 그 얼굴을 향해 또 배트를 휘둘렀다. 밤새도록 내내 배트를 휘둘렀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밤하늘을 쳐다봤다. 그 별들이 그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별하늘을 잊을 수가 없다. 고립무원한 상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나가시마 전감독을 비롯한 불과 몇몇뿐. 이 사건은 프로에의 길까지 막아 버렸다. 교진 미즈하라감독의 진력으로 입단이 거의 확정됐는데 시나가와(品川) 구단대표로부터 거절을 당한 것이다. "난폭자는 교진에 필요없다" 상처입은 늑대가 혼자서 가시밭길을 꿰질러가듯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꺽이지 않았다. '야구부원이 아니라고 연습까지 못할 것은 없다. 좋다. 나 혼자서라도 연습을 할것이다' 역경에 놓였을 때일수록 그 사람의 투지와 노력이 필요할 때는 없다. 그것을 이겨냈을 때 반드시 보답의 열매는 맺어진다. 혼자서의 연습이 시작됐다. 그것은 가혹한 자신과의 투쟁이었다. 혼자서 묵묵히 요도가와 강가를 몇km씩 달렸다. 미운 얼굴이 떠오르면 그것을 공인 셈치고 배트를 휘둘렀다. 하루 1천번의 배트 휘두르기. 밤에 야구부원이 돌아가면 그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었다. 텅 빈 그라운드. 나는 베이스를 꺼내 제자리에 갖다놓고 별빛에 베이스러닝을 했다. 혼자서 뛰고 달리고 슬라이딩까지....백 네트에 하얀 수건을 걸어두고 이번에는 투구연습, 수건에 볼이 맞으면 어둠 속에서도 수건이 흔들리는게 보였다. 이것이 본루반구(本壘返球)의 연습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외로운 연습은 계속되었다. 그날도 수건을 목표로 무심코 볼을 던지고 있을때 인기척이나서 돌아봤다. "열심히하고 있군...." 나가시마 전감독의 목소리였다. 그 따뜻한 격려에 여태까지 참고 있던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쳤다. 오열.... 나는 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3학년이 됐다. 한때 나가시마 전감독의 진력으로 야구부 복귀의 서광이 비치기도 했지만 여전히 T감독의 억지로 끝내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천하제일의 나니쇼가 조센진의 힘을 빈다는 것은 수치다. 하리모토(장훈) 따위는 우리 야구부에 필요없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형에게 편지를 썼다. "타국의 영웅이 되려했던게 잘못이었는지 몰라요. 허무한 굼이었는지 몰라요. 하하하" 자조의 웃음이었다. 그렇게 집념을 불태우던 고시엔 출전....그것은 내게는 영영 이룰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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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것이 祖國 이무렵 귀가 솔깃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在日韓國人 高校選拔팀'에 끼여 조국 고교생과 친선경기를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고시엔에 못나간 우수한 교포 고교선수로 조직된 팀이었다. 조국 - 그렇지 않아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반대였다. 치안상태가 좋지 않다는게 반대 이유였다. 나는 그 반대를 무릎쓰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나로서는 어딘가 외국에나 가는듯 조국에 간다는 실감이 우러나지 않았다. 그런데...조국땅을 밟았을때 사정은 달라졌다. 감동...그렇다, 뭐라 말할수 없는 감동이 내 온몸을 전류처럼 꿰질렀다. 공항의 환영인파.
한국고교생 밴드가 연주하는 '아리랑' '도라지'. 그것은 히로시마의 한인촌에서 들은 노래였고 자장가 삼아 어머니가 들려주던 노래였다. "내가 들으면서 자란 노래..." 이런 생각이 들자 찌르르 등줄기에 전해져 오는 것이 있었다. 잊었던 민족의 피가 몸안에서 부르르 떨며 끓어 올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30여년만에 귀국한다는 임원이 트랩을 내리면서 숫제 엉엉 울고 있었다. 스튜어디스의 소매자락을 붙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이 민족이라는 건가. 이것이 아버지의, 어머니의 모국인가. 그리고 형과 누나, 나의 모국인가" 일본에서는 일찌기 맛보지 못했던 영혼 속부터 뒤흔들려지는 깊은 감동이었다.
"조국의 품에 잘 돌아오셨습니다" 환영나온 고교생이 태극기와 꽃다발을 들고 인사말을 했을때 나는 소스라치며 동포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은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한국에서 묵는 며칠 우리는 이승만대통령을 예방했다. 대통령이 내손을 꼭 쥐었다. 손톱이 전혀없는 손. 손톱은 일본헌병이 모두 뽑아 버렸단다. "일본사람에겐 절대로 지지말어" 지금도 이 한마디는 내가슴에 강렬히 소용돌이 치고 있다. 한달동안의 전국 순회 친선경기. 그동안 나는 애 온몸에 민족의 자랑스러움이 용솟움치는 것을 실감했다. '나의 조국은 한국이다. 이제 나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로 살아가는 거다' 이것은 흔들릴수 없는 신념으로 뿌리박혔다. 차별과 박해로 겪은 슬픔이 이제야 조국의 땅을 밟으면서 새 생명력이 돼 혈관속에 맥박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는 삶의 支柱가 생긴 것이다.
어머니에게 바친 계약금
나는 프로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마음같아서는 교진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예의 사건때문에 그곳은 길이 막혔고 형은 주니치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도쿄로 가고 싶었다. 도쿄의 구단은 교진(巨人)과 도에이(東映), 마이니치(每日). 나는 서슴없이 '도에이 플라이어즈'로 정했다. 주니치의 6백만엔 계약금을 거절하고 2백만엔의 계약금을 택한 것이다. 급료는 4만5천엔. 당시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1만5천엔이었으니 그것만해도 엄청난 돈이었다. 이해 王貞治는 교진에 입단했다. 계약금은 1천8백만엔, 급료는 12만엔. 나하고는 엄청난 차이였다. "王貞治는 나와같은 좌타자. 다른 것은 계약금과 백넘버뿐. 승부는 이제부터다" 내 투지는 활활 타올랐다. 도에이에서는 계약금말고도 이사비용이라 해서 30만엔을 더 얹어 주었다. 우선 신세진 사람들에게의 인사로 20만엔을 쓰고 나머지 2백10만엔을 가지고 나는 형과 함께 야간열차로 히로시마로 향했다. 신문지로 싼 2백만엔. 형과 번갈아 이것을 지키느라 한잠도 자지 못했다. "아니 이렇게 큰 돈이 어떻게...." 어머니도 누나도 놀랐다. 그들로서는 평생 보지도 못한 큰돈이었다. "그렇게 말썽만 부리던 녀석이..."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이게 다 형님 덕입니다" 나는 그중에서 10만엔만 갖고 나머지 2백만엔은 몽땅 형에게 드렸다. 형도 감개무량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주루룩 두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자신의 청춘을 희생해가며 동생을 뒷바라지 해온 형으로서 어찌 가슴에 오가는 것이 없었겠는가. 어머니도 누나도 울었다. 얼마만에 흘려보는 기쁨의 눈물이었을까. 형은 이 돈으로 땅을 사 지금의 집을 지었다. 그 판잣집도 지금은 그리워 진다. |
데뷔전의 쓰라린 三振 "거물 발굴" - 도에이쪽에선 기대가 컸다. 당시 내 키는 180cm 체중 82kg. 우선 덩치로 봐도 다른 선수들을 누르고 있었다. "타격, 주력, 어깨도 좋아. 잘만 크면 거물이 되겠는데 아직은 미완성품이야" 2군 감독은 이렇게 기자단에게 말했다.
나는 오픈전에서도 상대방 투수를 타석에서 야유하기도 했다. 이게 또 "신인이라 볼수 없을만큼 배짱이 좋다"는 평을 받게 됐다. 고쿠테쓰(國鐵) 스왈로즈(야쿠르트 전신)와의 대전때는 라이트 스탠드에 홈런을 쳐갈기고는 고쿠테쓰 벤치에 소리소리쳤다. "34번 나와라". 34번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 대투수 가네다(金田正一. 한국명 김경홍)선수. 나니쇼 시절부터 동경하던 가네다 선수의 공을 어떻게든 꼭 한번 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소리를 들어서인지 가네다투수가 등판했다. 피융!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쾌속구. 나는 보기좋게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나가시마(長嶋茂雄)선수도 王貞治도 가네다투수에겐 하나같이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했었다. 아무튼 오픈전에서 8경기 출장에 성적은 29타수9안타(3루타4) 홈런1 타점4 타율0.310. 이번 시즌엔 아직 못보낼 거라 보고 있던 이와모토감독은 이 성적을 보고 일약 나를 1군 스타트멤버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공식전은 역시 오픈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상대팀은 한큐(阪急). 투수 요네다(米田)에게 3구삼진의 참패. 게다가 수비에선 평범한 플라이를 엉성하게 놓치는 실수. 즉각 나는 교체되고 말았다. 고개를 떨구고 벤치에 돌아오니 아무도 말을 건네주지 않았다. 분하고 부끄럽고....커다란 몸집을 오히려 어디다 둬야할지 난처했다. 밤새도록 잠도 못잤다. 이튿날.... 2군으로 미끌어지리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리가 없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를 교체한 것은 더 이상 실수를 저질러 내가 자신감을 잃게되는 것을 염려해서 취해준 이와모토감독의 따뜻한 배려였다. '좋아. 오늘은 꼭 어제의 오명을 설욕해야지' 나는 욕기백배, 경기에 임했다. 첫 타석에서 2루타를 뽑고 두번째 타석에선 마침내 투런홈런을 갈겼다. 라이트 스탠드로 쭉쭉 뻗어가는 백구. 감독의 웃고있는 얼굴이 보였다. 프로에 들어와 제1호 홈런. 천천히 베이스를 돌며 나는 프로야구의 홈런맛을 충분히 감상하고 있었다. 이후 프로야구에도 차츰 길이들어 나는 쾌속조의 진격을 거듭했다. 6경기가 끝났을때 나는 이미 퍼시픽리그 타격 10걸 가운데 7위에 올라 있었다. 17타수7안타 타율0.412. |
감격의 新人王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온 것은 이무렵이었다. "네가 안타를 하나치면 하얀 두루미를, 홈런을 치면 빨간 두루미를 종이로 접기로 했다. 시즌이 끝났을때 두루미가 몇개나 될지, 그것이 내 즐거움이다" 어머니가 야구를 알 턱이 없다. 아마도 형이 가르쳐 줬겠지.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가슴에 안아보며 더욱 더 투지를 불태웠다. 나는 시즌동안 날뛸대로 날뛰었다. 시즌이 끝났을때 비록 도에이는 우승을 놓쳤지만 나는 염원하던 신인왕을 획득할 수가 있었다. 신인왕..... 그것은 야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욕심내는 명예다. 그해에 프로에 들어간 선수밖에 딸수 없는 생애에 한번밖에 찬스가 없기에 더욱 그랬다. 센트럴리그에서는 라이벌시하던 교진의 王貞治가 아니라 다이요의 구와타(桑田武)가 뽑혔다. 아무튼 도에이에서는 처음 낸 신인왕이었다. 신인왕 표창식은 오사카구장에서 있었다. 어머니도 형도 나의 영광된 모습을 보려고 와 있었다. 어머니는 너무나도 기뻐 네트안쪽으로 달려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내게 소리쳤다. "잘했다. 勳아. 참 잘했다". |
史上 최연소 4번타자 입단 2년째. 나는 19살의 나이로 프로구계 사상 최연소 4번타자가 되어 있었다. 홈런이 마구 터졌고 안타가 쏟아졌다. 흔히 "2년생 징크스"라 하지만 내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성적은 19타수 10안타. 타율 0.526으로 톱이었다. "타석에 들어선 하리모토를 보면 위압감마저 느낀다" 난카이 에이스 스기우라(杉浦忠)투수가 그러면서 쓴웃음을 웃었지만 나는 되도록 여유있고 대담하게 버티어 상대 투수를 위압했다. 겁을 먹어서는 야구를 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센트럴리그에서는 역시 교진의 王貞治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국인, 좌타자, 드라이한 성격, 프로2년생, 그리고 19살..." 어떤 잡지가 두사람의 공통점을 이렇게 지적하며 '새로운 영웅'이란 특집을 낸것도 이해였다. 王貞治는 대만 국적이다. 게다가 특기할 것은 올스타전에 뽑혔다는 사실이다. 프로 2년만에 획득한 영예였다. 히로시마에서 어머니와 형도 와 주었다. 제1차전에선 타격상. 제2차전에선 노히트. 그러나 제3차전에선 수훈상을 받았다. 퍼시픽리그 득점 6점 가운데 3점은 내가 따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1회초 이미 나는 홈런을 작렬시켰고, 2회에도 중전 앞에 떨어지는 깨끗한 안타를 쳤다. 어머니는 트로피를 끌어 안으며 눈물겨워 했다. 이때 나는 누나를 생각했다. "누나도 텔레비젼을 봤을까" "그럼 보고말고. 좋아서 울었을 거다" 貞子 누나는 그해 1월, 교포(道家大基)와 결혼했었다. 지금은 네 아이의 어머니로 센오즈(?. 泉大津 혹은 泉津, 大津)에서 가게를 갖고 있지만 결혼한 것은 도에이가 하와이 원정을 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히로시마로 달려가 누나의 손을 덥석 쥐었다.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나와 주체할수가 없었다. 누나도 울었다. 나중엔 둘 다 손능 부여잡은 채 엉엉 울고 말았다. 누나가 시집을 가는게 슬펐는지, 그렇게 고생만 하더니 새색시가 된것이 기뻐서 그랬는지.... 나로서도 분간이 안갔다. 아마도 그 양쪽 다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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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함께 조국에 1961년 봄, 입단 3년째 도에이는 새감독을 맞이했다. 다름아닌 교진에 있으면서 내 입단을 주선해 주던 미즈하라(水原茂)감독이었다. 반갑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나는 12월30일, 하네다공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머니와 함께였다. 나는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멤버로 3년전에 찾은 적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1940년 3월에 일본에 온 이래 실로 21년만의 귀향길이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水長里란 마을. 온 마을이 친척들로 고교원정때 나는 이 마을에 들러 대환영을 받았었다. 내 평생의 꿈 가운데 하나는 어머니를 귀국시켜 이 친척들과 함께 설을 쇠게 하는데 있었다. 그 꿈이 지금 이루어진 것이다. "아, 조국..."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닿았을때 어머니는 감격으로 목이 메었다. "꿈에 본 조국. 나는 지금 돌아왔다" 비오듯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기쁘실까. 패전 직후의 히로시마에서 박해와 인종차별을 받아가며 참아온 긴 긴 세월. 그 고생이 지금 보람이 있어 조국의 땅을 밟는 것이다. 고향을 떠난지 20여년만에 밟아보는 조국땅.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훈아 고맙다" 내 손능 잡는 어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도 참을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눈물을 흐르는 대로 내버려 뒀다. 수장리 마을은 약 50가구. 나는 '젊은 영웅'으로 대환영을 받았고 어머니는 육친들과 감격의 재회를 가졌다. 마을에는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먼 連山도 눈으로 덮여 있었다. 마을에는 80이 되는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 "어무이 잘있었는교" 달려든 어머니를 끌어안고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조국이란 이렇게 좋은 것인가. 육친의 사랑은 이렇게 매듭이 굳은 것인가. 나는 다시한번 조국의 뜨거움을 가슴에 느꼈다 |
쾌진격(快進擊) 미즈하라감독은 대선수가 되려면 '진취' '야망' '기민'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과 같이 새감독을 맞이한 도에이는 쾌조의 돌격. 나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분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망의 첫 首位打者를 획득한 것이다. 기록은 129게임 473타수 159안타 2루타 31, 3루타 10, 홈런 24, 타점 95, 4구 51, 삼진 42, 타율 0.336였다. 센트럴리그 수위타자는 교진 나가시마(長嶋茂雄)로서 타율은 0.353로 나보다 위였다. 이듬해인 62년엔 도에이로서도 최고의 해였다.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센트럴리그에서 올라온 한신(阪神) 타이거즈를 눌러 실로 17년만에 일본의 패권을 쥔 것이다.
나는 타율-홈런-타점의 3관왕을 은근히 노렸지만 한 가지도 따지 못했다. 그러나 최고수훈선수(最高殊勳選手)로 뽑힌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명예가 어디 있을까. 프로선수라면 한번쯤은 꿈꿔보는 영광의 자리. 나는 그것을 입단 4년, 불과 21살의 젊은 나이에 움켜쥔 것이다. 그해 센트럴리그에서는 한쪽발을 들어올린 플라밍고타법으로 바꾼 王貞治가 드디어 제 실력을 발휘, 최초의 홈런왕을 땄다. 이래로 13년 연속 홈런왕을 지켜왔으니 그야말로 위대한 타자라 할수 밖에. 운명의 여신은 나에게 미소를 던지기 시작했다. 내 야구인생은 순조롭게 뻗어 통산 수위타자 7회, 시즌 최고타율 0.3834 등 일본 신기록을 세웠다. 수위타자 7회란 나가시마 시게오의 6회를 깬 신기록이며 더우기 67년에서 70년까지 연속 4년 수위타자를 따 나가시마의 연속 3년을 깼는데 이것도 일본 신기록, 타자로서는 긍지 높은 기록이다. 시즌 최고타율도 '타격의 神'이라던 가와카미(川上哲治)선수의 0.3831를 웃도는 신기록. 생애 타율은 현재 0.324. 3천타수 이상 친 사람으로서는 통산 3할 이상의 타율을 올리고 있는 것은 가와카미, 나가시마, 王貞治 등 10명밖에 없으며 그것도 3할2푼대는 나 하나밖에 없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대기록이라 하겠다. |
도에이 떠나 교진으로 세월은 흘러 재작년, 74년. 그동안 많은 감독들이 왔다가는 갔다. 그리고는 나카니시(中西)감독. 마침 퍼시픽리그에 지명타자제가 생겨 나를 지명대타자로 쓰려는 움직임이 구단 간부들 사이에 일었다. 이유는 수비가 약하다는 것. 그러나 야구에는 흐름이란게 있다. 경기의 흐름을 쫓아 타석에 섰을때 비로소 유감없는 힘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내 수비 잘못으로 진 경기와 내 타력으로 이긴 경기를 비교할때 어느쪽이 더 많은가. 후자가 말할것도 없이 훨씬 많다. 나는 구단 간부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19살에 프로에 뛰어들어 16년. 35살이 되서야 갑자기 내 신변이 뒤숭숭해진 것이다. 여기 있다가는 모처럼 올라선 비탈길을 굴러 떨어질 뿐이다. "잔류냐 퇴단이냐" 나는 고민했다. 머리도 식힐겸, 나는 白仁天 등 13명의 '일본프로야구 한국인선발팀'을 조직한 가네다(金田正一.한국명 金慶弘)감독을 따라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註 당시 참가한 선수는 白仁天, 金日融, 張明夫, 趙正次, 宋一秀, 金戊宗, 金有世, 朱東植 등이다) "장훈 선수 만세, 만세!" 구장이 떠나갈듯한 환성과 폭발하는 박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힘들었지만 조국 한국의 기대에 부응할수 있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나는 '민족의 영웅'으로서 '서울명예시민', '한국의 명예로운 국민'에 추대되었다.
 일본에 온 나는 또다시 잔류냐, 퇴단이냐 하는 고민에 빠졌다. 가네다감독도 "거기 있다간 자네 죽네"하며 퇴단을 충고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도 말이 있었으나 결국 나는 교진으로 적을 옮기기로 했다. 소년시절부터 꿈꾸던 구단. 거기엔 나가시마감독을 비롯, 王貞治....사나이의 우정으로 맺어진 분위기가 있다. 생각하면 王貞治선수와는 이상한 실로 이어져 왔다. 마음 속의 라이벌로 생각해 왔었고 프로에도 같은 해에 입단, 기록을 다퉈왔다. 그뒤 그는 위대한 홈런왕의 길을 매진했고 나는 중거리 히터의 길을 다듬어 왔다. 그러나 100호 홈런은 20일 가량 내가 먼저 수립했다. 그것은 1963년 7월. 내가 7월7일, 그가 7월28일이었으니까. 날더러 요즘은 '안타제조기(安打製造機)'라느니 '광각타법(廣角打法)', '90도 타법'을 하느니 말들을 하지만 사실은 이 타법의 비결은 王貞治선수의 어드바이스로 태어난 것....나는 지금도 그것을 王선수에게 감사하고 있다. 더구나 교진으로 옮기고 나서는 센트럴리그 소속이니 상대팀 투수들에 익숙치 못하다. 내가 3번타자 王貞治가 4번타자라, 그는 언제나 내게 정보를 준다. "저 투수에겐 이런 볼이 있어" 이 한마디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흔히들 날더러 교진으로 가더니 사람이 달라졌다고 한다. 하기야 도에이 시절에는 약간의 말썽이 있었다. 배트를 들고 상대팀 선수를 뒤쫓는 등.....그러나 언제나 나는 먼저 도발하지는 않는다. 도발을 당해야 분연히 일어나며 또 도발을 당하면 절대로 가만 있질 않는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작년(1975년) 5월9일, 한국의 '어린이 날'에 아동단체 새싹회에서 '장한 어머니'로 뽑혔다. "異國에서 남편과 사별하고도 4명의 자녀를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키웠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끈질기게 張勳선수를 일본에 귀화시키려는 유혹에도 지지 않고 張勳선수를 '민족의 영웅'으로 키웠다"는게 그 표창 이유였다. 어머니의 여태까지의 생활태도는 옳았다. 어머니는 "내가 어찌 이런 훌륭한 상을...."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고투의 75년 생애는 너무나도 비참과 절망과 박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보람을 찾은 것이다. 더욱 더 효도를 해드려야.....내 생각은 그 생각뿐이다. 굶주린 늑대처럼 가시밭길을 헤치며 살아온 이 18년. 나는 야구방망이 하나로 살아왔다. 이제는 여유도 생겼다. 하라주쿠(原宿)와 아카사카(赤坂)에 조촐한 맨션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뇌리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그 히로시마의 판잣집이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교진의 일원으로서 희망에 불타는 삶을 보내고 있다. 커다란 행복이며 기쁨이며 보람이다. 여태까지의 18년 야구생활에서 나름대로 만들어낸 자랑스런 기록.....그것을 다시 정리하면....수위타자 7회(61,67~70,72,74), 4년연속 수위타자(67~70), 출루율1위 9회(62,64,67~70,72~74), 최고수훈선수 1회(62), 베스트나인 14회(60~70,72~74), 통산타율 0.323(3000타수 이상), 시즌최고타율 0.3834(70), 1경기3안타 이상 204회, 시즌타율 3할이상 13회(연속 시즌타율 3할이상 9년), 시즌 타격10걸 15회(연속 시즌타격10걸 15년), 시즌 100안타이상 17회(연속 시즌 100안타이상 17년)....... 그리고 교진에 들어가 만든 것으로는 통산 2천5백안타(사상 2위), 30경기 연속안타(센트럴리그 신기록) 등이 있다. 이에 다행히 수위타자를 또 딸 수 있다면 전인미답의 8회째 신기록이 될 것이며 14번째의 3할타자, 16번째의 타격베스트10(王貞治, 가와카미와 타이)등도 자동적으로 달성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기록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온정과 따뜻한 팬들의 기대에 어긋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하리모토(張本勳)선수 힘내요!" 순진한 소년팬의 격려가 귀를 울린다. "하리모토(張本勳) 히트 하나 치자" 참으로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張勳선수 만세!" 조국의 동포가 보내는 뜨거운 소리가 가슴을 친다. 나는 지금 여태까지 보내온 증오의 인생을 반납하고 그 숱한 온정에 보답하며 "나가시마 교진"의 영광을 위해 싸우겠다. 그리고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뛰어넘어 한국과 일본이 다정한 이웃 민족으로서 깊게 맺어질 것을 염원하며 내 배트가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고 마음 속 깊이 다짐한다. 그것을 빌며 나는 오늘도 타석에 선다.<끝> 2004.8.11 ---------------------------------------------------------------------------------------------------<<後記>> 장훈은 교진에서의 4년을 뒤로하고 1980년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합니다. 장훈의 교진 4년 성적(76~79)은 444경기에 출전해 1605타수 526안타 타율0.328 홈런75 타점280을 낳았습니다. 교진 첫해인 76년엔 182개 안타로 최다안타상을 타기도 했죠. 그리고 두차례 리그 우승에 공헌했습니다. 79시즌을 마치기까지 그의 통산안타는 2961개.장훈은 교진에서 대망의 3000안타를 기록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진 나가시마감독은 매몰차게 장훈을 버렸죠. 글쎄...나가시마감독이 버렸는지...구단 수뇌부에서 버렸는지.....나가시마도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했을듯 합니다. 그도 사나이라면 말이죠....어쨌든 롯데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장훈은 착실하게 안타 행진을 이어나갔습니다. 드디어 1980년 5월28일. 조국이 혼란스러웠던 바로 그 날이었는데요.... 장훈은 롯데 본거지인 가와사키구장서 한큐 브레이브스를 맞아 2점홈런으로 대망의 전인미답 3000안타를 달성하게 됩니다. 당시 상대투수는 야마구치(山口高志)라는 강속구 투수였구요. 대기록을 달성한 장훈은 이듬해인 81시즌을 끝으로 23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통산 2752경기 3085안타 타율0.319 홈런504 타점1676 도루319 .....찬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국 프로야구 탄생을 위해 힘을 쏟았지요. 당시 선수 구성면에서 열악한 한국 프로야구에 재일동포 출신들을 진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는 1990년 사상 99번째로 가입하였습니다. 마음속 라이벌이었던 王貞治는 111번째로 가입했구요.......어린시절 필자에게 일본야구를 접하게 인도해준 장훈선수. 온갖 수많은 역경을 딛고 정상에 우뚝 선 그가 정말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 | |